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티 페티쉬
2019.11.20 12:49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그 부위’와 그 위를 덮은 새까만 털보다 팬티가 더 끌린다. 포르노 사이트에서 ‘카테고리’를 눌렀다. 스크롤을 쭉 내려 P에 멈췄다. 글자를 마저 읽기도 전에 손가락은 익숙한 그 단어에 마우스 커서를 댔다.
‘PANTY’
가리는 듯 시선을 끄는 수북한 털도, 수줍든 당당하든 마냥 해맑든 모든 ‘애티튜드’에 잘 어울리는 맨살의 ‘그 부위’도 물론 끌린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섹스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무조건 형형색색의 팬티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화장품과 속옷을 팔았다. 바디슈트부터 팬티까지 수많은 속옷과 화보에 둘러싸여 살면서, 나는 어린 나이에 관능의 다채로움을 온몸으로 배울 수 있었다. ‘보지’라고 말하기만 해도 신나서 어쩔 줄 모르던 또래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피아노 학원 벽에 새까만 연필로 주상절리에 가까운 허접한 ‘여자 성기 그림’을 그리며 흥분하던 동네 형들도 한심해 보였다.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또래들의 면 팬티와 중고등학생 누나들이 교복 밑에 입는 단색 팬티, 어른들만 입는 폴리 소재 팬티에는 각자만의 매력이 담겨있다.* 그 다채로움을 모르고 ‘보지’에만 목매는 또래들과 한 데 묶이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내 쓸데없는 오만함은 몇 달 뒤 비디오 가게에 붙은 ‘누들누드’ 포스터 앞에서 산산이 조각났다. 여성의 사타구니 곡선을 압박하듯 감싸는 고전적인 팬티 디자인은 천재만이 찾아내고 조합할 수 있는 예술작품처럼 보였다.**
* 소아성애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다만 내가 유치원생 때 초등학생을 보고 설렜을 뿐이다.
** 십여 년이 지나 성인영화 ‘잠굼이’에서 한국적인 팬티 디자인을 실사로 볼 수 있었다. 실사도 관능적이었지만, 누들누드 포스터에서 표현한 질감은 독보적이다.
팬티에 대한 집착으로 불편을 겪거나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적은 없어서 감추기보다는 즐겼다. 그러다 스트랩온 이라는 파격적인 아이템을 만났고, 이태원에서 팬티의 역사를 적은 책도 찾아 읽었다. 깊게 파이고 짧은 팬티만이 관능적인 것은 아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속바지나 80년대 하이틴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배꼽 언저리까지 끌어올린 하이레그 팬티’만 봐도 알 수 있다. 미세한 소재와 디자인의 변화, 그 팬티를 입는 이의 표정과 말투, 몸짓의 조화, 그리고 양말과 롤러스케이트, 펜, 셔츠 등으로 마무리한 시각적 완성까지. 모든 것은 팬티 하나로 바뀐다. 간신히 여성의 엉덩이를 가린 팬티는 조그맣지만, 그 영향력은 방 전체를 뒤집을 만큼 넓다. 그제야 ‘속옷은 자신감’이라는 말을 얼핏 이해할 수 있었다.
‘페티시’의 어원을 고려하면 팬티 페티시가 있는 이들은 팬티를 성적으로 ‘물신숭배’한다. 어쩌다 이 여신을 섬기기 시작했을까. 속옷 가게에서 자란 경험만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을까. 섹스칼럼을 쓰면서도 ‘보지’ 대신 본능적으로 ‘그 부위’라는 표현을 쓸 만큼 (특히 여성의) 성기에 보수적인 우리나라에서, 무의식중에 대체재로 팬티를 찾기 시작한 건 아닐까 싶다.
특히 어릴 적에는 성기를 보는 것보다 죄책감이 덜하다는 이유로 은연중에 팬티를 선호했던 것도 같다. 부모들도 그편을 덜 규제했다. 생각해보면 포르노 사이트라는 광활한 우주를 찾아내기 전까지, 우리는 어린 시절에 나체보다 팬티를 입은 여성을 보며 흥분한 경험이 훨씬 많다. 그렇게 성기가 삭제된 세상 속에서, 우리의 머릿속에 흥분의 대상으로 ‘보지’를 대체할 다른 것들이 자리한 건 아닐까. 누군가는 스타킹이나 교복, 채찍 같은 ‘물건’이었을 거고, 누군가는 피학이나 가학, 공공노출 같은 ‘상황’이, 누군가는 엄마나 동생, 선생님 같은 ‘인물 혹은 관계’였을 거다*. 더 정확히는 그 모든 것들이 조합된 게 우리의 페티시겠지.
* 문득 성적 대상화의 무수한 원인 중 한 갈래가 보이는 것도 같다. 성기를 성의 극단으로 생각하다 보니 우리는 정작 성 자체와 그 안에 포함된 페티시를 다루는 법을 생각지도 못한 건 아닐까. 예를 들어 SM은 안전수칙과 합의가 전제될 때에만 성적 취향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다. 그런데 안전수칙이나 합의의 중요성 등은 배울 새도 없이 매체에서 SM코드를 보고 자라는 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을 향유가 아닌 소비하는 방향으로 방치되는 게 아닐까. 덮어놓고 성을 감추려는 사고방식의 결과로, 우리는 ‘꼭 필요한 전제 없이 페티시를 키워나가는 것’이 ‘성기를 보고 자라는 것’ 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조금씩 더 풀어나가고 싶다.
정확한 원인을 짚기는 어렵지만, 대신 팬티가 매력적인 점이라면 얼마든지 댈 수 있다. 나체를 앞둔 마지막 관문이라는 긴장감, 보는 것만으로도 질감이 상상될 만큼 또렷한 굴곡과 재질, 장식과 라인, 소재 등 미세한 변화로 나뉘는 확연한 차이, 그 수많은 팬티가 그보다 많은 사람에게 입히며 터지듯이 만들어낸 조화. 무엇보다 ‘그 부위’만 가린 천 조각 하나로 섹스마다 분위기가 바뀐다는 것. 그래서 가끔 팬티는 은밀한 사인 같다. 오늘 섹스는 어떻게 하고 싶다는 그런 은밀한 사인.*
* 당연한 이야기지만 전적으로 합의된 관계에만 해당한다.
전에 만났던 애인에게 처음으로 속옷 선물을 해준 적이 있다. 부끄러운 척도 하면서 풋풋한 대학생티라도 냈으면 애인이 귀엽다며 더 대담하게 해줬을지도 모를 텐데,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애인에게 포장한 쇼핑백을 건넬 때까지 나에겐 너무도 중요한 순간이라 그런 연기 따위 할 여유가 없었다. 내 애인의 체형과 치수, 피부 톤, 얼굴과 이미지, ‘그 순간’의 표정도 모르면서 판매에만 눈이 먼 점원들이 달라붙는 게 귀찮아 매장에서 이어폰을 끼고 애인의 몸을 떠올리며 세심하게 팬티를 골랐다.
크리스마스에는 빨간 바탕에 흰 도트가 그려진 팬티와 밝은 감색 면에 노르딕 풍으로 레이스를 단 팬티 중에 어떤 게 좋을지 한참 고민했다. 이어폰은 계산할 때만 뺐다. 그 와중에도 다른 생각을 하느라 점원들의 말은 잘 듣지 않았다. 치수를 조금 작게 사면 밴드가 엉덩이 살 속으로 살짝 파고들려나, 작은 거로 하나 더 살까, 조금만 젖어도 티가 나는 회색 면 팬티면 좋을 텐데 하면서.
한여름에 입었던 나이키 박스티와 슈프림 팬티도, 내 스냅백에 팬티만 입었던 차림도, 핑크색 속옷 세트가 비쳤던 셔츠도, 버스에서 치마를 가려주는 새에 살짝 보였던 새하얀 빛도, 휴가복 모자와 상의에 입었던 검은 팬티도, 열어젖힌 하와이안 셔츠 사이로 보였던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가슴과 딱 맞는 팬티까지.
그 사람은 지워졌지만 그 순간들이 떠오르면 민망하리만큼 모든 기억이 생생해진다. 무엇보다 - 고민 끝에 샀던 빨간 바탕에 흰 도트가 그려진 속옷 선물을 받고, 며칠 뒤 ‘너가 아쉬워할 까봐’ 직접 사 입었다던 그 풋풋한 노르딕 패턴의 감색 면 팬티는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같은 디자인을 사서 액자에 끼워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 이미 가물가물해진 섹슈얼한 장면들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서가 아니라, 부끄럽게 생각했던 내 어두운 밑바닥까지 모두 받아준 그 마음이 고마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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