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66부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66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터져나올 무언가를 삼키듯 조용하게 대답한 기식은 식탁 한 켠으로 시선을 준 채 입을 다물었다. 선영은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진 그를 조심스레 슬쩍슬쩍 바라보며 남은 음식을 마저 먹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불안감과 의문점을 간직한 채 깨작거리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자 선영은 왠지 모를 잘못을 자기가 하고 있는 느낌에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포크를 입에 문 채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기던 선영은 잠시 후 얼굴을 활짝 펴며 말했다.



“그… 그렇죠! 저번에 계약서 얘기를 했는데… 그건 언제쯤 하면 되나요? 제가 사무실을 방문해야 되나요?”



“은선영 씨.”



선영은 갑자기 자신의 성명을 부르는 기식의 목소리에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기식은 그녀의 아름답고 또렷한 눈동자를 응시하며 나지막하게, 하지만 또렷하게 천천히 말했다.



“세상은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국가는 전체를 위해 개개인을 조종하고 기업은 조직을 위해 사원을 조종합니다. 모든 현상은 납득할만한 이유에 근거하여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갑니다. 조금이라도 이윤에 반한다면 철저하게 내쳐버리는 게 현실이에요. 따라서 누군가가 당신의 이익을 위한다며 나선다면 먼저 의심을 해보는 게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잠깐의 이익에 눈이 멀어 더 큰 것을 내주게 된다는 거죠.”



“그건… 저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요.”



“아니요. 모르시는 것 같아 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던 기식은 문득 스스로 엄청난 위화감을 느끼고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뭐하는 거야. 이건 계획에 없던 대본이잖아?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더 희망을 심어줘야 나중에 믿었던 자에게 배신을 당하는 참담함을 맛보게 해주잖아. 그런데 왜…….



기식이 속으로 갈등하는 동안 선영은 두 눈을 깜빡거리며 멍청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매우 당연하게도 기식이 새삼스레 그런 말을 꺼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다 결국 선영은 그가 지나치게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예. 그럼 무슨 뜻인지 잘 생각해볼게요. 어쨌든 기식 씨. 제가 언제쯤 계약서에 사인하면….”



“사람이 말하면 좀 들어요!”



기식은 결국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식탁을 쾅하고 내리쳤다. 접시가 요란스레 흔들리고 물컵의 물이 튀어올랐다. 어찌나 세게 내리쳤던지 식당의 손님들이 몽땅 돌아볼 정도였다.



“……!”



주의를 주러 다가오던 종업원이 발길을 멈추었다. 기식은 그 순간만큼은 누구도 자신을 방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선영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영이 얼어붙었음은 물론이다. 그녀는 황당함과 두려움으로 온통 머릿속이 들어차는 것을 느꼈다. 현재의 기식은 바로 이전까지 자신이 알던 기식이 아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선영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 멍청한 년. 알기는 뭘 알아? 지금 바로 앞에 널 이용해먹으려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도 모르면서…….



잠깐, 잠깐. 이게 아니지.



지금 내가 뭐에 홀려서 이런 짓을….



‘화낼 이유가 없잖아. 스스로 다된 밥에 재를 뿌릴 필요는…….’



기식은 눈을 감고 미간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목표에게 정 따위를 붙이는 것만큼 한심하게 계획을 망가뜨리는 것도 없다고 다짐하면서 기식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건 복수다. 녀석이 뭘 어쨌든 대상은 녀석 안에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선영 또한 피해를 보는 건 어쩔 수 없다. 이것저것 다 따지다 보면 정작 복수할 상황은 제대로 피어나지 않아. 빚을 짊어진 누군가가 죽으면 그 가족이 대신 빚을 청산해야 하는 구조처럼…….



“…괜찮으세요?”



“…….”



기식은 안색을 살피는 선영을 감정 없는 눈빛으로 마주보았다. 그의 딴에는 감정을 컨트롤하려는 의도였지만 선영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게 자신이 괜히 개인적인 일을 떠벌려서 그가 화가 난 것이라 판단했다. 무슨… 이런 자리에서까지 괜히 그런 무거운 얘길 꺼낼 필요는 없었잖아. 기식 씨랑 나는 이제 겨우 몇 번을 만난 자리일 뿐인데…. 역시 순간적인 기분에 몸을 맡기는 이 어린애 같은 감정이 문제야. 멍청이, 멍청이…!



선영은 이제 와서 사과하는 것도 그의 기분을 거슬리게 할 것만 같아 입을 다물고 완전히 주눅들어버렸다. 기식은 기식 나름대로 복잡해진 감정을 정리하지 못해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로 있었고, 그래서 식사의 마지막은 퍽이나 침체된 분위기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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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익.



기식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원룸 건물 앞에 차를 세우고 흘끗 위를 올려다보았다. 형준에게 받았던 데이터, 즉 인터넷 포탈사이트의 거리뷰로 보았던 건물이 거기 있었다. 비록 현재는 밤이었지만 기식은 선영이 거주하는 건물이 틀림없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저 안에서 아마 김성진이란 녀석도 함께 동거하고 있겠지. 녀석이 계획에 걸림돌이 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로선 그게 문제가 아니다….



“…….”



“…….”



선영의 (현재)집에 도착했지만 기식이나 선영이나 ‘다 왔다’는 말을 아무도 꺼내지 않았다. 중형 승용차의 낮은 시동소리만이 조용하게 둘 사이를 감돌았고 그래서 기식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여자한테 말 걸기 힘든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는 핸들만 만지작거리며 한참 동안 뜸을 들이다 지나가는 목소리를 겨우 연출하며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곳이 여기가 맞지 않나요? 다 왔습니다만….”



하지만 선영의 시선은 원룸 건물도 아니고 기식도 아니고 그저 창 밖 한구석의 어딘가로 고정되어 있었다. 물론 여전히 입을 다문 채로. 기식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고는 좀 더 따뜻한 목소리를 내어보았다.



“얼른 들어가 쉬어요.”



그제서야 풀로 붙인 종이가 떼어지는 것처럼 느릿하고 무겁게 고개를 돌리는 선영. 그녀는 기식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툭하고 입을 열었다.



“기식 씨는요?”



“저도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야죠. 내일 아침도 사무실로 출근해야 하니까요. 왜, 차라도 한잔 주시게요?”



성진이 있기에 그렇게 하지 못할 걸 뻔히 짐작하고 있었지만 기식은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완화시켜보려고 일부러 미소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꽤 효과가 있었다. 선영 또한 굳었던 표정을 풀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보였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그렇겐 안될 것 같네요. 그것보단…….”



“……?”



기식은 여전히 평온하게 미소지은 상태로 말해보라는 눈짓을 했다. 우물쭈물하던 선영은 겨우 한마디를 토했다.



“화난 것 아니죠?”



이 경우에는 화난 걸 알면서도 묻는 질문이란 걸 기식은 알고 있었기에 마음에도 없는 답변보다는 약간 디테일하게 납득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기식은 핸들에 손을 얹은 채로 전방 먼 곳을 바라보는 척하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화가 났었긴 합니다. 식당에서 그렇게 언성을 높였는데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그게 선영 씨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타이밍이 안 좋았을 뿐입니다. 선영 씨의 과거 얘기를 듣고 비슷한 경험이 있는 지인이 겪었던 고충이 떠올라서… 순간적인 감정이 욱했던 것뿐입니다.”



“예에… 어쨌거나 그런 얘기를 해버렸으니 제가 죄송… 죄송해요…….”



“아뇨. 이젠 괜찮습니다. 전혀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리고는 정말로 안심하라는 듯 평소의 페이스로 돌아와서 싱긋 하고 웃어보였다.



“조만간 ‘스피어’ 입단 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한 연락을 한번 드리겠습니다. 뭐 선영 씨는 거의 가입하기로 마음을 먹으신 것 같지만, 중간에 변동 사정이 생기면 드렸던 명함의 번호로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선영도 그제서야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조수석의 문 손잡이를 붙잡았다. 문득 그녀는 ‘그 저랑 비슷한 상황이었다던 지인분은 지금 잘 지내나요?’라는 질문을 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충분히 느꼈기에 말을 삼키고 문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는 한번 살포시 고개를 숙여보이곤 원룸 건물로 걸어들어갔다.



“…….”



기식은 선영이 들어간 후 몇 층쯤까지 계단 등불이 켜지는지 참고 삼아 확인한 후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부르릉-. 하얀 승용차는 학생 원룸들이 즐비한 좁은 길을 조용하게 달렸다.



큰길로 빠져나가려면 차를 돌려서 골목을 벗어나야 했으나 기식은 목적 없는 운전수처럼 계속해서 이리저리 좁은 길을 헤집으며 달렸다. 후진해서 차를 돌리기 귀찮은 듯했지만 길은 운전수의 심경에 부합해주지 않았다. 결국 기식은 막다른 골목까지 오자 차를 급정거시키고 숨을 몰아쉬었다. 갑자기 그는 참지 못하고 핸들 가장자리를 주먹으로 팍하고 내리쳤다.



“젠장할……!”



가로등 하나 없는 캄캄한 골목길에서 자꾸만 선영의 웃는 얼굴이 아른거렸다. 너무도 순수하게, 진심을 담은 모습으로. 기식은 자신이 지금 얼마나 잔인한 짓을 벌이려고 하는지를 자각하게 되는 것 같아 입술을 씹으며 안절부절 못했다. 이제 와서… 그 험악한 패거리들의 힘까지 동원해가며 짜릿한 강간의 향연을 펼칠 계획이 차곡차곡 진행되는 도중에 이 어이없는 감정이 피어나버릴 줄은…….



그러고 보니 강간이란 것을 녀석에게 처음 시도해보게 되는군.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이지. 그래, 그래서일 거야. 그렇게 자신을 다스리며 한참 동안 어둠 속을 노려보던 기식은 한 손을 들어 입고 있던 코트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꺼내 위치 어플로 지역을 검색했다. 스마트폰은 주인의 목적에 유동적으로 부합하며 원하는 것을 찾아주었고 기식은 주저 없이 가장 가까운 상대를 향해 차를 몰았다.



평범한 다세대 주택. 기식은 주변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는 그 주택의 몇 층인가에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전화를 걸었다. 경쾌한 수신음이 들리자 그는 조금은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역시 내 활력소는 여자지. 기식은 새삼스레 그런 자신의 타입에 만족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 어, 오빠. 이 밤에 웬일이야? -



“그냥 걸어봤지 뭐. 시간 좀 있냐?”



- 자취녀한테 남는 게 시간이지. 근데 왜? -



작은 웃음소리를 동반한 그녀의 긍정적 반응에 기식은 이미 머릿속으로 OK란 사인에 불이 들어옴을 느꼈다.



“지금 집 앞인데 들어가도 돼?”



- 뭐? 내 집 앞에 와있다고? -



“볼일이 좀 있어서 이 근방에 왔었는데, 오니까 또 갑자기 유라, 니 생각 나더라.”



잠깐 동안 핸드폰 너머로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들렸다. 기식은 당황하고 있을 유라를 떠올리며 키득거렸고 잠시 후 다급한 목소리가 건네져왔다.



- 자… 잠깐, 오빠. 나 지금 꼴이 말이 아니라서. 10분… 아니, 5분만 기다려줘 -



그냥 10분으로 하는 게 어때? 그렇게 그녀가 반가워할 제안을 건네볼까 생각하던 기식은 소리없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잊자. 그래, 현재의 선영 따위 어차피 제대로 된 인격체도 아닌 걸. 원망하려면 이런 복수의 계획을 짜게 만든 본래의 자신을 원망하라지 뭐. 기식은 그렇게 속으로 다짐하곤 백미러를 통해 머리카락만 대충 정리하면서 다가올 설렘의 시간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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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



선영은 한 손으로 샤워기를 든 채 한참동안 꼼짝 않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샤워기의 물줄기가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를 관찰하는 것처럼 고정되어 있었으나 생각은 완전히 다른 곳으로 텔레포트를 한 상태였다. 사실 오늘 너무 한꺼번에 이런저런 감정 기복이 되었던 상태라 그녀의 머릿속은 일련의 주제들이 들어차있었으나 연결고리가 없었다. 그저 자신의 현 상태, ‘카잔 전쟁’ 게임, 생각지도 못했던 기식과의 데이트…. 하지만 그 속속들이 엉키고 있는 기억 중에서도 한가지 가장 강하게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기식과 나누었던 대화였다.



내 상태를 기식 씨는 진심으로 이해하고… 아니, 최소한 이해하려고 노력해주는 정말 친절하고 자상한 분이시다. 선영은 그의 진실성에 한치도 의심을 품고 있지 않았다. 단지 그 후에 변했던 표정이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기에 선영은 여전히 그것이 꺼림칙했다. 나와 비슷한 경험이 있는 지인이라니… 그게 누굴까. 하긴 그런 사람이 또 있었기에 기식 씨는 나에 대한 상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겠지.



하지만 다음부터는 감정에 휩쓸려서 내 개인적인 사정만 떠벌려, 기식 씨를 불편하게 하는 오늘과 같은 일은 삼가야겠다. 선영은 그렇게 결론짓고는 텔레포트되었던 생각을 겨우 현 입지로 되돌려놓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주인의 의식 부재를 보완해주지 못하는 한 손에는 끊임없이 물줄기를 뿜어내는 샤워기가 들려있었다.



선영은 그제서야 서둘러 물을 껐다. 하지만 그녀는 샤워기를 던지듯 욕실 벽걸이에다 걸어놓았다. 이건 성진 녀석이 쓰는 샤워기잖아. 왠지 기분 나빠졌어. 게다가 또 물 오래 쓴다고 뭐라 할지 모르니 흥. 그래, 치사해서라도 안 쓴다고. 이미 20분 동안 샤워를 했으면 보편적인 샤워 시간보다 결코 짧다고 할 순 없지만 선영은 고양이 세수라도 한 것마냥 투덜대며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그리고 곧바로 욕실 문을 열고 방으로 나왔다.



여전히 보온이 꽤 잘 되는 원룸 방이었지만 욕실 기온이 상대적으로 높았기에 수증기도 함께 확하고 피어나왔다. 선영의 몸에서도 살짝 김이 피어오를 정도였고 그래서 그녀는 급격하게 낮아진 기온에 몸을 조금 떨었다.



침대 사이드레일에 기대어앉아 TV를 보던 성진은 세워놓은 한쪽 무릎에 리모콘을 쥔 팔을 올린 자세 그대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선영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 상태 그대로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면서 툭하고 말했다.



“어… 물 그렇게 많이 안 썼어. 욕실 정리도 잘 했고. 의심스러우면 와서 확인해보든가.”



“…….”



물소리가 20분 가량 계속 들렸던 게 많이 안 쓴 건지는 별로 따질 생각 없는 것처럼 성진은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선영의 봉긋한 젖가슴과 보지가 적나라하게 시야에 들어왔지만 성진에겐 그런 것도 별다를 것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선영도 마찬가지. 알몸 혹은 속옷으로 방 안을 종횡무진 돌아다니는 건 남매라고 할지라도 민망할 터인데 둘은 이미 편한 대로만 행동하는 데 익숙했다.



빨래대 앞에서 성진이 빨아 널어놓은 속옷들 중 마른 걸 골라보던 선영. 그녀는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자 고개를 다시 돌렸다. TV에선 꽤나 코믹한 프로그램이 펼쳐지는 것 같았지만 성진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영은 그 시선의 의미를 짐작하고 있었다. 또 뭔가 추궁할 게 생겼나?



“어디 갔다 왔어?”



지겹군. 같이 살면 저런 질문을 수도 없이 들어야 하나? 아, 혼자 살고 싶다. 선영은 그에게서 얼른 시선을 돌린 후 다시 속옷을 고르며 간단히 대답했다.



“미팅.”



“뭐…?”



“남이사.”



성진은 그녀가 대답한 미팅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가늠하지 못해서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곧바로 다시 그녀를 보면서 목소리를 조금 높여 말했다.



“차 소리가 들리던데. 혹시 누군가 태워다준 거냐?”



그녀가 올라온 시간과 맞추어 짐작해본 것이지만, 우연이라 치부하고 싶어하는 성진의 바람과는 달리 선영은 눈 깜짝 하나 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성진은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비단 태평스럽게 말하는 수준이 아니라 뭔가 자랑스러워하는 뉘앙스까지 풍기고 있었기에 성진은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하지만 그는 곧 어린애와 되도 않는 싸움을 시작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간신히 그런 자신을 제지했다. 게다가 남자만 운전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뭐 남자라고 해도 아무 사이도 아닐 수 있다. 과민반응이야, 과민반응….



“멋진 남자였지.”



브래지어를 한쪽 팔에 걸친 채로 볼에 손바닥을 갖다 대며 황홀해하는 선영. 성진이 두 번째로 벌떡 일어날 뻔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무서운 표정으로 선영을 응시하다가 진정하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TV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나지막하게, 하지만 경고하는 음성으로 말했다.



“멋대로 쏘다니는 짓 좀 자제해라.”



선영은 이상스레 그 명령하는 말투가 재미있게 들렸다. 그녀는 팔을 뒤로 돌려 브래지어 끈을 고정시키면서 성진을 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왜?”



“뭐?”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



성진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고 윽박지르려 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납득시킬만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는 간신히 선영에게 명령할만한 당위성을 생각해내곤 내뱉듯 말했다.



“네 상태가 지금 정상인하고 같냐? 그렇게 말해도 머릿속에 박히지 않는 모양인데.”



“그래서 언제까지고 이 집 구석에 꼭꼭 숨겨두려고?”



“본래의 네가 나오지 않겠다는 의지는 잘 알아. 하지만 현재의 네가 바깥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기엔 아직 너무 위험해. 내가 시간을 두고 차차…….”



달래고 설득시키던 성진은 문득 그녀가 묘한 표정을 하고 있음을 눈치채고는 입을 다물었다. 선영은 마치 선생을 선생으로 인정하지 않는 학생처럼 한심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성진은 일어서서 그녀와 시선 높이를 맞추고 얘기할 걸 그랬나 하는 잠깐의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아닌 듯하다. 몇 발치 너머에서 선영은 속옷을 다 입고는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살짝 꺾어보였다.



“흐음. 그렇다면 그 정도로 요주의 대상인 나를 두고 바깥을 그리 쏘다녔던 것이군?”



“어……?”



“뭐 좋아. 이젠 혼자 있어도 별로 무섭지도 않다 보니 네가 없어도 잘 자긴 하는데… 여행 갔다왔던 건 그렇다 치자. 그 전과 후에도 늘 집에 있는 날보다 외박하던 날이 압도적으로 많았잖아? 그러고선 이제 와서 나보고 위험하다느니 시간을 두고 차차 어쩌구 말하는 게 그냥 웃겨서 말야. 시간을 두고 뭘 해줘? 아니, 그게 무엇인지는 둘째 치고 내가 여기 지낸 지 수 개월이 지났는데 아직도 더 시간이 필요한 건가.”



“야! 너 지금… 누구 덕택에 이 집에서 밥 안 굶고 지내고 있는 줄…….”



선영은 이미 그 반박도 나올 걸 예상했다는 듯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성진은 다시금 말문이 막혀버렸고, 그녀는 벽에 걸린 시계라도 보는 것처럼 시선을 딴 데로 향하고는 한가로운 어투를 내었다.



“예에. 제공자의 은혜는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보답과 보상은 확실하게 할 준비가 되어있고요.”



어떻게 보상하겠다는 건지 성진은 짐작할 수 없었으나 묻지를 못했다. 선영이 거의 곧바로 말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사실 그 동안 당신한테 고맙긴 했어. 그리고 조만간 당신이 원하던 대로 이 집에서 나가줄 거야. 생각해 보니 불과 며칠 남지도 않은 것 같군. 미안했어.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내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돼.”



성진은 그녀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를 머릿속으로 빠르게 추리해봤고 ‘혹시 예전에 내가 감정적으로 꺼지라고 한 말 때문인가?’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 결론이 맞는지는 역시 확인해보지 못했다. 선영이 잠시 말을 끊는 듯하다가 살포시 미소지으며(역시 성진은 보지도 않은 채로) 들뜬 목소리로 연이어 말했던 것이다.



“내게도 나만의 인생을 열어줄 멋진 인연이 다가왔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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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이어집니다.

이젠 그냥 갈 데까지 가거라, 선영아.(먼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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