[real BDSM] 왜곡된 남성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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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한국에서 [완전한 사육 : 사랑의 40일]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암암리에 인기다. 이 영화, 남로당에서도 보신 분들 많을 거다. 최근 케이블 영화채널 OCN에서 심야에 방송된 이 영화는 조용히 형성된 나름의 마니아층까지 보유하고 있는 상태. 그런데 제목을 보니 [완전한 사육]이란다. 거기다 일본영화다. 웬만한 분들은 여기서 눈치 채실 거다. 그렇다. 이 영화, 납치와 감금 따위를 소재로 한 BDSM 변태영화다.

우리는 보통 이런 생각을 한다. - 게이들은 게이 바(bar)만 보면 환장하겠지. 그런데 우리나라라면 모를까, 수많은 게이 업소가 성업 중인 지역에서는 아무리 게이라 할지라도 아무 게이 바나 들어가지 않는다. 자신의 기준에 따라 최대한 양호한 곳을 가려고 한다. 이들에게는 꿈의 장소도 게이 바고, 최악 수질의 하수구 역시 게이 바다.

우리의 생활패턴과 같다. 여러분이 20대라면, 돈텔마마 나이트에 아무렇지 않게 가겠는가? 40대라면, 강남의 나이트클럽에서 애기들이랑 작업하며 놀고 싶겠는가? 모두들 어느 정도는 자신의 취향과 수질을 고려해 업소를 선택한다. 꼭 나이트까지 갈 필요도 없다. 길거리에 양탄자처럼 깔려 있는 술집을 찾아도 아무데나 생각 없이 들어가진 않는다. 단골이면 가장 좋고, 아는 곳이 없으면 자신의 입맛에 최대한 부응할 것으로 보이는 곳을 찾는다.

변태인 나도 마찬가지다. 반디지와 인간사육이 등장하는 영화-혹은 영상-에 무조건 보통 사람 이상으로 흥분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SMer이기 때문에, SM에 관한 영화에 나름에 가치판단을 메기게 된다. 즉 SMer들이 SM에 관한 것이라고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한국인이니까 가끔씩 극장에 걸리는 허름한 한국 영화 욕하는 거 아닌가. 마음에 드는 SM 영상도 있는 만큼, 나를 흥분시키기는커녕 불쾌하게 만드는 SM 영화도 얼마든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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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거기까지. 펨섭의 코가 더 들어올려지면 이 사진이 싫어질 것이다.
이 이미지는 내 취향의 경계선인지도 모르겠다. 
SMer들에게도 유쾌와 불유쾌의 기준은 있다.
그 분야가 SM일지라도.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일단 ‘개인적으로’ 이 [완전한 사육 - 사랑의 40일]시리즈가 싫다. 사실 싫은 것은 이야기하기 역시 별로 싫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펜... 이 아니라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은, 이 영화가 여기저기서 무슨 예술영화나 되는 것 마냥 순수하게 감성적인 평을 듣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물론 사람의 취향은 자유라, 설사 [긴급조치 19호]를 DVD로 소장할지라도 그 자유는 존중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완전한 사육]은 취향의 문제를 일부 벗어나 있다. 이 영화 시리즈물은 남성들의-나도 남자지만- 위험하고 폭력적인 논리를 감성이니 예술성이니 치유니 하는 개념들로 보기 좋게 포장하고 있는 탓에, 깔끔한 직선이 아니라 젠 체하고 아닌 체하는 곡선으로 찌질한 감성을 은근슬쩍 애무해주고는 [그건 감동이야.]라는 되도 않는 감언이설로 영화판과 관객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으니, 한국에 서식하는 한 마리 변태로서 이 짜치 SM 영화의 조잡함을 성토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완전한 사육]이라는 표제와 함께, 나란히 붙어있는 [사랑의 40일]이라는 소제... 납치 후 사육기간은 40일. 그 인간 사육은 집요하고 철저한 방식으로. 그런데, 사랑? 지금부터 이 영화가 대체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살펴보자.

>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일본 열도를 충격 속에 빠트렸던(그리고 이 영화 관계자를 포함한 일부 남자들을 성적 판타지로 빠트렸던) 사건에 영감을 받아, 마츠다라는 작가가 소설을 집필, 발표하게 되고, 다시 여기에 영감을 받은 일군의 영화인들이 동명의 영화를 제작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1편의 부제는 이름 하여 [신주쿠여고생납치사건].

내용을 살짝 보자면, [스윙 걸스] 및 [으라차차 스모부]등 수많은 일본영화에 출연, 몸을 사리지 않는 코믹&큐트 연기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다케나카 나오토가 하늘에서 젊고 예쁜 여자가 자신의 호주머니로 뚝 떨어지는 남성 루저 판타지스러운 깜짝 행운을 거머쥐는 심리치료사 ‘아카이’로 등장하고, 후카미 리에라는
젋고 파릇파릇한 여배우가 그에게 자신을 ‘사육’해줄 것을 부탁하는 ‘하루카’라는 여인의 역을 맡아 이 두 사람은, 다른 것도 아닌 ‘진실한 사랑’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포스터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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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라미 안의 아저씨가 다케나카 나오토.

나를 가둔 이 남자, 무죄란다. 예기치 못한 성적 유희를, 감금과 사육이라는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채운 남자가 아니라 그 피해자-내지는 성적 대상이 된 여자-가 대신 항변해주고 있다. 그녀에 따르면 그들은,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아무 잘못이 없다. 자신이 원하고 자신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남성적 찌질함의, 화간론에 대한 판타지를 애무하는 스토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화간론은 성적인 가해/피해상황에 있어서, 그러한 범죄적 상황의 책임이 가해자의 제어되지 못한 욕구가 아니라 피해자 자신에게 있다고 하는 논리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미니스커트가 강간을 유발한다.] 따위의 되도 않는 논리가 잔존해 있다. 변태인 내가 이런 논리를 싫어하는 것은 찌질해 보여서이다. - 강간하고 묶고 때리고 싶으면 적당한 상대 찾아서 설득을 해. 정말로 하고 싶으면 그냥 나는 개같은 놈이다, 라고 인정을 해버려. 강간도 하고 싶고, 여우의 교태에 넘어간 착한 삼룡이도 되고 싶어서 미니스커트가 발기에 미치는 영향 따위를 논하는 거야?.... 라고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덧붙이자면, 변태인 네가 왜 피해자의 동정과 용서를 받아야 돼? 피해자가 너를 좋아하게 되고, 네 편이 되고, 재미없게 사는 너한테 싱싱한 아랫도리도 막 대 주길 바라는 거야? 이왕 납치한 거 끝까지 나쁘게 가면 안돼? 왜 순정파인 척 해?.... 라고 하는 생각도. 나는 중학생 시절 한 여학생-우리 반 부반장이었다.-을 짝사랑한 적이 있었는데, 내게는 변태답게 그녀를 감금하고 유린하는 판타지가 있었다. 물론 그런 일이 정당하다거나 가능하리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무엇보다 그녀가 내게 동화되고 나를 사랑하게 되는 상황은, 상상해 본 적도 없거니와 그러기에도 너무 어색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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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표정을 보라. 남자는 심각하고 여자는 행복하다. 
비상식적인 상황만큼이나 두 남녀의 감정도 비상식적이다. 
특히 여자의 감정이.

화간론은 솔직하지 못하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지 못하니까 [그 쪽에서 원했다.]는 괴상한 논리가 등장하는 거고, 이 영화 속에서는 아예 정말로 여자가 먼저 원해버린다. 물론 현실에서 저런 꿈같은 상황-해당 남자에게는-이 일어날 확률은 지극히 낮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 많은 남자들이 환상 속에서 저런 꿈같은 상황을 가정할 확률은, 지극히 높다.

화간론은 집단적인 강자와 약자의 관계 속에서도 충분히 생존 가능하며, 실제로도 생존하고 있는 논리다. 우리나라는 심하게 비유하자면, 20세기 초 일본에게 ‘겁탈당했다.’ 가해자 일본과 피해자 한국과의 일방적인 관계의 이유를, 폭력의 직접적인 행위자인 일본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것을 겪어야만 했던 한국에 떠넘기는 것이야말로 일본 극우주의자들이 가장 애용하는 방식이다.

-한국이 원해서 일본이 갔다.

그들은 결코 [일본은 강했고 한국은 약했으며, 한국을 침탈했을 경우의 득이 그렇지 않았을 경우를 상회했기 때문에 일본의 국익을 위해 침탈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책임을 한국에 떠넘기면서 자신들은 언제까지나 선량한 상태로 남고자 한다. 그들이 가증스러운 이유는 역사적인 범죄를 자랑스러워해서이기도 하지만, 그 책임을 떠넘기는 방식이 치졸해서이기도 하다.

한술 더 떠 지만원 교수는 [먹힐 만 해서 먹혔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해버렸다. 먹힐 만 하면, 윤리적인 의무와 요구를 떠나 그럴 만 하면, 즉 그럴 수 있으면 그래도 된다, 라... 가령 아무 도움도 없는 골목길에서 갑자기 나타난 불한당보다, 물리적인 힘이 부족한 아가씨가 그에게 겁탈을 당하게 되면, 그 치한 녀석이 악랄한 인간이고 아무런 제제 없이 사회의 일부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는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그 아가씨가 ‘먹힐 만해서 먹힌’ 게 된다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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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왜 먹힐 짓을 하고 그래~

가해-피해의 책임은 명백히 가해자에게 있다. 최근 이 당연한 상식이 무시되는 상황을 우리는 한승조 교수를 통해 또 보고 말았는데, 바로 또 다른 형태의 피해자 유발론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피해자 유발론과 시간 순서가 반대다. 즉 [피해자가 원하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피해자는 손해 본 것이 없다]는 논리로 가해를 정당화하는 방식이다. 우리의 한승조가 했던 언사를 보자.

- 한국이 일본에게 먹히지 않았더라면 중국이나 러시아에게 먹혔을 것이다. 그러면 끝장 났다. 운 좋게도 일본에게 먹혔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산다.

이 또한 일본의 극우주의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논리 중 하나. 아니나 다를까, 이 말은 다름 아닌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 신문인 [산케이 신문]이 발행하는 잡지 [정론(正論)]에 실린 내용이다. 이런 식으로 짜 맞춘 미래를 놓고 과거 가해자의 잘못 없음을 논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완전한 사육] 2편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형태만 다를 뿐 화간론, 피해자 유발론이라는 점에서는 1편과 동일하다(그건 그렇고, 2편에서도 나오토 아저씨가 출연한다. 이 아저씨는 이후의 속편에서도 끈질기게 계속 출연한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흥행성이 있어서, 무려 6편까지 줄줄이 나온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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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홍콩정야]의 DVD판 표지. 역시 얼굴을 내밀고 있는 나오토상.

2편부터의 순서는 거꾸로. 납치를 당한 어린 여자가 자신을 납치하고 사육한 남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면서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5편까지 계속된다.(6편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사랑이 아니라 남편에게 학대당하는 여성과 그의 정부와의 도피적인 성애여서, 이전의 시리즈들보다 훨씬 솔직하다.) 배경과 등장인물의 스펙만 바뀌었을 뿐 가해자 정당화 논리는 동일하다. 남자는 소심하거나, 낙오자이거나, 앞으로 피해자가 될 여성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 녀석들이다. 여자는 아픈 과거가 있거나, 현재가 불완전하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백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물론 여자들이 순결한 이미지를 발하는 미인들이라는 점이다. 당연히 남자들이 그런 포스를 발할 리는 없다.

그리하여 남자는 여자를 납치하고, 여자의 음모를 깎아주는가 하면 매일같이 씻기고 묶고 감금하고 관찰한다. 즉 말하자면 집요한 방식으로 ‘관음’한다. 여자는 반항하고 탈출을 시도하고 몸부림치다가 결국 포기하게 되고, 남자가 키우던 돼지에게 달려있던 방울을 기쁘게 차고 다닌다던가, 남자를 위해 그의 결백을 주장한다던가, 새로운 형태의 행복을 느낀다던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한다는 식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론은 어찌 됐든 좋았어, 라는 것이다. 처음엔 폭력이었지만 나중엔 사랑이었기 때문에. 범죄의 40일이 사실은 사랑의 40일이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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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렇게 붙잡혀 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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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 때 남자는 여자의 육체를 물리적으로 소유하지 않기 때문에 정당하거나, 최소한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 즉 ‘관음’은 낯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낌없는 사랑’인 척을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남자는 선량하고 순수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육체적인 접근을 하고 섹스를 요구하는 것은 여자의 몫이다. 그러니까 자신을 납치하고 사육하고 벗기고 탐해서 관음욕을 해소하는 이상한 녀석이 너무나 좋은 나머지 참하고 정결한 미인은 그만 마음의 문을 열고, 그의 손을 먼저 침실로 잡아끌었으니, 그래서 둘은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적으로는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이니, 이 논리 속에 뻔뻔하게 숨어들어간 찌질한 남성판타지는 정말, 남자인 나조차도 구역질이 날 정도이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인질(피해자)이 인질범(가해자)에게 심리적으로 동화되는 ‘스톡홀롬 신드롬’에 관한 영화도, 궁극적으로는 아니라고 본다. 인간의 불합리한 심리를 탐구하기 위해 변태의 손아귀에 갇혀 있는 젊고 풍만한 여체(女體)가 필요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스톡홀롬 신드롬은 하나의 심리적인 현상일 뿐, 정당함이나 진실과는 관계가 없다는 점이다.

자신의 인격과 신체결정권을 저당 잡힌 상태에서 발생된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영화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어떤 피해자가 스톡홀롬 신드롬에 의해 가해자를 사랑한다고 말할지라도, 스톡홀롬 신드롬 자체가 결국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남긴 내적인 상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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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상태에서 사랑이란다.

덧붙여 이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일본의 식민 지배를 옹호하는 한 무리의 한국 아저씨들은(이 아저씨들은 친일파나 그 후손과 아무 관계가 없는 소시민인 경우도 있고, 지식인인 경우도 있으며, 인터넷 게시판과 정치적인 술자리에 종종 등장하곤 한다.) 무슨 거창한 음모에 가담해 있다기보다는, 그저 국가 단위의 스톡홀롬 신드롬에 사로잡힌 환자들인 것 같다.

왜 어떤 사람들의 남성성이, [사랑의 40일]이라는 영화를 그토록 반기는 것일까? 그건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했던 소심한 욕망을 긁어주는 존재를 만났을 때의 가슴 설레는 찌질함 때문이다.

이전 칼럼에서 소개했던, 파졸리니 감독의 [살로 소돔의 120일]을 보라. 거기엔 핑계가 없다. 솔직한 욕망만이 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교감 따위는 없다. 가해자는 끝까지 악마인 채로 갈 데까지 간다. 역겨울 뿐만 아니라 재미마저 극도로 없는 비추천 영화지만, 스토리만큼은 [사랑의 40일]만큼 역겹지 않다. 가해자의 행운에 감정이입 되기 위해 사태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꽁수 따윈 없다. 결론을 말하자면 [완전한 사육]은 SM 영화가 아니다. 낙오된 감정의 자위를 위한 영화다.

ps : 칼럼의 논지가 과격했으나, [완전한 사육]시리즈를 재미있게 보았거나 호평을 내리는 분들을 깎아내리기 위한 글은 아니었다. 어떤 예술적 결과물이든, 그것을 접하는 개인에겐 고유한 판단의 자유가 있다. 나는 다만 이 영화들 속에서 발견되는 위험한 논리를 지적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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