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사랑 - 2부
2018.05.21 15:50
2. 만남
4월의 바람은 날카로웠다. 살을 파고드는 그 날카로움에 소름이 돋았다. 누군가는 곧 봄이라고도 했지만 그것은 실제가 아닌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특히나 매일 정희를 분주하게 했던 시후의 존재가 사라진 이 날의 아침은 어색하기까지 했다. 문득 문득 어디선가 시후가 불쑥 얼굴을 디밀고 장난끼 어린 말을 던지지 않을까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시후의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공부 잘하고 오렴.”
“아빠는요?”
“새벽에 들어오셔서 주무시고 계셔.”
“많이 따셨대요?”
“아이고, 너네 아빠가 언제 화투 쳐서 돈 따는 것 봤니? 어제도 몽땅 털려서 차비 얻어 오셨다더라.”
“내가 옆에 있었으면 다 긁어오는 건데. 아쉽네!”
“됐어, 이것아! 넌 가서 공부나 열심히 해!”
“공부보다 돈 버는 게 더 재밌는데…”
“아침부터 맞고 갈래?”
“다녀오겠습니다! 쓩~”
집을 나서 길을 걸으면서도 정희는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미 마음으로 시후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습관화된 행동만큼은 멈출 수 없었다. 그러다 횡단보도신호를 기다리며 서있던 정희는 신호가 바뀌었음도 알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시후와의 인연은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고등학교 올라와 첫 등교하던 날, 바로 이 자리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건너편 신호등 아래에서 빤히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애. 자신과 같은 교복을 단정히 입은 아이. 신호가 바뀌고 그 아이 앞을 지나칠 때까지도 그 아이의 눈길은 정희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정희야!”
건너편에서 혜정이 정희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보행자 신호가 금방이라도 꺼질 듯 깜빡이고 있었다. 서둘러 발을 내딛는 순간, 누군가 정희를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날카로운 뱀의 혀처럼 멈춰선 차들 사이를 비집고 나온 오토바이 한대가 스치듯 그녀가 내딛고자 한 자리를 빠르게 지나쳐갔다.
“엄마야!”
정희의 날카로운 비명은 당겨진 몸이 돌아서며 누군가의 가슴에 부딪혀 멈춰섰다. 뜻하지 않은 어설픈 포옹. 서둘러 떨어진 정희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감사합니다.”
상대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여 인사부터 했다. 그리고 무심결에 바라본 상대의 눈과 마주쳤을 때, 정희는 세상 처음으로 온 몸에 오는 이상한 전율에 휩싸였다. 송곳처럼 가슴을 찔러오는 어떤 것. 약간의 현기증이 정희의 몸을 흔들었다.
“조심해요. 서둘지 말고.”
그의 말이 조금은 이상한 듯 들렸다. 보통은 이럴 때 ‘괜찮아요?’라고 묻지 않던가? 그런데 이 남자는 조심하란다. 서둘지 말고. 마치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투로.
“네.”
보행신호가 빨간색으로 바뀌고 차들이 흰색선을 밟으며 지나쳐 가고 있었다. 자꾸만 뒤에 서있는 그 남자의 시선이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얼음처럼 굳어진 자세로 가만히 서 있다가 건너편에서 여전히 자신을 기다리는 혜정의 눈길과 마주쳤다. 혜정의 얼굴이 잠시 정희를 향하는 듯싶더니 이내 얼굴에 묘한 놀람이 서리고 있었다. 조금은 멍한 듯한. 정희는 그런 혜정의 얼굴을 보며 그녀도 자신과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무언가 귓가에 들려오는 이 것. 작게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저절로 귀를 열게 하는 음악. 자신도 모르게 귀가 움직이듯 소리를 향해 머리를 기울일 때 무언가가 정희의 왼쪽 귀를 파고들었다.
“어멋!”
“같이 듣자.”
“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야. 폭풍이라고도 하지.”
선명해진 소리가 마음을 끌고 있었다. 무어라 거절하기 전에 마음을 끄는 소리에 할 말을 잠시 잊은 채 정희는 가만히 음악에 빠지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자 그가 정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걸으면서 들을까?”
그를 돌아봤다. 빙그레 웃는 그의 얼굴에서 따뜻한 빛이 아침 햇살처럼 뿌려지는 것 같았다. 그가걸음을 옮기며 정희의 어깨에 올린 손에 힘을 줬다. 그 가벼운 힘의 방향으로 정희의 걸음이 저절로 옮겨졌다. 그 이후 정희가 걸음을 옮겨 한걸음 디딜 때마다 그도 옆에서 보조를 맞추며 나란히 따라왔다. 마치 그림자처럼 정희가 어떻게 걸어갈 것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일정한 간격과 속도를 유지하며 전혀 부담스럽지 않게 함께 걸어주는 그의 움직임은 바람같이 여유로웠다. 두 사람이 혜정의 앞을 지나쳐 갈 때 혜정은 놀람과 경이로움이 섞인 얼굴로 석상처럼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모습이 제법 멀어진 다음에야 정신을 차린 듯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학교가 참 멋있구나.”
교문을 따라 들어서며 그가 말했다. 그 때서야 정희는 정신이 들었다. 긴 거리는 아니지만 학교에까지 그와 함께 이어폰을 나눠 들으며 등교를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의식 없이 무작정 걸었던 느낌이었다. 서둘러 이어폰을 귀에서 떼어내 그에게 건넸다.
“잘 들었습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함께 들으니 참 좋구나. 다음에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어떠니?”
“네?”
고개를 들어 그를 보니 그가 잔잔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정희, 너 거기서 뭐하니?”
교문 앞에서 아이들을 맞이하던 영어담당 전수지선생이 무언가를 살피듯 정희와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네.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를 잠시 쳐다보곤 이내 잰걸음으로 교문을 지나쳐 갔다. 그런 정희를 시선으로 따라오던 전선생이 다가오는 남자를 조금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정희야!”
뒤를 돌아보니 혜정이 숨을 헐떡이며 쫓아오고 있었다.
“혜정아…”
“그 남자… 헉헉… 누구니?”
“응?”
“아까… 후우… 너랑 같이 온 남자 말야.”
“아… 그 사람… 몰라. 모르는 사람이야.”
“뭐어? 그런데 이어폰까지 나눠 끼고 교문까지 왔단 말야?”
“응. 어쩌다 보니……”
“헐, 대박!”
혜정의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뒤로 하고 정희는 다시 교실을 향했다. 자신도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는 일들. 처음 보는 사람과 함께한 시간. 마치 마법에 홀린 듯, 그에게 끌려간 자신이 스스로도 황당하기만 했다.
정희가 막 교실문을 들어서려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 챘다. 놀라 고개를 돌아봤다. 바로 옆 반의 박기태였다.
“잠깐 얘기 좀 해.”
“왜 이래?”
“그 남자 누구야?”
“그 남자…?”
“몰라서 물어? 너랑 교문까지 같이 온 남자 말야. 아주 다정하게.”
그렇게 말하는 기태의 눈에 불꽃이 일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야.”
“뭐? 모르는 사람인데 그렇게 이어폰까지 나눠 끼고 왔단 말야? 그게 지금 말이라고 해?”
“어떻게… 알았어?”
“내가 뒤에서 따라왔는데도 모르더군. 얼마나 좋으셨길래……”
그랬던가? 그렇게도 주위를 의식하지 못할 만큼 노래에, 아니 그에게 빠져있었던가……
“어찌 됐건 누군지 모르는 건 사실이야. 그리고 내가 누구랑 뭘 하든 니가 무슨 상관인데?”
“뭐가 어째? 내가 전에도 말했지. 넌 내 여자라고 말야.”
“내가 물건이야? 응? 니가 뭔데 그런 소리를 하는 건데? 어이가 없어서…… 난 너랑 추호도 얽히고 싶지 않거든! 난 너한테 아무 관심 없으니 이제 그만 관심 끊어줬으면 좋겠어.”
“미안하지만 난 그렇게 못하겠어. 기필코 널 내 거로 만들 거니까.”
“허……”
정희는 기가 차다는 듯이 기태를 쳐다봤다. 그리고 손을 뿌리치며 교실을 들어섰다.
“이런, 제길……”
정희의 뒤를 쫓아오던 혜정은 두 사람의 실강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에 밀려드는 슬픔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내심으로 좋아하던 기태가 자신이 아닌 정희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다는 것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혜정의 마음은 짐작도 못한 채 상기된 표정의 기태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혜정이 너, 정희랑 같이 온 그 남자 누군지 아니?”
“아니… 그런데 그 남자 우리 학교로 들어오던데……”
“학교에?”
기태가 고개를 갸웃할 때쯤 정희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자신의 자리에 안고 있었다. 정희가 자리에 앉자 마자 옆자리의 효진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얌전한 고양이가 뭘 어쩐다더니… 참……”
정희가 수업준비를 하며 말했다.
“알려면 제대로 알고나 말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야.”
“뭐? 니가 지금 날 가르치냐?”
“모르는 건 배워야 하지 않겠어?”
“이게 어디서 아니꼬운 짓이야!”
효진이 벌떡 일어나며 정희를 향해 손바닥을 치켜들었다. 그 때 누군가 효진의 손을 붙들었다.
“뭐야, 넌?”
“그만 하지?”
“뭐? 니가 뭔데 나서서……”
앙칼진 효진의 목소리는 그러나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세돌이의 눈빛을 대하는 순간 어느새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아, 아파…”
“조례시간 됐으니 그만 자리에 앉지?”
세돌이 손을 놓자 효진은 정말 착한 학생처럼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앉아 첫 수업인 국어책을 꺼내어 눈길을 책에 주고 있었다. 학교에서 알아주는 노는 아이 효진이 왜 그토록 세돌이에게만은 꼼짝하지 못하는지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흥미롭게 그들을 바라보던 주변의 아이들도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신의 자리에서 수업준비를 했다.
다시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온 교실은 몇몇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더불어 평온이 찾아왔다. 그 평온 속에서 정희는 자신도 모르게 턱을 고이고 눈을 감으며 생각 속에 빠져들었다.
지난 밤부터 오늘 아침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이 너무나 믿기지 않았다. 이제는 일상처럼 익숙해진 시후의 불쑥 나타남과 귓가를 스치는 바람처럼 들려오던 그의 목소리. 혼자의 시간도 혼자일 수없었던 불편함과 혼자이고 싶지 않을 때 늘 곁에 있어주던 그의 존재. 이제 그 모든 존재가 부존재가 되어 사라졌다는 현실이 옷을 벗은 것처럼 불편했다. 그리고 아침부터 멍하니 낯 모르는 사람과 음악을 나눠 듣고, 마치 오랜 친분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와 함께 학교로 왔던 시간들도 과연 실제 했던 것인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왜 그렇게 그에게 순종적이었는지 스스로 이해되지 않았다.
불쑥 교실에 들어선 담임은 문가에 서서 교실을 훑어봤다. 그 눈빛은 죄수를 바라보는 간수의 그것처럼 차갑고 냉정했다. 무거운 침묵이 교실을 누르고 아이들의 눈은 책상을 향했다.
“아침부터 학교 앞에서 연애질이나 하고, 니들이 지금 중학생이야? 고2야, 고2! 왜, 대학가기 싫어? 싫은 놈들은 아예 학교 그만두고 다른 거나 해. 공부하려는 애들까지 방해하지 말고. 엉?”
아이들의 눈길이 슬금슬금 정희를 향했다. 벌써 그렇게 소문이 돌았던가? 의식하지 못한 잠깐의 일들이 이렇게 커질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하기만 했다.
“손정희!”
“네.”
“그래, 남자랑 놀아보니 어떻디?”
담임의 눈길과 마주친 정희 눈은 담담하기만 했다.
“별 생각 없었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나쁘진 않았던 것 같네요.”
순간 교실에 싸늘한 냉기가 몰려들어오는 것 같았다. 정희가 뱉은 의외의 말에 모두의 입이 열리고 눈이 커졌다. 서로를 바라보며 놀람을 표시할 때, 담임은 천천히 정희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래?”
“네.”
뚫어질 듯 바라보는 담임의 눈길을 맞으며 정희도 지지 않고 눈을 맞췄다. 그것은 평소의 정희에게서는 볼 수 없는 당돌하고 도전적인 모습이었다. 이전의 정희라면 눈을 내리고 조용히 있었을 것이었다. 담임인 신선생도 조금은 놀란 듯, 조금은 흥미로운 듯 정희를 바라봤다.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도 가까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의 얼굴이 부딪힐 듯 보였다.
“여태 공부만 아는 범생인줄 알았더니 너도 슬슬 계집이 되어가는 모양이군. 그런 거야?”
“그런가 보죠.”
“오호!”
신선생이 손을 들어 정희의 턱을 받쳐들고 이쪽 저쪽으로 움직이며 마치 카메라 테스트라도 하듯 살펴봤다. 그런 담임의 손길에 정희는 불쾌감을 얼굴에 떠올렸다.
“남자의 손길이 아니어서 싫은가 보지?”
정희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노려봤다.
“아직 남자를 아는 것 같진 않군. 하지만 곧 알게 되겠지? 기왕이면 잘하는 놈으로 골라. 그래야 그것이 즐겁다는 걸 배우게 될 거야. 공연히 나중에 불감증을 핑계로 이놈 저놈 만나지 말고.”
그녀의 말에 정희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것은 단순히 모욕적이라기보다 엄연한 성폭력의 일종이란 생각이 들었다.
“경험에서 나온 지식이신가 보죠?”
느닷없는 정희의 공격에 교실 여기 저기서 나지막한 탄성과 한숨이 터져 나왔다. 모두들 신선생의 결렬한 반응을 기대하며 벌써부터 몸을 움츠렸다. 일명 마녀로 불리는 신지아선생. 어떤 트러블도 무서워하지 않는 여장군. 한마디로 그녀는 이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들을 통틀어 통하는 갑이었다. 그녀가 그런 갑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만큼 그녀의 거침없는 행보의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별다른 문제없이 여태까지 지내온 것을 보면 아마도 그녀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특별한 배경이 있는지도 몰랐다. 대다수 학생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일부 교사들도 그런 듯 여기고 있었다.
뜻밖에도 신선생의 반응은 웃음이었다.
“뭐? 오호호호……”
그녀의 웃음이 호쾌했다.
“뭐, 부인하진 않겠어. 너 같은 애송이와는 다르게 난 어른이거든. 호호호……”
때마침 수업을 알리는 차임벨이 울렸어도 교실내의 누구도 그 소리에 신경 쓰지 못했다. 정희가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차라리 신선생이 발끈해서 뺨이라도 때렸다면 오히려 일의 마무리는 쉽고 간편했을 것이다. 당당한 그녀의 태도에 왠지 그녀에게 밀려난 듯한 느낌으로 머리에 열이 솟고 감정은 아래로 기울고 있었다. 정희의 뺨과 귀가 붉게 달아 올랐다.
그 때였다. 누군가 교실문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깨뜨리는 말을 날린 것은.
“죄송하지만 지금부터는 제 수업시간인 것 같습니다만.”
모두들 소리 나는 쪽을 돌아봤다. 바로 그였다.
신선생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가고 그가 교탁 뒤에 섰다. 그는 처음 볼 때와 같이 부드러운 미소로 학급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러다 정희와 눈길이 마주쳤을 때 그의 입가에 더 큰 미소가 그려졌다. 정희는 그의 미소를 대하며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의 등장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뒷자리에서 사선으로 바라보는 세돌의 눈에도 평소와 다른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오늘부터 여러분들과 함께 국어과목을 공부하게 된 김주호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한 번 교실을 훑어봤다.
“수업을 못 따라 오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수업시간에 다른 짓을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에 합당한 징벌이 존재할 것입니다.”
웃으며 말하는 그의 경고가 결코 말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것이 온 몸으로 느껴질 만큼 그의 말에 깃든 힘은 무거운 것이었다. 그 증거로 아무도 그의 말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눈빛에는 사람의 마음을 누르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이 시간 부로 경기도의 한 신도시 주택단지에 위치한 이곳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눈치챈 사람은 아직 극소수에 불과했다.
4월의 바람은 날카로웠다. 살을 파고드는 그 날카로움에 소름이 돋았다. 누군가는 곧 봄이라고도 했지만 그것은 실제가 아닌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특히나 매일 정희를 분주하게 했던 시후의 존재가 사라진 이 날의 아침은 어색하기까지 했다. 문득 문득 어디선가 시후가 불쑥 얼굴을 디밀고 장난끼 어린 말을 던지지 않을까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시후의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공부 잘하고 오렴.”
“아빠는요?”
“새벽에 들어오셔서 주무시고 계셔.”
“많이 따셨대요?”
“아이고, 너네 아빠가 언제 화투 쳐서 돈 따는 것 봤니? 어제도 몽땅 털려서 차비 얻어 오셨다더라.”
“내가 옆에 있었으면 다 긁어오는 건데. 아쉽네!”
“됐어, 이것아! 넌 가서 공부나 열심히 해!”
“공부보다 돈 버는 게 더 재밌는데…”
“아침부터 맞고 갈래?”
“다녀오겠습니다! 쓩~”
집을 나서 길을 걸으면서도 정희는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미 마음으로 시후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습관화된 행동만큼은 멈출 수 없었다. 그러다 횡단보도신호를 기다리며 서있던 정희는 신호가 바뀌었음도 알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시후와의 인연은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고등학교 올라와 첫 등교하던 날, 바로 이 자리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건너편 신호등 아래에서 빤히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애. 자신과 같은 교복을 단정히 입은 아이. 신호가 바뀌고 그 아이 앞을 지나칠 때까지도 그 아이의 눈길은 정희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정희야!”
건너편에서 혜정이 정희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보행자 신호가 금방이라도 꺼질 듯 깜빡이고 있었다. 서둘러 발을 내딛는 순간, 누군가 정희를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날카로운 뱀의 혀처럼 멈춰선 차들 사이를 비집고 나온 오토바이 한대가 스치듯 그녀가 내딛고자 한 자리를 빠르게 지나쳐갔다.
“엄마야!”
정희의 날카로운 비명은 당겨진 몸이 돌아서며 누군가의 가슴에 부딪혀 멈춰섰다. 뜻하지 않은 어설픈 포옹. 서둘러 떨어진 정희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감사합니다.”
상대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여 인사부터 했다. 그리고 무심결에 바라본 상대의 눈과 마주쳤을 때, 정희는 세상 처음으로 온 몸에 오는 이상한 전율에 휩싸였다. 송곳처럼 가슴을 찔러오는 어떤 것. 약간의 현기증이 정희의 몸을 흔들었다.
“조심해요. 서둘지 말고.”
그의 말이 조금은 이상한 듯 들렸다. 보통은 이럴 때 ‘괜찮아요?’라고 묻지 않던가? 그런데 이 남자는 조심하란다. 서둘지 말고. 마치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투로.
“네.”
보행신호가 빨간색으로 바뀌고 차들이 흰색선을 밟으며 지나쳐 가고 있었다. 자꾸만 뒤에 서있는 그 남자의 시선이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얼음처럼 굳어진 자세로 가만히 서 있다가 건너편에서 여전히 자신을 기다리는 혜정의 눈길과 마주쳤다. 혜정의 얼굴이 잠시 정희를 향하는 듯싶더니 이내 얼굴에 묘한 놀람이 서리고 있었다. 조금은 멍한 듯한. 정희는 그런 혜정의 얼굴을 보며 그녀도 자신과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무언가 귓가에 들려오는 이 것. 작게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저절로 귀를 열게 하는 음악. 자신도 모르게 귀가 움직이듯 소리를 향해 머리를 기울일 때 무언가가 정희의 왼쪽 귀를 파고들었다.
“어멋!”
“같이 듣자.”
“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야. 폭풍이라고도 하지.”
선명해진 소리가 마음을 끌고 있었다. 무어라 거절하기 전에 마음을 끄는 소리에 할 말을 잠시 잊은 채 정희는 가만히 음악에 빠지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자 그가 정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걸으면서 들을까?”
그를 돌아봤다. 빙그레 웃는 그의 얼굴에서 따뜻한 빛이 아침 햇살처럼 뿌려지는 것 같았다. 그가걸음을 옮기며 정희의 어깨에 올린 손에 힘을 줬다. 그 가벼운 힘의 방향으로 정희의 걸음이 저절로 옮겨졌다. 그 이후 정희가 걸음을 옮겨 한걸음 디딜 때마다 그도 옆에서 보조를 맞추며 나란히 따라왔다. 마치 그림자처럼 정희가 어떻게 걸어갈 것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일정한 간격과 속도를 유지하며 전혀 부담스럽지 않게 함께 걸어주는 그의 움직임은 바람같이 여유로웠다. 두 사람이 혜정의 앞을 지나쳐 갈 때 혜정은 놀람과 경이로움이 섞인 얼굴로 석상처럼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모습이 제법 멀어진 다음에야 정신을 차린 듯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학교가 참 멋있구나.”
교문을 따라 들어서며 그가 말했다. 그 때서야 정희는 정신이 들었다. 긴 거리는 아니지만 학교에까지 그와 함께 이어폰을 나눠 들으며 등교를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의식 없이 무작정 걸었던 느낌이었다. 서둘러 이어폰을 귀에서 떼어내 그에게 건넸다.
“잘 들었습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함께 들으니 참 좋구나. 다음에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어떠니?”
“네?”
고개를 들어 그를 보니 그가 잔잔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정희, 너 거기서 뭐하니?”
교문 앞에서 아이들을 맞이하던 영어담당 전수지선생이 무언가를 살피듯 정희와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네.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를 잠시 쳐다보곤 이내 잰걸음으로 교문을 지나쳐 갔다. 그런 정희를 시선으로 따라오던 전선생이 다가오는 남자를 조금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정희야!”
뒤를 돌아보니 혜정이 숨을 헐떡이며 쫓아오고 있었다.
“혜정아…”
“그 남자… 헉헉… 누구니?”
“응?”
“아까… 후우… 너랑 같이 온 남자 말야.”
“아… 그 사람… 몰라. 모르는 사람이야.”
“뭐어? 그런데 이어폰까지 나눠 끼고 교문까지 왔단 말야?”
“응. 어쩌다 보니……”
“헐, 대박!”
혜정의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뒤로 하고 정희는 다시 교실을 향했다. 자신도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는 일들. 처음 보는 사람과 함께한 시간. 마치 마법에 홀린 듯, 그에게 끌려간 자신이 스스로도 황당하기만 했다.
정희가 막 교실문을 들어서려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 챘다. 놀라 고개를 돌아봤다. 바로 옆 반의 박기태였다.
“잠깐 얘기 좀 해.”
“왜 이래?”
“그 남자 누구야?”
“그 남자…?”
“몰라서 물어? 너랑 교문까지 같이 온 남자 말야. 아주 다정하게.”
그렇게 말하는 기태의 눈에 불꽃이 일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야.”
“뭐? 모르는 사람인데 그렇게 이어폰까지 나눠 끼고 왔단 말야? 그게 지금 말이라고 해?”
“어떻게… 알았어?”
“내가 뒤에서 따라왔는데도 모르더군. 얼마나 좋으셨길래……”
그랬던가? 그렇게도 주위를 의식하지 못할 만큼 노래에, 아니 그에게 빠져있었던가……
“어찌 됐건 누군지 모르는 건 사실이야. 그리고 내가 누구랑 뭘 하든 니가 무슨 상관인데?”
“뭐가 어째? 내가 전에도 말했지. 넌 내 여자라고 말야.”
“내가 물건이야? 응? 니가 뭔데 그런 소리를 하는 건데? 어이가 없어서…… 난 너랑 추호도 얽히고 싶지 않거든! 난 너한테 아무 관심 없으니 이제 그만 관심 끊어줬으면 좋겠어.”
“미안하지만 난 그렇게 못하겠어. 기필코 널 내 거로 만들 거니까.”
“허……”
정희는 기가 차다는 듯이 기태를 쳐다봤다. 그리고 손을 뿌리치며 교실을 들어섰다.
“이런, 제길……”
정희의 뒤를 쫓아오던 혜정은 두 사람의 실강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에 밀려드는 슬픔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내심으로 좋아하던 기태가 자신이 아닌 정희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다는 것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혜정의 마음은 짐작도 못한 채 상기된 표정의 기태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혜정이 너, 정희랑 같이 온 그 남자 누군지 아니?”
“아니… 그런데 그 남자 우리 학교로 들어오던데……”
“학교에?”
기태가 고개를 갸웃할 때쯤 정희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자신의 자리에 안고 있었다. 정희가 자리에 앉자 마자 옆자리의 효진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얌전한 고양이가 뭘 어쩐다더니… 참……”
정희가 수업준비를 하며 말했다.
“알려면 제대로 알고나 말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야.”
“뭐? 니가 지금 날 가르치냐?”
“모르는 건 배워야 하지 않겠어?”
“이게 어디서 아니꼬운 짓이야!”
효진이 벌떡 일어나며 정희를 향해 손바닥을 치켜들었다. 그 때 누군가 효진의 손을 붙들었다.
“뭐야, 넌?”
“그만 하지?”
“뭐? 니가 뭔데 나서서……”
앙칼진 효진의 목소리는 그러나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세돌이의 눈빛을 대하는 순간 어느새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아, 아파…”
“조례시간 됐으니 그만 자리에 앉지?”
세돌이 손을 놓자 효진은 정말 착한 학생처럼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앉아 첫 수업인 국어책을 꺼내어 눈길을 책에 주고 있었다. 학교에서 알아주는 노는 아이 효진이 왜 그토록 세돌이에게만은 꼼짝하지 못하는지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흥미롭게 그들을 바라보던 주변의 아이들도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신의 자리에서 수업준비를 했다.
다시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온 교실은 몇몇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더불어 평온이 찾아왔다. 그 평온 속에서 정희는 자신도 모르게 턱을 고이고 눈을 감으며 생각 속에 빠져들었다.
지난 밤부터 오늘 아침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이 너무나 믿기지 않았다. 이제는 일상처럼 익숙해진 시후의 불쑥 나타남과 귓가를 스치는 바람처럼 들려오던 그의 목소리. 혼자의 시간도 혼자일 수없었던 불편함과 혼자이고 싶지 않을 때 늘 곁에 있어주던 그의 존재. 이제 그 모든 존재가 부존재가 되어 사라졌다는 현실이 옷을 벗은 것처럼 불편했다. 그리고 아침부터 멍하니 낯 모르는 사람과 음악을 나눠 듣고, 마치 오랜 친분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와 함께 학교로 왔던 시간들도 과연 실제 했던 것인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왜 그렇게 그에게 순종적이었는지 스스로 이해되지 않았다.
불쑥 교실에 들어선 담임은 문가에 서서 교실을 훑어봤다. 그 눈빛은 죄수를 바라보는 간수의 그것처럼 차갑고 냉정했다. 무거운 침묵이 교실을 누르고 아이들의 눈은 책상을 향했다.
“아침부터 학교 앞에서 연애질이나 하고, 니들이 지금 중학생이야? 고2야, 고2! 왜, 대학가기 싫어? 싫은 놈들은 아예 학교 그만두고 다른 거나 해. 공부하려는 애들까지 방해하지 말고. 엉?”
아이들의 눈길이 슬금슬금 정희를 향했다. 벌써 그렇게 소문이 돌았던가? 의식하지 못한 잠깐의 일들이 이렇게 커질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하기만 했다.
“손정희!”
“네.”
“그래, 남자랑 놀아보니 어떻디?”
담임의 눈길과 마주친 정희 눈은 담담하기만 했다.
“별 생각 없었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나쁘진 않았던 것 같네요.”
순간 교실에 싸늘한 냉기가 몰려들어오는 것 같았다. 정희가 뱉은 의외의 말에 모두의 입이 열리고 눈이 커졌다. 서로를 바라보며 놀람을 표시할 때, 담임은 천천히 정희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래?”
“네.”
뚫어질 듯 바라보는 담임의 눈길을 맞으며 정희도 지지 않고 눈을 맞췄다. 그것은 평소의 정희에게서는 볼 수 없는 당돌하고 도전적인 모습이었다. 이전의 정희라면 눈을 내리고 조용히 있었을 것이었다. 담임인 신선생도 조금은 놀란 듯, 조금은 흥미로운 듯 정희를 바라봤다.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도 가까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의 얼굴이 부딪힐 듯 보였다.
“여태 공부만 아는 범생인줄 알았더니 너도 슬슬 계집이 되어가는 모양이군. 그런 거야?”
“그런가 보죠.”
“오호!”
신선생이 손을 들어 정희의 턱을 받쳐들고 이쪽 저쪽으로 움직이며 마치 카메라 테스트라도 하듯 살펴봤다. 그런 담임의 손길에 정희는 불쾌감을 얼굴에 떠올렸다.
“남자의 손길이 아니어서 싫은가 보지?”
정희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노려봤다.
“아직 남자를 아는 것 같진 않군. 하지만 곧 알게 되겠지? 기왕이면 잘하는 놈으로 골라. 그래야 그것이 즐겁다는 걸 배우게 될 거야. 공연히 나중에 불감증을 핑계로 이놈 저놈 만나지 말고.”
그녀의 말에 정희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것은 단순히 모욕적이라기보다 엄연한 성폭력의 일종이란 생각이 들었다.
“경험에서 나온 지식이신가 보죠?”
느닷없는 정희의 공격에 교실 여기 저기서 나지막한 탄성과 한숨이 터져 나왔다. 모두들 신선생의 결렬한 반응을 기대하며 벌써부터 몸을 움츠렸다. 일명 마녀로 불리는 신지아선생. 어떤 트러블도 무서워하지 않는 여장군. 한마디로 그녀는 이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들을 통틀어 통하는 갑이었다. 그녀가 그런 갑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만큼 그녀의 거침없는 행보의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별다른 문제없이 여태까지 지내온 것을 보면 아마도 그녀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특별한 배경이 있는지도 몰랐다. 대다수 학생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일부 교사들도 그런 듯 여기고 있었다.
뜻밖에도 신선생의 반응은 웃음이었다.
“뭐? 오호호호……”
그녀의 웃음이 호쾌했다.
“뭐, 부인하진 않겠어. 너 같은 애송이와는 다르게 난 어른이거든. 호호호……”
때마침 수업을 알리는 차임벨이 울렸어도 교실내의 누구도 그 소리에 신경 쓰지 못했다. 정희가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차라리 신선생이 발끈해서 뺨이라도 때렸다면 오히려 일의 마무리는 쉽고 간편했을 것이다. 당당한 그녀의 태도에 왠지 그녀에게 밀려난 듯한 느낌으로 머리에 열이 솟고 감정은 아래로 기울고 있었다. 정희의 뺨과 귀가 붉게 달아 올랐다.
그 때였다. 누군가 교실문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깨뜨리는 말을 날린 것은.
“죄송하지만 지금부터는 제 수업시간인 것 같습니다만.”
모두들 소리 나는 쪽을 돌아봤다. 바로 그였다.
신선생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가고 그가 교탁 뒤에 섰다. 그는 처음 볼 때와 같이 부드러운 미소로 학급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러다 정희와 눈길이 마주쳤을 때 그의 입가에 더 큰 미소가 그려졌다. 정희는 그의 미소를 대하며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의 등장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뒷자리에서 사선으로 바라보는 세돌의 눈에도 평소와 다른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오늘부터 여러분들과 함께 국어과목을 공부하게 된 김주호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한 번 교실을 훑어봤다.
“수업을 못 따라 오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수업시간에 다른 짓을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에 합당한 징벌이 존재할 것입니다.”
웃으며 말하는 그의 경고가 결코 말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것이 온 몸으로 느껴질 만큼 그의 말에 깃든 힘은 무거운 것이었다. 그 증거로 아무도 그의 말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눈빛에는 사람의 마음을 누르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이 시간 부로 경기도의 한 신도시 주택단지에 위치한 이곳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눈치챈 사람은 아직 극소수에 불과했다.
인기 야설
- 1 친구의 마누라 - 단편
- 하숙집 아줌마 - 단편
- 오빠! 우리 다음에 낮에 한 번 ... - 단편
- 무너지는 유부녀...서지현-단편
- 남편을 위해서... - 상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