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친사랑 세 이야기
2018.08.08 04:50
첫 얘기
그 당시엔 환경이 그랬다. 내 방, 네 방, 따로 따로 하나씩 갖고 문 잠그고 자기 사생활 지키며 산다는 건 그림도 그리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6.25 난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방 한 칸에서 부모 자식은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3대가 엉켜 사는 집도 비일비재했다.
우리 집은 아들 둘에 딸이 셋이었는데 형님은 일찌기 서울 유학 중이었고 남자인 나 하나에 누이 셋이 한 방을 썼다. 나야 어렸으니까 큰 불편을 몰랐지만 누이들의 불편이 오죽 했겠나.
우리 집에서 겨우 몇 백 미터 거리에 이모네 집이 있었다. 우리나 그쪽이나 전쟁통에 가장이 사망하여 홀어머니에 자식들 뿐이었는데 이모 님 댁은 딸만 셋이었다. 둘은 장성하여 직장을 다녔는데 직장이 있는데서 생활을 했는지 집에는 가끔씩 왔고 그 큰 일본식 집에 이모와 막내딸인 당시 나보다 한 살 위인 고1의 이종누이 둘이서만 덩그러니 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자주 놀러 갔고 나중에는 이모의 권유에 따라 나는 이모 님 댁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이모는 내가 누이보다 한 살 아래라 그랬는지 어린애 취급을 하여 누이와 같이 자는 것을 전혀 개의하지 않았다.
누이인 나영이와 나는 아주 뽕짝이 잘 맞아 재미있게 잘 지냈다. 학교에 갔다 오면 서로 학교에서 재미 있었던 이야기에 열을 올렸고 사춘기였던 우리는 서로 관심을 가졌던 남녀 학생에 대해서도 감춤 없이 얘기를 하곤 하였다. 그때 우리가 살던 안양은 아주 작은 도시였기 때문에 어느 학교 누구하면 다 알 정도였었다.
그때 나영이가 나보다 한 살 위였지만 성적으로는 내가 위였다. 순진했던 그녀에 비해 나는 그 나이에도 자위행위의 경력이 5 년쯤 된 조숙아였던 것이다.
그 나이에 어떻게 5 년 전부터 자위를 할 수 있느냐? 남자의 자위는 누가 가르쳐서 배워지는 게 아니고 자연적으로 알게 또는 하게 되는데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자위를 했다. 처음엔 손으로 자지를 자극해서 한 게 아니라 새벽녘에 자연스레 조조발기가 된 상태에서 엎드린 채로 발기된 자지를 이불이 깔린 바닥에 비벼서 오르가즘에 오르곤 하였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정액을 최초로 분출한 게 중1 말이었으니까 4학년 때부터 근 3년간 정액을 분출함이 없이 마른 오르가즘에 올랐었다는 사실이다. 신기한 건 정액이 쏟아지느냐에 관계없이 절정의 기분은 똑 같다는 거였다.
새벽엔 바닥에 자지를 비벼서 했고 낮엔 책상이나 옷장 등의 모서리에 비벼서 절정에 올랐다. 하루에도 수도 없이 그 짓을 했다. 많게는 하루에 열 번도 더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니 같이 잠을 자면서도 나영이(그때는 서로 이름을 불렀었다)는 나를 의식 않고 편하게 잠에 들곤 했는데 나는 그렇지가 않았다. 여자가 옆에 있으니 자꾸 자지가 서서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처음 얼마간은 나 딴에는 나영이 모르게 자위(당시엔 핸드플레이라고 했음)를 해서 까부러지고 난 다음에야 잠을 자곤 했다. 나 딴이라고 한 것은 나는 나영이가 모를 줄 알았는데 나중에 듣고 보니 그녀는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다 알았다는 것이다. 단지 나한테 방해가 될까봐 자는 척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옆에 실물이 있는데 어찌 계속 자가발전만 하겠는가. 조금 지나서는 자다가 뒤척이는 척 하며 잔뜩 꼴린 자지를 나영의 손에 비비기 시작했고 조금 더 있다간 그녀의 손을 오무려 주며 내 자지를 쥐게 했다. 내가 그렇게 해도 그녀는 숨을 고르게 쉬며 자는 척 했지만 영악한 나는 그녀가 자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내 자지를 쥐고 있는 손의 미세한 경련과 배어나오는 땀을 어이 내가 몰랐겠는가.
남산 오르면 그 다음은 청계산 아닌가. 그녀의 손에 내 자지를 쥐어주곤 내 손은 슬슬 그녀의 보지 쪽으로 옮겨갔고 처음엔 팬티 위로 만지다 그 다음엔 팬티 속으로 기어들 게 되었다.
재미있는 건 맨 처음엔 여자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로 꼴려서 자가발전을 하여 쌌고 그 다음엔 내 자지를 그녀의 손에 비비기만 해도 쌌고 또 그 다음엔 내 손이 그녀의 보지 그것도 팬티 혹은 고쟁이 위로 만지기만 해도 꼴려서 쌌는데 그게 자꾸 진행될수록 싸기 위해 보다 큰 자극을 필요로 하더라는 것이다.
손으로 진짜 보지를 만지고 나니 그걸 눈으로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자는 척하며 하던 애무가 이미 상당히 많이 진척되었음에도 팬티를 벗기는 일은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팬티를 벗기려 하니 그녀가 자는 척 하며 내가 못 벗기게 자기 팬티 끈을 움켜쥐는 것이다. 나는 잔뜩 발기된 내 자지를 팬티끈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등에 비비며 입에 키스를 하곤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보기만 할 게, 보고 싶어 미치겠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오물대더니 팬티를 잡았던 손을 풀었다. 나는 잽싸게 팬티를 내리고 머리를 보지 앞에 대고 그렇게도 보고 싶던 보지를 눈이 뚫어지게 꼬나봤다.
솔직히 내가 그렸던 모양과 많이 달랐다. 나는 보지가 여자 얼굴처럼 예쁘게 생기고 구멍도 입처럼 뻥 뚤렸으려니 생각했는데 의외로 너무 단순하게 생기고 구멍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도 신기한 건 두덩에 난 무성한 털과 위에서부터 상당히 길게 찢어진 계곡이었다. 색깔도 의외로 거무티티한 게 이상했다.
나는 먼저 손가락으로 계곡을 벌려 보았다. 속도 생각보다 간단한 구조였다. 혀를 대 봤다. 찌릿한 맛이 들었다. 밑에 구멍이 작게 벌어져 보였다. 혀를 댔다. 그러자 나영이가 두 손으로 자기 보지를 가렸다. 나는 몸을 올려 그녀를 껴안고 자지를 그녀의 보지 위에 막 비볐다. 순식간에 정액을 쏟았다. 그녀가 당황하며 돌아누우며 자기 팬티로 정액을 닦았다. 정액이 보지 속으로 흘러 들어갈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 전까지는 그녀의 손바닥이나 허벅지에 싸곤 했다. 사실 싸고난 정액을 처리하는 것도 큰 일이었다. 그땐 크리넥스도 두루마리 화장지도 없었던 시절이라 기저귀나 걸레 같은 헝겊으로 닦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것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나영이가 자는 척 하기는 그때까지도 계속 되었다. 우리는 낮에는 전혀 밤의 얘기를 하지 않았고 온전히 그녀는 누나였고 나는 착하고 순진한 동생이었다. 서로 어색함도 없었고 깜찍하게도 우리는 애무를 시작하기 이전과 똑같이 킬킬대며 지냈다.
그러다 밤이 되면 나는 다시 짓꿎은 남자로 화해 그녀를 벗기고 키스하고 애무하고 자지를 몸 전체에 비비고 그리곤 몸 위에 싸고 했다. 그녀도 나의 그런 행동을 기다린다고 나는 내 멋대로 생각했다. 언제 박았을까?
끝까지 나영이가 자는 체 했지만 우리 둘의 대화가 그녀의 주도로 매일 같이 이어졌다. 그녀 책상의 오른 두 번째 설합 맨 밑바닥에 그녀가 편지를 써 두면 그걸 내가 보고 답장을 써서 그 밑에 놓곤 했던 것이다.
나영이는 그 편지에 거의 매일 같이 박는 건 절대 안 된다. 그러다 애라도 배면 너하고 나하고 둘 다 죽는다라는 말을 써서 나를 세뇌시켰다. 그래도 한 살이라도 많다고 철이 들었던 것이다.
그녀의 애절한 호소가 나의 저돌적인 도발을 애무에서 그치게 했다. 아니 그녀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몇 번인가 내 좆을 그녀의 구멍에 박으려고 용을 썼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녀는 참으로 의지를 갖고 내 좆의 삽입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 대신 당시로서는 어른들도 하지 않던 오랄을 해 주었고 나에게도 자기 보지를 빠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너무 박고 싶으면 그녀를 엎드리게 해 엉덩이 사이에 내 자지를 박는 형상으로 펌핑 동작을 해 사정을 했다. 가끔은 그녀의 크지 않은 젖에다 비벼서 싸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남녀가 잠자리에서 할 건 다 한 것 같다.
그녀와의 근 1년에 걸친 아름다운 관계는 내가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을 해 서울로 이사를 함으로 써 끝이 났다.
두 번째 얘기
고등학교엘 들어와 시작하게 된 서울생활도 옹색하기 짝이 없었다.
금오동 산동네는 지금도 작은 집들로 빼곡하지만 그 때는 대충 못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산동네였다.
우리가 세 들어 살던 집은 그래도 2 층집이었는데 그 동네가 다 그렇듯이 화장실이 없고 동네 전체가 쓰는 공중변소를 이용해야 했다. 아침에 일을 보려는 사람들이 줄을 선 풍경은 티비 연속극에서 가끔 소개가 되어 여기선 언급을 안 한다.
변소가 머니 다들 요강을 썼는데 건물이 엉성해 위층에서 여자들이 요강에 오줌을 누면 그 소리가 바로 옆 주전자 물을 컵에 붓드시 그렇게 자세히 들리곤 했다. 나중에는 오줌소리만 듣고서도 첫째 딸이 일을 보는지 둘째 딸이 일을 보는지 알 정도였다.
사는 사정이 비슷해도 막내고모가 사는 동대문 밖의 숭인동은 금호동보다는 조금 나았다. 고모부가 신사복을 만드는 기술이 있어 셋집에 양복점을 내고 계셨으며 그 안에 작은 방 한칸과 옹색한 부엌이 살림집 구실을 했다. 그 집엔 고모 내외와 나하고 동갑인 사촌과 한 살 아래 여동생 네 식구가 살고 있었다.
사촌과 나는 아주 친하게 지냈는데 여름방학이라고 내가 그 집으로 놀러를 갔다. 고3 때였다. 그런데 가보니 사촌이 학교에서 강원도로 농촌계몽을 떠났다는 것이다. 당시엔 전화가 부자집에만 있어 연락 없이 찾아가는 게 흔한 일이었다. 그 날로 돌아올까 하다가 온 김에 며칠 놀다 가라고 해서 그냥 머물기로 했다.
밤이 되니 고모 내외는 양복점의 재단대 위에서 주무시고 나와 여동생이 안에 있는 방에서 자게 되었다. 재단대와 방까지는 대여섯 발자국 정도의 거리였다.
여동생과 학교 얘기, 대학 얘기 그리고 약간의 이성 얘기를 재미있게 하다가 잠이 들었다. 잠결에 여러 사람들이 몰려 두런대는 소리에 잠이 깼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깜감한 속에 바로 방 밖에서 고모와 고모부가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예사 이야기가 아니었고 말소리 숨소리가 섞여 들리는 게 심상치 않았다. 나는 즉시 두 어른이 섹스를 하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누군가. 왕년에 이종누이와 거의 1년에 걸쳐 사랑을 했던 유경험자 아닌가. 순식간에 자지가 용트림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얼마 만인가. 그 달콤한 소리. 별안간 누이의 나신이 눈에 어른거렸다. 옆에 있으면 올라타는 건데. 그런 생각을 하고 옆을 보니 아 글쎄 여동생이 이불을 걷어차고 허연 허벅지를 내 보이고 자고 있는 게 아닌가.
평소 나이보다 어려 보이고 귀여워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허벅지와 반쯤 드러난 가슴을 보니 다 큰 처녀였다. 그녀를 쳐다보며 입맛을 다시는데 아무래도 그녀의 모습이 조금 어색해 보였다. 고개는 반대쪽인데 왼 무릎을 올려 거의 팬티가 보이게 했고 오른 손은 내 몸에 닿을 정도로 손금을 보라는 듯 펼쳐져 있었다. 난 혹시 그녀가 나처럼 잠이 깨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밖에서는 아까보다 조금 더 높은 톤의 숨소리가 전해져 왔다. 몸을 그녀 쪽으로 돌리며 슬그머니 손을 잡았다. 내가 조금 힘을 주어 잡는 순간 그녀도 내 손을 잡은 부분에 힘을 가하는 게 느껴졌다.
그녀도 깨어 밖에서 들려오는 자기 부모님의 예쁜 소리에 나처럼 흥분을 느낀다고 생각을 했다. 하기사 남자가 바로 옆에 누어 있으니 그럴 수도 있으려니 생각했다.
잡은 손을 끌어 다짜고짜 내 발기물 위에 놔주었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나는 주저 없이 내 자지를 팬티에서 꺼내 그녀의 손을 벌리게 하고 내 것을 쥐게 하고 내 손을 그녀의 손위에 얹고 꽉꽉 눌렀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깡이었는지. 그녀의 입에 내 입을 대고 키스를 했다. 그녀가 입을 꽉 다물었다. 혀로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하고 오른 손을 그녀의 팬티 속에 넣고 보지를 잡았다. 너무 일이 빨리 진행된다 생각했지만 그 순간 이상하게 흥분이 되어 본능적으로 행동했다. 손가락을 그녀의 보지구멍에 넣었다. 촉촉했다. 밖에서 고모의 비명소리가 낮게 연속으로 이어졌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녀의 팬티를 찢듯이 벗겨내고 그대로 올라 타 박았다. 의외로 쉽게 삽입이 되었다. 두 손으로 그녀의 양 볼기를 잡고 미친 듯이 펌핑을 했다. 내 자지가 박힐 적 마더 쩌버덕 소리가 들렸다. 그녀와 나의 숨소리도 심상치 않게 높음을 느끼며 우리가 내는 소리가 밖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겁이 났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순간 그녀의 소리가 나를 정신 차리게 했다.
"안에다 싸면 안 돼, 오빠"
나는 정신을 차리고 속도를 줄여 서서히 펌핑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폭발하려는 감을 잡고 자지를 빼 그녀의 허벅지에 쌌다. 싸면서 어찌나 그녀를 꽉 끌어안았던지 두 다리에 쥐가 나 죽는 줄 알았다.
그녀가 뒤처리를 다 해 주었다.
"미안해, 진희야"
그게 내가 한 말의 전부였다.
그것이 진희와 나의 첫 번 째이자 마지막 사랑행위였다.
세 번째 얘기
법과대학이 가장 인기 있는 대학이던 시절 나는 운 좋게 법대생이 되었고 잠시의 기쁨 후에 남과 같이 고시의 스트레스 속에 나날을 보냈다.
법대생활은 지극히 단조롭고 메마른 쳇바퀴였다. 개강 중에는 강의실과 도서관 그리고 방학 중에는 끼리끼리 연고가 있는 절에 들어가 밤낮 없이 수많은 책들과의 씨름 그것이 전부였다.
절 생활이 이골이 나던 4학년 때 나는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시골 농가를 수배했다. 워낙 태생이 서울 근교인데다 일가친척도 모두 서울과 인근에 살아 연고 있는 집을 찾기가 어려웠다.
내가 시골집을 찾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막내 이모가 자신의 외가 쪽 인척이 원주 근처에 살고 있는데 마흔 살 먹은 애 엄마와 초등학교 다니는 딸 단둘이 살고 있어 공부하기 딱일 거라며 거길 알선해 주었다.
아직도 이런 데가 있나 싶은 촌이었다. 전기가 안 들어 왔었으니 더 말해 뭐하랴. 동네의 가구 수도 한 열댓 될까 싶은 한촌이었다. 정말로 공부하는 데는 딱이었다.
아주머니(당시 그 호칭 밖에 마땅한 게 없어 그렇게 불렀다)는 소위 처녀과부였다. 결혼 두 달만에 군인이었던 남편이 지뢰를 밟아 전사하고 유복녀 하나를 나아 가르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이 그곳 출신이라 그냥 거기서 살고 있는데 애가 고등학교 들어갈 때쯤 도시로 갈 생각이라 했다.
그 해 여름은 열대야가 며칠 씩 계속될 만큼 무더웠다. 저녁 8시쯤 되면 호롱불을 켜야 되고 안방은 10 시전에 불이 꺼졌다.
밤 열 시 좀 넘어 나는 펌푸물로 샤워를 하곤 하였다. 그곳 펌푸물은 정말로 차고 시원했다. 정신이 번쩍 나고 잠이 멀리 달아나 공부하기 좋았다. 안방에 불이 꺼진 후니까 그리고 사방 어디에서도 볼 사람이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옷을 훌러덩 벗고 물을 쫙쫙 끼얹곤 하였다.
그런데 며칠 후부터 나는 누군가가 내가 목욕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안방 문틈에서 아줌마의 반짝이는 눈빛을 발견한 것이다.
여자라는 것을 잊고 지내다가 여자의 눈을 의식하니 이상하게 물건이 발기가 되었다. 신기한 반응이었다. 나는 처음엔 재미로 안방에서 발기된 자지가 잘 보이도록 각도를 잡아 서서 물을 끼엊곤 하였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는 짖꿎게 거기에 비누칠을 해 자위하는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발딱 선 좆을 자랑스레 흔들며 안방문을 지나쳐 내 방으로 갔다. 느낌이 그래선가 내가 안방문을 지나칠 때 낮은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녀가 나를 본다는 생각을 하기 전까지는 그녀를 전혀 여자로 생각 안 했었는데 별안간 그 순간부터 그녀가 여자로 보이고 새삼 몸매가 섹시하다는 생각이 드는가하면 그녀를 보거나 생각하면 슬그머니 물건이 대가리를 들곤 하는 것이었다.
공부에 열중을 해야 하는데 자꾸 좆이 서서 집중이 되지 않았다. 빼면 나으려니 하고 자위행위를 했지만 완전히 가라앉지를 안았다.
나는 속으로 이 집을 뜨던지 아님 그녀를 먹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먹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주머니가 딸과 같이 잠을 자기 때문이었다. 애가 놀러 나가 있는 한 낮이 기회였지만 그럴 용기는 없는 나였다. 속으로 나보다 나이를 더 먹은 그녀가 먼저 움직여 주길 바랐지만 남자관계가 없던 그녀한테 그걸 기대한다는 건 무리지 라고 생각했다.
아침에 밥을 먹을 때 그리고 낮에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그녀는 전과 달리 얼굴이 벌게지곤 하였다. 나도 편안한 자세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에게 육체적 관심이 있다는 신호를 보내려고 애를 썼다.
셋이 밥을 먹다가
"정희는 방학인데 어디 놀러갈 데 없나?"
라고 아이한테 물어 본 것도 나름대로 그녀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우연히 던져본 그 말이 우리 사이의 역사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 다음날, 점심을 차려 내 방으로 들어서며 그녀가 묻지도 않는 말을 했다.
"우리 정희 이틀 동안 집에 없어요."
내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갔어요?"
"지 친구네 집에서 잔다구 해서 그러라고 했어요"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아줌마가 그 애한테 어디 친구집에라도 며칠 갔다 오라고 했단다.
아줌마가 나가고 나는 가슴이 뛰어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 내가 용감해야 돼. 내가 주저하면 안되지. 그녀는 자기가 할 일 다 한 거야.
몇 번을 다짐했다. 그리고 다시 밤 샤워 시간. 안방엔 전처럼 불이 꺼졌고 나는 전처럼 펌푸물을 끼얹었다. 천천히가 아니고 서둘러. 그리곤 내 방으로 가질 않고 벌거벗은 채 안방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갔다. 의외였다. 자는 척 하고 있으려니 했는데 그녀는 마치 첫날밤에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요 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내 꼴은 뭔가, 꺼떡이는 좆을 앞세운 채 홀딱 벗은 상태였으니. 멋쩍었으나 껌껌한 게 나를 살렸다.
나는 그녀를 세워 마치 늘 그랬기나 한 거처럼 그녀를 껴안고 키스를 했다. 전혀 저항이 없었으나 그녀는 아주 당황하고 서투른 몸짓을 보였다. 키스도 제대로 받지를 못했다. 서둘러 옷을 벗기고 그대로 껴안고 누었다. 내가 너무 서둘러 그랬나. 그녀가 한 마디 했다.
"저 해본지 너무 오래 되요. 살살 해주셔야 될 거 에요"
정말로 그녀의 보지는 처녀 그대로였다. 나는 천천히 한다고 했지만 너무 꼴려 서둘렀나 그녀의 보지가 내 자지를 제대로 받지를 못했다. 너무 아파해 멈칫하니 그녀가 밑에서 나를 껴안고 리드를 해 주었다. 그녀가 내 방망이를 잡아 구멍 입구에 대 주었고 나는 서둘러 엉덩이를 밀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삽입이 되었다. 질이 좁아 마치 손으로 내 물건을 움켜쥔 듯했다. 죽고 싶을 만큼 좋았다. 너무 좋아 열댓 차례 펌핑을 하고는 그대로 싸버렸다. 창피해 미안하다고 하니 괜챦아요 그리고 고마워요 라고 했다.
그 날 밤 우리는 한 숨도 자지 않고 씹을 했다. 열 번도 더 한 거 같았다. 나중엔 자지 끝이 아파서 더 할 수도 없었고 사정을 해도 나오는 게 없는 거 같았다.
잠에 빠졌다 깨어보니 오후 2시였다. 우린 점심을 먹고 다시 붙어 세 번을 했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다시 세 번을 더 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데도 나는 그녀의 서방처럼 굴었고 그녀는 깍듯이 존대를 쓰며 서방님 대하듯 했다.
이틀 후 정희가 오고 나서 우리는 약간의 제한을 받았지만 그 애만 눈에서 벗어나면 아무 때건 어디서건 껴안고 만지고 그리고 박았다. 그녀는 아예 속옷을 입지 않아 치마만 들면 그대로 박을 수가 있었다. 부엌에서 밥하는 그녀를 뒤에서 안고 박았고 변소에까지 껴안고 가 내가 오줌을 누면 그녀가 내 자지를 잡아주고 그녀가 오줌을 누면 내가 어린여자 안아 쉬!하며 오줌 누이듯 그렇게 누게 했다. 그리곤 박았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웃기는 게 늘 같이 있으면서도 한 시간 정도 안 보면 보고 싶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어리게만 생각했던 정희가 눈치를 챈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걸 몰랐던 것이다. 셋이 아침을 먹다가 정희가 먼저 먹고 나가자 우리는 먹던 밥상을 밀고 그 자리에서 선 채로 박았다. 내 좆이 그녀의 보지를 채우는 순간 정희가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선 것이다. 그리곤 다짜고짜 악을 쓰며 울기 시작했다. 그때의 우리 몰골이라니.
아무튼 나는 그 날로 짐을 싸 그 집을 나왔다.
그러고 몇 년 후 내가 군에 근무할 때 휴가를 이용하여 며칠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녀와의 꿈 같은 사랑은 한 달도 채우지 못한 채 그때 그렇게 끝이 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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