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 22부

태어난 이래 살아가기가 힘겹다고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한 집에 사는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맞대는 시간이 거의 없다는 것은 놀랍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내가 아침에 운동을 하러 나간 사이에 유미 누나는 학교에 나갔고, 밤에는 전철이 끊기기 직전에 집에 돌아왔다. 주말에도 그녀는 엄마와 대청소를 한다든지 하는 특별한 일이 없는 때에는 책을 챙겨 학교 도서관에 나갔고, 그녀가 집에 있게 되는 때에는 내가 밖으로 나갔다.



굳게 결심을 하고 있었지만, 역시 무우 자르듯 감정을 정리할 수는 없었다. 밤에 가끔 누나가 문을 열고 나와 복도를 서성일 때면, 내 모든 신경은 내 방의 문에 집중되어 있었다. 혹시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을까? 하지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그런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았다. 그녀도 나만큼 마음을 굳게 먹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도 다행히 유진의 공부만은 빠지지 않고 챙겨 주었고, 그것만이 그녀와 나의 유일한 공통 관심사였다. 그렇게 한 달 남짓이 지났다.



“박 은혜 선생님요? 약속이 되어 있으세요?”

“제가 한 십분 쯤 빨리 왔네요.”



“박 선생님은 연습실에 계신대요... 거기는 과생들 말고는 출입금지라서....”

“기다리죠, 뭐.”



“저기 복도 돌면 선생님 방 있어요. 거기서 기다리세요.”

“참 미인이세요. 친절하시기도 하고...”



‘단순하게 살자’는 모토를 실천하려고 애쓰고 있었던 때라, 처음 본 여자한테도 쉽게 농담이 나왔다. 고학년으로 보이는 그녀의 볼에 미소가 어리를 걸 보고 돌아섰다.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본 게, 선미 누나의 결혼식에서였으니 벌써 두 달이 훌쩍 지난 후였다.



선생님의 방은 따뜻했지만,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초겨울 풍경은 쓸쓸하기 그지 없었다. 말라붙은 채 간신히 매달려 있는 나뭇잎 때문에 더 가냘프게 보이는 가지들이 창문 바로 앞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잠시, 그 풍경에 넋을 놓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엉덩이를 탁 두드렸다.



“뭘 보고 있니? 예쁜 아가씨라도 지나가?”



보라색의 타이즈를 입은 박 은혜 선생님이 서 있었다. 목 아래 쪽으로 내려가려는 시선을 억지로 잡아,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땀이 송글송글 맺힌 이마와 가닥진 머리카락의 그녀는 생동감이 넘쳤다.



“잘 계셨어요?”

“미안, 좀 늦었지?”



“괜찮아요.”

“뭐 마실래?”



“아뇨. 별로...”

“조금만 더 밖에 보고 있을래? 나 옷 좀 갈아입어야겠다.”



“그런 건 무용하는 분들만 입는 건줄 알았어요.”

“그냥 운동복일 뿐이야.”



“잘 어울리세요.”

“못된 상상 하는 거 아니야?”



그녀가 사라진 문이 빼꼼이 열려 있었다. 아마 탈의실 겸 샤워실인 듯 했다. 물줄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니, 기분이 좀 묘하긴 했다. 문을 좀 꼭 닫지 않고...!



몇 걸음만 걸으면 그 문 틈으로 알몸으로 샤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터였다. 벗은 박 은혜 선생님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지만,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예전 같으면 어떻게든 그걸 훔쳐보려고 했을 텐데... 그 때는 그런 성의마저 보이기가 귀찮았다.



“됐다. 나가자.”



여자의 변신은 감탄스러웠다. 목을 의도적으로 넓게 파 놓은 헐렁한 면티 덕분에 과감하게 노출된 하얀 피부와 브래져의 끈이 보일 때는 무척이나 야하게 보이더니, 그 위에 롱코트 하나만 걸친 것 뿐인데, 누가 봐도 지성적인 캐리어 우먼이었다.



“왜 웃어?”

“조금 놀랐어요. 누나 생각하면 그 공포의 하얀 츄리닝만 떠올랐거든요.”



“이상하다. 안 그런 모습도 꽤 보여준 것 같은데.”

“가끔 그 분홍색 비키니도 기억나요.”



“내 생각을 조금은 하나 봐?”

“더 많이 생각날 것 같아요. 앞으로는.”



“어떡하지? 볼 날이 얼마 없는데?”

“어디 다른 데 가세요?”



레스토랑은 꽤 고급스러워 보였다. 칙칙한 파커를 입은 사람도 나 밖에 없는 듯... 미리 예약을 해 놓았는지, 종업원이 우리를 전망이 좋은 방으로 안내했다. 그녀가 외투를 벗자 방 전체가 환해지는 느낌...



“다음 학기부터는 미국에 있을 거야.”

“잘 됐네요, 축하드려요. 미국 어디예요?”



“뉴욕.”

“얼마나 오래 계실 거예요?”



“글쎄다. 2년 계획하고 있는데, 기회가 되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고...”

“국부 유출이네요.”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나라 미인 한 명을 미국으로 뺏기는 거잖아요. 우리나라의 미모 지수가 낮아지니까...”



“호호호호. 묘한 칭찬이네.”

“기분 좋으시죠?”



“그래. 기분 좋다.”

“그걸로 밥값 한 셈 치고 염치없지만 얻어먹을게요. 사실 은사님한테 제자가 대접해야 맞는데... 쩝.”



“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 많이 먹어라.”



나이프로 고기를 자르느라 꿈틀거리는 그녀의 쇄골이 묘하게 나를 자극했다. 촛불에 반짝거리는 그녀의 붉은 입술이 앞에 놓인 커다란 와인 잔하고 기가 막히게 어울려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헛생각이 꿈틀거렸다. 여자는 온몸이 무기라더니...



“너 표정이 별로 밝아 보이지 않는다.”

“.....”



“예전의 당차고 늠름한 김 수호는 어디로 갔을까?”

“저도 나이가 있잖아요.”



“여자 때문이지?”

일부러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네, 근데 지금은 괜찮아요. 다 지난 일이라...”

“그 여자니? 해변에서 소리 지르게 한 여자...”



“맞아요.”

“그 때 네가 부른 이름 기억하고 있어. 유미였지?”



갑자기 등덜미가 서늘해졌다. 그런 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고개를 끄덕여 맞다는 표시를 해 주었다.



“근데 말야, 결혼식 때 봤더니 너네 큰 누나 이름이 선미더라. 그리고 나중에 광식이 오빠한테 물어봤더니 결혼식 때 잠깐 봤던 작은 누나 이름이...”



숨이 턱 막혔다. 선생님이 고개를 들어 내게 싱긋 미소를 짓더니, 다시 고기 접시로 시선을 돌려 칼질을 계속했다.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그래가지고 많이 먹을 수 있겠어?”

“......”



“그 여자가 작은 누나 맞지?”



알고 있었구나... 오래 전부터...



“네.”



선생님이 다 자른 고기 접시를 내 접시와 바꿔 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칼질을 계속 했다. 식욕이 사라진 나는 포크 대신 와인 잔을 손에 쥐었다.



“괜찮아. 내가 광식이 오빠하고 가까운 친척도 아니고... 그렇게 입이 싸지도 않아.”

“우습죠?”



“아니, 아름다워.”

“지금은 다 원래대로 됐어요. 누나한테 애인 생겼어요.”



“사랑하니?”

“그 때는요.”



“지금은?”

“제가 사춘기잖아요. 하하하. 사춘기 때는 다 그런 것 아니예요?”



“아직 못 잊는다는 뜻이구나. 누나는?”

“네?”



“누나도 널 사랑하느냐고.”

“그 때는... 그랬어요.”



“누나도 사춘기였나 보구나. 호호호호.”



그녀의 웃음이 비위를 자극했다. 거의 한 달 이상을 마음 속에서 유미 누나를 밀어내려 애쓰고 있던 차라, 그녀와 나와의 관계가 화제가 되는 것부터가 견디기 힘들었다.



“우리 누나 이야기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

“그래, 그래도 이 말만은 하고 싶다.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신중한 법이거든. 사랑한다는 말 쉽게 하지도 못하지만, 사랑한 사람 쉽게 잊지도 못해. 최소한... 남자보다는 그래.”



그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가끔 했다. 유미 누나도 나처럼 마음 속에 있는 김 수호를 밀어내기 위해 힘겨운 투쟁을 하고 있을지도... 그래서 나한테 그렇게 쌀쌀 맞게 구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흔들거리는 의지를 붙잡기가 참 힘들었지만, 누나의 마음이 어떻든 바뀔 것이 없었다. 어쨌든, 유미 누나도, 나도 바른 선택을 한 것이었다.



“남자친구 없으세요?”

“있으면 너하고 지금 이러고 있겠니?”



“쩝... 나는 대타였구나.”

“영광인줄 알아라. 지금이라도 전화하면 나올 남자들이 한 트럭이야.”



“황공하옵니다, 마마.”

“사제지간은 근친만큼 나쁜 걸까?”



“둘 다 나쁘지 않아요. 인정받지 못해 그렇지.”



단호한 내 대답에 선생님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도 잘못한 건 아니구나. 그 때 체육관에서 네가 남자로 보이더라. 멋있었어, 책임감도 있고.”

“저도 그 때 누나가 여자로 보였어요. 불쌍한 여자, 우헤헤헤.”



“못된 녀석.”

“죄송해요.”



“솔직히 말해 봐.”

“뭘요?”



“내가 지금 여자로 보이니, 은사님으로 보이니?”

“누나로 보여요.”



“피해가는 재주가 놀랍네?”

“고등학교를 좋은 데 나와서 그래요.”



솔직히 돌이 아닌 이상, 선생님이 우리 관계에 대해 뭔가 더 진전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하고 마저도 뭔가 꼬이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냥 선생님은 선생님인 게 좋은 거야! 단순하게 살자!



“여자 친구 소개시켜 줄까?”

“다음에 꼭 부탁드릴게요.”



작업하러 들어가야 한다는 그녀를 바래다주러 다시 캠퍼스 안으로 향했다. 이차를 가자고 하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웠다.



“오늘 저녁 괜찮았어?”

“포식 했어요. 덕분에...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밥 값 한 번 할래?”

“언제요?”



“종강하면 연락할게. 이제 방을 비워줘야 하니까... 와서 힘 한 번 써라.”

“그럴게요.”



“수호야!”

“네?”



“네가 옛날 같으면 좋겠어, 다음에 만날 때는.”

“노력할게요.”





기말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토요일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오빠를 면회하고 싶다는 유진을 데리고 성수가 복무하는 부대를 찾아갔다. 유진의 말대로 ‘철들고 나서 버스 여행은 처음’이라 그런지, 차창 밖의 풍경에 정신을 쏙 빼고 있더니, 슬며시 몸을 내게 기대왔다. 머리카락에서 나는 상큼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유진아.”

“왜요?”



“너 보기에 내가, 너 처음 만날 때하고 달라진 것 같으니?”

“네.”



“어떻게?”

“음 뭐랄까? 그 때는 메뚜기같이 팔딱거렸는데, 지금은 꼭 굼벵이 같아요.”



“얘가 비유를 해도 꼭...”

“히히히, 내가 생각해도 딱 맞는 표현이네.”



“계속 경치나 보세요, 아가씨.”

“오빠 걱정하지 마. 내가 항상 곁에 있어 줄께요.”



눈치가 빠른 아이니, 유미 누나와 나 사이에 생긴 이상한 기류를 감지했을 것이다. 그래도 거기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묻지 않는 영특함...



“생뚱 맞기는... 뭐 잘못 먹었지?”

“호호호. 너무 재밌다, 오빠랑 데이트하니까...”



전에 빈 손으로 왔다는 타박을 들었던 터라, 민통선 아래에 있는 마지막 동네에서 소주 몇 병과 닭을 한 마리 튀겨, 택시를 탔다. 유진이를 본 성수는 그저 ‘왔어?’하고 한마디 할 뿐이었다. 유진이도 그저 ‘잘 있었어?’ 하고 한마디... 하지만 그 정도라도 예전에는 서로 나눠보지 못한 인사였을 것이다. 사람들이 없는 연병장 근처에 돗자리를 깔고, 다른 면회객들이 흔히 할 법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진아. 잠깐 성수하고 이야기할 게 있는데......”



유진이가 구경을 하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성수의 눈이 모습이 안보일 때까지 그 애의 뒷모습을 좇았다.



“유진이 많이 변한 것 같다. 고맙다, 수호야.”

“그래... 이제 그냥 둬도 잘못되지는 않을 거야.”



“뭐 하러 왔어? 민간인이 군대를 이렇게 뻔질나게 드나들어도 되는 거냐?”

“유진이가 너 보고 싶다고 그래서... 나도 할 말이 있고.”



“뭔데?”

“도대체... 아직도 내가 모르고 있는 게 뭔지 궁금해.”



“새엄마 이야기냐?”

“응, 그 여자랑 또 잤다. 좋은 구경도 하고...”



“흐흐흐.”

“웃지마, 임마. 이런 이야기하면 기분 나쁘겠지만, 네 아버지라는 분, 이해 못하겠어.”



“너가 제일 경멸하는 스타일인 거 맞아.”

“너도 다 알고 있었지?”



“우리 엄마가... 내 친엄마 말야.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며...”



“자살했어. 이유는.... 말하고 싶지 않다.”

“그...그랬어?”



성수가 내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안 어울려.”

“좋은 이야기는 아니잖아.”



“그 여자 사는 거 봤지? 몇 년 지나면 그 여자도 엄마 꼴 날 걸? 우리 아빠한테... 그 여자는 무기일 뿐이야. 낡으면 신형으로 교체해야지...크크크.”

“무섭다, 너네 아버지.”



“치졸한 거지, 야. 그걸 무섭다고 하면 웃기는 거지. 나는 우리 아빠가 나하고 유진이를 왜 낳나 모르겠어. 세상에 아버지는 두 종류가 있거든? 너네 아버지 같은 분하고, 우리 아빠 같은 사람하고... 크흐흐흐.”



우리 아빠도 썩 훌륭하진 않아... 배다른 자식이 하나 있거든...! 그냥 웃어 주었다.



“그래서, 성수 네가 짠~하고 나타나서 구해 가려고? 제대하고 나서?”

“잘 모르겠다. 그 여자가 뭘 원할 지... 지금은 아빠한테서 그 여자를 빼낼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것 같아. 나 여기 있는 동안 누군가 나타나면 잘 된 거고, 제대할 때까지 그대로 있으면... 나라도 용을 써 봐야지.”



“내가 보기에는... 그 여자는 벗어나려고 하지 않을 것 같아.”

“그게 문제다. 좀 지나면 좋은 방법이 생각나겠지.”



“아이고, 나라 지키는 놈이 헛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씨발놈이... 열심히 나라 지키는 사람한테 나타나서, 니 엄마하고 씹질 했다고 자랑하는 놈은 어떻고?”



“하하하, 진짜 미안하다. 근데 왜 잘못했다는 생각이 안 들지?”

“너라도 잘 해라. 그 여자한테...”



유진이가 나타나고 이번에는 내가 부대 구경을 할 차례였다. 나지막한 벽돌 건물 말고는 그다지 구경할 게 없었지만, 시간을 주기 위해 두어 바퀴를 돌았다. 무슨 심각한 이야기를 했는지, 내가 다시 돌아갔을 때 유진이의 눈에서 얼핏 눈물 자국을 본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택시를 타고 나왔을 때는 저녁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중국집에 가서 간단히 저녁을 때우고 의정부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데, 이 맹랑한 녀석이...



“오빠, 원래 면회 오면 하루 자고 가는 거잖아요?”

“누가 그래?”



“피이~, 드라마나 소설 같은 데 보면 다 그렇잖아요. 차가 끊겨서 허름한 여관에 갔는데, 방이 하나 밖에 없어서 둘이 자게 되고... 처음에는 멀찍이 떨어져서 자다가 나중에는 응응 하게 되고, 그래서 서로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되잖아요. 햐~! 너무 아름답다!”

“아주 소설을 써라.”



“오빠, 우리도 자고 가요.”

“TV가 애들 망친다더니... 쯧쯧. 조그만 게 까져 가지고...”



“응? 내일 일요일이잖아. 나 집에 들어가기 싫어요. 끔찍해.”

“우리 집에 가자. 재워줄게.”



“아 증말, 멋대가리도 없게...”

“그럼 그냥 집에 겨들어가 자던지.”



엄마한테 유진이가 집에 갈 거라고 미리 전화를 해 두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가 열한 시... 신난다는 듯 내 손을 끌고 가던 유진이가 발걸음을 멈추더니 옆에 난 작은 골목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야~ 왜 이래?”

“쉬! 오빠!”



나도 고개만 내밀고 유진이가 보는 쪽을 쳐다보았다. 우리 집 대문 앞에 서 있는 두 사람... 진규 군과 유미 누나였다. 학교에서 집까지 진규 군이 누나를 에스코트한 것이다. 둘이 마주 서서 얘기하는 모습을 보자, 어쩔 수 없이 씁쓸한 감정이 가슴을 짓눌어왔다. 축복해야할 모습인데...



진규 군의 두 팔이 유미 누나의 어깨 위에 올려지는가 싶더니, 그의 입술이 다가가 유미 누나의 볼에 닿았다 떨어졌다. 갑자기 가슴 아래에서 묵직한 통증이 밀려 올라왔다.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까? 그저 심란한 기분... 진규 군이 우리 쪽을 향해 걸어오고 유미 누나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골목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우리 앞을 지나 사라지는 진규 군...



“멋있다, 저 오빠.”



그래... 멋있는 사람이지. 삼년 동안 한 여자만 쫓아다녔으니까... 언젠가는 올거라 생각했던 그 장면이 왜 그렇게 서글펐는지... 그의 입술을 받아들인 유미 누나가 야속하기도 하고... 꼭 순진하고 착실한 모범 소녀처럼 엄마한테 인사를 드리는 유진이의 모습을 보자 기가 찼다. 저 계집애는 진짜 카멜레온이야. 엄마는 유진이를 위해 손님 방에 이미 이부자리를 준비해 놓고 선미 누나의 잠옷까지 가져다 놓고 계셨다.



“유미 언니 보러 가야지!”

“유진아.”



“네?”

“언니한테... 조금 전에 봤다는 거 얘기하지 마.”



“오빠는... 내가 맹추야?”



유미 누나의 볼에 붙었던 그 입술이 언젠가는 그녀의 입술로 향할 것이고, 그 다음에는 포옹도 하고 더듬기도 하겠지? 그리고 섹스도 하고... 지금은 유미 누나의 마음 한 구석에만 있는 진규 군이 그 때 쯤에는 그녀 전부를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잊을 거야. 어쩌면 과거 나와의 일을 생각하면서, 얼굴을 붉힐 만큼 부끄러워할 수도 있겠지?



살아간다는 건 다 그런 것이다, 젠장! 한 십년 지난 후에 유미 누나도 나도 각자 아이들을 데리고 부모님 앞에서 만나는 장면이 떠올랐다. 지금 고모와 삼촌 사이 정도 되려나? 각자 생활에 바쁘고, 형제애도 그다지 남아있지 않은 것 같은 그 모습. 그 때 내 옆에는 어떤 여자가 있을까?



잊자, 잊어! 성수 말대로... 아무 줄이나 타고 가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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