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의 게임 - 4부
2018.05.28 11:50
그녀와의 게임이전처럼 좋긴 하지만 어딘가 어색한 관계..
아니..나만이 어색한 관계..
지수는 내가 고백한 이후 정말 조금의 변화도 없이 예전 그대로였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는 조금은 조심스럽게..
나와 단 둘이 있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연스런 스킨쉽과 가벼운 장난..
지수는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그저 내 머리가..내 마음이 복잡해서
이전만큼 지수를 보더라도 지수에게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을 뿐..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그 날의 반은 허락, 반은 거절당한 듯한 이상한 고백 이후로
얼굴은 웃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지수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조금 힘들었다.
그리고 예정된 민재, 민지, 지혜 그리고 나 4명의 주말여행..
지수는 말했던 대로 새롭게 하게 된 주말 과외로 인해 이번 여행에서 빠지게 됐고,
우리 네 명은 토요일 아침 일찍 만나 민재가 미리 예약해 둔 양평의 펜션으로 출발했다.
서울을 떠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상쾌한 공기..
그리고 정말 거의 처음인 것 같은 친구들과의 여행..
항상 바쁜 부모님으로 인해 어린 시절 여행은 꿈도 꿀 수 없어 어린 시절 가 본 여행이라곤
학교에서 가는 수학여행이 전부였던지라 오랜만에 제대로 된 여행은 묘한 설렘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야~ 양평만 와도 공기가 다르네 달라~ 이번 여름 방학엔 꼭 강원도나 공기 좋은 곳으로
여행 가자~“
“그래. 이번엔 시간이 짧아서 1박2일에 가까운 곳으로 오긴 했는데 민재 말대로 멀리 가면
더 좋을 거 같아“
“응..뭐..나쁘지 않네..”
“어. 나도 좋을 거 같아”
“민재야. 너 뭔 일 있냐? 민지는 원래 단답형이라지만 넌 뭔가 이상한데..”
“어? 어어..아..아냐..그냥 잠깐 딴 생각 좀 한다고..”
“딴 생각...? 아..너 혹시..!”
“야야야야야~~~ 여자애들 짐 정리 하라 그러고 우린 점심 준비나 하자”
민재의 능글맞은 눈빛.. 그 눈빛은 분명 그 날 있었던 미팅에 있었던 일을 말하려고 하는
거였다.
그 날의 일을 지금 이야기했다간 지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란 걸 알았기 때문에
난 재빨리 민재의 입을 막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물론 뒤에서 민지와 지혜의 이상한 눈초리가 느껴지긴 했지만..
“너..죽어 그거 말하면. 너 때문에 억지로 나간 거잖아!!”
“흐흐..그렇긴 한데...걔 생각하는 거 맞지? 걔랑 잘 된 거냐?? 그럼 지수는??”
“아...머리야..잘 된 것도 아니고..갑자기 지수 얘기는 왜 또 꺼내..”
“어..! 이것 봐라..너 지수랑 싸웠냐?”
“싸우긴 뭘...”
“말해 봐~ 내가 다른 애들한테는 말 안 할게”
그럴 리가 있나..민재는 이미 우리 과에서 가장 저렴한 입으로 통하고 있었다.
여자애들 하고 비교해도 오히려 훨씬 입이 가볍다는 게 증명된 녀석에게 지수와의 일을
털어 놓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됐다..점심이나 하자..”
“이상한데..분명 뭔가 있는데~ 말해 봐~ 진짜 말 안 한다니까~~”
“그 말을 누가 믿냐..민지나 지혜한테 물어 봐라..너한테 비밀 털어놓을 수 있는지..”
“비밀!! 너 진짜 뭔가 있구나..!!”
“어..아....”
순간의 방심..말이 새어 나와 버렸다.
내 입으로 비밀이라고 말하다니..
계속 된 민재의 추궁에 잠깐 정신이 혼미한 틈에 나도 모르게 내 입으로
그런 말을 털어 놔 버린 거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다 있나..
“말해 봐~~야~ 나 궁금해서 죽어 버릴 거 같아~ 빨랑빨랑~~~”
“민재야. 점심 안 하고 지후 계속 괴롭힐 거면 가서 짐이나 좀 정리하지”
“아..그게 아니라..지후가 비밀이 있다잖아~ 너도 궁금하지 않냐??”
“궁금한 건 궁금한 거고 밥은 먹어야지~ 배고파. 아침도 엄청 일찍 먹었잖아”
“어...그렇긴 한데...”
“자~ 방해하실 분은 나가서 민지 짐 정리나 좀 도우세요”
“어...저...”
순식간에 민재를 주방에서 내 쫓아버린 지혜..
순간 지혜가 정말 날개만 없다 뿐이지 천사라고 느껴진다.
천사..아니..구세주..그 어떤 말로도 부족한..
“야..진짜 고맙다. 너 아니었으면..”
“고맙긴..하도 쩔쩔매고 있길래..”
“어? 그랬어? 내가..?”
“어어...넌 얼굴에 네 감정 금방 금방 드러나잖아..”
“하하..내가 좀 그렇긴 하지..”
나도 잘 알고 있다. 나의 약점..
감정을 절대로 숨길 수 없는 것..
그래서 승희에게도...지수에게도..내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 버렸다.
그리고 그 사실이 무척이나 후회됐고..
“싸웠어..?”
“........”
“말 안 할게. 나 민재같이 입 안 싸거든..”
“어...싸운 건 아니고..”
“그래? 어쨌든 지수랑 뭔가 잘 되가는 그런 건 아닌가 보네..”
“그게...하아..나도 잘 모르겠다. 이게 잘 되는 건지..안 되는 건지..”
“알았어. 더 안 물을게. 나중에 이야기 하고 싶으면 하든가. 점심이나 만들자”
“어어....”
항상 남을 먼저 배려하는 지혜..
어쩌면 내가 지수를 먼저 안 만났다면 좋아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지혜는 나에게 참 좋은 친구였다.
처음엔 그냥 내성적이고 조용한 아이라고만 생각되어졌는데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아이..
귀엽고 착하게 생긴 외모만큼이나 지혜는 속이 깊고 남을 배려할 줄 알았고, 그런 모습에
과에서도 인기가 꽤나 좋은 편이었다.
덕분에 그런 지수, 지혜 그리고 민지와 어울려 다니는 민재와 나를 과에 다른 사람들은
늘상 부러워했었고..
그래..민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민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늘 학교에선 조용하고 말이 없는 아이..
오죽하면 민지의 별명은 학교에서 단답형이었다.
어떤 질문을 하든지 단답형으로 대답을 한다고..
그런데 이상하게 남자들은 민지에게 관심도 많고 호감을 가지는 경우도 많았다.
민지가 실제로 어떤지는 모르고..그 악랄한...
순간 민지가 지금까지 나에게 했던 행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여행 오기 며칠 전 있었던 양을 9830마리 세고 잠들 무렵 내가 잠을 깨워서
팔베개 노예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고, 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왜 갑자기 웃어? 지수 생각 했어?”
“어? 아..아냐..그냥 갑자기 웃긴 게 생각나서..”
“실없긴...”
지혜가 나를 보고 배시시 웃는다.
웃는 게 참 귀여운 아이.. 살짝 눈꼬리가 처진 눈이 웃을 때 자동으로 눈웃음과 함께
눈이 반달 모양으로 변했고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물론 그 중 가장 좋은 건 언제나 가식이 아닌 진심으로 웃는 지혜의 그 모습이었지만..
“어...왜 그리 빤히 봐..부끄럽게..”
“어? 아아..미안..”
지수와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도 모르게 넋이 놓는 일이 많아졌는데,
나도 모르게 지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고 지혜는 그런 내 시선에 얼굴이 붉게 달아
올랐다.
뭔가 어색한 상황..
지혜와 나는 이 어색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괜히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서로의 요리에 집중했다. 지혜는 찌개를.. 나는 불고기를..
“오~ 지후 네가 했다고? 요즘 요리 잘 하는 남자가 대세라던데..나중에 완전 사랑받겠는데?”
“뭐..그 정도까진 아니고...”
“왜~ 이 정도면 잘 한 거지? 그치 민지야?”
“어..뭐..”
역시나 저 단답형 인간..
민재랑 지혜는 괜찮다는데 한 번도 제대로 된 칭찬을 해 준 적이 없다.
아마 저 인간에게 들은 최대의 칭찬은 그 날 병원에 갔다 오면서 들었던 고맙다가 아닐지..
물론 그것도 마음에도 없는 말을 억지로 한 것 같지만..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바로 술...술..그리고 또 술..
역시나 별 거 있나..뭐 이것저것 하고 놀다가 해가 질 때쯤이면 슬슬 술판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게 어떤 목적의 여행이든지 간에 상관없이 보통은 그렇다.
그리고 당연히 우리의 여행도 마찬가지고..
내일이면 당장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데, 조금도 시간을 지체할 여유가 없었고
해가 아직 제대로 떨어지기 전에 술판은 벌어졌고 우리는 초저녁이 조금 지날 무렵
모두 각자의 주량을 꽤나 넘기고 취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지후야..”
“어??”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야..이제 네가 부탁한다고 하면 겁난다”
“아~ 그런 거 아냐 진짜..이번엔 진짜 개인적인 부탁”
“알았어 뭔데?”
“너 잠깐 지혜랑 좀 나갔다 오면 안 되냐?”
“어딜??”
“그건 네가 알아서 좀 하고..”
“어..뭐..그래..근데 왜? 이유는 알고 나가야 할 거 아니냐”
“어..저..그...내가 실은 민지를 좋아한다”
“어?????”
난 진짜 목구멍까지 미친놈이란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야..어..그..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지?? 누..누굴 좋아한다고???”
내 귀로 들었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 말..민재가 민지를 좋아한다니..
물론 학과에서 민지도 나름 인기가 많았지만..어디까지나 그건 다른 사람들이 민지를 좋아하는 것이고,
난 그런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저런 악마 같은 아이의 본성을 모르고 다들 눈앞에 보이는 모습에 현혹되어 그런 거라고..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민재가 민지를 좋아하다니..이게 무슨..
“야..저..네가 민지를 잘 몰라서 그래. 민지가 좀..”
“그러는 넌 민지 잘 아냐?”
“..........”
대답할 말이 없다. 아니..대답할 수 없었다.
어떻게 민지가 우리 옆집에 산다고..
계약 상태에서 무지막지하게 날 부려먹고 있다고..
그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아.....민재야 다시 한 번만 좀 생각을..”
“내 생각은 변함없어. 오늘밤 난 고백할거야..”
더 이상은 말릴 수 없다. 비록 민재를 알게 된 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난 어느 정도 민재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한 번 한다면 밀어붙이는 성격..
내가 설득한다고 해도 내 말을 들을 리 없었다.
머리가 지끈해져 온다.
왜 다른 사람도 아닌 민지란 말인가...
차라리 지혜를 좋아한다 했다면 정말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을 텐데..
“그래..뭐..네 생각이 그러면..”
“도와주는 거지??”
“그래..지혜만 데리고 나가면 되는거지?”
“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잘해봐라”
“고맙다~!! 잘 되면 꼭 한 턱 쏠게”
민재의 눈빛이 초롱초롱 반짝인다.
저렇게나 좋을까..정말...
하긴 사람을 좋아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을까..
그냥 좋아하는 거지..
나도 누군갈 좋아한 적 있고, 지금도 그런 상황이었기에..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민재에게 힘내라고 어깨를 한 번 쳐주고는
지혜에게 다가갔다.
“지혜야 잠깐 나갔다 올까? 약간 알딸딸한 게 산책이나 좀 할까 해서..”
“그래”
지혜는 별다른 말없이 나를 따라 나와 주었고, 민재는 그런 나를 향해
찡긋 윙크를 해보였다.
나는 말없이 그런 민재를 향해 웃어주었고..
‘잘 해 봐라...’
무언의 격려..어찌 됐든 민지와 민재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기에 진심으로 잘 되기를
바라며 난 지혜와 함께 천천히 펜션 주변 잔디밭을 걸었다.
“아직은 공기가 좀 차네”
“어..그러게..추워? 남방 벗어줄까?”
“아냐 괜찮아. 그 정도는 아냐”
“그래..”
“지후야..”
“어?”
“민재 민지 좋아하지?”
“어...????”
이게 여자의 육감이란 말인가..
난 정말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걸 알 수가 있는지..
난 너무 당황해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잠깐 자리 비워달라고 한 거 아냐?”
“어..저..그게..”
“맞구나. 너 거짓말 못하잖아. 당황한 거 티 다 나거든..”
“하...하하....”
순간 민재에 대한 미안함이 밀려든다.
혹시나 오늘밤 고백이 잘못 될 지도 모르는데 지혜에게 이렇게 들켜버리다니..
“잘 됐으면 하는데..잘 모르겠네..민지는 그리 관심이 없어 보이던데...”
“어? 어어..그래...?”
사실 민재가 민지를 좋아하는 건 정말 몰랐지만, 민지가 민재에게 친구 이상의
조금의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옆집에 살면서 정말 누구보다 많이 마주치는 사람인데..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민지에게 민재는 정말 친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민재가 너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혹시나 잘 안된다고 하더라도..괜히 우리들
사이 어색해질까 조금 걱정되기도 하고..“
“어..나도 좀 걱정되긴 하는데..잘 되겠지...”
“넌 네 걱정부터 해야 하는 거 아냐?”
“아...나? 하하..그렇긴 하지..”
“내가 민감한 부분 건드렸나? 미안..괜히 이야기 꺼낸 거 같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민감한 부분..사실 민감한 부분이긴 했지만 숨기고 싶은 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누구에게라도 상담을 받고 싶었으니까..
도대체 지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아깐 그냥 좀 놀래서 말 못했는데 사실 엄청 고민이긴 하네..지수하고의 관계..”
“어떤 점에서...?”
지혜의 눈빛이 반짝이며 빛난다.
진심이 담긴 눈빛.. 절대 누구에게 쉽게 이야기 할 그런 아이도 아니었고,
그 눈빛이 나를 걱정하는 진심이 담긴 거란 걸 알았기에 난 지혜에게 지수와
나의 관계에 대해 털어놨다. 물론 스킨쉽에 대한 건 쏙 빼놓고..
“조금 더 가까워지면 다시 생각해 보자라...확실히 완전한 선 긋기는 아니네..
거기에다 널 좋아한다고까지 말했으면..“
“그러니까...하아..내가 미치겠다는 거지..이건 긍정인지 부정인지..”
“어어...진짜 도와주고 싶긴 한데..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분명 무슨 이유가 있는 거 같긴 한데..그게 뭔지 잘 모르겠네...
근데 확실한 건 최소한 부정은 아니라는 거야. 내 생각은..더 좋아지면 좋아지지..
나빠질 거 같진 않아..“
“그래...??”
“으응”
“하아..그 말 들으니까 갑자기 마음이 확 놓인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고..”
정말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연애상담..
근데 부정적인 상황이 아니라니.. 뭔가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밀려온다.
상담을 해 준 게 믿을만한 사람인 지혜라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 들어갈까? 우리 나온 지 좀 된 거 같은데”
“어. 그럴까..?”
우린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걸어가기 시작했고, 순간 지혜의 손이 살짝 내 손을 잡았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체온..
난 손의 감촉에 옆을 슬쩍 살펴봤고, 내 시선을 느꼈는지 지혜의 손이 내 손에서 빠져
나가고 있었다.
“추워..? 손 잡아줄까?”
“바보...바보긴 하다..지후 너..”
“응?? 그게 뭔 소리야? 갑자기..”
“아냐. 어..저기 문 열고 나오는 거 민지 아닌가??”
“어디? 어 그러네”
“민지야~”
지혜는 민지를 보고 뛰어갔고, 서둘러 나도 지혜를 따라 뛰어갔다.
“나갔다 오게?”
“어..뭐..산책이나 좀 하게. 민재 좀 취한 거 같아. 재워야 될 거 같은데”
“그래..??”
분명 이건 긍정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민지 혼자 나올 리는 없으니..
“난 그럼 좀 걷고 올게”
“미..민지야”
민지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우리가 걸어갔던 길을 걸어가고 있었고,
지혜의 따라가 보라는 눈빛에 난 민지를 향해 걸어갔다.
“야. 같이 가. 뭐 그리 빨라”
“따라오지 마. 혼자 걷고 싶어”
“야~ 같이 좀 가자고”
“계약”
“하아..진짜 여기까지 와서 이럴 거야? 왜 그러는데...”
“혼자 걷고 싶다 말했어. 계약 안 지킬 거야?”
“왜 그런 지 말해주면 더 이상 안 따라갈게”
“뭘...?”
“왜 그렇게 화가 난건데?”
“화 난 거 아닌데”
“그럼??”
“그냥. 난 누군가 사귀는 게 싫어. 뭔가 의지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도 싫고..모르겠어. 꼭 연애를 해야 하나? 필요성도 잘 모르겠고..“
“하아..넌 참...”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원래 4차원인 건 알고 있었지만..
무작정 누군갈 사귀는 게 싫다니..연애의 필요성을 모르겠다니..
“그럼 잠 안 올 때마다 날 부른 건 의지하는 게 아니냐?”
“그건 계약일 뿐이야..”
“어...그..하아..정말..”
말로는 역시 당해낼 수 없다.
이미 말싸움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몇 번의 경우를 통해서 잘 알고 있었지만..
정말 이렇게나 답답할 때가 있나..
고집불통에 자기의견만 이야기하는..
“그래 네 맘대로 해라..난 그만 들어가야 겠다”
“왜 신경 쓰는 건데. 넌 지수랑 사귀잖아”
“야..갑자기 그 얘길 왜..”
순간 민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난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지혜도 알고 민재도 아는 일을 민지가 모를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내 일에 대해선 정말 조금도 신경을 안 쓰는 민지였기에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아냐. 지금 상태가 좀 이상한가 보다. 별 이야기를 다 하네.. 들어가 봐. 민재나 잘 달래줘”
“야..야!!”
더 이상 말은 듣지도 않고 멀어져 가는 민지..
어차피 따라가 봤자 또 계약을 들먹이며 따라오지 말라고 할 게 뻔했기에,
난 민지의 말대로 길을 되돌아가 다시 펜션으로 돌아갔다.
“민재는??”
“방에 누워 있어. 자기 싫다고 울고불고 하는 거 겨우 재웠어”
“울었다고??”
“몰라..충격적이었나 봐. 안에 들어오니까 혼자서 술 엄청 마신 거 같더라고..그래서 옆에서
그냥 몇 잔 같이 마셔주고 재웠지 뭐..저럴 땐 자는 게 최고니까..“
“하긴..그렇긴 하지...”
난 조심스레 민재가 자고 있는 방문을 열어 봤고, 지혜의 말대로 민재는 완전히 뻗어서
잠들어 있었다.
“진짜 완전 뻗었네..”
“어어..”
“에휴...저 녀석 후유증 좀 갈 거 같은데 어쩌냐...”
“어쩔 수 없지 뭐..실연의 상처는 누가 위로해 준다고 될 게 아니니..”
“그렇지....”
순간 승희에게 고백했던 그 날이 떠오른다.
너무나 화창한 날씨였던 그 날..
날씨와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까였던 그 날이..
차라리 비라도 왔으면 덜 슬펐을 텐데...
“술이나 한 잔 더 할까?”
“그래..”
지혜와 난 다시 앉아 우리들만의 2차를 시작했고, 한참을 마셔서 거의 뻗어버리기
직전에 민지는 펜션으로 돌아왔다.
“민지도 왔으니까 우리도 그만 잘까?”
“어..그래 2층 올라가서 자”
“어..너도 잘 자고”
그렇게 끝이 난 첫째 날..
그리고 둘째 날 아침..
어색한 기류..
원래 민지는 말이 거의 없긴 했지만 민재와 민지 사이엔 어색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고,
덕분에 지혜와 난 평소보다 훨씬 말을 많이 하며 분위기를 바꾸려 열심히 노력했다.
평소 그리 활달한 성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빠르게 지나가버린 둘째 날..
우린 둘째 날 오후 2시가 넘어서 서울에 다시 도착했고, 버스 정류장 근처 카페에 앉아
간단히 남은 회비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거의 민지와 민재를 제외한 지혜와 나 둘이서 나누는 이야기였지만..
“어..저 나 먼저 들어가 볼게. 진짜 이번에 다들 수고 많았어”
“수고는 무슨..민재 네가 제일 고생했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챙긴다고..”
“내가 뭘 한 게 있나..나 갈게”
“민재야”
“어???”
“미안...”
“아...아냐...뭐가...나 간다...”
갑작스런 민지의 미안하단 말에 민재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고, 잠시 후 지혜가 가는 걸 보고 민지와 난 같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어색한 침묵..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그리고 버스를 타고 가는 길..버스에서 내려서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우린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아니..그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이 맞겠다.
나에게 고맙단 말을 한 이후 두 번째로 민지가 감정을 드러낸 말이었다.
미안하단 말은..
그래서 지금 민지가 어떤 생각일지 알 수 없어 난 아무런 말도 건넬 수 없었다.
“들어가 쉬어라”
“야..”
“어...?”
“미안하다고 하면 된 거겠지..더 이상은 상처 받지 않았음 좋겠는데..”
“어...그래..그거면 됐지..민재도 이해할 거야..”
“그래..들어가 쉬어..그리고..고맙다..”
민지의 웃음..
정말 처음 본 것 같다. 문을 닫으며 들어가는 순간 민지의 입가에 걸린 그것은
분명한 미소였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어.....’
순간 머리가 멍해진다. 감정 표현을 알 줄 알았던 것인가..
그동안 내가 잘못 보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 날 처음으로 나는 민지에게 사람의 향기를 느꼈다.
아니..나만이 어색한 관계..
지수는 내가 고백한 이후 정말 조금의 변화도 없이 예전 그대로였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는 조금은 조심스럽게..
나와 단 둘이 있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연스런 스킨쉽과 가벼운 장난..
지수는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그저 내 머리가..내 마음이 복잡해서
이전만큼 지수를 보더라도 지수에게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을 뿐..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그 날의 반은 허락, 반은 거절당한 듯한 이상한 고백 이후로
얼굴은 웃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지수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조금 힘들었다.
그리고 예정된 민재, 민지, 지혜 그리고 나 4명의 주말여행..
지수는 말했던 대로 새롭게 하게 된 주말 과외로 인해 이번 여행에서 빠지게 됐고,
우리 네 명은 토요일 아침 일찍 만나 민재가 미리 예약해 둔 양평의 펜션으로 출발했다.
서울을 떠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상쾌한 공기..
그리고 정말 거의 처음인 것 같은 친구들과의 여행..
항상 바쁜 부모님으로 인해 어린 시절 여행은 꿈도 꿀 수 없어 어린 시절 가 본 여행이라곤
학교에서 가는 수학여행이 전부였던지라 오랜만에 제대로 된 여행은 묘한 설렘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야~ 양평만 와도 공기가 다르네 달라~ 이번 여름 방학엔 꼭 강원도나 공기 좋은 곳으로
여행 가자~“
“그래. 이번엔 시간이 짧아서 1박2일에 가까운 곳으로 오긴 했는데 민재 말대로 멀리 가면
더 좋을 거 같아“
“응..뭐..나쁘지 않네..”
“어. 나도 좋을 거 같아”
“민재야. 너 뭔 일 있냐? 민지는 원래 단답형이라지만 넌 뭔가 이상한데..”
“어? 어어..아..아냐..그냥 잠깐 딴 생각 좀 한다고..”
“딴 생각...? 아..너 혹시..!”
“야야야야야~~~ 여자애들 짐 정리 하라 그러고 우린 점심 준비나 하자”
민재의 능글맞은 눈빛.. 그 눈빛은 분명 그 날 있었던 미팅에 있었던 일을 말하려고 하는
거였다.
그 날의 일을 지금 이야기했다간 지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란 걸 알았기 때문에
난 재빨리 민재의 입을 막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물론 뒤에서 민지와 지혜의 이상한 눈초리가 느껴지긴 했지만..
“너..죽어 그거 말하면. 너 때문에 억지로 나간 거잖아!!”
“흐흐..그렇긴 한데...걔 생각하는 거 맞지? 걔랑 잘 된 거냐?? 그럼 지수는??”
“아...머리야..잘 된 것도 아니고..갑자기 지수 얘기는 왜 또 꺼내..”
“어..! 이것 봐라..너 지수랑 싸웠냐?”
“싸우긴 뭘...”
“말해 봐~ 내가 다른 애들한테는 말 안 할게”
그럴 리가 있나..민재는 이미 우리 과에서 가장 저렴한 입으로 통하고 있었다.
여자애들 하고 비교해도 오히려 훨씬 입이 가볍다는 게 증명된 녀석에게 지수와의 일을
털어 놓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됐다..점심이나 하자..”
“이상한데..분명 뭔가 있는데~ 말해 봐~ 진짜 말 안 한다니까~~”
“그 말을 누가 믿냐..민지나 지혜한테 물어 봐라..너한테 비밀 털어놓을 수 있는지..”
“비밀!! 너 진짜 뭔가 있구나..!!”
“어..아....”
순간의 방심..말이 새어 나와 버렸다.
내 입으로 비밀이라고 말하다니..
계속 된 민재의 추궁에 잠깐 정신이 혼미한 틈에 나도 모르게 내 입으로
그런 말을 털어 놔 버린 거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다 있나..
“말해 봐~~야~ 나 궁금해서 죽어 버릴 거 같아~ 빨랑빨랑~~~”
“민재야. 점심 안 하고 지후 계속 괴롭힐 거면 가서 짐이나 좀 정리하지”
“아..그게 아니라..지후가 비밀이 있다잖아~ 너도 궁금하지 않냐??”
“궁금한 건 궁금한 거고 밥은 먹어야지~ 배고파. 아침도 엄청 일찍 먹었잖아”
“어...그렇긴 한데...”
“자~ 방해하실 분은 나가서 민지 짐 정리나 좀 도우세요”
“어...저...”
순식간에 민재를 주방에서 내 쫓아버린 지혜..
순간 지혜가 정말 날개만 없다 뿐이지 천사라고 느껴진다.
천사..아니..구세주..그 어떤 말로도 부족한..
“야..진짜 고맙다. 너 아니었으면..”
“고맙긴..하도 쩔쩔매고 있길래..”
“어? 그랬어? 내가..?”
“어어...넌 얼굴에 네 감정 금방 금방 드러나잖아..”
“하하..내가 좀 그렇긴 하지..”
나도 잘 알고 있다. 나의 약점..
감정을 절대로 숨길 수 없는 것..
그래서 승희에게도...지수에게도..내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 버렸다.
그리고 그 사실이 무척이나 후회됐고..
“싸웠어..?”
“........”
“말 안 할게. 나 민재같이 입 안 싸거든..”
“어...싸운 건 아니고..”
“그래? 어쨌든 지수랑 뭔가 잘 되가는 그런 건 아닌가 보네..”
“그게...하아..나도 잘 모르겠다. 이게 잘 되는 건지..안 되는 건지..”
“알았어. 더 안 물을게. 나중에 이야기 하고 싶으면 하든가. 점심이나 만들자”
“어어....”
항상 남을 먼저 배려하는 지혜..
어쩌면 내가 지수를 먼저 안 만났다면 좋아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지혜는 나에게 참 좋은 친구였다.
처음엔 그냥 내성적이고 조용한 아이라고만 생각되어졌는데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아이..
귀엽고 착하게 생긴 외모만큼이나 지혜는 속이 깊고 남을 배려할 줄 알았고, 그런 모습에
과에서도 인기가 꽤나 좋은 편이었다.
덕분에 그런 지수, 지혜 그리고 민지와 어울려 다니는 민재와 나를 과에 다른 사람들은
늘상 부러워했었고..
그래..민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민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늘 학교에선 조용하고 말이 없는 아이..
오죽하면 민지의 별명은 학교에서 단답형이었다.
어떤 질문을 하든지 단답형으로 대답을 한다고..
그런데 이상하게 남자들은 민지에게 관심도 많고 호감을 가지는 경우도 많았다.
민지가 실제로 어떤지는 모르고..그 악랄한...
순간 민지가 지금까지 나에게 했던 행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여행 오기 며칠 전 있었던 양을 9830마리 세고 잠들 무렵 내가 잠을 깨워서
팔베개 노예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고, 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왜 갑자기 웃어? 지수 생각 했어?”
“어? 아..아냐..그냥 갑자기 웃긴 게 생각나서..”
“실없긴...”
지혜가 나를 보고 배시시 웃는다.
웃는 게 참 귀여운 아이.. 살짝 눈꼬리가 처진 눈이 웃을 때 자동으로 눈웃음과 함께
눈이 반달 모양으로 변했고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물론 그 중 가장 좋은 건 언제나 가식이 아닌 진심으로 웃는 지혜의 그 모습이었지만..
“어...왜 그리 빤히 봐..부끄럽게..”
“어? 아아..미안..”
지수와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도 모르게 넋이 놓는 일이 많아졌는데,
나도 모르게 지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고 지혜는 그런 내 시선에 얼굴이 붉게 달아
올랐다.
뭔가 어색한 상황..
지혜와 나는 이 어색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괜히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서로의 요리에 집중했다. 지혜는 찌개를.. 나는 불고기를..
“오~ 지후 네가 했다고? 요즘 요리 잘 하는 남자가 대세라던데..나중에 완전 사랑받겠는데?”
“뭐..그 정도까진 아니고...”
“왜~ 이 정도면 잘 한 거지? 그치 민지야?”
“어..뭐..”
역시나 저 단답형 인간..
민재랑 지혜는 괜찮다는데 한 번도 제대로 된 칭찬을 해 준 적이 없다.
아마 저 인간에게 들은 최대의 칭찬은 그 날 병원에 갔다 오면서 들었던 고맙다가 아닐지..
물론 그것도 마음에도 없는 말을 억지로 한 것 같지만..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바로 술...술..그리고 또 술..
역시나 별 거 있나..뭐 이것저것 하고 놀다가 해가 질 때쯤이면 슬슬 술판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게 어떤 목적의 여행이든지 간에 상관없이 보통은 그렇다.
그리고 당연히 우리의 여행도 마찬가지고..
내일이면 당장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데, 조금도 시간을 지체할 여유가 없었고
해가 아직 제대로 떨어지기 전에 술판은 벌어졌고 우리는 초저녁이 조금 지날 무렵
모두 각자의 주량을 꽤나 넘기고 취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지후야..”
“어??”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야..이제 네가 부탁한다고 하면 겁난다”
“아~ 그런 거 아냐 진짜..이번엔 진짜 개인적인 부탁”
“알았어 뭔데?”
“너 잠깐 지혜랑 좀 나갔다 오면 안 되냐?”
“어딜??”
“그건 네가 알아서 좀 하고..”
“어..뭐..그래..근데 왜? 이유는 알고 나가야 할 거 아니냐”
“어..저..그...내가 실은 민지를 좋아한다”
“어?????”
난 진짜 목구멍까지 미친놈이란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야..어..그..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지?? 누..누굴 좋아한다고???”
내 귀로 들었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 말..민재가 민지를 좋아한다니..
물론 학과에서 민지도 나름 인기가 많았지만..어디까지나 그건 다른 사람들이 민지를 좋아하는 것이고,
난 그런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저런 악마 같은 아이의 본성을 모르고 다들 눈앞에 보이는 모습에 현혹되어 그런 거라고..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민재가 민지를 좋아하다니..이게 무슨..
“야..저..네가 민지를 잘 몰라서 그래. 민지가 좀..”
“그러는 넌 민지 잘 아냐?”
“..........”
대답할 말이 없다. 아니..대답할 수 없었다.
어떻게 민지가 우리 옆집에 산다고..
계약 상태에서 무지막지하게 날 부려먹고 있다고..
그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아.....민재야 다시 한 번만 좀 생각을..”
“내 생각은 변함없어. 오늘밤 난 고백할거야..”
더 이상은 말릴 수 없다. 비록 민재를 알게 된 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난 어느 정도 민재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한 번 한다면 밀어붙이는 성격..
내가 설득한다고 해도 내 말을 들을 리 없었다.
머리가 지끈해져 온다.
왜 다른 사람도 아닌 민지란 말인가...
차라리 지혜를 좋아한다 했다면 정말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을 텐데..
“그래..뭐..네 생각이 그러면..”
“도와주는 거지??”
“그래..지혜만 데리고 나가면 되는거지?”
“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잘해봐라”
“고맙다~!! 잘 되면 꼭 한 턱 쏠게”
민재의 눈빛이 초롱초롱 반짝인다.
저렇게나 좋을까..정말...
하긴 사람을 좋아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을까..
그냥 좋아하는 거지..
나도 누군갈 좋아한 적 있고, 지금도 그런 상황이었기에..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민재에게 힘내라고 어깨를 한 번 쳐주고는
지혜에게 다가갔다.
“지혜야 잠깐 나갔다 올까? 약간 알딸딸한 게 산책이나 좀 할까 해서..”
“그래”
지혜는 별다른 말없이 나를 따라 나와 주었고, 민재는 그런 나를 향해
찡긋 윙크를 해보였다.
나는 말없이 그런 민재를 향해 웃어주었고..
‘잘 해 봐라...’
무언의 격려..어찌 됐든 민지와 민재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기에 진심으로 잘 되기를
바라며 난 지혜와 함께 천천히 펜션 주변 잔디밭을 걸었다.
“아직은 공기가 좀 차네”
“어..그러게..추워? 남방 벗어줄까?”
“아냐 괜찮아. 그 정도는 아냐”
“그래..”
“지후야..”
“어?”
“민재 민지 좋아하지?”
“어...????”
이게 여자의 육감이란 말인가..
난 정말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걸 알 수가 있는지..
난 너무 당황해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잠깐 자리 비워달라고 한 거 아냐?”
“어..저..그게..”
“맞구나. 너 거짓말 못하잖아. 당황한 거 티 다 나거든..”
“하...하하....”
순간 민재에 대한 미안함이 밀려든다.
혹시나 오늘밤 고백이 잘못 될 지도 모르는데 지혜에게 이렇게 들켜버리다니..
“잘 됐으면 하는데..잘 모르겠네..민지는 그리 관심이 없어 보이던데...”
“어? 어어..그래...?”
사실 민재가 민지를 좋아하는 건 정말 몰랐지만, 민지가 민재에게 친구 이상의
조금의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옆집에 살면서 정말 누구보다 많이 마주치는 사람인데..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민지에게 민재는 정말 친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민재가 너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혹시나 잘 안된다고 하더라도..괜히 우리들
사이 어색해질까 조금 걱정되기도 하고..“
“어..나도 좀 걱정되긴 하는데..잘 되겠지...”
“넌 네 걱정부터 해야 하는 거 아냐?”
“아...나? 하하..그렇긴 하지..”
“내가 민감한 부분 건드렸나? 미안..괜히 이야기 꺼낸 거 같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민감한 부분..사실 민감한 부분이긴 했지만 숨기고 싶은 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누구에게라도 상담을 받고 싶었으니까..
도대체 지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아깐 그냥 좀 놀래서 말 못했는데 사실 엄청 고민이긴 하네..지수하고의 관계..”
“어떤 점에서...?”
지혜의 눈빛이 반짝이며 빛난다.
진심이 담긴 눈빛.. 절대 누구에게 쉽게 이야기 할 그런 아이도 아니었고,
그 눈빛이 나를 걱정하는 진심이 담긴 거란 걸 알았기에 난 지혜에게 지수와
나의 관계에 대해 털어놨다. 물론 스킨쉽에 대한 건 쏙 빼놓고..
“조금 더 가까워지면 다시 생각해 보자라...확실히 완전한 선 긋기는 아니네..
거기에다 널 좋아한다고까지 말했으면..“
“그러니까...하아..내가 미치겠다는 거지..이건 긍정인지 부정인지..”
“어어...진짜 도와주고 싶긴 한데..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분명 무슨 이유가 있는 거 같긴 한데..그게 뭔지 잘 모르겠네...
근데 확실한 건 최소한 부정은 아니라는 거야. 내 생각은..더 좋아지면 좋아지지..
나빠질 거 같진 않아..“
“그래...??”
“으응”
“하아..그 말 들으니까 갑자기 마음이 확 놓인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고..”
정말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연애상담..
근데 부정적인 상황이 아니라니.. 뭔가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밀려온다.
상담을 해 준 게 믿을만한 사람인 지혜라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 들어갈까? 우리 나온 지 좀 된 거 같은데”
“어. 그럴까..?”
우린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걸어가기 시작했고, 순간 지혜의 손이 살짝 내 손을 잡았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체온..
난 손의 감촉에 옆을 슬쩍 살펴봤고, 내 시선을 느꼈는지 지혜의 손이 내 손에서 빠져
나가고 있었다.
“추워..? 손 잡아줄까?”
“바보...바보긴 하다..지후 너..”
“응?? 그게 뭔 소리야? 갑자기..”
“아냐. 어..저기 문 열고 나오는 거 민지 아닌가??”
“어디? 어 그러네”
“민지야~”
지혜는 민지를 보고 뛰어갔고, 서둘러 나도 지혜를 따라 뛰어갔다.
“나갔다 오게?”
“어..뭐..산책이나 좀 하게. 민재 좀 취한 거 같아. 재워야 될 거 같은데”
“그래..??”
분명 이건 긍정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민지 혼자 나올 리는 없으니..
“난 그럼 좀 걷고 올게”
“미..민지야”
민지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우리가 걸어갔던 길을 걸어가고 있었고,
지혜의 따라가 보라는 눈빛에 난 민지를 향해 걸어갔다.
“야. 같이 가. 뭐 그리 빨라”
“따라오지 마. 혼자 걷고 싶어”
“야~ 같이 좀 가자고”
“계약”
“하아..진짜 여기까지 와서 이럴 거야? 왜 그러는데...”
“혼자 걷고 싶다 말했어. 계약 안 지킬 거야?”
“왜 그런 지 말해주면 더 이상 안 따라갈게”
“뭘...?”
“왜 그렇게 화가 난건데?”
“화 난 거 아닌데”
“그럼??”
“그냥. 난 누군가 사귀는 게 싫어. 뭔가 의지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도 싫고..모르겠어. 꼭 연애를 해야 하나? 필요성도 잘 모르겠고..“
“하아..넌 참...”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원래 4차원인 건 알고 있었지만..
무작정 누군갈 사귀는 게 싫다니..연애의 필요성을 모르겠다니..
“그럼 잠 안 올 때마다 날 부른 건 의지하는 게 아니냐?”
“그건 계약일 뿐이야..”
“어...그..하아..정말..”
말로는 역시 당해낼 수 없다.
이미 말싸움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몇 번의 경우를 통해서 잘 알고 있었지만..
정말 이렇게나 답답할 때가 있나..
고집불통에 자기의견만 이야기하는..
“그래 네 맘대로 해라..난 그만 들어가야 겠다”
“왜 신경 쓰는 건데. 넌 지수랑 사귀잖아”
“야..갑자기 그 얘길 왜..”
순간 민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난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지혜도 알고 민재도 아는 일을 민지가 모를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내 일에 대해선 정말 조금도 신경을 안 쓰는 민지였기에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아냐. 지금 상태가 좀 이상한가 보다. 별 이야기를 다 하네.. 들어가 봐. 민재나 잘 달래줘”
“야..야!!”
더 이상 말은 듣지도 않고 멀어져 가는 민지..
어차피 따라가 봤자 또 계약을 들먹이며 따라오지 말라고 할 게 뻔했기에,
난 민지의 말대로 길을 되돌아가 다시 펜션으로 돌아갔다.
“민재는??”
“방에 누워 있어. 자기 싫다고 울고불고 하는 거 겨우 재웠어”
“울었다고??”
“몰라..충격적이었나 봐. 안에 들어오니까 혼자서 술 엄청 마신 거 같더라고..그래서 옆에서
그냥 몇 잔 같이 마셔주고 재웠지 뭐..저럴 땐 자는 게 최고니까..“
“하긴..그렇긴 하지...”
난 조심스레 민재가 자고 있는 방문을 열어 봤고, 지혜의 말대로 민재는 완전히 뻗어서
잠들어 있었다.
“진짜 완전 뻗었네..”
“어어..”
“에휴...저 녀석 후유증 좀 갈 거 같은데 어쩌냐...”
“어쩔 수 없지 뭐..실연의 상처는 누가 위로해 준다고 될 게 아니니..”
“그렇지....”
순간 승희에게 고백했던 그 날이 떠오른다.
너무나 화창한 날씨였던 그 날..
날씨와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까였던 그 날이..
차라리 비라도 왔으면 덜 슬펐을 텐데...
“술이나 한 잔 더 할까?”
“그래..”
지혜와 난 다시 앉아 우리들만의 2차를 시작했고, 한참을 마셔서 거의 뻗어버리기
직전에 민지는 펜션으로 돌아왔다.
“민지도 왔으니까 우리도 그만 잘까?”
“어..그래 2층 올라가서 자”
“어..너도 잘 자고”
그렇게 끝이 난 첫째 날..
그리고 둘째 날 아침..
어색한 기류..
원래 민지는 말이 거의 없긴 했지만 민재와 민지 사이엔 어색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고,
덕분에 지혜와 난 평소보다 훨씬 말을 많이 하며 분위기를 바꾸려 열심히 노력했다.
평소 그리 활달한 성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빠르게 지나가버린 둘째 날..
우린 둘째 날 오후 2시가 넘어서 서울에 다시 도착했고, 버스 정류장 근처 카페에 앉아
간단히 남은 회비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거의 민지와 민재를 제외한 지혜와 나 둘이서 나누는 이야기였지만..
“어..저 나 먼저 들어가 볼게. 진짜 이번에 다들 수고 많았어”
“수고는 무슨..민재 네가 제일 고생했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챙긴다고..”
“내가 뭘 한 게 있나..나 갈게”
“민재야”
“어???”
“미안...”
“아...아냐...뭐가...나 간다...”
갑작스런 민지의 미안하단 말에 민재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고, 잠시 후 지혜가 가는 걸 보고 민지와 난 같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어색한 침묵..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그리고 버스를 타고 가는 길..버스에서 내려서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우린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아니..그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이 맞겠다.
나에게 고맙단 말을 한 이후 두 번째로 민지가 감정을 드러낸 말이었다.
미안하단 말은..
그래서 지금 민지가 어떤 생각일지 알 수 없어 난 아무런 말도 건넬 수 없었다.
“들어가 쉬어라”
“야..”
“어...?”
“미안하다고 하면 된 거겠지..더 이상은 상처 받지 않았음 좋겠는데..”
“어...그래..그거면 됐지..민재도 이해할 거야..”
“그래..들어가 쉬어..그리고..고맙다..”
민지의 웃음..
정말 처음 본 것 같다. 문을 닫으며 들어가는 순간 민지의 입가에 걸린 그것은
분명한 미소였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어.....’
순간 머리가 멍해진다. 감정 표현을 알 줄 알았던 것인가..
그동안 내가 잘못 보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 날 처음으로 나는 민지에게 사람의 향기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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