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모 - 5부



재석이와의 사건 자체는 아무런 죄의식을 주지 않았다. 결혼의 의무는 쌍방 모두에게 있는 것이지 나만의 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결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자꾸 시선이 가고 남자로 의식하게 되었다. 한 집에 남편이 아닌 남자와 같이 산다는 것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그 남자가 반지를 해준다. 내 얼굴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그것을 딸들이나 남자가 보고 이상해 하지 않을지 걱정될 만큼 가슴이 떨렸다. 그리고는 아무도 모르게 답례로 시계를 산다.



남자들은 마음에 여러 개의 방이 있어 각각의 방에 여자를 담을 수 있기 때문에 바람을 피우는 본능이 있고, 여자는 방이 하나라서 바람을 피우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여자의 바람은 바람이 아니다. 그것은 이별이다. 내 안에서 남편의 자리가 비워지고, 다른 남자가 들어왔다.



그것이 문제였다. 재석이가 상처받은 것 같지 않아 다행이었던 것이 그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하게 되었고, 그의 앞에서 여자로 있고 싶은 자신과 싸워야 했다. 한마디를 말해도 여자로서 말하게 되고,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는 기분으로 그가 오기까지 잠들지 못했다.





바람이 분다. 제주는 삼다도라고도 불렸다. 삼다. 삼무. 삼다는 제주의 현실, 척박한 환경을 말하는 것으로, 삼무는 그런 삶 속에서도 인간답고자 하는 정신이 아닐까 한다. 제주의 삼다는 이제 삼다가 아니다. 여자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다. 삼무도 더 이상은 아니었다. 문이 없는 집은 거의 없었다. 세상이 변하듯 사람도 변하고, 인간의 자존심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붉은 석양 때문이었다. 나도 모르게 속마음을 이야기 했다. 기뻤고, 고마웠다. 그리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말은 할 수 없었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나로서는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35년의 나이차나 엄마라는 입장은 작은 문제였다. 엄마로서 행동하지도 않았고, 순수하게 사랑으로 시작된 것도 아니다.



여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악행을 서슴지 않던 그는 정말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운 순간에서 감싸준다. 그의 키스는 다음 내가 하고 싶은 말의 대답이 되었다. 그것으로 나는 사랑을 구걸하지 않아도 되었다.





제주에서 돌아와서 현주에게 들으니, 남편 역시 이틀 동안 안 들어와서 연주랑 둘이 지냈다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린다. 현주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다른 생각을 했다.



남편은 집에 내려가는 기차에서 만났었다. 한때는 우리 땅을 지나지 않고는 서울을 갈수 없다고 할 정도로 대구에서는 알아주는 부자였기 때문에 그 당시로는 드물게 대학까지 진학해 서울로 유학을 왔었다. 그리고 방학 때면 집으로 내려가곤 했었는데, 당시 집이 부산이었던 남편을 알게 됐다. 잘생긴 외모, 친절한 매너에 상당히 끌렸다. 방학이 끝나고 올라오는 차에서 다시 보게 되자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교제를 시작했다.



남편을 사랑했다. 남편의 부모님은 작은 어선 한척을 가진 그래도 부산에서는 먹고 살만한 형편이지만, 우리 집에서 보기에는 너무 처지는 혼처라며 반대가 심하셨다.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 결혼이었기에 남부럽지 않게, 부모님께 당당할 수 있는 결혼생활을 하고 싶었다. 사랑이 증오가 되었다. 이제와 생각하니 증오가 있을 때까지는 그래도 낳다. 이틀 동안 그 여자에게 가 있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약간의 씁쓸함만 느껴질 뿐이다. 그 씁쓸함조차 남편에 대한 것이 아니라 끝나가는 결혼생활에 대한 씁쓸함이었다.



“근데..엄마..”



“응?”



“재석이가 좋아? 예전에는 안 그랬잖아?”



“응...애가...착하네..”



“그것뿐?”



“그래도...너희들 시집가고 나면....그 애랑 살지도 모르니까...”



“엄마는~ 나랑 살면 되지~”



“시집이나 가..”



재석이가 좋다. 잘생긴 외모, 다정한 것이나 진실해 보이는 것은 남편을 닮았다. 아마도 그런 것들이 내가 선호하는 스타일인 모양이다. 사랑했던 남편의 변화를 오랜 시간 지켜보며 겪었던 고통이 아직도 선명한 만큼 너무 깊이 빠지지 말아야겠다는 경계의 마음도 생기지만 그런 자기보호의 감정을 뚫고 들어오는 매력이 있었다. 그것이 50살 아줌마의 심장을 흔들어 놓았다. 그럴 때면 아직 여자구나 싶다.



“참 수요일 1시에 부녀회 있다고 전화 왔었어..”



“어디서?”



“응...동원회관이라던데? 무슨 부녀회를 그런데서 해?”





이 지역은 몇 개의 파벌이 있다. 삼성 레미안 단지와 롯데 캐슬 단지가 가장 크고, 그 다음으로 주공단지다. 다른 단지들은 크기가 작아서 그 영향력이 작았다. 부녀회의 파워는 소비능력에서 나오는데, 레미안과 캐슬의 세대주는 30대에서 50대 사이의 중산층 이상의 소득을 가졌고, 또 쓸 곳도 많았다. 그런 만큼 이권이 컸다. 그리고 그런 이권을 관리하는 곳이 부녀회였다.



부녀회 역시 사람들이 운영하는 만큼 정치적이다. 지금 시대에 맞벌이 부부가 많은 만큼 저녁에 모여야 많은 참석률을 보일 터인데, 평일 오후 1시에 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술수였다. 많은 참석률은 권력의 분산을 야기한다. 그리고 사회생활 하는 여자들인 만큼 젊다고 만만하지 않았고, 평생 집오리였던 그들로써는 같이 어울리고 싶지 않은 열등감도 있었다.



젊은 여성들,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모르는 사람들에게 언니 언니 하며 밑에 사람임을 자처하기 싫었고, 자신이 이 아파트에 오래 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더 높은 곳을 원했고,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따라서 이런 곳의 일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결국은 부녀회는 40세 이상 10년 가까이 거주했던 초창기 멤버들이 주도했다. 그래도 이 지역이 제법 살기도 좋고, 학군도 좋아 150세대씩 20단지 3000세대정도 중 아직까지 살고 있는 사람들이 300세대 이상은 되었다.



기존의 300세대와 새롭게 이사와 부녀회에 적극 참여하는 부인들이 300세대 정도였다. 따라서 한번 모이면 600명은 되는 대식구였고, 일반 식당 같은 곳에서는 모일수가 없었다.





“언니~ 여기~”



거대한 홀을 가득 매운 여자들, 그들이 내는 소음은 공사판보다 시끄러웠다. 어디에 앉아야 하나 하고 둘러보는데, 우리 단지 여자들이 테이블 4개 정도에 모여 있었다. 그나마 친한 편이라 그쪽으로 앉았다.



“제주도 갔었다며?”



“응.”



“누구랑?”



“재석이랑.”



“어머~ 좋았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아들하나 낳는 건데..”



“지금이라도 낳아~”



이 시끄러운 여자도 딸만 둘이다. 재석이가 5살 때 유치원에 보냈을 때 큰딸 지수가 7살로 그 유치원에 다녔고, 재석이가 7살 때 둘째딸 지선이가 7살로 역시 같은 유치원에 다녔다. 그 후 지선이랑 재석이는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같은 반이었던 적도 2번이나 있어 가장 친한 편이다. 아니 친한척한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럴까? 내 친구 중에 늦둥이로 하나 낳은 애가 있기는 한데..호호호.”



“그럼 그러면 되겠네..”



“언니는~ 말이 그렇다는 거지...그리고 뭐 애는 혼자 낳나..”



“왜? 요즘 안 좋아?”



“아유~ 나도 결혼 20년차야..그이가 뭐라고 그러는 줄 알아? 나랑 자면 근친이래..가족이랑 어떻게 그걸 하냐고 하더라고..참 네 어이가 없어서..”



“호호호. 야 그 정도는 양반이다. 우리 그이는 매일 술에 절어서 들어와. 하도 술 냄새가 역겨워 옆에서 잘 수가 있어야지.. ”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사람이 잠이라도 편하게 자야 하는데..도저히 같이 못자겠더라고..그래서 아들 방에 가서 잤지..”



“아들방?”



“응.”



“아..우리 지수 좋다고 따라다니던 그 애? 혁재?”



“그래..그 녀석..아직 고1인데, 안고 잘만 하더라~”



“남편보다 좋아?”



“당연하지~ 어디 남편을 아들과 비하겠어.. 내속 아파 낳은 자식인데..”



지수엄마와 나의 대화에 혁재엄마가 끼어들었다. 딱히 할 말도 없어 듣고만 있는데, 아들과 같이 잤다는 말이 의미 있게 들렸다.



‘나도 자연스럽게 재석이 방에서 잘 수 있을까?’



남편 옆에서 잠들 수가 없었다. 바람피우는 남편 때문에 분해서 잠 못 들었던 것이 습관이 되었는지, 깊이 잠들지 못하고 선잠만 들었다. 어쩌다 남편이 뒤척이며 팔이라도 올리면 소름이 끼쳐서 다시 잠들지 못하고 주방으로 나가곤 했다.



그런데 재석이 옆에서는 깊이 잠들 뿐만 아니라 단잠을 잤다. 제주도에서 그렇게 한번 잠을 자고 나니까 그 기억이 밤마다 괴롭혔다. 그러나 자신은 혁재 엄마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건너갈 수는 없었다.



“참! 지수 과외선생이 그렇게 잘 가르친다면서? 우리도 소개 시켜줘.”



“음...소개시켜주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여선생님이라서..”



“뭐 어때서..오히려 더 열심히 하려고 할 수도 있고..왜. 그 나이 남자애들은 그런 것이 계기가 되기도 하잖아?”



“물어 볼게..”



“아니면, 지수랑 같이 하는 건 어때? 혁재는 아직도 지수 좋아하는 모양이던데..”



“호호호. 생각해 볼게.. 언니! 이참에 지선이도 그 선생님에게 과외 시키려고 하는데. 재석이도 같이 시켜볼래?”



“재석이를?”



“어머! 우리 혁재는 생각해 보겠다면서 왜 이래? 기분 나쁘게..”



“몰라? 재석이 이번 중간고사에 또 전교 1등 했다잖아. 그지 언니?”



“으응...”



나도 몰랐다. 혁재 엄마는 지수 엄마에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을 붉혔고, 나는 몰랐다는 사실에 스스로 민망해서 얼굴을 붉혔다.



“꼭 생각해봐..언니~”



“응..그런데..재석이가 학원 때문에 매일 12 넘어서 들어와서...”



“언니는 애한테 뭔 학원을 그렇게 많이 보내? 뭐뭐 보내?”



“.........그냥...뭐...이것저것..”



“언니도 참..자식욕심은 많아서...아무튼 나도 선생님에게 물어봐야 하니까..혁재 이야기까지 한 번에 물어볼게.. 그때 다시 이야기 해..”



“그.그래..”



그것도 잘 모른다. 그리고 과외선생이 여자라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고, 지선이랑 같이 시키자고 하는 것도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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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살 생일이 지나면서 단증이 나왔다. 지금까지 품띠였는데 검은 띠를 허리에 매니 쑥스러우면서 우쭐해졌다. 공인 2단이다.



“재석아.”



“네. 사범님.”



“새벽타임 한번 지도해 보지 않을래? 차비 정도 챙겨줄게..”



“네? 4단 따야 하는 거 아니에요?”



“2단이면, 보조사범으로 문제없어..5시부터 7시까지 두반인데..아침잠이 많아?”



“.......그건 아닌데...자신이 없어서요..얼마 주는데요?”



“음..네 도장비 면제에 매달 20만원씩.”



“....엄마랑 상의 해볼게요..”



“그래.”



한 달에 엄마에게 받는 돈이 150만원이었다. 학원비로 100만 원 정도가 들었고, 저녁 식사비와 차비, 책값과 용돈까지 포함된 금액이 50만원이었다. 그런 액수에 비해 20만원은 작은 금액이었지만 내가 노력해서 번다는 것이 중요하다. 엄마에게 선물이라도 하거나 이번처럼 놀러갈 기회가 왔을 때 내 돈이 있으면 좋을 거 같았다. 더불어 엄마랑 이야기해서 지금 다니는 학원들도 좀 정리를 했으면 했다. 태권도. 피아노. 영어회화. 보습학원 중에서 태권도를 새벽으로 옮기면 중간에 시간이 떠버린다. 그리고 피아노를 전공 할 것도 아닌데 계속 학원에 다니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전문적으로 피아노를 치려면, 학원을 다닐게 아니라 실력과 지명도 있는 선생님께 개인 레슨을 받아야 했고, 전문적으로 나갈 생각도 없다. 영어회화도 유치원 때부터 했던 거라 외국인 선생님과 말장난 하다 오는 것 밖에 안돼서 그만 다녀도 될 거 같았다. 보습학원은 이미 3학년 과정까지 진도가 끝이 났다. 계속 나가봐야 복습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다닐만한 것이 없네? 나..혹시..천재?’



지금 5시 반에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좀 더 일찍 잔다면 4시 반에 일어날 수 있을 것도 같고, 그러면 학교 끝나고 집에서 엄마랑 보낼 수 있을 텐데, 하고 하루 종일 생각했다.



“엄마. 저 드릴 말이 있어요..”



“그래? 뭔데...”



저녁에 음료수 한잔을 챙겨 주시곤 방에 들어가려는 엄마를 잡고 사범님의 제안과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건..너 하고 싶은 데로 해..난..너..믿으니까..”



“네..그럴게요. 엄마 실망시켜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아버지는 주무세요?”



“........안 들어오셨어..”



“.......”



엄마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따라 오셨다. 엄마를 침대에 앉히고 욕실로 가서 양치와 샤워를 하고 돌아왔다. 엄마가 없었다.



“..................”



딱.



실망감에 침대에 앉아 있는데 엄마가 들어오신다. 엄마의 등 뒤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똘똘이가 급격히 부풀어 올랐다.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엄마에게서 싱그러운 향기가 감돌았다. 엄마도 씻고 오셨던 것이다. 촉촉한 머릿결이 볼을 스치고, 민트향 가득 품은 입술이 얼굴을 덮쳤다. 몸이 뒤로 넘어가며 엄마의 몸과 완전히 포개졌다.



“일찍..자야지...”



“그럴게요..”









새벽 찬바람을 맞으며 집을 나섰다. 4시 30분이다. 한숨도 못 잤고, 기왕 이렇게 된 거 도장에 나가 어떻게 하는지 견학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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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석이에게 믿는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어서 조언을 할 수가 없었다. 몸이 건강하고 좋았지만 태권도를 다니는 줄 몰랐다. 얼마 전에 피아노 치는 것을 봤지만 아직도 다니는 줄 몰랐다. 공부를 잘하는지도 오늘 들었고 당연히 회화나 보습학원도 다니는 줄은 몰랐다.



‘전부..내가 데려가 끊어 줬을 텐데...’



모른 게 아니다. 듣고 잊어먹은 것이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안한 마음에 지수엄마가 이야기 했던 과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재석이 학원비로 나가는 돈이 대략 100만원 내외였다. 연주 족집게 학원비가 그 정도였기 때문에 과외비도 그 정도일거 같았다.



딩동~



“어? 어쩐 일이야?”



“응..어제 이야기 마저 하려고..”



지수엄마와 혁재엄마였다. 국화차 한잔씩을 가지고 식탁에 앉았다. 보통 손님이면 거실로 갔겠지만 다들 주부라서 그런지 식탁을 더 편안해 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선생님이 일단 애들을 만나보고 싶데. 여러 명같이 하는 것은 처음이라 애들 실력도 보고 결정하면 안 되냐고.."



"나도 참. 생각해 보니 그렇더라고요..호호.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더 믿음이 가서 꼭 시키고 싶은데..“



“그래? 지수 과외비는 얼마나 드려?”



“50만원이요. 주 5일 두 시간씩에 그 정도면 비싼 거 아니에요. 그지 혁재엄마?”



“그럼요.”



“알았어..”





토요일. 점심을 먹은 후 재석이와 시내로 나갔다. 목적지는 없었다. 따듯한 오후를 같이 다녔을 뿐이다. 재석이랑 같이 다니면 좋은 것이 손을 놓지 않는다는 것과 무슨 이야기든 재미있게 들어준다는 것이다. 잡은 손은 든든하면서도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줬다.



남자들은 이야기를 듣고 나면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충고를 하기도 하고 판결을 내리기도 한다. 최악의 경우는 귀찮아한다. 재석이는 어려서 그렇겠지만 충고나 비판을 하지 않고 열심히 들어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 다소 속상했던 것들은 마음이 풀리고, 어렵던 문제라도 말하면서 답을 찾게 된다.



돌아오는 길에는 저번에 갔었던 식당을 보며 나를 위해 쳐줬던 피아노가 생각났다. 그래서 재석이를 데리고 악기점에 갔다. 피아노를 사줄 생각이었다. 매달 지출에서 50만원이 줄었기 때문에 할부로 하면 괜찮은 피아노를 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피아노 가격이야 천차만별이었지만 가능한 비싸고 좋은 걸로 사주고 싶었는데, 재석이는 전자피아노를 갖고 싶어 했다.



“소리도 다양하고, 헤드폰 끼면 아무 때나 칠 수 있어서 좋아요. 피아노는 옆집에 피해를 주니까..마음대로 못해서 불편해요..”



항상 주변을 배려하는 마음이 예쁘다. 가격도 피아노보다 저렴해 할부로 안 해도 가능할 정도였고 바로 가지고 올수도 있었다. 집에 와서는 나를 앉혀놓고 두 시간 동안 연주도 해주고 노래도 불러줬다.



“I love you~사랑한다는 이 말 밖~에는 해줄 말이 없네요~ I love you~ 의미 없는 말이 되었지만~ 사랑~해요~”



잔잔한 음악에 감미로운 목소리가 내 마음을 촉촉하게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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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동~ 딩동~



“안녕하세요. 엄마가 가보라고 하셔서 왔는데...”



“응. 어서 들어와..”



지수엄마는 알고 있었지만 집에 와보기는 처음이었다. 안에는 지수와 지선이도 있었지만, 모르는 누나와 형도 있었다. 나와 지수 지선이는 관계가 이상했다. 둘 다 유치원 동기들로, 지수와는 단짝이었다. 지수가 졸업하고 지선이가 왔을 때, 나와 지수는 지선이에게 오빠라고 하라고 시켰고, 지선이는 일 년 동안 그렇게 불렀다. 그러던 것이 초등 학교 때 같은 반이 되면서 반말을 한다.



“오랜만이네?”



“그러게~ 지수는 진짜 오랜만이다. 이제 제법 숙녀 티가 나는데?”



“어머~ 얘 좀 봐~ 예전부터 숙녀였는데~”



“언니. 그쯤하고 소개부터 하지?”



“참! 호호. 선생님. 이애는 유치원때 단짝 재석이..”



다른 사람들은 이미 소개가 끝났는지 나만 소개를 했다. 나는 그냥 머리를 45도 숙여 태권도식 인사를 했다. 태권도식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다. 비굴하지 않게, 오만하지 않게, 딱 그 정도 인사였다.



“그래..반갑고..우선..지수와 혁재, 지선이와 재석이 이렇게 앉아..”



처음 보는 남자애가 혁재인 모양이다. 키가 나랑 비슷한 160~170사이로 얼굴에 여드름이 잔뜩 난 그런 애였다. 우리중 제일 키가 큰 사람은 선생님이라는 누나였다. 허리가 어찌나 날씬한지 사람이라기보다 마네킹 같았다.



“자 이거 받아서 풀어봐..”



지수와 남자애가 같은 문제를 받고, 나와 지선이가 같은 문제인 걸로 봐서 남자애는 고1인 모양이다. 문제지를 받아보니 1번부터 10번까지 난이도가 균등한 것이 제법 정성을 들인 표시가 났다.



시험은 국어, 영어, 수학, 3가지를 봤는데, 보습학원에서도 이미 중3까지의 진도가 나가 있었기 때문에 별 어려움은 없었다. 누나가 시험지를 들고 나간사이 우리들은 지수 엄마가 주신 음료수와 과일을 먹고 가볍게 이야기를 했다.



“만날 학원 다닌다며?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응..이번 달까지만 다니려고..”



“난...고1인데..넌 몇 학년이니?”



“중2요.”



지수와 지선이 둘에게 친구처럼 대하는 내가 이상했던 모양이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긴 했지만, 지수도 굳이 나에게 누나라고 하지 않았고, 나도 그냥 친구라는 생각에 별 문제 없었다.



“그래? 그럼 앞으로 나는 혁재형이라고 해.”



“네. 그럴게요. 혁재형..”



“지수한테도 누나라고 하는 것이 좋겠지?”



“..........지수...누나?”



“아휴~ 징그럽다. 난 그냥 지금처럼..”



“...........”



“지수랑은 친구니까..그럼 앞으로 지선이가 나에게 오빠라고 해.”



“뭐야~ 말도 안 돼. 흥. 그렇게는 절대로 못해!!”



지수와 지선이가 나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들었는지 눈빛이 제법 사나웠다. 어쩌면 나가서 한판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지수 초등학교 때부터 내가 지수에게 반말하면 달려드는 녀석이 1년에 한두 명은 꼭 있었다. 그리고 10살 때 이후 그런 애들에게 얻어 맞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른 애들은 나가서 볼일 보고, 재석이는 이것들도 풀어볼래?”



“네..”



대충 훑어보니 고1과정 인거 같다. 몇 개는 아는 것을 머리 굴려 맞췄는데, 몇 개는 도통 모르겠다. 모르는 것이 부끄럽지는 않았기 때문에 모르면 모르는 데로 적당히 답을 썼다. 그러니 오히려 더 금방 끝났다.



“..........”



누나는 좀 곤란해 하는 표정이었다. 누나는 지수엄마에게 이야기 하고, 지수어마는 우리엄마와 혁재엄마를 불렀다. 얼마 후 우리는 한자리에 전부 모여 누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렇게 전부 오시라고 한 것은 제가 결정하기 어려워서요. 처음에는 고1애들과 중2애들, 이렇게 두 팀으로 운영하면 되리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결정했어요. 그 점 사과드릴게요.”



“...........”



엄마들은 무척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과외생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별 생각은 없었다. 우리엄마야 원래 표정에 변화가 드물었다.



“현재 지수는 제가 그동안 고1과정까지는 전부 띄었어요. 그건 아실 테고, 혁재는....고1수준..정도 되요..재석이가 중학교 과정은 전부 끝냈네요. 지수도 중3수준은 되고요. 그러니까..전부 수준이 달라서...어떻게 해야 할지..”



“선생님은 어떻게 하시고 싶으신데요?”



“만약 4명을 전부 맡는다면, 지수는 고2진도를 나가고요. 혁재랑 재석이가 한팀으로 고1 과정을 하고, 지선이는 중3과정에 맞춰 나가는 것이 좋을 거 같아요. 그래서 제 친구 중 한명을 같이 해서 둘이 3팀을 운영하면 어떨까 해요.”



혁재 엄마와 지선이 표정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누나가 조심해서 말을 하기는 했지만, 혁재형 수준이 지수보다 떨어지고, 중2인 나랑 비슷하다는 이야기였다. 지선이 경우 자기 딴에는 열심히 했는데, 결과적으로 4명중 가장 실력이 떨어져 같이 수업을 할 수 없다고 하니 어쩌면 당연한 것인데도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물론, 애들이랑 어머니가 좋으시다면요..”



“...............”



애들이야 어떻던, 엄마들은 전부 동의했다.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수업을 맞춘다는 것도 아니었고, 어차피 과외를 시킬 바에야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선생님이 믿음도 가고 마음에도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그렇게 해주세요.”



그 후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다. 과외비는 짧게 언급되고, 시간은 우리와 상의해서 정하고, 장소는 3집이 돌아가면서 제공하기로 했다. 그래서 학교 끝나고 오후에는 엄마와 지내려는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래도 저녁은 같이 먹게 되었다. 일단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7월부터 시작한 과외는 기말고사를 중심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돈을 받고 가르치는 이상 눈에 보이는 성과 위주가 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진도가 나가지는 않았다.



대신 태권도와 피아노는 조금 성장한 기분이다. ‘가르치면서 배운다.’고 새벽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다 보니 스스로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고, 무심히 지나갔던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특히나 새벽반은 전부 어른들이라서 그들의 깊은 사고는 오히려 그들에게 배웠다. 저녁에 한두 곡이라도 피아노를 쳤다. 그럴 때면 엄마는 내 등에 등을 대고 기대서 들으신다. 지금까지 누군가를 위해 연주한다는 것의 기쁨을 몰랐다. 처음 엄마에게 피아노를 들려 줄때도, 음악을 들려준 것이 아니라 이만큼 칠 수 있다는 음악 실력을 들려준 것이었기 때문에 이런 기쁨은 없었다.



저녁은 엄마와 둘이 먹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나는 엄마와 함께 음식을 준비한다. 처음 한두 번은 공부하라고 말리셨지만, 지금은 같이 인터넷이나 요리책을 찾아보며 새로운 음식도 도전하곤 했다.



날씨가 조금씩 무더워지다가 찌는 듯 한 더위로 바뀌면서 방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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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요즘..아빠..”



“응...”



이제는 현주도 느낄 정도로 남편이 변했는지, 현주가 그만큼 어른이 되었는지 어둡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 순간, 나는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잠깐 동안 생각했다.



“괜찮아?”



“응. 괜찮아..오래됐는걸..”



“재석이 이후에도 계속?”



“..........가끔씩...”



“이제 완전히 포기한 것처럼 보이네, 엄마는...”



“그건..그래..”



어느새 딸애가 커서 이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오랜 세월 이런 순간을 기다려 왔었다. 다만, 딸애는 좀 늦었다. 이미, 다른 사람에게 위안을 얻고 있으니 말이다.



“이번 휴가 때 여행이라도 갈까?”



“으응?”



사실은 재석이랑 이미 여행갈 계획을 다 짜 놓았다. 요즘 인기 있는 발리에 갈려고 예약까지 다 했다. 딸들에게 뭐라고 말하고 갈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딸애가 휴가 때 같이 여행가자고 말하니 우리끼리 가려고 한다고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싫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너도 애인이랑 가고 싶지 늙은 엄마랑 가고 싶겠어?”



“엄마는~ 엄마가 뭐 늙었다고 그래..”



그건 사실이다. 아직 늙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도 애인이랑 가고 싶은 거다. 이 눈치 없는 것아.



“연주는?”



“연주가 좋다고 하면 같이 가고..엄마는 재석이랑 여행가는 건 싫어? 전에 제주도도 갔다 왔잖아?”



재석이야 항상 마음속에 있으니, 당연히 같이 가는 거다. 그래서 연주만 물어 봤는데, 현주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 오해하고 있어 주기를 바란다.



“으응.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넷이 가자고?”



“아빠에겐 한번 말은 해볼까 하는데...같이 가신다면..다시 가정으로 돌아 오실지도 모르잖아..엄만 싫어?”



“...........너의 아빠는...사실...휴...너 알아서 해..”



“응.”



“언제, 어디로 가려고?”



“음...7월 말에 일주일정도로...발리 어때? 요즘 한창 뜨는 곳이라는데..”



“발리? 예약 안 될 텐데?”



“어떻게 알아?”



“으응..나도 알아는...봤어...”



현주는 남편이 단순이 바람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딴 살림을 차렸다는 사실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며, 돌아오기만 하면 내가 받아 주리라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현주는 아빠도 멀리 갔지만 엄마 역시 돌아오지 못 할 만큼 멀리 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문득 현주와 연주가 모든 비밀을 알게 됐을 때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나에게는 재석이가 남이었지만, 현주나 연주는 비록 반뿐이라고 해도 피가 섞인 가족이었다. 현주가 나의 올케언니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그런데도 재석이가 좋으니 문제다.



“오늘 애들에게 한번 의견을 물어볼게..아빠는 내가 나중에 따로..”



“알아서 해..”



현주의 생각대로 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갑자기 취소한 표나 한두 장 나올까 비행기 표가 없다. 예약을 취소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것이 문제였다.





방학이라 전부 모여 저녁을 먹었다. 현주는 나에게 눈짓으로 의견을 물었고, 나는 모르는 척했다.



“저기 있잖아..”



“..................”



“이번에 가족끼리 발리로 여행을 갈까 하는데..시간 어때?”



“언제?”



연주는 반가와 한다. 아직 2학년이니 마음에 여유는 있는데, 벌써부터 입시에 시달리는 것도 불쌍했다. 재석이는 놀라서 나를 본다. 미리 이야기 할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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