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교사의 그 날 이후 - 6부
2019.08.06 16:00
=========================지금
웬일인지 무석도 오늘은 나에게 자신의 바지를 벗기라는 말 대신에 의자에 앉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 오라고 해서 놀랐어요?’하고 무척이나 다정스럽게 물어옵니다. ‘아니, 괜찮아.’하고 대답은 하지만 그가 지금 날 건드릴 생각이 없다는 게 섭섭하기도 합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백까지 걸치고 왔는데.... 이렇게 무석이 인자한 표정으로 날 쳐다봐주니 차가운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훈육실이 무척이나 아늑하게 느껴집니다.
“귀여워요. 선생님.”
어쩜 저렇게 제 마음을 잘 알고 있을까요? 그가 지금껏 제게 한 말 중에 가장 달콤한 말입니다. 입을 열면 눈물이 쏟아질까봐 고맙다는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똑똑한 무석은 내가 감격해하고 있다는 걸 알 겁니다. 그에게 달려가 목에 매달려 키스라도 하고 싶은데....
“부탁 하나 들어줄래요?”
그가 뭘 원하든 지금의 저는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제 첫 경험을 한 항문이 지금도 쓰라리지만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탁자 위에 엎드려 그에게 엉덩이를 내밀어 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어렵게 부탁하지 않아도 그가 원하기만 하면 할 수 있는 건데.... 도대체 어떤 부탁이길래 평소의 그 답지 않게 이렇게 정중한 걸까요?
======================== 그 날 이후
무석과 질펀한 정사를 나눈 그 주말 내내 저는 봄 감기인지, 몸살인지는 모르지만 온 몸이 망치로 맞은 듯 쑤시고 아파서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고맙게도 신랑은 골프 약속까지 취소하고 제 옆에 꼭 붙어 시중을 들어 주었고, 그런 그에게 무척이나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일요일 저녁, 그가 전화로 시어머니에게 물어물어 어렵게 끓인 미음을 한 숟가락씩 목구멍으로 넘기며 앞으로 제 인생에서 불장난은 더 이상 없을 거라고 수도 없이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조회 시작 전에, 그 결심을 빠르게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저는 일부러 무석을 다른 선생님과 학생들로 북적대는 교무실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전달 사항을 딱딱하게 말해 준 다음, 그에게 결별은 선언하였습니다.
“고마웠다.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어.”
저는 너무도 의기양양 했습니다. 그에게 ‘엊그제는 내가 실수했어. 그만 잊어줘!’ 하는 구차한 말 대신 고마웠다고 말함으로써, 그와의 관계에서 제가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는 걸, 저에게는 그가 아무리 넘봐도 깨지지 않는 단단한 틀이 있다는 걸 알려준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교사 장 윤정의 본래 모습인 것입니다.
사실 그는 화를 내면서 ‘우리 사이에 어쩌면 그럴 수 있느냐, 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황홀해 하지 않았느냐’ 하고 따져 온다면, 저로서는 뾰족한 대책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더욱이 그가 만약 ‘우리 둘의 관계를 신랑에게 말하겠다.’라거나, ‘미성년자와의 성 관계에 대해 고발하겠다.’라는 등의 협박을 해 온다면, 꼼짝없이 그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웬일인지 그런 게 걱정되지 않았습니다. 무석이 치밀하고 교활하긴 하지만, 그렇게 비열한 아이는 아니라는 것을 어느덧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제 믿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주었습니다. 섭섭하게고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저의 결심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제가 더 고맙습니다. 추억으로 간직할게요.”
그리고는 보통 다른 선생님에게 하듯,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서 가버렸습니다. 저는 조금 서운한 마음이 있었지만, 무석에게 고맙기도 했고,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다는 생각에 뿌듯하였습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은 정말 아무런 동요도,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모든 게 평화로웠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한 번 결심하면 그게 언제까지 유지되는 지 참 궁금합니다. 전에 교사 회식 자리에서 어떤 남자 선생님이 금연한 지 사흘 만에 다시 담배 갑을 여는 걸 보고 다들 의지력이 허약하다며 비웃었던 기억이 납니다만, 제 의지력도 아마 그 선생님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주말에 신랑에게서 받았던 감동은 불과 며칠도 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전에는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던 학생 지도와 미술 수업도 이제는 별다른 흥미를 주지 못했습니다. 수업시간엔 어떻게든 관심을 가져 보려고 일부러 애를 써봤지만, 대학입시에 별 도움도 되지 않고, 학생들도 싫어하는 수업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면 그 다음부터는 그저 귀찮은 노동이 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일상은 너무나 권태로웠고, 저는 제가 이미 과거의 제가 아니라는 걸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말하기도 부끄러운 버릇까지 생겼습니다. 신랑 몰래 자위를 하는 것까지야 그렇다 치고, 학교의 절반을 차지하는 남학생들이 전처럼 사랑스럽고 귀여운 제자들로 보이는 대신, 조금만 자극을 줘도 단단하게 굳어오는 자지를 가진 남자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남학생의 사타구니 쪽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제 자신을 발견하곤 깜짝깜짝 놀라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일부러 무석을 쳐다보거나 그와 단둘이 있게 되는 자리를 피했습니다만, 복도에서나 운동장에서, 아니 길거리에서도 무석처럼 키가 크고, 빼빼 마른 남학생을 보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고 예전에 그와 나눴던 정사에 대한 기억이 언뜻언뜻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태인지라 점심시간에 부반장인 유진이 저에게 ‘드릴 말씀이 있다.’고 찾아왔을 때에도 귀찮기만 했습니다. 이삼 주 전만 하더라도 저는 학생과의 면담을 무척이나 소중하게 생각하였고, 여학생들이 호소하는 것은 대개 뻔했습니다만, 그래도 그 애들에게 스승으로서, 인생을 먼저 산 선배로서 뭔가 도움이 되는 말을 해줄 수 있다는 게 무척이나 보람 있어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마저도 싫었습니다. 유진을 먼저 훈육실로 보내 놓고 어떻게든 면담시간을 단축시켜 보고자 나는 게으름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훈육실의 문을 여는 순간,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유진의 눈에 글썽이는 눈물을 보자 저는 그 애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는 걸 깨닫고, 진지해졌습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저 전학시켜 주세요.”
미처 의자에 앉지도 못한 저에게 다짜고짜 한 마디하고서 탁자에 엎드려 엉엉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참을성 있게 그 애의 울음이 멈추기를 기다렸습니다.
“무슨 일인지 알아야 선생님이 돕지.”
“.....”
“이성 문제니?”
“네...”
“우리 학교 남학생?”
“네.”
“이름 말해 줄 수 있니?”
“무석이요. 이 무석.”
그 때부터 제 심장의 박동은 빨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유진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점점 더 빨라졌습니다. 학기 초부터 무석을 좋아했던 유진이 처음 그에게 고백한 건 아마도 그가 내 스케치북을 훔쳐간 그 때 즈음인 듯 했습니다. 무석이 자신에게 강제로 키스를 했을 땐 무섭긴 했지만, 그 다음엔 더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유진이 말할 때에는 제 가슴 속에 뜨거운 불덩어리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무석이 미술 시간에 작업대에 나란히 앉았을 때 유진의 치맛 속을 더듬은 장면에서 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훈육실을 서성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언제였어?”
“저번 주...”
제가 그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던 그 시기에, 무석은 제 수업시간에 보란 듯이 다른 여학생의 몸을 더듬고 있었던 것입니다. 표시를 안 하려고 애를 썼지만 제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갔고 유진은 그런 저를 보고 바짝 얼어붙었습니다.
“넌... 어떻게 했어?”
“저는 말리려고 했는데... 수업 시간이라 다른 애들이 볼까 봐.”
“그래서... 결국 허용하고 말았어?”
고개를 끄덕거리는 유진은 보며,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파렴치하고 싸가지 없고 인간 말종 같은 녀석! 제가 알고 있는 가장 심한 욕을 마음속으로 퍼부어댔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겨우 목소리만을 가다듬고 유진에게 ‘그 다음에는?’하고 물었습니다.
“수업 끝나고 제가 그런 거 싫다고 하니까, 무석이가 알았다고 했어요.”
“그...그럼 된 거네?”
“그런데 그 다음부터 저하고는 말도 안 해요. 선생님 저 어떡해요? 차라리 싫다는 말을 하지 말 걸! 무석이가 저를 피하는 걸 보면 정말 죽어버리고 싶어요!”
그렇습니다. 지금도 제가 무석에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그의 냉정한 외면입니다. 차라리 화를 내고 날뛰면 더 나은데... 아무튼 저는 다시 탁자에 고개를 묻고 울고 있는 유진에게 해줄 말이 없었습니다. 시작은 달랐지만 무석은 유진과 저를 같은 방식으로 다루었고, 저 역시 그에 대하여 적당하게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지금
저는 결국 점심시간에 무석이 일러 준 레스토랑 앞까지 오고야 말았습니다. 훈육실에서의 그의 부탁은 느끼기에 따라선 무척이나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선배 생일이라 파티를 하는데 파트너로 참석해 달라는 것은 만약 제가 무석이 다니는 학교 선생님이 아니라면 못 들어줄 이유가 없는 부탁인 것입니다. 계단을 내려가자 말끔한 유니폼을 입은 총각이 다가와 예약이 되어 있느냐고 묻습니다. 제가 무석의 이름을 대자 그 이름이 무척이나 친근한 듯 아는 체를 하며,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벽에 걸린 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무척이나 세련되어 보여 조금은 안심이 됩니다만 아까부터 조금씩 불안해지는 마음이 추스려 지지 않습니다.
나이 많은 내가 어떻게 너하고 그런 델 갈 수 있겠느냐고 묻자 무석은 선배들도 다 그렇다며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지만, 지금 내 모습은 아무리 낮게 잡아도 스물 중반은 되어 보입니다. 차라리 가디건을 걸치고 오지 않았다면 좀 더 젊어 보였겠지만, 교사가 되어가지고 소매 없는 원피스 차림으로 밤거리를 활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아 저기, 무석의 모습이 보입니다.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 입어서인지 누가 봐도 고등학생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오늘은 윤정 씨라고 부를게요. 괜찮죠?”
“응.”
“네라고 하세요.”
“네...네.”
무석이 볼에 뽀뽀는 해주었지만 그 정도로는 불안함이 가시지 않습니다. 그냥 차라리 못오겠다고 할 걸. 하지만 그랬다간 무석이 다시는 저를 안아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이 자리는 저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운명인 것입니다.
============== 그 날 이후
제가 무석을 다시 호출한 건 유진과의 면담이 있었던 그 날 방과 후였습니다. 일과 시간 이후에는 훈육실을 이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미술실로 오라고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술실이 있는 별관 전체가 텅텅 비어 있어 조금 꺼려지기는 했지만, 다른 선생님들이 있는 교무실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었고, 또한 다음 날 점심시간까지 기다리기엔 제 마음이 너무나 조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작업대 건너편에 앉아 예전의 능글 맞는 미소를 짓는 대신, 차갑게 입술을 다물고 있는 무석의 얼굴을 쳐다보며 나는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애를 썼습니다. 눈 앞에 있는 남학생은 파렴치한 바람둥이가 아니라 내가 바른 길로 이끌어야할 제자라는 걸 몇 번이고 다짐한 끝에 입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너 원래 그런 녀석이야?”
이건 또 무슨 황당무계한 말입니까? 논리적으로 그를 설득하려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입은 방정 맞게도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비난의 말을 꺼내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만약 제가 담임로서의 경험이 훨씬 많았다면 그 상황을 쉽게 반전시킬 수 있었을 텐데, 저는 오히려 표정까지 굳히고 말았습니다. 그런 저에 비해 그는 너무나 침착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그가 제 면담 능력을 비웃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자 저는 어느덧 이성의 끈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네가 유진이한테 한 짓을 모를 줄 알아?”
‘잘못했습니다’ 라든지,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라든지 하는 반성까지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당황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 생각했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습니다. 오히려 그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더 당당해 보였습니다.
“뭘 말씀하시는 건데요? 유진이 몸 만진 거요, 아니면 헤어진 거요?”
“둘 다!”
“그건 저와 유진이의 문제인데요?”
너무나 뻔뻔스럽게 그는 되물었고 언제나 그래왔듯 그와의 대화에서 저는 주도권을 잡기 어려웠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말도 잘하는지... 하지만 저도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더욱더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어떻게 어린 여학생의 몸을 함부러 만질 수 있느냐’며, ‘너는 까진 녀석이지만 유진이는 착하고 순진한 애라 그런 못된 짓은 용서 못한다’며, ‘유진이 부모님이 아시면 넌 퇴학은 물론, 감옥에 가야한다’며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그를 쏘아붙였습니다. 그는 그저... 제 레퍼토리가 바닥날 때까지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리곤 제풀에 지쳐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저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선생님은요? 저에게 하신 것.”
분명 해는 떨어지지 않았는데 눈앞이 어두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별관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너무나 조용해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듯했습니다. 몇 마디 되지 않는 그 말이 그가 저에게 했던 어떤 저속한 말보다 더 심한 충격을 주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스케치북을 미끼로 저에게 벗기를 강요한 건 그였지만, 그 이후의 일들은 모두 제가 원했던 게 확실했습니다. 아니, 그가 어떻게 저를 도발했다 해도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한 것 자체가 교사인 저의 잘못이었습니다. 제가 무석에게 한 짓에 비하면 무석이 유진에게 한 행동은 그야말로 새발의 피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무석이도 유진과 마찬가지로 보호받아야 할 청소년인데도 말입니다.
“꼭 질투하시는 것 같아요, 선생님.”
질투라고?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진의 상대가 무석이 아닌 다른 남학생이었더라면 제가 그렇게 흥분했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요. 갑자기 무석의 얼굴에 예전에 절 능욕할 때 보였던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그걸 보자 몸 한쪽에 묘하게 비틀려 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유진이랑 다시 사귀어요?”
“교실로 돌아 가! 꼴 보기 싫어!”
의자에서 일어선 무석은 문 쪽으로 걸어가는 대신 작업대를 돌아 반대편에 앉은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미처 말릴 틈도 주지 않고 제 귀에 입을 바짝 대고는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선생님 점막에 넣고 싶어요. 제 굵은 기둥..”
그는 그 말을 마치고 미술실을 나가버렸지만 파블로프(Ivan Pavlov, 1849-1936)의 실험에 나오는 개처럼, 저는 익숙한 그 말에 반응하였습니다. 며칠 동안 무료함 속에서도 가늘게 유지되었던 결심은 사라지고, 무석과의 정사가 가져다 주었던 황홀한 쾌감에 대한 기억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결심하기만 하면 다시 한 번 그런 걸 경험할 수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저는 자리에서 일어서 저와 무석이 앉았던 의자를 작업대 깊숙이 밀어 넣고 미술실을 나와 이제 막 어둑어둑해지는 복도를 걸었습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층계참을 돌던 나는 옥상으로 향하는 층계의 중간 편평한 곳, 어둠 속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무석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잔인한 유혹이었습니다. 그를 못 본 척 하며 한발 한발 계단을 내려가고는 있지만 그에게서 멀어질수록 유혹은 커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2층까지도 채 내려가지 못하고 저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3층을 지나 그대로 옥상으로 가는 계단을 밟았습니다. 마치 수업 시작 후에 교실에 들어오는 지각한 학생이 된 심정이었지만, 오래간만에 느끼는 강한 욕구에 제 심장은 터질 듯 뛰고 있었습니다.
그런 저를 그는 벽으로 밀어붙였고 저는 차갑고 까칠한 시멘트에 두 손을 짚었습니다. 그의 손길은 거칠게 제 청바지의 단추를 풀고, 자크를 내렸고, 그러는 동안 저는 제 속에서 내장 하나 쯤은 터져 버리는 듯한 희열의 폭발을 느꼈습니다. ‘이게 너무 좋아. 여기가 학교든, 내가 교사든..’ 무석의 차가운 손이 팬티와 아랫배 사이를 파고 들어 왔습니다. 저는 다리를 벌려 그의 손이 쉽게 전진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수풀을 지나 둔덕을 넘는 것까지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으으으응!”
손가락 끝이 음핵을 압박하자 짜르르 번지는 전율을 참지 못하고 저는 짐승처럼 울부짖었습니다. 동시에 그간 저를 억누르고 있던 모든 것들, 지성, 교양, 자존심, 책임감, 죄책감 같은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한 마리의 암컷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웬일인지 무석도 오늘은 나에게 자신의 바지를 벗기라는 말 대신에 의자에 앉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 오라고 해서 놀랐어요?’하고 무척이나 다정스럽게 물어옵니다. ‘아니, 괜찮아.’하고 대답은 하지만 그가 지금 날 건드릴 생각이 없다는 게 섭섭하기도 합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백까지 걸치고 왔는데.... 이렇게 무석이 인자한 표정으로 날 쳐다봐주니 차가운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훈육실이 무척이나 아늑하게 느껴집니다.
“귀여워요. 선생님.”
어쩜 저렇게 제 마음을 잘 알고 있을까요? 그가 지금껏 제게 한 말 중에 가장 달콤한 말입니다. 입을 열면 눈물이 쏟아질까봐 고맙다는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똑똑한 무석은 내가 감격해하고 있다는 걸 알 겁니다. 그에게 달려가 목에 매달려 키스라도 하고 싶은데....
“부탁 하나 들어줄래요?”
그가 뭘 원하든 지금의 저는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제 첫 경험을 한 항문이 지금도 쓰라리지만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탁자 위에 엎드려 그에게 엉덩이를 내밀어 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어렵게 부탁하지 않아도 그가 원하기만 하면 할 수 있는 건데.... 도대체 어떤 부탁이길래 평소의 그 답지 않게 이렇게 정중한 걸까요?
======================== 그 날 이후
무석과 질펀한 정사를 나눈 그 주말 내내 저는 봄 감기인지, 몸살인지는 모르지만 온 몸이 망치로 맞은 듯 쑤시고 아파서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고맙게도 신랑은 골프 약속까지 취소하고 제 옆에 꼭 붙어 시중을 들어 주었고, 그런 그에게 무척이나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일요일 저녁, 그가 전화로 시어머니에게 물어물어 어렵게 끓인 미음을 한 숟가락씩 목구멍으로 넘기며 앞으로 제 인생에서 불장난은 더 이상 없을 거라고 수도 없이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조회 시작 전에, 그 결심을 빠르게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저는 일부러 무석을 다른 선생님과 학생들로 북적대는 교무실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전달 사항을 딱딱하게 말해 준 다음, 그에게 결별은 선언하였습니다.
“고마웠다.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어.”
저는 너무도 의기양양 했습니다. 그에게 ‘엊그제는 내가 실수했어. 그만 잊어줘!’ 하는 구차한 말 대신 고마웠다고 말함으로써, 그와의 관계에서 제가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는 걸, 저에게는 그가 아무리 넘봐도 깨지지 않는 단단한 틀이 있다는 걸 알려준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교사 장 윤정의 본래 모습인 것입니다.
사실 그는 화를 내면서 ‘우리 사이에 어쩌면 그럴 수 있느냐, 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황홀해 하지 않았느냐’ 하고 따져 온다면, 저로서는 뾰족한 대책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더욱이 그가 만약 ‘우리 둘의 관계를 신랑에게 말하겠다.’라거나, ‘미성년자와의 성 관계에 대해 고발하겠다.’라는 등의 협박을 해 온다면, 꼼짝없이 그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웬일인지 그런 게 걱정되지 않았습니다. 무석이 치밀하고 교활하긴 하지만, 그렇게 비열한 아이는 아니라는 것을 어느덧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제 믿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주었습니다. 섭섭하게고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저의 결심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제가 더 고맙습니다. 추억으로 간직할게요.”
그리고는 보통 다른 선생님에게 하듯,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서 가버렸습니다. 저는 조금 서운한 마음이 있었지만, 무석에게 고맙기도 했고,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다는 생각에 뿌듯하였습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은 정말 아무런 동요도,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모든 게 평화로웠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한 번 결심하면 그게 언제까지 유지되는 지 참 궁금합니다. 전에 교사 회식 자리에서 어떤 남자 선생님이 금연한 지 사흘 만에 다시 담배 갑을 여는 걸 보고 다들 의지력이 허약하다며 비웃었던 기억이 납니다만, 제 의지력도 아마 그 선생님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주말에 신랑에게서 받았던 감동은 불과 며칠도 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전에는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던 학생 지도와 미술 수업도 이제는 별다른 흥미를 주지 못했습니다. 수업시간엔 어떻게든 관심을 가져 보려고 일부러 애를 써봤지만, 대학입시에 별 도움도 되지 않고, 학생들도 싫어하는 수업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면 그 다음부터는 그저 귀찮은 노동이 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일상은 너무나 권태로웠고, 저는 제가 이미 과거의 제가 아니라는 걸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말하기도 부끄러운 버릇까지 생겼습니다. 신랑 몰래 자위를 하는 것까지야 그렇다 치고, 학교의 절반을 차지하는 남학생들이 전처럼 사랑스럽고 귀여운 제자들로 보이는 대신, 조금만 자극을 줘도 단단하게 굳어오는 자지를 가진 남자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남학생의 사타구니 쪽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제 자신을 발견하곤 깜짝깜짝 놀라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일부러 무석을 쳐다보거나 그와 단둘이 있게 되는 자리를 피했습니다만, 복도에서나 운동장에서, 아니 길거리에서도 무석처럼 키가 크고, 빼빼 마른 남학생을 보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고 예전에 그와 나눴던 정사에 대한 기억이 언뜻언뜻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태인지라 점심시간에 부반장인 유진이 저에게 ‘드릴 말씀이 있다.’고 찾아왔을 때에도 귀찮기만 했습니다. 이삼 주 전만 하더라도 저는 학생과의 면담을 무척이나 소중하게 생각하였고, 여학생들이 호소하는 것은 대개 뻔했습니다만, 그래도 그 애들에게 스승으로서, 인생을 먼저 산 선배로서 뭔가 도움이 되는 말을 해줄 수 있다는 게 무척이나 보람 있어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마저도 싫었습니다. 유진을 먼저 훈육실로 보내 놓고 어떻게든 면담시간을 단축시켜 보고자 나는 게으름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훈육실의 문을 여는 순간,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유진의 눈에 글썽이는 눈물을 보자 저는 그 애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는 걸 깨닫고, 진지해졌습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저 전학시켜 주세요.”
미처 의자에 앉지도 못한 저에게 다짜고짜 한 마디하고서 탁자에 엎드려 엉엉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참을성 있게 그 애의 울음이 멈추기를 기다렸습니다.
“무슨 일인지 알아야 선생님이 돕지.”
“.....”
“이성 문제니?”
“네...”
“우리 학교 남학생?”
“네.”
“이름 말해 줄 수 있니?”
“무석이요. 이 무석.”
그 때부터 제 심장의 박동은 빨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유진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점점 더 빨라졌습니다. 학기 초부터 무석을 좋아했던 유진이 처음 그에게 고백한 건 아마도 그가 내 스케치북을 훔쳐간 그 때 즈음인 듯 했습니다. 무석이 자신에게 강제로 키스를 했을 땐 무섭긴 했지만, 그 다음엔 더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유진이 말할 때에는 제 가슴 속에 뜨거운 불덩어리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무석이 미술 시간에 작업대에 나란히 앉았을 때 유진의 치맛 속을 더듬은 장면에서 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훈육실을 서성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언제였어?”
“저번 주...”
제가 그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던 그 시기에, 무석은 제 수업시간에 보란 듯이 다른 여학생의 몸을 더듬고 있었던 것입니다. 표시를 안 하려고 애를 썼지만 제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갔고 유진은 그런 저를 보고 바짝 얼어붙었습니다.
“넌... 어떻게 했어?”
“저는 말리려고 했는데... 수업 시간이라 다른 애들이 볼까 봐.”
“그래서... 결국 허용하고 말았어?”
고개를 끄덕거리는 유진은 보며,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파렴치하고 싸가지 없고 인간 말종 같은 녀석! 제가 알고 있는 가장 심한 욕을 마음속으로 퍼부어댔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겨우 목소리만을 가다듬고 유진에게 ‘그 다음에는?’하고 물었습니다.
“수업 끝나고 제가 그런 거 싫다고 하니까, 무석이가 알았다고 했어요.”
“그...그럼 된 거네?”
“그런데 그 다음부터 저하고는 말도 안 해요. 선생님 저 어떡해요? 차라리 싫다는 말을 하지 말 걸! 무석이가 저를 피하는 걸 보면 정말 죽어버리고 싶어요!”
그렇습니다. 지금도 제가 무석에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그의 냉정한 외면입니다. 차라리 화를 내고 날뛰면 더 나은데... 아무튼 저는 다시 탁자에 고개를 묻고 울고 있는 유진에게 해줄 말이 없었습니다. 시작은 달랐지만 무석은 유진과 저를 같은 방식으로 다루었고, 저 역시 그에 대하여 적당하게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지금
저는 결국 점심시간에 무석이 일러 준 레스토랑 앞까지 오고야 말았습니다. 훈육실에서의 그의 부탁은 느끼기에 따라선 무척이나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선배 생일이라 파티를 하는데 파트너로 참석해 달라는 것은 만약 제가 무석이 다니는 학교 선생님이 아니라면 못 들어줄 이유가 없는 부탁인 것입니다. 계단을 내려가자 말끔한 유니폼을 입은 총각이 다가와 예약이 되어 있느냐고 묻습니다. 제가 무석의 이름을 대자 그 이름이 무척이나 친근한 듯 아는 체를 하며,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벽에 걸린 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무척이나 세련되어 보여 조금은 안심이 됩니다만 아까부터 조금씩 불안해지는 마음이 추스려 지지 않습니다.
나이 많은 내가 어떻게 너하고 그런 델 갈 수 있겠느냐고 묻자 무석은 선배들도 다 그렇다며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지만, 지금 내 모습은 아무리 낮게 잡아도 스물 중반은 되어 보입니다. 차라리 가디건을 걸치고 오지 않았다면 좀 더 젊어 보였겠지만, 교사가 되어가지고 소매 없는 원피스 차림으로 밤거리를 활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아 저기, 무석의 모습이 보입니다.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 입어서인지 누가 봐도 고등학생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오늘은 윤정 씨라고 부를게요. 괜찮죠?”
“응.”
“네라고 하세요.”
“네...네.”
무석이 볼에 뽀뽀는 해주었지만 그 정도로는 불안함이 가시지 않습니다. 그냥 차라리 못오겠다고 할 걸. 하지만 그랬다간 무석이 다시는 저를 안아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이 자리는 저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운명인 것입니다.
============== 그 날 이후
제가 무석을 다시 호출한 건 유진과의 면담이 있었던 그 날 방과 후였습니다. 일과 시간 이후에는 훈육실을 이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미술실로 오라고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술실이 있는 별관 전체가 텅텅 비어 있어 조금 꺼려지기는 했지만, 다른 선생님들이 있는 교무실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었고, 또한 다음 날 점심시간까지 기다리기엔 제 마음이 너무나 조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작업대 건너편에 앉아 예전의 능글 맞는 미소를 짓는 대신, 차갑게 입술을 다물고 있는 무석의 얼굴을 쳐다보며 나는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애를 썼습니다. 눈 앞에 있는 남학생은 파렴치한 바람둥이가 아니라 내가 바른 길로 이끌어야할 제자라는 걸 몇 번이고 다짐한 끝에 입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너 원래 그런 녀석이야?”
이건 또 무슨 황당무계한 말입니까? 논리적으로 그를 설득하려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입은 방정 맞게도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비난의 말을 꺼내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만약 제가 담임로서의 경험이 훨씬 많았다면 그 상황을 쉽게 반전시킬 수 있었을 텐데, 저는 오히려 표정까지 굳히고 말았습니다. 그런 저에 비해 그는 너무나 침착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그가 제 면담 능력을 비웃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자 저는 어느덧 이성의 끈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네가 유진이한테 한 짓을 모를 줄 알아?”
‘잘못했습니다’ 라든지,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라든지 하는 반성까지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당황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 생각했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습니다. 오히려 그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더 당당해 보였습니다.
“뭘 말씀하시는 건데요? 유진이 몸 만진 거요, 아니면 헤어진 거요?”
“둘 다!”
“그건 저와 유진이의 문제인데요?”
너무나 뻔뻔스럽게 그는 되물었고 언제나 그래왔듯 그와의 대화에서 저는 주도권을 잡기 어려웠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말도 잘하는지... 하지만 저도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더욱더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어떻게 어린 여학생의 몸을 함부러 만질 수 있느냐’며, ‘너는 까진 녀석이지만 유진이는 착하고 순진한 애라 그런 못된 짓은 용서 못한다’며, ‘유진이 부모님이 아시면 넌 퇴학은 물론, 감옥에 가야한다’며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그를 쏘아붙였습니다. 그는 그저... 제 레퍼토리가 바닥날 때까지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리곤 제풀에 지쳐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저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선생님은요? 저에게 하신 것.”
분명 해는 떨어지지 않았는데 눈앞이 어두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별관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너무나 조용해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듯했습니다. 몇 마디 되지 않는 그 말이 그가 저에게 했던 어떤 저속한 말보다 더 심한 충격을 주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스케치북을 미끼로 저에게 벗기를 강요한 건 그였지만, 그 이후의 일들은 모두 제가 원했던 게 확실했습니다. 아니, 그가 어떻게 저를 도발했다 해도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한 것 자체가 교사인 저의 잘못이었습니다. 제가 무석에게 한 짓에 비하면 무석이 유진에게 한 행동은 그야말로 새발의 피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무석이도 유진과 마찬가지로 보호받아야 할 청소년인데도 말입니다.
“꼭 질투하시는 것 같아요, 선생님.”
질투라고?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진의 상대가 무석이 아닌 다른 남학생이었더라면 제가 그렇게 흥분했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요. 갑자기 무석의 얼굴에 예전에 절 능욕할 때 보였던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그걸 보자 몸 한쪽에 묘하게 비틀려 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유진이랑 다시 사귀어요?”
“교실로 돌아 가! 꼴 보기 싫어!”
의자에서 일어선 무석은 문 쪽으로 걸어가는 대신 작업대를 돌아 반대편에 앉은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미처 말릴 틈도 주지 않고 제 귀에 입을 바짝 대고는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선생님 점막에 넣고 싶어요. 제 굵은 기둥..”
그는 그 말을 마치고 미술실을 나가버렸지만 파블로프(Ivan Pavlov, 1849-1936)의 실험에 나오는 개처럼, 저는 익숙한 그 말에 반응하였습니다. 며칠 동안 무료함 속에서도 가늘게 유지되었던 결심은 사라지고, 무석과의 정사가 가져다 주었던 황홀한 쾌감에 대한 기억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결심하기만 하면 다시 한 번 그런 걸 경험할 수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저는 자리에서 일어서 저와 무석이 앉았던 의자를 작업대 깊숙이 밀어 넣고 미술실을 나와 이제 막 어둑어둑해지는 복도를 걸었습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층계참을 돌던 나는 옥상으로 향하는 층계의 중간 편평한 곳, 어둠 속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무석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잔인한 유혹이었습니다. 그를 못 본 척 하며 한발 한발 계단을 내려가고는 있지만 그에게서 멀어질수록 유혹은 커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2층까지도 채 내려가지 못하고 저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3층을 지나 그대로 옥상으로 가는 계단을 밟았습니다. 마치 수업 시작 후에 교실에 들어오는 지각한 학생이 된 심정이었지만, 오래간만에 느끼는 강한 욕구에 제 심장은 터질 듯 뛰고 있었습니다.
그런 저를 그는 벽으로 밀어붙였고 저는 차갑고 까칠한 시멘트에 두 손을 짚었습니다. 그의 손길은 거칠게 제 청바지의 단추를 풀고, 자크를 내렸고, 그러는 동안 저는 제 속에서 내장 하나 쯤은 터져 버리는 듯한 희열의 폭발을 느꼈습니다. ‘이게 너무 좋아. 여기가 학교든, 내가 교사든..’ 무석의 차가운 손이 팬티와 아랫배 사이를 파고 들어 왔습니다. 저는 다리를 벌려 그의 손이 쉽게 전진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수풀을 지나 둔덕을 넘는 것까지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으으으응!”
손가락 끝이 음핵을 압박하자 짜르르 번지는 전율을 참지 못하고 저는 짐승처럼 울부짖었습니다. 동시에 그간 저를 억누르고 있던 모든 것들, 지성, 교양, 자존심, 책임감, 죄책감 같은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한 마리의 암컷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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