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여전히 기억합니다 - 프롤로그

제목: 난 여전히 기억합니다.



안녕하세요?

그동안 게시판에서 열심히 보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글을 씁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소설을 쓴다는 것이 쉬운일이 아닌데다가 개인적으로는 말 그대로 창작에 의한 하드코어 야설 보다는 개인적인 경험을 담담하게 풀어 놓는 글을 좋아하기 때문에 왠지 옛기억을 너무 많이 떠올리게 될까봐 그동안은 읽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자판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이야기는 그간의 제 경험을 있는 그대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그리 자극적이지도, 많은 독자분들께서 기대하시는 재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일부러 흥분을 유발하기 위한 단어나 장면을 설정하지도 않을 것이고, 반대로 지나치게 딱딱하지도 않게, 그저 그 당시의 느낌과 이야기를 그대로 적어 나갈까 합니다.



끝으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지명이나 이름들은 대부분 실제와 실명을 사용하지만 주인공은 제 필명인 "질주폭풍"에서 한자씩 따서 "질풍"으로 하겠습니다.



[난 여전히 기억합니다 - 첫번째 기억]





1991년 늦 봄의 따사로운 오후...

난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이다.

지지고 볶는 남들 다 거치는 고3 생활을 뒤로 하고 난 미술학과 서양화 전공 신입생이 되었고, 집이 있는 대전에서 학교까지는 바이크를 타고 통학을 했다.



길가의 가로수들에 한껏 물기를 머금은 연두빛 잎새들이 따가와지기 시작하는 햇살을 손바닥 뻗듯이 가리고 있었고, 헬멧의 방풍고글을 때리는 바람은 지난 겨울의 칼바람과는 달리 이제 제법 열기를 뿜어낸다.



구불구불한 급코너가 산재한 국도이지만 이미 익숙한 길.

난 바이크의 스로틀을 활짝 연 상태에서 몸을 시트 좌우로 중심이동을 해가며 유유히 코너를 돌아 학교-집까지의 40Km를 30분만에 끊고 간혹 푸드덕 거리는 소리를 내는 캬뷰레이터를 손보기 위해 바이크를 집 근처 센터에 세웠다.



콜라 한잔 마시며 기다리라는 친한 센터 아저씨의 말을 뒤로 한채 담배 한개비를 입에 물고 난 온 몸을 옥죄고 있던 가죽 수트의 지퍼를 명치 밑까지 내리고 양 팔을 빼낸뒤 양 소매를 허리춤에 묶어 고정했다.



"흐읍~ 후~우~~"



입에서 빠져나가는 담배연기가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과 섞이며 어느 것이 구름인지 담배연기인지 모르게 섞여 퍼져간다.



그렇게 담배 절반쯤을 피우며 고개를 쳐들고 있던 내게 바이크 센터 바로 옆 건물의 3층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00 만화 애니메이션 학원]



"응? 언제 여기에 이런 학원이 생겼지?"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한다.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고 말을 하기 시작했을때부터 그림그리는 것이라면 사족을 못썼고 맨땅에 아이스크림을 먹고 남은 막대기로 온갖 만화의 주인공들을 그려대는 낙서를 좋아하다가 결국 미대까지 가게 된 나다.



당시 이런 학원은 정말 드물었기 때문에 그 신기함은 이루말할 수 없었고, 어느새 내 발은 그 건물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드르르~"



선팅이 된 유리문을 옆으로 밀고 들어가자 실내는 새로 들어 선 학원답게 밝고 화사하다.

액자에 담긴 그림들이 주욱 걸려있는데, 솔직히 그림들은 좀 그저그랬다.

이미 감각이 떨어진 지방신문에서나 볼 법한 시사만화와 당시 유행하던 유명 작가들의 그림을 모사한 그림들이 대부분이었다.



"어서 오세요~ 접수하시려고요?"



액자들을 무심히 살펴보던 내 뒤통수를 꼬집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는 것 처럼 보였던 카운터에서 긴 생머리 하나가 쓰윽 올라온다.



창을 등지고 카운터를 바라본 내 눈에 창으로 들어오는 밝은 햇살을 고스란히 받아 마치 빛이 나는 듯 환한 그녀의 얼굴이 가득 들어온다.



부드러운 생머리에 허리부분이 조여진 커피색 하늘거리는 원피스, 가늘고 다소곳하게 뻗은 긴 팔.

그 눈부시게 흰 팔을 따라 시선을 다시 위로 옮겨가다 보니 그녀의 뽀오얀 목선이 보인다.

피부가 희다.

아니, 햇살에 의한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희다못해 투명해 보이기 까지 한 그녀의 환한 얼굴은 날 어정쩡한 자세로 굳혀 버리고 말았다.





"등록...하러 오신거 아니세요?"





이런...





"아, 그게... 사실은 등록하는 것 까진 아니고요, 원래 그림그리는 것 좋아하는데 밖에 간판보고 그냥 한번 들어와 봤어요."



"아, 그러셨군요. 후후~ 전 또 등록하러 온 수강생인줄 알았어요"





그말은... 아마 막 오픈해서인지 수강생이 잘 안들어 오는 모양이다.

하긴 그러고 보니 이 아가씨 외에는 다른 사람들의 인기척도 없다.





"수업중이 아닌 모양이네요. 혼자 여기 지키고 계신거에요?"



"네... 아직은 홍보가 안되어 사람들이 거의 없어요. 오늘은 수업이 있는 날도 아니고... 근데 그림 그리는 분이시라고요?"





그림그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내 말에 양팔을 카운터에 걸치고 비스듬히 서있던 그녀가 큰 눈을 반짝 거리며 내쪽으로 몸을 기울여 온다.





"네, 원래 낙서하고 만화 그리는 것 좋아하다가 지금은 결국 미대갔어요"



"우와~ 미술대학 다니세요? 저도 미대가고 싶었는데... 좋겠다~"





이건 접대용 멘트가 아니다. 그녀의 눈동자는 정말 부럽다는 느낌을 그대로 담은채 내 눈을 똑바로 꿰뚫고 있었다.

갑자기 그 시선이 어색해서 잠시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다가 시선을 아래로 했는데...



V라인으로 적당히 파인 그녀의 원피스 앞자락 사이로 뽀오얀 속살이 살짝 드러나고 있었다.

팔짱끼듯 카운터에 올린 두팔에 의해 몸을 앞으로 기울인 그녀의 가슴이 눌려 뚜렷한 가슴의 계곡라인이 팽팽하게 드러났고, 귀여운 흰색의 브래지어 레이스가 살짝 엿보였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기 시작한다.





"흠흠~ 저기... 그쪽은 여기에서 일하세요?"



"아~ 저도 여기 학생인데요, 원장님이 카운터에서 접수받아야 할 직원을 뽑아야 하는데, 괜찮으면 학원비 면제해줄테니 수업 없는 날에 좀 봐달라고 해서요."





흠... 알만하다. 이거 미술학원에서도 많이 써먹는 방법이지.





"아, 그렇군요. 이거 미안하네요. 등록하러 온게 아니라서..."



"호호호~ 괜찮아요^^ 그렇지 않아도 하루종일 사람도 안오고 심심해서 누군가 좀 나타났으면 하던 참이었는데... 참, 혹시 몇학년이세요?"





"아, 저 신입생이에요. 이번에 입학했죠"



"어? 그럼 나랑 동갑이네, 재수한거 아니죠?





엇, 동갑이랜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는 얼굴에 엷게 화장을 한데다가 좀 성숙해 보이는 옷을 입고 있어서 몰랐는데, 가만히 보니 내 또래라는 것을 알겠다.(제가 원래 여자를 보는 눈치가 좀 없는 편이라서^^)



갑자기 그녀가 카운터의 덧문을 열고 나오더니 미니 냉장고에서 사이다 두잔을 따라서 창가 옆의 응접용 테이블 위에 놓곤 날 부른다.



"잠깐 앉아서 시원한 것 마셔...요... 아니, 마실래?"



씨익~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동갑이란 것을 안 순간부터 그녀는 눈에 띄게 얼굴이 밝아졌고 더 편안해 보였다.

뭐랄까, 약간의 경계심을 풀어 놓았다고나 할까?



"동갑이라니 말 놓는게 편하겠지?"



내 말에 그녀는 대답 대신 생글거리며 사이다잔을 살짝 들어 올린다.

가죽수트안에서 흘렸던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다가 시원한 사이다 한 잔에 이내 서늘한 기운이 등골을 파고 든다.



음료수를 마시며 우린 서로에 대해 몇가지를 더 알게 되었다.

그녀는 어렸을때부터 그림이 너무 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도 그랬고, 어머님의 반대가 너무 심해 포기를 한뒤 한 전문대학교의 의상학과에 진학을 했지만, 아무래도 그림을 포기할 수 없어서 부모님 몰래 학교는 휴학을 하고 이 학원에 나와 그림을 배우며 청0문화산업대학교의 만화학과에 진학하려고 준비중이라고 한다.



서로 경계심을 풀어서일까?

푹신한 소파에 기대에 앉아 난 그동안 제대로 못보고 있던 그녀의 모습을 천천히 볼 수 있었다.



첫인상은 얼굴이 무척 작다는 것이다.

키는 아마도 약 163정도?

얼굴이 작은데다가 전체적으로 마른 몸매이여서 실제 키보다는 훨씬 커보이는 몸매였고 특히 팔 다리가 가늘어서 무척 보기 좋은 몸매인데다가 하늘거리는 원피스는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어서 청순해 보이는 인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눈이 무척 큰편이어서 양옆으로 가지런하게 가름마가 타진 머릿결 사이로 그녀의 눈동자는 까맣게 빛나고 있었고, 아담한 코, 도톰하고 시원스럽게 보이는 입매, 가늘고 긴 목선이 귀엽기도 하면서 나이에 비해서는

성숙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빚어 내고 있다.



좀 의외였던 것은 V넥으로 파인 그녀의 원피스가 간신히 가리고 있는 그녀의 가슴.

한눈에 보기에도 봉긋한 그녀의 가슴은 가느다란 몸매와는 대조적으로 부풀어 있다.

고등학생 시절 짝사랑하는 여학생도 있었고, 잠시 여자친구가 있었던 적이 있긴 했지만, 아직 제대로 여자에 대한 경험이 없었던 나로써는 그 봉긋한 가슴라인에도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내 눈길이 그녀의 가슴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마자 난 어쩔줄 몰라 하다가 테이블에 놓인 음료수잔을 잽싸게 들어 입에 가져다 댔는데...



"내 옷 이상해요? 계속 보고있네?"





순간 잔을 들고 있던 내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은근한 내 눈길을 들켜버린 것 같아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고 있는 것이다.



"이 옷 이상한가보죠? 힝~ 역시 아직까진 아닌가?"



이게 무슨 소리지?





"사실 이 옷 제가 만든거거든요. 학교들어가서 두번째로 만들어 본건데... 역시 아직은 실력도 안되고 그냥 내 맘대로 만들어 본거라... 휴~ 역시 티가 나나봐 어떡해~~"



헉, 이 옷이 직접 만든거라고?





"어, 그게 아닌데. 그 옷 직접 만든거라고? 와~ 대단하네. 난 정말 몰랐어!"



"정말? 이상해 보이지 않았어? 난 또 옷이 이상해 보인걸줄 알고 무지 창피했잖아...."

"근데 왜 그렇게 빤히 보고 있었던 건데?"



이런... 들켰나? 일단 둘러대야겠지?



"아, 그게 아니라 너 너무 예뻐보여서... "



.......................................



젠장, 둘러댄다는게 진심을 말하고 말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의 시간... 실제로는 무척 짧은 순간이었지만 진짜 이마에서 땀이 삐질 하고 나오는 어쩔 줄 모르는 답답함을 깬 것은 그녀.



"깔깔깔~~"



우스워죽겠다는 듯이 그녀는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한참을 웃던 그녀가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말하길



"첨에 가죽옷 입고 들어오길래 웬 날라리인가 했더니 보기보단 순진하네 호호~"



헉, 날라리...

하긴... 그렇게 생각할만도 했다.

흰색바탕에 빨간색과 검정색으로 줄무늬가 들어간 온로드 레이스용 원피스 가죽 수트에 같은 색깔의 라이딩 부츠, 거기에 플라스틱으로된 보호대가 부착된 가죽장갑까지, 누구라도 언뜻 보면 생날라리 처럼 볼 수도 있는 모습이다.



"...."



내가 아무말 못하고 있자 그녀가 또 입을 뗀다.



"헤헤~ 농담인데 금방 얼굴빛이 바뀌네? 첨엔 날라리인줄 알았더니 이젠 순진텡이로 보이려구?"



"자꾸 놀리다간 이 오빠한테 한대 맞는다!"





그녀의 자연스러운 반응에 힘입어 나도 많이 마음이 편해져 역습 한 방을 날렸다.



"킥킥킥~ 너~ 그래도 하나도 안무서워 ㅎㅎㅎ"





헤여~~ 털썩.

역시 여자들 말빨은 아직 경험이 부족한 나로써는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일단 포기하고 나니 맘이 편해졌다.

맘이 편하니 말도 이젠 편하게 나왔고 그렇게 우린 한시간 가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신기한 것은 이상하게 그녀와 난 마음이나 생각하는 것이 참 잘맞았고, 난 그녀의 밝고 순수한 분위기가, 그녀는 보통 그 또래의 다른 친구들과는 약간 특이한 내 특기나 바이크 취미, 개인적인 영화취향등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슬슬 하던 대화의 소재가 말라갈 무렵, 어느새 쨍쨍하던 햇살은 청량한 푸른빛에서 서서히 붉은 기운을 머금어 가기 시작했고, 바이크의 수리도 이미 진작에 끝났을 거란 생각에 난 소파에 뭍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내가 일어나자 그녀도 엉겹결에 벌떡 일어섰고 우린 낮은 응접용 유리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둔채 딱 눈이 마주쳤다.



아까는 나 혼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이번에는 그녀의 눈빛도 일렁이고 있었다.

일단 일어선 이상 인사를 하고 나가야 했지만 나나 그녀나 서로의 눈빛을 읽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를 망설이다가 먼저 입을 뗀 것은 나였다.



"저... 내일 몇시에 끝나? 괜찮으면 나 또 와도 될까?"



"...."



그녀가 말이 없다.

너무 성급했나?

갑자기 무지 당황스러워서 문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



"내일은 수업있으니까 들어오진 말고... 요앞에 와서 전화해. 나 경륜이야. 김 경륜"





전화번호는 그렇지 않아도 아까 학원 홍보용 명함을 건네 받아서 알고있다.

카운터에 있으니 자기가 전화를 받게 될 꺼라는 얘기다.





"김 경륜...."



난 이상하게 말이 나오질 않아 이름만 한번 되뇌인 후 그녀를 향해 멋쩍은 웃음을 한번 지어 보인뒤 문을 나서버렸다.



진하게 선팅된 미닫이 유리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오며 왜 내일 보자는 말 한마디가 안나올까 하는 후회를 하며 건물 밖으로 나왔고, 답답한 마음에 담배 한개피를 입에 물고 나니 아까처럼 다시 학원 간판이 있는 3층 창문쪽을 바라본 순간...



창을 열고 나를 바라보며 시원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한가득 들어왔다.



그녀는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입모양으로 "잘가~"라고 말을 했고, 마침내 나도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만들어 귀에 갖다대 내일 전화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뒤돌아 바이크 센터로 가는 내 눈속에는 돌아서는 순간 보인, 활짝웃는 그녀의 새하얗고 고른 치아가 새겨져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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