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립스틱* - 42부

이진아는 곽춘호와 주승균의 대화중에 박종규가 폭력배 조직 보스가 되었다는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부산으로 내려와 술집종업원을 가장하여 알아 본 결과 털보파의 보스가 박종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항상 부하들의 호위를 받고 있는 박종규를 혼자서 처치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진아는 털보파와 세력다툼을 하고 있는 영도파의 힘을 빌리고자 생각한 것이다.



힘을 자랑하는 남자일수록 여자에게 충동적인 유혹에 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진아는 영도파의 보스 전석도를 유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진아는 박종규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놈이니 복수하게 해달라고 전석도에게 거짓말을 했다. 마침 털보파를 제압하려던 전석도로서는 그 시기를 단축한 것뿐이었다.



집요하게 젖꼭지를 파고들던 전석도가 거친 숨을 흘리더니 일어나서 룸의 문을 걸어 잠갔다. 그는 양복과 와이셔츠를 벗고 팬티차림으로 소파로 다가와 이진아를 번쩍 안아서 커튼으로 다가갔다. 커튼을 젖히고 드러난 큰 침대위에 이진아를 눕혔다. 그리고 이진아가 걸치고 있는 원피스를 우악스럽게 벗겨냈다. 팬티마저 벗겨져 알몸이 된 이진아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이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손길이 잔디처럼 돋아난 이진아의 음모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많은 여자를 다루어본 남자의 손가락이 유희를 하듯이 그녀의 음부를 쓰다듬고 다녔다. 여자의 성적인 감각은 혈관 내에서 생기는 하나의 규율이라고 했던가. 예민한 살갗들이 돌기를 일으키고 그녀는 내부에서 일어나는 성감에 휘말려 둔부를 꿈틀거렸다.



“아........”



남자의 입술이 숨겨진 신경 세포들을 건드리고 다녔다. 그리고 촉촉해진 몸속으로 남자의 손끝이 무례하게 침범하여 노략질을 했다. 그녀는 파르르 떨면서 침대 모포를 움켜쥐었다. 남자는 쪽쪽 소리가 나도록 그녀의 알몸을 핥고 지나다녔다. 남자의 혀끝이 목덜미에 뜨거운 열기를 불러 일으켰다. 순간 그녀는 몸속으로 거대한 남성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사. 사장님. 아 으.......”

“헉~!”



급히 숨을 들이마신 전석도가 그녀를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다. 뜨거운 불기둥이 몸속을 불태우며 깊이 들어오는 감각에 그녀는 파르르 떨었다.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등을 움켜쥐었다. 남자의 몸이 상하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그녀의 알몸은 방향을 잃고 흔들렸다. 그녀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뜨거움은 성욕이라기보다는 복수의 불길이었다.



“난 몰라. 하 아.......”

“허 윽! 니, 니 윽스로 대단하구만.......”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끈적끈적한 엑스터시의 물결이 이어졌다. 파도 깊숙이 가라앉는 그녀의 귀에는 나부코의 오페라가 장엄하게 들려왔다. 몸 속 깊은 뼈끝이 짓이겨지는 전율에 그녀는 몸서리를 친다. 헐떡거리던 남자가 더욱 거세게 그녀를 몰아 붙였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신음을 터트렸다.



“니, 닌.......윽스로........하 억!”

“아.........”



몸속으로 스며드는 남자의 뜨거운 배설물을 느끼는 그녀는 깊은 나락으로 추락했다. 남자는 사정을 하고도 그녀를 놓아 주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움켜쥐고 있는 남자의 등에 땀방울이 배어났다. 살갗과 살갗이 잇닿은 곳에서 흙탕물이 스미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헐떡이며 거친 숨을 내뿜던 전석도가 그녀의 몸 위에 축 늘어졌다. 그때 룸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전석도가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 뱉었다.



“누구고.......!?”

“형님! 저 돌주먹입니다.”



“와 그라는데?”

“홍기가 놈들에게 당했습니다.”



“머라꼬! 알았다. 내 나갈끼니 기다리래이.”



룸 문 저편을 향해 내 뱉은 전석도가 이진아의 알몸에서 벗어났다. 이진아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희소를 흘린 그는 벗어던진 팬티를 걸치느라 뒤뚱거렸다. 양복까지 걸쳐 입은 그는 룸 문 안의 잠금장치를 누르고 룸을 나갔다. 침대 위에 누워있던 이진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룸 안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도꼭지를 틀고 누구인가에게 분풀이라도 하듯이 휴지를 수북하게 마구 말아서 물에 흠뻑 적셨다. 그리고 허벅지 사이에 흘러내리는 분비물을 북북 문질러 닦았다.



밤새도록 거리를 누비던 술꾼들도 사라지고 이슬이 내리는 새벽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로에 트럭과 승용차들이 질주하여 남포동 거리로 들어섰다. 차량들은 남포동에서도 유명한 룸살롱의 이층 건물 앞에 급정거를 했다. 차량에서는 몽둥이와 각목을 든 사내들이 뛰어 내렸다. 사내들은 서슴지 않고 닫힌 룸살롱의 문을 두들겨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내들은 영도파 폭력배 조직원들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작은 등산 가방을 어깨에 둘러멘 이진아의 모습도 보였다.



지하의 룸살롱과 일층 이층으로 나뉘어 돌진해 들어간 사내들은 닥치는 대로 기물과 시설들을 부수었다. 지하 룸살롱에 늦게까지 일하다가 잠들었던 여자 종업원들과 털보파의 조직원들이 기겁을 하여 우왕좌왕하고 날뛰었다. 비명소리와 기물들이 부서지는 소리. 일층에서 마작을 하다가 쓸어져 잠들었다가 영도파에게 급습을 당한 털보파 조직원들은 각목과 몽둥이에 얻어맞고 나뒹굴었다.



이층에는 털보파의 보스인 박종규가 사용하는 장소였다. 이층으로 뛰어 들어간 전석도와 주먹코는 출입문을 걷어찼다. 그들의 뒤에는 몸매가 들어나도록 착 달라붙는 바지와 점퍼를 걸친 이진아가 서 있었다. 출입문이 부서져 나가고 들어난 이층 구조는 사무실을 개조한 살림집이었다. 거실 한편으로는 커튼이 쳐진 침실이 보였다. 벌거벗은 채 여자를 껴안고 잠들었던 박종규가 기겁을 하여 침대에서 일어났다.



“뭐야! 네놈들은........”

“우리가 여길 접수해뿌겟네.”



전석도가 대뜸 달려가 박종규의 가슴을 걷어찼다. 이진아가 찾는 턱수염의 박종규였다. 박종규와 같이 침대에 누워 잠들었던 여자가 젖가슴을 들어내고 바들바들 떨었다. 전석도의 발길질에 박종규는 발가벗은 채 침대 밑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주먹코가 들고 있는 각목으로 박종규를 마구 내리쳤다. 각목으로 얻어맞는 살갗들이 터지고 피가 흘렀다. 그때 바라보고 있던 이진아가 나이프를 들고 나서며 표독스럽게 뱉어냈다.



“저한테 원수 갚으라고 했잖아요.”

“니, 죽이면 안 된다.”



이진아는 대답 없이 박종규에게 다가섰다. 박종규는 일어서려는지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일어서려고 했다. 이진아는 침대모서리를 잡으려는 박종규의 뻗은 손을 쳐다봤다. 그녀를 윤간 하던 놈의 절단된 새끼손가락! 몸서리치도록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이진아는 몸을 돌려 일어서려는 박종규의 가슴을 휘둘러 찼다. 그녀의 빠른 몸놀림을 보고 전석도가 감탄했다.



“오! 가스나, 대단하구만........”



이진아는 쓰러진 박종규의 하복부를 한발로 밟고 섰다. 그리고 들고 있던 나이프로 그의 가슴을 내리 찍었다. 순간 전석도가 외쳤다.



“죽이면 안 된다 카이. 와 그라노?”



지역폭력배 조직들은 살인을 해서 감옥살이를 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잘못하면 지역도 뺏기고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진아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나이프를 휘둘러 박종규를 벌집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녀의 악귀 같은 잔인한 행동에 전석도와 주먹코, 그리고 영도파 조직원들은 경악하여 바라보고만 있었다.



“죽어! 죽으라고. 이 악마야.”



이진아는 날카로운 목소리를 뱉어내며 나이프를 휘둘렀다. 박종규는 숨이 끊어졌는지 반사적으로 흔들리다가 고개를 꺾었다. 그때서야 이진아는 히쭉하고 희소를 흘렀다. 그녀는 거침없이 배낭에서 검은 립스틱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박종규의 입술과 선혈이 낭자한 몸에 하트를 그렸다. 거실의 오디오에 테이프를 집어넣고 버튼을 누른 그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피비린내 속에 나부코의 오페라가 흘러나오고, 이진아의 해괴한 행동에 공포를 느낀 폭력배 조직원들은 넋을 잃고 있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그녀의 얼굴에는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히쭉하고 미소를 흘리더니 거실 문을 나섰다. 당황한 전석도가 그녀를 불렀다.



“야! 가스네, 어디가노?”



이진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층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전석도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부하들에게 퇴각명령을 내린 전석도는 바르게 층계를 내려왔다. 난투극이 벌어졌던 건물 안은 난장판이었다. 영도파에게 두들겨 맞은 털보파 조직원들이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거나 일어서려고 버둥거리고 있었다.



상처가 심각하지 않은 놈들은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도망치고 있었다. 전석도와 영도파 조직원들은 밖으로 나와 빠르게 트럭과 승용차에 올라탔다. 어디로 갔는지 이진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새벽의 밤거리에 들어와서 멈추어있던 트럭과 승용차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서울시 검찰청 회의실에는 탁자를 중심으로 대검찰청의 형사부장인 최 부장검사와 경찰청 수사국장인 정 치안감, 안기부 민 국장이 배석해 있었다. 그들 뒤에는 각 기관의 참모들이 각각 앉아 있었다. 경찰청 수사국장 뒷자리에는 서울시경의 조병문 수사계장의 모습도 보였다. 회의를 주도하는 사람은 수사국장이었다. 수사국장이 입을 열었다.



“오늘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는 사건에 대해서는 미리 알고들 계실 겁니다. 시중 언론에서는 검은 립스틱이라는 명칭을 붙인 이 사건은 그동안 경찰에서도 다방면으로 수사를 해 왔지만, 부끄럽게도 용의자에 대해서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처음에 일어난 군산사건은 경찰에서 마약에 관련된 사건을 추적하다가 발견되었기에 밀수업자나 폭력배들이 관련된 단순한 다툼에서 일어난 것으로 오인했습니다. 그러나 인천의 전당포 주인 살해, 부산의 폭력조직 보스 살해한 수법이 동일 범죄라고 판명되었습니다. 아직 용의자에 대해서 밝혀진 정보는 없지만 경찰에서는 밀수업자나 폭력배를 배제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서울시경의 조병문 수사계장이 직접 부가 설명을 하겠습니다.”



수사국장의 위임을 받은 수사계장 조병문 경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체격이 우람한 부장검사가 먼저 말문을 막고 질문을 했다.



“동일 범죄라고 판명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회의실내의 사람들이 모두 조 경정을 바라봤다. 설명을 하려던 조 경위가 이어서 말했다.



“지금까지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이라고 수사과정에서 밝혀진 바로는 첫째 살해당한 사람들이 모두 폭력배나 범법자인 남성으로서 성 관계를 했던 흔적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잔혹하게 난자당한 수법으로 피해자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점이고, 셋째로 군산사건이 발생하기 이 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살인사건이 있었습니다만, 사망자의 입술은 모두 검은 립스틱으로 칠해져 있고 몸에는 하트 모양이 새겨져 있다는 점입니다. 넷째로 공교롭게도 시신이 발견된 현장에는 ‘나부코’의 오페라 테이프가 발견되었는데 범인이 대범하게도 자신이 저지른 행위라는 것을 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건들을 추이해 볼 때 사건의 배후에는 원한관계라든지 특정한 사유가 내포되어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물론 부산 사건은 폭력배들 사이의 지역다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털보파 보스 박종규를 살해한 수법이 동일하여 수사 중입니다. 지금까지의 사건정황을 종합해 보건데 단독범행이라고는 믿기지 않으며 공범자들 중에는 여자가 포함되어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안경너머로 표정 변화 없이 듣고 있던 안기부 국장이 불쑥 물었다.



“비슷한 범죄자나 출소자들을 조사해 봤습니까?”

“아직 용의자를 목격한 사람들도 없고, 현장에서 발견된 지문과 혈흔을 범죄자나 출소자들과 대조해 보았으나 아직까지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도 아니고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니 이제부터는 공개수사를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안기부 국장이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퉁명스럽게 다시 질문했다.



“지금 야당에서 개헌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시국입니다. 전국적으로 경찰력을 동원한다면 민심이 혼란해질 것 같은데, 좀 더 수사를 한다던지 다른 수사방법을 고려해 볼 수는 없습니까?”

“미국에서는 DNA 검사로 범인을 색출하기도 하지만, 아직 우리 경찰과학수사 능력이 부족한 형편입니다. 피해자들에게서 주출한 DNA를 미국 FBI에 의뢰는 하였습니다만,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판단합니다.”



사건 서류를 뒤적이던 안기부 국장이 부장 검사를 쳐다보았다.



“최 부장님은 범죄심리학을 전공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건 용의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이유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정신병원에 갇혔다가 탈출한 정신병 환자는 아닌지도 확인해 볼 필요는 없을까요.”



부장 검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탁자 앞으로 상체를 당겨 앉았다.



“연쇄살인범은 정신질환자와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주위 환경이라든지 유전자로부터 물려받은 성격의 질환이라고 보는 것이 더 가깝습니다. 보통 연쇄살인이란 이름이 붙으려면 범행동기가 정치적 또는 경제적 목적이 아닌 심리적, 성적 동기 등 개인적인 것입니다. 또한 특정 직업, 인종, 성별 등 특정 인물 그룹에 속한 사람만 골라 살해하는 경우도 숱하게 발견됩니다. 그리고 공격적 성향을 억제하는 분비물인 세로토닌이 부족해 사소한 일에도 강한 공격적 성향을 드러냅니다. 사이코패스는 이 같은 유전적, 생물학적 요인에 더해 사회 환경적 요인이 결합돼 나타나는 전인격적 병리현상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실제 사이코패스에 해당되는 연쇄살인범의 상당수는 범행 사실이 들통 나기 전까지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매력적이기까지 합니다. 또한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에 충실한 사람으로 이웃들에게 여겨지기도 하고요.”



“그럼, 이번 사건도 사이코패스의 소행일 가능성도 있겠군요.”

“글쎄요. 아직 밝혀진 증거가 부족하여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임무라고 생각도 합니다. 임무달성 동기는 세상을 정화하고 사회악을 없애기 위해서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없어져야 한다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동성연애자, 성매매 여성, 특정 인종, 특정 종교 신도 등을 없애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해 살인을 저지릅니다. 그리고 쾌락을 느낍니다. 쾌락의 동기는 사람을 죽이는 행위 자체에서 욕망의 충족, 긴장과 희열, 안정감 등 즐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탁자를 둘러싸고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부장검사의 말에 더욱 사건의 심각성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앉았던 수사국장이 일어서서 회의 참석자들을 둘러보았다.



“그럼 합동수사본부를 서울시경에 설치하고 공개수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상부에도 결과를 보고하고 정보가 입수되는 데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군의 수사당국에도 연락하겠지만, 다른 기관에서도 유기적인 공조수사를 부탁드립니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면 이것으로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회의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회의가 종결되고 각 기관에서 나온 회의참석자들은 참모진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대화를 나누면서 회의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부장검사와 치안감에게 수사방향에 대한 지시를 받은 조병문 경위는 대기하고 있던 임춘수 경위를 불러 바쁘게 검찰청을 빠져나갔다.



남산 분실에서 풀려난 강민우는 며칠째 종합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깁스한 다리를 지지대에 매달고 있는 그는 TV를 주시하며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뉴스가 방영되고 있는 TV화면에는 부산 폭력배사건에 대한 현장이 비쳐지고 있었다. 기어코 그가 염려하던 이진아가 세 번째 복수를 하는 사건이 다시 발생했어도 수수방관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탓할 수밖에 없다.



공개적으로 이미연에게 딸을 만나게 해주려고 했던 일들이 역효과가 나서 GIS에게 이진아의 신분을 알려준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를 고문하면서까지 GIS에서 추적하고 있는 이진아는 분명히 나머지 놈들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그는 분통이 터지고 답답하기만 했다.



입원실 문이 열리고 안경을 착용한 오민국 차장이 들어섰다. 강민우가 일어나 앉으려다가 통증을 느끼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침상으로 다가온 오 국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강민우의 팔을 어루만지며 위로를 했다.



“그냥 있어. 좀 어떤가?”

“견딜 만합니다.”

“흠, 그만한 게 다행이야. 언제부터 권진경을 데리고 있었나?”



오 국장은 GIS가 강민우를 납치하여 고문한 사유가 이진아를 찾기 위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강민우가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광주사태 당시였습니다. 이진아가 권진경이라는 사실은 최근에 알았습니다.”

“지금 GIS에서는 이진아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 정말, 자네는 이진아의 행방을 모르나?”

“저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자네 혼자의 힘으로 공룡을 상대하기는 무리네. JRS에서도 상대하기 버거워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지.”

“어떤 기회를 말씀하시는지.......!?”



강민우는 오 국장의 말이 너무나 막연하게만 들렸다. 지금 정치 상황으로 봐서는 JRS도 강민우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고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몸만 완쾌된다면 혼자의 힘으로 해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민심도 변하고 정치는 변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위해 레임덕이 되면 임기를 채우려는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일 생각이지. 이건 개인 문제가 아니니 이진아의 행방을 알게 되면 나한테 말하도록 해.”

“네.”



“GIS내부는 분란이 일어나고 있네.”

“어떤 분란 입니까?”



“다음 대선에 내세울 두 지도자를 놓고 알력이 생겼네. 오래전부터 그들의 지도자라고 지원했던 K와 현재의 국무총리. 뿐만 아니라, 총선과 대선을 치룰 자금을 마련하는 문제도 갈등하고 있네. 그들은 경쟁하듯이 하부조직으로부터 검은돈을 마구 긁어모으고 있는 상황이네.”

“그럼 두 지도자의 정치적 이념이 달라진 것 입니까?”

“이념보다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거를 이기고 보겠다는 생각이네. 그들의 정치 이념으로 지원하던 지도자와 여당과도 연합전선을 이루겠다는 지도자의 차이네.”



그때 입원실 문이 열리고 오민국 차장이 대동했던 안기부 요원이 들어왔다. 그리고 요원이 오 차장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요원에게 무슨 지시인가 내린 오 차장이 돌아서서 강민우에게 말했다.



“급한 일이 생겨서 가보겠네. 몸조리 잘하고.”

“네. 수고 하십시오.”



급하게 몸을 돌려 입원실 문으로 다가가던 오 차장이 주춤했다. 입원실 문이 열리고 카네이션을 손에 든 송나희와 과일과 음료수 상자를 든 유서연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들은 황급히 오 국장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녀들의 인사를 받은 오 국장은 넉넉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입원실 문을 나갔다. 오 국장의 뒷모습을 바라본 그녀들이 강민우의 침상으로 다가왔다. 카네이션이 꽂힌 꽃병을 침상 머리 탁자에 내려놓은 송나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프지 않아요?”

“괜찮아. 바쁠 텐데........”



유서연의 눈치를 살피는 강민우와 송나희는 친근한 감정이 있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강민우는 송나희의 손을 슬며시 움켜쥐었다. 생글거리며 다가온 유서연이 눈웃음을 쳤다.



“강 실장님! 내가 얼마나 걱정 했다고요.”

“고마워.”



과일상자를 내려놓은 유서연의 시선이 송나희와 강민우가 맞잡고 있는 손에 머물렀다. 은연중에 강민우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던 유서연은 질투를 느꼈다. 물론 강민우와 송나희가 가까워진 사이라는 것은 눈치 채고 있었지만,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고 평소에 생각하는 자유분방한 그녀의 성격이었다. 유서연이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고문을 당했으니 얼마나 힘드세요. 내가 병간인하러 자주 들릴게요.”

“.........”



유서연의 시선을 의식한 강민우는 어쩔 수없이 송나희의 손을 놓아주었다. 강민우와 시선이 마주친 송나희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눈치 없는 유서연은 강민우의 발밑에 손가방을 내려놓고 침상 머리로 다가섰다. 그리고 강민우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었다.



“면도도 못하고, 면도해드릴까요?”

“근무시간 중일 텐데.......”



한발 물러서서 말없이 쳐다보고 있던 송나희가 마지못해 유서연의 팔을 슬며시 잡아당겼다. 그리고 정색을 하는 유서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잠간 들린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가봐야 돼요.”

“언니, 바쁘지 않은데. 좀 있다 가면 안 돼나.”



아쉬운 표정을 지은 유서연이 면도를 하지 않은 강민우의 턱을 손으로 슬쩍 쓰다듬었다. 입원실 문이 벌컥 열리고 의사와 의료품을 담긴 카트기를 밀고 간호사들이 들어왔다. 담당의사의 정기진료 시간이 된 것이다. 그녀들은 어쩔 수없이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가야 할 수밖에 없었다. 강민우의 발밑에 놓았던 손가방을 집어 들던 유서연이 카트기에 밀려 휘청거렸다.



“아 얏!”

“어 멋! 미안해요.”



카트기를 밀고 들어왔던 간호사가 당황하였다. 유서연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그녀의 손가방 안에 들었던 화장품과 지갑 등 소지품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이맛살을 찌푸린 유서연이 스커트를 툭툭 털어내며 일어섰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간호사와 송나희가 엎드려서 바닥에 흩어진 소지품들을 주웠다. 간호사가 미안해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다치지 않았어요?”

“괜찮아요.”



얼굴을 찡그렸던 유서연은 강민우를 의식해서인지 생글거리는 미소를 띠었다. 쏟아졌던 소지품을 손가방에 챙겨 넣은 유서연과 송나희가 입원실 문을 나섰다. 그녀들이 병실을 나간 후 강민우의 상태를 진료한 의사가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강민우의 상처를 치료하고 붕대를 새로 갈아 감아 주었다. 형식적인 질문을 한 의사와 간호사들이 바쁘게 입원실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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