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본능 - 단편
2018.05.10 00:50
원초적 본능
오 양(吳孃)의 비디오 사건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미인탈렌트였던 미스코리아 출신의 오 모 양이 자신의 매니져였던 남자와 정사를 벌이는 장면의 비디오가 인터넷에 떴던 사건이다. 당시 전 국민을 이른바 관음증 환자로 만들었던 대사건이었다,
관음증이란 타인의 성애장면이나 성교장면을 몰래 훔쳐보며 흥분을 하는 이상증세라고 사전에 풀이되어 있다. 이상증세라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가장 원초적인 호기심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설이 길었다. 나는 스스로 관음주의자(Voyeurer)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씹을 무지 좋아하지만 솔직히 내가 씹을 하는 것보다 남이 씹하는 것을 몰래 훔쳐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씹이 아니더라도 키스를 하거나 애무 특히 서로의 자지와 보지를 애무하거나 빠는 장면을 볼 수 있으면 대박이라고 생각한다. 둘이 지랄하는 장면이 아니고 그냥 여자의 보지만 봐도 일당은 건진 것이 된다.
국민학교 4학년 무렵 나는 이미 여자의 보지에 대해 무한한 경이와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새벽 좆이 서면 엎드린 채 요에 자지를 비며 정액 없는 드라이 사정으로 오르가즘을 맛보던 깜찍한 아이였다.
당시 한 방에서 남녀 구별 없이 한 가족 4, 5명이 함께 자는 것은 통상의 풍경이었는데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지어야했던 큰누나는 일어나자마자 윗목에 있는 요강에 앉아 오줌을 누었다. 그 작은 공간에서 내가 살짝 눈을 뜨면 오줌을 토해내는 누나의 열린 보지가 코앞에 전개되어 있었다. 그 신비하고 징그럽고 귀엽고 깜찍한 내 사랑 보지를 보기 위해 나는 그 어린 시절 새벽잠을 설치고 자는 체 하며 보지가 열리기를 기다렸었다. 나이를 먹은 지금에도 오줌줄기를 쏟아내는 여자의 보지를 보고 그리도 흥분하는 연유가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남자가 여자의 보지를 보고 싶어하는 게 남자들의 일방적이고 변태적인 욕구만은 아닌 듯 싶다. 자기의 보지를 남자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여자도 있다는 걸 알게되었던 것이다.
남녀 형제가 한 방을 쓰는 게 불편한 건 누이들 쪽이었다. 그래서 내가 중학생이 되자 나는 같은 동네에 사는 이모 님 댁으로 쫓겨가게 되었다. 추방이지만 나에겐 천국으로 입성한 것이었다.
이모님 댁은 옛날 일본식 가옥으로 방이 여덟 개가 넘었고 정원도 꽤 넓어 내 눈에는 대궐이었다. 그 넓은 집에 홀로되신 이모와 마흔 전후의 이종형님 내외 그리고 두 조카딸 등 다섯이 살고 있었으나 형님이 지방에서 교편을 잡고 있어 한 달에 한 두 번만 오시는지라 남자라야 내가 유일했다.
겨울방학을 끝내고 2학년으로 올라간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나에게 섹스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었다. 당시 나에게는 실물로 보긴 보았지만 가랑이 저쪽의 그림자 속에 묻혀 보이던 누나 보지를 그리며 딸을 치는 게 전부였었다.
어느 날 저녁을 먹고 형수와 그녀 또래의 동네 아줌마들이 우리 집에 모여 라디오에서 나오는 연속극을 들으며 수다를 떠는 속에 내가 끼어 있었다. 그런데 내 맞은 편에 앉아 있던 형수님이 다리를 바꾸는 순간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고쟁이가 안 보이는 것은 물론 다리 사이의 사타구니 안쪽이 거무티티하게 보였던 것이다. 나는 눈을 비비면서 딴청을 부렸다. 그런데 또 잠시 후 입으로는 계속 수다를 떨면서 형수는 아까보다 더 느리게 다리를 바꾸며 가랑이를 내 쪽으로 벌려준 것이다. 시커먼 보지털이 보였고 계곡 끝에 찢어진 살점들이 분명하게 보였다. 나는 수다에 동참해 정신이 없는 다른 여편네들을 훔칫 보며 숨을 들이켰다. 숨이 탁 막혔기 때문이다. 맨 오른쪽 구석에 앉아있는 나만 볼 수 있도록 각도를 잡으면서 형수님이 자기 보지를 열어주는 것 같았다. 자지가 발작적으로 용트림을 하며 발기되었다. 형수가 힐끗 보았다는 느낌을 받으며 두 손으로 꺼떡대는 좆을 꽉 눌렀다.
그전까지는 단 한번도 형수님을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워낙 나이 차가 많기도 했으려니와 하는 행동도 꼭 큰 엄마가 하듯이 나를 어린애 취급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꼬맹이 도련님에게 자기 보지를 열어 보였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무튼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꿈에도 그리던 보지를 보았으니 그 날 밤 정말로 맛있게 플레이(당시엔 수음을 핸드플레이라고 했음)를 쳤다. 치고 치고 또 치고 자지가 아플 때까지 치다가 떨어졌다.
형수님의 노출쇼는 그 후에도 간간히 이어졌다. 희한한 것은 단둘이 있을 때는 그러지를 않다가 몇 명이 함께 있을 때에만 나의 맞은 편에 자릴 해 보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의 보지를 보며 흥분에 떨면서도 나는 그녀도 내게 자기 보지를 열어보이며 흥분해하고 있음을 감지하였다. 형님이 늘 집을 비우니 생과부로 지내며 그나마 그 집에 있는 유일한 남자인 나를 상대로 섹스플레이를 하는 모양이었다. 사유야 어떻든 나를 남자 대접해준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말이다.
그일 있은 후 내게 형수님이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큰 가슴도 그렇고 쫙 벌어진 엉덩이에도 눈이 갔으며 그것들이 보지만큼 내 좆을 세우는데 일조를 하였다. 내 앞에서 엎드려 걸레질을 할 때면 펑퍼짐한 엉덩이가 실룩이며 흔들리는데 그 가운데에 보지가 입을 벌리고 있으려니 생각하면 좆이 꼴려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어느 주말이었다고 생각된다. 형님이 오셔야 하는데 무슨 감사를 받는다고 못 오신다며 당신의 내복 등을 가져다 달랜 모양이다. 형수님이 가느냐 어머님이 가느냐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다가 큰 딸애와 함께 할머니가 떠났다.
그 날 저녁을 먹고 내방에서 벌렁누어 자지를 주무르고 있는데 막내가 와서 자기 엄마가 벽장정리를 하는데 나를 부른단다. 일식인 그집은 안방에 넓은 다락이 있었는데 벽문을 열고 서너 계단을 올라야 했다. 그런데 벽문을 열고 오르려 위를 보는데 아 글쎄 형수가 가랑이를 벌린 채 쪼그리고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빤스를 입지 않고 말이다. 넓고 두툼한 보지가 쫙 벌어진 채 내 얼굴을 내려다 보는 것이다. 자나깨나 보지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중학교 2학년 악동 앞에 탱탱히 영근 마흔살 보지가 아가리를 쫙 벌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보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시뻘건 살점과 검은 털 그리고 물기가 있는 보지구멍을 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집어 달라는 물건 몇 개를 집어주고 나는 내 방으로 뛰어들어와 바지를 훌러덩 벗고 자지를 흔들었다. 보통 때보다 크기가 두 배 이상 발기가 된 듯 싶었다. 너무 꼴려 눈을 감고 "아 형수 보지 먹고 싶다. 아 씨팔년의 보지에 박고 싶다. 아 아 씹 씹" 등을 마구 외치며 좆을 까며 흔들었다. 엉덩이를 위로 치켜올리며 흔드는데 누군가의 손이 내 손을 치우고 내 자지를 쥐는 것 같았다. 눈을 살며시 떠보니 형수가 내 자지를 쥐고 흔들고 있었다. 쪼그려 앉은 채 다리를 벌려 아까 그 자세 그대로였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보지에 손을 댔다. 뜨겁고 미끈하고 꺼칠하고 그랬다. 그녀는 자기 보지를 만지고 있는 내 손을 자기 손으로 눌러 비비며 내 좆을 마구 흔들었다. 너무 흥분했던 나는 채 1분도 되기 전에 좆물을 토해냈고 그녀도 내 손등을 자기 보지에 마구 눌러 비비며 몸을 부르르 떨며 자빠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 날 이후 그녀는 자주 내 자지를 만져주었고 나에게 자기 보지와 몸을 만지게 해주었다. 그러나 내 좆을 자기 보지에 박지는 못하게 했다. 콘돔이 없었던 그 시절 어린 중학생의 좆에 의해 애를 밸까봐 두려워했던 것이다. 내가 너무 박고 싶어하니까 주기법으로 완전히 안전한 날이 되면 박게 해 주겠다고 했고 얼마 후 나를 눕혀놓고 정말로 자기 보지에 내 좆을 박으며 깔고 앉아 주었다.
그 첫 씹의 감동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좆에 느껴지던 뜨겁고 미끄덩거리고 간지럽고 땡겨지던 그 기분. 내 좆을 박고 흔들 때 그 육중한 여인의 젖과 배가 출렁대던 영상 그리고 첫 번째 좆물을 구멍 깊숙이 쏟으며 몸서리를 치던 그 감동. 내가 싸고 난 후 내 몸을 부등켜 안고 자기의 보지를 내 둔덕에 비비며 땀을 뻘뻘 흘리면서 몸을 경직시키던 일. 등등
형수는 사실 요새 기준으로 볼 때 섹시함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작은 키에 시골티가 물씬 나는 인상에 아줌마 상표의 퉁퉁한 몸매. 그 어느 구석을 봐도 십대의 미성년자 시동생에게 자기 보지를 보여줄 여자처럼 보이질 않는다. 생각해 보면 당시 내가 나이에 비해 175센치나 되는 큰 키에 곱상하게 생긴 외모 때문에 나에게 영계로서의 구미를 느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가 내게 보지를 보여준 거나 내가 여자의 보지를 보기 위해 그 어린 시절에도 잠을 설치며 새벽에 누이가 오줌 누기를 기다린 게 다 원초적 본능(원초적 노출증과 원초적 관음증)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재미있는 기억 하나. 당시 여자들은 집에서 일할 때 치마 속에 고쟁이를 입었다. 팬티 위에 그냥 치마를 입는다는 건 대단히 불경한 일이었다. 그녀는 처음에 내게 보지를 보여주려고 고쟁이를 벗곤 하였으나 내가 그러지 말고 고쟁이의 가랑이 부분을 가위로 잘라내라고 했더니 팬티는 아예 안 입고 고쟁이를 잘라내어 다리만 벌리면 보지가 내게 보이도록 했고 단둘이 있을 때 몇 번인가는 나를 눕혀놓고 고쟁이를 입은 채 내 좆에 자기 보지를 끼워 박기도 했다. 그럴 땐 평소보다 훨씬 흥분으로 몸을 떨곤 하였다.
그녀는 내가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할 때까지 1 년여 동안 참으로 많이 나에게 자기 보지를 보여주고 내 좆을 박게 해 주었다. 정말로 행복한 사춘기였다.
훔쳐보기 애호가 즉 VOYEURER 로서의 나에게 사상최대의 대박을 건지는 행운이 십오륙년 전에 도래했었다.
강남에 있는 구청사거리 일각에 당시 이름께나 날리던 30대 여가수가 하는 술집이 있었다. 룸이 세 개에 홀이 꽤 넓은 편이었다. 토요일 밤이었나 싶다. 당시에는 음주운전 단속이 심하지 않은 터라 강북에서 1차 2차 끝나고 강남에 건너와 집에 들어가기 전에 3차를 하던 시기라 알딸딸한 취중에 들렀는데 홀에 손님이 없었다. 약간 안면이 있는 여종업원이 자꾸 방으로 들어가자 하여 둘이 앉아 있기는 택 없이 넓은 룸으로 들어가 입으로 구라를 풀고 손으론 빨래를 해가며 술을 마시다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엘 갔다. 취기가 느껴졌다. 그 탓인가 일을 보고 방으로 오다가 번지를 잘 못 찾아 옆방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백만불짜리 생쑈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남자가 바지를 발목까지 내리고 문 쪽을 향해 있고 여자가 아랫도리를 다 벗고 역시 문 쪽을 향한 채 놈의 좆을 보지에 박고 방아를 찧고 있었다. 놈은 년의 브라우스를 위로 올려 두 젖통을 주무르고 있었다. 여자에 가려 놈의 얼굴을 보이지 않았으나 좆방망이를 타고 앉은 년은 순간 나와 눈이 마주 쳤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좆과 씹의 도킹부분을 눈이 시뻘건 채 째려보았다. 좆이 보지에 박혀 있는 모습은 언제 봐도 죽이는 장면이 아닌가. 그것도 술집의자에 앉아 내가 보는 앞에서 좆방망이를 보지구멍에 한가득 박아넣고 방아를 찧고 있는 년의 모습은 가히 타이타닉을 능가하는 스펙타클이었다. 나는 순간 잽싸게 바지에서 내 좆을 꺼내 그녀를 향해 흔들다 문을 닫고 내 방으로 왔다.
그 에로틱하고 그로테스크한 씹의 장면은 나의 뇌리에서 근 6 개월 이상 떠나지를 않았다.
나는 지금도 그녀를 관음광(Voyereuer)인 나와 같은 과인 노출광(Exhibitionist)이라고 생각한다.
이쁜 년, 고마운 년. 그 보지에 행운 있으라.
오 양(吳孃)의 비디오 사건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미인탈렌트였던 미스코리아 출신의 오 모 양이 자신의 매니져였던 남자와 정사를 벌이는 장면의 비디오가 인터넷에 떴던 사건이다. 당시 전 국민을 이른바 관음증 환자로 만들었던 대사건이었다,
관음증이란 타인의 성애장면이나 성교장면을 몰래 훔쳐보며 흥분을 하는 이상증세라고 사전에 풀이되어 있다. 이상증세라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가장 원초적인 호기심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설이 길었다. 나는 스스로 관음주의자(Voyeurer)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씹을 무지 좋아하지만 솔직히 내가 씹을 하는 것보다 남이 씹하는 것을 몰래 훔쳐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씹이 아니더라도 키스를 하거나 애무 특히 서로의 자지와 보지를 애무하거나 빠는 장면을 볼 수 있으면 대박이라고 생각한다. 둘이 지랄하는 장면이 아니고 그냥 여자의 보지만 봐도 일당은 건진 것이 된다.
국민학교 4학년 무렵 나는 이미 여자의 보지에 대해 무한한 경이와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새벽 좆이 서면 엎드린 채 요에 자지를 비며 정액 없는 드라이 사정으로 오르가즘을 맛보던 깜찍한 아이였다.
당시 한 방에서 남녀 구별 없이 한 가족 4, 5명이 함께 자는 것은 통상의 풍경이었는데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지어야했던 큰누나는 일어나자마자 윗목에 있는 요강에 앉아 오줌을 누었다. 그 작은 공간에서 내가 살짝 눈을 뜨면 오줌을 토해내는 누나의 열린 보지가 코앞에 전개되어 있었다. 그 신비하고 징그럽고 귀엽고 깜찍한 내 사랑 보지를 보기 위해 나는 그 어린 시절 새벽잠을 설치고 자는 체 하며 보지가 열리기를 기다렸었다. 나이를 먹은 지금에도 오줌줄기를 쏟아내는 여자의 보지를 보고 그리도 흥분하는 연유가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남자가 여자의 보지를 보고 싶어하는 게 남자들의 일방적이고 변태적인 욕구만은 아닌 듯 싶다. 자기의 보지를 남자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여자도 있다는 걸 알게되었던 것이다.
남녀 형제가 한 방을 쓰는 게 불편한 건 누이들 쪽이었다. 그래서 내가 중학생이 되자 나는 같은 동네에 사는 이모 님 댁으로 쫓겨가게 되었다. 추방이지만 나에겐 천국으로 입성한 것이었다.
이모님 댁은 옛날 일본식 가옥으로 방이 여덟 개가 넘었고 정원도 꽤 넓어 내 눈에는 대궐이었다. 그 넓은 집에 홀로되신 이모와 마흔 전후의 이종형님 내외 그리고 두 조카딸 등 다섯이 살고 있었으나 형님이 지방에서 교편을 잡고 있어 한 달에 한 두 번만 오시는지라 남자라야 내가 유일했다.
겨울방학을 끝내고 2학년으로 올라간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나에게 섹스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었다. 당시 나에게는 실물로 보긴 보았지만 가랑이 저쪽의 그림자 속에 묻혀 보이던 누나 보지를 그리며 딸을 치는 게 전부였었다.
어느 날 저녁을 먹고 형수와 그녀 또래의 동네 아줌마들이 우리 집에 모여 라디오에서 나오는 연속극을 들으며 수다를 떠는 속에 내가 끼어 있었다. 그런데 내 맞은 편에 앉아 있던 형수님이 다리를 바꾸는 순간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고쟁이가 안 보이는 것은 물론 다리 사이의 사타구니 안쪽이 거무티티하게 보였던 것이다. 나는 눈을 비비면서 딴청을 부렸다. 그런데 또 잠시 후 입으로는 계속 수다를 떨면서 형수는 아까보다 더 느리게 다리를 바꾸며 가랑이를 내 쪽으로 벌려준 것이다. 시커먼 보지털이 보였고 계곡 끝에 찢어진 살점들이 분명하게 보였다. 나는 수다에 동참해 정신이 없는 다른 여편네들을 훔칫 보며 숨을 들이켰다. 숨이 탁 막혔기 때문이다. 맨 오른쪽 구석에 앉아있는 나만 볼 수 있도록 각도를 잡으면서 형수님이 자기 보지를 열어주는 것 같았다. 자지가 발작적으로 용트림을 하며 발기되었다. 형수가 힐끗 보았다는 느낌을 받으며 두 손으로 꺼떡대는 좆을 꽉 눌렀다.
그전까지는 단 한번도 형수님을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워낙 나이 차가 많기도 했으려니와 하는 행동도 꼭 큰 엄마가 하듯이 나를 어린애 취급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꼬맹이 도련님에게 자기 보지를 열어 보였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무튼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꿈에도 그리던 보지를 보았으니 그 날 밤 정말로 맛있게 플레이(당시엔 수음을 핸드플레이라고 했음)를 쳤다. 치고 치고 또 치고 자지가 아플 때까지 치다가 떨어졌다.
형수님의 노출쇼는 그 후에도 간간히 이어졌다. 희한한 것은 단둘이 있을 때는 그러지를 않다가 몇 명이 함께 있을 때에만 나의 맞은 편에 자릴 해 보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의 보지를 보며 흥분에 떨면서도 나는 그녀도 내게 자기 보지를 열어보이며 흥분해하고 있음을 감지하였다. 형님이 늘 집을 비우니 생과부로 지내며 그나마 그 집에 있는 유일한 남자인 나를 상대로 섹스플레이를 하는 모양이었다. 사유야 어떻든 나를 남자 대접해준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말이다.
그일 있은 후 내게 형수님이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큰 가슴도 그렇고 쫙 벌어진 엉덩이에도 눈이 갔으며 그것들이 보지만큼 내 좆을 세우는데 일조를 하였다. 내 앞에서 엎드려 걸레질을 할 때면 펑퍼짐한 엉덩이가 실룩이며 흔들리는데 그 가운데에 보지가 입을 벌리고 있으려니 생각하면 좆이 꼴려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어느 주말이었다고 생각된다. 형님이 오셔야 하는데 무슨 감사를 받는다고 못 오신다며 당신의 내복 등을 가져다 달랜 모양이다. 형수님이 가느냐 어머님이 가느냐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다가 큰 딸애와 함께 할머니가 떠났다.
그 날 저녁을 먹고 내방에서 벌렁누어 자지를 주무르고 있는데 막내가 와서 자기 엄마가 벽장정리를 하는데 나를 부른단다. 일식인 그집은 안방에 넓은 다락이 있었는데 벽문을 열고 서너 계단을 올라야 했다. 그런데 벽문을 열고 오르려 위를 보는데 아 글쎄 형수가 가랑이를 벌린 채 쪼그리고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빤스를 입지 않고 말이다. 넓고 두툼한 보지가 쫙 벌어진 채 내 얼굴을 내려다 보는 것이다. 자나깨나 보지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중학교 2학년 악동 앞에 탱탱히 영근 마흔살 보지가 아가리를 쫙 벌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보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시뻘건 살점과 검은 털 그리고 물기가 있는 보지구멍을 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집어 달라는 물건 몇 개를 집어주고 나는 내 방으로 뛰어들어와 바지를 훌러덩 벗고 자지를 흔들었다. 보통 때보다 크기가 두 배 이상 발기가 된 듯 싶었다. 너무 꼴려 눈을 감고 "아 형수 보지 먹고 싶다. 아 씨팔년의 보지에 박고 싶다. 아 아 씹 씹" 등을 마구 외치며 좆을 까며 흔들었다. 엉덩이를 위로 치켜올리며 흔드는데 누군가의 손이 내 손을 치우고 내 자지를 쥐는 것 같았다. 눈을 살며시 떠보니 형수가 내 자지를 쥐고 흔들고 있었다. 쪼그려 앉은 채 다리를 벌려 아까 그 자세 그대로였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보지에 손을 댔다. 뜨겁고 미끈하고 꺼칠하고 그랬다. 그녀는 자기 보지를 만지고 있는 내 손을 자기 손으로 눌러 비비며 내 좆을 마구 흔들었다. 너무 흥분했던 나는 채 1분도 되기 전에 좆물을 토해냈고 그녀도 내 손등을 자기 보지에 마구 눌러 비비며 몸을 부르르 떨며 자빠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 날 이후 그녀는 자주 내 자지를 만져주었고 나에게 자기 보지와 몸을 만지게 해주었다. 그러나 내 좆을 자기 보지에 박지는 못하게 했다. 콘돔이 없었던 그 시절 어린 중학생의 좆에 의해 애를 밸까봐 두려워했던 것이다. 내가 너무 박고 싶어하니까 주기법으로 완전히 안전한 날이 되면 박게 해 주겠다고 했고 얼마 후 나를 눕혀놓고 정말로 자기 보지에 내 좆을 박으며 깔고 앉아 주었다.
그 첫 씹의 감동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좆에 느껴지던 뜨겁고 미끄덩거리고 간지럽고 땡겨지던 그 기분. 내 좆을 박고 흔들 때 그 육중한 여인의 젖과 배가 출렁대던 영상 그리고 첫 번째 좆물을 구멍 깊숙이 쏟으며 몸서리를 치던 그 감동. 내가 싸고 난 후 내 몸을 부등켜 안고 자기의 보지를 내 둔덕에 비비며 땀을 뻘뻘 흘리면서 몸을 경직시키던 일. 등등
형수는 사실 요새 기준으로 볼 때 섹시함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작은 키에 시골티가 물씬 나는 인상에 아줌마 상표의 퉁퉁한 몸매. 그 어느 구석을 봐도 십대의 미성년자 시동생에게 자기 보지를 보여줄 여자처럼 보이질 않는다. 생각해 보면 당시 내가 나이에 비해 175센치나 되는 큰 키에 곱상하게 생긴 외모 때문에 나에게 영계로서의 구미를 느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가 내게 보지를 보여준 거나 내가 여자의 보지를 보기 위해 그 어린 시절에도 잠을 설치며 새벽에 누이가 오줌 누기를 기다린 게 다 원초적 본능(원초적 노출증과 원초적 관음증)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재미있는 기억 하나. 당시 여자들은 집에서 일할 때 치마 속에 고쟁이를 입었다. 팬티 위에 그냥 치마를 입는다는 건 대단히 불경한 일이었다. 그녀는 처음에 내게 보지를 보여주려고 고쟁이를 벗곤 하였으나 내가 그러지 말고 고쟁이의 가랑이 부분을 가위로 잘라내라고 했더니 팬티는 아예 안 입고 고쟁이를 잘라내어 다리만 벌리면 보지가 내게 보이도록 했고 단둘이 있을 때 몇 번인가는 나를 눕혀놓고 고쟁이를 입은 채 내 좆에 자기 보지를 끼워 박기도 했다. 그럴 땐 평소보다 훨씬 흥분으로 몸을 떨곤 하였다.
그녀는 내가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할 때까지 1 년여 동안 참으로 많이 나에게 자기 보지를 보여주고 내 좆을 박게 해 주었다. 정말로 행복한 사춘기였다.
훔쳐보기 애호가 즉 VOYEURER 로서의 나에게 사상최대의 대박을 건지는 행운이 십오륙년 전에 도래했었다.
강남에 있는 구청사거리 일각에 당시 이름께나 날리던 30대 여가수가 하는 술집이 있었다. 룸이 세 개에 홀이 꽤 넓은 편이었다. 토요일 밤이었나 싶다. 당시에는 음주운전 단속이 심하지 않은 터라 강북에서 1차 2차 끝나고 강남에 건너와 집에 들어가기 전에 3차를 하던 시기라 알딸딸한 취중에 들렀는데 홀에 손님이 없었다. 약간 안면이 있는 여종업원이 자꾸 방으로 들어가자 하여 둘이 앉아 있기는 택 없이 넓은 룸으로 들어가 입으로 구라를 풀고 손으론 빨래를 해가며 술을 마시다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엘 갔다. 취기가 느껴졌다. 그 탓인가 일을 보고 방으로 오다가 번지를 잘 못 찾아 옆방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백만불짜리 생쑈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남자가 바지를 발목까지 내리고 문 쪽을 향해 있고 여자가 아랫도리를 다 벗고 역시 문 쪽을 향한 채 놈의 좆을 보지에 박고 방아를 찧고 있었다. 놈은 년의 브라우스를 위로 올려 두 젖통을 주무르고 있었다. 여자에 가려 놈의 얼굴을 보이지 않았으나 좆방망이를 타고 앉은 년은 순간 나와 눈이 마주 쳤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좆과 씹의 도킹부분을 눈이 시뻘건 채 째려보았다. 좆이 보지에 박혀 있는 모습은 언제 봐도 죽이는 장면이 아닌가. 그것도 술집의자에 앉아 내가 보는 앞에서 좆방망이를 보지구멍에 한가득 박아넣고 방아를 찧고 있는 년의 모습은 가히 타이타닉을 능가하는 스펙타클이었다. 나는 순간 잽싸게 바지에서 내 좆을 꺼내 그녀를 향해 흔들다 문을 닫고 내 방으로 왔다.
그 에로틱하고 그로테스크한 씹의 장면은 나의 뇌리에서 근 6 개월 이상 떠나지를 않았다.
나는 지금도 그녀를 관음광(Voyereuer)인 나와 같은 과인 노출광(Exhibitionist)이라고 생각한다.
이쁜 년, 고마운 년. 그 보지에 행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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