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42부
2018.09.15 03:30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42
“은선영 씨. 우승 소감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최소한 기뻐서 울음을 터뜨린다거나 감격에 겨워서 말을 못한다면 이해는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기 진행자가 보기에 은선영이란 이 희대의 여성 ‘카잔 전쟁’ 우승자는 그를 포함한 여타 관람객들의 이해를 도울만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선영은 현재 경기가 펼쳐졌던 강당의 연단 위에서 주위의 누구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멍하니 서있었다.
‘창오빠가 본래의 내게서 들었다던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태는 대체 어떤 걸까? 그러고 보니… 그의 말대로라면 나는 이제 자의든 타의든 한번만 더 성교를 하면 본래의 내가 나와 죽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잖아? 그럼 난 창오빠를 믿어야 하는 건가? 연락처를 알려주면… 창오빠는 내가 신뢰를 가졌다고 생각하고 정말 안전하게 보호해줄까?’
아니면 뭔가 위험 요소를 피할 다른 방법이라도…. 그렇게 생각하던 선영은 문득 좌중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진행자는 약간 초조한 얼굴로 선영을 응시하다가 곧 능숙하게 다른 멘트로 그 공백을 메꾸어나갔다.
“정말 의외의 우승자가 나왔지요. 더군다나 여기 은선영 씨는 이 경기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웬만한 프로게이머 못지 않은 남성 우승 후보들까지 모조리 제칠만한 실력을 갖고 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역시 세상은 넓달까요…. 자, 은선영 씨. 뭔가 ‘카잔 전쟁’을 하는 데 숨겨진 비법이라도…?”
진행자는 보다 대답하기 쉬울 것 같은 화재로 좁혀나가며 마이크를 선영에게 건네는 시늉을 했다. 그제서야 선영은 마이크를 받아쥐며(물론 진행자는 자신의 유연한 대처 방법이 효과를 보았다고 자찬했다) 주변에 모인 관객들을 죽 한번 훑어보았다. 기삿거리까지는 안 될 작은 경기였기에 메모 따위를 준비하는 사람도 없어보였지만 의외의 정갈한 실력을 보여준 그녀에게 상당한 기대감이 담긴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어쩐지 전날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선영은 무난하고, 평범하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우승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플레이 비법이라… 글쎄요, 그런 건 잘 모르겠네요. 다만 저는 이 ‘카잔 전쟁’ 게임에 무한한 애정을 갖고 수많은 net플레이를 통해 실력을 쌓았던 게 오늘의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 같습니다. 노력한 만큼의 결실을 얻었다고 여기고, 만족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저는 이 게임을 정말 좋아합니다.”
늘상 우승자의 멘트 후에 뒤따르는 와아-! 하는 함성이나 박수소리가 울려퍼지진 않았다. 그녀가 소감을 마쳤다고 생각하는 순간, 한쪽에서 아직도 자신이 플레이했던 데스크탑 앞에 망연자실하게 앉아있던 준석이 벌떡 일어섰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승전에서 완벽하게 3연패를 당했다는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선영이 자리를 뜨기 전에 일련의 의문을 확인하고 말겠다는 오기 또한 서려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인정할 수 없어요! 비법이 아니라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속임수 같은 게 있는 거 아닙니까? 저 여자는… 저 여자의 플레이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이 따라갈 수 없는 계산치를 갖고 있어요!”
대다수의 관중들이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차는 소리가 강당을 메꾸었다. 패배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종의 변명 꼬락서니로 비추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영은 단순히 그런 현상이라 넘겨짚지 않았다. 직접 자신과 대전하며 몸으로 느낀 점도 한몫 했을테지만, 선영은 그가 ‘카잔 전쟁’에 대해 상당한 실력을 갖고 있기에 일반인이 예측할 수 없는 천재적 플레이까지 감지했다는 걸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특이한 천재라는 전제를 준석이 알리는 없었고, 그래서 이해 안 갈 상황을 속임수로 치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었다.
그녀는 곁의 진행자에게 돌려주려던 마이크를 다시 회수하며 몇마디 더 해도 되겠냐는 눈짓을 했다. 진행자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선영은 매력적인 미소를 살포시 지으며 준석을 바라보았다.
“홍준석… 씨라 했나요? 당신의 실력도 진심으로 뛰어나다고 생각했습니다. 패배라는 결과를 인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요. 그리고 저는 저와 대전했던 당사자분들에게 일종의 경의를 표하곤 했죠. 깜빡하고 그냥 갈 뻔했네요.”
좌중의 궁금한 시선이 쏠린 가운데, 선영은 자신의 어깨에 맨 가방에서 조그만 플라스틱 컵을 하나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연단에서 내려와 또각또각 준석에게 걸어갔다. 의자에 다시 앉을 생각도 못한 채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하던 준석은 곧 그녀가 쥐고 있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녹색의 내용물을 담고 있는 젤리였다. 선영은 그것을 그가 앉았던 데스크탑 모니터 옆에 살포시 내려놓고는 다시금 연예인을 연상시킬법한 미소를 화사하게 지어보였다.
“상금을 가로채게 된 건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의 실력은 ‘진짜’ 프로게이머였어요.”
가슴이 두근거린 것도 잠시, 준석은 그녀가 돌아서자마자 이를 아득 물고는 젤리통을 거칠게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바닥에 내팽개쳤다. 개봉되지 않은 젤리통은 그대로 터지듯 산산조각이 나서 바닥에 흩어졌다.
“지금 누구 놀리나? 이 빌어먹을 년! 네년이 그 구역질 나는 퍼포먼스에 동참하리라 생각했다면 그야말로 오산 중에 오산이다. 하기야 이 더러운 젤리도 네년의 보짓물보다는 깨끗하겠지만.”
이죽거리며 무도한 말을 지껄이는 준석의 모습에 관객들은 눈살을 찌푸리곤 술렁였다. 하지만 선영은 그런 그의 발언에 충격을 받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성교로 인해 본래의 자신이 끌어올려지면 죽음보다 끔찍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옛 애인에게 죽음을 의뢰할 정도인데, 그런 성폭언 따위는 귀엽게까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선영은 갈기갈기 터져버린 젤리를 잠시 돌아보더니 곧 희미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바로 하고는 강당 출구쪽으로 걸어갔다.
‘메지즈’ 팀의 박 코치와 그의 후배 스탭원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간 건 그 시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선영이 예상하던 것이기도 했기에 고개를 잠깐 숙여 보였다. 눈썰미가 좀 뛰어난 관객이라면 그녀가 인사차 고개를 끄덕인 게 아니란 것을 알아챌 것이다. 박 코치는 스탭원에게 스카웃 제의서 등을 꺼내놓으라는 손짓을 하고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누구… 인지 결정하셨습니까?”
“코치님도 보셨겠지만 저 남자에요. 이름이 홍준석이라 하더군요. 경험이 많고 상황판단 감각도 뛰어납니다. 최소한 박 코치님의 프로게이머 구단 ‘메지즈’에 손실을 입힐 일은 없을 겁니다. 성격을 제어 못하고 좀 욱하는 면이 있어 보이지만… 오기에 따른 근성으로 전환하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봐요.”
규모는 작지만 남자들로서도 달성하기 어려운 무패의 우승을 달성한 그녀가 자질이 있다고 판단했다면 거의 확실할 것이다. 박 코치는 성과 없이 선영을 보내기에 앞서 그러한 차선책을 마련해놓는 노련함을 발휘했고 그것은 현재 예상대로 효과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박 코치는 무표정으로 감정을 숨기고 다른 말을 꺼내었다.
“선수들을 어떻게 다루고 교육하는지는 저희가 알아서 할 문제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은선영 씨는 프로게이머에 입단할 생각이 없는 겁니까? 앞서 저희와 일련의 얘기를 나누었을 때, 비단 ‘메지즈’ 뿐만이 아니라 다른 구단도 가입할 생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실효성에 의심을 품는 건 아니지만 이유가 궁금해지더군요. 은선영 씨 정도면 실력 뿐이 아니라 미모로도 웬만한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체감하고 많은 연봉도 올릴 수 있으실 텐데….”
생각해두었던 말을 늘어놓으면서 박 코치는 선영이 지명한 홍준석이란 남자보다 그녀 본인을 스카웃하고 싶은 기색을 연신 내비쳤다. 그리고 선영은 약간 쓸쓸해보이는,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임으로써 그 얘기를 종결시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저는 프로게이머에 입단하더라도 언제 활동을 중단하게될지 모르는 상태라서요. 일종의 불치병… 정도로 생각해주셔도 좋겠습니다. 훗날 안정을 찾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현재로서는 미지수네요.”
그리고 선영은 야상 점퍼 깃을 여미며 저녁 빛이 환하게 쏟아지는 강당 출구를 걸어나갔다. 자신에게 무지막지한 욕을 퍼부었던 준석을 프로게이머로 등극시키는 행운을 선사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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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이 참가한 첫 ‘카잔 전쟁’ 대회의 우승 상금은 100만원이었다. 작은 대회치고는 꽤 거액의 상금이었고 선영의 목표 또한 그것이었기에 원하는 바는 달성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현금이 담긴 묵직한 돈봉투를 확인하고 가방속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기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것은 승리의 기쁨을 같이 할 친구나 애인이 없어서 때문은 아니었다. 또한 승부의 세계에서 특정인을 얕잡아보고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쓰레기 인간들의 저주를 받아야 하는 현실을 경험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녀는 이전까지 잘 느끼지 못했던 삶의 의미라는 정신적 과제의 기로에 맞닥뜨려있는 상태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선영은 자신을 보호해줄 사람으로 누구를 믿어야하는지, 그것이 김성진이 될지 창오빠라 불리는 송태환이 될지를 갈등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어제의 채팅으로 인해 태환이 처해있는 상황과 자신의 위태로운 두 인격을 자각했고, 이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으로 바뀌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선영은 근본부터의 회의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본래의 선영이 자살하는 순간에 제어할 수 없는 스스로의 의지로 튀어나왔기에, 그것은 얼핏 보기엔 모든 생물들이 초기에 태어나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선영의 경우엔 20대 초반이라는 성인의 몸과 두뇌를 가진 상태로 태어났다. 즉 머릿속의 자료만 백지화 - 이 백지화라는 것도 사실 이전 선영의 기억과 연동돼있기에 임시로 지워진 것에 지나지 않지만 - 되었기에 그녀는 보통 사람들이 자라나며 서서히 터득하는 삶의 의미라든지 방향성을 심념(深念)해볼 틈이 주어지지 않았다. 선영의 머릿속은 다양한 정보들을 엄청난 흡수력으로 채워갔고 그 능력은 가히 초인적이었으나 그것들을 지탱할만한 신념이 없었다.
게다가 선영은 보통 여자들에게 주어진 큰 행복의 권리 하나를 완전히 제거하고 살아야 했다. 그녀는 자의든 타의든 섹스를 할 수 없다.(당연히 아기 또한 만들 수 없다) 섹스를 하면 본래의 선영의 튀어나오고 그것은 목숨을 위협하게 되는 칼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본래의 선영이 직접 신체를 위협하지 않는다 해도 그런 상황이 반복은 그녀가 태환에게 일렀던 것처럼 벽 속, 즉 죽지도 못하는 미지의 공간에 갇히게 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본래의 선영을 포함한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었기에, 더 끔찍한 상황이 생기기 전에 목숨을 끊는 쪽이 여러모로 ‘유리할’ 수 있다.
이 무슨 희대의 유리함이란 말인가. 죽는 게 이롭다고 여겨질 만큼 나락의 경우가 또 있을까 싶으며 선영은 차라리 허탈하게 웃어버리고 싶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항변하기라도 하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주의 저편에서 인류에게 선사한 위대한 천체의 일각은 노을빛에 물들어 선영을 불그스름하게 감싸고 있었다.
한동안 그런 무한한 크기의 스크린을 바라보던 선영은 고개를 숙여 가방을 뒤적였다. 100만원이 든 상금 봉투가 다시 만져졌고 그녀는 계획에 없던 일부를 써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유희였다. 머리 아픈 시험이나 과제 하나가 끝나면 아무 생각 없이 먹고 마시고 노는, 그런 해방감 비슷하게 설레는 감정. 생활의 활력소를 가져다 줄 감정. 선영은 그런 평범한 여학생의 심리를 느껴보면서 이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혼자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페밀리 레스토랑을 갔다. 비싼 스테이크를 시켰다. 평**면 카드값 때문에 바가지 긁듯 잔소리를 해댈 성진을 신경쓰지 않고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며 그녀는 깔깔대고 좋아했다. 팝콘을 한아름 샀다. 절대 혼자서 다 못먹을 양이었지만 선영은 그것을 품에 안아 들고 영화관 맨 앞자리에 앉아 무술과 피가 난무하는 액션영화를 봤다. 클라이맥스가 나오면 타 관중들을 따라서 감탄사를 연발해보기도 했다. 면세점을 갔다. 청바지를 벗어버리고 화사하면서도 짧은 치마의 원피스를 사 입었다. 하이힐도 새로 구입했다. 야상 점퍼는 그대로였지만 꽤 큰 키에 속하는 선영은 워낙 출중한 미모였기에 웬만한 코디는 다 스타일리시한 면모를 돋보였다.
“So I can walk my destiny. I can walk my destiny… 달빛 아래 새로운 생명이 휘몰아치는 것처럼…♬”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잡고 한참을 부르던 선영은 데스티니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의 운명? 내 운명이 바꿀 수 있는 것일까? 내 자신의 의지로… 새롭게….
- 연애? 섹스? 정확히는 모르는 게 아니라 계속 몰라야 할 거야 -
붉은 비의 공간에서 만났던 본래의 선영이 비웃듯 건네던 말.
…바꿀 수 없을 것만 같다.
호프집의 분위기는 은은하면서도 부산스러웠다. 조명은 아늑했으나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선영은 신경 쓰지 않고 한 구석에 앉아 맥주를 홀짝거리며 마른안주를 씹었다. 땅콩을 오물거리며 잔잔히 흐르는 팝송을 감상하고 있노라니 몇 남자들이 그녀의 미모에 혹해서 다가선다.
“어이, 아가씨. 혼자 왔나? 뭣하면 같이 놀아줄 수도 있는데.”
“야, 짜식. 뻘쭘하게 ‘놀아줄 수도’가 뭐야. 아가씨. 이 날씨에 맨다리는 반칙이라고. 그냥 나왔을 리는 없고 근처 클럽이라도 같이 가지 않을래?”
“혼자 오셨어요? 저기 우리 일행이 있는데, 이쪽으로 오셔서 함께 즐겁게 얘기라도….”
그리고 그들은 모두 단조로운 눈빛으로 멍하니 마주보는 선영의 얼굴에 할 말을 잊어버렸다. 하다못해 튕기는 기색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그녀는 마치 생기 없는 기계처럼 그들의 말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횡설수설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몇 마디 정도 어물거리다 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이런 방면으로도 베테랑급의 작업 실력을 갖춘 자는 어디에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준수한 외모를 지닌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는 자신이 마시던 맥주를 선영 옆으로 가지고 와서 같이 홀짝거리며 은근한 시선으로 떠보았다.
“아가씨.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요? 힘이 없어 보이네요.”
“…….”
“아가씨가 들어올때부터 저는 아가씨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꽤 여기 오래 앉아있었죠. 제가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바깥은 첫눈이라도 올 것처럼 흐리고 춥더군요. 하지만 눈은 내리지 않았죠. 혹시 아가씨가 들어올 때도 하얀 무엇인가 내리지는 않던가요?”
“…운명이란 게 정해져 있다면, 행복이 없는 삶은 살아갈 의미가 있을까요?”
드디어 열린 그녀의 입. 그리고 그 내용은 남자의 질문과는 전혀 연관성을 찾아볼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뜻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말 그대로 ‘선수’였기에 당황한 빛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그는 선영의 마음에 동조라도 해보듯 시선을 허공에 둔 채 맥주를 한모금 길게 마셨다. 그리고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미심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꺾어보였다.
“글쎄요. 정해지지 않았거나 모른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의지로 과거를 만들어간다고 여기며 그 의미를 대신하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저는 애초부터 알고 있었어요.”
남자는 그제서야 이 멀쩡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실연 따위가 아닌, 무슨 큰 병이라도 앓고 있나 하는 시선으로 당황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선영은 그런 남자를 다시 바라보지는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서서 인사도 없이(좌중은 무슨 화장실이라도 가는 것처럼 보였다) 간략하게 계산을 마치고 나가버렸다.
남자의 말대로 바깥은 구름이 잔뜩 끼어서 별빛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자정에 가까워가는 시각이었으나 선영은 한시바삐 집에 돌아가서 잠을 잘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거리를 여전히 배회하였다. 딱히 갈 곳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좀 더 순수하게 설레는 감정을 느끼고, 즐기고 싶었다.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DVD방이나 카지노 게임장 등을 기웃거리기도 하면서 시간을 흘러 보냈다. 하지만 행동에 억지를 쓰면 쓸수록 알 수 없는 허무감만 그녀의 가슴 속에 쌓여가고 있었다.
새벽 1시가 다 되어서야 선영은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성진의 원룸이 있는 동네로 들어섰다. 가방 속에는 이미 젤리도 다 먹어서 들어있는 것도 없는데 어깨가 자꾸 그쪽으로 쏠렸다. 오랜만에 무리한 덕분인지 다 나았다고 생각했던 다리도 지끈거렸다. 밤바람은 차가웠고, 그럼에도 그녀는 이마에 진땀이 베이는 것을 느끼며 원하지 않는 귀환이라도 맞는 것처럼 터덜터덜 밤길을 걸었다. 불이 켜진 집도 얼마 없었기에 가로등 불빛만이 희미하게 그녀의 행보를 밝히고 있었다.
원룸 건물앞에 도착해서야 선영은 자신이 돈을 얼마나 썼는지 궁금해져서 걸음을 멈추고 가방을 열어보았다. 흡사 열쇠를 찾는, 그런 모습일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때까지 숨죽이고 몰래 숨어서 선영을 바라보던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기에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판단한 듯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
선영은 인기척을 느끼고는 돈봉투가 들어있는 가방을 얼른 닫고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꽤 빠른 반응이었다고 생각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늦은 행동이었다. 상대는 이미 몇 발자국도 안 되는 거리까지 다가와서 선영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은 여전히 답답할정도로 희미했고 그래서 얼굴 윤곽을 잘 볼 수는 없었지만 선영은 낯설지 않은 모습임을 상기해내었다.
“홍준석…?”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나와서야 준석은 표정에 변화를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미묘하게 진지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선영이 너무 놀라서 그 이후에 해야 할말을 잊고 있을 무렵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하지만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음성을 내었다.
“기억해주니 고맙군. 네가 날 지명해준 덕분에 난 ‘메지즈’ 구단에서 프로게이머 제의를 받았고 당연히 그것을 수락했지.”
하지만 준석은 전혀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너무 진지해서 오히려 약간 화가 난 표정으로까지 보였다. 그리고 선영은 그의 이 예상치 못한 등장과 반응에 대한 추론으로 한가지 가설을 입각해보기로 했다. 그녀는 조금 바래졌지만 여전히 윤기나는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싱긋 웃어보였다.
“원하던 대로 된 것 아닌가요? 하지만 말투나 표정을 보아하니 저한테 감사의 말을 하려고 온 것 같지는 않군요. 게다가 미행까지 한 걸 보면.”
“그래.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서다.”
역시… 그건가? 한낱 시시콜콜한 쓰레기 인간은 아니었던가 보군. 선영도 따라서 진지하게, 하지만 맞받아칠 준비가 돼있는 미소로 그를 마주보았다. 날 선 칼과 같은 반말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다.
“자존심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나? 의외로 멋진 구석이 있네. 하지만 네겐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을 텐데? 게다가 다시 승부를 벌인다고 해도 승산이 없다는 것은 네 쪽이 더 잘…….”
한창 말을 이어가려던 선영은 문득 준석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미소를 거둔 선영이 그를 따라서 미묘한 표정을 지을 무렵, 준석은 고개를 까딱 하고 옆으로 꺾었다. 의아함이 가득한 음성이 그의 목구멍 속에서 흘러나왔다.
“싸우러 온 게 아닌데.”
“그럼…?”
“싸우러 온 게 아니라고.”
같은 말을 반복하며 한걸음 다가오는 준석. 선영은 그의 뭔가에 홀린 듯한 눈동자를 보고는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기억의 회로가 그를 처음 만났던 낮의 대회로 거슬러올라가며 이 상황에 대한 위화감을 표출해내고 있었다. 매우 얄궂게도 그런 위화감을 상쇄시킬만한 해답을 떠올리게 되자 선영은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르는 기분을 받았다.
대회장에서부터 줄곧 나를 따라왔나…? 이 시각, 이 장소까지?
“으… 은선영. 이름도 이뻐. 선영. 나를 그렇게 완벽하게 제압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준… 여, 여신 같다고나 할까. 나… 난 네게 아주 많이 고마워하고 있어. 그리고 그보다 더… 주체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계속 따라왔어. 그… 그러니까.”
그의 말은 반나절 가량을 고민했다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더듬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선영은 그의 스토커와 같은 행각에 충격을 받아 뭐라 제지하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만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종일 혼자였던 선영의 모습에서 당연히 남친 따위는 없을 거라 판단한 준석은 용기를 내어 입 밖으로 단숨에 뱉어내듯 말했다.
“나… 나랑 사귀어줘, 선영아! 너… 너랑 함께라면 그 험난한 프로게이머 일도 잘해낼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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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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