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경험담 편의점에서 - 4부

실제경험담 편의점에서근처에 있다는 윤주씨를 만나러 까페로 향하면서도 설레는 마음 같은 건 느껴지질 않았다. 윤주씨는 아주 오래 전에 입은 화상자국 같은 여자였다. 더는 아프지 않지만, 보기는 싫은 그런 여자. 대책없이 밝고, 대책없이 솔직한 세인이와는 다르게 생각할 때마다 조심스럽고 어른스러운 윤주씨여서, 만나기 전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만날 때마다 가던 까페 블룸의 계단을 오르면서도 왜 윤주씨가 나를 만나고자 하는 지가 궁금했다. 익숙한 창가자리에 하얀 머플러를 하고 있는 윤주씨가 앉아 있었다. 창백해 보이는 얼굴에는 다급함이 어려 있었다. 귀가 시려 쓰고 있던 후드 티의 모자를 내리자 윤주씨가 내게 손을 들었다.



"잘 지냈어요? 좋아보이네."

"네. 윤주씨도 잘 지냈어요? 어쩐 일이에요."

"지영이에게 말을 들었어요.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요."

"네. 윤주씨도 그렇다는 소리를 들었는데요. 사장님 까페모카 주세요. 따뜻한 물도 한 잔 주시고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엄청 고민하던 윤주씨를 난 그저 기다렸다. 기다리는 거야 말로 내가 가장 잘 하는 일 중 하나다. 혹시나 조급해하지 않을까 해서 난 천천히 커피를 마시면서 핸드폰으로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보던 윤주씨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는데, 두께가 있어보이는 흰봉투였다. 순간적으로 청첩장인가 했는데, 내게 내민 그 봉투엔 청첩장 대신에 돈이 들어 있었다.



"150만원이에요. 늦었어요. 고민이 많았는데 돌려주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이게 무슨 돈이에요?"

"그 때, 우리...헤어졌을 때요..."

"아...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그건 제 잘못이니까요."

"아니에요."



내가 김윤주라는 이 여자를 흉터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마지막이 아주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난 일방적으로 결별을 통보받았고, 그 이유를 들으려고 찾아갔던 그녀의 집 앞에서 그의 오빠에게 폭행을 당했고, 이가 두 개나 부러졌었다. 그리고 거기서 들은 말이 어디서 가난뱅이 새끼가 였었다. 기억이 나버렸다. 한참 후에야 내가 그녀가 고위공직자의 아들과 선을 봤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이건 왜...윤주씨가 돈봉투를 지그시 보고 있는 내게 어렵게 말을 이었다.



"저기 싸이월드에 우리 같이 있었던 사진을 지우고 싶은데. 그게 경민씨가 올린 거라..."

"우리가 같이 찍은 사진이 있나요?"

"여행동호회에서..."

"아, 알았어요. 확인해 보고 바로 지울게요. 그리고 이 돈은 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니에요. 저 때문에 다치기까지 했는데. 잘 지내는 거 맞죠?"

"네. 내가 돈을 받는 게 윤주씨 마음이 편하면 받을게요. 고맙게 잘 쓸게요."

"네."

"그럼 전 그만 일어날게요."



일어나서 악수를 하려는데, 윤주씨의 목에서 내가 선물한 목걸이를 발견했다. 저걸 아직도 하고 있나. 내가 선물한 목걸이는 은방울꽃 문양의 금 목걸이였는데, 금값이 막 오르기 전이어서 그렇게까지 비싸진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 저걸 선물하고 그날 윤주씨와 첫 밤을 보냈었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윤주씨의 가녀린 목선은 진짜로 고왔다.



일어나려던 내가 자기의 목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것을 깨달은 윤주씨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변명하듯 재빠르게 말했다.



"이, 이건 그냥 오랜 습관이어서. 모르고 있었어요. 돌려 드릴게요."



목에서 목걸이를 푸는 윤주씨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만둬요. 은방울꽃 꽃말이 뭔지 아세요? 틀림없이 행복해집니다에요. 윤주씨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선물한 목걸이니까, 하는 게 좋겠어요. 마음에 걸리면 하지는 않더라도 간직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냥요. 윤주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나 그거 살 때 진짜 좋았거든요. 그걸 돌려받으면 그걸 살 때 좋았던 것을 모두 잃어버릴 것 같아서요. 미안한데, 그거 간직해주지 않을래요?"



난 언제나 낭만에 중독된 채로 살아가고 있는 이상주의자다. 이상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예전에 사귀었었던 여자에게 멋진 남자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은 남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마음이었다. 새삼 감동한 얼굴로 나를 보는 윤주씨에게 살짝 으쓱하고 어깨를 들어올린 후, 돈봉투를 집어들고 까페를 나왔다. 공돈이 생겼다. 세인이에게 미안할 짓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이상했다. 묘하게 들뜨고, 묘하게 죄책감이 들고. 잘못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마음이 이런 건 세인이에게 미안할 일을 내가 한 증거였다.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싸이월드를 접속해서 예전 내가 들었었던 여행동호회를 찾았다. 그리고 거기서 속리산으로 산행을 떠났을 때의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나 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진을 왜 지우려고 하는 걸까? 사진 속의 나와 윤주씨는 연인으로 보이긴 했다. 볼을 맞대고 사진을 찍거나 키스는 아니어도 뽀뽀를 하는 사진도 있었으니까. 캐캐묵은 몇 년전의 사진을 지워야 할 이유가 있는걸까?



우선 떠오른 것은 윤주씨가 윤주씨의 모든 이력과 과거를 조사할 정도의 집안의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 경우였다. 윤주씨의 동료인 지영씨에게 예전에 들은 바로는 그 고위공직자의 아들과 헤어졌지만, 또 다른 유력가의 남자와 만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으니까. 두 번째는 그런 것을 찾아볼 정도로 의심이 많은 남자와 사귀고 있는 경우였다. 세인이를 만나기 전 나도 꽤나 그 문제에 힘들었었다. 난 세인이와 처음부터 불꽃을 튀어 만난 것이 아니어서, 그녀의 과거 남자친구들을 거의 대부분 알고 있었고, 때때로 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면서, 세인이와의 잠자리에 대해 들은 적이 있기도 했다. 적어도 난 그런 부분에 초연하려 했지만, 어지간한 나도 그것을 극복하는데는 정말로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어쩌면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는 그런 것을 꺼리는 내 자신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혹시나 그런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남자를 만난 건지도 모른다. 어느 경우건, 윤주씨 본인이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 속이 상했다. 사진을 하나하나 지우다가 그래도 몇 장은 간직하고 싶었다. 디지털 사진이란 지워버리면 그걸로 사라지고 마는 거니까. 이메일에다 저장을 할까 하다가, 역시 한 번씩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핸드폰에다 저장을 하고 말았다.



편의점에 가서 다시 한 번 창고와 매장을 돌아다니면서 부족한 물건들을 채워놓고, 음료수를 채우러 냉장고로 들어갔더니 예의 케이크 상자가 있었는데, 한쪽 구석이 파헤쳐져 있었다. 하긴 먹을 걸 놔두고 먹지 않는 것처럼 힘든 것도 없다. 대낮부터 누가 맥주를 대량으로 사간건지 훌쩍 빈 카프리 매대를 쭉 채우고 나왔더니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미진이를 화장실에 보낸 후 담배를 뜯어 채우는데, 편의점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근처의 하우스에서의 전화였다. 도박이라면 고스톱도 잘 못치는 나지만, 가게는 요즘 하우스들에게 소문이 나서 장사가 꽤 잘되는 편이다. 사나흘에 한 번씩 카드와 라면, 물과 담배같은 것을 사가는 하우스 막내들에게 난 전화로 미리 주문을 해놓기만 하면 미리 싸놨다가 바로 계산을 해주는 서비스를 시작했고, 얼마 지나서는 십만원이면 십만원, 십오만원이면 십오만원 뭐 이런 식으로 돈의 액수만 말해줘도 그에 맞춤으로 해서 카드와 화투, 음식물에 음식물 쓰레기봉투까지 빈틈없이 챙겨주는 식으로 발전했고, 곧 식당 아줌마에게 부탁해서 달걀후라이나 계란찜. 심지어 분홍소세지를 달걀입혀 구운 것까지 챙겨서 넣어주고 있어서, 여러 하우스에서 주문을 받는 편이었다.



예전에 미성년자에게 담배를 팔았다가, 그 미성년자가 모텔에서 혼숙을 하다가 걸려서, 역추적당해서 벌금을 받았던 적이 있었는데, 하우스는 불법이라 하더라도, 하우스에서 필요한 물건을 파는 것은 불법이 아니니까 별다르게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오히려 가게 입장에선 담배를 수백갑 파는 것보다 오히려 나은 점이 있어서 특별히 난 하우스 물품에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미진이에게 이야기를 해서 물건들을 포장해 놓고, 근처의 만화방으로 향했다. 몇년 전 장르소설을 출판한 적이 있는 나는 여전히 내 책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언젠가 시간이 되면 다시 출판을 하고 싶어서 새로 나오는 책들을 꾸준히 읽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새로나온 소설 하나를 집어서 읽고 있는데, 상규의 여자친구인 진영씨와 만화방에서 마주쳤다. 순정만화 애호가인 진영씨는 내게 눈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나에게 닿기를 17권을 집어 들고 내 앞에 앉았는데, 만화방에서 나와 진영씨는 한 번씩 마주치는 사이여서 어색하거나 그런 것은 없었다. 책을 모두 읽고서 일어서려는데, 일어서려는 나를 보고서 진영씨도 자신의 책을 정리하고는 같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만화책 몇 권에 난 소설 두권이 다여서 간단히 내가 계산을 했더니, 진영씨가 따라붙으면서 말을 걸었다.



"경민오빠, 나 저녁 좀 사주면 안되나요?"

"그래. 그럴까? 상규는?"

"상규 오빠 이야기로 오빠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그래? 그러자 그럼."



만화방 근처의 삼겹살 집으로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진영씨를 데리고 간 곳은 깔끔한 차림이 좋은 테이블형 고기집이었는데, 달걀찜이 맛있어서 늘 내가 가면 사장님이 서비스로 달걀찜을 서비스해 주시는 곳이다. 삼겹살을 주문하고 고기를 굽는데 진영씨가 상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오빠, 상규오빠랑 어떻게 친해요? 둘은 전혀 다른데. 스타일이."

"대학 때 기숙사 같은 방을 썼었거든. 한 6개월 같이 살았으니 뭐 안친할래야 안친할 수가 없었지. 그리고 나랑은 성격도 잘 맞는 편이고. 왜 무슨 문제 있니?"

"경민오빠도 나도 좀 문화계라고 해야 하나. 둘 다 조용한 분위기잖아요. - 진영씨는 도서관의 사서다 - 그런데, 상규오빠는 좀 다르잖아요. 내가 하는 이야기를 전혀 못알아들을 때가 있어요.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요. 저번에 미시마 유키오 이야기를 했는데, 무슨 이종격투기 선수인줄 알더라고요."

"그런 거 알고 만난 거잖아."

"만나면 만날 수록 나랑 다른 사람인 것 같아서요. 오빠랑은 좀 달라요. 오빠는 고기집을 와도 이런 곳에 오잖아요. 분위기도 좋고, 여자들이 앉기에도 좋고. 그런데, 상규 오빠는 내가 짧은 치마를 입든, 반바지를 입든 늘 양반다리를 앉아야 하는 곳에만 가거든요. 배려가 없어요."

"그런 건 이야기를 해서 고쳐야지."

"거기가 맛있대요. 한 번씩 세인이가 부러워요. 오빠 같은 사람 만나서."

"사귀다 보면 누구나 한 번씩 그런 충돌은 있을수도 있는 거잖아. 대신에 상규는 사람이 좋잖아. 수입도 좋고."

"그것도 좀 그래요. 일하는 싸이클이 맞지 않으니까 어쩌다가 요즘처럼 파업같은 거라도 하지 않으면 늘 만날 수가 없거든요. 상규오빠가 밤새고 낮에 잠깐 도서관에 와서 만나는 거 빼면 일주일에 한 번도 만나기 힘들다니까요."

"그래서 헤어지고 싶은 거야?"

"솔직히 말하면 그러고 싶기도 한데, 우리 좀 오래 만났잖아요. 상규 오빠 나이도 있고. 그런데 지금와서 내가 그만두면 정말로 내가 나쁜 년이 되는 것 같아서. 오빠 쪽에서는 내년 봄에 결혼을 하자고 우리 부모님께 전화도 하고 그러시는 모양이더라고요."

"결혼까지는 아니다 뭐 그런 생각이야?"

"이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고 싶기도 한데, 상규오빠 알잖아요. 늘 마이페이스인거. 내 생각을 해주질 않아요. 많이 진짜 답답해서..."



고기를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역시 소통이 문제였다. 상규는 경상도 남자 특유의 고집이 있었고, 그것을 진영씨는 견뎌하지 못하고 있었다.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여서 고기를 먹은 내내 그저 한잔 두잔 들이키는 진영씨를 따라주기만 했는데, 이야기를 들어주다보니 어느 순간 진영씨가 너무 취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처음엔 상규를 부르려고 전화기를 들었다가 이건 아닌 것 같았다. 상규와 헤어지려는 고민을 이야기했는데, 상규를 부르는 건 아닌 것 같았고, 오해를 피하려고 세인이를 부르려다가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세인이는 친구의 여자친구를 대취하게 한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결국엔 진영씨의 집으로 진영씨를 데려갔다. 진영씨의 원룸은 이사를 할 때 상규와 함께 가구 같은 것을 나른 적이 있어서 가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차가운 공기를 맞은 진영씨가 조금씩 깨어나서, 진영씨의 집 계단에 이르렀을 때는 거의 제 정신을 찾아 자기 힘으로 계단을 올라갈 수 있었다. 그래도 계단은 위험해서 같이 3층까지 올라갔는데, 진영씨는 바래다 준 내게 고마워하며 차를 한 잔 마시고 갈 것을 청했다. 이런 건 아니다 하면서도 난 진영씨의 방에 들어갔다. 어쩌면 조금은 기대가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소라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런 상황은 수도 없이 봤었고, 내게도 얼마쯤은 욕망의 찌꺼기가 마음 한 켠에 쌓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자꾸만 머리 속을 채워가기 시작할 무렵 노골적인 유혹이 시작되었다. 차를 끓이려고 주전자에 물을 따르던 진영씨가 오빠 잠깐만요라면서 갑자기 화장실로 뛰어가더니 오바이트를 변기를 부여잡는 것이었다. 오바이트를 하나 해서 뒤를 따라갔는데 우엑 우엑하고 헛구역질을 몇 번 하던 진영씨가 갑자기 세수를 하더니 얼굴을 수건으로 닦고는 내게 눈을 맞추더니 갑자기 무릎정도까지 오는 반바지와 팬티를 동시에 내리면서 변기에 앉아 소변을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황해서 고개를 돌리려고도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10초 정도의 숨막히는 시간이 지났다. 나와 진영씨는 내내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눈을 아래로 내릴 수조차 없었다. 진영씨는 천천히 일어나더니 화장지로 자기의 털이 거의 없는 보지를 닦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눈이 진영씨의 손과 보지로 향했고, 내가 눈을 내리까는 순간, 진영씨가 내게로 뛰어들듯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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