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있었던 일 - 1부
2018.08.09 16:00
아내에게 남겨진 흔적. 1 (슬픈사랑)
여는글
어쩌다 늦게 들어간 날 간신히 눈을 비비며 일어나 힘겹게 문을 열어주고는 왜 늦었느냐고 묻지도 않고 다시 잠에 빠져드는 아내를 내려다보면 웬일인지 서글퍼지곤 한다.
아마도 나의 늦은 귀가보다도 더 급한 것이 아내에게 있거나, 아니면 여유롭기 때문이리라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내가 아내의 관심에서 멀어져가고 있다는 불안감이 더 크기 때문이다.
아내의 여유로움과, 나보다 앞서는 그 어떤 것(그것이 다른 사람이라면)을 빨리 보기 위해 방해받지 않고 서둘러 급한 잠에 빠져드려는 듯한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질투보다는 낮고, 이기보다는 한 차원 높은, 그러나 나 자신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느낌인데, 아내로부터 그러한 느낌이 있은 지 7년째가 되어가지만, 그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다.
그렇긴 하지만 그런 아내의 모습은 분명히 단계를 거쳐 나에게 경고되어진 것으로 기억된다.
전화를 자주 하지 않는다는 투정과, 머리 모양이 바뀐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서운해했고, 주말에 외출이 없는 것을 불평하더니, 회사에서 철따라 가는 야유회나 늦은 회식에도 참여하는 일이 잦아지기도 했다.
주말에는 테니스 동우회 모임에 참여했고, 피곤하다며 사우나에서 새우는 밤도 생겼다.
나를 향한 투정과 불만이 적어진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렇게 해가 거듭되며 나와 마찬가지로 아내 역시 직장생활에 경력이 쌓이면서 직책이 무거워져갔고, 늦은 밤까지 일하는 날이 있기도 했으며, 그런 날이면 웬일인지 막내처제가 불안해했다.
새벽이 되어 뽀얗고 깨끗한 얼굴로 들어와 화장만 고치고 출근하는 아내를 보며 울타리 한쪽이 허물어져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혼자서 고치기엔 너무 힘들었다.
지금이라면, 아내와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있다면, 이제는 정말 잘할 수 있을 텐데…….
퇴근하면서 찾아온 아내의 흰색 블라우스가 눈처럼 깨끗하고 하얘서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아내의 일기’(아내에게 남겨진 흔적)는 내 아내가 자신에게 있었던 과거의 일들을 비밀스럽게 기록해놓은 것을 내가 그녀의 노트북에서 옮겨놓은 것이다.
6년 전부터 대략 3년 정도의 경험을 적어놓은 것으로, 아내는 자기 노트북을 바꾸면서 이것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은데, 아마도 삭제하는 것을 잊은 듯하다.
특정인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원치 않아 등장인물들을 가명으로 썼으며, 일기 내용 중 시간과 장소 등도 수정하여 옮겼음을 밝혀둔다.
아내의 일기(아내에게 남겨진 흔적)?1
오전 외근을 마치고 회사로 들어가는 길에 편의점 앞에서 지역 정보지 몇 장을 버릇처럼 갖고 왔다.
사무실로 들어와 점심시간을 기다리며 자잘한 광고들이 몇 줄씩 나열되어 있는 정보지를 뒤적이는데, 특이해 보이는 광고가 눈에 띄었다.
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광고 문구였다.
만남…… 이벤트…… 절대 비밀보장!!
‘만남 이벤트? …… 절대 비밀보장이라니, 무슨 말이지……?’
간단하게 쓰여진 몇 줄이 고작이었지만, 제 딴엔 자기네 의도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해 보였다. 그런 류의 문구들 중 대부분은 유치하고 저속한 표현들 일색이긴 했지만, 그런 노력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무심코 지나치기엔 너무도 선정적이고 자극적이었다.
여성 무료……!
상류층 회원 다수 확보……!
강남 최고의 역사와 전통……!
허전한 생활의 무료함을 멋지게 탈출……!
겨울 찬바람을 막아줄 따뜻한 사랑……!
문구는 한정된 지면을 가득 메워서라도 어떻게든 회원을 확보하려는 듯 갖가지 선정적인 표현으로 가득했는데, 마지막 줄에서 남자는 무료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 여성회원 원장 직접 면접상담, 절대 미모 보장!
매일같이 눈에 띄는 광고라 무시해오던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눈에 뭐가 씌었는지 큼지막하게 눈앞을 가로막았다.
게다가 광고의 내용을 어렴풋이 상상하면서 가슴까지 쿵쾅거리는 나 자신을 느끼며 웃음까지 흘러나왔다.
‘그냥 한번 전화나 해볼까……?’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조용히 자기 할 일에 매달려 있는 눈치였다.
나는 표나지 않게 정보지에 나열되어 있는 몇 개의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입력한 다음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리고 회사 옥상에 있는 야외휴게소로 가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광고 문구를 실은 사무실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거기 이벤트 사무실이죠……?”
“예, 맞습니다. 그런데, 어디세요?”
“예, 저…… 광고 보고 전화 드렸는데요…….”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려왔지만 저쪽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와 억양은 그런 내 마음을 안다는 듯 차분하고 친절했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하는 분이시죠? …… 아, 그냥 참고하려고 그래요.”
“그냥 직장에 다니는데…….”
“아, 그러세요? 그럼 잠깐 나오실 수 있으세요? 어디세요, 지금?”
“예, 여긴 역삼동인데요.”
“어머, 그래요? 가깝네요, 여긴 강남역 근처예요. 오실 수 있죠?”
“예…… 근데 꼭 가야 하나요? 그냥 전화로 이야기하면 안 되나요?”
설명을 듣지 않아도 대략 어떤 내용일지 짐작이 가는 바라, 내 호기심을 들키는 것 같아 창피하고 수치스럽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방문을 요구해 신분이 노출될까봐 염려되었다. 순간적으로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고, 자칫 직장 동료들과 주변 사람들 입에 이 사실이 오르내리게 된다면……!
하지만 오랜 호기심과 알 수 없는 기대감이 그런 이성의 감각을 짓누르고 있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상대방은 그런 내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듯 더욱 적극적으로 나왔다.
“오셔서 저랑 잠깐 얘기를 나누시면 돼요. 어떤 분인지 제가 알아야 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어떤 스타일의 남성 분을 원하시는지도 알아야 되지 않겠어요? 전화로는 다 알 수가 없는 거잖아요? 잠깐이면 돼요. 처음이시니까 좀 망설여지시겠지만 다른 분들도 잘 오시는 걸요, 뭐. 아무 걱정 마시고 한번 들르세요.”
“예, 그렇군요……. 정확히 어딘데요, 위치가……?”
“예, 여기는요…….”
나는 곧 방문할 것처럼 전화를 끊고는, 걱정 말라는 그 여자의 말이 마음에 걸려 결국 찾아가지 못했다. 걱정을 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을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의 한 편으로 마음이 너무도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내 호기심을 참지 못한 나는 이튿날 출근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그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어제 그분이시죠?”
“예, 그런데…… 누구신지?”
“저…… 어제 전화하고…….”
“아, 어제 통화했던 그…… 직장에 다닌다고 하신……?”
“예…….”
“호호, 뭘 그렇게 불안해하세요? 다들 잘 오시는데……. 걱정 마시고 오세요. 비밀은 절대 보장되니까요, 호호호!”
“예, 그럼…….”
통화를 끝내고 오전 일과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몰랐다. 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녀가 일러준 대로 택시를 타고 직장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그 사무실로 향했다.
그녀가 강조한 피부 마사지실 간판이 걸려 있는 입구에 도착해 한참 동안 망설였다. 건물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과 시선이 마주치면 마치 내가 큰 죄를 짓다가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괜히 고개가 움츠러지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간신히 용기를 냈다. 그리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스무 개 남짓한 계단을 간신히 올라갔다.
벽이 회색으로 칠해진 사무실 문을 밀치고 들어가자 다섯 평 남짓한 공간에 놓인 책상 두 개와 응접 세트가 시야에 들어왔다.
실내는 제법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그런 분위기 탓인지 잔뜩 몸을 움츠러들게 했던 불안감은 어느덧 봄눈 녹듯 사라지고 있었다.
“아까 전화하셨던 경은 씨죠?”
“예, 안녕하세요……?”
“예, 어서 오세요. 세상에! 이렇게 직접 뵈니 너무 매력적이시네요, 호호! …… 전 김 실장이라고 해요.”
“예…….”
“않으세요. 커피 한 잔 드릴게요.”
“예…….”
이윽고 커피를 내온 그녀와 마주 앉아 있으려니 왠지 다시 낯설고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건네받은 커피 잔을 입에 대지도 못한 채 그냥 두 손으로 감싸쥐고 있었다.
자신을 김 실장이라고 소개한 여자가 물었다.
“어떤 광고지를 보셨어요?”
“예…… ○○○인데요…….”
“아, 그렇군요. 제가 참고하려고요. 근데…… 이벤트사 이용은 처음이신가 보죠?”
“예…….”
“그래요.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불안해들 하세요. 그렇지만 몇 번 만나보시고 나면 달라져요. 지금까지 다 그래요, 호호호!”
“예…….”
“결혼은 하셨어요?”
“3년 되었어요.”
“그렇군요. 남편께서 잘 못해주시나 보다, 그쵸……? 호호호!”
“아뇨…… 그이는…… 떨어져 계시거든요…….”
“어머나! 이렇게 예쁘신 분을 혼자 놓아두시다니, 호호호……! 사실 우리 사무실 여자 회원 분들 중 대부분이 그런 분들이세요. 잘 오셨어요.”
그녀는 수많은 여자들을 만나보았다는 듯 나를 안심시키고 편하게 해주기 위해 애쓰는 눈치였고, 나도 그리 싫지는 않았다.
사무실을 찾는 여자들 중 대부분이 나와 같은 처지의 유부녀들이라는 말에 적잖이 안심되었고 불안감도 어느 정도 누그러들었다. 그렇지만 ‘나 같은 처지’란 어떤 처지를 말하는지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경은 씨……. 경은 씨는 어떤 만남을 원해요?”
“예?”
“괜찮으니까 우리끼리 솔직하게 말해요. 만남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뭔데요?”
“예…… 첫 번째는 순수한 만남이에요. 그건 말 그대로 순수한 만남을 의미해요. 만나서 대화하고 차 마시고…… 애인처럼, 아니면 친구처럼 만나는 거죠. 물론 두 사람이 마음에 들 경우지만요…….”
“두 번째는요?”
김 실장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두 번째는…… 만나서 엔조이하는 만남이에요. 어차피 모르는 사람들이니 뒤탈도 걱정 없어요. 남자는 우리가 신분도 확인한,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물론 우리 회원이죠. 그리고 그런 만남은 약간의 대가도 받을 수 있어요.”
“대가라면……?”
“사실대로 말하면…… 만나서 즐기고 헤어지는 일회성 만남이에요. 남자는 그 대가로 여자 분에게 10만 원에서 15만 원 정도를 사례비로 주고요. 어때요, 해보실래요?”
“…….”
“만약 그런 만남이 싫으시면 순수한 만남으로 하셔도 되고요. 본인이 좋은 걸로 하세요……. 절대 강요가 아니니까…….”
“…….”
“거듭 말하지만,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우리 사무실은 그런 데 아니니까……. 그렇게들 많이 즐기세요. 그런데 경은 씨는 키가……?”
“예, 168이에요…….”
“어머! 어쩐지…… 아까 들어오시는데 훤칠하시고 늘씬하시더라니! 남자들이 좋아하겠어요, 호호호호!”
“뭘요…….”
“몸무게는 어떻게 돼요?”
“예, 요즘은 한 52쯤 될 거예요…….”
“좋아요, 아주 적당하죠. 에구! 난 살이 쪄서 누구 하나 거들떠도 안 봐요. 호호호호!”
“아직 예쁘신데요 뭐…….”
“후훗! 경은 씨에 비하면 할머니죠, 호호! 나이는 올해……?”
“서른두 살이에요.”
“어머, 좋아라, 너무 좋은 나이다……!”
“고마워요…….”
“저…… 경은 씨……?”
“예…….”
“어차피 남편 분과 그렇게 떨어져 계시다면 그렇잖아요……?”
“…….”
“괜찮으니까 한번 만나보세요. 남들도 다 하는데요, 뭐. 그런다고 남편이 알 것도 아닌데…… 안 그래요……?”
“그래도…… 좀…….”
“순수한 만남도 좋지만 기왕이면 즐기고…… 약간의 용돈도 받고…… 그게 좋잖아요……?”
“……글쎄요.”
“남자는 어떤 스타일이 좋을까요? 말해봐요. 우리끼리니까…….”
“…….”
“괜찮아요, 말해봐요. 거의 원하는 남자 분으로 맞춰드릴 수 있어요.”
“예…….”
“아무래도 깨끗하고 매너 있는 남자가 좋겠죠?”
“…….”
“유부남이 좋을까요…… 아니면 총각?”
“…….”
“그래요…… 내가 알아서 좋은 남자로 소개시켜 드릴게요. 걱정 말고 편하게 만나시면 돼요. 남자가 알아서 리드하니까. 그리고 만나서 헤어질 때 절대로 연락처 같은 건 주지 말고요. 혹시 모르니까……. 귀찮게 전화하면…… 알았죠? 오늘은 어떠세요? 괜찮죠?”
“……?”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나의 그런 침묵을 동의로 간주한 듯 그렇게 결정하고는 곧장 연락처와 만남이 가능한 시간과 장소 등을 물었다.
딱히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오늘 당장 누구를 만날 수 있겠느냐고 묻다니……!
한참 동안 망설인 끝에 내 휴대폰 번호를 일러주고 그곳을 나서는데, 김 실장이 등뒤에 대고 말했다.
“경은 씨, 즐거운 만남 가지세요.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곳을 빠져나온 나는 어떻게 사무실까지 돌아왔는지 몰랐다. 그리고 사무실로 들어와서도 방금 전 내가 무슨 짓을 벌이고 온 건지를 떠올리며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낯선 남자를 만난다……. 그러다가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쩌지? 설마……!’
이런저런 혼란스런 기분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 * *
그날 오후, 퇴근시간을 두 시간쯤 남기고 있을 무렵 갑자기 휴대폰에 호출번호가 찍혔다.
‘3325’, 점심 때 찾아갔던 사무실의 뒷자리 번호였다. 나는 즉시 사무실 밖으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예, 김 실장이에요. 경은 씨죠?”
“예.”
“잘 들어갔어요? 호호호! 그나저나 경은 씨는 정말 운이 좋은 것 같다, 호호호!”
“왜요?”
“저기…… 우리 회원 중에 점잖고 매너 좋은 분이 계신데, 오늘 만나고 싶으시데요. 경은 씨, 시간 괜찮다고 했죠? 한번 만나보세요.”
“저…… 어떤 사람인데요?”
“예, 나이는 서른아홉이고, 사업하시는 사장님이에요. 매너 좋으시고 너무 착한 분이세요. 키는 중간이고 잘생기셨어. 호호호! 경은 씨도 만나면 마음에 들 거야.”
“그래요…… 저…… 정말 괜찮을까요……?”
“그럼,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소개하는 거니까, 알았지?”
“그래도 좀…….”
“에이, 뭘 그렇게 걱정해? 오늘 만나보고 나중에 또 만나게 해달라고 조르지나 말아. 호호호!”
“예…….”
“퇴근이 6시라고 했죠? 6시 30분에 강남역에 있는 가나 커피숍으로 나와서 기다려요. 시간이 되면 카운터에서 경은 씨를 찾는 전화가 올 거야. 알았죠? 그럼, 데이트 잘해요. 호호호……….”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김 실장은 그렇게 일사천리로 일방적인 전달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말미에 진지한 말투로 ‘약속시간 잘 지키고’라는 말과 함께.
퇴근시간까지는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하지만 통화를 마치고 나자 내내 나는 불안한 심정으로 후회를 거듭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몇 시간 동안 같이 있어야 하다니……!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그건 그렇고…… 만나서 어쩐다……? 커피 마시고…… 무슨 얘기를 하지……?’
불안과 초조함으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런 기색을 눈치챘는지 옆자리의 미스 김이 문득 물었다.
“언니,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아무 일도…….”
마치 내 행동거지를 들키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란 나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서둘러 화장실로 갔다.
‘세상에……!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불안에 떠는 마음과 달리 화장을 고치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고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거울 속 얼굴에는 마음속처럼 그렇게 천박하거나 불안한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뻔뻔해 보이기까지 해 이게 진정 내 얼굴인가 하는 의아심이 들었다.
누가 봐도 매력적으로 보이는 나 아닌 다른 여자, 그녀가 천박하지 않은 세련된 컬러의 루즈로 입술을 그리고 있었다.
퇴근 후 그녀가 일러준 곳으로 나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려니 후회와 긴장, 알 수 없는 기대감으로 전신이 경직되어 얼어붙는 듯했다.
약속시간까지 아직 5분 정도 남아 있었지만, 그 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둘째 문제였다. 차라리 아무런 연락이 없어도 좋으니 상대방이 나타나주지 않기를 바랐다.
머릿속으로 온갖 갈등이 스쳐갔다.
‘목소리만 들어보고 맘에 안 들면 그냥 달아날까? …… 아님 지금이라도……?’
그런 내적 갈등의 순간도 잠시였다.
“김경은 손님, 전화 받으세요.”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여 멈칫거리다가 내 이름이 두 번 이상 불리는 창피는 피하고 싶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예…… 저는 신준식이라고 합니다. 김경은 씨 되시죠?”
“예, 제가…….”
“예, 나오셨군요……. 처음이시라는 말을 듣고 안 나오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만…….”
“…….”
“저는 지금 아래층에 있습니다……. 올라가겠습니다.”
“예…….”
“무슨 옷을 입고 계시죠?”
“남색 스커트에…… 밤색 니트요…… 창가 쪽이에요…….”
“예…… 알겠습니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와 내 앞에 앉은 사람, 신준식이라고 자신을 밝힌 남자는 175쯤 되는 키에 넉넉한 살집으로 둥글다는 인상을 주는 말쑥한 남자였다.
거부감이 드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음에 쏙 드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나름대로 예의를 차리는 남자라는 것, 무지막지한 남자가 아닌 것 정도는 봐줄 만하다라는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신준식입니다.”
“예…… 김경은이에요…….”
“반갑습니다.”
“예…….”
낯선 중년 남녀의 첫 만남.
일상적인 인사치레가 오가고, 주문한 차를 기다리는 동안 대화가 이어졌다.
자기는 결혼한 지 10년 차라는 것과, 9살짜리 아들과 6살 된 딸이 있다는 것, 아내에게 별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렇다고 무분별한 외도는 하지 않는다는 것 등등의 이야기가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가 나이를 물어 서른둘이라고 답하자 내 남편에 대해 물어왔다.
자기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러 나온 여자에게 남편에 대해 묻는 걸 보니, 그도 이런 일이 그렇게 자주인 것 같지는 않아 보여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무스탕 코트 깃 사이로 보이는 하얀 목이 깨끗해 보여 혹시라도 염려되는 감염에 대한 걱정이 조금은 적어지긴 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스스로를 의식하고는 갑자기 등뒤가 썰렁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남자가 자기는 이번 만남이 두 번째라고 말하더니, 내게 정말 처음이냐고 물어왔다.
조그만 소리로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다른 말을 덧붙일 수가 없었다. 나도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이런저런 우스갯소리를 해주면서 말 중간중간에 내 외모에 대한 칭찬도 잊지 않았다. 나의 긴장과 어색함을 풀어주기 위해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과 달리 차분한 마음이 되어 대화 도중 간간이 웃음을 보이기도 했지만, 가슴속에 자리잡은 갈등의 똬리는 어쩔 수 없었다.
대략 30분쯤 흘렀을 무렵 그가 배려하듯 말했다.
“가정주부이시니 시간이 많지는 않겠군요?”
“……예.”
“자, 그만 일어나실까요?”
그가 말했을 때 무엇에 홀린 듯 그를 따라나서는 내 모습을 깨닫고는 스스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남자의 차 안은 적당한 온도로 히터가 켜져 있고, 옆자리의 나를 의식해선지 잔잔한 음악까지 흘러나왔다. 예전에 자주 들었던 팝송이었는데,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봐도 곡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차를 운전하는 동안 내게 뭐라고 말했지만, 나는 한마디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해 있었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차들과 퇴근길 사람들을 바라보며 갈등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집에 가겠다며 차에서 내려달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잠실사거리쯤에서 우회전한 그가 차를 주차한 곳은 말로만 듣던 러브호텔들이 밀집되어 있는 골목이었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 내내 갈등하고 망설였지만 결국에는 그가 열어주는 차 문에서 나와 요란한 전구가 둘러져 있는 모텔 안으로 따라 들어섰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긴장이 최고조에 오른 상태라 걷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남자에게 쉬운 여자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정신을 가다듬으며 애써 태연한 척 따라 들어갔다.
카운터로 들어서니 중년 부인이 이미 둘 사이를 알고 있다는 듯 태연스레 말했다.
“쉬었다 가실 거죠?”
요금을 지불한 그가 열쇠를 받아들고는 내가 앞장서도록 뒤로 물러섰다. 이제는 돌아갈 기회가 없어진 것이다.
두 사람이 타면 딱 맞을 듯한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더 이상 내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노출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그가 오른팔을 들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가볍게 자기 쪽으로 안아왔다. 순간 나는 흠칫 놀랐다.
‘이 사람이 이제 내가 자기 여자라는 듯이 구는구나…….’
그렇다고 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벨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긴 복도가 나타났다.
어두컴컴한 복도의 중간쯤까지 가는 길이 멀고도 길게만 느껴졌다.
뒷자리가 ‘7’이라고 쓰여 있는 방 앞에 이르러 문을 열면서 그가 내 뒤로 서서 들어가라고 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출입구 오른쪽으로 깨끗하게 청소된 욕실이 보였고, 방안에는 둥그런 침대가 놓여 있었다.
뒤따라 들어온 남자가 냉장고를 열며 마실 것을 주었지만 나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가 의자에 앉으며 엉거주춤 핸드백을 메고 서 있는 날더러 자기 앞에 앉으라고 했다.
어느덧 그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고 있는 날 느끼며 놀라기도 했지만, 잠시 후면 그와 함께 할 그것을 생각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지……?’
“어차피 이렇게 만났는데, 너무 예민하게 신경 쓰지 마세요.”
“…….”
그가 라이터를 켜 담배를 피워 물며 말했다.
“먼저 샤워하실래요?”
“아뇨…… 먼저…….”
그렇게 말하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이어 옷 벗는 소리가 들려 곁눈질로 그를 보았다.
어느새 어두운 색조의 트렁크형 팬티만 걸친 그가 벗은 옷가지들을 옷걸이에 걸고 있었다. 굵직한 다리의 많다 싶어 보이는 털과 힘있어 보이는 근육들이 남편과는 대조적이었다.
남자도 나이가 들면 배가 나오는 법이지만, 배 나온 다른 남자의 모습을 나는 처음 보았다. 기분이 묘하고 못 볼 것을 본 것 같기도 해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았다.
화장대 위에 놓여 있던 칫솔과 면도기를 들고 욕실로 들어가면서 그가 날 돌아보며 다짐하듯 말했다.
“옷 벗으시죠.”
“예.”
불에 데인 듯 놀라 대답하며 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욕실로 들어가자 이내 물소리가 났고, 내 머릿속에서는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정신을 차려야겠는데 머릿속이 온통 답답해오고 몸이 떨려와 걸음을 옮기기도 힘들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백을 들고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혼란 속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어느새 욕실 문이 열리며 그가 나왔다.
물기도 닦지 않고 벗은 몸으로, 자기 심벌을 그대로 노출한 채 나오는 남자를 돌아보고는 까무러치게 놀라 고개를 돌려버렸다.
“씻으세요.”
“예…….”
애써 담담하게 대답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지……? 옷을 입은 채 욕실로 갈까…… 아니면 벗고……?’
“코트 이리 주세요. 제가 걸게요.”
코트 하나 벗지 못하고 있던 날 보고 그가 바보 취급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얼른 코트를 벗어 그에게 주었다.
아무래도 옷을 벗고 씻으러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이 지워지지 않도록 주의해 밤색 니트를 벗고 있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남자가 자기에게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내 웃옷을 받아 접어서 의자에 올려놓는 그 앞에서 도저히 스커트를 벗을 수 없어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을 보면서 내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정장 스커트, 위에는 슬립에 안으로는 브래지어…….
치약이 짜여 있는 칫솔을 보며 스커트를 벗어 수건걸이에 걸고 스타킹도 벗었다.
양치질을 하면서, 평소보다 세심하고 정성스레 닦고 있다는 생각에 대강 마무리를 지었다.
속옷을 벗으며 거울 속의 여자를 보니 허리 쪽 밴드가 가는 회색 스포츠 언더웨어를 입고 있었다.
‘남편이 선물한 속옷인데…….’
흰 바탕에 파스텔 톤으로 예쁘게 그려진 꽃무늬가 마음에 들어 즐겨 입는 브래지어를 벗자 하얀 살에 유난히 돋보이는 유두가 부끄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목에서부터 따뜻한 물을 뿌리며 비누를 집으려는데, 남자의 것으로 짐작되는 체모가 묻어 있었다.
샤워기에서 뿌려지는 물줄기로 그걸 떨어져나가게 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결국에는 손으로 떼어내야 했다.
‘다른 남자의 체모를 내 손으로 만지게 되다니…… 세상에……!’
대충 몸을 씻어내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데, 밖으로 나갈 일이 걱정스러웠다.
‘눈 딱 감고 누워 있기만 할까? ……어쩌지? ……내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지? ……지금이라도 가겠다고 하면 보내줄까……?’
방에서 그가 날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끔찍하고 무서웠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욕실에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커다란 타월로 몸을 최대한 안 보이게 두르고 안에는 팬티와 브래지어까지 입은 채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운 채로 양손을 머리 뒤로 돌려 팔베개를 하고 TV를 보고 있는 그가 보였다.
내 몸을 훑듯이 바라보는 그 앞에서 시선을 어디로 둘지 몰라 당혹스러웠다.
나는 얼른 방문 옆에 붙어 있는 스위치를 내려 불을 껐다. 어두워진 탓에 수치심이 덜하긴 했지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온몸을 타월로 감싼, 우스꽝스런 모습이었다.
남자는 아랫배까지만 얇은 이불을 덮고 있었다. 그의 아랫부분이 두드러지게 돋아 있는 모습을 보자 너무 무서웠다.
그가 몸을 일으켜 앉으며 손을 내밀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머리의 수건도 벗지 못한 채 끌리듯 그의 옆으로 들어가 가슴까지 이불을 끌어올렸다.
옆에 나란히 누운 남자가 내 머리를 들어 자기 팔 위에 올려놓으며 한 손을 이불 속으로 넣어 내 가슴 위에다 올려놓았다. 브래지어와 수건 위로 남자의 손길을 느끼며 순간적으로 흠칫 진저리를 쳤다.
머리에 두른 수건을 벗겨낸 남자의 다른 쪽 손이 이번에는 다리를 만져왔다.
흥분이라기보다는 뱀이 지나가는 듯한, 섬뜩한 느낌이었다. 남자의 손길이 움직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 가슴이 터질 듯했다.
수건을 올리고 내 아랫배를 만지는 남자의 손길이 제법 따뜻하다고 느끼고 있을 때 그가 조용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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