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천사 - 11부
2018.05.23 09:50
11. 회색천사
“네, 선생님”
“오늘 예약한 강주희씨 아직 안 오셨나요?”
“네.”
“연락도 없었나요?”
“네. 연락해볼까요?”
“부탁해요.”
화요일 오후 2시에 약속한 주희씨가 아무 연락 없이 오지 않았다. 다른 환자라면 모를까 그녀라면 연락 없이 안 오지 않을 텐데.
“저, 선생님.”
“네.”
“강주희씨 전화를 안 받는데요.”
무슨 일일까? 마음이 불편해진다.
“전화 더 해볼까요?”
“아뇨. 그럴 필요는 없어요. 오늘 오후 예약 스케줄이 어떻게 되죠?”
“상담 예약은 없구요. 대신 오늘 오겠다고 선생님 시간을 물어본 분은 있었어요.”
“그게 언제죠?”
“오늘 아침인데 3시 이후에 시간이 어떻게 되냐고 물어보셔서 괜찮다고 했어요.”
“알겠습니다.”
무료한 시간이 흘러간다. 그러다 자료를 찾아본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연주양의 방어기재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방법에 대한 것. 그렇게 점점 자료에 몰두 하고 있을 때
“선생님!”
“네.”
“아까 말씀 드린 손님 오셨는데요.”
“기본설문지 작성하시고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저… 그거 없이 그냥 상담만 받고 싶다고 하시는데……”
“알았어요. 그냥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평소 같으면 반드시 기본설문지 작성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날은 예외였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오감을 뛰어넘는 육감의 한 부분일 것이다.
노크를 하고 들어선 남자는 편안한 웃음을 짓고 있는 듯 했지만 실상 그의 눈빛은 날카로움을 숨기지 못하고 여기저기 살펴보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이리 앉으시죠.”
소파에 앉은 그의 눈을 살펴봤다.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없는 나름의 고유한 빛이 있는 법이다. 내 앞에 앉아 주위를 살피는 이 남자의 경우도 예외일 수는 없다.
“어떤 문제로 오셨나요?”
“특별한 문제가 있어서 온 건 아니고, 앞으로 문젯거리가 될 만한 것이 있어서 그걸 말씀 드리려고 왔습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선생님 환자 중에 정연주라는 학생이 있죠?”
직감적으로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가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환자에 대한 정보는 보호해야 할 사항입니다. 확인해드릴 수가 없군요.”
“뭐 그러시겠죠. 나도 선생님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꼭 드려야 해서 왔습니다.”
그는 아직도 주변을 살펴보고 있다. 이 방안에 있는 사소한 것 하나라도 다 기억하려는 듯한 태도. 실제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혹여 모른다. 그럴 수 있을 지도. 그의 눈길을 따라 나도 머리 속으로 방안에 대한 그림을 확인한다. 내 책상 위에 있는 의 개인적인 물품들은 저 남자의 자리에서는 제대로 확인하기 어렵다. 나는 방안에 많은 장식을 하지 않는 편이다. 내 자신의 정보를 노출할만한 것도 없다. 모든 자료는 캐비닛이 아닌 컴퓨터에 파일로 저장되어 있다. 그것도 HDD는 이곳에 없다. 모든 작성 자료는 이 곳 컴퓨터에서 임시로 작성될 뿐 저장은 별도의 관리 회사에 전송되어 미러링 처리된다. 덕분에 나는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그 자료에 접근할 수 있다. 심지어 스마트폰으로도.
“연주양의 정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의 상담을 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건 제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연주양이 결정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거야 그렇겠죠. 그래도 결국 선생님이 결론을 내줘야 연주양도 그만 둘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씀은 나보고 연주양에게 상담을 그만 받도록 말하라는 뜻인가요?”
“잘 알아들으시네요. 역시 심리학을 공부하신 분은 뭔가 틀리네. 하하……”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도 될 것 같은 데 연주양 주변 인물들이 공연스레 부산을 떠는 것이죠. 구태여 그럴 필요 없다는 정보를 드리는 겁니다. 뭐 선생님도 연주양이 특별히 문제 없다고 생각되지 않으신가요?”
이 자는 나를 떠보고 있다. 내가 자신의 위협에 쉽게 타협할 것인지, 연주양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이 자의 정체가 뭘까?
“모든 상담에 있어서 가장 우선하는 것이 내담자의 자유의사입니다. 저는 그저 보조적인 위치에 있죠. 그러니 그런 부분은 연주양이나 연주양 부모님과 직접 상의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타협은 하지 않겠다 그런 뜻이시죠? 허허…… 그러리라 생각은 했습니다만 그래도 그런 말을 들으니 좀 섭섭하긴 하군요. 난 좋은 뜻으로 말씀 드린 건데.”
“본인 상담과 관련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만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 축객령에 이 남자는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해졌다.
“아주 정상적이고 예측 가능한 보편적 마인드시군요. 알겠습니다. 충분히 알아들으셨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또 그에 맞게 처신하실 것이라고 생각이 되고. 그럼 전 이만 가보도록 하죠. 상담료는 물론 내고 가겠습니다. 다음엔 제 상담이 필요할 지도 모르니까요. 하하하……”
돌아서던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말했다.
“환자와는 연애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신과 의사 선생님들의 불문율이라고 하던데 정말 그런가요?”
그를 보는 내 눈빛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죠.”
퉁명스런 내 말에 그가 한 번 씩 웃더니 이내 문을 나갔다. 그가 사라진 이후에도 한동안 나는 멍한 상태로 있었다. 혹시 그가 나와 주희씨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가 사진이 인쇄된 편지를 보낸 자가 아닐까?
불현듯 창가로 다가가 블라인드 사이로 밖을 본다. 조금 전 나간 그자가 저쯤에서 걸음을 멈추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내 긴 연기를 뿜으며 뒤를 돌아본다. 나도 모르게 움찔 놀라 창문에서 떨어졌다.
(저 자의 정체가 뭘까?)
“선생님, 퇴근 안 하세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5시 반이나 된 걸요.”
“그렇군요. 먼저 퇴근하세요. 난 좀 더 있다 갈게요.”
“네, 알겠어요. 그럼 낼 뵈요.”
평소 같으면 왜 더 있냐고 물어볼 법도 하건만 이양은 서둘러 문을 열고 나선다. 그런 뒷모습이 조금 허전하기도 하다. 어느새 함께 있는 것이 제법 익숙해져서 일까?
이양이 간 것을 확인하고 병원문을 안에서 잠궜다. 오늘은 병원 밖을 나가고 싶지 않다.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내 마음의 신호등이 빨갛게 움직이지 말라고 말한다. 나는 예전부터 그랬듯 내 마음의 신호등에 순종한다. 경험적으로 봐서 그러한 순종이 내게 손해를 입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상담실의 블라인드를 모두 내리고 소등한 채 책상 위의 작은 등 하나만을 켰다. 소파에 앉아 앞에 놓아둔 핸드폰을 충전하며 녹음기능을 켜두었다. 그리고 공기계 상태인 다른 하나의 스마트폰을 꺼내 미리 녹음된 내용을 플레이 했다. 이제 난 조금 위험한 시도를 해야 한다. 전에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성공의 여부나 안전의 여부는 나로선 확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불확실한 무언가를 찾아 떠나는 탐험가의 마음과 같은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평안케 노력하며 들려오는 소리에 신경을 집중한다. 낮은 톤의 클래식이 흘러나와 내 주위를 감싼다. 서서히 내 몸이 가벼워지고 내 의식에도 자유가 찾아온다. 들려오는 소리는 친근한 듯 어색한 내 목소리. 그 소리에 나를 맡긴다. 내가 나를 최면의 상태로 유도하는 일명 자기최면. 그러나 일상적인 목적의식에 집중하기 위한 자기최면이 아닌, 말 그대로 전문적 깊이의 최면. 스스로의 뇌파를 늦춘다. 베타에서 알파로, 다시 알파에서 세타로. 드디어 최면의 길이 열린다. 이것은 위험천만한 모험의 길이다.
내가 다시 의식의 상태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깨어난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본다. 육체적인 상태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살펴보게 된다. 별다른 이상은 없는 듯하다. 나 자신에 대한 것을 점검해본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자문자답. 내가 조금 전에 무슨 시도를 했었는가에 대한 상황파악. 자기최면의 결과보다 의식으로 돌아온 내가 정상인가에 대한 검증. 그리고 멀쩡한 나 자신을 확신하며 녹음된 내용을 듣기 위해 핸드폰을 집어 드는 순간
“똑똑똑!”
누군가 병원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제 좀 괜찮아요?”
“네, 선생님. 괜찮아요.”
찻잔을 손에 쥔 주희씨의 손이 이제야 안정감을 찾고 있었다.
“죄송해요. 늦은 시간에……”
“아닙니다. 그나 저나 어떻게 된 건가요?”
“저도 그걸 잘 모르겠어요.”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된 걸까? 미간에 주름이 잡힌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나도 생각 속에 골몰했다.
노크 소리에 자석에 끌리듯 문을 열었을 때 거기 그녀가 서 있었다. 그것도 비를 흠뻑 맞고서. 언제 비가 왔던 것일까? 흠뻑 젖은 주희씨의 옷을 벗기며 나는 그녀가 안쓰럽기만 했다. 5월이라 낮에는 제법 덥다고 해도 밤에는 쌀쌀했다. 그나마 얇은 옷을 입고 그녀는 떨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옷을 벗기는 순간에도 털을 깎기는 양처럼 가만히 있었다. 젖어서 몸에 달라붙은 그녀의 옷을 모두 벗겨내고 서둘러 샤워실로 들여보낸 후가 더 난감했다. 그녀가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그 때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아악!”
서둘러 샤워실로 달려갔을 때, 그녀는 샤워기 아래 몸을 웅크리고 주저 앉아 떨고 있었다.
“왜 그래요, 주희씨?”
그녀는 말없이 손으로 거울을 가리켰다. 내 눈에 비친 거울은 그저 거울일 뿐 이상한 것은 없었다. 나는 샤워기 물을 끄고 그녀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지금은 그녀를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저기 뭔가 있어요!”
“걱정 말아요. 지금은 아무 것도 없어요.”
“정말 없어요?”
“네, 없어요.”
“무서워요.”
“괜찮아요. 걱정할 것 없어요. 내가 같이 있잖아요.”
그녀가 천천히 나를 돌아봤다. 그녀의 눈에 애처로움이 가득했다.
“선생님!”
내 품으로 파고드는 그녀를 그대로 안을 수 밖에 없었다. 아이처럼 두 팔로 나를 감싸 안고 그녀는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안심시키려 했을 때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내 입술에 그녀의 입술을 부딪혀 왔다. 아무런 암시도, 최면도 없는 상태에서의 그녀의 태도는 나를 놀래키고 있었지만, 그러나 나와 그녀는 이미 서로의 육체에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우리는 이내 익숙하게 서로를 탐했다. 좁은 샤워실에서 우린 다시 하나가 됐다. 실제로 맨 정신에서의 그녀는 나와의 관계가 처음이었지만 몸은 나를 안다는 듯이 서툴지 않았다.
샤워기를 붙잡고 엉덩이를 뒤로 뺀 그녀의 엉덩이가 항아리처럼 풍성하게 보였다. 그 항아리 언저리를 잡고 내 물건을 사정없이 그녀의 몸 속에 집어 넣었다. 별다른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처음 삽입은 쉽지 않았지만 이내 그녀는 높은 음의 탄성과 함께 내 물건을 받아 들였다. 처음은 거칠었지만 서둘러 관계를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스크림을 먹듯 그렇게 그녀를 조금씩 먹어 들어갔다. 그녀가 점차 반응해 왔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듯 절정을 향해 서서히 치솟아 올랐다.
절정에서의 그녀는 온 몸을 떨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자리에 주저 앉은 그녀를 바닥에 돌려 눕혀 놓고 나는 다시 삽입을 했고 마치 리플레이라도 하듯 다시 또 그녀를 음미해갔다. 떨어지지 않는 흥분에 그녀는 정신 없이 신음을 뿌려댔다. 정숙하고 조신한 그녀가 그렇게까지 강한 흥분과 암캐와 같은 열락의 신음성을 내지를 줄은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어떤 포르노보다 더한 격한 반응에 나도 점차 절정을 향해 치달았고 그녀의 의사를 살펴볼 틈도 없이 아니 그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자제력을 잃고 그대로 그녀의 몸 속 깊이 사정을 했다.
깊은 신음을 뱉어낸 내가 무너지듯 그녀의 몸 위로 쓰러졌을 때, 그녀는 부드럽게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마치 아이를 어르듯 내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주도권이 나에게서 그녀에게로 넘어간 느낌이었다. 서서히 물건을 빼내며 나도 모르게 그녀의 아랫도리를 내려다 봤다. 그녀의 질 밖으로 하얗게 흘러내리는 내 정액의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도 고개를 들고 자신의 그곳을 살펴보는 듯 했다. 그러다 나와 시선을 마주하고는 어이없는 농담으로 나를 어이없게 했다.
“어쩌겠어요. 주어 담을 순 없잖아요.”
소파에 앉아 마주보던 우리는 지금은 나란히 앉아 어깨를 붙이고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친밀성을 알아보는 가장 좋은 것이 서로의 거리라고 한다. 서로의 신체적 거리가 가까울수록 심리적 거리도 가깝다는 뜻이다. 아니 진리다. 그녀와 나는 이미 더 이상 가까울 수 없는 거리로 붙어버렸다.
“어떻게 된 거에요? 오늘 상담은 왜 안 왔어요?”
헐렁한 내 옷을 입은 그녀가 고개를 내 어깨에 기대어 왔다.
“죄송해요. 실은… 오려고 나왔다가 병원 앞까지 와서 망설였어요.”
“왜요?”
“왠지… 선생님하고 너무 가까워지는 것 같아서요. 선생님이 그냥 의사선생님이 아니라 남자로… 느껴져서……”
알고 있다. 의사와 환자가 이성간일 경우 이런 일은 흔하게 발생하는 일이다. 정신과 의사에게 환자들은 심리적인 많은 부분을 의지하게 되어 있고, 그것을 때로 연애감정으로 착각하게도 된다. 그래서 학생시절에 이런 심리적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또 환자의 이런 경향을 의도적으로 이끌지 않도록 주의를 받고 교육을 받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제대로 잘 처신하기가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언제부터 그런 거에요?
“모르겠어요. 점차 그렇게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어떻게 다시 오게 된 거에요?”
“용기가 안 나서 오늘은 상담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혼자 영화관엘 갔어요.”
“그랬군요. 그래서 전화도 안받았군요.”
“진동으로 해놔서 전화 온 줄 몰랐기도 했고, 전화에 신경 쓰고 싶지도 않고 했어요. 그런데…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은 것 같아요.”
“정신을요?”
“네. 정신 차려보니 여기 와있더군요.”
“그럼 그 사이 시간은 얼마나 흘렀던가요?”
“아주 오래진 않았어요. 아마 극장에서 바로 이리로 온 것 같아요. 어떻게 왔는지는 기억에 없구요.”
분명히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잘 생각해 보세요. 영화를 볼 때 주변 사람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으니까요.”
“음… 그럴 일은 없었던 것 같아요. 제 줄에는 저 혼자였거든요. 앞에도 뒤에도 사람이 없었구요. 평일이라 그런지 극장 전체에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낮이기도 했고.”
“흠…… 무언가 영향을 준 것이 틀림없이 있을 거에요. 만약 주변 사람이 아니면 극장의 시설이라던가 아니면… 영화의 내용이라던가……”
“극장은 전에도 갔었던 곳인데… 그럼 영화 내용 때문인가?”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이유를 찾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영화의 내용이 뭔가요?”
“특별한 건 없었어요. 그냥 재미로 볼만한 영화였는데 죽은 애인이 천사가 돼서 위험에 처한 애인을 도와주려고 하는 내용이었어요. 예전 데미 무어가 나왔던 영화와 비슷한 거요.”
“기억해보려고 해보세요. 마지막으로 본 내용이나 대사가 뭔지.”
“그게… 주인공이 천사가 되었다는 걸 이야기 해주는 대목이었는데… 자신이 애인의 수호천사……”
주희씨의 몸이 힘없이 쓰러져 왔다. 그 때서야 알았다. 내가 한 암시가 함정이었다는 것을.
“주희씨?”
“네, 선생님.”
이미 최면에 들어선 그녀는 몽롱한 시선이었다.
“이제부터 당신은 내 음성으로 직접 하는 <회색천사>라는 말에만 최면에 유도됩니다.”
“네, 선생님.”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나 어떤 소리에도 반응하면 안됩니다. 내가 직접 말하는 <회색천사>라는 말만이 당신을 편안하고 안전한 최면으로 이끄는 열쇠가 됩니다. 이 열쇠는 자물쇠 기능이 있어서 누군가 당신을 최면상태로 이끌려고 하면 그것을 거부합니다. 동의하시겠습니까?”
“네.”
마음에 안심이 됐다. 수호천사라는 쉬운 단어의 암시가 그녀에게 짐작하지 못한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빨리 확인해서 다행이었다. 그것은 나의 실수이기도 했다. 이제 내가 의도치 않은 단어암시에 의한 최면유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역최면까지도 염두에 둔 최면암시는 이제 그녀를 더 이상의 최면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해 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알까? 회색천사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예전 징벌을 담당했던 천사가 인간을 돕고자 하나 신의 선함과 인간의 악함을 동시에 자신에게 끌어들이는 까닭에 흰색과 검은색의 중간인 회색의 날개를 가지게 되었다는 전설을. 어쩌면 나는 그 회색의 천사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네, 선생님”
“오늘 예약한 강주희씨 아직 안 오셨나요?”
“네.”
“연락도 없었나요?”
“네. 연락해볼까요?”
“부탁해요.”
화요일 오후 2시에 약속한 주희씨가 아무 연락 없이 오지 않았다. 다른 환자라면 모를까 그녀라면 연락 없이 안 오지 않을 텐데.
“저, 선생님.”
“네.”
“강주희씨 전화를 안 받는데요.”
무슨 일일까? 마음이 불편해진다.
“전화 더 해볼까요?”
“아뇨. 그럴 필요는 없어요. 오늘 오후 예약 스케줄이 어떻게 되죠?”
“상담 예약은 없구요. 대신 오늘 오겠다고 선생님 시간을 물어본 분은 있었어요.”
“그게 언제죠?”
“오늘 아침인데 3시 이후에 시간이 어떻게 되냐고 물어보셔서 괜찮다고 했어요.”
“알겠습니다.”
무료한 시간이 흘러간다. 그러다 자료를 찾아본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연주양의 방어기재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방법에 대한 것. 그렇게 점점 자료에 몰두 하고 있을 때
“선생님!”
“네.”
“아까 말씀 드린 손님 오셨는데요.”
“기본설문지 작성하시고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저… 그거 없이 그냥 상담만 받고 싶다고 하시는데……”
“알았어요. 그냥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평소 같으면 반드시 기본설문지 작성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날은 예외였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오감을 뛰어넘는 육감의 한 부분일 것이다.
노크를 하고 들어선 남자는 편안한 웃음을 짓고 있는 듯 했지만 실상 그의 눈빛은 날카로움을 숨기지 못하고 여기저기 살펴보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이리 앉으시죠.”
소파에 앉은 그의 눈을 살펴봤다.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없는 나름의 고유한 빛이 있는 법이다. 내 앞에 앉아 주위를 살피는 이 남자의 경우도 예외일 수는 없다.
“어떤 문제로 오셨나요?”
“특별한 문제가 있어서 온 건 아니고, 앞으로 문젯거리가 될 만한 것이 있어서 그걸 말씀 드리려고 왔습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선생님 환자 중에 정연주라는 학생이 있죠?”
직감적으로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가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환자에 대한 정보는 보호해야 할 사항입니다. 확인해드릴 수가 없군요.”
“뭐 그러시겠죠. 나도 선생님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꼭 드려야 해서 왔습니다.”
그는 아직도 주변을 살펴보고 있다. 이 방안에 있는 사소한 것 하나라도 다 기억하려는 듯한 태도. 실제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혹여 모른다. 그럴 수 있을 지도. 그의 눈길을 따라 나도 머리 속으로 방안에 대한 그림을 확인한다. 내 책상 위에 있는 의 개인적인 물품들은 저 남자의 자리에서는 제대로 확인하기 어렵다. 나는 방안에 많은 장식을 하지 않는 편이다. 내 자신의 정보를 노출할만한 것도 없다. 모든 자료는 캐비닛이 아닌 컴퓨터에 파일로 저장되어 있다. 그것도 HDD는 이곳에 없다. 모든 작성 자료는 이 곳 컴퓨터에서 임시로 작성될 뿐 저장은 별도의 관리 회사에 전송되어 미러링 처리된다. 덕분에 나는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그 자료에 접근할 수 있다. 심지어 스마트폰으로도.
“연주양의 정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의 상담을 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건 제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연주양이 결정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거야 그렇겠죠. 그래도 결국 선생님이 결론을 내줘야 연주양도 그만 둘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씀은 나보고 연주양에게 상담을 그만 받도록 말하라는 뜻인가요?”
“잘 알아들으시네요. 역시 심리학을 공부하신 분은 뭔가 틀리네. 하하……”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도 될 것 같은 데 연주양 주변 인물들이 공연스레 부산을 떠는 것이죠. 구태여 그럴 필요 없다는 정보를 드리는 겁니다. 뭐 선생님도 연주양이 특별히 문제 없다고 생각되지 않으신가요?”
이 자는 나를 떠보고 있다. 내가 자신의 위협에 쉽게 타협할 것인지, 연주양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이 자의 정체가 뭘까?
“모든 상담에 있어서 가장 우선하는 것이 내담자의 자유의사입니다. 저는 그저 보조적인 위치에 있죠. 그러니 그런 부분은 연주양이나 연주양 부모님과 직접 상의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타협은 하지 않겠다 그런 뜻이시죠? 허허…… 그러리라 생각은 했습니다만 그래도 그런 말을 들으니 좀 섭섭하긴 하군요. 난 좋은 뜻으로 말씀 드린 건데.”
“본인 상담과 관련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만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 축객령에 이 남자는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해졌다.
“아주 정상적이고 예측 가능한 보편적 마인드시군요. 알겠습니다. 충분히 알아들으셨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또 그에 맞게 처신하실 것이라고 생각이 되고. 그럼 전 이만 가보도록 하죠. 상담료는 물론 내고 가겠습니다. 다음엔 제 상담이 필요할 지도 모르니까요. 하하하……”
돌아서던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말했다.
“환자와는 연애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신과 의사 선생님들의 불문율이라고 하던데 정말 그런가요?”
그를 보는 내 눈빛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죠.”
퉁명스런 내 말에 그가 한 번 씩 웃더니 이내 문을 나갔다. 그가 사라진 이후에도 한동안 나는 멍한 상태로 있었다. 혹시 그가 나와 주희씨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가 사진이 인쇄된 편지를 보낸 자가 아닐까?
불현듯 창가로 다가가 블라인드 사이로 밖을 본다. 조금 전 나간 그자가 저쯤에서 걸음을 멈추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내 긴 연기를 뿜으며 뒤를 돌아본다. 나도 모르게 움찔 놀라 창문에서 떨어졌다.
(저 자의 정체가 뭘까?)
“선생님, 퇴근 안 하세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5시 반이나 된 걸요.”
“그렇군요. 먼저 퇴근하세요. 난 좀 더 있다 갈게요.”
“네, 알겠어요. 그럼 낼 뵈요.”
평소 같으면 왜 더 있냐고 물어볼 법도 하건만 이양은 서둘러 문을 열고 나선다. 그런 뒷모습이 조금 허전하기도 하다. 어느새 함께 있는 것이 제법 익숙해져서 일까?
이양이 간 것을 확인하고 병원문을 안에서 잠궜다. 오늘은 병원 밖을 나가고 싶지 않다.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내 마음의 신호등이 빨갛게 움직이지 말라고 말한다. 나는 예전부터 그랬듯 내 마음의 신호등에 순종한다. 경험적으로 봐서 그러한 순종이 내게 손해를 입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상담실의 블라인드를 모두 내리고 소등한 채 책상 위의 작은 등 하나만을 켰다. 소파에 앉아 앞에 놓아둔 핸드폰을 충전하며 녹음기능을 켜두었다. 그리고 공기계 상태인 다른 하나의 스마트폰을 꺼내 미리 녹음된 내용을 플레이 했다. 이제 난 조금 위험한 시도를 해야 한다. 전에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성공의 여부나 안전의 여부는 나로선 확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불확실한 무언가를 찾아 떠나는 탐험가의 마음과 같은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평안케 노력하며 들려오는 소리에 신경을 집중한다. 낮은 톤의 클래식이 흘러나와 내 주위를 감싼다. 서서히 내 몸이 가벼워지고 내 의식에도 자유가 찾아온다. 들려오는 소리는 친근한 듯 어색한 내 목소리. 그 소리에 나를 맡긴다. 내가 나를 최면의 상태로 유도하는 일명 자기최면. 그러나 일상적인 목적의식에 집중하기 위한 자기최면이 아닌, 말 그대로 전문적 깊이의 최면. 스스로의 뇌파를 늦춘다. 베타에서 알파로, 다시 알파에서 세타로. 드디어 최면의 길이 열린다. 이것은 위험천만한 모험의 길이다.
내가 다시 의식의 상태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깨어난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본다. 육체적인 상태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살펴보게 된다. 별다른 이상은 없는 듯하다. 나 자신에 대한 것을 점검해본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자문자답. 내가 조금 전에 무슨 시도를 했었는가에 대한 상황파악. 자기최면의 결과보다 의식으로 돌아온 내가 정상인가에 대한 검증. 그리고 멀쩡한 나 자신을 확신하며 녹음된 내용을 듣기 위해 핸드폰을 집어 드는 순간
“똑똑똑!”
누군가 병원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제 좀 괜찮아요?”
“네, 선생님. 괜찮아요.”
찻잔을 손에 쥔 주희씨의 손이 이제야 안정감을 찾고 있었다.
“죄송해요. 늦은 시간에……”
“아닙니다. 그나 저나 어떻게 된 건가요?”
“저도 그걸 잘 모르겠어요.”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된 걸까? 미간에 주름이 잡힌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나도 생각 속에 골몰했다.
노크 소리에 자석에 끌리듯 문을 열었을 때 거기 그녀가 서 있었다. 그것도 비를 흠뻑 맞고서. 언제 비가 왔던 것일까? 흠뻑 젖은 주희씨의 옷을 벗기며 나는 그녀가 안쓰럽기만 했다. 5월이라 낮에는 제법 덥다고 해도 밤에는 쌀쌀했다. 그나마 얇은 옷을 입고 그녀는 떨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옷을 벗기는 순간에도 털을 깎기는 양처럼 가만히 있었다. 젖어서 몸에 달라붙은 그녀의 옷을 모두 벗겨내고 서둘러 샤워실로 들여보낸 후가 더 난감했다. 그녀가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그 때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아악!”
서둘러 샤워실로 달려갔을 때, 그녀는 샤워기 아래 몸을 웅크리고 주저 앉아 떨고 있었다.
“왜 그래요, 주희씨?”
그녀는 말없이 손으로 거울을 가리켰다. 내 눈에 비친 거울은 그저 거울일 뿐 이상한 것은 없었다. 나는 샤워기 물을 끄고 그녀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지금은 그녀를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저기 뭔가 있어요!”
“걱정 말아요. 지금은 아무 것도 없어요.”
“정말 없어요?”
“네, 없어요.”
“무서워요.”
“괜찮아요. 걱정할 것 없어요. 내가 같이 있잖아요.”
그녀가 천천히 나를 돌아봤다. 그녀의 눈에 애처로움이 가득했다.
“선생님!”
내 품으로 파고드는 그녀를 그대로 안을 수 밖에 없었다. 아이처럼 두 팔로 나를 감싸 안고 그녀는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안심시키려 했을 때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내 입술에 그녀의 입술을 부딪혀 왔다. 아무런 암시도, 최면도 없는 상태에서의 그녀의 태도는 나를 놀래키고 있었지만, 그러나 나와 그녀는 이미 서로의 육체에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우리는 이내 익숙하게 서로를 탐했다. 좁은 샤워실에서 우린 다시 하나가 됐다. 실제로 맨 정신에서의 그녀는 나와의 관계가 처음이었지만 몸은 나를 안다는 듯이 서툴지 않았다.
샤워기를 붙잡고 엉덩이를 뒤로 뺀 그녀의 엉덩이가 항아리처럼 풍성하게 보였다. 그 항아리 언저리를 잡고 내 물건을 사정없이 그녀의 몸 속에 집어 넣었다. 별다른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처음 삽입은 쉽지 않았지만 이내 그녀는 높은 음의 탄성과 함께 내 물건을 받아 들였다. 처음은 거칠었지만 서둘러 관계를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스크림을 먹듯 그렇게 그녀를 조금씩 먹어 들어갔다. 그녀가 점차 반응해 왔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듯 절정을 향해 서서히 치솟아 올랐다.
절정에서의 그녀는 온 몸을 떨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자리에 주저 앉은 그녀를 바닥에 돌려 눕혀 놓고 나는 다시 삽입을 했고 마치 리플레이라도 하듯 다시 또 그녀를 음미해갔다. 떨어지지 않는 흥분에 그녀는 정신 없이 신음을 뿌려댔다. 정숙하고 조신한 그녀가 그렇게까지 강한 흥분과 암캐와 같은 열락의 신음성을 내지를 줄은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어떤 포르노보다 더한 격한 반응에 나도 점차 절정을 향해 치달았고 그녀의 의사를 살펴볼 틈도 없이 아니 그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자제력을 잃고 그대로 그녀의 몸 속 깊이 사정을 했다.
깊은 신음을 뱉어낸 내가 무너지듯 그녀의 몸 위로 쓰러졌을 때, 그녀는 부드럽게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마치 아이를 어르듯 내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주도권이 나에게서 그녀에게로 넘어간 느낌이었다. 서서히 물건을 빼내며 나도 모르게 그녀의 아랫도리를 내려다 봤다. 그녀의 질 밖으로 하얗게 흘러내리는 내 정액의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도 고개를 들고 자신의 그곳을 살펴보는 듯 했다. 그러다 나와 시선을 마주하고는 어이없는 농담으로 나를 어이없게 했다.
“어쩌겠어요. 주어 담을 순 없잖아요.”
소파에 앉아 마주보던 우리는 지금은 나란히 앉아 어깨를 붙이고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친밀성을 알아보는 가장 좋은 것이 서로의 거리라고 한다. 서로의 신체적 거리가 가까울수록 심리적 거리도 가깝다는 뜻이다. 아니 진리다. 그녀와 나는 이미 더 이상 가까울 수 없는 거리로 붙어버렸다.
“어떻게 된 거에요? 오늘 상담은 왜 안 왔어요?”
헐렁한 내 옷을 입은 그녀가 고개를 내 어깨에 기대어 왔다.
“죄송해요. 실은… 오려고 나왔다가 병원 앞까지 와서 망설였어요.”
“왜요?”
“왠지… 선생님하고 너무 가까워지는 것 같아서요. 선생님이 그냥 의사선생님이 아니라 남자로… 느껴져서……”
알고 있다. 의사와 환자가 이성간일 경우 이런 일은 흔하게 발생하는 일이다. 정신과 의사에게 환자들은 심리적인 많은 부분을 의지하게 되어 있고, 그것을 때로 연애감정으로 착각하게도 된다. 그래서 학생시절에 이런 심리적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또 환자의 이런 경향을 의도적으로 이끌지 않도록 주의를 받고 교육을 받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제대로 잘 처신하기가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언제부터 그런 거에요?
“모르겠어요. 점차 그렇게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어떻게 다시 오게 된 거에요?”
“용기가 안 나서 오늘은 상담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혼자 영화관엘 갔어요.”
“그랬군요. 그래서 전화도 안받았군요.”
“진동으로 해놔서 전화 온 줄 몰랐기도 했고, 전화에 신경 쓰고 싶지도 않고 했어요. 그런데…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은 것 같아요.”
“정신을요?”
“네. 정신 차려보니 여기 와있더군요.”
“그럼 그 사이 시간은 얼마나 흘렀던가요?”
“아주 오래진 않았어요. 아마 극장에서 바로 이리로 온 것 같아요. 어떻게 왔는지는 기억에 없구요.”
분명히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잘 생각해 보세요. 영화를 볼 때 주변 사람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으니까요.”
“음… 그럴 일은 없었던 것 같아요. 제 줄에는 저 혼자였거든요. 앞에도 뒤에도 사람이 없었구요. 평일이라 그런지 극장 전체에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낮이기도 했고.”
“흠…… 무언가 영향을 준 것이 틀림없이 있을 거에요. 만약 주변 사람이 아니면 극장의 시설이라던가 아니면… 영화의 내용이라던가……”
“극장은 전에도 갔었던 곳인데… 그럼 영화 내용 때문인가?”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이유를 찾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영화의 내용이 뭔가요?”
“특별한 건 없었어요. 그냥 재미로 볼만한 영화였는데 죽은 애인이 천사가 돼서 위험에 처한 애인을 도와주려고 하는 내용이었어요. 예전 데미 무어가 나왔던 영화와 비슷한 거요.”
“기억해보려고 해보세요. 마지막으로 본 내용이나 대사가 뭔지.”
“그게… 주인공이 천사가 되었다는 걸 이야기 해주는 대목이었는데… 자신이 애인의 수호천사……”
주희씨의 몸이 힘없이 쓰러져 왔다. 그 때서야 알았다. 내가 한 암시가 함정이었다는 것을.
“주희씨?”
“네, 선생님.”
이미 최면에 들어선 그녀는 몽롱한 시선이었다.
“이제부터 당신은 내 음성으로 직접 하는 <회색천사>라는 말에만 최면에 유도됩니다.”
“네, 선생님.”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나 어떤 소리에도 반응하면 안됩니다. 내가 직접 말하는 <회색천사>라는 말만이 당신을 편안하고 안전한 최면으로 이끄는 열쇠가 됩니다. 이 열쇠는 자물쇠 기능이 있어서 누군가 당신을 최면상태로 이끌려고 하면 그것을 거부합니다. 동의하시겠습니까?”
“네.”
마음에 안심이 됐다. 수호천사라는 쉬운 단어의 암시가 그녀에게 짐작하지 못한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빨리 확인해서 다행이었다. 그것은 나의 실수이기도 했다. 이제 내가 의도치 않은 단어암시에 의한 최면유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역최면까지도 염두에 둔 최면암시는 이제 그녀를 더 이상의 최면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해 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알까? 회색천사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예전 징벌을 담당했던 천사가 인간을 돕고자 하나 신의 선함과 인간의 악함을 동시에 자신에게 끌어들이는 까닭에 흰색과 검은색의 중간인 회색의 날개를 가지게 되었다는 전설을. 어쩌면 나는 그 회색의 천사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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