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던 사람들, 그림을 그리던 그녀
2019.09.23 12:49
영화 <마네의 제비꽃 여인> 중
둘이 서로를 처음 만난 것은 작은 뮤지컬 극장에서였다. 남자는 작은 뮤지컬의 무대팀장이었고 여자는 그 공연에 들어가는 소품 디자이너였다. 창작 뮤지컬의 특성상 제작 초반에 공연 연습과 무대나 조명, 소품들의 초기 설정이 변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남자와 여자는 자연스레 모두의 연습이 끝난 후에도 남아 회의를 하곤 했다. 마지막으로 바뀐 화분의 위치를 정하고 둘이 극장을 나서던 새벽 2시, 남자는 용기를 내 여자에게 맥주를 한잔 하자 청할 수 있었다.
여자는 서양화를 꽤 오래 전공하고 진로를 바꿔 디자인을 시작한 지도 5년이 되어가는 프로였고, 남자는 공연 연출가가 되기를 꿈꾸며 무대 스텝으로 일한 지 겨우 2년이 된 사회 초년생이었다. 여자는 다섯 살 연상인 만큼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는 남자를 보듬고 격려했고, 남자는 눈을 반짝이며 따뜻한 말이 들려오는 여자의 입술을 응시했다. 곡명을 알 수 없는 팝송들이 익숙하게 반복되고 한 잔, 두 잔 다양한 종류의 맥주가 그들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서로 알게 된 지 3주 남짓 되었을까, 아니 공연이 아닌 둘의 이야기를 나눈 것은 세 시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남자도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그녀는 부드러운 눈을 하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시작은 번잡하지도 요란하지도 않았다. 둘 중 누군가의 마른 입술이 다른 입술에게 다가갔는지 알 수 없었다. 이따금 새어 나오는 작은 숨소리들만이 그 곳에 둘이 있다는 것을 말할 뿐,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남자는 오랜 시간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입술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고, 여자는 말랐지만 탄탄한 남자의 몸을 익숙히 다뤄왔던 붓과 캔버스처럼 자연스레 자신에게 이끌었다. 두 사람이 평소에 꿈꾸던 낭만적인 섹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작은 숨소리는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거칠어졌으며 둘은 서로의 존재만이 남은 듯, 쓸어 내리고 핥고 만지며 왠지 넓었던 방을 열기로 가득 채웠다. 문득 남자는 작은 점이 있는 그녀의 골반을 더듬으며 조만간 아니, 앞으로 한번이라도 다시 이 골반을 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밤새 그렇게 여자의 몸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남자는 의외로 맥없이 금방 여자의 등 위에 털썩 엎어졌다. 여자는 남자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고, 남자는 금방 평온해지는 마음을 만날 수 있었다. 바로 몇 분 전까지 이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둘은 얌전히 서로에게 기대 누워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존재였고 남자는 그렇게 뜨거워진 몸 때문인지 울렁이는 마음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다음 날, 옅게 새어 들어오는 햇빛을 느끼고 남자가 잠에서 깨었을 때 이미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잠시 잠을 추스르고 일어나려 하는데 침대 옆에 어울리지 않는 탁장 위에 으레 이런 숙박시설에 있을 법한 작은 메모지를 발견했다. 하얀 메모지 위에 두꺼운 연필로 그린 것이 확실한 ‘남자의 자는 모습’이 남겨져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 모양새로 보아 남자는 그 그림의 모델이 자신인 것을 확신했다. 메모지 한 귀퉁이에 작고 예쁜 글씨로 ‘예뻐 보여서’ 라고 적혀 있을 뿐 여자는 자신이 왜 먼저 사라지는지, 잠시 후 극장에서 둘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따위의 말들을 남기지 않았다. 그 아름다운 여자다운 행동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 남자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둘은 그 날 저녁도 극장에 출근하여 만났다. 계속해서 공연과 연출, 진행상황에 대해 서로 확인하고 이야기했다. 물론 어젯밤에 대해서는 둘 다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주머니 속에 여자가 남긴 작은 메모지를 가지고 있었고 이따금씩 따뜻한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여자의 미소를 보며 굳이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정리가 조금 필요했지만 많은 감정의 소비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다. 어젯밤에 그녀 역시 나를 사랑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내 용기와 열정이 고스란히 벤 공연은 무사히 막을 내렸고 그로부터 2년이란 시간이 더 지났지만 아직도 내 방 책상 유리아래는 ‘내가 잠들어 있는 모습’이 그려진 작은 메모지가 끼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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