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BDSM] 너에게 나를 보낸다  

왜 학대당하고 싶을까?

[변태가 되는 길] 편은 필독이 ‘실제 SM 경험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대목에서 끝이 났다. 실전 없는 이론은 빈 수레나 다름없었다. 실전경험이 있어야 했다. 아무리 SM의 피가 끓어 넘치는 녀석이라고 해도 실제로 경험해보지 못한다면 진정한 SMer라고 할 수 없다. 물론 ‘진정한 SMer’ 따위 되고 싶은 생각 없다. 이건 ‘진정한 이성애자’나 ‘참다운 동성애자’처럼 뜬금없는 말이다. 나는 다만 첫 섹스를 기대하는 스무 살 숫총각과 같은 마음으로 플레이를 하고 싶었다.

SM에서 ‘플레이’란 오프라인에서 S성향의 돔과 M성향의 섭이 만나 실제로 가학과 피학을 실행하는 것을 말하는 은어다. 줄여서 ‘플’이라고도 한다. 종종 온라인 플과 오프라인 플로 나누기도 하는데, 그냥 ‘플’이라고 할 때는 대부분 오프라인 플을 말한다. 온라인 플이란 게시판이나 채팅을 통한 가상 조교를 말한다. 예를 들어 멜돔인 A가 펨섭인 B에게 [스스로 관장을 해보고 내일까지 그 과정과 감상에 대해 상세히 글을 남겨라]라는 과제를 내주면, 펨섭 B는 지시받은 대로 그 과제?를 수행하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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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플의 한 예. 이 펨섭은 지시받은 대로 도그플레이를 한 후 보고하고 있다.
(도그플레이란 섭을 개(犬)로 설정하는 것을 말한다.)

아니 어째서 이런 사람들이 있지?

그리고 그들의 수가 많다는 것, 나처럼 SM을 강하게 원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지배하고 학대하고 정복하고자 하는 욕구는 우월해지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가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간단히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 때문에 누군가에게 처참히 짓밟히기를 원하는 것일까? 일단 생존의 욕구 따위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기질이다. 지배욕은 어떻게든 설명이 된다. 딱 잘라 ‘스트레스 해소’의 차원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굴욕과 고통을 당하고자 하는 욕구는? 보통 메저키스트(섭)는 여성이 많다는 점에서, 이것을 많은 여성들의 ‘강간당하는’ 성적 판타지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강간 판타지는 어디까지나 판타지일 뿐이지,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실제로 강간당하길 원하는 여성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SMer들은 피학에 적극적이며, 기꺼이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 달콤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내 평소의 성향을 봐도 그렇다. 나는 SM 상황에서만 악마적이지, 실제로는 순한 인간이다. 그리고 얼마든지 있는 남성 섭(멜섭)과 여성 돔(펨돔)의 존재는 남성의 성적 지배욕 내지는 적극성이니, 여성의 수동적 성향이니 하는 말들을 모두 무색하게 한다.

어쨌든 나는 피학의 욕구는 혹시 가학의 욕구와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단지 짝으로서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SM이라는 틀 속에 쓸어 담겨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혀 다른 종류의 변태인 섭은 어쩌면 돔과는 차원이 다른 독보적인 존재일지도 모른다. SM을 병이라 봐도 좋고 단순한 기질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대체 어떤 이유로 그러한 성향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것은 많은 인문학자, 심리학자들이 고민하고 연구해 온 물음이다. 이번 회에서는 사회심리학의 거장이자 SM의 이유에 대해 가장 자신 있는 대답을 내 놓은 에리히 프롬의 생각을 디벼보자.

인간이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다

일단 에리히 프롬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의 출신성분을 살펴봐야 한다. 그는 1900년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태어난 독일계 유태인이다. 그도 다른 유태인들처럼 끝이 안 좋을 뻔 했지만 비교적 빠른 시기에 도피를 결정, 1933년 나치의 광기를 피해 무사히 미국에 안착한다. 따라서 사회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프롬은 성실하고 친절한 독일인들이 왜 갑자기 유태인들을 사냥하는 잔인한 늑대로 집단 돌변했는지, 그 이유에 어떤 인간적인 본성이 숨어있는지를 설명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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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 옹. 저작의 많은 부분을 현대인들을 꾸짖는 데 할애했지만
그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도는 높다.

이렇게 보면 프롬의 동기는 무척 당연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나치의 피해자인 그는 기본적으로 나치스를 자신이나 미국인과 같은 [인간]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폭력적인 집단주의자가 된 [인간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것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헐리웃 영화나 정치인들의 연설에서 보듯이 나치-나치뿐만 아니라 모든 미국의 적-를 만화 속의 악당으로 취급하는 미국인들이나, 사탄의 무리로 받아들이는 다른 유태인들과는 격이 다른 수준의 접근이다. 프롬은 단순한 선악의 이분법으로 나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냉전시대의 미국도 본질적으로는 나치와 다르지 않다. 일본 제국주의와 파시즘도 마찬가지며 집단 이지메에 참여하는 중학생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실수한 것은 악하거나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나치스가 기꺼이 히틀러의 노예가 된 것은, 책 제목 그대로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구속에의 욕구]인 것이다. 왜 자유가 싫은 것일까? 프롬은 자유에도 단계가 있다고 한다. 일차적인 자유는 ‘~로부터 해방되는 자유(free from)’다. 이차적인 자유는 ‘~을 하고자 하는 자유(free to)’다. 언제나 ‘대중들은 뭘 모르고 있다’고 근엄하게-하지만 친절하게- 훈계하는 프롬 답게 그는 사람들이 자유의 개념을 일차적인 자유에만 한정시켜 생각한다고 못을 박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유는 무조건적으로 좋기만 한 것으로 여긴다고 말한다.

프롬에게 있어 자유란, 일차적인 자유와 이차적인 자유를 모두 향유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소중한 것이다. 일차적인 자유만을 누리는 사람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해방되어 있는] 자유는 대부분 투쟁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냥 주어진 자유다. 일례로 민주국가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공산국가에서 태어난 사람들보다 훨씬 자유롭다. 그러나 [무엇을 하고자 하는]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적극적으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렇게 보면 왜정시대의 독립투사들은 일차적인 자유를 위해 싸웠지만 본질적으로는 더 고차원적인 자유를 향유한 사람들이다. 거꾸로 친일파들은 직접적인 억압에서는 자유로워졌지만 결과적으로는 폭력에 굴종했기 때문에 수준 낮은 자유를 누린 자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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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처형된 독립운동가들의 시신.
영화 [파워 오브 원]의 모건 프리먼처럼 “죽는 순간만큼은 진정한 자유인”이었길 빈다.
그런데 친일파 후손들은 잘 살고 있다며? ㅆㅂ

프롬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을 집단이나 틀 속에 안전하게 두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일체감과 소속감에 대한 욕구가 있다. 따라서 이차적인 자유를 누릴 자질이 없는 사람에게 일차적인 자유는 소외감과 고독, 무기력함을 준다. 이런 사람들은 잠재적으로 자신의 자유를 압수할 존재를 간절히 원하게 된다. 독일 국민들에게 그 존재는 히틀러였던 것이다. 독일인들은 기꺼이 독재자를 위한 도구가 되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에리히 프롬이 히틀러와 독일인들의 관계를 SM의 관계로 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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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 '나... 변태인 거야?'

즉 [자유로부터 도망]하려는 미성숙한 인간들은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려고 한다. 이 때 적극적인 도망자들은 타인을 지배해 자신에게 포함시킴으로써 독립된 개인이 되기를 포기한다. 이런 자는 사디스트다. 반대로 수동적인 도망자들은 자신을 지배하는 타인에게 포함됨으로써 독립된 개인이기를 포기한다. 이들이 메저키스트다. 프롬에게 있어 이들은, 멜돔인 나도 포함되겠지만, 홀로서기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다만 형태가 다를 뿐이다. 스스로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S는 남을 삼켜서 자기 자신을 확장하려 하고, M은 자신을 남에게 헌납해 그 일부가 되려 한다.

여기서 문제. 1명의 학생을 이지메하는 10명의 학생은 S일까? 그렇지 않다. 이 녀석들은 스스로를 집단적인 만족감에 헌납했기 때문에 M이다. 이지메는 집단을 강화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 왕따를 즐기는 학생은 없다. 반대로 짱의 지시를 착실하게 수행하는 똘마니는 짱의 존재에 안도감을 느낀다. 그래서 다른 학교 녀석들에게 자신들의 짱이 얼마나 싸움을 잘하는지를 떠들면서 자랑스러워한다. 자기 잘난 체를 하면서가 아니라. 이미 스스로가 짱이라고 하는 타인의 일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분’이 잘나면 나도 잘난 게 된다. 짱의 10대1 활극을 과장하거나 독재자를 신격화하는 것은 같은 증상이다. 

프롬의 다른 작품 [인간 - 양인가 늑대인가?]에서 말하는 늑대와 양도 결론적으로는 S와 M을 말한다. 프롬에게 있어 인간은 늑대여서도 양이어서도 안 된다. 온전한 인간이어야 한다. 이런 설명을 하고 있자니 멜돔인 내가 한심스러워진다... 어쨌든 자, 여러분은 양인가 늑대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여러분이 어느 쪽이라도 안심하시기 바란다. 프롬은 이런 집단적인 SM을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 즉 여기까지는 변태가 아니다. 변태란 더 개인적이고 性적인 S와 M을 말한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해도 불완전한 사랑을 할 가능성이 높다. 에리히 프롬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사랑의 기술]에서 프롬은 자유와 마찬가지로 사랑에도 여러 가지 단계와 수준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이 여러 가지 사랑의 층위를 모두 설명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인간은 사랑을 통해 합일(合一)을 추구한다. 합일이란 말 그대도 다른 이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논리는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다를 바 없다. 홀로서기에 성공한 인간은 성숙한 개인으로서 합일을 추구한다. 반대로 미성숙한 인간은 홀로서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합일을 추구한다. 

이런 수준 낮은 합일의 한 종류가 바로 강제적인 합일이다. 이 미성숙한 단계에서 남을 적극적으로 강제하려는 사람이 사디스트, 수동적으로 강제를 당하려는 사람이 메조키스트다. 이렇게 저질적인 합일이 신체적, 성적인 욕구와 함께 움직이면, 비로소 그 사람은 변태이며 SMer가 되는 것이다. 다음은 [사랑의 기술]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 … ‘수동적’ 형태는 복종, 또는 임상적 용어를 사용한다면 피학대 음란증(masochism)이다. … 자신의 생명이고 산소인 다른 사람의 일부가 됨으로써 견디기 어려운 고립감과 분리감으로부터 도피한다. …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고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 그는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그는 독립하지는 못한다. … 그는 아직도 완전히 탄생하지 못한 자이다.

… ‘능동적’ 형태는 지배, 혹은 … 가학성 음란증(sadism)이다. …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서 고독감과 갇혀 있다는 감정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 양자는 한 쪽이 없으면 살아나갈 수 없다. 차이점은 오직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은 명령하고 착취하고 상처를 입히고 모욕을 가하고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명령받고 착취당하고 상처를 입고 모욕을 당한다는 점뿐이다.” (황문수 번역, 문에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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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학과 피학의 만남... 혹은 성숙하지 못한 것들의 만남?

고맙게도 에리히 프롬 옹에 따르면 멜돔인 나는 음지에 서식하는 악의 무리는 아니다. 그렇지만 [미성숙한 인간]이다. 사랑은 너에게 나를 보내는 것이다. 프롬 식으로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에게 나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불만족스럽기 때문에 너에게 나를 보내는 것이 SM이다. 나에게는 굉장히 무서운 담론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미성숙한 인간일 뿐일까? SMer이든 아니든,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프롬의 말이 맞는 것 같은가? 비록 내가 SMer지만 나는 이 양반의 말에 꽤나 수긍이 간다.

왜 섭은 학대당하고 싶을까? 프롬의 말이 모두 옳은 것이라면 간단히 해결된다. 사디스트인 나와 같은 이유로 메조키스트가 된 것이다. 미성숙한 남자가 역시 미성숙한 여자를 필요로 한다면, 무척이나 슬픈 일일 게다. Anyway, 난 SM이 일반적인 사랑보다 우월하거나 최소한 동등하다고 외치고 싶지도 않고 그런 것에 대한 강박관념도 없다. 나는 한 마리의 변태고 내 욕망에 충실할 뿐인데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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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플의 한 예. 일본인 SMer들의 사진이다. 
역시 일본은 변태들의 나라...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만, 
한국 SMer들도 저렇게 한다. 이 장면은 아주 소프트한 편.

어찌 됐든, 당장 플을 하고 싶은 마당에 그런 철학적인 고민 따위는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나는 무조건 펨섭을 만나 머릿속에서 끓어 넘치던 것을 조금만이라도 실현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단순히 펨섭이 많은 것과 만날 수 있는 펨섭이 많은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결국 펨섭과 만나기도 하고 플을 하기도 했지만, 그 과정은 녹록치가 않았다. 

이번엔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다음 편엔 정말로 첫 플레이의 과정과 소감을 보고할 생각이다. 경험담과 에리히 프롬의 썰을 함께 쓰려다가, 아무래도 따로 분리해야 할 것 같아 일부러 머리 아픈 부분을 빨리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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