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사랑 - 7부
2018.05.21 10:50
7. 각성
발개진 얼굴로 수퍼로 들어가는 정희의 모습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한 참을 김주호 선생은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그대로 있었다. 언제나 평온한 그의 모습이 정희가 보이지 않게 된 이후 생기 없는 얼굴로 굳어진 채 서 있는 모습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해?”
누군가 뒤에서부터 다가와 김선생의 옆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놀랍게도 그것은 신지아 선생이었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그것은 오직 그녀의 몫이지.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니까. 선택의 기회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겠지.”
“그런데 선생님은 왜 그렇게 학생들에게 차갑게 대하시는 거에요?”
“왜, 불만이야?”
“담배도 없어요.”
“죽을래?”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하죠. 그럴 수 있다면.”
“헐! 눼~~ 그러시군요. 그럼 죽여드릴까요?”
“홍! 그럴 수는 있으시구요?”
“아직 뭘 모르는군. 육체만 죽는다고 죽는 것이 아냐. 진짜 죽음은 말야 추억조차 할 수 없게 소멸되는 것이지.”
“그것도 나쁘진 않죠. 말 그대로 평온해질 테니.”
“그래? 원한다면!”
신선생이 손을 들었다. 순간 번쩍이는 빛과 함께 그녀의 손에 일렁이는 불꽃이 흐르는 하얗고 투명한 별자리가 떠올랐다. 은은하게 경계가 그어진 허공과의 사이에 보는 것 만으로도 베일 듯한 예기가 직선의 흐름을 따라 뿜어져 나왔다. 이어 그녀의 입에서 주문처럼 나지막이 읍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林有魈兮山有夔(림유소혜산유기) 숲에는 원숭이가 있고 산에는 귀신이 있고
陸有虎兮水有螭(륙유호혜수유리) 땅에는 호랑이가 있고 물에는 이무기가 있어
夜而行兮晝而伏(야이행혜주이복) 밤이면 돌아다니고 낮이면 숨어 있다가
攬余裾兮嚙余足(람여거혜교여족) 나의 옷깃을 끌어당기고 내 발을 깨무네.
橫中途兮不可制(횡중도혜불가제) 길에서 횡행하니 제어할 길이 없고
爲民害兮勢漸猘(위민해혜세점제) 백성에게 해가 되어 그 기세가 점점 더 거칠어지네.
我有刀兮名四寅(아유도혜명사인) 나에게 칼이 있어 그 이름을 사인(四寅)이라 하는데,
讋地祇兮通天神(섭지기혜통천신) 지신(地神)을 두렵게 하고 천신(天神)과 통한다네.
白銀粧兮沈香飾(백은장혜침향식) 백은(白銀)으로 단장하고 침향(沈香)으로 꾸몄으며
光潑潑兮霜花色(광발발혜상화색) 빛이 번쩍이며 뿜어지니 마치 서리꽃과 같다네.
防余身兮奚所懼(방여신혜해소구) 내 몸을 보호하니 어찌 두려워할 바가 있으리?
邪自辟兮罔余迕(사자벽혜망여오) 사악한 기운 저절로 물러가 나를 얽매지 못하리라.
精爲龍兮氣爲虹(정위룡혜기위홍) 정(精)은 용(龍)이 되고 기(氣)는 무지개가 되어
橫北斗兮亘紫宮(횡북두혜긍자궁) 북두성(北斗星)을 가로질러 자미원(紫微垣)까지 퍼지네.
行與藏兮惟余同(행여장혜유여동) 길을 다닐 때 몸에 감추어 함께하니 내 몸과 한 가지로 생각하네.
歲將暮兮倚空同(세장모혜의공동) 장차 늙어지면 함께 공동(空同)으로 돌아가리라.
그녀의 말이 끝나고 그녀의 손에서 유성처럼 빛이 떨어져 내렸다.
“잠깐!”
빛은 정확히 김선생의 목덜미 가까운 곳에서 멈추어 섰다.
“풉…… 살고 싶은 모양이지?”
“그게 아니고, 누군가 오고 있어요.”
그 말에 신선생의 손에 들려있던 칼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집중하는 듯 하더니
“그 자가 오고 있군. 어떻게 할까?”
“그 자라면… 최?”
신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부딪힐 필요는 없겠죠. 일단 숨어서 지켜볼까요?”
“숨을 필요가 있을까? 그 자도 이미 우리를 느꼈을 텐데.”
“하긴 그렇기도 하겠군요. 四寅劍(사인검)의 기운이 퍼져나갔을 테니.”
“결국 내 탓이란 말이지?”
“아니라고 할 수도 없겠죠.”
“크……”
“왔군요.”
잠시 후 낮은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 그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역시 당신들이었군요.”
“최선생님이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우연히 지나가다 놀라운 기가 느껴지기에 왔습니다만.”
“아, 그래요? 도대체 어떤 기운이길래 놀라기까지 하셨습니까?”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신선생의 말에 최선생은 얼굴에 잔잔한 웃음을 띄웠다.
“사인참사검의 기운을 어찌 놀랍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스치기만 해도 죽을지 모르는 기운인데.”
“죽을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은 아시는 모양이군요.”
“허허…… 그거야 위에 계신 분께서 허락하신 범위에서이니 죄는 죄이나 죄라 단죄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 묘한 논리로군요. 죄는 죄이나 죄라 단죄할 수 없다……”
“그나 저나 사인참사검은 어쩐 일로 나타난 것인가요?”
“글쎄요. 우리도 기가 느껴져 와봤습니다만 그새 사라지고 없더군요.”
“그래요? 이상하군요. 저는 두 분 중에 한 분이 그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그런 막중한 임무가 저희 같은 미천한 존재에게 주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된다고 해도 영광이긴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큰 부담이 되겠죠.”
“겸손하시군요. 하하하……”
“별말씀을.”
“그럼 징벌의 천사께서는 여기 일을 마치고 돌아가신 모양이군요.”
“그런 모양입니다.”
“아쉽군요. 이번엔 꼭 뵙고 싶었는데.”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 분이 갖고 계신 사인참사검이 무척 신묘하다 하여 구경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만.”
“혹, 어디 사용처가 있으신 건 아니구요?”
“그 검이야 주인의 명에 따르는 것 아니던가요? 징벌의 천사가 아니라면 그 검을 쥐어봐야 아무 소용없을 텐데요.”
“하긴 그렇기도 하겠지만……”
순간 최선생의 눈빛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신선생은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으니 김선생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최선생의 변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최선생이 그런 김선생의 눈초리를 의식했는지 헛기침을 했다.
“헛험…… 전 그럼 가봐야겠군요. 두 분 학교에서 뵙지요.”
“네. 그러지요.”
“안녕히 가십시오.”
그렇게 그날의 세 사람의 만남은 짧게 마무리 됐다. 멀어져 가는 최선생을 바라보며 신선생도 걸음을 옮겼다.
“조심해. 저 자는 가장 위험한 존재니까.”
“알고 있습니다. 쉬십시오. 저도 그만 들어가서 쉬어야겠습니다.”
“그러시지요, 김선상님! 젊은 애하고 노시느라 많이 힘드셨을 테니. 푸후후……”
놀리듯 웃으며 돌아서는 신선생을 잠시 쳐다보다 수퍼 2층, 불이 켜진 정희의 창문을 바라봤다. 무엇을 하는지 닫혀진 창문에 정희로 짐작되는 그림자가 몇 번 어른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김선생의 눈에 아쉬운 빛이 스쳐 지나갔고 얼마 후 그도 천천히 미끄러지듯 걸어서 자신의 집을 향했다.
정희는 한동안 자신의 방안을 서성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위험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은 느낄 수 있었지만 도대체 그 위험을 자신이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이 그 위험을 피할 수 있는 큰 무기일 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지금의 입장에서는 다가오는 위험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후우…… 도무지 그게 뭔질 모르겠어……’
서성이던 정희가 침대에 철썩 걸 터 앉았다. 그러다간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엎드렸다. 와인 때문이었는지 피곤 같은 나른함이 몰려왔다. 눈을 감고 어느 새 잠이 들려 했다. 그 때였다.
“정희야!”
희미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익숙한 음성이었다.
“정희야!”
다시 들린 소리에 정희가 눈을 떴다. 그리고 불현듯 몸을 일으켰다.
“시후야!”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시후야! 너지? 응? 시후야!”
그 순간 정희의 앞에 희미한 모습이 어른거렸다. 정신을 집중하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시간이 가며 그 모습이 점차 또렷해져 왔다.
“시후!”
그랬다. 그것은 시후였다. 그러나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딱히 무어라 할 수 없지만 예전 영으로서의 시후의 모습과는 무언가 달랐다.
“정희야!”
“너구나, 정말!”
정희의 눈에 눈물이 고여왔다.
“반가워, 다시 볼 수 있어서.”
“그럼 너… 아직 안 떠난 거니?”
“그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게. 조금 복잡해서…”
“그렇구나… 그런데 네 모습이 전하고 좀 틀린 것 같아.”
“그래 보이지? 네가 보는 것… 내 영의 실체가 아니거든.”
“실체가… 아니라고? 그럼 뭐야?”
“이건 念(염)이라고… 생각의 투영체지. 영이 아니고.”
“아… 그렇구나. 그럼 네 생각이 만들어낸 너의 그림자 같은 거구나?”
“맞아.”
그러고 보니 시후의 모습이 계속 선명하지 않고 때로 흐려졌다 다시 선명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건 시후가 얼마나 집중할 수 있는가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내 집중력이 오래 버틸 수 없어. 그래서 서둘러 말할게.”
“응, 말해봐.”
“내가 전에 보여준 것 있지? 내 등에 보였던 것.”
“그림 같은 거?”
“응. 지금 네가 고민하는 문제, 너의 능력. 그걸 각성하지 않으면 다가오는 위험을 피할 수 없어.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 등의 문양을 이해해야 해.”
“그걸 어떻게 이해를 하냐고!”
“바보! 말로는 이해지만 그것은 그냥 너의 마음과 영혼에 받아들이는 거야.”
“그러니까 말야. 그걸 어떻게 하냐고!”
시후의 모습이 전파방해라도 받은 TV처럼 순간 찌그러졌다.
“시후야!”
“눈을 감고 떠올려봐. 그러다 보면 무언가 깨닫게 될 거야. 시간 날 때마다 해야 해. 알았지?”
시후의 모습이 점차 흐려지며 사라지고 있었다.
“시후야!”
“이만… 야겠… 안녕…”
“또 올 거지?”
“네가…… 면……”
“시후야! 시후야?”
안개처럼 흩어지는 시후의 모습을 보며 손을 내밀어 봤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내 그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의 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남은 것은 짙은 침묵이었다.
“시후야……”
한동안 혹여 시후의 모습이 다시 나타날까 기다렸지만 시후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정희도 한참을 기다리다 결국 이 날은 시후가 더 이상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조금은 낙심한 듯 침대 모서리에 주저 앉아 있던 정희는 무언가 결심한 듯 욕실로 들어가 정성껏 몸을 씻고 나와서는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침대 옆 작은 스탠드 하나를 켜고는 침대 머리맡에 반가부좌를 틀고 앉아 편하게 두 손을 모아 잡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얼마나 정신을 집중했을까? 그 날 시후의 등에서 군무처럼 펼쳐지던 선의 움직임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노력하던 어느 순간, 점차 선명해지는 선들이 마치 살아있었다는 듯이 움직여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음악처럼 희미하게 다가왔다가 다시 반복되며 조금 더 그 선들을 강하게 만들더니 횟수를 거듭할수록 또렷함으로 펼쳐졌다.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되던 순간들이 지나갔지만, 점점 더 찡그려지는 정희는 얼굴에 땀방울이 맺혀졌지만 아직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머리는 또 가슴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턱 선을 타고 내려온 땀방울이 비처럼 툭! 하고 떨어져 모아진 손에 떨어졌다. 그리고
“시후……”
머리 속에서 가득했던 선들이 사라지고 시후와 보냈던 지난 시간들이 머리를 채우며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 시간들 속에서는 때로 그가 밉고 원망스러웠던 시간들이 지금은 오히려 그래서 더욱 그리운 시간이 되었음을 느꼈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아껴주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추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아름답게 채색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와의 지나간 시간은 적어도 지금 이 시간에는 채색하지 않아도 아쉬운 존재라는 것을 머리에서 가슴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영화처럼 흐르던 그와의 시간들이 마지막에 이르렀을 즈음에 그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너의 선택이 많은 것을 바꾸게 돼. 그리고 그건 무척이나 중요하고… 심각한 거야. 그러니 네가 중요한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때는……”
“그 때는?”
“날…… 기억해 줘!”
“뜬금 없이 그게 뭔 소리야?”
“그런 게 있어…… 아마도 때가 되면 하나씩 기억이 날 거야. 그러니까 만약 너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나를 기억해 줘. 알았지?”
무엇이 중요한 걸까? 무엇을 결정할 때라는 걸까? 때가 되면 기억이 난다니… 도대체 그는 무엇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신을 기억해 달라니! 도대체 무엇을 기억하라는 말일까? 정희의 머리는 실타래처럼 이리 저리 엉켜 아무 것도 정리되지 않는 것 같았다.
‘시후야! 난 도무지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겠어. 네가 한 말도, 지금 내가 무엇을 각성해야 하는지도. 도대체 내가 무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니? 왜 내 결정이 중요하다는 거니? 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데……’
가슴이 조금씩 답답함을 안고 뛰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들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정희는 그러한 자신의 머리와 가슴의 움직임을 제어할 힘이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지쳐있었다. 그리고 마음의 피곤함으로 그 모든 것을 그냥 있는 그대로 두고 싶었다. 그렇게 자신을 내려 놓고 있을 때
‘응? 이, 이건……!’
생각하지도 않았던 선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선들은 아까처럼 정형화된 선들이 아닌 제멋대로의 움직임이었고 그러다 한 순간 그 움직임이 충돌하듯 격렬한 움직임을 보이며 어지럽게 그려지더니 갑자기 불에 타는 듯 움직임의 공간을 태워나갔다. 공간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무엇인가가 새롭게 나타났다. 그것은 익숙한 거리였다. 바로 대로에 있는 횡단보도. 늘 보아오던 차들의 움직임. 횡단보도 저 편에 있는 익숙한 얼굴. 아빠.
‘아빠?’
그녀의 소리를 듣지 못한 듯 정희의 아빠는 횡단보도에서 핸드폰을 들고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행자 신호가 파랗게 변한 모습을 보고는 길을 건너오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어디선가 환한 빛이 아빠의 모습을 비췄고 아빠가 고개를 들어 왼편을 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무엇인가가 맹수처럼 다가와 아빠의 몸을 허공에 날렸다.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천천히 땅에 떨어지더니 배터리 뚜껑이 날아가고 이어 배터리가 튀어 나갔다.
“아, 아빠!”
정희가 소리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습은 사라지고 부릅뜬 눈에는 그저 변함없는 자신의 방안이 비쳐졌다. 멍했다. 그리고 그렇게 있던 정희가 급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위에서 카운터에 앉아 벽에 걸린 TV 속 드라마를 보고 있던 엄마를 향해 소리쳤다.
“엄마!”
“왜 정희야? 출출해서 그래?”
“아빠 오셨어요?”
“아니. 지난 번 상 당하신 분하고 오늘 한잔 하기로 하신 모양이던데?”
“그래요?”
그 때 엄마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
“이제 오세요?”
“……”
“사올 거 없어요. 아, 잠깐만요. 정희야! 아빤데 버스에서 지금 내리셨대. 뭐 먹고 싶은 거 있냐고 물어보시는데 너 먹고 싶은 거 있니?”
“지금 오셨대요?”
“그래. 버스 정류장에 지금 내리셨단다.”
순간 정희의 머리에 조금 전의 영상이 스쳤다.
“아빠……”
정희가 서둘러 계단을 뛰듯이 내려왔다. 실내에서 신는 슬리퍼를 신은 채 내려온 그녀를 엄마가 인상을 쓰며 뭐라고 할 때였다.
“엄마. 아빠보고 내가 간다고 횡단보도 건너편에 그냥 계시라고 해주세요. 어서요!”
“어? 왜?”
“어서요! 그런 게 있어요. 절대로 건너오지 마시라구요. 건너편에 계시면 제가 간다고 해주세요. 저 지금 가요!”
“정희야! 너 잠옷차림으로 어딜 가!”
엄마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아빠가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하게 하는 거였다. 슬리퍼가 빨리 걷게 해주지 않았다. 정희는 슬리퍼를 벗어 던지고 맨발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리 멀지 않은 대로까지의 거리가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숨을 헐떡이며 횡단보도 앞에 이르렀을 때 전화기를 들고 통화를 하며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아빠를 볼 수 있었다. 정희가 입에 두 손을 모으고 소리쳤다.
“아빠! 아빠!!”
아빠가 자신을 알아보고 한 손을 흔들었다.
“아빠! 오지 마세요!”
통화를 하고 있던 아빠는 잘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보행자 신호에 파란 불이 들어왔다.
발개진 얼굴로 수퍼로 들어가는 정희의 모습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한 참을 김주호 선생은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그대로 있었다. 언제나 평온한 그의 모습이 정희가 보이지 않게 된 이후 생기 없는 얼굴로 굳어진 채 서 있는 모습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해?”
누군가 뒤에서부터 다가와 김선생의 옆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놀랍게도 그것은 신지아 선생이었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그것은 오직 그녀의 몫이지.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니까. 선택의 기회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겠지.”
“그런데 선생님은 왜 그렇게 학생들에게 차갑게 대하시는 거에요?”
“왜, 불만이야?”
“담배도 없어요.”
“죽을래?”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하죠. 그럴 수 있다면.”
“헐! 눼~~ 그러시군요. 그럼 죽여드릴까요?”
“홍! 그럴 수는 있으시구요?”
“아직 뭘 모르는군. 육체만 죽는다고 죽는 것이 아냐. 진짜 죽음은 말야 추억조차 할 수 없게 소멸되는 것이지.”
“그것도 나쁘진 않죠. 말 그대로 평온해질 테니.”
“그래? 원한다면!”
신선생이 손을 들었다. 순간 번쩍이는 빛과 함께 그녀의 손에 일렁이는 불꽃이 흐르는 하얗고 투명한 별자리가 떠올랐다. 은은하게 경계가 그어진 허공과의 사이에 보는 것 만으로도 베일 듯한 예기가 직선의 흐름을 따라 뿜어져 나왔다. 이어 그녀의 입에서 주문처럼 나지막이 읍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林有魈兮山有夔(림유소혜산유기) 숲에는 원숭이가 있고 산에는 귀신이 있고
陸有虎兮水有螭(륙유호혜수유리) 땅에는 호랑이가 있고 물에는 이무기가 있어
夜而行兮晝而伏(야이행혜주이복) 밤이면 돌아다니고 낮이면 숨어 있다가
攬余裾兮嚙余足(람여거혜교여족) 나의 옷깃을 끌어당기고 내 발을 깨무네.
橫中途兮不可制(횡중도혜불가제) 길에서 횡행하니 제어할 길이 없고
爲民害兮勢漸猘(위민해혜세점제) 백성에게 해가 되어 그 기세가 점점 더 거칠어지네.
我有刀兮名四寅(아유도혜명사인) 나에게 칼이 있어 그 이름을 사인(四寅)이라 하는데,
讋地祇兮通天神(섭지기혜통천신) 지신(地神)을 두렵게 하고 천신(天神)과 통한다네.
白銀粧兮沈香飾(백은장혜침향식) 백은(白銀)으로 단장하고 침향(沈香)으로 꾸몄으며
光潑潑兮霜花色(광발발혜상화색) 빛이 번쩍이며 뿜어지니 마치 서리꽃과 같다네.
防余身兮奚所懼(방여신혜해소구) 내 몸을 보호하니 어찌 두려워할 바가 있으리?
邪自辟兮罔余迕(사자벽혜망여오) 사악한 기운 저절로 물러가 나를 얽매지 못하리라.
精爲龍兮氣爲虹(정위룡혜기위홍) 정(精)은 용(龍)이 되고 기(氣)는 무지개가 되어
橫北斗兮亘紫宮(횡북두혜긍자궁) 북두성(北斗星)을 가로질러 자미원(紫微垣)까지 퍼지네.
行與藏兮惟余同(행여장혜유여동) 길을 다닐 때 몸에 감추어 함께하니 내 몸과 한 가지로 생각하네.
歲將暮兮倚空同(세장모혜의공동) 장차 늙어지면 함께 공동(空同)으로 돌아가리라.
그녀의 말이 끝나고 그녀의 손에서 유성처럼 빛이 떨어져 내렸다.
“잠깐!”
빛은 정확히 김선생의 목덜미 가까운 곳에서 멈추어 섰다.
“풉…… 살고 싶은 모양이지?”
“그게 아니고, 누군가 오고 있어요.”
그 말에 신선생의 손에 들려있던 칼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집중하는 듯 하더니
“그 자가 오고 있군. 어떻게 할까?”
“그 자라면… 최?”
신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부딪힐 필요는 없겠죠. 일단 숨어서 지켜볼까요?”
“숨을 필요가 있을까? 그 자도 이미 우리를 느꼈을 텐데.”
“하긴 그렇기도 하겠군요. 四寅劍(사인검)의 기운이 퍼져나갔을 테니.”
“결국 내 탓이란 말이지?”
“아니라고 할 수도 없겠죠.”
“크……”
“왔군요.”
잠시 후 낮은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 그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역시 당신들이었군요.”
“최선생님이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우연히 지나가다 놀라운 기가 느껴지기에 왔습니다만.”
“아, 그래요? 도대체 어떤 기운이길래 놀라기까지 하셨습니까?”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신선생의 말에 최선생은 얼굴에 잔잔한 웃음을 띄웠다.
“사인참사검의 기운을 어찌 놀랍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스치기만 해도 죽을지 모르는 기운인데.”
“죽을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은 아시는 모양이군요.”
“허허…… 그거야 위에 계신 분께서 허락하신 범위에서이니 죄는 죄이나 죄라 단죄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 묘한 논리로군요. 죄는 죄이나 죄라 단죄할 수 없다……”
“그나 저나 사인참사검은 어쩐 일로 나타난 것인가요?”
“글쎄요. 우리도 기가 느껴져 와봤습니다만 그새 사라지고 없더군요.”
“그래요? 이상하군요. 저는 두 분 중에 한 분이 그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그런 막중한 임무가 저희 같은 미천한 존재에게 주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된다고 해도 영광이긴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큰 부담이 되겠죠.”
“겸손하시군요. 하하하……”
“별말씀을.”
“그럼 징벌의 천사께서는 여기 일을 마치고 돌아가신 모양이군요.”
“그런 모양입니다.”
“아쉽군요. 이번엔 꼭 뵙고 싶었는데.”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 분이 갖고 계신 사인참사검이 무척 신묘하다 하여 구경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만.”
“혹, 어디 사용처가 있으신 건 아니구요?”
“그 검이야 주인의 명에 따르는 것 아니던가요? 징벌의 천사가 아니라면 그 검을 쥐어봐야 아무 소용없을 텐데요.”
“하긴 그렇기도 하겠지만……”
순간 최선생의 눈빛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신선생은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으니 김선생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최선생의 변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최선생이 그런 김선생의 눈초리를 의식했는지 헛기침을 했다.
“헛험…… 전 그럼 가봐야겠군요. 두 분 학교에서 뵙지요.”
“네. 그러지요.”
“안녕히 가십시오.”
그렇게 그날의 세 사람의 만남은 짧게 마무리 됐다. 멀어져 가는 최선생을 바라보며 신선생도 걸음을 옮겼다.
“조심해. 저 자는 가장 위험한 존재니까.”
“알고 있습니다. 쉬십시오. 저도 그만 들어가서 쉬어야겠습니다.”
“그러시지요, 김선상님! 젊은 애하고 노시느라 많이 힘드셨을 테니. 푸후후……”
놀리듯 웃으며 돌아서는 신선생을 잠시 쳐다보다 수퍼 2층, 불이 켜진 정희의 창문을 바라봤다. 무엇을 하는지 닫혀진 창문에 정희로 짐작되는 그림자가 몇 번 어른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김선생의 눈에 아쉬운 빛이 스쳐 지나갔고 얼마 후 그도 천천히 미끄러지듯 걸어서 자신의 집을 향했다.
정희는 한동안 자신의 방안을 서성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위험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은 느낄 수 있었지만 도대체 그 위험을 자신이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이 그 위험을 피할 수 있는 큰 무기일 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지금의 입장에서는 다가오는 위험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후우…… 도무지 그게 뭔질 모르겠어……’
서성이던 정희가 침대에 철썩 걸 터 앉았다. 그러다간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엎드렸다. 와인 때문이었는지 피곤 같은 나른함이 몰려왔다. 눈을 감고 어느 새 잠이 들려 했다. 그 때였다.
“정희야!”
희미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익숙한 음성이었다.
“정희야!”
다시 들린 소리에 정희가 눈을 떴다. 그리고 불현듯 몸을 일으켰다.
“시후야!”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시후야! 너지? 응? 시후야!”
그 순간 정희의 앞에 희미한 모습이 어른거렸다. 정신을 집중하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시간이 가며 그 모습이 점차 또렷해져 왔다.
“시후!”
그랬다. 그것은 시후였다. 그러나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딱히 무어라 할 수 없지만 예전 영으로서의 시후의 모습과는 무언가 달랐다.
“정희야!”
“너구나, 정말!”
정희의 눈에 눈물이 고여왔다.
“반가워, 다시 볼 수 있어서.”
“그럼 너… 아직 안 떠난 거니?”
“그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게. 조금 복잡해서…”
“그렇구나… 그런데 네 모습이 전하고 좀 틀린 것 같아.”
“그래 보이지? 네가 보는 것… 내 영의 실체가 아니거든.”
“실체가… 아니라고? 그럼 뭐야?”
“이건 念(염)이라고… 생각의 투영체지. 영이 아니고.”
“아… 그렇구나. 그럼 네 생각이 만들어낸 너의 그림자 같은 거구나?”
“맞아.”
그러고 보니 시후의 모습이 계속 선명하지 않고 때로 흐려졌다 다시 선명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건 시후가 얼마나 집중할 수 있는가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내 집중력이 오래 버틸 수 없어. 그래서 서둘러 말할게.”
“응, 말해봐.”
“내가 전에 보여준 것 있지? 내 등에 보였던 것.”
“그림 같은 거?”
“응. 지금 네가 고민하는 문제, 너의 능력. 그걸 각성하지 않으면 다가오는 위험을 피할 수 없어.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 등의 문양을 이해해야 해.”
“그걸 어떻게 이해를 하냐고!”
“바보! 말로는 이해지만 그것은 그냥 너의 마음과 영혼에 받아들이는 거야.”
“그러니까 말야. 그걸 어떻게 하냐고!”
시후의 모습이 전파방해라도 받은 TV처럼 순간 찌그러졌다.
“시후야!”
“눈을 감고 떠올려봐. 그러다 보면 무언가 깨닫게 될 거야. 시간 날 때마다 해야 해. 알았지?”
시후의 모습이 점차 흐려지며 사라지고 있었다.
“시후야!”
“이만… 야겠… 안녕…”
“또 올 거지?”
“네가…… 면……”
“시후야! 시후야?”
안개처럼 흩어지는 시후의 모습을 보며 손을 내밀어 봤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내 그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의 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남은 것은 짙은 침묵이었다.
“시후야……”
한동안 혹여 시후의 모습이 다시 나타날까 기다렸지만 시후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정희도 한참을 기다리다 결국 이 날은 시후가 더 이상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조금은 낙심한 듯 침대 모서리에 주저 앉아 있던 정희는 무언가 결심한 듯 욕실로 들어가 정성껏 몸을 씻고 나와서는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침대 옆 작은 스탠드 하나를 켜고는 침대 머리맡에 반가부좌를 틀고 앉아 편하게 두 손을 모아 잡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얼마나 정신을 집중했을까? 그 날 시후의 등에서 군무처럼 펼쳐지던 선의 움직임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노력하던 어느 순간, 점차 선명해지는 선들이 마치 살아있었다는 듯이 움직여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음악처럼 희미하게 다가왔다가 다시 반복되며 조금 더 그 선들을 강하게 만들더니 횟수를 거듭할수록 또렷함으로 펼쳐졌다.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되던 순간들이 지나갔지만, 점점 더 찡그려지는 정희는 얼굴에 땀방울이 맺혀졌지만 아직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머리는 또 가슴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턱 선을 타고 내려온 땀방울이 비처럼 툭! 하고 떨어져 모아진 손에 떨어졌다. 그리고
“시후……”
머리 속에서 가득했던 선들이 사라지고 시후와 보냈던 지난 시간들이 머리를 채우며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 시간들 속에서는 때로 그가 밉고 원망스러웠던 시간들이 지금은 오히려 그래서 더욱 그리운 시간이 되었음을 느꼈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아껴주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추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아름답게 채색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와의 지나간 시간은 적어도 지금 이 시간에는 채색하지 않아도 아쉬운 존재라는 것을 머리에서 가슴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영화처럼 흐르던 그와의 시간들이 마지막에 이르렀을 즈음에 그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너의 선택이 많은 것을 바꾸게 돼. 그리고 그건 무척이나 중요하고… 심각한 거야. 그러니 네가 중요한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때는……”
“그 때는?”
“날…… 기억해 줘!”
“뜬금 없이 그게 뭔 소리야?”
“그런 게 있어…… 아마도 때가 되면 하나씩 기억이 날 거야. 그러니까 만약 너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나를 기억해 줘. 알았지?”
무엇이 중요한 걸까? 무엇을 결정할 때라는 걸까? 때가 되면 기억이 난다니… 도대체 그는 무엇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신을 기억해 달라니! 도대체 무엇을 기억하라는 말일까? 정희의 머리는 실타래처럼 이리 저리 엉켜 아무 것도 정리되지 않는 것 같았다.
‘시후야! 난 도무지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겠어. 네가 한 말도, 지금 내가 무엇을 각성해야 하는지도. 도대체 내가 무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니? 왜 내 결정이 중요하다는 거니? 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데……’
가슴이 조금씩 답답함을 안고 뛰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들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정희는 그러한 자신의 머리와 가슴의 움직임을 제어할 힘이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지쳐있었다. 그리고 마음의 피곤함으로 그 모든 것을 그냥 있는 그대로 두고 싶었다. 그렇게 자신을 내려 놓고 있을 때
‘응? 이, 이건……!’
생각하지도 않았던 선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선들은 아까처럼 정형화된 선들이 아닌 제멋대로의 움직임이었고 그러다 한 순간 그 움직임이 충돌하듯 격렬한 움직임을 보이며 어지럽게 그려지더니 갑자기 불에 타는 듯 움직임의 공간을 태워나갔다. 공간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무엇인가가 새롭게 나타났다. 그것은 익숙한 거리였다. 바로 대로에 있는 횡단보도. 늘 보아오던 차들의 움직임. 횡단보도 저 편에 있는 익숙한 얼굴. 아빠.
‘아빠?’
그녀의 소리를 듣지 못한 듯 정희의 아빠는 횡단보도에서 핸드폰을 들고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행자 신호가 파랗게 변한 모습을 보고는 길을 건너오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어디선가 환한 빛이 아빠의 모습을 비췄고 아빠가 고개를 들어 왼편을 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무엇인가가 맹수처럼 다가와 아빠의 몸을 허공에 날렸다.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천천히 땅에 떨어지더니 배터리 뚜껑이 날아가고 이어 배터리가 튀어 나갔다.
“아, 아빠!”
정희가 소리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습은 사라지고 부릅뜬 눈에는 그저 변함없는 자신의 방안이 비쳐졌다. 멍했다. 그리고 그렇게 있던 정희가 급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위에서 카운터에 앉아 벽에 걸린 TV 속 드라마를 보고 있던 엄마를 향해 소리쳤다.
“엄마!”
“왜 정희야? 출출해서 그래?”
“아빠 오셨어요?”
“아니. 지난 번 상 당하신 분하고 오늘 한잔 하기로 하신 모양이던데?”
“그래요?”
그 때 엄마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
“이제 오세요?”
“……”
“사올 거 없어요. 아, 잠깐만요. 정희야! 아빤데 버스에서 지금 내리셨대. 뭐 먹고 싶은 거 있냐고 물어보시는데 너 먹고 싶은 거 있니?”
“지금 오셨대요?”
“그래. 버스 정류장에 지금 내리셨단다.”
순간 정희의 머리에 조금 전의 영상이 스쳤다.
“아빠……”
정희가 서둘러 계단을 뛰듯이 내려왔다. 실내에서 신는 슬리퍼를 신은 채 내려온 그녀를 엄마가 인상을 쓰며 뭐라고 할 때였다.
“엄마. 아빠보고 내가 간다고 횡단보도 건너편에 그냥 계시라고 해주세요. 어서요!”
“어? 왜?”
“어서요! 그런 게 있어요. 절대로 건너오지 마시라구요. 건너편에 계시면 제가 간다고 해주세요. 저 지금 가요!”
“정희야! 너 잠옷차림으로 어딜 가!”
엄마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아빠가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하게 하는 거였다. 슬리퍼가 빨리 걷게 해주지 않았다. 정희는 슬리퍼를 벗어 던지고 맨발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리 멀지 않은 대로까지의 거리가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숨을 헐떡이며 횡단보도 앞에 이르렀을 때 전화기를 들고 통화를 하며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아빠를 볼 수 있었다. 정희가 입에 두 손을 모으고 소리쳤다.
“아빠! 아빠!!”
아빠가 자신을 알아보고 한 손을 흔들었다.
“아빠! 오지 마세요!”
통화를 하고 있던 아빠는 잘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보행자 신호에 파란 불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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