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쉰넷에 1 - 11부

11.

유월 초의 어느 날이었어요.

모내기가 한창이었고, 농부들에게는 일년 중 가장 바쁜 시기였죠.

지금은 5월 중순이면 모내기가 다 끝나던데,,,,,,

그때는 6월도 중순이 넘어야 모내기를 마쳤던 거 같아요.

강원도라 그랬는지도 모르고요.

그 바쁜 와중에 엄마 아빠는 깨끗한 옷 갈아 입으시고, 쑥골에 다녀 오신다고,,,,,

“집 잘 보고 있어라, 쑥골 좀 다녀 올란다.”

한창 더워지기 시작하는 무렵인데, 아빠는 흰색 두루마기까지 입으셨더라 고요.

저녁 무렵에 돌아 오신 엄마 아빠는 수심이 가득한 표정이었어요.

“아이구, 그 형님도 늙으막에 겨우 그 아들 하나 둔 건데, 쯔쯔쯔,,,,,”

“그러니 어째요?”

“오래 살 거 같지는 안던데,,,,,”

“그러게 말에요”

머리에 벼락을 맞은 것 같았어요.

쑥골에서 우리 아빠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덕수오빠네 아버지가 유일한 사람이었거든요.

지금 엄마 아빠는 덕수오빠가 오래 살 것 같지 않다는 말씀을 나누고 있었던 거에요.

“덕수오빠요?”

소리치듯 물었어요.

“그래, 폐병 걸려 집에 와 있는데 오래 살 거 같지는 않더라. 허 참!”

눈 앞이 깜깜해 오더라고요.

“어린 나이에 객지 나가 그리 고생했으니,,,,,,”

“공부도 그렇게 잘 한다고 만나기만 하면 자랑이더구먼,,,”

“허~ 참! 그러니 이제 그 형님은 어떻게 살지~ 원”

“두 노인네가 아들보다 먼저 가게 생겼습디다.”

“왜 안 그러겠어? 어떤 아들인데,,,,, 허~허 ~참.”

눈 앞이 깜깜한데,,,,,,

머리 속은 하얗게 되어 아무 생각 없었어요.

한 참을 아무 소리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 붙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 내일은 너도 시간 내서 한 번 가 봐라.”

“어려서 둘이 그렇게 붙어 다녔는데,,,,,”

“폐병은 전염된다더라. 가더라도 너무 붙어 앉지 말고!”



밤새 울었어요.

이제는 오빠한테 시집 가지 못하게 된 내 신세를 한탄하면서,,,,

이제 곧 죽을 거라는 덕수 오빠를 생각하면서,,,,,,

내 몸은 이제 더럽게 됐는데,

오빠를 만나면 오빠는 내 과거를 다 알 거 같았어요.

나를 더러운 년이라고 쳐다 보지도 안을 거 같은데,,,,,

이 년의 신세가,,,,



오빠는 죽어 가고 있다는데,,,,,

오빠가 죽어 가고 있다는데,,,,,



얼마나 울었는지 베개가 펑하게 젖었더라 고요.

날이 밝기 무섭게 옷 차려 입고 나서니,

아빠가 꼬깃꼬깃한 돈 내밀며, ‘고기라도 한 근 사 가지고 가 봐라.’

‘폐병 전염되는 거다. 조심하고,,,’



싸리고개를 넘어 가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길이 안보이더군요.



그 와중에도 오빠네 엄마 아빠는 일하러 나가셨고,

오빠는 그 너럭바위에 비스듬히 누워 하늘만 쳐다 보고 있더라고요.

“오 빠!”

오면서 다짐 다짐했어요.

오빠를 보면 결코 울지 않겠다고.

싸리고개서 싫건 울고,,,

오빠 만나면 방긋 웃어주겠다고.



“어~~엉”

그렇게 다짐했는데,,,,

오빠 품에 쓰러져지자 울음이 쏟아지는데,,,,

어~~~엉, 어~~~엉”

오빠는 한 손으로 내 어깨를 토닥이며,

“그래 순아 많이 컸구나, 울지 마라! 울지마! 뚝!”



동네가 워낙 작아서 너럭바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동네 전체가 알게 되요.

내가 우는 소리에 조용하던 동네가 깨어 나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6촌 네가 농사 짓고 있는 그 산비탈 밭에서 일하시던, 오빠네 엄마 아빠, 그리고 6촌네 내외, 또 오래 전부터 같이 살던 이웃들이 하던 일 다 멈추고 너럭바위로 모였죠.



“순아 왔구나”

“어쩜 이렇게 이뻐졌니?”

“아유~~ 이제 처녀 다 됐네. 시집가야 겠구나.”

울음을 속으로 삼키며, 그래도 일일이 인사를 했어요.

“그래, 재 작년인가 와 보고 한 이태 됐지?”

“어쩜 이렇게 이쁘니? 그때하곤 또 다르네”



그제서야 오빠를 바로 보게 됐어요.

키는 멀쭝하게 커졌는데,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이 두 볼은 쑥 들어 갔고,

반 소매 남방 밖으로 나온 오빠의 두 팔뚝은 뼈 위에 가죽만 씌워 놓은 거 같았어요.

나를 보며 살짝 웃어 주는데, 가슴이 메어지는 거에요.

어렸을 때 그 얼굴, 밤마다 그리던 그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오빠네 엄마는 부지런히 부엌으로 들어가서 국수를 차려 내 오시고, 정말 오랜만에 너럭바위 위에는 동네 사람 다 모여서 무슨 잔치 상이라도 벌어진 거 같았어요.

오빠네 아빠는 처음 나를 보고는 ‘순아 왔냐’ 그 한 마디 하신 게 전부였어.요.

국수를 다 드시고, 막걸리를 한 대접 따라 드시고는 아무 말 없이 일하시던 밭으로 가시고,,,,,

그렇게 다 자기 일터로 가시고 너럭바위 위에는 오빠와 나 둘만 남았네요.



“오~빠! 나 안보고 싶었어!”

“그래 안 보고 싶었다.”

내 귀를 잡고 한 번 흔들었다 놓네요.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오빠네 엄마가 오셔서,

‘순아야 이제 가야지.’

“더 늦으면 걱정하실 라”

“ 좀만 더 있다 요.”

“그래 이제 가 봐라. 넘 늦으면 해 떨어지기 전에 못 갈라.”

오빠도 거드네요.

오빠와 헤어진 지, 6년만인데,

아직 아무 얘기도 못했는데,,,,,

나한테 빨리 가래요

오빠는 내가 이미 다 더럽혀져서 오빠의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하나 봐요.

나 같은 건 쳐다 보기도 싫은가 봐요.





또 그 긴 싸리 고개를 너머 오면서 울고, 울고 집에 와서는 방으로 들어가 이불 뒤집어 쓰고 또 울고,

그래 나 같은 걸 오빠가 생각이나 했겠어?

그래 잘 됐어.

어차피 오빠한테는 시집도 못 갈 텐데 뭘.

엄마 아빠 말대로 오빠가 죽으면 어쩌지?

그래, 잘됐어 오빠가 죽으면 나도 죽지 뭐.



아냐, 요즘은 의학이 발달해서 결핵 정도는 쉽게 고친다던데,,,

병 다 고쳐서 다시 서울로 가버리면,,,,

온갖 생각을 하게 되고,

세상의 모든 불행은 모두 나에게 다가 온 것 갖고,,



밤 새 단 한숨도 잘 수가 없었어요.

엄마 아빠하고도 단 한 마디 말도 안 하는 날이 늘어 갔어요.

방에서 꼼짝 않고 있는 날의 연속이었죠.

엄마는 어떻게 던 나한테 무슨 말이라도 시켜 보려고 하셨지만,,,,,



내가 그러고 있는 사이 동네에서는 이미 나에 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요.

순영이네 엄마가 친척 결혼식이 있어 서울에 갔다가, 순영을 만나고 온 거예요.

결국은 우리 부모님 귀에까지 들어 온 거죠.

엄마는 나를 끌어 안고,

“이 죽일 것”

“이 죽일 것”

“너하고 나하고 같이 죽자”

“죽자, 죽어”



엄마하고, 나는 식음을 전폐한 채 자리에 누웠고,

아빠는 아침부터 막걸리 주전자하고 같이 지냈어요.

집안은 빈 집처럼 적막했고,,,,



당시에 여자가 순결을 잃는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어요.

잘해야 자기를 강간한 그 나쁜 놈에게 시집 가거나, 그 것도 남자 집안에서 크게 인심이라도 베풀어야 가능한 일이었죠..

아니면, 죽은 듯이 집안에 박혀 있다가 애 몇 달린 집 재추자리로 한 밤중에 동네를 떠나는 것이 고작이었고요.

좀 더 양반집입네 하는 집안에서는 부모의 체면 때문에 은근히 자살을 강요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정선 그 작은 동네에서도 일년에 한,두건씩은 그런 자살 사건이 생겼고, 저 나무는 누가 목맨 나무, 저 연못은 누가 빠져 죽은 연못,,,,,,



아빠의 전보를 받은 셋째 언니가 내려 오고, 고한에 있는 광산 기사한테 시집간 큰언니, 정육점 집으로 시집간 둘째 언니, 군대에 가 있던 오빠만 빼고 다 모였어요.



모처럼 온 식구가 모였지만 웃음기라고는 하나 없고, 한 마디로 초상집이었죠.

셋째 언니는 이미 알고 있던 일이라, 씩씩거리며, ‘이 죽일 년, 저 죽일 년’하면서 순영이 엄마를 욕해댔고,,,,

큰 언니, 작은 언니는 소리도 못 내고 이불에 머리를 파 묻은 채로 울었어요



나를 뺀 식구들이 모여, 모은 의견은,

내가 셋째 언니를 따라 서울에 가 있는 게 제일 좋다는 결론이었고,

서울에 가서 미용기술이나 양장기술이라도 좀 배워서 지내다 보면 좋은 사람 나타나지 않겠느냐 하는 거였어요.



나는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서울에 안 가겠다고 버티고,,,,,

엄마는 또 같이 죽자고 말만 되 뇌이고,,,



결국 엄마하고 나는 쑥골 옛집에 가서 당분간 지내다 마음이 좀 정리되면,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모두 헤어졌어요.



셋째 언니가 서울로 올라 가기 전에 순영네 집에 찾아 가서 얼마나 악다구를 했는지 지금까지도 순영네와 우리 집은 왕래가 없이 지낸답니다.



아빠가 쑥골에 가셔서 한 열흘이나 넘게 집을 손 보고, 보따리 하나 싸 들고 엄마와 난 쑥골로 가게 됐죠.



덕수 오빠도 나도 아직 십대였지만 이미 마음은 육십도 넘었어요.

개울에서 둘이 같이 고기 잡고, 가재 잡으며 뛰놀던 철없고 순진했던 시절은 이미 다 가버리고, 서로 속이고 감추고, 참고,,,,,,



느티나무 아래 너럭바위는 거의 하루 종일 내 차지가 되고, 칠월 그 찌는듯한 복더위에도 오빠는 하루 종일 방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어요.

사람들이 폐병환자라고 마음 속으로는 피하고 있으면서도, 막상 얼굴 대하면 그럴 수도 없자 나요.

오빠는 가능한 사람을 피하게 되고, 그 찌는 더위에도 방안에서만 보냈던 거에요



하루 몇 차래 어쩔 수 없이 밖에 나오게 되면,

“순아 잘 잤니?’

“순아 오늘 얼굴 좋아 보이네”

그 게 전부였고, 나도 오빠한테 할 말이 없었죠.



새벽이면 오빠의 기침하는 소리가 우리 집까지 들려서 내가 잠을 깨는데, 3~4분씩이나 계속 되는 그 기침 소리는 내 숨을 멈추게 하고,

끝내는 심장까지 멎게 하는 느낌이었어요.

나뿐이 아니고 엄마도, 아니면 그 동네 사시던 모든 사람들이 꼭 같았을 거에요.



기침 소리가 그칠 때쯤 나가 보면 삽으로 풀섶을 파고, 양푼에 담긴 핏덩어리를 묻고 있는 오빠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나는 느티나무 밑에 앉아 흘러 가는 구름이나 멍하니 쳐다보고 있고, 엄마는 손바닥만한 텃밭의 밭고랑이 윤이 나도록 하루 종일 앉아 계시는 게 일이 었어요.



다섯 가구가 사는 쑥골은 하루하루 그렇게 지나 가고, 일주에 한 번씩 읍내 보건소 아가씨가 오빠의 약을 들고 찾아 와서, 객담을 받아 가고 가끔은 동네 사람 전부의 객담을 받아 갔죠.

그런 날은 오빠의 모습은 하루 종일 볼 수 없었어요.



오빠네 집 마당에는 화덕을 만들어 놓고 작은 솥을 걸어 놨는데, 하루 종일 연기가 그치지 않았어요.

오빠네 아빠는 틈만 나면 뱀을 잡아다 그 솥에 넣고는 했고, 다른 동네 어른들도 그렇게 했어요.



단풍이 쑥골 전체를 불태우듯 붉게 물들일 때쯤, 오빠의 기침소리는 점점 수그러 들기 시작했고, 오빠가 나한테 하는 말 수는 조금씩 많아지기 시작했지요.



가끔씩 너럭바위에 나란히 앉아, 그 동안 지냈던 얘기도 하게 되고, 둘이 손잡고 들국화가 노랗게 펴 있는 산길을 걷기도 했어요.



오빠가 청계천 공구상에 있으면서, 야간대학에 입학하기 까지 어떻게 공부했는지를 말해주는데, 나는 너무 호강하고 살아 왔다 싶데요.

“오빠! 나도 공부해서 고등학교 다닐래”

“그래? 그래 너도 하면 될 거야.”



그렇게 나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어요.

오빠는 정말 나한테 잘 가르쳐 줬어요.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쳐 줬던 것 보다 열 배는 더 잘 가르쳐 주는 것 같았죠.



추수가 끝나고 아빠도 쑥골로 오셨어요.

오빠의 기침 소리는 이제 멎었고, 얼굴에 살도 올라서 누가 봐도 미남이라고 할 만큼 멋져 졌어요.

파리했던 내 얼굴도 이제 제법 화색이 돌고,,,,



쑥골에 눈이 쌓이고, 오빠는 내 공부를 돌봐 준다고 우리 집에 와 살다시피 했고, 우리 엄마 아빠도, 오빠네 엄마 아빠도, 그리고 다른 동네 어른들도 앞으로 나하고 오빠하고 결혼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 때쯤 나도 그 동안 잃어 버렸던 자위행위도 하게 되고,,,

오빠를 생각하면서 하는 자위행위는 정말 좋았어요.

뚝섬에서 정기사에게 그렇게 당하고 난 후 전혀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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