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의 게임 - 3부

그녀와의 게임무척이나 가까워진 느낌, 나만의 착각인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이 어색할 정도로

지수와 난 자주 붙어 다녔다.



물론 다른 동기들이 섞여서 함께 만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한 번씩은 우리 둘만의 몰래 데이트가 이뤄지기도 했다.



이 정도면 정말 사귀는 단계가 아닐까..

고백만 하지 않았지..



하지만 첫 고백의 충격이 너무나 컸던 탓일까,

난 섣불리 고백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거절당한다면 한동안 그 트라우마를 도저히

극복하지 못할까 너무나 겁이 나서..













“너네들 요즘 아무리 봐도 수상해..사귀냐?”

“야~! 뭔 소리야..그냥..뭐..”

“어! 저 봐..말 더듬는 거, 너 사귀지??”

“아니래도~~!!”

“왜들 그래?? 무슨 일 있어?”

“지혜 네가 보기에도 지후 얘 사귀는 거 같지 않냐?”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뭐야~ 모른 척 해주는 거야? 아님 진짜 모르는 거야?”

“아니~ 뭘 말을 제대로 해야 알지..지후랑 누구? 지수??”

“거 봐~ 알면서..크크크”

“이것들이 진짜 아니라니까!!”



민재가 갑자기 몰아가는 상황에, 지혜까지 나서서

합세를 하는 바람에 내 얼굴은 말 그대로 홍당무가 되어 버렸다.



“무슨 얘기들이 그렇게 재미들 있으실까?”

“어~ 지수 왔냐? 지수야~”

“야! 너 죽는다 진짜!!!”

“아~ 알았어 알았어..크크크”

“왜? 뭔데??”

“아니다 아냐..흐흐”



민재는 나의 신신당부하는 눈빛을 보고는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지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와 민재, 지혜의 얼굴만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자, 이제 민지만 오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좀 해볼까?”

“뭔 이야긴데 그래? 오기 전에 잠깐 썰 좀 풀어봐”

“어~ 저기 오네, 민지야 여기”



민지는 민재를 보고 손을 흔들고 웃더니, 나를 보고는 갑자기 표정을 확 바꾸고는

지혜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역시나 그 날의 고맙단 말은 그냥 마음에 없던 말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장난이었던 것인지 도무지 민지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학교에선 어쩔 때는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다가, 기분 좋은 날은 놀려대다

집에 가면 한 번씩 쓸데없는 심부름 시키는 걸로 이상한 계약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어떤 아이인 건지..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더 알 수 없는 아이란 생각만이 들었다.



“어..내가 다 모여 달라고 한 건 명색이 그래도 우리가 그 뭐냐..패밀리?

그런 개념 아니겠냐? 이렇게 뭉쳐 다니니까, 그렇지?“

“그래서??”

“그래서~! 우리의 우정을 더 돈독하게 만들고자 이번 주말에 1박! 2일~!!의 여행을

갔으면 하는데 너희들 생각은 어때?“

“난 찬성”

“나도..뭐 주말 괜찮을 거 같아”

“어..저 난 안 될 거 같은데..”

“왜? 무슨 일 있어??”

“어어..이번 주부터 주말 과외 있어서..”

“아...이런...우리 모임의 활력소 지수 빠지면 아쉬운데..”



지수가 못 가다니..생각도 못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난 간다고 말한 상황, 지금 와서 못 간다고 하기엔 무언가 모양새가 이상했다.



“민지 너는??”

“어..뭐..난..”

“야~ 너까지 빠지면 5명 중에 2명이나 빠지는데 그럼 파토야..가자 응??”

“어..그게..”

“민지야 가자, 지수도 안 간다고 하면 여자는 나 혼자잖아”

“어..그럼 뭐..알았어..”



민지는 민재에 이어 지혜까지 설득하자 마지못해 간다고 했고,

지수가 빠진 체 급작스레 주말여행이 결정되었다.



“진짜 아쉽다..같이 가면 좋을 텐데..”

“어쩔 수 없지 뭐, 너희들끼리 잘 놀다 와. 근데 어디 갈 거야?”

“몇 군데 알아보긴 했는데 이제 확정 놨으니까 제대로 한 번 알아봐야지, 나만 믿어~!”

“그래. 단톡방 하나 파서 공유 좀 해주고”

“알았어. 그럼 있다가 또 보자, 난 약속이 있어서..”

“무슨 약속?”

“어..흐흐..그런 게 있다”



민재는 갑작스레 약속이 있다며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먼저 가 버렸고,

민지와 지혜는 같이 도서관을 간다며 민재가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버리고

결국 카페엔 나와 지수 둘만 남게 됐다.



왠지 지수를 두고 친구들과 여행을 간다는 것이 뭔가 미안한 상황..



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난감했다.



“야..뭐..그렇게 미안한 표정 짓고 그래. 잘 놀고 오면 되지. 괜히 나 미안하게..”

“아니..넌 과외 한다는데 나만 놀러 가니까..”

“왜...? 그래서 신경 쓰여...은근히 기분 좋은데..”



늘 이렇게 적극적이다.

어느새 내 얼굴 가까이 다가온 지수의 얼굴..



오늘은 무슨 향수를 뿌린 것일까..

은은한 향이 내 코를 간지럽힌다.



그리고 순식간에 내 볼에 닿았다 떨어져 나가는 지수의 입술..

언제 느껴도 감미롭고 촉촉한 감촉이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갔다 와서 잘해주면 되지. 나 오늘은 약속 있어서 먼저 갈게..

괜찮지..?“

“어..어어..”



어떤 대답을 하기도 전에 웃음만을 남기고 사라져버린 지수..

항상 나보다 빠르다. 말도..행동도..



“우린..정말 어떤 관계니...”



분명 사귀고 있는 사이에서나 할 법한 스킨쉽이 오가고 있는데

사귀고 있는 사이는 아닌..뭔가 아리송한 관계..마음이 싱숭생숭하다.







그리고 홀로 카페에 앉아 잠시 지수와의 관계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려는 찰나

휴대폰이 울린다. 민재의 전화였다. 하여튼 타이밍하곤...꼭 이럴 때..



“왜?”

“야, 너 지금 어디냐?”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래 어디야?”

“아까 그 카페”

“그래? 너 학교 앞 찜닭 집 옆에 있는 노란색 간판 커피숍 알지?”

“어? 아..알아”

“그쪽으로 일단 좀 와라”

“뭔 일인데??”

“일단 와서 말해줄게”

“야! 야야!!”



간다는 말도 없었는데 일방적으로 끊어진 전화..

아..내 주위 사람들은 다들 왜 이러냐..

지수도, 민지도, 민재도 이건 다 뭐 통보다..통보..





하지만 이 상황에서 더 더욱 짜증나는 건 그 통보와 같은 부름에

거부하지 못하고 가고 있는 내 자신이란 것이다.





어느새 나는 학교 앞 찜닭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어 여기~”

“뭔 일이야 대체?”

“너..진짜 사귀는 거 아니지?”

“야...하아..그 이야기 하려고 불렀냐?”

“아 됐고~! 공식적으로 아직 사귀는 사이 맞아? 아니야?”



공식적으로 라면..역시 고백을 하고 사귀는 사이가 맞냐는 질문이겠지..

확실히 지수와 난 그런 관계는 아직 아니었다. 고백을 하지는 못 했으니..



“어..뭐..”

“그럼 됐어. 들어가자”

“뭔데?? 말이나 좀 해줘”

“일단 들어와”



난 엉겁결에 민재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갔고,

그 안의 풍경은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카페 안쪽엔 처음 보는 4명의 여학생이 앉아 있었고,

그 맞은편엔 나와는 그다지 친하지 않은 우리 과 남학생 2명이 앉아 있었다.



민재와 나를 포함하면 정확히 남학생도 4명..

이건 누가 봐도 미팅 자리였다.



“야..나 나간다”

“어딜 나가 임마, 일단 여기 앉아~”

“미팅이란 말 없었잖아!”

“안 사귄다며? 사겨??”



아..돌겠다...

설령 지수와 사귄다고 해도 이런 이상한 상황, 분위기 속에서 그런 사실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건 모두가 축복해 줄 수 있는 자리에서나 할 이야기이지..



“그건 그거고..미리 말도 안 해주고..”

“야~ 내 사정 좀 봐주라..내가 주선한 자리라고..창희 그 놈이 갑자기 잠수를 타서 그래..

지후야? 응?? 내 사정 좀 봐주라..임마..대충 좀 이야기 하다 가면 돼..지수한테는 내가

비밀로 해줄게..“

“하아...지수 이야긴 왜 또..”

“알았어. 안 할게..일단 좀 앉자..응?”



마음이 약해진다. 이렇게 사정을 하고 부탁을 하니..

아..역시 나란 놈은 어쩔 수 없는 우유부단한 녀석인 것인가..



어색한 분위기..

난 마지못해 민재의 옆에 앉았고, 그렇게 이상한 분위기 속에서

생애 첫 미팅이 시작됐다.





나름 나쁘지 않은 외모의 경영학과 4명의 여학생..

사실 나쁘지 않다기보다 충분히 괜찮은 외모였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썸타는 사람이 없을 때의 얘기였고,

지금 내 머릿속에 있는 사람은 지수 단 한 명뿐이었고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나타나는 불안함..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지수가 어디서 약속이 있는지 모르니 혹시나 지수에게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에 난 한시라도 이 자리를 빨리 뜨고 싶었다.



“저..이름이 지후씨라고 하셨나요?”

“아..네..”



긴 생머리에 지수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새하얀 피부에 청순한 얼굴..

지수가 없었더라면 충분히 반하고도 남을 외모였다.



“난 그럼 지후씨하고 먼저 나갈게요”

“네??”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민재를 포함한 모두가 당황한 표정..



그리고 그 표정을 보고 다른 여학생들을 보고나자

난 그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나같이 나름 나쁘지 않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방금 나와 나가자고 했던 여학생이 그 중 가장 예쁜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고

그런 퀸카가 폭탄 처리반으로 온 나를 초이스 했으니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순간 난 민재와 다른 동기들에게 몹시도 미안했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 진행이 되다니...

오늘 미팅 와서 다 합쳐서 10마디도 하지 않은 거 같은데..



“그럼 이만 가볼게요, 가요 지후씨”

“아..네...저..”



뒤통수에 꽂히는 따가운 시선,

난 그 시선을 뒤로 하고 아까 이름을 말했던 거 같은데 기억도 안 나는

여학생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저..어딜...가시는..?”

“우와..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네?? 제가 무슨 실수라도..”

“흐음...나 이래 뵈도 자존심 쎈 여자거든요”

“아...네..그건 알겠는데 제가 딱히 잘못한 건 없는 거 같은데..”

“제가 그쪽 골랐죠?”

“네”

“그럼 당연히 이제 데이트는 지후씨가 리드해야죠..아닌가요?”

“어...그...”



당황스럽다. 나를 좋게 봐준 건지 뭐인지 모르겠지만 골라 준 건 감사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선택해 달라고 한 적도 없었는데 다짜고짜 데이트에..리드까지 해달라는

상황이라니..



“어..저..그게 하아..”



차마 입이 안 떨어진다.

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이 자리엔 폭탄 제거반으로 나온 거라고..



이 상황에서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자존심도 쎈 여자라는데..



“아..진짜..이러기에요?”

“네??”



순간 여학생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 얼굴색과 표정은 얼마나 자신이 화가 났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사과를 해야 할 상황인 것인가..



“저..미..어어..!!”



그리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려는 순간, 여학생은 내 손을 낚아채듯

잡아 이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어..저..어디 가요..!”



한참을 여학생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학교 앞 조그만 곱창집이었다.



“아니..왜 여길...”



하지만 여학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구석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일단 나도 따라가서 같이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작 된 갑작스런 술자리..



내가 두 잔을 마실 동안 여학생은 연속으로 8잔을 연거푸 마셨고,

그대로 뒀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 거 같아 9잔째 여학생의 입으로 향하는 술잔을 막았다.



“뭐에요, 왜 막아요”

“많이 마셨어요. 그러다 확 취해요..”

“내가 마시든 말든 무슨 상관이에요, 내 이름은 알아요?”



이름..이름이라..

그제야 여학생에게 처음으로 진심으로 미안했다.



어찌 보면 미팅 자리에 기분 좋게 나왔을 텐데, 자존심도 쎄다고 말한 사람이

자신에게 별 관심도 없어 보이는 남자에게 먼저 초이스를 했는데..

난 관심도 없고, 이름조차 모르니..



내가 여자라도 충분히 화가 날만한 상황이었다.



난 지수에게 정신 팔려 있어 그런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지도 못하고..

이기적으로 그저 내 생각만 했으니..



“저..미안해요 정말”

“뭐가요..”

“나..사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갑작스레 친구한테 끌려 나와서 급하게

온 거라서 솔직히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일단 왔으니 그냥 갈 수도 없었고 그래서

앉아 있긴 했는데 솔직히 앉아서 다른 생각하고 있었어요..그 사람 생각..“

“하..하하..뭐야...지금 나 그럼 까인 거에요?”

“네...어..진짜 미안해요. 솔직히 나라도 화날 거 같아요. 기분 나쁘고...이렇게 해서

화가 풀릴지 모르겠지만 때리고 싶음 때려요. 난 맞아도 싸니까..“

“뭐야..지금 내가 때리면 나만 더 비참하고 이상한 사람 되잖아요..”

“아..그런가요? 미안해요..그건 미처..신경을..”

“미안..미안..미안..뭐가 그렇게 다 미안해요? 하나도 안 미안해도 되요. 나 자존심도

쎈데 이기적이기도 해요. 내가 맘에 들어서 고른 거라구요. 나한테 관심도 없는 거

알고 있었어요. 다들 나만 쳐다보는데 유독 날 한 번도 안 쳐다본 사람..몰라요..그래서

처음엔 언제까지 날 안 쳐다보나 싶어 오기로 쳐다봤는데 우와..끝까지 안 쳐다보더라구요..

진짜 이런 적 처음이야..아 몰라..몰라 내가 무슨 이야길 하는 거야..하튼 미안해 할 필요 없고..“

“어..하아...”



뭐라 할 말이 없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갑자기 말 주변이 없는 내 자신이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다.

무엇인가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은데..



“나...하아..진짜 까인 적 처음이라 무지 쪽팔리고 부끄럽거든요..근데 뭐..딱히 기분이 더럽거나 그렇진 않네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부끄럽고 쪽팔릴 필요 없어요. 나 같은 사람이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치이..그렇게 말하지 마요. 그럼 당신 같은 사람한테 끌린 나는 뭐가 돼...왜 그리 용기가 없어요?

혹시 그 좋아한다는 사람한테 고백 해보긴 했어요..?”

“어......그..”

“못했구나..바보..지후씨 충분히 멋지고 좋은 남자거든요. 고백해 봐요. 꼭 성공할 테니까..”

“아..고마워요....”



뜻밖이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용기를 얻을 줄은..

승희에게 생애 첫 고백을 하고 실패한 후 내 안에 용기란 모두 없어진 줄 알았는데,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의 응원에 용기가 다시 생겨났다.



“고마워요 정말..진심으로..”

“그렇게 좋아요? 아까 그렇게 무표정하더니 웃네..그 사람 생각하면서 웃은 거죠?

부럽네 그 사람...”

“아..미...”



난 얼굴 표정을 숨길 수 없는 사람인가..그리고 바보인가..

또 습관적으로 미안하단 말을 하려다 참았다.



“가요. 나랑 있는 이 시간이 그 사람에게 너무 미안할 거 아냐..”

“아..그래도..”

“모든 여자한테 잘해주지도 말구요. 그 사람한테만 잘해줘요. 안 그러면 그 사람이 아마 질투할 걸요? 여자들은

다 그러니까..나 안 취했으니까 너무 신경 안 써도 되요..”

“정말 고마워요..”

“됐네요..그리고 내 이름은 희정이에요..박희정, 뭐..인연이 있다면 나중에 또 보겠죠”



갈 때가 되어서 비로소 알게 된 이름, 희정

난 희정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곧장 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더 이상은 망설일 필요가 없을 거 같아서..

오늘은 꼭 고백을 해야만 할 거 같아서..













“지후야”

“어..여기..”



지수가 늘 나를 바래다주는 버스 정류장,

십여 분을 기다려 지수가 나타났다.



이제 내 마음을 전해야 할 차례..



“약속 있었어? 늦네”

“아..뭐..넌 약속 끝나고 온 거야? 내가 방해한 거 아냐?”

“아니 괜찮아. 근데 집에 가기 전에 나 보고 싶어서 연락한 거? 헤헤..”

“어..뭐..그렇기도 하고 겸사겸사 할 말도 있어서..”

“할 말? 무슨 말...?”



가깝다. 너무..

이렇게 가까이 또 다가오면 내가 설레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잖아..



미친 듯이 두근대는 심장 박동..

난 겨우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오랫동안 망설인 그 말을 꺼냈다.



“나..널 좋아해..”

“그래? 나두 지후 네가 좋아”

“어..그럼 우리 사귈까?”



웃는다. 지수가..너무나 환하게..

긍정의 의미인가? 아마도 그렇겠지...?



그런데 웃기만 하고 대답이 없다.

1분..2분..5분..10분..



설마 이렇게 또 까이는 건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어..사귀자 하고 사귀는 건 너무 촌스럽잖아..”

“어? 그게 무슨 말이야..나 잘 이해가..”

“그냥 난 지금이 좋은데..너도 나 좋다며? 나도 너 좋고..”

“그..그렇지..그럼 사귀는 거 아냐? 좋으면 사귀는 거잖아..”

“그렇지 보통은...”

“그럼 넌 보통의 사람이 아냐...?”



또 다시 말없이 웃는다.

아..돌아버리겠다. 이건 긍정인지 부정인지..



“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지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자..알았지..? 어, 저기 버스 온다”



지수가 내 볼에 살짝 뽀뽀를 하고 손을 흔들며 어느새 저 멀리 멀어진다.



난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고, 멀어지는 지수를 바라보다 버스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멘붕..

분명 거절은 아니었다. 거절이라고 하기엔 너무 해맑게 웃고 있었다. 지수가..



물론 승희도 웃으며 나를 거절하긴 했지만 그때 승희는 확실히 NO라는 의사를 말해주었고,

지금의 지수는 그런 대답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긍정에 가까운..



그런데 문제는 100% 긍정이 아니라 알 듯 모를 듯 날 애매하게 만드니 그게 날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사귀면 사귄다. 안 사귀면 안 사귄다지..



도대체 이도 저도 아닌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정말 오늘 오랜만에 멘탈이 소멸되는 듯하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모르게 멍을 때리며 집에 도착했고,

도착하자마자 난 샤워를 하고 나와 있는 힘껏 베개를 두들겨대며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악!!!”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아서..



그리고 그 순간 카톡이 울린다. 민지인가..



-야..잠도 안 오는데 밤늦게 뭔 짓이냐..

-깨웠냐..미안..

-하아...양 9830마리 세고 겨우 잠들려는 찰나였는데...

-뭐????9830마리??



역시 정상인이 아니다. 9830마리라니..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아..이 4차원...”



-건너와, 재워줘..

-내가 네 보모냐...

-깨웠으면 책임을 져야지

-하아..나 오늘 진짜 넘 힘들다..오늘은 그냥 좀..

-계약

-알았다 알았어..



역시 피도 눈물도 없다. 씨알이 먹힐 리가 있나..



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민지의 집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이제는 불이 꺼져 있어도 켜지 않고 익숙하게 민지가 누워 있는 곳으로 가서

민지의 옆에 누웠다.



“팔베개”

“이건 완전 노예야”

“이렇게 편한 노예가 세상에 어딨냐?”

“말이나 못하면..”

“됐고..조용...시끄러우면 잠 안와”

“야..하나만 물어보자?”

“뭐?”

“여자는 도대체 왜 그리 복잡한 동물이냐”

“밤중에 뭔 개소리를...잠이나 자”

“그래...물은 내가 미친놈이지..자자...자..”



역시나 민지에게 명쾌한 해답을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고,

난 이런 질문을 한 나를 탓하며 팔베개로 인해 팔이 저려서

잠이 들려다 깨고, 들려다 깨고를 반복하며 오늘도 느끼고 있었다.



오늘도 잠자기엔 틀려먹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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