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26부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26







- × × ×선수, 빠른 경장기병대로 집요하게 △ △ △선수의 확장 진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진지를 궤멸시키진 못하고 있지만 이렇게 꾸준히 타격을 가하면 △ △ △선수는 병력을 제대로 모으기도 힘들단 말이죠 -



“한그릇 더.”



선영은 TV에서 펼쳐지는 ‘카잔 전쟁’의 경기에 눈과 귀를 집중한 채 빈 밥그릇을 들어올렸다. 성진 쪽은 보지도 않고 건네는 그 모습은 마치 당연한 걸 요구하는 손님과 점원의 관계를 연상케 했지만 성진은 피식 한번 웃기만 할 뿐 순순히 그릇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밥을 반쯤 채워서 다시 건네주었고, 그 결과물을 본 선영의 시선을 돌리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왜 이렇게 조금 줘? 난 분명 한그릇 더라고 했는데 이건 반 공기잖아.”



“무슨 여자애가 그리 많이 먹으려 하냐? 살찐다고. 네 몸도 생각해야지. 가뜩이나 움직이지 않고 방안에만 있는 주제에.”



“먹어야 할 때와 안 먹어야 할 때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고. 그리고 나 요즘 운동도 다닐 정도로 거의 다 낫고 있잖아.”



“회복의 절정기땐 영양 보충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거냐?”



“잘 아네.”



선영은 그렇게 마무리지으며 다시 그에게 밥그릇을 건넸고, 성진은 또한번 가볍게 웃어넘겨버렸다. 그리고는 그릇을 받아들여 이번엔 꽉꽉 채워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요즘 따라 갑자기 늘어난 그녀의 식량은 성진의 냉장고를 꽤나 빠르게 갉아먹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않기로 했다. 어쨌거나 기억하기 싫은 그날의 사건이 있었던 후로 성진은 그녀가 건강하게 있는 현재의 상황에 이유 모를 감사함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처절한 강간의 사건을 접했던 여자답지 않게 선영의 회복은 놀랍도록 빨랐다. 그녀는 불과 열흘도 지나지 않아 그런 사건 따윈 기억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린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성진은 그녀가 내색하지 않는 것뿐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예전과 별 다를 것 없는 멋대로(?)의 분위기에, 여전히 게임을 즐기고 - 그녀의 ‘카잔 전쟁’ 계정을 끊어주어 선영은 현재 집에서도 net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 잘 쏘다니고 식사도 잘하는 걸 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오히려 변한 건 성진쪽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녀가 뭔 투정을 하든 성진은 웬만한 건 다 들어주었고, 짜증을 내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도리어 선영 쪽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자신이 사랑하고 싶었던 여자가 그녀 내면에 ‘존재는 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일까, 똑같은 외모에서 그리움 비슷한 걸 느끼기 때문일까. 성진은 그녀가 다시 TV의 ‘카잔 전쟁’ 경기에 집중하는 옆모습을 바라보며 그냥 이대로의 시간이 지속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앞일이야 어떻게 되든 간에 어쨌건.



“뭘 그리 빤히 보고 있어? 민망하게….”



“으응, 아냐. 니가 너무 이뻐서 그렇다.”



“닭살 돋는 대사는 그만 하고. 이거 맛있다. 좀 더 있어?”



“그게 끝이야. 후…. 미팅 끝나고 장 보고 와야겠군. 뭐 살 거 있으면 말해.”



선영은 ‘카잔 전쟁’에서 시선을 돌려 성진을 바라보았다. 수저를 입에 문채로 눈을 동그랗게 뜨곤 입을 여는 그녀.



“미팅? 그거 남녀끼리 만나고 뭔가 하고 그러는 거지?”



연애를 모르는 현재의 선영이 나름대로 지식은 주워듣고 있다는 건 인정해야겠다며 성진은 속으로 웃었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열어 스케줄을 확인해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아니다. 조별 과제 때문에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어. 업무상의 미팅 같은 거랄까.”



“흐음, 지금 가는 거야? 올 때 젤리나 많이 사와.”



성진은 이미 그건 기본이 되어버린 듯 ‘그것뿐이야?’라고 반문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촉박하게 다가왔음을 알자 부산스럽게 재킷을 걸치고 거울을 보며 머리를 다듬었다. 간단한 스킨과 로션으로 외출 준비를 끝낸 그는, 가방 안에 몇 가지 문서를 확인하고 ‘나가려고’ 했다. 여기까지는 휘파람을 불며 기분을 내어도 별 문제 없을 평범한 일상이나 마찬가지.



그는 ‘예상 외로 꽤 촉박해진’이 ‘보다 심각하게 촉박해진’으로 건너가게 되는 하나의 결정적 장애물에 당도했음을 개탄해야 했다. 그리고 그 장애물은 인생의 대부분의 험난한 굴곡이 그렇듯 예상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뭐? 엠티?”



“응. 잊고 있었는데, 나 내일 오전에 다른 과 애들이랑 같이 세라임 호수에 가기로 했어. 다들 좋은 사람들 같더라. 난 몸만 와도 된다나 뭐라나. 사고가 있었던 걸 감안해주는 모양이야. 어쨌든 점심도시락 용으로 하나 먹을만한 것도 사와주면….”



성진은 그녀가 말하는 ‘좋은 사람들’이란 표현에 별 위안을 얻지 못했다. 그는 금방이라도 나갈 것 같았던 발걸음을 멈칫하고 선영을 내려다보았고, 그래서 그녀는 묻는 시선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곤 마주보았다. 성진은 일단 핸드폰 시간을 확인해보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뭐야, 성진아. 왜 그래?”



“아 잠깐, 그……. 음,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하아…….”



“너 바쁘지 않아? 얼른 나가봐. 설거지는 내가 할게.”



“엠티는 이미 지난주에 끝난 거 아니었나? 왜 이제 와서 또 간다는 얘기가 나오지?”



“지난 주에 다들 바빠서 이번주로 연기된 거야. 그리고 내가 추가지원 한거고.”



성진에게는 까맣게 관심을 끄고 있던 소식이었다. 어차피 그에게 있어서는 납품일 때문에 갈 수도 없는 거였으니. 물론 친구들이나 지인을 통해서 알 수도 있었을 거였지만 요새 신경이 온통 선영에게로 가 있었던지라 접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모르는 사이에 선영은 멋대로 지원하고 아직 철없는(?) 그녀는 이제서야 성진에게 밝히는 것이었다.



“야, 너 수업도 거의 못 들어갔잖아. 게다가 너도 알겠지만 넌 예전에 다른 사람들이 알던 선영이 아니라고. 그걸 자각하고 지원한 거냐?”



“왜 또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너 가끔씩 되게 이상하다? 수업을 거의 못들어갔으니까 엠티라도 가서 친목을 다져야지. 그리고 예전의 나와는 다르다고 언제까지 기피하고 있을 거야? 어차피 내가 이 세계를 계속 살아가야 한다면 익숙해질 계기가 필요해.”



“젠장할! 익숙해지지 않아도 돼! 내가…….”



성진은 순간적인 감정으로 ‘내가 지켜주면 되잖아!’라고 내뱉을 뻔하다가 간신히 그 말을 삼켰다. 선영의 식사조차도 제대로 감당해주기 어려운 그의 처지에서는 별 현실성이 없는 발언이었고, 쓸데없는 말싸움으로만 전이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그녀 말마따나 언제까지고 친구들과의 관계를 기피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아직 학창시절은 많이 남았고 본래의 선영은 돌아올 수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니 그녀의 삶으로 전환해서 살아야 할 기로를 결정해야 했다.



그렇다곤 해도… 너무 급작스럽다고 생각한 성진은 핸드폰을 열어 동혁에게 연락을 취했다. 인원 담당은 그였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고 그래서 직접 전화해서 선영의 지원을 취소시킬 작정이었다.



하지만 통화음이 가는 동안 성진은 이것이 생각보다 원활하게 풀릴 문제가 아님을 직감하고 있었다. 선영의 성격은 예전 선영의 능동적인 본성에 그대로 기인하고 있었기에, 못가게 막는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행여나 지금 당장 미팅에 간 사이에 집을 나갔다가 내일 곧바로 가버릴 수도 있다. 그런 그의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영은 생긋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치, 요즘 따라서 왜 그렇게 걱정해주는 거야?”



“요즘 따라서라니… 예전에 그 일도 있고 하니 조심하는 거지.”



“고맙긴 한데… 나도 이제 좀 어린애다운 기질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내 의지로 선택한 거야. 날씨가 더 추워지면 갈 기회가 없을 것이기도 하니까.”



성진은 엠티의 목적이 단순히 친목에 있지 않고 남녀끼리 일종의 썸씽이 생길 소지가 많다는 점을 굳이 자각시켜야 하나라는 고민을 잠깐 해보았다. 하지만 연애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는 그녀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선도 아니거니와 한창 활달해지는 그녀에게 경계시켜야 할 거리만 넘겨주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는 것이었다. 그 때 핸드폰 너머로 동혁의 목소리가 울려온다.



- 야, 김성진! 너 맞지? 왜 전화를 하고 대답이 없어? -



“어? 어, 잠깐만….”



성진은 미팅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일단 다녀온다는 손짓을 해보이곤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두 다리를 놀리면서 핸드폰을 귀에 밀착하고 동혁에게 말했다. 자가용 한 대가 그의 앞을 휙하고 지나갔고, 거의 스칠 듯이 다가섰다는 것을 자각한 그는 정신을 차리기라도 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일 엠티에 은선영 이름이 목록에 올라가있냐?”



- 어? 어. 지원하긴 했는데 왜? -



“그거… 취소시킬 수는 없겠지?”



- 걔 아직도 너네 집에서 동거중이냐? -



핸드폰 너머로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성진은 그런 그와 말장난할 여유 따윈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지체된 미팅 시간을 메우기 위해 택시를 찾아보기로 마음먹은 성진은 바쁘게 고개를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그런 그의 핸드폰에 동혁의 목소리가 다시금 건네어졌다.



- 뭔 애 돌보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다친 것뿐이잖아? 그것도 이젠 거의 나았으니 슬슬 어울려야지. 걔 그래봬도 학교에서 잘 어울리는지 엠티 참가한다니까 다들 좋아하는 눈치더라고 -



‘하긴, 정신까지 뒤바뀌었다는 걸 알리가 없지. 지금 말해봤자 납득하기도 쉽지 않을테고.’



성진은 속으로 한숨을 폭하고 내쉬고는, 그래도 믿을 만한 수완이 있는 녀석이란 생각을 하며 당부를 해두기로 했다. 게다가 녀석에겐 윤지가 있으니 선영에게 딱히 집적거리거나 어떠한 위해를 가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택시에 올라타고는 경각심을 담아서 또박또박 동혁에게 말을 건넸다.



“어쨌거나 네가 인원 관리자인 만큼 특별히 주의해서 선영을 좀 감시해줘. 술 절대 많이 먹이지 말고. 아직 다 나은 게 아니니까 누구 하나 손대지 못하게 해.”



잠시 핸드폰 너머에서 정적이 감돌았다. 입학할 때부터 쭉 같이 있었던 만큼 동혁은 성진의 타입을 상당 부분 파악하고 있었고, 그래서 ‘거 되게 심각하네’ 따위로 간단히 짚고 넘어가지는 않았다.



- 그렇게 심각한 거야?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좀 이상하군. 알았어. 특별히 주의해서 보지 -



“부탁한다. 나중에 나이트나 한탕 가자고.”



- 짜식. 근데 요즘 뭐 바쁜 거 있냐? 통 놀러다니기 힘들다 -



성진은 피식 웃고는 핸드폰을 끊었다. 그리고는 미팅 때 제시할 문서를 택시 안에서 하나 둘 검토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촉박하게 움직이는 시간 속에서 그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존재했다. 그는 본래의 선영이 다시 나오지 않겠다는 ‘의지만’ 생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녀가 다시 나왔을 시 현재의 선영에게도 매우 위험해질 거라는 경고를 까맣게 망각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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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를 바라보는 남자의 입에서 길게 담배연기가 피어올랐다. 어쩐지 한숨처럼 피어올려진 그 담배연기는 천장에 닿기 전 뿔뿔이 비산하였고, 남자는 새롭게 만들 작정이라도 한 듯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의 눈은 어두운 방 안 컴퓨터 책상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카잔 전쟁의 net플레이 화면 한쪽엔 온라인 친구 목록에 선영의 아이디 ‘실버레인’이 접속해있었고, 며칠 전부터 다시 접속한 그녀에게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다른 net대전자와 게임을 하는 데 정신이 없는 모습이었으며, 그의 질문도 거의 무시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결국 남자는 포기한 것처럼 의자 등받이에 쭉 등을 기대었다. 하지만 실제론 포기한 게 아니었다. 단지 자세를 바꾸고 다방면으로 고민해보기 시작한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녀에게 무슨 일이 발생했었는지, 현재의 그녀가 누구인지, 그리고 나란 존재를 알릴 수 있을까? 자신이 은선영이란 점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데… 그런데도 나를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물론 헤어졌을 땐 필요 이상으로 연락하지 않기로 확실히 매듭짓긴 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그녀의 안위가 걱정된다는 새로운 필요성이 발현된다. 그는 문득 자신이 예전에 비해 ‘카잔 전쟁’의 net플레이에 자주 접속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선영 때문이기도 하며, 헤어지고 나서 ‘알던 여자’로만 치부할 정도로 연락도 없이 지냈던 오랜 기간에 반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래… 돌이켜보면 은선영은 꽤나 특별한 여자였지. 함께 있었던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그녀와 있었던 기억을 되살려본 그는 잠시 후 피식 하고 웃었다.



“지금의 내 모습을 알면 그녀가 실망할 테지만… 그래도 그녀를 걱정하는 사람이 한명 정돈 더 있다는 점을 확고히 해두는 게 좋겠지.”



그는 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조금 떼고는 팔을 양쪽으로 벌렸다. 그리곤 마치 스트레칭을 하는 사람처럼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풀어나갔다. 그의 손가락들은 잠시 후 조심스럽게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선영에게 전달되는 온라인 귓속말.



「은선영. 나다」



「해신의창? 또 너냐?」



「내 아이디야 익숙하겠지만 이름은 까먹었지? 여러 번 말했던 것 같지만」



「알고 있어. 송태환」



송태환이라 불린 남자는 그녀가 잠시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는 점에서 아마 떠올리는 데 조금 신경을 썼을 거라고 짐작했다. 가볍게 웃고 싶었지만 사실상 그런 기분은 아니었다. 그랬다는 것은 정말로 자신을 잘 모르며, 연기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란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기억해주니 고맙군. 지금 게임 중이니?」



「아니…. 만만한 대전자가 별로 없어서」



「얘기 좀 했으면 하는데」



「말해두지만 전에 했던 질문들이라면 대답할 수 없어. 네가 누군지도 모르고 말할 의무도 없고, 난 예전의 은선영이 아니니까 그 때에 알던 누군가와 얽히고 싶지도 않아」



이 정도는 이미 예상했던 범위라 태환은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자신에 대해 솔직히 밝히는 게 낫겠다는 판단 하에 다시 조심스럽게 자판을 두들겼다. 카잔 전쟁 net플레이 대기실 채팅창엔 어느 새 그녀와 자신의 비밀스런(?) 귓속말로 채워져가고 있었다.



「네 남자친구 옆에 있나?」



「남자친구라니?」



「그 왜, 저번에 말했던 그 애 원룸에서 동거하고 있다며?」



「김성진? 아하하. 남자친구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야」



김성진이라… 그녀와 같은 과 클래스메이트라도 되나? 그런데 남자친구도 아닌데 동거라? 이 부분에서 태환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사고로 기억을 잃었다는 가정 하에, 돌봐주는 일시적 보호자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어쨌거나 그 애 지금 옆에 있나?」



「아니, 미팅갔어. 지금은 집에서 나 혼자 걔 컴퓨터로 게임 중」



미팅?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 보면 확실히 둘 사이가 그렇고 그런 관계는 아닌가 보군. 그럼 이쯤에서 본론을 꺼내볼까. 그는 손가락 가까이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모니터 옆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자판을 두들겼다.



「얼굴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네가 믿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2년쯤 되었지. 나는 네 전 남자친구다」



「알고 있어」



태환은 하마터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설 뻔했다. 곧바로 모니터에 뜬 그 답변 때문이었다. 그는 살짝 떨리는 손가락으로 채팅의 귓속말을 다시 입력해나갔다.



「알고 있다니? 어떻게? 너 나를 모른다 했잖아」



잠시 정적. 그리고 태환이 재촉해보고 싶은 심경을 꾹꾹 억누르고 있을 때쯤 다시 채팅창에 글씨가 떴다.



「내가 모르기 때문에 안 거야」



이 모순된 말에 태환은 그 말뜻을 추측해보려 미간을 부여잡았고, 사실 그렇게 고민할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실버레인’이란 아이디를 가진 선영은 조금 후 먼저 그의 마음을 떠보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베일에 싸인 여자를 보는 듯한 기분에 휩싸인 태환.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해신의창?」



「내가 했던 질문들마냥. 현재의 네 모습에 관하여」



「네가 나한테 어울릴만한 애인이었는지 시험해볼까 하는데」



「솔직히 말하지. 애인이라고까지 할만한 사이었는지는 애매해. 어쨌거나 특별한 관계이긴 했어」



「흐음. 하지만 그건 즐거웠던 기억이겠군」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마치 날 알고 있지만 제삼자가 연인과의 관계를 추측해보고 있는 뉘앙스잖아. 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진 선영의 파격적인 제안에 태환은 그런 의문마저 날려버렸다.



「이 게임. ‘카잔 전쟁’에서 날 이겨봐. 그럼 나한테 일어났던 일 모두를 밝혀주지」



가만히 모니터를 바라보던 태환은 순간 박장대소하듯 짧고 크게 웃었다. 집안에 누가 있었으면 무슨 일인가 해서 방문을 열어볼지도 모를만큼 큰 소리였다. 하지만 어차피 부모는 지금 시간에 집에 없고 여동생 예나는 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있을 시간이니.



이윽고 태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채팅을 짧게 입력했다.



「너답군」



「너답다니?」



「내가 알고 있던 선영이 맞다는 거야. 그녀는 종종 쇼킹한 일을 만들고 즐겼지. 비록 요인이 염세적이었다 할지라도. 하지만 지금의 너는 날 모르는 척 하진 않는 것 같군」



상대의 감정을 읽을 순 없지만 태환은 어쩐지 모니터너머로 그녀가 움찔하고 있다는 기분을 받았다.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그는 아무 말도 없는 그녀에게 다시한번 귓속말을 보내었다.



「그래서 너이면서도 네가 아닌 그 정체를 밝혀볼까 하는데」



「‘카잔 전쟁’에 자신이 있나 보군」



「모르나 본데, 너한테 이 게임을 알려주어서 가입하게 만들었던 것도 나야. 네가 지금 그 아이디를 그대로 씀으로 인해서 재회하게 된 것이기도 하고」



「난 현재 그런 기억 따윈 없이 순수하게 즐기고 있는 거지만, 뭐 좋아」



어쩐지 모니터에서 불꽃이라도 튀면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한 태환은 또다시 미소지었다. 그리곤 예전의 선영이라면 정말로 자신의 본실력을 발휘해야 이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의자에 앉은 채로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선영이 만든 1대 1용 비공개 방으로 접속을 하는 그의 손과 마음은 유달리 긴장돼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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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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