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모 - 27부





오늘 두 번째 하혈을 했다. 그래서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계속 여러 가지 검사를 하라고 시킨다. 하나 검사하고 기다렸다가 결과 나왔다고 하면 의사에게 가고, 또 의사는 다른 검사를 하라고 한다. 서무과에 접수하고 검사실로 가서 기다렸다 검사하고, 다시 의사에게 가서 기다렸다가 진료를 받았다. 이런 식으로 몇 시간을 보내자 화도 나고 초초해졌다.



“서혜경씨 들어오세요.”





“앉으세요..”



“.............”



“검사결과...유감입니다만 위암..입니다..”



“............그럼..수술을?”



“위암은 1기에서 4기로 분류하고 1기는 1A. 1B, 2기, 3기는3A. 3B, 4기로 세분할 수 있습니다. 서혜경씨 경우 대동맥 주위의 림프절 전이가 있습니다. 4기로 수술로 제거하기 어렵겠습니다.”



“그럼...”



“항암화학요법으로 치료해 나가야 합니다..”



“그럼...살 수 있나요?”



“..........5년 생존율로 통계가 있는데..10%미만입니다..”



“5년 동안 살아있을 확률이 10%가 안 된다는...말인가요?”



“네..그러나 최선을 다하면 간혹 좋은 결과...............”



더 이상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걸어 나왔다.



“엄마..괜찮아? 어디 아파?”



“응?”



어느새 집에 왔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딸을 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엄마 왜 그래? 응? 무슨 일이야?”



“현주야..엄마 죽고 싶지 않아..나 죽고 싶지 않아..흑흑흑”



“왜? 엄마가 왜 죽어! 응? 엄마?”



“흐극. 흑흑..엄마 암이래..수술도 못한데..”



“누가 그래? 병원에서 그래?”



“흑흑흑...응..”





“위암이라고 다 죽어! 안 죽어. 요즘...”



“흑흑..5년을 살 가망성이 10%가 안 된데..흑흑..”



“엄마...............”



현주도 울고 나도 울었다. 한참을 얼싸안고 울었더니 좀 진정이 된다. 아직도 머리가 멍하지만 그래도 눈물은 멈췄다.



“병원..내일 병원 가보자..알았지? 오진일거야..응? 그러니까..알았지?”



“응...”







현주와 다시 찾아간 병원에서도 위암 진단을 받고 의사의 권유에 따라 입원을 했다. 입원소식을 듣고 연주와 재석이가 달려왔다. 연주도 재석이도 현주에게 이야기를 듣고는 울었다. 그들의 울음을 보면서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어금니 꽉 물고 참으며 달랬다. 그래도 그 애들에게는 현주 앞에서처럼 추한 꼴 보이지 않아 다행이다.



“엄마....”



재석이가 내 손을 두 손으로 잡고 고개를 숙이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 모습에 눈물이 나오려 해서 창밖을 바라봤다. 나무에 새싹이 나고 있었다.





암환자 전용 병동이 있을 정도로 암환자가 많았다. 관심 없을 때는 몰랐는데 전체 사망자중 사분의 일이 암으로 죽는다고 한다. 시간은 흥분하고 좌절했던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고,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주었다. 입원한 병실은 2인실인데 나보다 먼저 입원한 애가 있었다.



“..............”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며 본 명찰에는 25살로 현주또래다. 우리는 암이 주는 절망감에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의사가 하는 말을 옆자리라는 이유로 듣게 되었는데 한번 수술했다가 이번에 재발했다고 하는 것 같다. 나보다 먼저 입원해 있었던 그녀는 너무 말라서 나이보다 어려 보였다. 머리에 털로 뜬 모자를 쓰고 있지만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모습은 너무나 가여운 것이었고 그 애에게 감정이 이입되면서 슬펐다.



“엄마..”



“왔어?”



“누나는 들어가..”



“응..그럼 내일 올게..”



고3인 연주는 저녁에 잠깐 오는 것만을 허락하고 현주가 회사를 휴직했다. 사회생활을 해보지 않아 잘 모르겠는데 하던 일이 있는데 휴직이 되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회사로 돌아갔을 때 그 사이 다른 사람을 뽑아 현주가 하던 일을 하고 있다면 현주는 어떻게 되는 건가? 걱정이었다.



병실에 있는 거야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검사하러 갈 때면 너무 무서워서 현주나 재석이가 있어줬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미안했지만 말리지 못했다. 저녁을 먹고 재석이가 온다. 재석이도 과외와 태권도장을 그만 두었다. 저녁부터 현주와 교대해서 아침에 현주가 다시 올 때까지 있어준다. 애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오늘은 어땠어?”



“응..그냥 검사하고 약 먹고..누워서 자고..텔레비전보고..그랬어..”



“엄마 그러다 뚱보 되겠다.”



“얘는~”



옆자리에 있는 애는 낮에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있다가 저녁이 되면 혼자였다. 병원이라는 곳이 밤이 더 무섭다. 병원은 아픈 사람들이 있는 곳이고, 그 중에는 죽는 사람도 많다. 25살이던 51살이던 그런 곳은 무서운 것이다. 특히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형선고를 받은 입장에서는 더욱 그랬다.



“참..화분하나 사왔어..”



“아..동백나무구나..”



“이게 동백나무야?”



“그럼 뭔지도 모르고 사왔어?”



“응..꽃이 예쁘기에..엄마 닮기도 했고..”



“호호. 정말? 엄마가 동백꽃 닮았어?”



“그럼~ 엄마가 더 예쁘지만..”



“얘는~”



처녀 적에 여수에 갔다가 동백나무 숲을 봤던 기억이 난다. 섬이었는데, 섬 전체가 붉은 꽃으로 활짝 피어있었고, 아름다운 사찰이 있었던 거 같다. 동백나무를 보니 그 곳에 다시 한 번 갔으면 하는 소망이 생겼다.



“음..내가 알아볼게..엄마 다 낳으면 같이 가자..스키장에 못 갔으니까 이번에는 꼭 데리고 갈게..”



“호호. 알았어..”



“귤 좀 사왔는데 줄까?”



“응..”



“귤 좀 드세요..누나..”



“.............”



“여기..놔둘게요..”



재석이가 옆에 애에게 몇 개를 집어 주고는 껍질을 깨끗이 벗겨내 하나씩 준다. 먹여주려는 것을 억지로 말렸다. 둘만 있었다면 받아먹었을 텐지만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그러지 못했다. 그래도 입 안에서 터지는 알갱이가 맛있다.



“공부는 잘 하고 있는 거지?”



“응. 걱정하지 마..나 엄마 닮아서 천재잖아..”



“으응..그래도 열심히 해야지..노력하는 사람. 이기는 천재는 없어..”



“알았어..”



처음 울었던 것에 비하면 잘 웃는다. 그러나 알고 있다. 이 애, 눈이 항상 빨갛다. 어딘가 어두운 구석에서 혼자 울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안쓰러웠다. 손 안 가득 느껴지는 부드러운 머리카락,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느낌을 가져본다.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재석이를 생각하면 그런 마음이 든다. 그러나 나는 사랑해서 좋았다. 사랑받아서 기뻤고, 나를 위해 울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가슴 벅찼다. 25살 여자애가 혼자 죽음과 싸우고 있는 동안에도 위로받고 있다.



“누울래?”



“아니..하루 종일 누워있었어..”



“그럼..좀 걸을래?”



“음...그럴까?”



“추우니까..이거 입어..”



“응..”



링거를 옷걸이 비슷한 행거에 걸고 밖으로 나갔다. 병동 안에는 기도실도 있고 매점과 식당이 있지만 갈 곳이 많지는 않다. 밖으로 나가자 한쪽 구석에 환자복을 입고서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아저씨들이 잔뜩 있다. 담배를 피울 수 있을 만큼 건강하던가 아픈데도 담배가 피고 싶을 만큼 좋은가 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종교라도 열심히 다녀 기도라도 하던가 담배나 배워 피워볼걸 그랬다.



“안 추워?”



“응. 좋아..”



나무 가지들 사이사이 새싹이 나오는 것을 봤는데 막상 나오니 찬바람과 어둠 때문에 봄을 느끼지 못하겠다. 잔디나 나무들이 더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거보다는 주차장이 더 넓다.



“여기 앉을까?”



“응..”



벤치에 앉자 재석이가 나를 가슴에 안는다. 금방 따듯해졌다. 어깨에 머리를 올리자 편안해졌다. 환자복 주머니 안에 먹지 않은 약들이 만져졌다. 복도나 병실에서 오고가며 마주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는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어차피 죽을 거면 그런 모진 고생을 다 하고, 아픔에 취한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엄마..”



“응..”



“떨고 있어..추워?”



“아니..무서워..”



죽음이 무서워서 눈물이 난다. 재석이나 애들 앞에서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감정 조절이 안 된다. 재석이가 눈물을 핥아먹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다. 재석이는 내 눈물을 먹어서 자기 눈물로 만든다. 나 역시 재석이 눈물을 먹었다. 그리고 내 눈물로 만들었다.



“울지 마..내가 옆에 있잖아..무서워하지 마..”



“응..그럴게...”



“음..”



오랜만에 키스를 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나는 여자이고 싶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잠깐 동안 암과 죽음을 잊는다.





“엄마..좀 더 숙여야지..거품 들어가겠어..”



“응..”



아침에 재석이가 머리를 감겨 주겠다고 했을 때 웃었다. 현주가 해주면 된다고 했는데도 자기도 하고 싶다며 고집을 부린다. 전에 그러기로 약속하지 않았냐는 말에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여름에 발리에 갔을 때였다. 벌써 반년이나 지난 이야기였다.



“엄마 머리카락 많다..샴푸가 계속 들어가..”



“............”



“빨래하는 거 같아..”



“너무 길어? 자를까?”



“아니..머리 길어서 좋아..”



옆 침대에 있는 애가 생각났다. 이런 이야기 들으면 가슴 아플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모습으로 변해갈걸 생각하니 슬펐다. 변해가는 내 모습을 보며 재석이도 안타까워 할 것이다.



“말시키니까 자꾸 거품을 먹잖아..”



“아..알았어..조용히 할게..”



재석이 말처럼 남이 감겨주는 손길이 좋다. 미용실에서 직업으로 의무적으로 감겨주는 것이 아니라 애정과 서투름이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옷 안으로 물이 계속 들어갔지만 온도가 적당해서 그냥 있었다. 거품과 비누기를 제거하고는 빨래처럼 짜서 수건으로 말려준다.



“어머! 어딜 손을 넣고 그래?”



“히히. 어때서..”



수건을 옷 안으로 넣어 닦아주는 척 하면서 가슴을 주무른다. 그 손길을 온전히 받으면서 투정을 부렸다. 그냥 주기는 심술이 나서였다.



“엄마~ 재석아~”



“응..우리 화장실에 있어..”



“뭐해?”



“..머리감아..”



“뭐야! 엄마 머리감기는 거야? 내가 와서 해도 되는데..”



“그냥..한번 해보고 싶어서..”



아들이 엄마 머리 감겨 주는 거야 무슨 흉이 될까마는 현주는 알고 있다. 나와 재석이 부모자식으로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그래서 민망했다. 암으로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연애질이라고 나중에라도 비웃을 거 같았다.



“나와. 내가 할게..”



“다했어..”



“왜? 아예 목욕을 시켜주지?”



“음..그럴까?”



나는 아무 말도 못하는데 둘이서 잘도 놀린다.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밖으로 나오니 여자애와 그녀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가 쳐다본다.



“참..화목하시네요..”



“..네...애들이 착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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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에 걸린 엄마가 불쌍하고 슬퍼해야 하는데 때때로 부럽기도 하고 얄미웠다. 아침에 재석이가 머리를 감겨주는 것을 봤을 때도 그랬다. 명색이 딸인데, 자신 앞에서 그러고 싶은지 궁금하다.



저녁이 되면 화장을 한다. 재석이가 올 때가 된 것이다. 나도 결혼하면 남편에게 어디서 아들하나 낳아서 오라고 해야겠다. 아니면 아들을 낳아서 그 애와 연애를 해 볼까? 그러면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어때?”



“응..예뻐..”



“그래?”



26살 먹은 딸내미는 연애도 못하고 늙어 가는데 51살 먹은 아줌마는 병원에서도 화사하다. 혹시나 밤에는 동침이라도 하는 거 아닌지, 괜히 옆 사람들 눈치를 봤다. 엄마를 위해서 1인실로 옮겨줘야 하는 것이 딸의 도리일지 생각해 본다.



“엄마..”



“응?”



“불편하면...1인실로 옮길까?”



“.........얘는...”



“싫어?”



“........그보다..연주는 잘 하고 있니?”



“응..아침에 학교 보내고..저녁에 보면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싫다고 안한다. 슬쩍 나가서 간호사에게 물으니 1인실 빈 곳이 없단다. 선심 한번 쓸려고 했는데, 이건 하느님도 시기하시는 것이 분명했다. 조금 고소하다.



“...........”



매점에 갔다 오는데 기도실에서 옆 침대 사람을 마주쳤다. 인사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정하지 못했다. 이 여자 울면서 나오고 있었다. 나보다 어린데..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저기요..”



“네?”



“이거..”



“.......”



어차피 같은 병실이다. 같이 걸었다.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라 좀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그녀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감정이 있었다.



“뭐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부담가지지 말고 얘기 하세요..동정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저희 엄마도 아파서..”



“...그래도 아줌마는 행복해 보이던데요..”



“....좀..푼수라서 그래요..하지만 혼자서 가끔 울어요..”



“알아요..무섭죠..죽는다는 것이..”



“..........”



엄마가 아프고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냉정하게 말해서 내가 아프고 죽는 거랑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슬픔과 외로움, 무서움을 다 알지는 못한다. 그것은 본인이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언니는..언니라고 해도 될까요?”



“네..제가 1살밖에 더 안 먹었지만..편한 데로 해요.”



“그래요? 그럼 26살?”



“네..”



“아줌마를 보면 부러워요..결혼도 해보고, 애들도 키웠고, 다들 좋아해주고 있고..”



“.........”



“전 18살에 처음 수술해서 연애한번 못해봤어요..죽는 것이 너무 억울해요..”



“.........”



“아빠, 엄마는 저 때문에 고생하고, 속상해 하고...흑..”



또 운다. 가슴에 싸인 한이 많았다. 그동안 이별도 경험하고, 아버지의 불륜과 엄마의 근친도 보고 자신도 여러 가지 힘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애에 비하면 그런 건 행복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들은 살아 있기 때문에 겪는 아픔이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새로운 사랑에 대한 희망도 있고, 목표도 있다.



“아~ 많이 울어서 다 비운 줄 알았는데..아직도 눈물이 남아있네요..”



“...........”



“미안해요..괜히..”



“그런 거..신경 쓰지 마세요..저..어떤 위로도 드리지 못해서..”



“호호. 그게 나아요..어설픈 위로보다는..”



김다희, 이 애 이름이다. 그 일을 계기로 많이 친해졌다. 스스럼없이 대화도 하고, 먹을 것이 생기면 나눠도 먹었다. 그렇게 여자 넷이 아픔을 잊어 보려고 노력한다.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잘 모를 때에도 항암제를 복용하고 괴로워하는 그녀를 보는 것이 유쾌하지 않았는데 이름도 알고 가까워지면서 그녀의 고통 역시 다가왔다. 그녀가 힘들어 할 때면 우리 사이에는 얇은 커튼 한 장이 가로막았지만 그걸로 그녀의 고통을 감추지는 못했다.



“으으.....”



고통이 가득 담긴 신음소리, 몸부림, 그리고 열기, 피부로 느껴지는 공기부터 다르다. 침대 두 개와 약간의 공간만이 있는 병실은 그녀에게서 나오는 죽음의 무게에 짓눌렸다. 엄마는 두려움과 안타까움이 섞인 얼굴로 잔뜩 굳어져 내 손만을 꼭 잡고 버텼다.



단지 병실 밖으로 나온 것만으로 공기의 질이 달라진 것을 느낀다. 그 기억은 나를 병실 밖으로 내몰았지만 혼자 두려움에 떨 엄마를 생각하면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흑흑....”



다희는 아픔을 견디다 못해 울곤 했다. 그 울음은 그녀의 엄마에게 옮겨가고 다시 우리에게 왔다. 솔직한 심정은 엄마가 그런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엄마가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아픔일 것이다.



“진통제 놔 드릴게요..”



몰핀이라는 마약이라고 들었다. 마약은 무조건 안 좋은 거라는 선입관이 있었다. 하지만 이 공간 안에서 절대로 안 좋은 것이란 없다. 백해무익하다고 말하는 마약조차도 여기서는 성약이다.



그녀가 잠이 든 것처럼 조용해지고 밖으로 나왔다. 지금 이 순간 내 머리를 가득 채운 것은 그녀의 고통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 건강하다는 것에 대한 안도와 감사였다.





--------------





재석이가 과외를 그만 두었다. 과외를 하는 날이면 재석이가 신경 쓰이고 부담스러워 몇 번이나 그만두려고 했었는데, 막상 재석이를 보지 못하게 되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허전했다. 이렇게 끝이 난다는 것이 가슴 시리도록 허무했다. 첫사랑 때처럼 울면서 난리를 치는 것이 더 낳았다고 생각했다.



“뭐 생각해?”



“응? 별로..”



“....재석이?”



“...........”



슬기에게도 미안하게 됐다. 그 둘이 연애를 하든 말든 신경 쓰지 말았어야 했다. 괜히 어쭙잖은 충고라고 해 놓고 슬기에게 상처를 줬다. 친구의 애인을 빼앗은 것처럼 재석과 관계를 맺고는 또 혼자서 정리를 해 버린 꼴이다. 이래서는 친구 잘 되는 꼴을 못 봐 훼방만 놓은 것이 되었다.



“너에게 미안하다..”



“........그래...나도 화났던 것도 사실이야..네가 미웠어..”



“..............”



“이제는 괜찮아..재석이 볼 때는 좀 괴로웠는데..안보니까 별 생각 없더라..”



나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슬기가 재석이와 키스를 했던 것은, 물론 호감은 있었겠지만 분위기를 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제는 괜찮다고 말하는 슬기를 보니 그게 아니다. 슬기는 재석이에게 마음을 줬던 것 같다. 슬기 같은 타입은 한번 마음을 주면 걷어내는 것도 어렵다. 아직도 좋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



그러나 자신이 슬기를 도와줄 수는 없다. 나도. 아직 감정 정리가 안 돼 있다. 지금 슬기를 위해 나선다는 것은 핑계가 될 것이다. 내 몸이 그 애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슬기가 재석이와 만난다면 지금 심정으로는 슬기도 보기 힘들 것이다.



“술이나 할까?”



“호호. 술 때문에 그런 일을 격고도 마시고 싶니?”



“그래서 맛 들였나봐..”



“그래..오랜만에 둘이 마시자..”



한동안 양주에 콜라를 타 마셨는데 오늘은 소주를 샀다. 술꾼들처럼 라면하나 끓여놓고 마주 앉아서 마셨다. 소주가 쉽게 넘어갔다. 소주가 아무리 쓰다고 해도 지금 마음보다는 덜 했다. 사람들이 소주를 즐겨 마시는 이유도 그 때문인 듯하다.



“언제부터 좋았니?”



“재석이? 음...왜 영화 보던 날..”



“멋지긴 했었지..그거 보고? 참...센티멘털하네..”



“호호. 그게 아니고..병원에 갔었는데...다친 손을 들어 보이며 웃더라..멋있지 않냐고? 그러면서 사실은 무서웠다고 하는데..”



“..........”



“그 애...떨고 있었거든..싸우기 전에도..싸우고 나서도 한동안...막 안아주고 싶었는데..”



“..............”



“분식집에 갔는데..어쩌다보니 먹여주게 됐는데...그때도..”



“..............”



“지하철에서..손을 다쳐서 그거..못한다고..나보고 해달라고 농담을 하는데..나..해주고 싶어서..해줄까? 하고 말하려고 했는데...”



“..............”



“만약에...”



“응....”



“그 날...내가 그걸 했으면 지금...어떻게 되었을까? 나 역시..헤어졌을까?”



“.......”



지금 당장은 아닐 것이다. 경험상 한창 행복해 하고 있을 시기였다. 2년 혹은 3년, 어쩌면 10년 까지도 사랑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 때가 되면 슬기는 31살. 재석이는 25살.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그래서 말렸던 거였다. 결국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 생각해 봤는데...네 말처럼 돼서 후회한다고 해도.....”



“그래...네 말이 맞아...미안해..”



결혼. 그것이 기준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순결한 상태에서 결혼하는 것이 슬기의 목표라고 미리 예단했었다. 그것이 슬기의 목표가 맞는다고 해도 그 후 행복하게 살 거라 장담할 수 없어졌다. 사촌언니의 모습이 그랬다.



“호호..지난일 자꾸 생각하면 뭐하나 싶은데..잘 잊히지 않네..”



“..............”



슬기는 울었다. 말하면서 울었다. 잊었다고 해 놓고서는 울었다. 아마도 이것이 슬기의 첫사랑이 아닐까 생각했다. 고개를 돌려 창을 봤다. 눈이 온다. 그날, 따듯했던 그 날 처럼..





--------------





엄마가 아파서 제일 싫은 것 중에 하나가 동정이다. 허연 화장을 떡칠이 되도록 한 가면마녀까지도 어설픈 위로와 동정을 한다. 차라리 봉투 하나 줄었다고 슬퍼한다면 그나마 참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엄마가 말한 섬..찾았다.”



“어딘데?”



“응..오동도.”



“맞다. 오동도였지..”



그래서 나도 엄마 앞에서 울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슬퍼도 엄마보다 슬프지는 않을 것이고, 나의 눈물이 엄마의 병을 낳게도 못하지만 기쁘게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대신 웃었다. 가슴을 채우는 슬픔을 누르고 엄마를 위해 웃었다.



“그런데 동백꽃을 보려면 4월이 절정이라네..”



“음..그러고 보니..엄마 갔을 때도 그 무렵이었던 거 같네..”



“엄마는..참..네..”



“호호. 너무 오래됐으니까 그렇지..너도 엄마 나이 되 봐..”



“히히. 나는 아마 못 잊을걸..”



“그래...넌 잊지 마...”



“4월이면 얼마 안 남았는데..어떡하지?”



“음..잠깐 퇴원해도 되고...의사선생님께 부탁해서 외출 허가를 받아도 되고..”



“음..그런 수도 있구나..”



엄마는 입원을 했지만 암의 진행을 늦추지는 못하고 있다. 의사는 우리를 불러놓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좀 냉정하게 들렸다. 전에 의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만화를 본적이 있는데, 거기서 의사가 환자를 인간으로 생각을 하면 수술을 하기도 힘들고, 수술 후 결과가 잘못되면 견디지 못한다는 내용을 봤었다. 그 때는 의사도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엄마가 환자가 되고 보니 또 다르다. 환자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면, 나는 의사가 기술자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은 입장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 뿐이다. 우리 엄마가 아프니까. 곧 죽을지도 모르니까. 의사든 하느님이든 의지하게 된다. 너무 의지하다 보니 원망도 하게 된다. 나, 내 가족, 내 것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의사가 나중에 그 일로 고통을 받던 말든 상관하지 않고 지금 순간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인간은 그런 존재다.



“그럼..누나에게는 내가 말할까?”



“음...엄마가 말할게..”



“알았어..”



아마도 엄마도 누나도 이것이 마지막일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의사가 포기한 순간 우리가 찾을 것은 신뿐이 없었다. 여수에는 향일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새벽에 올라가 일출도 보고 그 암자에서 기도를 하려고 한다.



“가능하면...둘이 갔으면 좋겠다..”



“호호호..”



4월의 남쪽 바다는 따듯했으면 좋겠다.

엄마가 춥지 않을 정도로만이라도 따듯했으면 좋겠다.

가는 길이 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동도 전체에 동백꽃이 활짝 피었으면 좋겠다.

일출을 볼 수 있도록 날씨가 맑았으면 좋겠다.

암자가 상상처럼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암자에 계신 부처님이 내 소원을 듣고 엄마의 병을 고쳐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는 활짝 웃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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