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월드컵의 추억 - 단편10장

프랑스 월드컵의 추억혜미를 만나고나서 며칠 뒤였다.

운전 면허 학원을 다녀 오는 길에 누나에게서 연락이 왔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평소엔 연락을 잘 하지 않는 그녀였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민혁아..아빠가 쓰러지셨대..흑..흑-



울먹이느라 말 끝을 제대로 맺지 못하는 그녀,

그녀의 얘기를 듣는 순간,

무언가에 머리를 얻어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온갖 나쁜 생각이 순식간에 나를 사로잡으며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



쉽게 믿기가 힘들었다.

아침에만 해도 분명히 멀쩡하게 출근을 하셨는데,

그가 갑작스럽게 쓰러졌다는게,

도저히 믿을수가 없었다.



나는 누나와 통화를 마친 뒤에

곧바로 아버지가 계신다는 병원으로 달려 갔다.

30분 후쯤 도착한 그곳엔 이미 엄마와 누나,

그리고 아버지 회사분들 3-4분이 와계셨다.



아버지는 앉아 계시기가 힘들었던 듯,

자리에 누워서 눈을 감고 계셨다.

병원으로 오는길에 막연히 상상은 했지만,

실제로 그가 초라하게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깐,

울컥하면서 눈물이 핑 도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옆에가서 그의 손이라도 잡고서,

도데체 왜 그런거냐고 묻고 싶은데,

차마 다가갈수가 없었다.



-은행 다녀오시는 길에 쓰러지셨대-



누나가 먼저 내가 궁금해 하는 걸 말해주었다.

원래부터 아버지는 혈압과 위가 좋으신 편은 아니였다.

그런데 근래들어 음주, 과로, 그리고 극심한 스트레스까지,

모든것이 한꺼번에 몇달 사이 몰리면서

찌는 날씨와 함께 몸이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고 했다.





잠시후,

검사 결과가 나와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잘못 쓰러지셨으면 큰일 날뻔 했다면서,

이것 저것 조심해야 하고,

충분히 안정을 취해야지 회복을 할 수 있다는 그의 말에,

나는 아주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구나 싶어서,

진심으로 감사했다.



하지만,

나만큼이나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계셨던 그가,

생천처음으로 쓰러져 병원에 누워있는 모습을 본 나는,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대한 충격에서 한동안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보내놓고,

고집스럽게 그의 곁에 남아 있었다.

딱히 집에 가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지 내 마음이 조금 편할 것 같았다.



모처럼만에,

그가 잠든 모습을 보았다.

예전에 그렇게 강하게만 보이셨던 그,

그런 그는 어디간데 없고,

지금은 힘이 빠진 50대 중년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그를 위해서든, 가족을 위해서든,

열심히 세상과 싸우다 지치고 힘이 빠진,

남자이자, 한 집안의 가장이 쓸쓸히 잠이 든 모습이었다.



그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했다.

가끔은 아들에게,

회사에 와서 심부름이라도 해라 라고 말하셔도 괜찮은데,

형편이 좋지 않아 보여주고 싶지 않으신건지,

좀처럼 그는 내게 그런 여지를 주지 않았었다.



그게 뭐가 그렇게 대수인지 모르겠다.

한학기 미리 휴학을 하고

그의 회사라도 잠시 다녀볼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분명히 원치 않을 것 같았다.





지금 그는,

어떤 꿈을 꾸면서,

잠이 들어있는건지 모르겠다.



그저 나는,

이 순간만이라도 그가,

아무 걱정없이 마음 편하게

쉴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다음날,



아버지 곁에 있다가 과외를 가기 위해

병원을 빠져나가는 길이었다.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저기..김민혁씨 핸드폰인가요?-

-네..그런데요..어디시죠?-

-저는 이상호라고 합니다..-



‘이상호?’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목소리도 전혀 낯이 익지 않았다.



-음..누구시죠?-

-네..혹시 혜미라고 아시죠?-



‘혜미?’



그의 입에서 혜미의 이름이 나오자

순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직감적으로 무언가 좋지 않은 기분을 느꼈다.



-네..그런데 혜미는 왜 물으시죠?-



나는,

약간의 경계심을 보이며

그에게 용건을 물었다.

그는 잠시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얼마후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20대 후반 정도로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는,

침착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단호한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그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게 어느새 5분 정도 흘렀던 것 같다.



그가 어떤 이유에서 내게 전화를 건지도 알겠고,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지도 알 수 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가 어떤 스타일의 남자인지도,

대략 느낄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내 그의 얘기가 끝났다.

그제서야 나는,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일단 저는 혜미 남자친구는 아니구요..

-네..-

-저는 두분 사이에 끼고 싶지 않습니다.-

-….-

-두분 일은 두분이 알아서 하셨으면 좋겠구요..-

-네..-

-그렇게까지 부탁하시니깐..제가 혜미한테 태도는 확실히 할께요-

-네..감사합니다..죄송하기도 하구요..-

-아니예요..그렇게 해야죠..대신 혜미한테 잘해주시구요..-

-네..알겠습니다.-

-제가 답할수 있는 건 다 드렸는데..그럼 저는 통화 끊을께요..-

-네..-





통화를 마치고 나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가 말한 얘기들의 내용은 둘째치고,

마치 내가 죄를 지은것 마냥 찝찝한 기분도 들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생기게끔 만든

혜미에게 가장 짜증이 났다.





한참동안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1주일째 얼굴을 못본 혜미의 얼굴,

그녀와 보냈던 마지막 밤,.

그리고 그날 밤 그녀가 내게 했던 말,

모든 것이 순식간에 거짓말처럼 떠올랐다.



-우리 다시 만날래?-



그말을 하면서,

그녀가 내게 지었던 표정이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도데체 무슨 생각으로 그 얘기를 한걸까?

나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녀가 괘씸해 지기 시작했다.

나를 두고 또다시 누군가와 저울질을 했다는 것에 화가 났다.





전화기를 꺼내들어 그녀에게 연락을 했다.

잠시 신호움이 울리고 나서

곧바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민혁아..-



그녀의 목소리는,

아무것도 예상하지 않은 듯,

무척 밝은 목소리였다.



-어디야?-

-밖이야..친구들이랑 있어..아버지는 어떠셔?-

-그냥 그렇지..-

-그래..다들 힘들겠다 병원에서..-

-응..-



나는,

아버지 상태와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그녀의 물음에,

짧은 단답식으로 대답을 했다.

머릿속에서는 어서 빨리 그녀에게

속 얘기를 꺼내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혜미야-

-응?..-

-너랑 프랑스 여행 갔던 남자..그 남자 이름이 이상호야?-



그녀가,

내 물음에 잠시 움찔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참뒤에야 대답을 해왔다.



-음..어..그런데 왜?-

-아까전에 전화왔었어..나한테..-

-너한테? 왜?..너 번호는 어떻게 알고?-

-모르지 뭐..네 전화를 본건지..은희한테 물어본건지..-

-아..-



잠시,

그녀의 목소리가 흥분했다가

다시 가라앉는듯 했다.

나는 말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갔다.



-그게 중요한건 아니고..단도직입적으로 말할께..-

-…-

-나, 너네 둘 사이에 껴서 이상한 놈 만들지마-

-…-

-남의 여자 친구 뺏어 오면서까지 너 만나고 싶지도 않고…

너랑 나랑 하루 이틀도 아니고, 조금 웃기자나..안그래?

나 그렇지 않아도 요새 아버지 때문에 신경 예민한데,

너까지 그러니깐 짜증이 확난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너 나한테 얼마나 솔직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 당분간 연락하지 말자..알았지?-



나는 쉴새 없이 그녀를 몰아부쳤다.

그녀는 아직까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한 듯 싶었다.

나는 그녀가 어떤 말을 할지 궁금치도 않았다.

사실 듣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었다.



-할말 없지? 나 그럼 끊는다..-



나는,

곧바로 전화기를 접으며 통화를 끊었다.

하지만 잠시후 무언가가 떠올라,

그녀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나 찾아오거나 하지마..진심이다.

나 너 보기 싫으니깐 연락하지마. 부탁할께-





5분후,

그녀에게선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고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통화를 하고, 화를 내고,

문자까지 다 보내서 할 말 다 했는데도,

마음이 개운할 것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이상하게 아려오는 것 같았다.





혜미,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이성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끔 해준 그녀,



그런 그녀와,

이제 정말 마지막이다,

볼 수 없다라는 생각을 하니

한편으로는 실감이 잘 나질 않았다.



하지만,

내 말을 번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더 이상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7월의 마지막쯤,

1년 6개월간에 내 마음속에 있던 그녀를,

나는 그렇게 한편으로 밀어내려 했었다.





그날도 역시,

날씨는 미친듯이 더웠었고,

나는 하루 왠 종일,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지내야만 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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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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