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시마 다케오의 여인추억 3 ... - 3부 7장
2018.10.12 10:00
19. 미망인
마사오의 대학 생활 첫 해가 별다른 일 없이 지나갔다. 정신없이 바쁘게 보낸 한 해였다. 처음으로 겪은 대학 생활은 자유 분방한 듯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규칙과 규율의 틀 안에 갇혀 지낸 셈이었다. 어쩌면 그런 규칙은 마사오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인지 모른다.
하쥬다 노파의 하숙집이 요구하는 엄격한 분위기도 마사오를 제멋대로 굴게 내버려두지 않았고 그런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도 마사오는 자기 나름대로 짜릿한 체험을 만끽할 수 있었다. 물론 공부에 크게 방해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였다. 또한 2학년으로 올라가기 전 겨울방학을 마사오는 그냥 도쿄의 하숙집에서 보냈는데, 학교 공부에 좀더 신경을 쓰기 위함이었다.
센까나 유끼꼬의 그런 마사오의 학생다운 결심을 읽었는지 마사오에게 이렇게 할 유혹의 손길이나 추파를 보내지 않았다. 묘우미와의 만남도 자제하고 있던 마사오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고향의 다에꼬와는 한 달에 두어 번씩 계속 편지 왕래를 하고 있었다.
학기가 시작된지 며칠째 되던 날이었다. 마사오가 아침 일찍 하숙집을 나와 역에 도착했을 때 플랫폼에는 다른 날과는 달리 유난히 많은 사람이 붐비고 있었다.
그들은 역무원의 안내 방송을 듣고 있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역 사이 건널목에서 사람은 뛰어드는 자살 사고가 발생하여 열차가 연착되고 있습니다.”
역무원의 설명을 들으며 이미 역사를 빠져나가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또는 대합실에서 그냥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들 열차가 정상 운행되기만을 기다리며 시간 가는 것을 걱정할 뿐. 자살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표정들이었다.
‘도시는 비정한 곳이다. 타인의 죽음보다는 자신의 목적지까지 제 시간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마사오로서는 학교 수업을 어떻게 해서든 꼭 들어야 할 만큼 중요한 강의는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하숙집으로 돌아가 잠이라도 한숨 자고 다시 나올까 생각하고 있는데 때마침 상행 열차가 도착했다. 열차가 정상 운행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마사오는 열차가 세 대째 왔을 때에 겨우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차 안은 터질 것 같은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도 승객은 자꾸 불어나기만 했다. 마사오는 밀리고 밀려서 더 이상 몸을 꼼짝 할 수도 없게 되었다.
다음 정류장에서였다. 승객들이 더 올라타는 통에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이 사람들 틈에 끼여 딸려갔다. 마사오는 당황해서 가방을 힘껏 당겼다. 그러는 바람에 마사오의 몸의 방향이 부뀌었다. 순간 새로운 얼굴이 마사오의 정면으로 들어왔다.
몸집이 자그마한 여자였다. 머리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텁텁한 훈기 속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향기였다. 다름 아닌 하숙집의 유끼꼬의 어머니 찌에였다.
“어? 아주머니!”
“어머.”
찌에도 얼굴을 들어 마사오를 쳐다봤다. 만원 열차에 시달린 표정으로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었다. 마사오보다 먼저 집을 나섰는데도 같은 열차를 타게 된 것이다.
남자들도 견디기 힘든 만원 열차인데 자그마한 찌에가 힘들어하는 것은 당연했다. 마사오는 무의식중에 찌에를 주위의 압박으로부터 보호하는 자세를 취했다. 자연히 두 사람은 마주보게 되었다.
겨우 문이 닫히고 열차가 출발했다. 여기저기서 승객들의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뛰어든 사람이 젊은 여잔가 봐!”
“자살 방법 치곤 좋은 방법이지. 남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으니까.”
그런 대화들이 들려왔다.
아무리 만원 열차라 해도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남녀가 서로 마주보며 딱 붙어 서는 경우는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서로 조금씩은 방향을 달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마사오는 그러한 조심성보다는 찌에의 연약한 몸을 보호해야 된다는 의식이 앞섰기 때문에 그런 자세가 된 것이었다. 게다가 차 안은 평상시보다 배나 되는 승객으로 혼잡했기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마사오의 왼쪽 손에는 가방이 들려져 있었다. 가방을 놓아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을 만큼 차내는 사람들로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오른손은 찌에를 보호하기 위해 올린 채 그대로였는데 사실 내릴 만한 공간도 없었다. 그런 자세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지각이죠?”
“예.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찌에의 얼굴은 마사오의 턱 바로 밑에 까지 와 있었다. 마사오는 그녀를 바로 내려다보는 격이 돼 버렸다. 검은 머리카락과 화장기 없는 찌에의 하얀 얼굴을 이처럼 가까이에서 대하기는 처음이었다.
서로의 가슴과 가슴 사이나 약간의 틈이 있을 뿐이었다. 찌에가 들고 있는 가방이 마사오의 허벅지에 닿아 딱딱하게 느껴졌다.
찌에는 가방을 양손으로 잡고 있는 듯했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마사오의 허벅지에 찌에의 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허벅지 윗부분을 압박했다. 열차가 거세게 흔들릴 때마다 찌에의 손은 더욱 세게 느껴졌다.
당연히 찌에의 손등은 마사오의 사타구니에 닿기도 했다. 열차의 흔들림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 마사오로서는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흥분을 느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손등이 무엇을 압박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걸까?’
찌에의 힘들어하는 얼굴 표정으로 봐서는 그런 것을 의식할 만한 여유가 없는 듯했다. 만약 의식했다면 손을 딴 곳으로 가져갔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열차는 서행하기 시작하더니 멈춰 버렸다.
“무슨 일일까요?”
“앞이 정체돼서 신호를 기다리는 거겠죠”
“나야 괜찮지만, 학생은 수업 때문에 곤란하겠군요”
“아니, 뭐 별로 중요한 강의는 아닙니다.”
열차가 멈췄을 때 승객들의 흔들림으로 찌에의 손등은 마사오의 허벅지 가운데로 옮겨졌다. 정면으로 그곳을 눌렀다. 찌에의 손등을 니끼고 있는 그곳은 전에 유끼꼬의 손이 닿았던 곳이었다. 유끼꼬는 그것을 보자 놀란 눈으로 꼭 쥐었었다.
그 기억은 지금까지도 선명했다. 그날 밤 이후로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없었으며 마사오와 유끼꼬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지내오고 있었다. 그러나 유끼꼬가 그 일을 잊을 리는 없었다. 여전히 유끼꼬는 마사오에게 응석을 부렸다. 그 응석에는 유치한 에로티시즘의 표현도 담겨 있는 것을 마사오는 항상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유끼꼬는 아직 어린애였다.
그런 유끼꼬가 비록 한 번이었지만 어린 호기심으로 만졌던 성기를 지금은 간접적이긴 하지만 그의 어머니인 찌에의 이 닿았다.
‘제발, 잠자코 곱게 그대로 있어라’
마사오는 마음 속으로 타이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충혈되기 시작했다. 급속히 뜨거워졌다. 오히려 찌에의 손등을 누르기 시작했으며, 손 등을 느끼자 더욱더 발기되어 맥박까지 느껴졌다.
게다가 마사오의 의식은 그렇게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오른팔이 찌에의 어깨를 안는 자세가 되어버렸다.
차내는 초만원을 이루고 있는 데다가 멈춰 서 있었기 때문에 창은 열려져 있었어도 바람은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차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 때문에 찌에는 괴로운 표정이었다.
‘나의 이것을 의식할 만한 여유가 없었으면 좋겠는데.’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될 수 있으면 모르도록 해야 한다.
“힘드시죠?”
마사오는 찌에의 어깨를 안은 손을 내리고는 좁은 틉을 비집고 호주머니를 더듬어서 손수건을 꺼냈다. 다행이 손수건은 한 번도 쓰지 않은 깨끗한 것이었다. 마사오는 손수건으로 찌에의 얼굴에 맺혀 있는 땀을 찍어냈다. 화장은 옅게 했지만 그래도 문지르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요.”
작은 소리로 찌에가 말했다. 그 때, 갑자기 열차가 굉음을 내며 움직이는 바람에 승객 전체가 흔들렸다. 그리고 의외의 사태가 발생했다.
기우뚱하면서 마사오가 찌에를 안아 버린 것이다. 그것은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와 동시에 찌에가 넘어지지 않으려다 마사오의 그것을 잡은 것이었다. 부딪힌 것이 아니고 분명히 손으로 잡았던 것이다. 마사오는 쾌감을 느꼈다.
곧바로 그 손은 제자리로 돌아가고 찌에의 이마가 마사오의 어깨에 살짝 부딪쳤다.
“미안해요.”
겨우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였다.
“아닙니다.”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한 마사오는 찌에의 말에 어떤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자기가 무엇을 만졌는지 찌에는 분명히 느꼈던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잡았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잡고 나서는 그것을 의식했다는 표현이었다.
“오히려 제가……,”
당황한 마사오는 찌에처럼 낮은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찌에가 얼른 손을 제자리로 가져갔기 때문에 좀전처럼 마사오의 그것은 다시 찌에의 손등을 누르는 상태가 되었다. 한 번 잡혔던 감각 때문에 마사오의 성기는 이제 완전히 흥분된 상태였다. 그것이 찌에의 손 등을 압박했다. 사방이 사람들로 꽉 차 있었기 때문에 마사오는 허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찌에의 작은 손은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텐데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마사오의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찌에는 얼굴을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찌에는 지금 좀전과는 달리 손등에 맞닿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의식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왜 잡았던 걸까? 넘어지려고 할 때 반사적으로 뭔가를 붙잡으려는 것은 당연하지만 가장 손쉽게 잡을 수 있는 곳이 하필이면 왜 그곳이었을꺄? 좀전부터 의식하고 있으면서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으로 차가 흔들리는 순간,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일가?’
그렇게 생각하는 마사오의 마음에는 찌에는 정숙하고 청결한 미망인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여자라기보다는 상냥한 어미니 상이며 유순한 아내 상이었다. 성(性)과는 무관한 생활을 하고 있는 여자였다.
열차는 다시 서행하기 시작하더니 또다시 정차했다. 마사오는 찌에의 이마에 다시 땀방울이 맺혀 잇는 것을 봤다. 좀전에 꺼냈던 손수건으로 땀을 가볍게 찍어냈다.
“고마워요”
역시 작은 소리였다.
“땀이 눈에 들어가면 아리거든요.”
“몸이 조금만 피곤하면 땀을 흘려요. 어젯밤 늦게까지 바느질을 했더니만……,”
찌에의 목소리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게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한다는 것은 마사오의 무례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낮엔 일을 하시니까 저녁에는 일찍 주무셔야 할 텐데요.”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도 있거든요.”
별다른 의미가 있는 말은 아니겠지만 마사오의 가슴은 다시 두근거렸다. 마사오에게는 은밀한 고백처럼 들리기도 했던 것이다.
정차한 상태에서 그러한 말이 오간 뒤, 찌에의 손이 뭔가 마사오에게 신호를 보내는 듯한 움직임을 마사오는 확실히 느꼈다. 주위의 동요에 의한 움직임이 아니고 의식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치워 달라는 무언의 항의일까? 찌에는 사려 깊은 사람이니 나에게 수치를 주지 않으려고 은밀한 움직임을 보이는 걸까? 아니면 은근히 즐기고 있는 걸까?’
마사오의 마음이 쉽게 평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한 번 그렇게 돼 버리면 좀처럼 평정을 되찾기가 힘들었다. 특히 지금은 더욱 더 그랬다.
‘지금으로서는 오직 학생답게 솔직히 용서를 비는 방법밖에는 없다. 이제 와서 하숙을 좇겨나면 갈 만한 곳도 없다.’
마침내 마사오는 찌에의 어깨에 얹어 놓았던 손에 약간의 힘을 넣으며 고개를 돌려 귀에다 입을 갖다댔다.
“저어, 죄송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절대 들어서는 안 될 내용이었다.
“엉뚱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자연 현상일 뿐입니다. 좀 괴로우시더라도 참아 주십시오.”
다행히 주위는 사람들이 얘기를 주고받느라 산만했다. 혼잣말을 하고 있는 남자도 있었다. 마사오의 목소리는 찌에밖에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찌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상냥한 목소리였다. 오히려 상대방을 위로하는 말투였다. 그리고 손등이 다시 한 번 강하게 마사오에게 느껴졌다. 그것은 화가 나지 않았으니 안심하라는 움직임인 것 같았다.
마사오는 그 움직임을 확인하고 다시 은밀하게 속삭였다.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찌에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너무 많이 지껄이면 주위에서 눈치를 챌 염려가 있었다.
이윽고 창 밖으로 목을 내밀고 있던 맞은편 남자가 소리쳤다.
“파란 불이다. 출발해라!”
출발 신호라도 된 듯 열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봐서 파랑이면 운전사 눈에도 파랑인 게지.”
그 남자의 말에 사람들이 와르르 웃었다. 차내가 잠시 술렁였다. 그리고 그때 다시 찌에의 손바닥이 방향을 바꿔 마사오의 흥분돼 있는 곳으로 오더니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그것을 꽉 잡았다.
“앗.”
마사오가 낮게 외치자 찌에의 손은 곧 풀리면서 제자리로 갔다. 엄지와 검지의 힘이 아직 거기에 남아 있었다.
찌에에게 그런 의식은 없었겠지만 남자인 마사오로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찌에의 희미한 중얼거림이 들렷다.
“항상 이런가요?”
찌에의 그 말 앞에는 아무 곳에서라도는 말이 생략돼 있었다. 마사오는 찌에의 귀에 입을 갖다댔다.
“이런 일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찌에는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열차는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20. 어머니와 딸
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면서도 마사오의 머릿속은 열차 안에서의 일로 뒤죽박죽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의도적이었을까, 아니면 우연이었을까?’
다른 사람도 아닌 찌에의 경우에는 의도적이냐 우연이었느냐 따라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치달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날 저녁, 찌에보다 먼저 집에 돌아온 마사오는 자기 방에 들어가 꼼짝 않고 있었다. 왠지 찌에의 얼굴을 대하기가 꺼림칙하기도 했고 유끼꼬나 하쥬다 할머니와 마주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책상에 앉아 막 책을 펼쳐 들려고 할 때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예전에 느낄 수 없었던 분위기였다. 하숙집에 같이 사는 사람이라면 문 두드리는 소리만 듣고도 누구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데, 이번 경우는 달랐다. 센까도 아닌 듯 싶었다. 하쥬다는 이층에 올라오는 일이 거의 없다.
“누구세요?”
문 밖에서는 대꾸가 없다. 마사오는 일어나 문 쪽으로 갔다. 그리고 문을 열어 밖에 있는 사람을 본 순간 움찔 놀라고 말았다.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끼였던 것이다. 전에 마사오가 하숙했던 긴다꾸 장의 딸 아끼가 찾아오다니 마사오로서는 반가움에 앞서 너무 뜻밖의 일이라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저를 잊은 건 아니겠죠?”
“아끼! 네가 어떻게 여기를 …….”
“왜요, 저는 옛 애인을 찾으면 안 되는 여잔가요? 버림받은 여자의 애증이 얼마나 끈끈한지 마사오 씨에게 확인 시켜 주려고 왔어요”
아끼는 벌써 문을 막고 서 있는 마사오를 밀어내고 방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역시 아끼는 변한게 없었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능숙한 말솜씨며 당돌한 태도가 여전했다. 문을 닫으며 마사오가 말했다.
“아무튼 반갑다. 그런데 누가 아래층에서 내가 여기 있다는 걸 가르쳐주었니?”
“아니요. 아래층에는 아무도 없던 걸요. 제가 제 발로 찾아 올라왔어요.”
“이 집 주인이 여간 까다로운 노파가 아니라서 만났더라면 꽤 골치 아픈 일이 생겼을 텐데.”
“왜요?”
“네가 여자니까.”
“그렇게 도도했던 마사오 씨가 이제야 나를 여자로 봐 주는군요 어쨌든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니라서 고맙습니다.”
아끼는 허리를 깊숙이 꺾어 마사오에게 절까지 하며 능청을 부렸다.
“이렇게 뜻밖에 만나게 되니 괜히 서먹서먹해지는데? 긴다꾸 장 사람들은 다 잘 지내겠지?”
“첫 물음이 겨우 그거예요?”
뾰로퉁해진 아끼가 마사오 앞에 앉으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끼의 그런 모습에서 마사오는 전에 아끼의 방 옷장 안에서 나우었던 사랑의 순간들이 떠올렸다. 어린 소녀이긴 하지만 아끼에게는 남자의 마음을 뿌리째 흔드는 요염한 색기가 있었다. 그 그칠 줄 모르는 아끼의 유혹의 손길을 핑계삼아 마사오는 긴다꾸 장을 나와 하숙을 옮겼던 것이다.
“저녁 아직 안 먹었으면 우리 밖으로 나갈까? 내가 사지.”
“전 여기 있는 게 좋아요 우리 둘이서만 이렇게.”아끼가 다시 마사오의 품에 안겼다. 조금 전보다 더욱 달라붙었다. 그러면서 아끼의 한 손이 슬그머니 마사오의아랫도리로 내려가려는 것을 마사오는 느꼈다. 얼른 손목을 잡았다.
“여기서는 안 돼.”
“그래서 나가자고 하는 거예요?”
“그런 게 아니라…….”
“그러면 가만히 있어요. 저도 눈치가 있는 여자예요. 제가 이 방에 있으면 당신이 곤란해진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구요 역시 이 집에도 마사오의 상대 여자가 없지는 않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
아끼의 그 한마디에 마사오의 말문은 꽉 막혀 버린 셈이었다. 마사오가 주저하는 사이에 아끼의 손길은 어느 새 마사오의 사타구니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마사오는 쑥스러운 기분을 떨텨 버리려고 아끼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입술을 포갰다. 그러나 아끼는 마사오의 입술을 받지 않았다. 재 빨리 뒤로 몸을 뺀 것이다.
“그것 봐요. 능청떠는 버릇은 여전하군요. 자기도 늘 여자를 원하면서 여자가 먼저 손을 대게 만드는 탁월한 수법! 그 수법에 이곳에서는 몇이나 되는 여자가 걸려들었나요?”
은근히 농담조로 빈정거리면서 아끼는 마사오 앞으로 한 걸음 다시 접근해 몸을 밀착시켰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두 손으로 마사오의 가운데를 꽉 움켜잡으며 말했다.
“앞으로 아무리 많은 여자가 이곳을 거쳐가도 선배는 나, 아끼에요. 안 그래요?. 자, 이젠 나가죠”
아끼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끼의 각본대로였다. 마사오는 갑자기 들이닥친 아끼의 술수에 엉겁결에 휘말려든 셈이었다.
두 사람이 방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가려는 순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마사오는 못된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움찔했다.
‘히쥬다 할머니가 아닐까? 일이 묘하게 꼬이겠군’
그렇다고 무작정 계단에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뒤따라 내려오는 아끼는 마사오를 밀치고 앞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찌에와 유끼꼬였다. 모녀가 우연히 길에서 만난 모양이었다. 네 사람이 서로 마주쳤다. 마사오는 당황해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몰랐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역시, 아끼였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아끼라고 해요”
마사오가 얼른 가로막고 나섰다.
“아주머니, 전에 제가 하숙집의 따님입니다. 동생처럼 저를 따랐지요”
“아, 그래요 반갑군요. 더 놀다 가지 그래요? 저희는 괜찮은데요.”
“아니에요. 열차 시간에 맞추려면 지금 곧 가야 합니다. 지나는 길에 잠깐 들렀어요.”
찌에는 꽤 부드러운 태도를 보였으나 유끼꼬는 계속해서 아끼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심상치 않다는 눈초리를 보냈다. 마사오가 말을 꺼냈다.
“자, 아끼, 가자. 시간 늦겠다.”
둘은 밖으로 나왔다. 대충 엄어가 준 것 같아 마사오는 적이 안심이 되었다. 공연히 오해를 살 필요는 없으니까.
역 앞까지 온 두사람은 자그마한 술집에 들어가 긴다꾸 장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에서의 태도로 보아 아끼는 그냥 내버려둘 것 같지 않았으나, 막상 집을 나선 후부터는 당돌한 낌새를 비치지 않았고 줄곧 긴다꾸 장의 이야기를 입에서 올릴 뿐 마사오에겐 별다른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
아끼가 술값을 내려고 했다. 잠시 실랑이 끝에 마사오가 값을 지불하고 술집을 나왔다. 둘이 열차 시간에 맞추어 개찰구 쪽으로 향하려는데 개찰구 바로 앞에 누가 서 있었다. 유끼꼬였다.
‘조금 전에 어머니하고 같이 집에 들어가는 걸 보고 나왔잖아? 어쩐 일일까?’
마사오는 유끼꼬 앞으로 다가섰다.
“유끼꼬? 여기는 어쩐 일이냐? 누굴 기다리는 중이니?”
“친구.”
“음, 약속이 있는 모양이구나”
“예”
아끼가 표를 사 가지고 왔다.
“어머, 이 애는 아까 하숙집에서 본 애잖아?”
“그 집 딸이야.”
“아유 귀엽기도 하지.”
마사오는 유끼꼬에게 아끼를 소개했다. 유끼꼬는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도 아끼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는 않았다. 마사오는 아끼를 재촉했다.
“자, 어서 서둘러야지.”
“알았어요. 아가씨! 이 사람을 잘 감시하세요. 다른 여자를 방에 들이지 않도록 말이에요”
그렇게 내뱉은 뒤 아끼는 개찰구를 향해 걸어갔다. 마사오는 그 뒤를 따라갔다. 아끼는 개찰구 앞에서 멈추더니 마사오를 향해 돌아서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글피 꼭이야!”
마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끼는 개찰구를 나가고 마사오는 유끼꼬에게로 돌아왔다.
“오빠를 기다리고 있었어. 친구를 기다린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야.”
“아끼와 이 근처에서 한잔했어. 자 이제 가자.”
유끼꼬는 약간 사이를 두고 마사오와 아끼의 뒤를 쫓아온 게 틀림없었다. 마사오는 유끼꼬의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마사오는 걸으며 생각했다.
‘이 손이 아끼의 화원을 만졌던 손이야.’
상가를 지나자 길이 몹시 어두웠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엄마한테는 뭐라고 하고 나왔니?”
“친구 집에 잠깐 갔다오겠다고 했어요.”
“그럼, 같이 들어가면 이상하겠구나.”
유끼꼬는 마사오의 손을 꼬옥 쥐었다. 손은 자그마하지만 야무지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내가 먼저 들어갈게요.”
“그래.”
“그런데, 좀전에 그 여자와는 친한 사이에요?”
“응? 으응 약간.”
“오빠를 좋아하는 모양이지?”
좀전에 아끼가 유끼꼬에게 한 말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야, 그렇지는 않아. 원래 말투가 그래서 그렇지. 지금 남자 친구 일로 고민인가 봐. 그래서 자문을 구하러 왔던 거야.”
“애인이 있다구요?”
“응, 성질이 좋지 않은 남잔가 봐.”
“친한 사이도 아닌데. 어떻게 오빠한테 그런 걸 상담할까?”
“원래 제멋대로인 애니까. 남자 관계도 그렇겠지 그런데 이번에는 상대가 잘못 걸린 것 같아 유끼꼬는 이 다음에 남자를 선택할 때는 잘 관찰해 보고해야 될 거야.”
“그 여자, 반드시 또 찾아올 거예요.”
“그럼 어떡하지? 별로 환영하고 싶지 않은 여잔데.”
“하지만 예쁘잖아요”
“유끼꼬는 이 다음에 더 예뻐질 텐데. 그 애에게는 내적인 아름다움이 없어.”
마사오는 유끼꼬의 손을 놓고, 그 작은 어깨를 안았다. 왜 역까지 나와서 마사오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마사오는 죄의식을 느꼈다. 어린애의 팔을 비튼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마사오는 지금 유끼꼬의 팔보다도 귀중한 그 마음을 농락하고 있다는 죄의식이 느껴졌다.
역에서 멀어짐에 따라 담질이 많아지고 주위가 조용해졌다. 가로등 사이의 가로수에서 잎이 떨어져 거리를 덮고 있었다. 유끼꼬는 멈춰 서서 마사오를 올려다봤다. 마사오는 주위를 둘러본 뒤 양팔로 유끼꼬의 어깨를 않았다. 등을 구부려 얼굴을 갖다댔다. 입술을 천천히 포갰다. 유끼꼬는 마사오에게 몸을 맡겼다. 입술을 부드럽게 포개고 등을 어루만지면서 얼굴을 끌어당겼다.
“술 냄새! 정말이었구나, 술 마셨다는 거.”
안심한 듯한 목소리였다. 마사오가 아끼와 어디로 갔었는지 의심했던 모양이다.
“정말이고 말고 그러니까 저녁 식사도 안 해도 되겠어.”
“나는 아직 식사 전인데.”
“그럼 집에서 기다리시겠군. 빨리 들어가야지. 먼저 들어갈래?”
“예.”
마사오는 유끼꼬의 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그대로 서 있다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유끼꼬와는 더 이상 불장난을 해서는 안 됀다.’
현관문은 빼꼼히 열려 있었다. 유끼꼬가 일부러 그렇게 해놓은 듯했다. 마사오는 활짝 열고 일부러 크게 소리쳤다.
“다녀왔습니다.”
유끼꼬가 신고 있던 빨간 끈의 나막신이 밖을 향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문을 잠그고 있는데 히쥬다가 나왔다.
“죄송합니다. 저녁식사하고 한잔하느라고 늦었습니다.”
“전에 있던 하숙집 딸이 왔었다면서요?”
“예, 아주머니도 들으셨군요.”
“앞으로 계속 부를 건가요?”
간섭하는 듯한 말투다. 하지만 싫은 내색을 해서는 안 된다.
“아니오 이제 오지 않을 겁니다.”
마사오가 웃으며 덧붙였다.
“성격이 활탈한 애지요”
“마사오 씨가 들어오란 말도 하진 않았는데 마음대로 계단을 올라가 방엘 들어갔다지요?”
“죄송합니다. 워낙 그런 애니 이해해 주십시오”
“설마 밤에 찾아오는 일은 없겠지죠?”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 집에는 알다시피 어린애가 있으니 주의해 주기 바랍니다.”
“예. 잘 알았습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마사오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계단을 올라갔다. 방으로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아서 갑작스런 아끼의 출현에 대해 생각해 봤다.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의 허술한 태도에 대해 스스로 화가 치밀었다.
‘일 년 동안이나 소식이 없었다는 것은 인연을 끊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다시 불쑥 나타나 멋대로 사람 마음을 휘저어 놓고 갔다. 내일모레 다시 만나자면서. 혹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른다. 성격적으로 나쁜 아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래. 다시 만나더라도 연관에는 가지 않을 거야. 허술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
아끼와의 일에 대한 후회와 더불어 마사오의 머릿속엔, 자신을 찾아다니다 역 개찰구 옆에 서 있던 사랑스런 유끼꼬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음 날 아침, 마사오가 학교에 가려고 역을 향해 길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앞에 찌에가 걸어가고 있었다. 마사오는 걸음을 재촉했다. 어제 있었던 여러 가지 일을 찌에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오늘밤에는 좀 늦게 들어갈 거라는 얘기도 미리 해두기 위해서였다.
“이제 가십니까?”
마사오가 다가가 인사하지 찌에는 깜짝 놀라며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왼손으로 옮겨 들었다. 마사오가 오른쪽에 와 섰기 때문이었다.
“어젯밤…….”
찌에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학생이 그 아가씨와 함께 나간 뒤 그것이 걱정이 되는지 유끼꼬가 역으로 나갔었는데, 역에서 만났었죠?”
순간 마사오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찌에의 말이 단지 추측이라면 순순히 응할 필요는 없다.
“친구 집에 가지 않았던가요?”
오히려 반문을 해 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렷다.
“후후후.”
찌에는 낮은 소리로 웃었다.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유끼꼬는 그렇게 말하지만 구실이죠 아직 어린애니까. 어제 그 아가씨에 대해 민감하게 받아들였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학생이 유혹에 빠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됐던 거겠죠. 급히 구실을 달고 나가더니 학생이 들어오기 바로 전에 들어왔어요”
“유끼꼬가 대학생인 저를 걱정해 준단
마사오의 대학 생활 첫 해가 별다른 일 없이 지나갔다. 정신없이 바쁘게 보낸 한 해였다. 처음으로 겪은 대학 생활은 자유 분방한 듯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규칙과 규율의 틀 안에 갇혀 지낸 셈이었다. 어쩌면 그런 규칙은 마사오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인지 모른다.
하쥬다 노파의 하숙집이 요구하는 엄격한 분위기도 마사오를 제멋대로 굴게 내버려두지 않았고 그런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도 마사오는 자기 나름대로 짜릿한 체험을 만끽할 수 있었다. 물론 공부에 크게 방해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였다. 또한 2학년으로 올라가기 전 겨울방학을 마사오는 그냥 도쿄의 하숙집에서 보냈는데, 학교 공부에 좀더 신경을 쓰기 위함이었다.
센까나 유끼꼬의 그런 마사오의 학생다운 결심을 읽었는지 마사오에게 이렇게 할 유혹의 손길이나 추파를 보내지 않았다. 묘우미와의 만남도 자제하고 있던 마사오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고향의 다에꼬와는 한 달에 두어 번씩 계속 편지 왕래를 하고 있었다.
학기가 시작된지 며칠째 되던 날이었다. 마사오가 아침 일찍 하숙집을 나와 역에 도착했을 때 플랫폼에는 다른 날과는 달리 유난히 많은 사람이 붐비고 있었다.
그들은 역무원의 안내 방송을 듣고 있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역 사이 건널목에서 사람은 뛰어드는 자살 사고가 발생하여 열차가 연착되고 있습니다.”
역무원의 설명을 들으며 이미 역사를 빠져나가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또는 대합실에서 그냥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들 열차가 정상 운행되기만을 기다리며 시간 가는 것을 걱정할 뿐. 자살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표정들이었다.
‘도시는 비정한 곳이다. 타인의 죽음보다는 자신의 목적지까지 제 시간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마사오로서는 학교 수업을 어떻게 해서든 꼭 들어야 할 만큼 중요한 강의는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하숙집으로 돌아가 잠이라도 한숨 자고 다시 나올까 생각하고 있는데 때마침 상행 열차가 도착했다. 열차가 정상 운행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마사오는 열차가 세 대째 왔을 때에 겨우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차 안은 터질 것 같은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도 승객은 자꾸 불어나기만 했다. 마사오는 밀리고 밀려서 더 이상 몸을 꼼짝 할 수도 없게 되었다.
다음 정류장에서였다. 승객들이 더 올라타는 통에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이 사람들 틈에 끼여 딸려갔다. 마사오는 당황해서 가방을 힘껏 당겼다. 그러는 바람에 마사오의 몸의 방향이 부뀌었다. 순간 새로운 얼굴이 마사오의 정면으로 들어왔다.
몸집이 자그마한 여자였다. 머리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텁텁한 훈기 속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향기였다. 다름 아닌 하숙집의 유끼꼬의 어머니 찌에였다.
“어? 아주머니!”
“어머.”
찌에도 얼굴을 들어 마사오를 쳐다봤다. 만원 열차에 시달린 표정으로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었다. 마사오보다 먼저 집을 나섰는데도 같은 열차를 타게 된 것이다.
남자들도 견디기 힘든 만원 열차인데 자그마한 찌에가 힘들어하는 것은 당연했다. 마사오는 무의식중에 찌에를 주위의 압박으로부터 보호하는 자세를 취했다. 자연히 두 사람은 마주보게 되었다.
겨우 문이 닫히고 열차가 출발했다. 여기저기서 승객들의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뛰어든 사람이 젊은 여잔가 봐!”
“자살 방법 치곤 좋은 방법이지. 남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으니까.”
그런 대화들이 들려왔다.
아무리 만원 열차라 해도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남녀가 서로 마주보며 딱 붙어 서는 경우는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서로 조금씩은 방향을 달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마사오는 그러한 조심성보다는 찌에의 연약한 몸을 보호해야 된다는 의식이 앞섰기 때문에 그런 자세가 된 것이었다. 게다가 차 안은 평상시보다 배나 되는 승객으로 혼잡했기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마사오의 왼쪽 손에는 가방이 들려져 있었다. 가방을 놓아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을 만큼 차내는 사람들로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오른손은 찌에를 보호하기 위해 올린 채 그대로였는데 사실 내릴 만한 공간도 없었다. 그런 자세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지각이죠?”
“예.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찌에의 얼굴은 마사오의 턱 바로 밑에 까지 와 있었다. 마사오는 그녀를 바로 내려다보는 격이 돼 버렸다. 검은 머리카락과 화장기 없는 찌에의 하얀 얼굴을 이처럼 가까이에서 대하기는 처음이었다.
서로의 가슴과 가슴 사이나 약간의 틈이 있을 뿐이었다. 찌에가 들고 있는 가방이 마사오의 허벅지에 닿아 딱딱하게 느껴졌다.
찌에는 가방을 양손으로 잡고 있는 듯했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마사오의 허벅지에 찌에의 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허벅지 윗부분을 압박했다. 열차가 거세게 흔들릴 때마다 찌에의 손은 더욱 세게 느껴졌다.
당연히 찌에의 손등은 마사오의 사타구니에 닿기도 했다. 열차의 흔들림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 마사오로서는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흥분을 느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손등이 무엇을 압박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걸까?’
찌에의 힘들어하는 얼굴 표정으로 봐서는 그런 것을 의식할 만한 여유가 없는 듯했다. 만약 의식했다면 손을 딴 곳으로 가져갔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열차는 서행하기 시작하더니 멈춰 버렸다.
“무슨 일일까요?”
“앞이 정체돼서 신호를 기다리는 거겠죠”
“나야 괜찮지만, 학생은 수업 때문에 곤란하겠군요”
“아니, 뭐 별로 중요한 강의는 아닙니다.”
열차가 멈췄을 때 승객들의 흔들림으로 찌에의 손등은 마사오의 허벅지 가운데로 옮겨졌다. 정면으로 그곳을 눌렀다. 찌에의 손등을 니끼고 있는 그곳은 전에 유끼꼬의 손이 닿았던 곳이었다. 유끼꼬는 그것을 보자 놀란 눈으로 꼭 쥐었었다.
그 기억은 지금까지도 선명했다. 그날 밤 이후로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없었으며 마사오와 유끼꼬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지내오고 있었다. 그러나 유끼꼬가 그 일을 잊을 리는 없었다. 여전히 유끼꼬는 마사오에게 응석을 부렸다. 그 응석에는 유치한 에로티시즘의 표현도 담겨 있는 것을 마사오는 항상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유끼꼬는 아직 어린애였다.
그런 유끼꼬가 비록 한 번이었지만 어린 호기심으로 만졌던 성기를 지금은 간접적이긴 하지만 그의 어머니인 찌에의 이 닿았다.
‘제발, 잠자코 곱게 그대로 있어라’
마사오는 마음 속으로 타이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충혈되기 시작했다. 급속히 뜨거워졌다. 오히려 찌에의 손등을 누르기 시작했으며, 손 등을 느끼자 더욱더 발기되어 맥박까지 느껴졌다.
게다가 마사오의 의식은 그렇게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오른팔이 찌에의 어깨를 안는 자세가 되어버렸다.
차내는 초만원을 이루고 있는 데다가 멈춰 서 있었기 때문에 창은 열려져 있었어도 바람은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차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 때문에 찌에는 괴로운 표정이었다.
‘나의 이것을 의식할 만한 여유가 없었으면 좋겠는데.’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될 수 있으면 모르도록 해야 한다.
“힘드시죠?”
마사오는 찌에의 어깨를 안은 손을 내리고는 좁은 틉을 비집고 호주머니를 더듬어서 손수건을 꺼냈다. 다행이 손수건은 한 번도 쓰지 않은 깨끗한 것이었다. 마사오는 손수건으로 찌에의 얼굴에 맺혀 있는 땀을 찍어냈다. 화장은 옅게 했지만 그래도 문지르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요.”
작은 소리로 찌에가 말했다. 그 때, 갑자기 열차가 굉음을 내며 움직이는 바람에 승객 전체가 흔들렸다. 그리고 의외의 사태가 발생했다.
기우뚱하면서 마사오가 찌에를 안아 버린 것이다. 그것은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와 동시에 찌에가 넘어지지 않으려다 마사오의 그것을 잡은 것이었다. 부딪힌 것이 아니고 분명히 손으로 잡았던 것이다. 마사오는 쾌감을 느꼈다.
곧바로 그 손은 제자리로 돌아가고 찌에의 이마가 마사오의 어깨에 살짝 부딪쳤다.
“미안해요.”
겨우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였다.
“아닙니다.”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한 마사오는 찌에의 말에 어떤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자기가 무엇을 만졌는지 찌에는 분명히 느꼈던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잡았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잡고 나서는 그것을 의식했다는 표현이었다.
“오히려 제가……,”
당황한 마사오는 찌에처럼 낮은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찌에가 얼른 손을 제자리로 가져갔기 때문에 좀전처럼 마사오의 그것은 다시 찌에의 손등을 누르는 상태가 되었다. 한 번 잡혔던 감각 때문에 마사오의 성기는 이제 완전히 흥분된 상태였다. 그것이 찌에의 손 등을 압박했다. 사방이 사람들로 꽉 차 있었기 때문에 마사오는 허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찌에의 작은 손은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텐데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마사오의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찌에는 얼굴을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찌에는 지금 좀전과는 달리 손등에 맞닿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의식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왜 잡았던 걸까? 넘어지려고 할 때 반사적으로 뭔가를 붙잡으려는 것은 당연하지만 가장 손쉽게 잡을 수 있는 곳이 하필이면 왜 그곳이었을꺄? 좀전부터 의식하고 있으면서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으로 차가 흔들리는 순간,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일가?’
그렇게 생각하는 마사오의 마음에는 찌에는 정숙하고 청결한 미망인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여자라기보다는 상냥한 어미니 상이며 유순한 아내 상이었다. 성(性)과는 무관한 생활을 하고 있는 여자였다.
열차는 다시 서행하기 시작하더니 또다시 정차했다. 마사오는 찌에의 이마에 다시 땀방울이 맺혀 잇는 것을 봤다. 좀전에 꺼냈던 손수건으로 땀을 가볍게 찍어냈다.
“고마워요”
역시 작은 소리였다.
“땀이 눈에 들어가면 아리거든요.”
“몸이 조금만 피곤하면 땀을 흘려요. 어젯밤 늦게까지 바느질을 했더니만……,”
찌에의 목소리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게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한다는 것은 마사오의 무례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낮엔 일을 하시니까 저녁에는 일찍 주무셔야 할 텐데요.”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도 있거든요.”
별다른 의미가 있는 말은 아니겠지만 마사오의 가슴은 다시 두근거렸다. 마사오에게는 은밀한 고백처럼 들리기도 했던 것이다.
정차한 상태에서 그러한 말이 오간 뒤, 찌에의 손이 뭔가 마사오에게 신호를 보내는 듯한 움직임을 마사오는 확실히 느꼈다. 주위의 동요에 의한 움직임이 아니고 의식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치워 달라는 무언의 항의일까? 찌에는 사려 깊은 사람이니 나에게 수치를 주지 않으려고 은밀한 움직임을 보이는 걸까? 아니면 은근히 즐기고 있는 걸까?’
마사오의 마음이 쉽게 평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한 번 그렇게 돼 버리면 좀처럼 평정을 되찾기가 힘들었다. 특히 지금은 더욱 더 그랬다.
‘지금으로서는 오직 학생답게 솔직히 용서를 비는 방법밖에는 없다. 이제 와서 하숙을 좇겨나면 갈 만한 곳도 없다.’
마침내 마사오는 찌에의 어깨에 얹어 놓았던 손에 약간의 힘을 넣으며 고개를 돌려 귀에다 입을 갖다댔다.
“저어, 죄송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절대 들어서는 안 될 내용이었다.
“엉뚱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자연 현상일 뿐입니다. 좀 괴로우시더라도 참아 주십시오.”
다행히 주위는 사람들이 얘기를 주고받느라 산만했다. 혼잣말을 하고 있는 남자도 있었다. 마사오의 목소리는 찌에밖에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찌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상냥한 목소리였다. 오히려 상대방을 위로하는 말투였다. 그리고 손등이 다시 한 번 강하게 마사오에게 느껴졌다. 그것은 화가 나지 않았으니 안심하라는 움직임인 것 같았다.
마사오는 그 움직임을 확인하고 다시 은밀하게 속삭였다.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찌에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너무 많이 지껄이면 주위에서 눈치를 챌 염려가 있었다.
이윽고 창 밖으로 목을 내밀고 있던 맞은편 남자가 소리쳤다.
“파란 불이다. 출발해라!”
출발 신호라도 된 듯 열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봐서 파랑이면 운전사 눈에도 파랑인 게지.”
그 남자의 말에 사람들이 와르르 웃었다. 차내가 잠시 술렁였다. 그리고 그때 다시 찌에의 손바닥이 방향을 바꿔 마사오의 흥분돼 있는 곳으로 오더니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그것을 꽉 잡았다.
“앗.”
마사오가 낮게 외치자 찌에의 손은 곧 풀리면서 제자리로 갔다. 엄지와 검지의 힘이 아직 거기에 남아 있었다.
찌에에게 그런 의식은 없었겠지만 남자인 마사오로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찌에의 희미한 중얼거림이 들렷다.
“항상 이런가요?”
찌에의 그 말 앞에는 아무 곳에서라도는 말이 생략돼 있었다. 마사오는 찌에의 귀에 입을 갖다댔다.
“이런 일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찌에는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열차는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20. 어머니와 딸
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면서도 마사오의 머릿속은 열차 안에서의 일로 뒤죽박죽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의도적이었을까, 아니면 우연이었을까?’
다른 사람도 아닌 찌에의 경우에는 의도적이냐 우연이었느냐 따라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치달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날 저녁, 찌에보다 먼저 집에 돌아온 마사오는 자기 방에 들어가 꼼짝 않고 있었다. 왠지 찌에의 얼굴을 대하기가 꺼림칙하기도 했고 유끼꼬나 하쥬다 할머니와 마주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책상에 앉아 막 책을 펼쳐 들려고 할 때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예전에 느낄 수 없었던 분위기였다. 하숙집에 같이 사는 사람이라면 문 두드리는 소리만 듣고도 누구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데, 이번 경우는 달랐다. 센까도 아닌 듯 싶었다. 하쥬다는 이층에 올라오는 일이 거의 없다.
“누구세요?”
문 밖에서는 대꾸가 없다. 마사오는 일어나 문 쪽으로 갔다. 그리고 문을 열어 밖에 있는 사람을 본 순간 움찔 놀라고 말았다.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끼였던 것이다. 전에 마사오가 하숙했던 긴다꾸 장의 딸 아끼가 찾아오다니 마사오로서는 반가움에 앞서 너무 뜻밖의 일이라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저를 잊은 건 아니겠죠?”
“아끼! 네가 어떻게 여기를 …….”
“왜요, 저는 옛 애인을 찾으면 안 되는 여잔가요? 버림받은 여자의 애증이 얼마나 끈끈한지 마사오 씨에게 확인 시켜 주려고 왔어요”
아끼는 벌써 문을 막고 서 있는 마사오를 밀어내고 방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역시 아끼는 변한게 없었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능숙한 말솜씨며 당돌한 태도가 여전했다. 문을 닫으며 마사오가 말했다.
“아무튼 반갑다. 그런데 누가 아래층에서 내가 여기 있다는 걸 가르쳐주었니?”
“아니요. 아래층에는 아무도 없던 걸요. 제가 제 발로 찾아 올라왔어요.”
“이 집 주인이 여간 까다로운 노파가 아니라서 만났더라면 꽤 골치 아픈 일이 생겼을 텐데.”
“왜요?”
“네가 여자니까.”
“그렇게 도도했던 마사오 씨가 이제야 나를 여자로 봐 주는군요 어쨌든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니라서 고맙습니다.”
아끼는 허리를 깊숙이 꺾어 마사오에게 절까지 하며 능청을 부렸다.
“이렇게 뜻밖에 만나게 되니 괜히 서먹서먹해지는데? 긴다꾸 장 사람들은 다 잘 지내겠지?”
“첫 물음이 겨우 그거예요?”
뾰로퉁해진 아끼가 마사오 앞에 앉으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끼의 그런 모습에서 마사오는 전에 아끼의 방 옷장 안에서 나우었던 사랑의 순간들이 떠올렸다. 어린 소녀이긴 하지만 아끼에게는 남자의 마음을 뿌리째 흔드는 요염한 색기가 있었다. 그 그칠 줄 모르는 아끼의 유혹의 손길을 핑계삼아 마사오는 긴다꾸 장을 나와 하숙을 옮겼던 것이다.
“저녁 아직 안 먹었으면 우리 밖으로 나갈까? 내가 사지.”
“전 여기 있는 게 좋아요 우리 둘이서만 이렇게.”아끼가 다시 마사오의 품에 안겼다. 조금 전보다 더욱 달라붙었다. 그러면서 아끼의 한 손이 슬그머니 마사오의아랫도리로 내려가려는 것을 마사오는 느꼈다. 얼른 손목을 잡았다.
“여기서는 안 돼.”
“그래서 나가자고 하는 거예요?”
“그런 게 아니라…….”
“그러면 가만히 있어요. 저도 눈치가 있는 여자예요. 제가 이 방에 있으면 당신이 곤란해진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구요 역시 이 집에도 마사오의 상대 여자가 없지는 않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
아끼의 그 한마디에 마사오의 말문은 꽉 막혀 버린 셈이었다. 마사오가 주저하는 사이에 아끼의 손길은 어느 새 마사오의 사타구니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마사오는 쑥스러운 기분을 떨텨 버리려고 아끼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입술을 포갰다. 그러나 아끼는 마사오의 입술을 받지 않았다. 재 빨리 뒤로 몸을 뺀 것이다.
“그것 봐요. 능청떠는 버릇은 여전하군요. 자기도 늘 여자를 원하면서 여자가 먼저 손을 대게 만드는 탁월한 수법! 그 수법에 이곳에서는 몇이나 되는 여자가 걸려들었나요?”
은근히 농담조로 빈정거리면서 아끼는 마사오 앞으로 한 걸음 다시 접근해 몸을 밀착시켰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두 손으로 마사오의 가운데를 꽉 움켜잡으며 말했다.
“앞으로 아무리 많은 여자가 이곳을 거쳐가도 선배는 나, 아끼에요. 안 그래요?. 자, 이젠 나가죠”
아끼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끼의 각본대로였다. 마사오는 갑자기 들이닥친 아끼의 술수에 엉겁결에 휘말려든 셈이었다.
두 사람이 방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가려는 순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마사오는 못된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움찔했다.
‘히쥬다 할머니가 아닐까? 일이 묘하게 꼬이겠군’
그렇다고 무작정 계단에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뒤따라 내려오는 아끼는 마사오를 밀치고 앞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찌에와 유끼꼬였다. 모녀가 우연히 길에서 만난 모양이었다. 네 사람이 서로 마주쳤다. 마사오는 당황해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몰랐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역시, 아끼였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아끼라고 해요”
마사오가 얼른 가로막고 나섰다.
“아주머니, 전에 제가 하숙집의 따님입니다. 동생처럼 저를 따랐지요”
“아, 그래요 반갑군요. 더 놀다 가지 그래요? 저희는 괜찮은데요.”
“아니에요. 열차 시간에 맞추려면 지금 곧 가야 합니다. 지나는 길에 잠깐 들렀어요.”
찌에는 꽤 부드러운 태도를 보였으나 유끼꼬는 계속해서 아끼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심상치 않다는 눈초리를 보냈다. 마사오가 말을 꺼냈다.
“자, 아끼, 가자. 시간 늦겠다.”
둘은 밖으로 나왔다. 대충 엄어가 준 것 같아 마사오는 적이 안심이 되었다. 공연히 오해를 살 필요는 없으니까.
역 앞까지 온 두사람은 자그마한 술집에 들어가 긴다꾸 장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에서의 태도로 보아 아끼는 그냥 내버려둘 것 같지 않았으나, 막상 집을 나선 후부터는 당돌한 낌새를 비치지 않았고 줄곧 긴다꾸 장의 이야기를 입에서 올릴 뿐 마사오에겐 별다른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
아끼가 술값을 내려고 했다. 잠시 실랑이 끝에 마사오가 값을 지불하고 술집을 나왔다. 둘이 열차 시간에 맞추어 개찰구 쪽으로 향하려는데 개찰구 바로 앞에 누가 서 있었다. 유끼꼬였다.
‘조금 전에 어머니하고 같이 집에 들어가는 걸 보고 나왔잖아? 어쩐 일일까?’
마사오는 유끼꼬 앞으로 다가섰다.
“유끼꼬? 여기는 어쩐 일이냐? 누굴 기다리는 중이니?”
“친구.”
“음, 약속이 있는 모양이구나”
“예”
아끼가 표를 사 가지고 왔다.
“어머, 이 애는 아까 하숙집에서 본 애잖아?”
“그 집 딸이야.”
“아유 귀엽기도 하지.”
마사오는 유끼꼬에게 아끼를 소개했다. 유끼꼬는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도 아끼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는 않았다. 마사오는 아끼를 재촉했다.
“자, 어서 서둘러야지.”
“알았어요. 아가씨! 이 사람을 잘 감시하세요. 다른 여자를 방에 들이지 않도록 말이에요”
그렇게 내뱉은 뒤 아끼는 개찰구를 향해 걸어갔다. 마사오는 그 뒤를 따라갔다. 아끼는 개찰구 앞에서 멈추더니 마사오를 향해 돌아서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글피 꼭이야!”
마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끼는 개찰구를 나가고 마사오는 유끼꼬에게로 돌아왔다.
“오빠를 기다리고 있었어. 친구를 기다린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야.”
“아끼와 이 근처에서 한잔했어. 자 이제 가자.”
유끼꼬는 약간 사이를 두고 마사오와 아끼의 뒤를 쫓아온 게 틀림없었다. 마사오는 유끼꼬의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마사오는 걸으며 생각했다.
‘이 손이 아끼의 화원을 만졌던 손이야.’
상가를 지나자 길이 몹시 어두웠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엄마한테는 뭐라고 하고 나왔니?”
“친구 집에 잠깐 갔다오겠다고 했어요.”
“그럼, 같이 들어가면 이상하겠구나.”
유끼꼬는 마사오의 손을 꼬옥 쥐었다. 손은 자그마하지만 야무지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내가 먼저 들어갈게요.”
“그래.”
“그런데, 좀전에 그 여자와는 친한 사이에요?”
“응? 으응 약간.”
“오빠를 좋아하는 모양이지?”
좀전에 아끼가 유끼꼬에게 한 말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야, 그렇지는 않아. 원래 말투가 그래서 그렇지. 지금 남자 친구 일로 고민인가 봐. 그래서 자문을 구하러 왔던 거야.”
“애인이 있다구요?”
“응, 성질이 좋지 않은 남잔가 봐.”
“친한 사이도 아닌데. 어떻게 오빠한테 그런 걸 상담할까?”
“원래 제멋대로인 애니까. 남자 관계도 그렇겠지 그런데 이번에는 상대가 잘못 걸린 것 같아 유끼꼬는 이 다음에 남자를 선택할 때는 잘 관찰해 보고해야 될 거야.”
“그 여자, 반드시 또 찾아올 거예요.”
“그럼 어떡하지? 별로 환영하고 싶지 않은 여잔데.”
“하지만 예쁘잖아요”
“유끼꼬는 이 다음에 더 예뻐질 텐데. 그 애에게는 내적인 아름다움이 없어.”
마사오는 유끼꼬의 손을 놓고, 그 작은 어깨를 안았다. 왜 역까지 나와서 마사오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마사오는 죄의식을 느꼈다. 어린애의 팔을 비튼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마사오는 지금 유끼꼬의 팔보다도 귀중한 그 마음을 농락하고 있다는 죄의식이 느껴졌다.
역에서 멀어짐에 따라 담질이 많아지고 주위가 조용해졌다. 가로등 사이의 가로수에서 잎이 떨어져 거리를 덮고 있었다. 유끼꼬는 멈춰 서서 마사오를 올려다봤다. 마사오는 주위를 둘러본 뒤 양팔로 유끼꼬의 어깨를 않았다. 등을 구부려 얼굴을 갖다댔다. 입술을 천천히 포갰다. 유끼꼬는 마사오에게 몸을 맡겼다. 입술을 부드럽게 포개고 등을 어루만지면서 얼굴을 끌어당겼다.
“술 냄새! 정말이었구나, 술 마셨다는 거.”
안심한 듯한 목소리였다. 마사오가 아끼와 어디로 갔었는지 의심했던 모양이다.
“정말이고 말고 그러니까 저녁 식사도 안 해도 되겠어.”
“나는 아직 식사 전인데.”
“그럼 집에서 기다리시겠군. 빨리 들어가야지. 먼저 들어갈래?”
“예.”
마사오는 유끼꼬의 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그대로 서 있다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유끼꼬와는 더 이상 불장난을 해서는 안 됀다.’
현관문은 빼꼼히 열려 있었다. 유끼꼬가 일부러 그렇게 해놓은 듯했다. 마사오는 활짝 열고 일부러 크게 소리쳤다.
“다녀왔습니다.”
유끼꼬가 신고 있던 빨간 끈의 나막신이 밖을 향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문을 잠그고 있는데 히쥬다가 나왔다.
“죄송합니다. 저녁식사하고 한잔하느라고 늦었습니다.”
“전에 있던 하숙집 딸이 왔었다면서요?”
“예, 아주머니도 들으셨군요.”
“앞으로 계속 부를 건가요?”
간섭하는 듯한 말투다. 하지만 싫은 내색을 해서는 안 된다.
“아니오 이제 오지 않을 겁니다.”
마사오가 웃으며 덧붙였다.
“성격이 활탈한 애지요”
“마사오 씨가 들어오란 말도 하진 않았는데 마음대로 계단을 올라가 방엘 들어갔다지요?”
“죄송합니다. 워낙 그런 애니 이해해 주십시오”
“설마 밤에 찾아오는 일은 없겠지죠?”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 집에는 알다시피 어린애가 있으니 주의해 주기 바랍니다.”
“예. 잘 알았습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마사오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계단을 올라갔다. 방으로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아서 갑작스런 아끼의 출현에 대해 생각해 봤다.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의 허술한 태도에 대해 스스로 화가 치밀었다.
‘일 년 동안이나 소식이 없었다는 것은 인연을 끊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다시 불쑥 나타나 멋대로 사람 마음을 휘저어 놓고 갔다. 내일모레 다시 만나자면서. 혹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른다. 성격적으로 나쁜 아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래. 다시 만나더라도 연관에는 가지 않을 거야. 허술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
아끼와의 일에 대한 후회와 더불어 마사오의 머릿속엔, 자신을 찾아다니다 역 개찰구 옆에 서 있던 사랑스런 유끼꼬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음 날 아침, 마사오가 학교에 가려고 역을 향해 길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앞에 찌에가 걸어가고 있었다. 마사오는 걸음을 재촉했다. 어제 있었던 여러 가지 일을 찌에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오늘밤에는 좀 늦게 들어갈 거라는 얘기도 미리 해두기 위해서였다.
“이제 가십니까?”
마사오가 다가가 인사하지 찌에는 깜짝 놀라며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왼손으로 옮겨 들었다. 마사오가 오른쪽에 와 섰기 때문이었다.
“어젯밤…….”
찌에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학생이 그 아가씨와 함께 나간 뒤 그것이 걱정이 되는지 유끼꼬가 역으로 나갔었는데, 역에서 만났었죠?”
순간 마사오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찌에의 말이 단지 추측이라면 순순히 응할 필요는 없다.
“친구 집에 가지 않았던가요?”
오히려 반문을 해 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렷다.
“후후후.”
찌에는 낮은 소리로 웃었다.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유끼꼬는 그렇게 말하지만 구실이죠 아직 어린애니까. 어제 그 아가씨에 대해 민감하게 받아들였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학생이 유혹에 빠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됐던 거겠죠. 급히 구실을 달고 나가더니 학생이 들어오기 바로 전에 들어왔어요”
“유끼꼬가 대학생인 저를 걱정해 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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