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의 게임 - 2부

그녀와의 게임결국 밤을 꼴딱 새고 말았다.



조금 잠이 들려 하면 내 몸에 닿는 민지의 감촉에 난 좀처럼 잠이 들 수 없었고, 그러기를 수차례 반복..어느새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하아..결국...”



창문으로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

그 햇살을 보며 난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야~ 일어나!! 야~ 늦었다고!!”

“어? 어어?? 뭔 소리야”

“학교 안 가냐?”

“학교? 몇 신데?”

“8시 20분”

“헐..수업 9시까지 아냐?”

“어~ 이제 알았냐”

“근데 왜 이제 깨워~!!!”



잠깐만 자고 일어나서 준비를 한다는 것이 어느새 수업시간이 40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어..그러고 보니..

민지는 화장에 옷까지 입고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우유에 시리얼을 말아먹고 있었다.



자기 준비할 거 다 하고 날 깨우다니..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건 그거고 이러다가 진짜 지각을 할 거 같아 서둘러 난 집으로 건너갔다.



“아~ 저 망할 기집애..좀 깨워주면 덧나나..”



난 대충 고양이 세수로 얼굴에 물기만 묻히고, 대충 머리 정리를 하고 어제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나왔다.



마침 집에서 나오고 있는 민지..



“오오~ 스토커냐? 나 나오는 소리 듣고 따라 나온 거?”

“뭐래....”

“농담이다. 아침부터 그런 눈초리를 할 필요는 없잖아”

“내가 안 그러게 생겼냐..치사하게 지 준비할 거 다하고 깨우냐”

“알아서 일어나야지..애도 아니고..내가 왜 깨워줘? 코까지 골면서 잘 자더만”



아..진짜 주먹이 운다. 남자였으면 바로 죽빵을..

내가 어제 자기 때문에 한숨도 못자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하지만 너무나 애석하게도 민지는 겉보기엔 정말 천상 여자 중에 여자였고,

난 그저 부들부들 떨리는 내 주먹을 바지 주머니에 푹 찔러 넣을 수밖에 없었다.



“안 오냐? 엘리베이터 내려간다”

“야야~ 같이 가!!”



난 가까스로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파고들었고, 민지는 다른 곳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아침부터 이렇게 당하다니..멘탈이 아주 가루가 되는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거의 1시간도 제대로 못 자서 제 정신이 아닌데..









학교까지 가는 버스 안..

정신이 없다.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지..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내가 서 있는 건지, 사람들 사이에 떠있는 건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에 어느새 버스는 학교 정류장 앞에 도착했다.



“야 내려~”

“어어”



가까스로 멍 때리고 있다가 민지의 재촉에 난 버스에서 내릴 수 있었고,

아무 생각 없이 민지가 가는 방향으로 그저 따라갔다.

지금은 도저히 제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지야~”

“어, 지혜야. 아직 민재랑 지수는 안 왔어?”

“민재는 아직 안 왔고, 지수는 화장실 갔어”

“그래”



지혜는 너무나도 다행히 잠자기 좋은 가장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난 지혜와 민지를 방패삼아 뒤쪽에 자리를 잡고 가방을 베개 대용으로 깔고 얼굴을 파묻었다.



“어제 잠 못 잤어?”

“어? 어어..어쩌다보니..”

“야~ 나 어제 어떻게 들어갔냐?”

“어~ 민재 왔냐”

“어어~ 지후야. 넌 왜 아침부터 정신 못 차리냐? 어제 멀쩡한 거 같더니”

“그렇게 됐다..난 먼저 좀 자련다..죽을 맛임..”

“그래~ 자라. 형이 옆에서 가려줄게”

“땡스~”



앞에서 지혜와 민지가 가려주고, 옆에서 덩치 큰 민재가 가려주니..

이것이야 말로 완벽한 구성이다.



난 마음 놓고 잘 수 있겠다는 생각에 뿌듯함이 밀려왔다.

이렇게 적절한 자리 선정이라니..!



“어~ 다 왔네”



그때 지수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순간 어제 있었던 지수와의 잠깐의 입맞춤이 떠오른다.

두근대는 가슴, 순간 잠이 싹 달아난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인사하려다 문득 오늘 세수도 제대로 안 해서 내 꼴이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고개를 숙인 체로 지수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

“왜 그래? 어디 아퍼??”

“아니~ 잠 한 숨도 못 잤대”

“그래서 저렇게 퍼져 있구나..크크...자리 기막히게 잡았네 그래 좀 자라”



아..보고 싶다. 지수 얼굴을..

하지만 도저히 지금 내 몰골이 쪽팔려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순간, 왜 모자를 가지고 나오지 않았을까 후회가 됐다.

그럼 얼굴이 좀 가려져서 괜찮을 텐데..



에라..모르겠다..잠이나 자야겠다.

일단 잠이나 자고보자는 마음에 난 곧바로 잠을 청하기 시작했고,

잠시 후 교수님이 들어와서 수업이 시작됐다.



수업 첫 날인데 우리의 전공교수님은 일찍 끝내주는 것도 없이 정확히 시간에 맞춰 수업을 진행했고, 덕분에 난 푹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다른 애들은 수업이 일찍 안 마친다고 엄청 불만이었지만..



“야~ 수업 끝났어”

“어?? 끝났냐. 후아~ 잘 잤다”

“크크..너 엄청 잘 자더라. 그렇게 피곤했냐?”

“어..뭐..그렇게 됐어. 다음 수업 바로 있나?”

“1학년들은 수업 다 똑같이 짜지 않냐? 수업 변경 한 거 있어? 변경한 거 없으면 다음 수업은 1시 수업이고”

“그렇구나. 변경한 거 없어. 좀 어디서 쉬다가 점심 먹고 수업 들으러 가야겠네”

“난 도서관에 책 빌릴 거 있어서 먼저 갈게”

“어~ 저..지수야 나도 같이 가”

“그래”

“있다 연락할게 같이 점심 고고~”

“그래, 있다 봐”







“잠자긴 잔거야?”

“어..조금..나 지금 몰골이 말이 아니지..”

“아니~ 생각보다 괜찮은데”

“에이..솔직히..”

“크크크...왜? 엉망이란 말 듣고 싶어?”

“역시...”

“뭐야~ 진짜 괜찮아. 도서관에 가서 자려고?”

“어? 어어..”

“잘한다~ 학생이 도서관에서 잘 생각이나 하고”

“하하...좀 찔리긴 한데..진짜 도저히 지금은 안 자고는 못 버틸 거 같아”

“그래..가서 조금이라도 자긴 해야겠다. 아직 눈동자가 정상이 아니네”



도서관에 도착해 난 자리를 잡고 그대로 뻗어버렸고, 지수는 내 옆에 앉아

빌린 책을 읽었다.



얼마나 오래 잤을까..

이렇게 잠깐 자고 일어나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느낌을 가져다준다.



“지후야, 점심 먹으러 가자 그만 일어나”

“어어..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크크..가방에 얼굴 눌린 거 봐라”

“어..어어..하하..”



민망하다. 오늘 좋아하는 사람한테 보일 꼴, 못 보일 꼴을 다 보이는 것 같다.

그래도 어쩌리..너무 너무 피곤한데..이게 다..민지 그..



다시 민지 생각에 난 화가 울컥 나려는 걸 가라앉히고,

화장실에 가서 대충 얼굴이며 머리를 수습하고 밖으로 나왔다.



“가자”

“오오~ 그 사이 좀 깔끔해진 듯..”

“헤헤..그래?”



지수의 칭찬에 기분이 좋다.

늘 남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아이..

지수는 다른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법을 알고 있었다.

비방보다는 칭찬이 입에 베여 있는..



비록 그게 립서비스라 하더라도

칭찬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마법과도 같으니까..



“오오~ 둘이서 데이트 잘 했냐?”

“데이트는 무슨...흐흠..”

“찔리냐? 헛기침은? 크크..”

“안..안 찔리거든”

“왜~ 데이트 좀 했어. 부러워??”

“지..지수야..!!”



갑작스런 지수의 말에 내 얼굴은 빨갛게 물들었다.



“야..너 얼굴이 그러면 진짜 같잖아”

“하여튼..저..멍청이...”

“뭐?? 멍청이? 야!! 김민지~”

“역시..지후 잡는 건 민지지...크크.. 완전 톰과 제리 같군”

“그러게..”



민지는 내가 불러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먼저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고

밥을 먹는 동안 내가 계속 눈을 마주쳐도 조금도 날 바라보지 않았다.



하여튼 내가 당해낼 수 없는 얄미운 아이다.

어찌나 사람을 잘 들었다 놨다 하는지..



“너네 계속 그러고 있을 거냐?”

“내가 틀린 말 했나? 멍청이 맞잖아”

“아오...너 진짜 남자였으면..”

“워워~~ 그쯤 진정..크크..무슨 장난친 거 가지고 애들도 아니고~ 자자~ 수업이나 들으러 갑시다”



민재의 중재로 우리의 2라운드는 시작되기도 전에 시시하게 끝이 났고,

민지는 그 날 하루 종일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원래 자기가 내킬 때만 나에게 말을 걸긴 했지만..



“형님은 과외 알바 있어서 먼저 간다”

“벌써 알바 구했어? 부럽다..나도 구해야 하는데”

“너도 알바 자리 필요해? 알았으~ 우리 지혜 자리도 내가 알아볼게”

“고마워~ 아..그리고 나도 오늘은 집에 일 있어서 먼저 갈게”

“에이..뭐야..오늘도 달릴까 했더니 다 시시하게 가는 거야?”

“지수야~ 쏘리..흐흐 내일 보자”

“미안..먼저 갈게~ 집에 급한 일이라..”

“그래..어쩔 수 없지 뭐..민지랑 지후는..?”

“나 그만 갈게. 오늘 좀 피곤하네”

“어..그래..들어가 민지야”



둘만 남아버리게 된 상황..

뭔가 분위기가 묘하다.



아까 도서관에서 나름 푹 자서 딱히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둘만 남아 있다 보니 뭔가 데이트 같기도 하고 그런 느낌..



“너도 들어가야 해?”

“아니..난 괜찮은데”

“그럼 좀 놀다 가자~ 나 일찍 들어가기 싫어”

“그래~ 그러자”



갑작스레 결정된 지수와 둘만의 데이트..

방해할 사람도 없었고, 나로선 지수에게 점수를 딸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아..진짜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좀 멋지게 하고 나오는 건데..’



하지만 후회하면 뭐 하리..이미 찌질한 모습도 다 보여 버렸고..

다시 시간을 돌릴 수도 없는데..



그저 지금부터 잘 하고, 잘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너 노래 잘 해? 우리 노래방 갈까?”

“어? 아니..뭐 그냥..”

“노래방 가자~ 스트레스 풀게”

“그래 그러자..”



사실 내 노래 실력은 음치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결코 좋다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싫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



난 지수의 손에 이끌려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제발 지수도 노래를 못 하길 빌며...



그런데 이게 왠 걸..

내 바람과 달리 지수의 노래 실력은 정말 대단했다.



오디션 프로까지는 오바겠지만..

학교 내 가요제를 하면 충분히 입상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살아오면서 봤던 사람 중에 가장 노래를 잘 불렀다.





아..이러면 안 되는데..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먼저 잘해버리면 반칙이잖아..



“어때? 들을 만은 하지..?”

“아니..무슨 그런 겸손을...엄청 잘 하는데..”

“헤헤..그래? 고마워. 너도 빨랑 불러”

“어..어어..”



이럴 땐 어쩔 수 없다. 못 불러도 잘 부르는 것 같이 보이는 노래를 선곡하는 수밖에..

난 나의 고음 불가에 잘 맞고 분위기 있는 곡인 김동률의 노래를 골랐다.



물론 김동률의 노래도 후렴부 가면 조금 힘들었지만..

그나마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음역대의 노래 중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제일 괜찮다고 평을 들었으니

이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오오..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김동률? 너 취향이 조금 올드구나. 나도 옛날 노래 좋아하는데..”

“아..그래? 다행이네..”



실로 정말 다행이었다. 예전에 승희랑 노래방 가면..승희는 언제나 최신곡을 불렀기에,

내가 이런 노래들을 선곡해서 부르면 할아버지 같다고 놀려댔기에, 내심 걱정했는데..



지수의 날 바라보는 시선..

부담스럽다. 못 부르면 완전 쪽팔리는 건데..



난 최대한 목을 가다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오늘은 목 상태가 나름 괜찮은 날..



1절 후렴에서 살짝 고비가 있기는 했지만 잘 넘어갔다.

그리고 다가온 2절의 후렴.. 역시 나는 노래에 소질이 없는가보다.



2절까지 부른 적이 잘 없기도 했거니와 슬슬 숨이 차고 힘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 계속 올라가는 부분인데..



아..도저히 안 되겠다. 더 이상은..

난 재빨리 취소 버튼을 누르기 위해 리모컨을 잡았다.



그 순간 내 눈앞에 다가온 지수..

가깝다..어제 입맞춤을 했던 그 순간처럼..



“지..지수야..”

“키스해도 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지만 너무나 놀라 말은 조금도 나오지 않았고,

지수는 그런 내 반응을 긍정으로 받아 들였는지 살짝 나를 향해 웃으며

입술이 다가왔다.



내 입술에 닿는 촉촉한 느낌..

아...너무 부드럽다.



그리고 이어지는 달콤한 키스..

지수의 혀가 내 입술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내가 원했던 하고자 했던 첫 키스..

승희와 바랬던 그런 키스였다. 너무나 달콤한..그리고 부드러운..



승희의 거절로 너무나 상처받았었는데..

그 상처가 지수와의 키스로 모두 녹아내리는 듯하다.



지수의 립글로스의 달콤한 향..그리고 부드러운 입술, 혀의 감촉..



모든 사고가 정지 된 듯 하고, 시간이 멈춘 듯 했다.



내 신경은 내 모든 것은 오로지 지수와의 키스에 몰두해 있었고,

얼마나 오래 키스했는지 모를 정도로 우린 한참동안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다.



“헤에....좋다..”



내 입술에서 떨어지는 지수의 입술, 그리고 쑥스러운 듯 붉어진 볼..

너무나 예쁘고 너무나 사랑스럽다. 어떻게 저렇게 예쁜 아이가 나에게 키스를..



“와아..벌써 시간이 30분이 넘게 지났어..우리 엄청 오래 했네”

“어? 어어..그러게..”



정말 지수의 말대로 노래방 시간은 30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벌써 그만큼 시간이 지나가 버렸단 말인가..



“그럼 이제 다시 노래 좀 불러볼까?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얼른 예약하자~”

“그래”



예약..지금 번호가 눈에 들어올 턱이 있나..

생전 처음으로 여자와 그것도 이렇게 예쁜 여자와 키스를 했는데..



난 정말 어떻게 노래를 불렀는지, 지수가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고

오직 지수와의 첫 키스 그 순간만이 머리에 계속 맴돌았다.



지수와 노래방에서 나와 저녁을 먹을 때도,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실 때도..



“이제 그만 들어가야지. 어제도 늦게까지 놀았는데 내가 너무 오래 괴롭혔나?”

“아..아니 좋았어. 너무 좋았어”

“그럼 다행이고..근데 너 어딘가 넋이 나가 있는 거 같은데..내 착각인가?”



아니..착각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난 지금 지수에게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으니까..



“가자.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줄게”

“으응..”



지수와 함께 걸어 도착한 버스 정류장..

아..아쉽다. 이렇게 집에 가기가..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은데..



하지만 그런 나의 바람과 달리 확실히 어제 잠을 못 자서 그런지..

낮에 잠을 좀 보충했어도 이렇게 다시 저녁 늦게 노니까 몸이 힘든 게 느껴졌다.



“어..버스 온다. 잘 들어가..”

“어. 오늘 진짜 너무 좋았어..그리고..”



고백..순간 고백을 할까 생각이 들다 멈췄다.

승희에게도 너무 섣부르게 고백하다 거절당한 기억이 있었기에..

아직은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내 입을 막았다.



“뭐..? 할 말 있어?”

“아..아냐. 잘 들어가라고. 조심해서..”

“그래. 너두 잘 들어가고..”

“어어..내일 보자”



집으로 가는 버스 안..

시간이 그때 멈춘 듯.. 지수와의 첫 키스가 계속 머리에 맴돈다.



‘하아...어떻게 그렇게 좋을 수 있지..정말....’



어떻게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왔는지 모를 정도로 난 계속 그 장면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바보처럼 혼자 희죽 희죽 웃으며 집으로 들어왔다.



아마 남들이 봤으면 분명 미친놈이라고 욕을 했을 터..

하지만 그러면 어떠하리..내가 좋으면 됐지..내가 지금 이렇게 좋은데..







집에 오자마자 울리는 카톡 소리, 왠지 민지일 거 같다.



또 문소리 때문에 내가 집에 온 걸 알아챈 것인가..

순간 문을 새로 고쳐야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거야 원..문소리 때문에 집에 들어오고 나가는 걸 다 감시당하는 기분이니..



-집?

-어..귀신이네..

-말했잖아. 다 들린다고

-그래..왜?

-나 약 좀

-뭔 약?

-말 길게 못 해..나 죽을 듯

-뭔 소리야??

-아..길게 못한다고 얼른 우리 집 와서 약 좀

-아니..뭔 소린지..일단 알았다. 문 열려있냐?

-닫혔음 1182

-도어락 비번?



더 이상 답변이 없다.



아..이거 이렇게 성가실 수가 없다. 이제는 약 심부름까지..

집에 있는 약 먹는 거 하나도 귀찮은가..



난 혼자 있는 욕 없는 욕을 다 하면서 궁시렁 대며 민지의 집으로 향했다.

민지가 말한 번호를 누르니 도어락이 열렸고, 난 안으로 들어갔다.



“넌..무슨 다크니스한 걸 이렇게 좋아하냐..불 좀 켜고 살아라..”



난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불부터 켰다.

이렇게 어두워서야 약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으니..



그때 눈앞에 들어온 방 한가운데 누워 있는 민지의 모습..

그런데 누워 있다고 보기엔 어딘가 자세가 이상했다.



잔뜩 웅크리고 있는 모습..



“야..많이 안 좋아...?”



가까이 다가가 본 민지의 얼굴은 새하얗게 창백했고,

아직 날씨가 꽤나 쌀쌀한데 얼굴엔 식은땀이 잔뜩 흐르고 있었다.



“미..민지야 왜 그래?? 정신 좀 차려봐. 민지야”



난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고, 다급히 민지의 몸을 흔들어 보았다.

하지만 민지의 몸은 축 처진 상태에서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아..미치겠네..기절한 건가..어떡하지...일단 119를 불러야 하나..”



사람이 이렇게 쓰러져 있는 건 정말 난생 처음 보는지라

난 너무나 당황해서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그때 민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



“민지야..민지야 정신 좀 들어??”

“아..아파..”

“어디가? 어디가 아픈데? 당장 병원 갈까?”

“배...”

“민지야?? 민지야?”



다시 기절한 민지..

도저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큰일이라도 날 거 같아서

서둘러 난 민지를 일단 등에 업었다.



그 순간 손에 닿는 축축한 감촉..



“뭐지...?”



바닥을 보니 피가 흥건히 묻어 있었다.



“어...이거 피잖아!”



난 내 손에 닿은 미끌한 감촉이 피라는 것이 생각에 미치자 진짜

살면서 이렇게 빠르게 움직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민지를 업고

뛰어나가며 콜택시를 불렀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허파가 터질 듯하다.

하긴..혼자도 아닌 민지를 업고 달렸으니..



그때 눈앞에 보이는 아파트 입구에 와 있는 콜택시,

난 택시에 타자마자 가까운 종합병원 응급실로 가달라고 말했다.















“생리통입니다”

“네???”

“생리통이라구요. 약 주사했으니 좀 안정 취하면서 몇 시간 있다가 가시면 될 거 같습니다”

“아...네..감사합니다....”



생리통이라니........

순간 안도감과 함께 허탈함이 밀려왔다.



죽을병이 아니라는 것은 정말 다행이었지만, 생리통에 그 난리를 치면서 택시타고 응급실까지 오다니...



어쨌든 많이 아픈 건 아니라 다행이긴 했지만 헛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살다 살다..엄마나 누나도 아니고..생리통 때문에 다른 여자를..그것도 김민지 때문에 병원 응급실에 다 오다니...아...머리야....”



머리가 지끈거려온다.



민지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상모르게 편안한 표정으로 잘 자고 있었다.



아..너무나 얄밉다.

내가 도대체 이웃을 잘못 만나서 이게 한 밤중에 무슨 개고생인지..











“그러게 오바는 왜...오바 하는 게 주특기냐..”

“야..사람이 쓰러져서 얼굴이 하얗고 식은 땀 흘리고 거기에 피까지..그 상황에서 제 정신인 사람이 얼마나 있을 거 같냐?”

“아~ 좀 조용히 말해. 옆에 다 들리거든”

“말 잘하는 거 보니 이제 괜찮나 보네..얼른 집에 가자..벌써 1시다”

“내일 어차피 오전 수업도 없는데..어지간히 닦달하네..”

“아...피곤하다고..”

“알았어. 가자 가”



역시 고맙다는 한 마디 할 줄 모르는 녀석이다.

최소한의 양심도 없는 녀석..



하긴 처음부터 고맙다는 말 들을 거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우린 한 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생리통으로 기절한 여자, 그 여자를 업어서 응급실에 데려간 남자..

이 난감한 상황에서 딱히 대화를 할 게 뭐가 있을 리도 없었고..





“들어가라”

“아..맞다..없구나..”

“뭐가?”

“야.. 여기 돈, 편의점 가서 좀 사와”

“뭘???”

“생리대”

“야..너...하아....”

“아니 이건 계약을 떠나서 나 진짜 아직 정상 아니거든..원래 첫째 날 둘째 날 엄청 심하다고..”



물론 안색이 안 좋은 것도 알고 있었고, 생리통 심한 사람은 많이 아프다는 것도..

심지어 방금 응급실 갔다 왔는데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몸이 정상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생리대라니...



“갔다와..”



내 말은 역시나 듣지도 않고 내 손에 돈을 쥐어주고 들어가 버리는 민지..

아..진짜 아프지만 않으면 꿀밤이라도 한 대 때리는 건데..



하지만 어쩔 수 있나..딱 봐도 민지는 환자..

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집 근처의 편의점으로 향했다.



“보자...뭐 이렇게 종류가 많아..소형..중형..대형..오버나이트...하아...”



골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생리대 종류가 이렇게나 많았다니..

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알바생에게 다가갔다.



“저..죄송한데..생리대를 어떤 걸 사야 할지 몰라서..”

“네???”



순간 변태나 성범죄자를 쳐다보는 듯한 알바생의 표정..

나도 잘 알고 있다...내가 얼마나 이상한 소리를 했는지..



하지만 생리대를 사가야 하니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아..저..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고..여자친구가 아파서..제가 대신 사러..”

“아..네에..”



이렇게 설명해도 뭔가 떨떠름한 표정이다.



“양이 좀 많은 편이세요? 아니면 첫째 날?”



내가 그런 걸 알 리가 있나...

하지만 그 순간 아까 바닥에 흥건하던 피가 생각났고,

난 재빨리 양이 많은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럼 이미 밤이고 하니 오버나이트 사가시면 되겠네요”

“아..네 감사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구매한 생리대..

난 마치 엄청나게 큰일을 해냈다는 생각에 혼자서 뿌듯해 하면서

민지의 집으로 가 초인종을 눌렀다.



“어..왔냐?”

“여기..”

“잘했으~ 또 못 사오고 어리버리 떨 줄 알았더니..”

“그 정도야 뭐...”



난 괜시리 잘 사왔다는 말에 우쭐하다 민지의 안색을 살폈다.

아까보다 확실히 좋아진 표정..



“아까보다 좀 낫네. 병원 갔다 오길 잘했네..얼른 자라. 몸도 안 좋은데..”

“어...야..”

“왜?”

“고맙다고...”

“어?”



뭐라 대꾸도 하기 전에 문이 닫힌다.

이건 뭐 츤데레도 아니고 자기 할 말만 하고..

고마우면 당당하게 고맙다고 할 것이지..





하지만 왜 일까..처음으로 민지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 것일까..

괜히 기분이 좋고, 안색이 좋아진 걸 보니 마음이 놓인다.



‘오늘은 편히 잘 수 있겠지....’



순간 어제 민지를 안고 밤을 샜던 장면이 떠오른다.

민지의 가슴이 닿았던...



‘내가 무슨 생각을...! 미쳤나봐..’



민지가 고맙다는 말 한 마디를 해서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걸까 라는 생각에 난 순간

소름이 돋았다.



‘설마..나를 자기 마음대로 쥐었다 폈다 하려고 고맙다는 말을 한 게 아닐까? 김민지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안 돼..그런 고맙다는 호의 섞인 말에 속아 넘어갈 수 없지..역시 경계해야 할 아이야..내가 잠시 마음이 풀어진 거야.. 고맙다는 말에..’



난 다시 한 번 민지를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들어갔다.

자꾸만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지우려 노력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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