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람을 만나게 된 사연 - 9부
2018.08.07 07:00
언덕길을 허겁지겁 내려와 버스정류장에 도착해서야 숨을 고를수 있었다.
난 그길로 고향으로 향했다. 고향가는 버스안에서 눈을 붙이면서 하룻동안의
일을 천천히 되새겨 볼수가 있었다.
피끓는 젊은 남녀가 하룻밤을 엔조이하며 보내는것이야 별 죄가 되지는 않겠지만
어제 내가 한 행동은 어떤 변명을 늘어놓아도 결코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죄악
이라는 생각에 고향을 내려 가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큰 멍에를지고 있었다.
다시는 중만이 형님을 볼수가 없으리라....
내 고향은 제천이다. 제천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하는 촌 구석이다.
내가 고향에 내려간다고 해서 반겨줄 사람은 누구 한명도 없다.
일가 친척이라고 해 보았자 사돈에 팔촌처럼 아주 먼 촌수에 사람이 있을뿐이다.
난 버스에서 내려 제천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하루에 몇대밖에 없는 버스
첫차를 타고서야 고향에 도착했다. 도착 후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 산소에
성묘를 하고 벌초를 한다음에 봉화로 향했다.
내 유일한 피붙이 누나가 봉화에 시집가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는 세 살터울인데 할머니와 누나,,,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살다가 18살에 팔려가듯
시집을가서 지금은 애만 넷을 낳고 죽어라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두 살때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우리 두 남매를 키우며 사셨는데 살림이 너무나 궁하여 나도 중학교
이후로는 내가 벌어서 직훈을 다녔고(고등학교 인정됨)..졸업과 동시에 군대에 하사관으로
지원하여 들어갔다. 최소한 군대가면 굶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할머니는 내가 직훈 1년때...누나가 시집간지 2년만에 한 많은 생을 마감하셨다.
<제 이야기는 추후에 기회가 나면 다시 하기로하고...>
봉화에서 본 누나는 서른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정도로 늙어있었다.
매형은 마흔이 조금 넘었을테인데 거의 환갑에 가까울정도로 보인다.
남매라고 하지만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누나 시집가고 합쳐보았자 다섯 번정도
만난 것이 전부여서인지 어딘지 모르게 서먹한감이 느껴졌다.
산촌이 다 그러하듯 먹고 살기가 빠듯한 것 같았다.
매형은 듬성듬성 빠진이를 내보이며 탁주한잔 하고 가라고 했지만 난 누나얼굴
보았으니 됐다고 하며 서둘러 누나집을 나섰다.
나오면서 누나에게 10만원을 꼭 쥐어주었는데 누나는 그 돈을 보고 떠나는 내 등뒤에서
소리죽여 울고만 있었다.
마땅히 갈데가 없던 나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동안 못만났던 친구들을 만나고 모아두었던 돈을 서울 가까운곳에있는 전답을
사둔다음 다시 한국을 떠나기위해 준비를 하였다.
이번에는 도저히 사우디로 가지를 못할 것 같았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중만이 형님을 뵐수가 있겠는가?
난 다행히 대수로 공사가 시작되고 있는 리비아로 2년간의 계약을하고 갈수가 있었다.
리비아에 도착해서 중만이 형님에게 간단한 안부편지를 보냈다.
여차저창해서 사우디로 가지는 못하고 리비아로 왔다고..
그때가 84년하고도 12월쯤 이었었다.
계약기간이 2년이었지만 조금 더 늦게서야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수 있었다.
한국은 아시안게임을 치르고 정국이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던 87년 3월이었다.
서울시내는 온통 최루탄으로 가득했으며 밤거리는 흥청만청대고 있었다.
난 벌어온 돈을 다시 전에 사두었던 땅 근처 포도밭을 샀다.
그리고 서울에 모 백화점 전기실에 취직이되어 다니면서 지내고 있을때였다.
성실하다고 소문이나서 이곳 저곳에서 중매를 서겠다고 했는데 일가친척 하나없는
천애고아와 같은 신세라는 것을 알고서는 맞선을 본 후 내게 쉽게 호감을 주는 여자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 나이 서른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느 날 29살 먹은 여자와 맞선을 보았다. 내 처지를 알고서도 괜찮다며 내게 달려들던
여자가 그리 싫지는 않았다. 그 여자와 몇번의 데이트를 하고 우린 내 자취방에서 첫
관계를 가졌다. 당시 나와 여자는 약간의 술을 한 상태였고 은연중에 결혼을 약속한
사이나 마찬가지여서 누가 먼저라고 할것없이 서로를 원하게 되었다.
그때 형수와 관계를 가진 이후에 처음이었다.
물론 직업여성들과 관계는 한달에 두 번꼴로 가졌지만 직업여성이 아닌 여자와는 형수
이후에 처음이었다. 하지만 여자와 섹스를 하면서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아주 평범한 섹스를 한 것이었다.
여자는 섹스후에 내게 기대어와서 "이제 나는 덕구씨 여자에요.."하며 말을 붙여왔다.
숫처녀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모를 서글픔이 밀려왔다.
그래...어차피 나같은 놈이 결혼한다는것도 호강인데..하며 약간은 자포자기적인 심정을
가지고 "이 여자와 결혼하자"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5월 말정도로 기억이 되는데 전에 외국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들과
우연히 연락이 닿아서 영등포에서 만나기로 하여 나가게 되었다.
혹시나 중만이 형님이 나오면 어쩔까 신경이쓰여 물어보았더니 중만이 형님은 이 모임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여 부담없이 나갈수가 있었다.
그런데 모임의 술자리에서 중만이 형님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한동안 중만이 형님과
호형호제 했던 나로서는 너무나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중만이 형님이 오늘 내일 한다니..."
난 중만이 형님의 소식을 알고있던 남자로부터 자세히 말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 사람으로부터 들은 말은 이러했다.
그러니까 내가 리비아로 떠난 후 얼마지나지 않아 형은 사우디에서 한국으로 돌아올수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남편을 외국으로 보내놓고 춤바람이 난 여편네들이 많다고해서
형님은 다시 외국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않고 한국에서 건설현장에 나가면서 월급받고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그러지 않아도 혈압이 많았던 사람이 무슨일인지는 몰라도
뇌출혈로 쓰러져 지금은 반신불수가 되어 누워있는데 쓰러진지 한달만에 중만이 형
아내가 재산을 모두 가지고 도망을가서 지금은 딸이 공장을 다니며 부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 이번에는 야설이 아니라 좀 거시기한 내용이 되어 버렸네요...실망하셨다면 죄송..죄송..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다음회부터 시작될 것이니 양해부탁 합니다.***
난 그길로 고향으로 향했다. 고향가는 버스안에서 눈을 붙이면서 하룻동안의
일을 천천히 되새겨 볼수가 있었다.
피끓는 젊은 남녀가 하룻밤을 엔조이하며 보내는것이야 별 죄가 되지는 않겠지만
어제 내가 한 행동은 어떤 변명을 늘어놓아도 결코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죄악
이라는 생각에 고향을 내려 가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큰 멍에를지고 있었다.
다시는 중만이 형님을 볼수가 없으리라....
내 고향은 제천이다. 제천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하는 촌 구석이다.
내가 고향에 내려간다고 해서 반겨줄 사람은 누구 한명도 없다.
일가 친척이라고 해 보았자 사돈에 팔촌처럼 아주 먼 촌수에 사람이 있을뿐이다.
난 버스에서 내려 제천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하루에 몇대밖에 없는 버스
첫차를 타고서야 고향에 도착했다. 도착 후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 산소에
성묘를 하고 벌초를 한다음에 봉화로 향했다.
내 유일한 피붙이 누나가 봉화에 시집가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는 세 살터울인데 할머니와 누나,,,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살다가 18살에 팔려가듯
시집을가서 지금은 애만 넷을 낳고 죽어라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두 살때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우리 두 남매를 키우며 사셨는데 살림이 너무나 궁하여 나도 중학교
이후로는 내가 벌어서 직훈을 다녔고(고등학교 인정됨)..졸업과 동시에 군대에 하사관으로
지원하여 들어갔다. 최소한 군대가면 굶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할머니는 내가 직훈 1년때...누나가 시집간지 2년만에 한 많은 생을 마감하셨다.
<제 이야기는 추후에 기회가 나면 다시 하기로하고...>
봉화에서 본 누나는 서른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정도로 늙어있었다.
매형은 마흔이 조금 넘었을테인데 거의 환갑에 가까울정도로 보인다.
남매라고 하지만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누나 시집가고 합쳐보았자 다섯 번정도
만난 것이 전부여서인지 어딘지 모르게 서먹한감이 느껴졌다.
산촌이 다 그러하듯 먹고 살기가 빠듯한 것 같았다.
매형은 듬성듬성 빠진이를 내보이며 탁주한잔 하고 가라고 했지만 난 누나얼굴
보았으니 됐다고 하며 서둘러 누나집을 나섰다.
나오면서 누나에게 10만원을 꼭 쥐어주었는데 누나는 그 돈을 보고 떠나는 내 등뒤에서
소리죽여 울고만 있었다.
마땅히 갈데가 없던 나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동안 못만났던 친구들을 만나고 모아두었던 돈을 서울 가까운곳에있는 전답을
사둔다음 다시 한국을 떠나기위해 준비를 하였다.
이번에는 도저히 사우디로 가지를 못할 것 같았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중만이 형님을 뵐수가 있겠는가?
난 다행히 대수로 공사가 시작되고 있는 리비아로 2년간의 계약을하고 갈수가 있었다.
리비아에 도착해서 중만이 형님에게 간단한 안부편지를 보냈다.
여차저창해서 사우디로 가지는 못하고 리비아로 왔다고..
그때가 84년하고도 12월쯤 이었었다.
계약기간이 2년이었지만 조금 더 늦게서야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수 있었다.
한국은 아시안게임을 치르고 정국이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던 87년 3월이었다.
서울시내는 온통 최루탄으로 가득했으며 밤거리는 흥청만청대고 있었다.
난 벌어온 돈을 다시 전에 사두었던 땅 근처 포도밭을 샀다.
그리고 서울에 모 백화점 전기실에 취직이되어 다니면서 지내고 있을때였다.
성실하다고 소문이나서 이곳 저곳에서 중매를 서겠다고 했는데 일가친척 하나없는
천애고아와 같은 신세라는 것을 알고서는 맞선을 본 후 내게 쉽게 호감을 주는 여자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 나이 서른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느 날 29살 먹은 여자와 맞선을 보았다. 내 처지를 알고서도 괜찮다며 내게 달려들던
여자가 그리 싫지는 않았다. 그 여자와 몇번의 데이트를 하고 우린 내 자취방에서 첫
관계를 가졌다. 당시 나와 여자는 약간의 술을 한 상태였고 은연중에 결혼을 약속한
사이나 마찬가지여서 누가 먼저라고 할것없이 서로를 원하게 되었다.
그때 형수와 관계를 가진 이후에 처음이었다.
물론 직업여성들과 관계는 한달에 두 번꼴로 가졌지만 직업여성이 아닌 여자와는 형수
이후에 처음이었다. 하지만 여자와 섹스를 하면서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아주 평범한 섹스를 한 것이었다.
여자는 섹스후에 내게 기대어와서 "이제 나는 덕구씨 여자에요.."하며 말을 붙여왔다.
숫처녀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모를 서글픔이 밀려왔다.
그래...어차피 나같은 놈이 결혼한다는것도 호강인데..하며 약간은 자포자기적인 심정을
가지고 "이 여자와 결혼하자"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5월 말정도로 기억이 되는데 전에 외국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들과
우연히 연락이 닿아서 영등포에서 만나기로 하여 나가게 되었다.
혹시나 중만이 형님이 나오면 어쩔까 신경이쓰여 물어보았더니 중만이 형님은 이 모임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여 부담없이 나갈수가 있었다.
그런데 모임의 술자리에서 중만이 형님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한동안 중만이 형님과
호형호제 했던 나로서는 너무나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중만이 형님이 오늘 내일 한다니..."
난 중만이 형님의 소식을 알고있던 남자로부터 자세히 말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 사람으로부터 들은 말은 이러했다.
그러니까 내가 리비아로 떠난 후 얼마지나지 않아 형은 사우디에서 한국으로 돌아올수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남편을 외국으로 보내놓고 춤바람이 난 여편네들이 많다고해서
형님은 다시 외국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않고 한국에서 건설현장에 나가면서 월급받고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그러지 않아도 혈압이 많았던 사람이 무슨일인지는 몰라도
뇌출혈로 쓰러져 지금은 반신불수가 되어 누워있는데 쓰러진지 한달만에 중만이 형
아내가 재산을 모두 가지고 도망을가서 지금은 딸이 공장을 다니며 부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 이번에는 야설이 아니라 좀 거시기한 내용이 되어 버렸네요...실망하셨다면 죄송..죄송..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다음회부터 시작될 것이니 양해부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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