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모 - 8부





현주는 준영과 결국 헤어졌다. 이별을 통고한 것은 준영씨지만 마음으로 먼저 버린 것은 자신이었다. 아빠의 영향이 컸다. 아빠와 엄마는 사랑해서 결혼했다. 외가에서 둘을 헤어지게 만들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다고 들었다. 아빠와 엄마는 사랑의 결정체 같은 존재였다. 이제는 외가에 가도 다들 웃으며 이야기 하고, 전설처럼 회자되었다. 그런 아빠와 엄마의 이별을, 사랑에 대한 불신을 마음 깊이 심었다.



사랑 자체에 대한 믿음도 흔들리는데, 자신은 준영을 정말로 사랑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고, 준영이 자신을 사랑하는지도 의심하게 되자 마음은 불안과 불신으로 가득 찼다. 그러던 차에 준영이 이별을 이야기 했고, 놀라울 정도로 담담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남은 것은 엄마에 대한 동정과 이별 자체가 주는 쓸쓸함이다. 결정된 발리 행에 대해서 가기 싫은 마음과 가서 홀가분하게 털어내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다짐 속에 갈등하다가 어영부영 출발했다.



비록 어정쩡하게 출발을 했지만 도착하고 나니 좋다. 생각보다 푸르지 않는 바다였지만 이국의 냄새가 물씬 풍겼고, 여유 있는 사람들 표정 속에 바쁘게 살아온 인생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아빠는 없지만 엄마는 그대로였고, 두 동생도 있다. 연주는 같은 여자로 뜻이 잘 통했고, 재석이는 든든했다. 더욱이 엄마랑 재석이가 사이가 좋아져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간밤의 술로 인해 긴장도 많이 풀렸는지, 늦잠을 잤다. 몸이 상쾌했다. 그동안 잘 잠들지 못했었다. 엄마와 재석이가 먼저 내려간다고 하자, 연주를 깨우고 가볍게 샤워를 했다. 다시 연주를 억지로 샤워부스 안으로 밀어 넣고 보니 안개 자욱한 전망이 보기 좋았다. 수영장 안의 연인이 서로 끌어안고 나누는 키스가 부럽기도 하면서 아름다웠고, 그들이 평생 그럴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허망함도 있었다. 불과 몇 달전만 해도 자신 역시 그들 못지 않았다.



수영장 옆에 엄마와 재석이가 있었다. 그들은 포옹을 하고 있었다. 순간 눈을 의심했다. 재석이가 엄마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는데, 그런 재석을 받아들이는 엄마가 낯설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변한다는 것을 방금 생각했지 않은가? 엄마도 늙어가는 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아침을 먹은 후, 모두 같이 해변으로 나갔다. 엄마가 비키니 수영복을 입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그 몸매나 피부가 젊은 처녀들 못지않아 내심 만족했다.



그러나 재석의 등에 난 손톱자국은 가슴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분명 손톱자국이다. 그리고 전에 보았던 자국들도 생각난다. 그게 벌써 한 달은 더 전이었다. 어제 재석이는 엄마랑 잤다.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졌다.



하나씩 퍼즐이 맞춰진다. 처음 엄마의 변화는 갈비찜, 그리고 재석이 등의 상처, 그리고 그들의 은밀한 교류들. 여행계획에 당황하던 것들, 묘하게 어울리는 그들의 옷들. 어젯밤 엄마의 표정은 바람피우는 남편을 둔 여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속단할 수는 없다. 그건 너무나 엄청난 일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어떤 엄마인가? 딸인 자신이 봐도 결벽증으로 보일 정도로 완벽주의자였고, 한 점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래서 현주는 그들을 관찰했다. 의심은 확신이 되어갔지만 결정적인 것은 없었다. 모든 열쇠는 밤에 있다고 생각하고, 살며시 내려가서 보조키를 받았다. 내가 예약을 했기 때문에 보조키를 받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이제 문을 열고 들어가 그들을 볼 것이다. 만약 이것이 나의 기우라면, 다시는 그런 엉뚱한 의심을 하지 않으리라. 그런 마음으로 의심하는 딸은 죄스러움을 덮어두고 문을 열었다.



열쇠가 돌아가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천둥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고급스러움을 추구하는 리조트의 문은 소리 없이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덮치고, 음란한 신음이 귀를 틀어막았다.



복도의 밝은 빛을 등으로 막으며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문을 닿고 서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눈으로 직접 봐야만 한다. 그런 생각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아아아..”



엄마의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엄마가 이런 소리를 내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어둠이 눈에 익으며 그들이 보였다. 엄마가 개처럼 엎드려서 침대 머리받침을 잡고 있고, 뒤에 재석이가 엄마의 엉덩이를 움켜잡으며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아아..아아..좋아..미치게 좋아..”



“엄마..나도..”



엄마의 큰 엉덩이와 재석이의 작은 엉덩이는 안 어울렸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는 추했다. 역겨웠다. 현주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울었다. 엄마의 절규와 같은 비명소리가 들릴 때까지 현주는 그들을 증오하며 바라봤다.



“엄마..사랑해..”



“나도..”



끊임없이 속삭이고, 서로를 쓰다듬고, 핥는다. 추잡했던 모습과는 달리 상처 입은 강아지들이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과 비슷해 보였다. 그제야 현주는 재석의 아픔과 엄마의 고통을 생각해냈다.



“음...아..”



나가야 하는데, 나가다 들킬까봐 무서웠다. 그리고 엄마 위에서 재석이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하고, 엄마의 입에서 애간장 녹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까처럼 마지막 순간이 되면 나가더라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생각에 그 순간을 기다렸다.



“음..아..”



엄마와 재석이는 파도를 타고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섹스, 자신이 해온 그것이 아니었다. 두 번째라서 그런지 아까 같은 추접함이나 격정은 없었다. 대신 부드럽게 출렁이며 뱀처럼 서로를 칭칭 감는다. 엄마는 애교 있는 목소리로 투정을 부리고, 재석이는 그런 엄마를 넉넉하게 받아냈다.



“으으으...아..너무..빨라..천천히..”



엄마 혼자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재석이 때문에 나가지 못했다. 그들은 차가운 에어컨 바람 안에서도 땀을 흘리고 있었다. 자신도 땀을 흘렸다. 방 안은 후덥지근했다. 엄마는 생각보다 오래 침묵하고, 재석이는 그런 엄마를 감싸주고 있었다.



“아이~천천히 하라니까..아직 못했지?”



“응..이번에는 같이 해..”



“또 하려고? 조금이라도 자야 하잖아..”



“그치만 엄마 아랫입이 나주지 않는걸?”



“........그럼 이번에는 같이 해..엄마 끝까지 참아 볼 테니까..”



“응.”



동물 같았다.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는 침대 전체가 출렁거렸다. 침대가 부서질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엄마의 소리는 비명이 되었고, 엄마의 경직이 그대로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갑자기 찾아온 정적.



“...........엄마?”



“..............”



재석이는 익숙하게 얇은 담요를 끌어다가 두 사람을 덮었다. 이제 완전히 나갈 기회를 잃어버린 나는 재석이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서있을 수가 없어서 벽을 집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그들이 전부 잠든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복도의 공기가 시원했다. 열쇠를 반납하고 방에 들어오기까지 마라톤이라도 뛴 것처럼 힘들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다리는 질질 끌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옷도 벗지 못하고 침대로 들어갔다.



“후...”



그제야 긴 숨이 나왔다. 손을 반바지 안으로 넣었다. 역시나 팬티가 흠뻑 젖었다. 아까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이정도로 젖어 있을지는 예상 못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움직일 힘이 없다. 그리고 곧 잠들었다.



현주는 꿈을 꾸었다. 너무 민망한 꿈이라 아침에 일어나서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밤새 재석이에게 시달리는 꿈이었다. 엄마처럼 소리지리며 추한 소리를 냈다. 개처럼 엎드렸고, 재석의 그것을 맛나게 빨았다. 꿈은 계속 반복해서 재석이를 탐하고, 재석이는 자신을 욕보였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팬티뿐 아니라 바지도 젖었고, 시트도 축축했다.



현주는 엄마를 이해하기로 했다. 용서는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엄마를 용서해야 할 사람은 아빠뿐인데, 아빠는 이미 자격을 잃었다. 그래도 현주는 엄마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여러 번 시도를 했다.



엄마가 그것을 피한다. 점점 열이 받았다. 그리고 다정한 둘을 보고 있자니 참 아니꼬웠다. 동생 연주도 그런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엄마는 지금은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입장을 확실히 했다. 본인이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마지막 날 엄마와 자리를 같이 했다.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엄마를 몰아붙였다. 엄마가 울 때까지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날 밤은 엄마도 나도 마음속의 울분을 전부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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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집에 돌아왔다. 돌아오기 전날 연주 누나랑 자게 되었을 때, 마지막 밤을 엄마랑 보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리고 현주 누나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엄마와의 며칠이 상당히 피곤했는지 일직 잠자리에 들었다. 엄마와의 그 일도 알게 모르게 에너지를 많이 소모했지만, 무엇보다 아침에 일직 일어나 밤새 벌인 일들의 흔적을 지우고 전달 충분히 휴식을 취한 누나들과 노는 일과는 우선 잠이 부족했었다.



아침에 일어나 옆방에 갔는데, 둘 다 일어날 생각을 안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걱정이 돼서 보조키를 가져다 열고 들어갔는데, 방 안은 난리도 아니었다. 빈 술병들이 굴러다니고, 엄마와 누나는 널브러져 자고 있었다. 방안에서 씨름이라도 했는지 베개며 이불이 바닥에 뭉쳐있고, 시트도 거의 벗겨져있었다. 엄마랑 누나가 어제 옷 그대로가 아니었다면 나는 둘이 나와 엄마가 하는 그 일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오해를 할 뻔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비행기 시간이 다 되가는데 젖은 수건으로 세수를 시켜도, 뺨을 때리고 머리를 흔들어도 죽은 것처럼 잠만 자는 것이다. 결국 작은 누나랑 내가 힘을 모아 택시까지 옮기고, 택시에서 공항까지 업고 갔다.



티켓팅까지 마쳤을 때 간신히 깨울 수가 있어서 비행기는 태웠다. 그런데, 비행기 안에서 토하고 술을 못 이겨 괴로워했다. 장장 7시간동안 두 사람에게 시달렸다. 비행기 안의 다른 사람보도기도 창피했다. 작은 누나와 나는 한국사람 아닌 척 영어로 이야기 했다. 그러나 누나와 엄마는 한국말로 주정을 부렸다. 그리고 비행기는 대한항공이었다.



비행기가 도착하고, 다시 엄마와 누나를 업고 부축해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정말이지 겨우 돌아왔다는 말이 실감난다.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는 8월 첫 번째 일요일이었다. 일주일간의 여행으로 집은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희미하게 발자국이 날 정도였다. 그 사이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다. 그래서 이상했다. 아버지는 일주일동안 어디에 계셨던 걸까?



엄마와 누나는 힘들어 하면서도 창문을 전부 열고 청소를 시작했다. 나와 작은 누나 역시 지치고 힘들었지만 도울 수밖에 없었다. 여행의 즐거움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각자가 자신만의 생각에 묻혔고,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하는 심정으로 집안을 닦았다.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 아니 일은 이미 벌어졌으니 끝나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청소가 끝난 엄마는 십장생이 조각되어 있는 장롱 앞에 가만히 서 계셨다.



“엄마...”



그런 엄마를 발견한 것은 큰누나였다. 나는 큰누나의 말에서 불길한 느낌을 받고 따라 들어갔다. 엄마는 장롱 안을 바라보고 있었고, 큰누나는 장롱과 엄마를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안방은 변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세상이 멈추고 나만 움직일 수 있게 된 건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하게 되었다.



“엄마..”



“응? 아무것도 아냐..어서들 가서 쉬어..”



큰누나가 다시 엄마를 부르고, 엄마는 잠깐 나갔던 혼이 돌아온 사람처럼 우리를 돌아보며 다른 말을 했다.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하지만 혼란에 빠져 있었다. 누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는지 나를 밖으로 내몰고는 방문을 닫았다.



“누나..”



“오늘은...엄마 쉬게 두자..응?”



“알았어..”



그러나 엄마는 쉬지 않았다. 시장을 봐와서는 저녁을 만들었고, 냉장고 안을 다 청소하고, 베란다와 욕실, 세탁실까지 청소했다. 그러고도 안방을 정리하는지 밤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나 역시 잠들지 못했다. 거실 너머로 엄마의 움직임이 간간이 들려왔다. 그 움직임은 새벽이 돼서 부엌으로 이어진다.



“엄마.”



“응? 일어났어? 엄마 때문에 못 잤구나?”



“........괜찮아?”



“응..모르겠어..괜찮은 건지 괜찮지 않은 건지..”



“나...말해주면 안 돼?”



“...........”



엄마는 아침을 준비하다 말고 식탁에 앉았다. 나는 따듯한 국화차 두 잔을 타서 우리 사이에 놓았다. 엄마가 잔을 들어 입술만 축이고는 손에 감싸 쥐었다. 8월인데도 엄마는 추워보였다.



“너의 아빠..옷들이 없네...”



“.......그럼...”



“응..빨래도..아무것도...”



“나 때문이야?”



“.....아니..”



엄마는 아니라고 하셨지만 나는 맞다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에게 미안하고, 아버지에게 죄스러웠다. 가만히 떨고 있는 엄마를 안았다. 엄마가 나를 원망하고 밀어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엄마는 나에게 의지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엄마가 울었기 때문이다. 울고 계실지도 모르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입술을 꼭 물고 울었다.



“울지 마..울지 마...네 잘못 아니니까..자책하지도 말고...”



엄마가 위로를 해 준다. 눈물을 닦아 주는 손이 따듯했다. 따듯한데 떨고 있었다. 나도 엄마의 눈물을 닦았다. 눈물 자국이 없어지지 않았다. 계속 흐르기 때문이다. 엄마가 우는 것이 싫었다. 나는 울어도 엄마는 울면 안 된다. 나는 엄마의 눈물을 먹었고, 눈도 먹었다. 엄마는 나에게 모든 것을 맞기고 있었다.



아버지가 없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아침이면 도장을 가야하고, 아침을 먹어야 했다. 큰누나는 출근을 하고, 작은 누나는 학원을 간다. 난 과외를 받았다. 점심에는 어김없이 밥을 먹고, 저녁까지 피아노를 치고, 엄마는 그런 내 등에 기대 하늘을 봤다. 큰누나가 평소보다 일직 오고, 다시 밥을 먹는다.



“............”



“왜?”



“으응..그냥..이야기나 좀 할까 해서..”



“들어와..”



오랜만에 누나가 내 방으로 왔다. 아버지 이야기 일거라고 짐작했다. 아침에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어렵게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었다. 아버지가 나간 이유가 나일 지도 몰랐다. 그러나 다른 사고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평상시 그대로셨다.



“아버지..전화 했었어?”



“응..”



“나도..”



“............”



“나 때문일까?”



계속 생각해 오던 것이라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그러나 누나는 엄마와 나의 일을 모른다. 누나는 당연히 아니라고 할 것이다.



“...아버지가 아셨다면..”



“..........”



누나 말에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누나가 알고 있다면 아버지가 알고 있다고 해서 이상하지 않다. 머릿속에서 실이 뚝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알고..있었어?”



“....응..”



“.........”



“하지만 이번에 발리가서 알았어..아버지가 알았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어..그리고. 아버지도 여자가 있고..”



“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여자가 있다는 것이야 말로 믿기 어려웠다. 아버지는 좀 무표정하고 무정하다. 여자가 좋아할 타입도 아니지만 여자를 좋아하는 분도 아리라고 생각했었다.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냐?”



“봤어..애까지 있더라..”



“엄마는...알아?”



“응..”



아버지를 만나봐야 한다. 아버지가 나 때문에 나가셨다면 잘못을 빌어야 한다. 그런다고 그 일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내 마음은 좀 낳아질 것이다. 아버지가 다른 여자 때문에 나갔다면 내 죄는 많이 가벼워질 거 같았다. 나는 아버지나 엄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아버지를 만나려고 한다.



“아버지 만나 보려고?”



“.......응...”



“그래..그 말이 하고 싶었어..”



“누나는...나..밉지?”



“.....그렇지는 않아..”



나도 그 말이 듣고 싶었다. 누나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웠다.



토요일에 아버지 회사로 갔다. 매일 이 핑계 저 핑계를 자신에게 대면서 하루하루 연기했다. 토요일이 돼서 더 이상 변명을 찾지 못하게 되고, 아버지가 없기를 바라면서 갔다. 가면서 누나가 사준 PMP폰으로 아버지께 전화를 했다. 아버지는 반갑게 받으시면서 회사 앞에 오면 전화하라고 하신다. 그렇게 만난 아버지는 바로 나를 차에 태워서 어디론가 가셨다.



“잘 지냈니?”



“네..아뇨..그냥요..”



“............”



아버지도 나름 긴장하고 계시는 듯 했다. 어색한 공기가 맴도는 차 안에서 그만큼이나 어색하게 움직이는 차들을 바라본다. 길을 잘 몰라 어디로 가는지 몰랐는데, 점점 아는 동네들이 나온다. 집 근처였다.



“오늘은 집에 오세요?”



“.......”



말하고 보니 이상하다. 그래서 그런지 대답을 안 하셨다.



“..............”



우리가 도착한 곳은 집이 아니다. 그러나 모르는 곳도 아니었다. 전에 엄마랑 한번 온 적이 있는 유명한 경양식집이었다. 매니저라며 엄마에게 와인을 선물해 주기도 했던 그 집이었다.



‘아버지가 여긴 왜...’



내가 아버지를 만나러 오면서 제일 바랐던 상황은 아버지 회사에 일이 있어서 며칠 동안 집에 올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가 어버지가 우리 일을 알고 충격을 받아 나가신 상황인데 결코 그런 일은 없기를 빌고 또 빌었다. 아버지를 보고 그런 느낌은 받지 않아 약간 방심하고 있었는데, 이 가게 앞에 아버지와 나란히 들어가게 되면서 귀가 ‘웅’ 하고 울리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알고 계신다...아버지가 알고 계신다..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다리가 떨리는 것을 억지로 걸었다. 심장이 두 개. 세 개 같이 울렸다. 그 중 하나는 머리에서 바로 들렸다. 걷고 있는 것인지 발에서 땅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고, 주변이 돋보기 안경너머처럼 어지러웠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정신을 수습해 본다. 최소한 아버지에게 사죄라도 해야 한다. 아버지도 잘못한 것은 있다. 나도 엄마도 아버지의 사랑을 간절히 원했다. 아버지는 우리를 방치했다. 엄마 항아리도 내 항아리도 완전히 비어졌다. 나는 생각나는 대로 하나라도 더 이유를 만들어 무너지는 정신을 추슬렀다.



“오셨어요?”



“네. 오랜만..입니다..”



“...재석아..인사드려라..”



“... 유재석입니다.”



“호호. 반가워요..아주 잘 생겼네요..”



30~40 사이 정도 되는 아주 고운 아줌마였다. 아줌마는 우리를 한자로 ‘죽’이라고 써진 방으로 안내했다. 좌석이 대략 30개정도의 방인데, 벽지가 상당히 아름다운 대나무가 그려져 있고, 인조대나무가 그 벽지와 조화롭게 심어져 있었다.



“앉자..”



“네..”



나는 많은 자석들 중에서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 몰라 망설이는데, 아버지는 대충 아무데나 앉는다는 인상으로 한자리 차지하고 바로 나에게 권했다. 미리 주문을 했는지 바로 음식이 나온다. 전에 엄마랑 왔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많은 음식들이 나왔다. 혹시 엄마나 누나가 오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먹자..”



“네..”



와인도 한 병 왔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내 잔에도 따라 주시고는 아버지 잔에 가득 채워 드셨다. 음식은 많고 먹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먹었다. 지금은 시간이 필요했다. 안 넘어가는 음식을 입에 물고 계속 씹었다. 무슨 맛인지는 당연히 느껴지지도 않았다.



“전에..현주엄마랑 여기 왔었다며?”



“...........네...........”



나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이었다. 갑자기 목이 꽉 막혀 제대로 대답을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들으셨는지, 그런 것은 별 상관없는 듯,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별반 변화가 없으셨다. 아버지는 내가 먼저 이야기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일까? 지금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야 하나?



“피아노..잘 친다며?”



“.......별로..에요...”



“어머~ 무슨 말을..아주 좋았어요..”



아까 봤던 아줌마가 음식을 들고 들어온다. 음식을 나를 아줌마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줌마는 내 옆자리에 앉으며 음식을 바로 앞에 놓아 주셨다. 지금은 아줌마가 낄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아줌마로 인해 놓친 기회가 오히려 고마웠다. 다시 잠깐의 집행 유예 기간을 벌었다.



“........그날 피아노 훌륭했어요. 나 피아노가 꿈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주 듣는 편이라..호호..재석이는 자신을 가져도 되요..”



“아..네..감사합니다..”



“...................”



‘혹시 이 아줌마가 아버지 애인인 걸까?’



나는 아줌마를 탐색했다. 하얀 블라우스에 검정치마, 단정한 옷차림이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무릎을 붙이고 앉아 있는 폼이 품위가 있어 보인다. 블라우스에 붙은 액세서리가 어울리는 것이 센스가 있다. 머리는 살짝 묶어서 말아 감았는데, 어려보이지도 않고 늙어 보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웃는 얼굴이 상당히 친근감을 준다.



“...................”



“..................”



“그럼 음료수라도 가져다 드릴게요. 말씀들 나누세요.”



아줌마로 인해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도 나도 단발적인 질문을 했지만 대답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의 반응을 보는 잽 같은 것일 뿐이다. 우리의 눈치에 아줌마는 나가고, 다시 대화를 이어야 했다.



“아버지..좋아하시는 분이세요?”



“후후. 그렇게 보이니?”



“저분이..좋아하는 것처럼..보여요..”



“....저 사람은...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누나는 아버지에게 좋아하는 사람과 그 사이에 낳은 애가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나의 일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우선 아버지의 일부터 확인하고 싶어졌다. 아버지의 치부를 보고 나면 나도 사죄하기 더 낳을 것이고 아버지 역시 나에게만 모든 죄를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까 멍했던 만큼 갑자기 맹렬히 돌아가면서 이런 저런 계산을 했다.



“엄마는..이제 좋아하지 않으세요?”



“........현주엄마..좋아한다..”



아버지가 엄마를 좋아한다는 말은 충격이었다. 엄마를 좋아한다는 말에 가슴이 송곳으로 찔리는 것처럼 아팠다. 평생 처음 하는 아버지와의 진지한 대화는 점점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나는 간신히 버티는 것이 전부였다. 다음 대화를 이끌 여력이 없었다.



“..................”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 많이 컸구나.”



“....................”



“아버지는...현주엄마나 너희들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버지 좋아하는 사람..있다.”



“좀 전의..?”



“....그 사람도 맞고..또 다른 사람도 있다.”



“.........그럼...아버지는..3명이나...좋아하신다는 거예요?”



놀랐다. 대신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누나에게 듣기만 했던 것을 아버지 입으로 시인을 하고 그 상대방까지 보여주다니 뜻밖이었다. 내가 아버지를 적으로 생각했던 것에 비해 아버지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좋아한다고 해서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



“현주엄마는..너나 현주, 연주를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로 좋아하는 것이고, 또 과거에 좋아했던 사람도 있고, 현재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 관계에는 여러 가지가 변한다.”



아버지는 그런 것들을 잘 설명하기 힘들어 하셨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설명해 보려고 노력하셨다. 나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아버지가 엄마를 배신하고, 내가 아버지를 배신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 아들이었고, 나의 아버지라는 것을 생각해 내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그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엄마랑 잘 지내니? 전에 그 이야기 듣고 좀 의외였었다.”



“아...그 아줌마가 이야기 해줬군요?”



“그래..”



“당연히 엄마랑은 잘 지내요. 엄마는 절 사랑하시고, 저도 엄마를 사랑하는 걸요.”



나는 아버지가 우리가 여기 왔었다는 것만 알지 아버지를 배신하고 그런 일을 한 것은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버지 말투에 나에 대한 질책이 없었고, 아줌마가 이야기 했다면 집에서 벌어진 일은 절대로 모를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걱정을 덜고 힘이 났다.



“그 아줌마..엄마랑 저를 알아요?”



“............그래..그 사람에게는..여러 가지로 신세를 졌지...”



한 가지 걱정을 덜고 나자 다른 것들이 궁금해진다.



“아버지는..엄마랑..저희를...버리실 건가요?”



“..........어떤 게 버리는 건데?”



“그러니까..그...아버지 좋아하시는 분에게...가실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넌 어떻게 할 거니? 엄마랑 살래, 나랑 살래?”



“.................”



“그래..아버지는 현주엄마가 그만 헤어지자고 할 때까지 가만히 있을 생각이었다. 너희들도 있고, 현주엄마에게 미안해서라도 내가 먼저 떠날 수는 없었지..그런데..상황이 변했다.”



“..................”



“아버지가 떠나는 것은 절대로 너희들이 싫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다. 최선을 다해서 처리하고 있지만.. 아마도....”



“그럼...?”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을 대비해야 한다. 그건 우리 남자들의 몫이야. 지금은 잘 이해가 안 되도 언젠가는 아버지 말을 알 날이 올 거다. 그러니 아버지를 믿고, 누나들과 엄마를 잘 지켜줘라. 남자니까...알았지?”



“...네...”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남자대 남자로 이야기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와의 일을 아버지께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아버지가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속에서 그냥 넘어가자고 유혹하는 무엇이 있었다.



그 아줌마가 쟁반에 음료수를 들고 들어왔다. 그 사이 꽤 시간이 지났다. 실제로 나눈 대화보다는 생각하는 시간이 길었다. 아줌마의 등장은 나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 갔지만 그런 그녀가 은근히 반갑고 고마웠다.



“재석이는..콜라 괜찮아?”



“........네...”



‘엄마가 콜라 먹는 거 싫어하는데..’



큰 유리잔을 앞에 뒀다. 잔이 어찌나 큰지 한손으로는 들기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아버지는 커피를 드셨고, 아줌마와 아버지는 지나가는 말처럼 주식이야기를 하셨다. 별로 친해 보이지 않는다.



“재석아..언제 와서 피아노 쳐줄래..아줌마를 위해서..”



“..............네...”



“정말~ 그럼..오기 전에 꼭 전화해 주고 와..내가..여기 없을 때가 가끔 있거든...”



“........네....”



정말은 올 생각이 없다. 이 아줌마도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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