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쉰넷에 1 - 10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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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에 결국은 나도 남들처럼 그렇게 팔려나가게 됐죠.

뚝섬에 있는 섬유공장이었는데,,,,



내가 창성섬유에 팔려 나가게 되니까 순영이 자기도 같이 가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김과장이란 분의 손에 이끌려 순영과 나는 작은 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뚝섬에 있는 창성섬유에 가게 되었어요.



폴리에스텔 원사를 가져다 가공을 해서 남품하는 회사였는데 여공이 60명정도 됐어요.

20명씩 조를 짜서 3교대 근무를 했죠.



여공들은 모두 공장 기숙사에서 기거 했는데, 보통 한 방에 7~8명씩 있었어요.

내와 순영이 있는 방에도 일곱 명이 같이 있게 되었는데, 순영과 내가 제일 어렸고,

나이가 제일 많은 순금이 언니는 22살이었어요.



순영과 나는 한 방을 썼지만 근무조가 달라서 같이 잘 기회는 별로 없었어요.

더구나 여럿이 같이 쓰는 방이라 쑥골에서와 같은 장난을 한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어요.



기숙사에는 사감 언니가 있었는데, 가끔 여공들을 모아놓고 교육을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실례를 들어 가면서 여공들끼리 음란행위를 하다 들키면 즉시 보따리 싸서 내쫓는다고

항상 엄포를 놓고는 했죠.



그런대로 공장 생활에 익숙해 지니까 견딜 만 하더라고요.

3개조가 교대근무를 하다 보면 3주에 한번 하루 종일 쉴 수 있는 날이 있거든요.



그러면 제기동에서 봉제공장에 다니는 셋째 언니한테 가서 놀기도 하고,

몇 명이 어울려 영화구경도 하고,,,

3주에 한번 노는 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외출을 할 수가 없었어요.



외출을 하려면 사감언니한테 외출증을 받아야 하는데 얼마나 꼬치꼬치 묻고,

깐깐한지 차라리 외출을 안 하는 게 더 편했으니까요.



돈 쓸 일이 별로 없으니, 작지만 받는 월급은 통장에 꼬박꼬박 싸여 가고,

불어 나는 통장잔고 쳐다보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었어요.



여름휴가 같은 말은 요즘에 생긴 말이고, 휴가라고는 추석에 3일 구정에 3일 쉬는 게 고작이었어요.



그럭저럭 여름도 가고 추석이 돌아 올 때 쯤은 나에게도 많은 변화가 생겼어요.



그렇게 쌔까맣던 얼굴도 이제는 벗어져서 제법 흰 색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몸에 살도 좀 붙어서, 제법 수돗물 먹은 티가 나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회사 내에서 제법 남자들의 관심도 끌기 시작했죠.



하기는 회사 내의 남자들이란 사장님까지 합해서 겨우 11명이었는데

그 중에 총각이라고는 단 네 명 뿐이었어요.



사무실에 자재를 담당하는 상고 출신이 하나 있었고, 각 조마다 1명씩 배치된 기사들이 3명 있었어요.

순영이 조에 배치된 유기사는 그 해에 공고를 졸업한 여드름 투성이에 아랫입술이 불룩 나와서

아주 기형적으로 보이고, 수줍음이 얼마나 많은지 여공들 하고 말도 잘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속한 조를 담당하는 사람은 26살이나 먹었는데, 얼굴이 우락부락하고,

덩치가 아주 큰 사람인데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서글서글해서 여공들 중에는 은근히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 때부터 정기사가 은근히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사실 나는 전혀 관심이 없었거든요.

내 맘 속에는 항상 덕수 오빠가 들어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덩치만 크고,

좀 바보스럽게 보이는 정기사를 받아드릴 수 있겠어요.



야간 근무를 할 때는 은근히 사무실로 불러서 서류정리 하는 일을 도우라고 하면서 한,

두 시간씩 쉬게도 해주고, 빵이나 과일을 사다 놨다가 나한테만 주기도 했어요.



난 그저 그 사람이 나를 어린 동생으로 생각하는 줄로 생각했고,

나도 자상한 큰 오빠 정도로 생각하고 지냈어요.



추석에 3일을 노는데, 그 때의 교통사정으로는 도저히 고향에까지 다녀 온다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엄마, 아빠도 보고 싶고 고향에도 가고 싶었지만,

포기하고 제기동 셋째 언니네 자취방에 가서 언니하고 같이 지내기로 했죠.



그렇게 고향 떠나 온지도 어느덧 일년이 지나가고, 흰 눈이 오는 크리스마스가 다가 왔어요.

당시에 성탄절은 지금 분위기 하고는 많이 달랐던 거로 기억되네요.

아니면 소녀 때의 감성 때문인지도 모르고요.

아무튼 지금보다는 더 열 뛴 분위기였어요.



모처럼 통금도 해제되고 모든 사람이 길거리로 뛰쳐 나가서 명동에는 사람의 물결로 넘쳐 났었으니까요.

모처럼 크리스마스날은 공장도 하루 쉬기로 하였고, 외출도 맘대로 할 수 있게 해 줬어요.

순영이 하고 나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 언니 두 명 하고 명동으로 나갔어요.



서울 온지 일 년 만에 나도 드디어 명동에 가게 된 거죠.

그 흥청거리는 분위기에 휩쓸려 음악다방이란 곳도 가보고,

빈대떡 집에서 막걸리도 홀짝거려보고, 너무 신나는 하루였어요.

열한 시쯤 아쉬운 마음으로 회사로 들어왔어요.



회사 정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있고 공장과 남자 기숙사 사이로 골목이 있어서,

그 골목을 통해서 여자 기숙사로 가게 되어 있었어요.



명동에서의 분위기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채로 웃고 떠들면서 골목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남자 기숙사 창문이 열리면서 정기사가 얼굴을 불쑥 내밀더라고요.



“가스나들이 일찍일찍 다니지 어데 갔다 덜 이제오노.”

“너덜은 일찍 들어 가고 순아는 나 점 보제이”

“왜요” 내가 묻자

“선물 하나 줄라 칸다”

“우리는 안 주고 왜 순아만 줘요”

“느그덜 것은 내가 다로 준비했으이, 낼 줄거마 빨랑 가 자구라”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먼저 기숙사로 들어 가고 정기사가 손에 큼지막한 상자를 하나 들고 나오더니,



“니 나 좀 따라 온나”

“여기서 그냥 주셔도 되는데,,,”



어린 나이에 정기사 손에 들린 선물의 유혹도 있었고,

설마 회사 안에서 어쩌랴 싶어서 줄줄 뒤를 따라갔어요.



정기사가 방치실 문 손잡이를 돌리는 걸 보고 얼른 되돌아서려는데,

내 팔목을 잡더니 우악스럽게 나를 안으로 몰아 넣더라고요.



포리에스텔 원사를 가공하면 마치 털실과 비슷한 모양이 되는데,

가공이 끝난 실은 이 방치실로 옮겨서 36시간이상 방치를 해 놓아야 되요.



가능한 빛이 없는 곳에서 온도와 습도를 잘 맞춰줘야 하거든요.

그래서 방치실은 항상 사물이 잘 안보일 정도로 어두컴컴하고, 따뜻했어요.



바닥에는 실이 산처럼 쌓여 있어서 일하기 싫을 때 이 곳에 와서 한 시간쯤 자고 나가기도 하곤 하는데,,,,,,,,,,,,,,



이 방치실에 관해서는 기숙사 언니들한테 들은 말이 많았거든요

전에 다니던 누구는 어떤 기사하고 방치실에서 씹을 하다 걸려서 쫓겨 났다는 등,

누구는 어느 기사한테 끌려들어가서 강간을 당하고 목을 맸다는 이야기까지 아주 전설이 많은 곳이었어요.



그런데, 바로 내가,,,,



발버둥을 치고 소리를 치려는데 정기사 이놈이 손 바닥 내 얼굴보다 커요.

입을 꽉 틀어 막는데, 눈까지 가려지고 숨이 콱 막히더라고요.



입을 막은 채로 나를 번쩍 들고 방치실 뒷 편 구석으로 가서 실더미 위에다 내려 놓더라고요.

한 손은 내 팔목을 꽉 잡은채로,



“소리쳐 봐야 암소용 업데이”

“정기사님 우리 말로 해요. 이 손 놓구요”



얼굴이 벌개져서,

“순아야! 걱정말레이 나가 다 책임질 거구마 그러니 내말 들우라”

“ 그래요 내가 말 잘들을 테니 이 손 좀 놔줘요.”



말로 살살 달래도 보고, 울고불고 살려 달라고 애원도 해 봤지만 이 놈이 우악스럽게 달려드는데,,,,

힘은 어떻게 세던지,

한 손으로 내 두 손을 움켜쥐고는 한 손으로는 내 바지를 찢듯이 잡아 끌어내리는 거에요.



죽을 힘을 다해 버텨봤지만 10분을 못 넘기고 전신에 힘이 빠져 나가더라고요.

내 힘이 빠지자 내가 포기한 건 줄 아는지 얼굴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그거 보레이, 니가 말 잘 들으면 서로 이렇게 편찬나. 와 그리 고집이 세노.

내가 다 책임질 겅게 암 걱정말레이”



암 말도 못하고 울기만 하는데,,,,

이 놈은 벌써 내 바지를 팬티 채로 벗겨버리고 그 우악스런 손으로 내 보지를 만지려고 하는 거예요.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어떻게 반항할 수도 없고, 이 놈의 손이 보지를 만지기 시작하는데,

죽고 싶기만 하더라고요.



“제발, 제발 ,만지지 말아요. 그냥 맘대로 해도 가만히 있을 테니, 제발 만지지 말아요.”



오늘은 공장이 쉬는 날이니 이 방치실에 누가 올 리도 없고,

이미 지칠 대로 지쳐서 내가 이 상황은 벗어 날 수가 없다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엉엉 울면서 다시 한번 사정해 봤지만 눈알이 벌개져 갖고 덤벼드는 데는 방법이 없었어요.



이놈도 더 시간을 끌어 봐야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바지를 훌렁 벗고 자지를 꺼내는데,,,



내가 기껏 본 거는 덕수오빠 자지뿐인데 그 것도 14살 때였으니, 겨우 어른 손가락만 했었거든요.

시커먼데 당시 생각으론 마치 괴물 같았어요.

그걸 한 손으로 잡고 다짜고짜, 내 보지 속으로 밀어 넣는 거에요.



“억!”



난 그 순간 기절을 하고 말았어요.



“야! 순아야! 정신차리레이, 정신차리레이”



이놈이 내 얼굴을 쳐 대는 바람에 정신이 돌아 오더라고요.

내 보지는 쑤시고 아픈데 뭐가 꽉 차 있는 느낌이기도 하고, 뻥 떨어져서 허전한 느낌도 들고,,,,,

이놈은 내가 기절해 있는 동안 지 욕심을 다 채운 거 같았어요.



“으흐헉” 하면서, 막혔던 숨과 함께 울음이 터져 나오더라고요.



아래가 하도 아파 내려다 보니 온통 피 칠을 했는데, 겁이 더럭 나는 게,

그 때부터는 아프고 서러워서가 아니고 무서워서 울게 되더군요.



이놈이 그래도 양심은 좀 있는지 한 팔로 나를 안고 달래는 거에요.

30분 넘어 엉엉거리며 울었나 봐요.



실뭉치 하나 들고 가더니 물을 묻혀다가 내 아랫도리를 닦아 주더니 바지도 입혀주고,

자기가 모든 걸 책임질 테니, 이제는 그만 울고 들어가 자라네요.



소문나면 안되니 조용히 하라고,

이런 나쁜 놈이 소문나면 안될 일을 왜 해 가지고 내 인생을 망쳐 놯는지?

어떻든 거기에 그 놈하고 더 있기는 싫었어요.



울음을 삼키며, 일어서려는데 통증이 몰려 오면서 휘청거리게 되더라고요.

그놈은 두 손으로 나를 부축하여 일으켜서는 여자기숙사 앞까지 데려다 주고는,,,



“조심하레이, 내가 다 책임질 겅께 걱정말고,,”



다행이 오늘은 다들 외박을 하는지, 순영이 혼자 골아 떨어져 자고 있을 뿐이데요.

이불 뒤집어 쓰고 있는데 온 몸이 와들와들 떨리고, 아무런 생각도 안 나는 거에요.



죽어야지, 죽어야지, 죽으면 되는 거야.

그저 죽는 말만 속으로 수 없이 했던 거 같아요.



그러다 잠바 하나 걸치고는 밖으로 나갔어요.

경비 아저씨가 구벅꾸벅 졸다가 내가 나가니까 깜작 놀라 일어나더니,,,,



“아니 이 새벽에 어디 가려고? 지금은 못나간다.”



아무 말 않고 문 빗장을 여는데 쫓아 나오더니 옷자락을 잡으며, ,,,,



“아니, 얘가 갑자기 미쳤나, 못 나간다는데, 왜 이러나”



내가 고개를 돌리고 아저씨를 쳐다 봤더니, 몸을 움칫하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 서시더라고요.

마치 귀신을 본 듯한 표정이었어요.



하기는 죽으러 가는 길이었으니, 이미 반은 귀신이었는지도 모르죠.

더는 나를 잡지 못하더라고요.



공장에서 뚝도시장까지 10여분 길을 눈길에 몇 번이나, 넘어졌는지 몰라요.

눈물은 왜 그렇게 흘러 내리는지?



입으로는 ‘죽어야지’를 연신 되뇌면서, 한 없이 걸었어요.

뚝도시장에서 정수장을 거쳐 경마장 앞까지 걸어 오니 날이 훤해 오면서 버스가 하나씩 다니기 시작하군요

.

사람들이 성탄절 새벽 미사를 마치고 삼삼오오 길거리로 나오는데 죄 지은 년 모양 쳐다 볼 수가 없었어요.



제기동 언니네 자취방 앞에 까지 갔는데,,문을 잡고 당겨 보니 안으로 잠겼더라고요.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그 자리에 주저 앉았어요.



그 동안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두 다리를 버리쩡거리며, 울기 시작했어요.

언니가 놀라 나와서는,,,

겨우겨우 안다시피 나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 갔는데,,,,,



언니가 나를 안고 아무리 달래도 내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나중에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면서 언니도 같이 울더라고요.

하도 울어서 목이 잠겨,

울음 소리 마저 안 나올 때까지 울었나 봐요.



울면서 한 말이라고는 그저 ‘나 죽어’ 한 마디 뿐이었으니, 언니는 얼마나 놀랬겠어요.



그렇게 서너 시간이나 울다가 그냥 잠이 들었어요.

잠결에 누가 내 머리를 자꾸 쓸어 내리는 바람에 깨어 보니,

언니가 내 머리를 자구 슬어 내리고 있더라고요.



몇 시간이나 잤는지, 밖은 이미 칠흑 같고,

언니는 그 동안 꼼짝 안고 나에게 무릎을 베어 주고 있었나 봐요.



“일어났니?”

“무슨 일 있었니?”



뭔가 말을 하고 싶어 입을 여는데 아무 소리가 안 나는 거예요.

목이 메어 오면서 또 울음이 나는데, 울음소리도 안 나오고, 눈에서 눈물만 비 오듯 쏟아지고,,,,,,,



내가 죽었구나.

내가 죽어서 이제는 말도 못하고 소리 내어 울 수도 없구나.

죽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그렇게 울고 또 울고, 지치면 잠이 들고, 잠이 깨면 또 울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언니도 내가 울면 따라 울고,

내가 잠들면 옆에 앉아 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면서 ,삼일 밤 낮을 꼬박 세웠어요.



나중에 언니한테 들은 얘기지만,

내가 자다가도 가끔 ‘흑흑’거리며 눈물을 흘리는데 꿈 속에서도 우는 것 같더래요.



그러니 언니가 한 숨이라도 잘 수가 있겠어요.

그렇게 사흘이 지나가니 조금씩 마음이 갈아 안더라고요.



언니가 끓여다 주는 미음을 한 숟가락씩 받아 먹으며,

일주일이 더 지나자 겨우 입을 벌려 말을 할 수가 있더라고요.



다행히 언니가 다니는 봉제공장주인 내외가 아주 착한 분들이라 언니가 공장에 안 나가자 찾아와 보고는,

내가 그러고 있으니 죽도 끓여다 주고

반찬도 한,두 가지 해다 주시면서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 주시더라고요.



그 날 내가 당했던 일을 언니한테 다 말했어요.



중간중간 언니하고 같이 끌어 안고 울고 또 울고,,,



언니가 공장에 찾아가서 내 짐을 챙겨오고,

나는 언니네 집에서 한 발작도 안 나간 채로 삼 개월이 지났어요.



삼월 어느 날 언니 손에 이끌려 다시 정선으로 가게 됐어요.



엄마 아빠를 보자 또 울음이 나오는데,

엄마 아빠는 어린 딸이 객지에서 너무 고생해서 그런 줄 아시더라 고요.



내려온 김에 언니도 한 일주일 집에 같이 있으면서,

엄마 아빠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고,

이제는 다 잊고 새롭게 살자고 다짐다짐 하고는 다시 서울로 떠났어요.



기차역까지 가는 동안 언니는 땀이 나도록 내 손을 꼭 쥐고 가면서,

절대로 다른 맘 먹지말고 굳굳이 버티라고, 엄마 아빠 생각해서라도 절대 다른 맘 먹으면 안 된다고,,,



들에는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산에는 진달래가 활짝 펴서 온 산이 분홍으로 물들었어요.

나는 그저 방안에 틀어 박혀, 가끔 훌쩍거리며 울기도 하고,

창문 열고 흘러 가는 구름이나 쳐다 보면서 지냈어요.



엄마 아빠는 문 밖에도 안 나가고, 날로 파리해져 가는 막내 딸을 보며,

걱정을 하시기는 했지만, 이제 본격적인 농사철이라 너무 바쁘셔서 딸 걱정만 하고 계실 수는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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