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천사 - 10부
2018.05.23 10:50
10. 넌 누구?
최면에 빠진 연주양을 바라보며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이미 솔직함에 대한 신뢰를 잃은 환자에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환자에 대한 치료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의사로서 사회적 양심에 반하는 일에 동조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망설임은 있었지만 나는 마음을 굳히고 이 일을 하기로 했다. 치료가 아닌 진실에의 접근을.
“여긴 비밀의 방이에요. 연주양만이 열어볼 수 있는 연주양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곳이죠. 그래서 무엇이든 이야기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해요. 솔직해질 수 있는 자유로운 곳이죠. 어때요, 편안하죠?”
“네,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 남에게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여기 이 방에 숨겨 놓도록 해요. 그러고 나면 마음에 있던 짐도 사라지고 마음이 아주 가벼워질 겁니다. 자, 제일 먼저 무엇을 숨기면 좋을까요?”
“숨길 건……”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없어요.”
그 말이 내겐 충격이었다. 어떻게 마음에 숨길 것이 하나도 없을까? 경험상으로도, 내가 연주양과 했던 상담의 내용으로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잘 생각해 봐요. 아마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하나쯤은 있을 거에요.”
그 때 들려온 연주양의 소리에서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전혀 없어요.”
그건 연주양의 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은 연주양의 목소리를 빌어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연주양의 본질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소리라고.
짧은 순간 연주양을 지켜보다 강수를 뒀다.
“당신은 누구죠?”
“……”
“대답을 하세요. 당신은 누구죠?”
대답이 즉각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그 존재가 연주양이 아님을 나타내는 증거였다. 이건 분명이 연주양이 아닌 섣부른 판단을 하기 어려운 다른 무엇임에 틀림없었다.
“왜 연주양 속에 있는 거죠? 당신이 원하는 게 뭡니까?”
“……”
“말하지 않으면 당신을 연주양 밖으로 끌어내겠습니다.”
“넌 그럴 수 없어!”
순간 연주양이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봤다. 잠시 놀랐지만 나도 지지 않고 연주양의 눈을 바라봤다. 잠시 후 연주양은 다시 눈을 감았다. 더 놀라운 일은 그 후에 일어났다. 나의 암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주양이 스스로 눈을 뜨며 최면에서 일상의 의식상태로 전이한 것이었다.
“머리가 좀 아파요.”
“연주양?”
“네?”
순순한 대답이 그녀로 돌아온 것이 확실했다.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요?”
“아뇨. 아무 것도. 뭐가 잘못됐나요?”
“오늘은 최면집중이 잘 안되는 것 같군요. 다음에 다시 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하죠. 머리가 아픈 건 일시적일 거에요. 혹시 시간이 많이 지나도 계속 아프면 바로 연락해줘요. 알았죠?”
“네, 선생님. 저도 오늘 컨디션이 좀 그러네요.”
진단서를 요청할 줄 알았던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갔다. 어쩌면 그녀의 무의식이 어서 여기를 떠나고 싶어 하는 지도 몰랐다. 연주양을 내보내고, 나는 상담일지를 쓰며 스스로 약간의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아까의 상황을 다중인격장애의 다른 인격의 출현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내 마음에 집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다중최면 중의 선최면이 방어기재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란 추론이었다. 다시 말해서 앞서 누군가 연주양에게 최면암시를 걸어서 자신의 내면을 다른 이에게 보이지 않도록 문을 잠근 것이다! 이 특별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머리 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멍청히 창 밖을 바라보다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나다, 진석이. 시간 괜찮니?”
“어, 그래. 회의가 있어서 나가봐야 하긴 하지만 한 5분쯤 시간 있다.”
“간단하게 물어보마. 전에 나에게 보낸 정연주양 있지?”
“왜 뭔 문제라도 생겼냐?”
“연주양 나에게 보내기 전에 혹시 너네 병원에서 정신과 상담했었니?”
“어…… 그랬지.”
“담당은?”
“혜리… 였어.”
“……”
“무슨 문제라도 생겼냐?”
“아니. 알았다.”
전화기를 거칠게 내려 놓으며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개자식!”
“뭐라구요? 지금 욕하신 거에요?”
무언가를 들고 들어오던 이양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제길!
“아, 아니에요.”
“아니긴요! 내 두 귀로 분명히 들었는데. 선생님 그런 욕도 하실 줄 아세요? 놀라운데요!”
“그건 뭐에요?”
“흠…… 좀 전에 우체부 다녀갔어요. 선생님 앞으로 온 우편물들이에요. 월요일이라서 그런지 좀 많네요.”
이양이 다가와 내 책상 앞에 여러 개의 우편물을 내려놨다. 그리곤 조금 흘기는 듯한 눈매로 밖으로 나갔다.
“으이구……”
그 뒤에 ‘내 팔자야!’하는 말이 붙으려다 참았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말이다.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신경정신과 유혜립니다.”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점심 시간을 이용해 S종합병원 구내 커피숍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들이 무척이나 길고 초조하게 느껴졌다.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라 여겼던 그녀였다. 한 때는 내 여자였지만 지금은 남의 여자인 사람이었고, 그 과정에는 상처도 있었다. 무엇보다 내 부족함에 대한 자책으로 다시 그녀를 마주할 용기 따위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 내가 그녀를 만난다. 내가 그녀를 만날 결심을 한 것은 아마도 내 안에 무언가 변화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오랜 만이에요, 선배.”
가운을 입은 채 앞에 선 그녀를 올려다 보다 천천히 일어섰다.
“오랜만이다.”
“그러게요.”
자리에 앉는 그녀의 모습을 바로 보지 않았다. 내 시선은 테이블을 향했다.
“생각 못했어요. 선배가 전화 할 줄은.”
그냥 웃었다. 그랬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시간 내줘서 고마워.”
“별말씀을요.”
“잘 지내지?”
“저야, 뭐. 선배도 잘 지내죠?”
“나도 뭐 그렇지.”
“그런데 어쩐 일이에요?”
“간단하게 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렇다고 전화로 물어보기도 그렇고 해서.”
“네…… 참, 차는 뭘로 드시겠어요? 여기 셀프라서요.”
“아, 그렇군. 뭘로 할래?”
“여기 저희 병원이잖아요. 손님접대는 제가 해야죠.”
“그런가… 난 헤이즐럿.”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문대로 갔다. 그제서야 나는 시선을 들고 그녀를 봤다. 언제나 단정하던 모습 그대로 오늘의 그녀도 그랬다. 가운이 무척 잘 어울리는 그녀. 참 총명했었지.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미친 듯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고마워.”
“괜찮나 모르겠네요. 선배는 맛보다 향을 더 중요시하곤 했었잖아요.”
“별 걸 다 기억하는군.”
“그러게요. 시간 지나도 저절로 생각이 나네요. 후훗……”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셔본다.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내색할 필요는 없겠지.
“별로죠?”
“음? 아니. 괜찮아.”
“다행이네요.”
“바쁠 테니 간단하게 말할게. 몇 개월 전에 한 환자를 상담했을 거야. 정연주라고. 대학 2학년 여학생. 기억 나?”
“아…… 우리 병원 이사장 손자하고 something 있었다던?”
“그렇다고 하더군.”
“기억나요. 임신중절 수술 후에 정신적 스트레스와 불면증을 호소했었죠.”
“그 때 혹시 뭐 특별하거나 이상한 거 기억 나는 거 없어?”
“글쎄요. 당시 상담기록을 봐야 알겠지만 지금 생각에는 별 특별한 건 없었던 것 같은데요.”
“그런가?”
“왜요? 혹시 선배한테 갔어요?”
“응.”
“그래요? 어떻게 알고요?”
“현호가 소개를 했다고 하더군.”
“그이… 가요?”
“음. 아마 이사장 손자 문제고 해서 일부러 외부에서 상담을 받았으면 했던 모양이지.”
“나한텐 그런 이야기 없었는데……”
“내부 사정이 있었겠지.”
“네……”
“몇 번 상담을 해보니 무언가 좀 이상한 게 있어서 말야.”
“이상한 거요?”
“음. 혹시 치료하면서 다중인격체 성향을 보이지는 않았나?”
“다중인격체요? 아뇨. 전혀.”
“그럼 혹시 최면요법 사용은?”
“그럴 이유가 없었죠. 스트레스와 불면증 정도에 최면요법을 이용할 이유가 없잖아요. 현실적인 건데.”
“그랬군…… 그럼 혹시 혜리가 상담하기 전에 다른 곳에서 상담을 받았단 적은 없다고 하던가?”
“글쎄요… 그런 이야긴 기억에 없고 어디 시골에 있는 종교단체 수련원에 있었다고는 들었어요.”
“그래? 거기가 어딘데?”
“그건 기억에 없구요, 상담기록을 봐야 알 것 같은데요.”
“좀 알아봐줄 수 있을까?”
“공식적으론 좀 어려운데……”
“부탁해.”
“선배 부탁이니 제가 찾아볼게요. 근데 저희는 개인병원이 아니어서 제 환자였다고 해서 지난 상담 화일을 마구 열어볼 수는 없구요. 음… 아, 요즘 제가 논문 준비하는 게 있으니 사례연구에 참고하는 걸로 해보죠.”
“고마워.”
“아니에요. 뭐라도 도움이 된다면 기쁘죠.”
또 그냥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부탁하고 갈게.”
“네. 연락드릴께요.”
밖으로 나가는 회전문에서 나는 몇 걸음 뒤에 서서 나를 보는 창문에 비친 그녀의 눈을 봤다. 비록 거울로 보듯 또렷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촉촉한 그녀의 눈빛 만은 변함없이 반짝이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그 눈길에 내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다시 바라보지 말자던 그녀의 눈을.
(이양이 어디 갔지?)
다시 병원으로 왔을 때 당연히 자리에 있어야 할 이양이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보다 했지만 테이블에 있는 오늘의 스케줄 표를 보며 기다려도 이양은 금방 나타나지 않았다.
(어딜 가면 간다고 메모라도 남길 것이지.)
오후 스케줄을 확인하곤 내 자리로 돌아왔다. 잠시 생각 속에 있다가 책상 위에 던져둔 온갖 우편물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은 기분전환 삼아 내용물을 확인해본다. 회보, 청첩장, 고지서 등을 넘기다 눈에 들어온 편지 하나. 정상적인 우편물이 아닌 소인 없는 직접 배달의 편지. 고개를 갸웃한다. 이게 뭘까? 겉봉엔 그저 받는 사람에 내 이름과 병원 이름이 있을 뿐이다.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는 프린터된 글씨들.
봉투를 뜯자 그 속엔 카드 한 장이 들어있었다. 앞 면에 검은 테두리가 있고, 그 안에 장미 꽃 한 송이가 꽃잎이 뜯겨진 모습의 이상한 그림.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럼에도 궁금증에 봉투를 열어본다.
(이, 이건……)
편집된 사진인 그 속엔 내가 빗 속에 주희씨의 아파트 앞에 서 있던 모습, 어둡기는 하지만 희미하게 옥상출입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내 물건을 입에 물고 있던 주희씨의 모습, 그리고 그녀와 내가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써 있는 한 줄.
< 이게 당신의 실체인가? >
“선생님 언제 오셨어요?”
느닷없이 상담실에 들어서는 이양을 보고 나는 얼음처럼 굳어졌다.
“노, 노크 좀 하세요.”
“문이 열려있어서 들어와본 건데요?”
“그, 그래요?”
“언제 오셨어요?”
“좀 전에요.”
“배가 고파서 간식거리 좀 사러 간 사이 오셨군요. 참, 선생님 점심 시간에 그렇게 오래 나가 계시면 어떻게 해요? 공연히 기다리다가 식사 때만 놓쳤잖아요. 전화기도 안 갖고 가시고.”
“내가 그, 그랬어요?”
“아무래도 정신 상담은 선생님이 좀 받으셔야 할 것 같아요. 쿠쿠…… 그렇게 정신 없으셔서 환자들 보시겠어요?”
“별 걱정을 다… 암튼 늦어서 미안해요. 시간이 이렇게 늦어질 줄 내가 미쳐 생각을 못했군요.”
“대신 오늘 저녁 한 잔 사주세요. 그럼 용서해드리죠. 어때요?”
“이따가 상황 봐서 다시 이야기 하죠. 내가 지금은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건 좀 곤란한데요!”
이럴 때 이양은 참 피곤하다. 왜 이렇게 아무 때나 저돌적인지.
(아무래도 강박증의 초기증세가 아닌지 상담을 해봐야, 아니지. 내가 스스로 이양이 파놓은 무덤 속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겠지. 또 무슨 꼬투리로 날 피곤하게 할지 모르니 말야.)
스스로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인다.
“오호! 지금 승낙하신 거죠?”
“뭐, 뭘요?”
“고개 끄덕이셨잖아요.”
“내가 언제요?”
“헐! 절 지금 장님 취급하시는 거에요? 분명히 고개 끄덕이셨다고요.”
(아이고… 맙소사!)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냥 순순히 한 잔 사주고 말자.
“알았어요. 사요, 사.”
“헤헤…… 불금은 아니지만 불월을 한 번 만들어 볼까나?”
“뭐라구요?”
“음… 뭐 그건 이따가 생각해도 될 것 같고… 차 한 잔 드릴까요”
“괜찮아요.”
“드릴게요.”
“괜찮다잖아요!”
“왜요?”
“먹고 왔어요!”
“어디서요?”
“그걸 내가 다 이야기 해야 돼요?”
“아뇨.”
“근데 왜 자꾸 물어봐요?”
“주인님 상황을 파악하는 건 노예로서의 의무니까요.”
“뭐라구요?”
“그럼 일 보세요. 헤헷!”
문을 닫고 나가는 이양의 뒷모습에 문득 꼬리가 아홉 개 달렸다던 구미호가 연상됐다. 아무래도 내가 홀린 것이 아닐까?
그러다 말고 내 손에 들린 카드의 사진에 다시 눈길이 간다. 이게 무슨 뜻일까?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경고장? 아니면 돈푼이라도 뜯어내겠다는 짓거리? 그도 아니면…… 뭐지? 한참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스토커라도 되는 건가?
어떤 이유가 되었든 기분이 좋지 않다. 숨겨진 어둠 속의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불안감. 어떤 위협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나만의 영역에 누군가 침입했다는 불쾌감.
(넌 누구냐? 뭘 원하는 거지?)
눈에 그리고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최면에 빠진 연주양을 바라보며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이미 솔직함에 대한 신뢰를 잃은 환자에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환자에 대한 치료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의사로서 사회적 양심에 반하는 일에 동조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망설임은 있었지만 나는 마음을 굳히고 이 일을 하기로 했다. 치료가 아닌 진실에의 접근을.
“여긴 비밀의 방이에요. 연주양만이 열어볼 수 있는 연주양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곳이죠. 그래서 무엇이든 이야기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해요. 솔직해질 수 있는 자유로운 곳이죠. 어때요, 편안하죠?”
“네,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 남에게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여기 이 방에 숨겨 놓도록 해요. 그러고 나면 마음에 있던 짐도 사라지고 마음이 아주 가벼워질 겁니다. 자, 제일 먼저 무엇을 숨기면 좋을까요?”
“숨길 건……”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없어요.”
그 말이 내겐 충격이었다. 어떻게 마음에 숨길 것이 하나도 없을까? 경험상으로도, 내가 연주양과 했던 상담의 내용으로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잘 생각해 봐요. 아마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하나쯤은 있을 거에요.”
그 때 들려온 연주양의 소리에서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전혀 없어요.”
그건 연주양의 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은 연주양의 목소리를 빌어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연주양의 본질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소리라고.
짧은 순간 연주양을 지켜보다 강수를 뒀다.
“당신은 누구죠?”
“……”
“대답을 하세요. 당신은 누구죠?”
대답이 즉각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그 존재가 연주양이 아님을 나타내는 증거였다. 이건 분명이 연주양이 아닌 섣부른 판단을 하기 어려운 다른 무엇임에 틀림없었다.
“왜 연주양 속에 있는 거죠? 당신이 원하는 게 뭡니까?”
“……”
“말하지 않으면 당신을 연주양 밖으로 끌어내겠습니다.”
“넌 그럴 수 없어!”
순간 연주양이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봤다. 잠시 놀랐지만 나도 지지 않고 연주양의 눈을 바라봤다. 잠시 후 연주양은 다시 눈을 감았다. 더 놀라운 일은 그 후에 일어났다. 나의 암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주양이 스스로 눈을 뜨며 최면에서 일상의 의식상태로 전이한 것이었다.
“머리가 좀 아파요.”
“연주양?”
“네?”
순순한 대답이 그녀로 돌아온 것이 확실했다.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요?”
“아뇨. 아무 것도. 뭐가 잘못됐나요?”
“오늘은 최면집중이 잘 안되는 것 같군요. 다음에 다시 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하죠. 머리가 아픈 건 일시적일 거에요. 혹시 시간이 많이 지나도 계속 아프면 바로 연락해줘요. 알았죠?”
“네, 선생님. 저도 오늘 컨디션이 좀 그러네요.”
진단서를 요청할 줄 알았던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갔다. 어쩌면 그녀의 무의식이 어서 여기를 떠나고 싶어 하는 지도 몰랐다. 연주양을 내보내고, 나는 상담일지를 쓰며 스스로 약간의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아까의 상황을 다중인격장애의 다른 인격의 출현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내 마음에 집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다중최면 중의 선최면이 방어기재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란 추론이었다. 다시 말해서 앞서 누군가 연주양에게 최면암시를 걸어서 자신의 내면을 다른 이에게 보이지 않도록 문을 잠근 것이다! 이 특별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머리 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멍청히 창 밖을 바라보다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나다, 진석이. 시간 괜찮니?”
“어, 그래. 회의가 있어서 나가봐야 하긴 하지만 한 5분쯤 시간 있다.”
“간단하게 물어보마. 전에 나에게 보낸 정연주양 있지?”
“왜 뭔 문제라도 생겼냐?”
“연주양 나에게 보내기 전에 혹시 너네 병원에서 정신과 상담했었니?”
“어…… 그랬지.”
“담당은?”
“혜리… 였어.”
“……”
“무슨 문제라도 생겼냐?”
“아니. 알았다.”
전화기를 거칠게 내려 놓으며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개자식!”
“뭐라구요? 지금 욕하신 거에요?”
무언가를 들고 들어오던 이양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제길!
“아, 아니에요.”
“아니긴요! 내 두 귀로 분명히 들었는데. 선생님 그런 욕도 하실 줄 아세요? 놀라운데요!”
“그건 뭐에요?”
“흠…… 좀 전에 우체부 다녀갔어요. 선생님 앞으로 온 우편물들이에요. 월요일이라서 그런지 좀 많네요.”
이양이 다가와 내 책상 앞에 여러 개의 우편물을 내려놨다. 그리곤 조금 흘기는 듯한 눈매로 밖으로 나갔다.
“으이구……”
그 뒤에 ‘내 팔자야!’하는 말이 붙으려다 참았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말이다.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신경정신과 유혜립니다.”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점심 시간을 이용해 S종합병원 구내 커피숍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들이 무척이나 길고 초조하게 느껴졌다.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라 여겼던 그녀였다. 한 때는 내 여자였지만 지금은 남의 여자인 사람이었고, 그 과정에는 상처도 있었다. 무엇보다 내 부족함에 대한 자책으로 다시 그녀를 마주할 용기 따위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 내가 그녀를 만난다. 내가 그녀를 만날 결심을 한 것은 아마도 내 안에 무언가 변화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오랜 만이에요, 선배.”
가운을 입은 채 앞에 선 그녀를 올려다 보다 천천히 일어섰다.
“오랜만이다.”
“그러게요.”
자리에 앉는 그녀의 모습을 바로 보지 않았다. 내 시선은 테이블을 향했다.
“생각 못했어요. 선배가 전화 할 줄은.”
그냥 웃었다. 그랬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시간 내줘서 고마워.”
“별말씀을요.”
“잘 지내지?”
“저야, 뭐. 선배도 잘 지내죠?”
“나도 뭐 그렇지.”
“그런데 어쩐 일이에요?”
“간단하게 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렇다고 전화로 물어보기도 그렇고 해서.”
“네…… 참, 차는 뭘로 드시겠어요? 여기 셀프라서요.”
“아, 그렇군. 뭘로 할래?”
“여기 저희 병원이잖아요. 손님접대는 제가 해야죠.”
“그런가… 난 헤이즐럿.”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문대로 갔다. 그제서야 나는 시선을 들고 그녀를 봤다. 언제나 단정하던 모습 그대로 오늘의 그녀도 그랬다. 가운이 무척 잘 어울리는 그녀. 참 총명했었지.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미친 듯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고마워.”
“괜찮나 모르겠네요. 선배는 맛보다 향을 더 중요시하곤 했었잖아요.”
“별 걸 다 기억하는군.”
“그러게요. 시간 지나도 저절로 생각이 나네요. 후훗……”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셔본다.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내색할 필요는 없겠지.
“별로죠?”
“음? 아니. 괜찮아.”
“다행이네요.”
“바쁠 테니 간단하게 말할게. 몇 개월 전에 한 환자를 상담했을 거야. 정연주라고. 대학 2학년 여학생. 기억 나?”
“아…… 우리 병원 이사장 손자하고 something 있었다던?”
“그렇다고 하더군.”
“기억나요. 임신중절 수술 후에 정신적 스트레스와 불면증을 호소했었죠.”
“그 때 혹시 뭐 특별하거나 이상한 거 기억 나는 거 없어?”
“글쎄요. 당시 상담기록을 봐야 알겠지만 지금 생각에는 별 특별한 건 없었던 것 같은데요.”
“그런가?”
“왜요? 혹시 선배한테 갔어요?”
“응.”
“그래요? 어떻게 알고요?”
“현호가 소개를 했다고 하더군.”
“그이… 가요?”
“음. 아마 이사장 손자 문제고 해서 일부러 외부에서 상담을 받았으면 했던 모양이지.”
“나한텐 그런 이야기 없었는데……”
“내부 사정이 있었겠지.”
“네……”
“몇 번 상담을 해보니 무언가 좀 이상한 게 있어서 말야.”
“이상한 거요?”
“음. 혹시 치료하면서 다중인격체 성향을 보이지는 않았나?”
“다중인격체요? 아뇨. 전혀.”
“그럼 혹시 최면요법 사용은?”
“그럴 이유가 없었죠. 스트레스와 불면증 정도에 최면요법을 이용할 이유가 없잖아요. 현실적인 건데.”
“그랬군…… 그럼 혹시 혜리가 상담하기 전에 다른 곳에서 상담을 받았단 적은 없다고 하던가?”
“글쎄요… 그런 이야긴 기억에 없고 어디 시골에 있는 종교단체 수련원에 있었다고는 들었어요.”
“그래? 거기가 어딘데?”
“그건 기억에 없구요, 상담기록을 봐야 알 것 같은데요.”
“좀 알아봐줄 수 있을까?”
“공식적으론 좀 어려운데……”
“부탁해.”
“선배 부탁이니 제가 찾아볼게요. 근데 저희는 개인병원이 아니어서 제 환자였다고 해서 지난 상담 화일을 마구 열어볼 수는 없구요. 음… 아, 요즘 제가 논문 준비하는 게 있으니 사례연구에 참고하는 걸로 해보죠.”
“고마워.”
“아니에요. 뭐라도 도움이 된다면 기쁘죠.”
또 그냥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부탁하고 갈게.”
“네. 연락드릴께요.”
밖으로 나가는 회전문에서 나는 몇 걸음 뒤에 서서 나를 보는 창문에 비친 그녀의 눈을 봤다. 비록 거울로 보듯 또렷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촉촉한 그녀의 눈빛 만은 변함없이 반짝이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그 눈길에 내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다시 바라보지 말자던 그녀의 눈을.
(이양이 어디 갔지?)
다시 병원으로 왔을 때 당연히 자리에 있어야 할 이양이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보다 했지만 테이블에 있는 오늘의 스케줄 표를 보며 기다려도 이양은 금방 나타나지 않았다.
(어딜 가면 간다고 메모라도 남길 것이지.)
오후 스케줄을 확인하곤 내 자리로 돌아왔다. 잠시 생각 속에 있다가 책상 위에 던져둔 온갖 우편물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은 기분전환 삼아 내용물을 확인해본다. 회보, 청첩장, 고지서 등을 넘기다 눈에 들어온 편지 하나. 정상적인 우편물이 아닌 소인 없는 직접 배달의 편지. 고개를 갸웃한다. 이게 뭘까? 겉봉엔 그저 받는 사람에 내 이름과 병원 이름이 있을 뿐이다.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는 프린터된 글씨들.
봉투를 뜯자 그 속엔 카드 한 장이 들어있었다. 앞 면에 검은 테두리가 있고, 그 안에 장미 꽃 한 송이가 꽃잎이 뜯겨진 모습의 이상한 그림.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럼에도 궁금증에 봉투를 열어본다.
(이, 이건……)
편집된 사진인 그 속엔 내가 빗 속에 주희씨의 아파트 앞에 서 있던 모습, 어둡기는 하지만 희미하게 옥상출입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내 물건을 입에 물고 있던 주희씨의 모습, 그리고 그녀와 내가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써 있는 한 줄.
< 이게 당신의 실체인가? >
“선생님 언제 오셨어요?”
느닷없이 상담실에 들어서는 이양을 보고 나는 얼음처럼 굳어졌다.
“노, 노크 좀 하세요.”
“문이 열려있어서 들어와본 건데요?”
“그, 그래요?”
“언제 오셨어요?”
“좀 전에요.”
“배가 고파서 간식거리 좀 사러 간 사이 오셨군요. 참, 선생님 점심 시간에 그렇게 오래 나가 계시면 어떻게 해요? 공연히 기다리다가 식사 때만 놓쳤잖아요. 전화기도 안 갖고 가시고.”
“내가 그, 그랬어요?”
“아무래도 정신 상담은 선생님이 좀 받으셔야 할 것 같아요. 쿠쿠…… 그렇게 정신 없으셔서 환자들 보시겠어요?”
“별 걱정을 다… 암튼 늦어서 미안해요. 시간이 이렇게 늦어질 줄 내가 미쳐 생각을 못했군요.”
“대신 오늘 저녁 한 잔 사주세요. 그럼 용서해드리죠. 어때요?”
“이따가 상황 봐서 다시 이야기 하죠. 내가 지금은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건 좀 곤란한데요!”
이럴 때 이양은 참 피곤하다. 왜 이렇게 아무 때나 저돌적인지.
(아무래도 강박증의 초기증세가 아닌지 상담을 해봐야, 아니지. 내가 스스로 이양이 파놓은 무덤 속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겠지. 또 무슨 꼬투리로 날 피곤하게 할지 모르니 말야.)
스스로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인다.
“오호! 지금 승낙하신 거죠?”
“뭐, 뭘요?”
“고개 끄덕이셨잖아요.”
“내가 언제요?”
“헐! 절 지금 장님 취급하시는 거에요? 분명히 고개 끄덕이셨다고요.”
(아이고… 맙소사!)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냥 순순히 한 잔 사주고 말자.
“알았어요. 사요, 사.”
“헤헤…… 불금은 아니지만 불월을 한 번 만들어 볼까나?”
“뭐라구요?”
“음… 뭐 그건 이따가 생각해도 될 것 같고… 차 한 잔 드릴까요”
“괜찮아요.”
“드릴게요.”
“괜찮다잖아요!”
“왜요?”
“먹고 왔어요!”
“어디서요?”
“그걸 내가 다 이야기 해야 돼요?”
“아뇨.”
“근데 왜 자꾸 물어봐요?”
“주인님 상황을 파악하는 건 노예로서의 의무니까요.”
“뭐라구요?”
“그럼 일 보세요. 헤헷!”
문을 닫고 나가는 이양의 뒷모습에 문득 꼬리가 아홉 개 달렸다던 구미호가 연상됐다. 아무래도 내가 홀린 것이 아닐까?
그러다 말고 내 손에 들린 카드의 사진에 다시 눈길이 간다. 이게 무슨 뜻일까?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경고장? 아니면 돈푼이라도 뜯어내겠다는 짓거리? 그도 아니면…… 뭐지? 한참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스토커라도 되는 건가?
어떤 이유가 되었든 기분이 좋지 않다. 숨겨진 어둠 속의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불안감. 어떤 위협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나만의 영역에 누군가 침입했다는 불쾌감.
(넌 누구냐? 뭘 원하는 거지?)
눈에 그리고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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