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한 여인 - 2부
2018.12.13 22:00
천한 여인(2)
"야, 이놈아! 지금이 몇신줄 알아? 형과 누나들은 벌써 아침을 다 먹었다."
방문이 왈칵 열리며 엄마의 고함이 터졌다. 이어 이불마저 확 제껴 졌다. 아직 정신을 못차리는 중에도 나는 알몸으로 잠이 들었다는 생각이 퍼뜩 났다. 그러나 내 팬티는 입혀 있었다. 물론 문자는 방에 없었다.
세수와 아침식사를 하는둥 마는둥 허겁지겁 학교로 향했으나 나는 그날 6학년 들어 처음 지각을 했다.
여자, 혹은 섹스에 대한 나의 첫체험은 이 정도로 마무리 지어야 한다.
문자는 다시 내 방을 찾지 않았으며 그녀에게 접근할 기회도 별로 없었다. 그래도 가끔 눈이 마주치면 눈짓과 미소가 오가기는 했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고, 단지 우리 둘만이 아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그녀는 나를 보면 급히 외면하고 우울한 표정을 짓거나 흠칫 놀랄 때가 많았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는 아예 우리집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사라지기 얼마전, 집에는 할머니가 낮잠에 빠져 있었고 문자와 나뿐이었다.
"누나!"
방구석으로 그녀를 밀며 나는 기습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놀라며 제지하려 했지만 입술은 제대로 맞았고 나는 혀를 내밀어 그녀의 입을 열려 했다. 또 한손으로는 가슴을 더듬었다. 그러나 그녀의 완강한 반대로 나는 곧 떠밀려 버렸다.
"누나, 키스 한번만. 누나가 가르쳐 준대로 ...... "
나는 장난끼까지 있어 웃으며 다시 매달리려다 멈칫했다. 그녀의 얼굴은 아주 징그럽거나 무서운 것을 본 사람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 얼굴을 두손으로 가리고 훽 돌아 앉더니 울부짓듯 말했다.
"이러지 마! 이래선 안돼! 우리는 이러면 안돼!"
다시 집적거릴 수 없을만큼 그녀는 단호했다. 나도 그녀의 표변이 밉기도 하ㅗ 분통이 나서 그대로 돌아서 버렸고 며칠동안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오문자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소년에게는 늘 흥미롭고 새로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더구나 내가 중3에 올라갈 때 우리집은 완전히 서울로 이사했다.
나는 고등학생 때 두번 연애편지를 써보았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 고3 때는 친구따라 창녀촌에 가서 동정을 깼다.
그후 3~4명의 여자를 섭렵하다 결혼했다. 결혼 후에도 그럭저럭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도 가지며 이혼하기 전까지는 그런 문제로 가정불화 같은 것도 없이 정말 그럭저럭 살아 왔다.
오문자에 대한 회상은 최소한 내가 서울로 이사온 후로는 떠올린 적이 없는 것 같다. 큰 누나의 칠순잔치에서 우연히 만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나에게 영원히 망각의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를 만남으로써 되살아난 그 옛날 추억은 아련하면서도 감미로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 없이 유치하고 무지했던 "한 여름밤의 꿈" 같은 일이지만 또 얼마나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순간이었던가.
회상에서 벗어나며 꼬냑병을 보니 3분의 2쯤은 마셔 버렸다. 수면제 용으로는 좀 과한 편이다. 그러나 취기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련하고 감미로운 추억이 안주, 혹은 기분좋은 무드로 작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또 하나 전과 다른 변화를 느꼈다.
아랫쪽이 뻐근한 것 같았다. 손으로 눌러 보았다. 딱딱한 감촉이 전해 진다. 나는 아예 바지를 내려 버렸다. 좆이 빳빳하게 서 있었다.
손바닥으로 감싸 쥐어 보니 손가락 마디 하나쯤은 남을만 한 길이에 귀두도 탱탱한 것이 왕년의 위용을 되찾은 것 같다.
아래 위로 움직이자 감흥이 조금씩 고조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곧 동작을 멈추었다. 아무도 없는 집안이라고 하나 60 나이에 이게 무슨 남사스러운 짓인가.
최소한 나는 결혼 한 후에는 직접 딸딸이를 쳐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잠시 후 행동을 재개했다.
이것은 임상실험이다, 사실 확인이다 라고 스스로 변명하면서 ......
칙,칙,치칙, ...... 손놀림이 빨라 지면서 곧 사정할 것 같은 느낌이 왔다. 나는 그대로 탁자 위에 쏟아 내기로 했다.
나온다! ...... 한창 때처럼 물총 쏘듯이 탄력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첫 사정은 몇십센티를 튀어 나갔다. 손놀림을 더 빨리 하자 정액은 계속 밀려 나왔다. 쾌감 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대견했다.
정액 한방울을 손가락으로 찍으며 옛날 생각이 났다. 내 첫 정액을 문자 보지 위에 토해 냈을 때 그녀는 내게 냄새를 맡아 보라고 했고 나는 도래질을 했었다.
그런데 탁자 위의 정액을 찬찬히 살펴 보니 그저 탁한 액체가 아니라 약간 노란 색을 띈 당면조각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의학지식은 없지만 정액이 방출되지 못하고 오랫동안 정관 속에 같혀 있으며 굳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너는 생산된지 최소한 5년이 넘어 세상 구경을 한 셈이구나.
정말 그렇다. 나는 5년만에 처음 사정을 해 본 것이다.
이혼과 도산이라는 인생의 몰락을 겪으면서 내게 더욱 충격과 좌절을 준 것은 임포텐스, 바로 발기불능 현상이었다. 의욕도 자신감도 상실하고 대인기피증까지 생겼으며, 특히 누나들이 적극적으로 나섰건만 재혼을 엄두도 못내며 불편하고 외로운 홀아비 생활을 감수하는 그 밑바닥에는 항상 임포텐스라는 요인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의 주장이 꼭 남들의 공감을 얻을 수 없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요즘 스트레스니, 공해니 해서 20대에도 무정자증의 남자가 많고, 30대 40대에도 임포텐스로 섹스를 못하는 남자들이 많다는 것을 나는 직,간접으로 들어 왔다.
병원을 가면 보게 되는 각양각색의 환자들은 또 어떤가. 꼭 불치의 병은 아니라도 정상적 생활이 어려운 환자들, 특히 사고등 후천적 원인으로 각종 불구가 된 사람들을 생각하면 사지가 멀쩡하고 일상 생활에도 거의 불편이 없는 나같은 경우는 행복한 투정일 수도 있다.
더구나 내 또래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벌써부터 부부가 각방을 쓰고 "아내가 싫어해서 몇년 째 관계을 안한다."는 경우도 많았다. 자식농사도 다 지어놓은 터라 섹스가 그리 대단할 것도 절실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배신으로 시작된 이 현상을 당시 나는 달관한 듯 받아 들일 수가 없었다.
어느날 불쑥 걸려 온 전화는 그 모든 불행의 전주곡이었다.
마침 술자리 약속이 있어 퇴근하려던 참에 전화가 왔다. 나를 확인한 상대는 "강미란씨 남편 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그럼 오상수씨를 아십니까?"라고 다시 물어 왔다. 기억을 더듬어도 생각나지 않는 이름이었다.
"나는 강남경찰서 수사과의 김형사입니다. 부인 강미란씨와 오상수씨가 간통죄로 고소당해 지금 본서에 연행되어 있습니다."
나는 한동안 멍해 있었다. 그때 불쑥, 아내가 교통사고나 강도를 당했다는 응급전화를 들었다면 내 심정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튼 그보다 훨씬 나쁜 상황이었다.
"그럼 제가 가야 됩니까?"
"아니, 꼭 필요 요건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구속영장을 신청한 상태라 우선 친족에게 통고해 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결국 경찰서를 찾아 갔다.
아내는 나를 보자 두손으로 고개를 감싸고 얼굴을 숙여 버렸다. 그래서 나는 당시 아내의 심경도 모른다. 잘 못 했다는 것인지, 네깟놈이 뭐냐는 것인지, 세상 만사가 귀찮다는 것인지 ......
오상수라는 간부는 나도 아는 인물이었다. 바로 내 아들이 고3 때 과외교사였다. 당시 대학생이었는데 벌써 7~8년 전의 일이고 그 녀석도 이제 대기업의 대리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
아는 경찰관을 통해 나는 조서도 볼 수 있었다. 아내는 "그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식의 진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교는 오늘 딱 한번 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오가의 진술을 보니 아내가 상대를 잘 못 골랐다는 기분도 들었다. 녀석은 "강미란이 줄기차게 만나기를 요구해 왔으나 자신은 가정을 가진 터라 거절해 왔는데 워낙 끈질겨서 마지막으로 한번만 만나기로 약속하고 오늘 성교를 했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하면 쌍벌죄라도 자신은 벌을 좀 덜게 받으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 정도로도 뻔했다. 그 연놈들은 이미 7~8년 전부터 지금까지 간통을 해 온 것이다. 다만 나는 그런 낌새나 의심조차 전혀 하지 못한 것이다.
그날 밤 나는 혼자 술집을 찾았다.
"사장님, 무슨 고민이 있으신가봐요."라는 흐스테스와 단둘이 위스키 3병을 해 치우고 우리는 호텔로 갔다. 나는 결혼 후에도 심심찮게 외도를 해 왔지만 오늘은 배신감을 달래기 위해서도 꼭 이 절차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실패했다. 임포텐스가 된 것이다.
팁이 후한 이유도 있겠지만 20살 안팎의 나이답지 않게 그녀는 능숙하고 끈질기게 펠라치오까지 해주었으나 내 좆은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참담한 기분이었지만 스스로 핑계를 댈 수도 있었다. 오늘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셨고 심리적 충격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바로 다음날 나는 다른 여자와 재시도를 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대상을 바꾸었다. 우리 회사의 경리 미스 박, 하도급업체에서 업무연락 담당인 강지숙, 단골 룸살롱의 홍마담, ...... 모두 이미 섹스파트너였던 여성들이다. 하지만 모두 실패였다.
"어머나! 사장님, 왜 이래요? 다른 년한테 너무 많이 빼 주셨나보다."
이렇게 변죽을 올리는 년도 있어 오히려 더 창피만 당하며 욕구는 더 위축되어 버린다.
아내는 구속된지 10여일만에 석방이 되었다. 고소인인 오가의 아내가 고소를 취하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당신 처분대로 하겠어요."라고 했지만, 이미 자식들을 삶아 놓았는지 아이들은 "가정을 깨지 않도록 엄마를 용서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혼의 단안을 내렸다. 이미 부부 사이는 깨진 그릇인데 가정이라는 울타리로 싸 봤자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만 27년을 살아 온 부부사이는 이렇게 허망하면서도 간단하게 끝나 버렸다.
그 후 아내, 아니 전처의 소식을 누나들이나 주위 사람을 통해 가끔 듣게 됐다. 그녀는 최소한 2~3명의 남자와 동거, 혹은 내연관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상대는 모두 그녀보다 젊은 놈들이었고 그녀가 버림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몇달 후 그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물론 아들도 딸도 그 소식을 뒤늦게 알았는데 자살할 당시 그녀는 지방의 한 소도시에서 식당 종업원으로 일했었다고 한다.
이렇게 끝난 것으로 아들 딸도 나를 원망하는 것 같다. 나 역시 마음은 아팠다. 소식을 듣던 날 나는 혼자 사는 홀아비 방에서 울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흐뜨러져 버린 인연을 ......
이혼 후 내가 씹 한번 하려고 바둥거리는 동안 회사는 부도를 냈다. 누가 보기에도 회생할 가능성은 없었다. 완전히 도산한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아내의 간통이나 이혼, 나의 씹에 대한 집착과 실패등에 연관시키고 싶지 않다.
회사의 도산은 어쩌면 필연적이며 확률의 소산이다. 대한민국에서 중소기업은 1천개중 하나가 대기업으로 성장한다면 나머지 999개는 망한다. 그게 바로 확률인 것이다. 다만 업체마다의 차이라면 그중 어떤 기업은 1년 안에, 또는 10년 안에, 20년 안에 라는 식으로 생존기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마치 슬로트 머신이나 경마장에서 오래 배팅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번 혹은 몇번쯤은 대박이 터질 수 있지만 확률이라는 진리 앞에서 결국은 누구나 끝내는 털리고 마는 것이다.
그나마 경제적 여유는 있었기에 나는 우선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
우습게도 그 핵심은 "아내의 저주" 같은 임포텐스를 극복하고 씹을 할 수 있는것이었다.
나는 비아그라도 혼자 먹어 보았다. 그런데 좆이 서기도 전에 가슴부터 벌렁거리더니 심장이 조여 오는 듯한 통증까지 느껴졌다. 병원으로 갈까 하다가 그만 두었고 가까스로 진정이 되기는 했지만 다시 그런 시도는 않기로 했다.
병원도 몇군데를 가 보았다. 혈액검사, 소변검사, 어떤 곳은 엑스레이까지 찍고 자지와 불알을 만지작 거리고는 "신체적 결함은 없어 보이니 일단 심인성으로 판단된다. 정신과 치료를 권한다."고 했다.
그까짓 진단은 이미 나도 했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 앞에서 "아내가 서방질을 해서 충격을 받았다."는 식의 주저리를 까는 것도 싫었지만 그런 고백을 해서 치유된다는 보장도 없는 것 아닌가.
대안으로 의사는 주사 요법과 수술요법을 소개했다, 주사는 간편하고 지도를 받으면 혼자서도 실컷 놀 수 있다고 했다.
우선 시험적으로 맞아 봤다.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 좆은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지만 바늘로 찌르는 듯한 쓰라림이 오기 시작한다. 더구나 좆을 만져 보니 이를 뺄 때 마취주사를 맞고 혀가 안 움직이듯 감각이 없었다.
이런 상태로 어떤 보지에 꼽아도 내가 씹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술요법? ...... 설명을 듣고 나는 시험도 포기했다. 첫째 방법은 자지에 고형물을 집어 넣는 것이란다. 단점이라면 자지가 늘 발기한 것처럼 부풀어 있고유방확장수술처럼 이물질에 의한 염증이나 부작용도 가끔 일어난다고 한다.
그래서 새로 개발된 것이 공기주입식이란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자지에 풍선 기능의 고무관을 넣고 불알에 펌프를 장착해서 성교 전에 바람을 넣는 식이다.
나는 쓴웃음이 나왔다.
가령 내가 재혼을 한다. 헌장가라도 첫날밤을 지룬답시고 알몸이 된 후 화장실에서나 혹은 돌아 앉아서 불알을 꾹꾹 눌러가며 바람을 넣는다 ...... 앓느니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노력이나 모색이 모두 무위로 끝나면서 나는 적당히 체념 상태가 되었다.
체념이란 절망의 진통제 같은 것이다.
한번만이라도 꼭 씹을 하고야 말겠다는 오기와 집착이 가해 왔던 자학도 어느 정도 수그러 들었다. 정말 마음이 끌리는 여자, 섹시한 여자를 봐도 달관한 도인처럼 묵살해 버릴 수 있다. 케이블 TV에서 가끔 진한 포르노를 봐도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는다.
진통제의 약효라고도 할 수 있다. 살기에 편한 것이다.
그러나 진통제가 완전한 치료제는 아니듯 가끔 아쉬움과 외로움이 밀려 오기도 한다. 그것은 섹스를 떠나서도 일상생활에서 결핍을 느낄 때 더욱 그렇다.
끼니를 찾아 먹는 것, 설겆이, 세탁, 청소, 각종 공과금 납부 ...... 아내가 있을 때 나는 이런 것들이 사는데 꼭 필요한지조차 몰랐다. 혼자 살게 되면서 또 이런 것들이 얼마나 힘든 일이고 또 내가 그 방면에 무능한지도 절실하게 깨달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나는 재혼을 하고 싶었다.
돈만 빼 먹으려는 여자가 아니라면 아내를 부양하면서 수준 이상으로 살 경제력은 충분히 있다. 나이 든 것이 결점이 된다면 아내감을 살 수도 있다. 지금 내가 사는 이 강원도 시골만 해도 조선족 여자와 월남여자등 3명이 팔려오듯 농부의 아내가 되어 살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팔려 온 신세라 한들 좆도 안 서는 남자와 정상 생활이 지속될 수 있을까. 내가 완전 불구가 되어 똥오줌이나 받아 줄 아내감을 구한다면 모를까, 지금의 나는 그런 자격도 없는 것이다.
문제는 항상 나한테 있었다. 사실 임포텐스 현상만 없었다면 왕년의 놀던 가락을 활용해서 내가 마음에 드는 상대도 고를 수 있었을 것 같다.
이렇게 모든 욕구와 오기와 자학감을 체념으로 누르고 달래며 살와왔던 내가 단지 어린 시절의 아련하고 감미로운 추억만으로 뜻밖에 발기와 사정을 경험한 것이다.
그날 무슨 꿈을 꾸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여튼 나는 잠에서 깨자 손을 아래로 가져 갔다. 아, --- 좆은 서 있었다. 옛날 어른들이 "빚을 주어도 된다"는 새벽좆이 서 있었다. 나는 오랫만에 상쾌한 아침을 맞았다.
"야, 이놈아! 지금이 몇신줄 알아? 형과 누나들은 벌써 아침을 다 먹었다."
방문이 왈칵 열리며 엄마의 고함이 터졌다. 이어 이불마저 확 제껴 졌다. 아직 정신을 못차리는 중에도 나는 알몸으로 잠이 들었다는 생각이 퍼뜩 났다. 그러나 내 팬티는 입혀 있었다. 물론 문자는 방에 없었다.
세수와 아침식사를 하는둥 마는둥 허겁지겁 학교로 향했으나 나는 그날 6학년 들어 처음 지각을 했다.
여자, 혹은 섹스에 대한 나의 첫체험은 이 정도로 마무리 지어야 한다.
문자는 다시 내 방을 찾지 않았으며 그녀에게 접근할 기회도 별로 없었다. 그래도 가끔 눈이 마주치면 눈짓과 미소가 오가기는 했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고, 단지 우리 둘만이 아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그녀는 나를 보면 급히 외면하고 우울한 표정을 짓거나 흠칫 놀랄 때가 많았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는 아예 우리집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사라지기 얼마전, 집에는 할머니가 낮잠에 빠져 있었고 문자와 나뿐이었다.
"누나!"
방구석으로 그녀를 밀며 나는 기습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놀라며 제지하려 했지만 입술은 제대로 맞았고 나는 혀를 내밀어 그녀의 입을 열려 했다. 또 한손으로는 가슴을 더듬었다. 그러나 그녀의 완강한 반대로 나는 곧 떠밀려 버렸다.
"누나, 키스 한번만. 누나가 가르쳐 준대로 ...... "
나는 장난끼까지 있어 웃으며 다시 매달리려다 멈칫했다. 그녀의 얼굴은 아주 징그럽거나 무서운 것을 본 사람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 얼굴을 두손으로 가리고 훽 돌아 앉더니 울부짓듯 말했다.
"이러지 마! 이래선 안돼! 우리는 이러면 안돼!"
다시 집적거릴 수 없을만큼 그녀는 단호했다. 나도 그녀의 표변이 밉기도 하ㅗ 분통이 나서 그대로 돌아서 버렸고 며칠동안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오문자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소년에게는 늘 흥미롭고 새로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더구나 내가 중3에 올라갈 때 우리집은 완전히 서울로 이사했다.
나는 고등학생 때 두번 연애편지를 써보았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 고3 때는 친구따라 창녀촌에 가서 동정을 깼다.
그후 3~4명의 여자를 섭렵하다 결혼했다. 결혼 후에도 그럭저럭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도 가지며 이혼하기 전까지는 그런 문제로 가정불화 같은 것도 없이 정말 그럭저럭 살아 왔다.
오문자에 대한 회상은 최소한 내가 서울로 이사온 후로는 떠올린 적이 없는 것 같다. 큰 누나의 칠순잔치에서 우연히 만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나에게 영원히 망각의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를 만남으로써 되살아난 그 옛날 추억은 아련하면서도 감미로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 없이 유치하고 무지했던 "한 여름밤의 꿈" 같은 일이지만 또 얼마나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순간이었던가.
회상에서 벗어나며 꼬냑병을 보니 3분의 2쯤은 마셔 버렸다. 수면제 용으로는 좀 과한 편이다. 그러나 취기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련하고 감미로운 추억이 안주, 혹은 기분좋은 무드로 작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또 하나 전과 다른 변화를 느꼈다.
아랫쪽이 뻐근한 것 같았다. 손으로 눌러 보았다. 딱딱한 감촉이 전해 진다. 나는 아예 바지를 내려 버렸다. 좆이 빳빳하게 서 있었다.
손바닥으로 감싸 쥐어 보니 손가락 마디 하나쯤은 남을만 한 길이에 귀두도 탱탱한 것이 왕년의 위용을 되찾은 것 같다.
아래 위로 움직이자 감흥이 조금씩 고조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곧 동작을 멈추었다. 아무도 없는 집안이라고 하나 60 나이에 이게 무슨 남사스러운 짓인가.
최소한 나는 결혼 한 후에는 직접 딸딸이를 쳐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잠시 후 행동을 재개했다.
이것은 임상실험이다, 사실 확인이다 라고 스스로 변명하면서 ......
칙,칙,치칙, ...... 손놀림이 빨라 지면서 곧 사정할 것 같은 느낌이 왔다. 나는 그대로 탁자 위에 쏟아 내기로 했다.
나온다! ...... 한창 때처럼 물총 쏘듯이 탄력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첫 사정은 몇십센티를 튀어 나갔다. 손놀림을 더 빨리 하자 정액은 계속 밀려 나왔다. 쾌감 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대견했다.
정액 한방울을 손가락으로 찍으며 옛날 생각이 났다. 내 첫 정액을 문자 보지 위에 토해 냈을 때 그녀는 내게 냄새를 맡아 보라고 했고 나는 도래질을 했었다.
그런데 탁자 위의 정액을 찬찬히 살펴 보니 그저 탁한 액체가 아니라 약간 노란 색을 띈 당면조각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의학지식은 없지만 정액이 방출되지 못하고 오랫동안 정관 속에 같혀 있으며 굳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너는 생산된지 최소한 5년이 넘어 세상 구경을 한 셈이구나.
정말 그렇다. 나는 5년만에 처음 사정을 해 본 것이다.
이혼과 도산이라는 인생의 몰락을 겪으면서 내게 더욱 충격과 좌절을 준 것은 임포텐스, 바로 발기불능 현상이었다. 의욕도 자신감도 상실하고 대인기피증까지 생겼으며, 특히 누나들이 적극적으로 나섰건만 재혼을 엄두도 못내며 불편하고 외로운 홀아비 생활을 감수하는 그 밑바닥에는 항상 임포텐스라는 요인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의 주장이 꼭 남들의 공감을 얻을 수 없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요즘 스트레스니, 공해니 해서 20대에도 무정자증의 남자가 많고, 30대 40대에도 임포텐스로 섹스를 못하는 남자들이 많다는 것을 나는 직,간접으로 들어 왔다.
병원을 가면 보게 되는 각양각색의 환자들은 또 어떤가. 꼭 불치의 병은 아니라도 정상적 생활이 어려운 환자들, 특히 사고등 후천적 원인으로 각종 불구가 된 사람들을 생각하면 사지가 멀쩡하고 일상 생활에도 거의 불편이 없는 나같은 경우는 행복한 투정일 수도 있다.
더구나 내 또래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벌써부터 부부가 각방을 쓰고 "아내가 싫어해서 몇년 째 관계을 안한다."는 경우도 많았다. 자식농사도 다 지어놓은 터라 섹스가 그리 대단할 것도 절실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배신으로 시작된 이 현상을 당시 나는 달관한 듯 받아 들일 수가 없었다.
어느날 불쑥 걸려 온 전화는 그 모든 불행의 전주곡이었다.
마침 술자리 약속이 있어 퇴근하려던 참에 전화가 왔다. 나를 확인한 상대는 "강미란씨 남편 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그럼 오상수씨를 아십니까?"라고 다시 물어 왔다. 기억을 더듬어도 생각나지 않는 이름이었다.
"나는 강남경찰서 수사과의 김형사입니다. 부인 강미란씨와 오상수씨가 간통죄로 고소당해 지금 본서에 연행되어 있습니다."
나는 한동안 멍해 있었다. 그때 불쑥, 아내가 교통사고나 강도를 당했다는 응급전화를 들었다면 내 심정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튼 그보다 훨씬 나쁜 상황이었다.
"그럼 제가 가야 됩니까?"
"아니, 꼭 필요 요건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구속영장을 신청한 상태라 우선 친족에게 통고해 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결국 경찰서를 찾아 갔다.
아내는 나를 보자 두손으로 고개를 감싸고 얼굴을 숙여 버렸다. 그래서 나는 당시 아내의 심경도 모른다. 잘 못 했다는 것인지, 네깟놈이 뭐냐는 것인지, 세상 만사가 귀찮다는 것인지 ......
오상수라는 간부는 나도 아는 인물이었다. 바로 내 아들이 고3 때 과외교사였다. 당시 대학생이었는데 벌써 7~8년 전의 일이고 그 녀석도 이제 대기업의 대리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
아는 경찰관을 통해 나는 조서도 볼 수 있었다. 아내는 "그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식의 진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교는 오늘 딱 한번 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오가의 진술을 보니 아내가 상대를 잘 못 골랐다는 기분도 들었다. 녀석은 "강미란이 줄기차게 만나기를 요구해 왔으나 자신은 가정을 가진 터라 거절해 왔는데 워낙 끈질겨서 마지막으로 한번만 만나기로 약속하고 오늘 성교를 했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하면 쌍벌죄라도 자신은 벌을 좀 덜게 받으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 정도로도 뻔했다. 그 연놈들은 이미 7~8년 전부터 지금까지 간통을 해 온 것이다. 다만 나는 그런 낌새나 의심조차 전혀 하지 못한 것이다.
그날 밤 나는 혼자 술집을 찾았다.
"사장님, 무슨 고민이 있으신가봐요."라는 흐스테스와 단둘이 위스키 3병을 해 치우고 우리는 호텔로 갔다. 나는 결혼 후에도 심심찮게 외도를 해 왔지만 오늘은 배신감을 달래기 위해서도 꼭 이 절차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실패했다. 임포텐스가 된 것이다.
팁이 후한 이유도 있겠지만 20살 안팎의 나이답지 않게 그녀는 능숙하고 끈질기게 펠라치오까지 해주었으나 내 좆은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참담한 기분이었지만 스스로 핑계를 댈 수도 있었다. 오늘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셨고 심리적 충격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바로 다음날 나는 다른 여자와 재시도를 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대상을 바꾸었다. 우리 회사의 경리 미스 박, 하도급업체에서 업무연락 담당인 강지숙, 단골 룸살롱의 홍마담, ...... 모두 이미 섹스파트너였던 여성들이다. 하지만 모두 실패였다.
"어머나! 사장님, 왜 이래요? 다른 년한테 너무 많이 빼 주셨나보다."
이렇게 변죽을 올리는 년도 있어 오히려 더 창피만 당하며 욕구는 더 위축되어 버린다.
아내는 구속된지 10여일만에 석방이 되었다. 고소인인 오가의 아내가 고소를 취하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당신 처분대로 하겠어요."라고 했지만, 이미 자식들을 삶아 놓았는지 아이들은 "가정을 깨지 않도록 엄마를 용서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혼의 단안을 내렸다. 이미 부부 사이는 깨진 그릇인데 가정이라는 울타리로 싸 봤자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만 27년을 살아 온 부부사이는 이렇게 허망하면서도 간단하게 끝나 버렸다.
그 후 아내, 아니 전처의 소식을 누나들이나 주위 사람을 통해 가끔 듣게 됐다. 그녀는 최소한 2~3명의 남자와 동거, 혹은 내연관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상대는 모두 그녀보다 젊은 놈들이었고 그녀가 버림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몇달 후 그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물론 아들도 딸도 그 소식을 뒤늦게 알았는데 자살할 당시 그녀는 지방의 한 소도시에서 식당 종업원으로 일했었다고 한다.
이렇게 끝난 것으로 아들 딸도 나를 원망하는 것 같다. 나 역시 마음은 아팠다. 소식을 듣던 날 나는 혼자 사는 홀아비 방에서 울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흐뜨러져 버린 인연을 ......
이혼 후 내가 씹 한번 하려고 바둥거리는 동안 회사는 부도를 냈다. 누가 보기에도 회생할 가능성은 없었다. 완전히 도산한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아내의 간통이나 이혼, 나의 씹에 대한 집착과 실패등에 연관시키고 싶지 않다.
회사의 도산은 어쩌면 필연적이며 확률의 소산이다. 대한민국에서 중소기업은 1천개중 하나가 대기업으로 성장한다면 나머지 999개는 망한다. 그게 바로 확률인 것이다. 다만 업체마다의 차이라면 그중 어떤 기업은 1년 안에, 또는 10년 안에, 20년 안에 라는 식으로 생존기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마치 슬로트 머신이나 경마장에서 오래 배팅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번 혹은 몇번쯤은 대박이 터질 수 있지만 확률이라는 진리 앞에서 결국은 누구나 끝내는 털리고 마는 것이다.
그나마 경제적 여유는 있었기에 나는 우선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
우습게도 그 핵심은 "아내의 저주" 같은 임포텐스를 극복하고 씹을 할 수 있는것이었다.
나는 비아그라도 혼자 먹어 보았다. 그런데 좆이 서기도 전에 가슴부터 벌렁거리더니 심장이 조여 오는 듯한 통증까지 느껴졌다. 병원으로 갈까 하다가 그만 두었고 가까스로 진정이 되기는 했지만 다시 그런 시도는 않기로 했다.
병원도 몇군데를 가 보았다. 혈액검사, 소변검사, 어떤 곳은 엑스레이까지 찍고 자지와 불알을 만지작 거리고는 "신체적 결함은 없어 보이니 일단 심인성으로 판단된다. 정신과 치료를 권한다."고 했다.
그까짓 진단은 이미 나도 했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 앞에서 "아내가 서방질을 해서 충격을 받았다."는 식의 주저리를 까는 것도 싫었지만 그런 고백을 해서 치유된다는 보장도 없는 것 아닌가.
대안으로 의사는 주사 요법과 수술요법을 소개했다, 주사는 간편하고 지도를 받으면 혼자서도 실컷 놀 수 있다고 했다.
우선 시험적으로 맞아 봤다.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 좆은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지만 바늘로 찌르는 듯한 쓰라림이 오기 시작한다. 더구나 좆을 만져 보니 이를 뺄 때 마취주사를 맞고 혀가 안 움직이듯 감각이 없었다.
이런 상태로 어떤 보지에 꼽아도 내가 씹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술요법? ...... 설명을 듣고 나는 시험도 포기했다. 첫째 방법은 자지에 고형물을 집어 넣는 것이란다. 단점이라면 자지가 늘 발기한 것처럼 부풀어 있고유방확장수술처럼 이물질에 의한 염증이나 부작용도 가끔 일어난다고 한다.
그래서 새로 개발된 것이 공기주입식이란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자지에 풍선 기능의 고무관을 넣고 불알에 펌프를 장착해서 성교 전에 바람을 넣는 식이다.
나는 쓴웃음이 나왔다.
가령 내가 재혼을 한다. 헌장가라도 첫날밤을 지룬답시고 알몸이 된 후 화장실에서나 혹은 돌아 앉아서 불알을 꾹꾹 눌러가며 바람을 넣는다 ...... 앓느니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노력이나 모색이 모두 무위로 끝나면서 나는 적당히 체념 상태가 되었다.
체념이란 절망의 진통제 같은 것이다.
한번만이라도 꼭 씹을 하고야 말겠다는 오기와 집착이 가해 왔던 자학도 어느 정도 수그러 들었다. 정말 마음이 끌리는 여자, 섹시한 여자를 봐도 달관한 도인처럼 묵살해 버릴 수 있다. 케이블 TV에서 가끔 진한 포르노를 봐도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는다.
진통제의 약효라고도 할 수 있다. 살기에 편한 것이다.
그러나 진통제가 완전한 치료제는 아니듯 가끔 아쉬움과 외로움이 밀려 오기도 한다. 그것은 섹스를 떠나서도 일상생활에서 결핍을 느낄 때 더욱 그렇다.
끼니를 찾아 먹는 것, 설겆이, 세탁, 청소, 각종 공과금 납부 ...... 아내가 있을 때 나는 이런 것들이 사는데 꼭 필요한지조차 몰랐다. 혼자 살게 되면서 또 이런 것들이 얼마나 힘든 일이고 또 내가 그 방면에 무능한지도 절실하게 깨달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나는 재혼을 하고 싶었다.
돈만 빼 먹으려는 여자가 아니라면 아내를 부양하면서 수준 이상으로 살 경제력은 충분히 있다. 나이 든 것이 결점이 된다면 아내감을 살 수도 있다. 지금 내가 사는 이 강원도 시골만 해도 조선족 여자와 월남여자등 3명이 팔려오듯 농부의 아내가 되어 살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팔려 온 신세라 한들 좆도 안 서는 남자와 정상 생활이 지속될 수 있을까. 내가 완전 불구가 되어 똥오줌이나 받아 줄 아내감을 구한다면 모를까, 지금의 나는 그런 자격도 없는 것이다.
문제는 항상 나한테 있었다. 사실 임포텐스 현상만 없었다면 왕년의 놀던 가락을 활용해서 내가 마음에 드는 상대도 고를 수 있었을 것 같다.
이렇게 모든 욕구와 오기와 자학감을 체념으로 누르고 달래며 살와왔던 내가 단지 어린 시절의 아련하고 감미로운 추억만으로 뜻밖에 발기와 사정을 경험한 것이다.
그날 무슨 꿈을 꾸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여튼 나는 잠에서 깨자 손을 아래로 가져 갔다. 아, --- 좆은 서 있었다. 옛날 어른들이 "빚을 주어도 된다"는 새벽좆이 서 있었다. 나는 오랫만에 상쾌한 아침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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