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친상간 고백서 - 미씨 USA - 1부

[근친상간 고백서]


본 근친상간 고백서는 근친상간을 주제로 한 창작소설입니다. 주인공이 자신의 근친상간에 대한 경험을 고백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진 야설입니다. 각 편마다 전혀 다른 주인공들의 다른 이야기들이 있는 옴니버스 스타일로 꾸며져 있으며 각 편마다 다른 제목이 있습니다. 읽고 즐거운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제3편 미씨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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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송미나라고 합니다.

뭐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는 제가 미국에 와서 격은 이야긴데 뭐 믿으실 지는 모르겠지만 100% 사실입니다.

이런 제 이야기를 여기에서 이렇게 떠들어 대봤자 저한테는 뭐 좋을 게 하나 없지만 그렇다고 또 저한테 손해가 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차피 뭐 인터넷이란 데가 익명성이 보장되는 곳이니깐요.

그냥 내가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또 제 이야기가 정말 텔레비전의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만한 일이기에 이런 저에 대해서 사람들이 알게 되면 도대체 어떻게 생각할지 그게 너무 궁금해서 하는 것이니 그냥 읽어 보시고 욕이나 하시지 말기 바래요.

뭐 세상에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기 마련이고 또 이런 일 저런 일 정말 거짓말 같은 일들이 우리 주위엔 많이 있으니, 그저 이런 여자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시고 제가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는 약간의 동정심을 가져주신다면 좋겠네요.

앞으로 제가 여기에서 쓸 내용들은 물론 제 경험담이고 저에 대한 이야기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실명을 사용할 수는 없겠죠? 그래서 당근 제 이름하고 우리 아이들과 남편 그리고 여기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은 가명으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편의상 제 신분이 드러날 위험성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약간 실제와는 다르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만 모든 것이 100%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는 것만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서론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본 이야기로 들어갈 볼까요?

전 원래 대학 때부터 아주 밝은 성격이고 친구도 많고 그런 스타일이었습니다. 완전 생기발랄 명랑 소녀, 분위기 메이커 뭐 그런 거 있죵.

93년에 남편과 결혼해서 시집살이하면서도 시부모님에게 밝게 대하고 그래서 우리 시아버님이 전 잘 웃어서 너무 좋다고 그러셨거든요. 제가 한 애교하거든요.

결혼생활과 부부관계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비교적 남편하고도 잘 지냈고 시부모님과의 사이도 좋은 편이었지요. 단 하나 남편이 아주 한국 전통의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남편은 바깥일 아내는 집안일을 나누어서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딱 박혀 있어서 집에 오면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지요.

우리 오빠(신랑)는 완존 왕. 그래도 뭐 내 애교엔 못 당하지만......

그러다가 2004년, 우리 두 아이들이 4학년, 2학년이었는데 남편이 미국으로 해외파견발령이 난 거예요.

물론 그때 안 가고 싶으면 안 간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었지만 처음에 회사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 남편하고 나하고 상의를 했는데 저는 뭐 완전 너무 좋아했죠.

결혼 전 대학 때에 미국 유학을 꿈꿨었고 나도 미국에 한번 가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남편이 미국으로 주재원 파견을 간다니 나야 난리가 났죠.

“히야 나도 미국 간다!”

그때 주위에서도 보면 잘 사는 집에서는 아이들을 미국시민권 갖게 한다고 미국 가서 원정출산하는 집들도 많이 있었고 또 돈 많은 집 엄마들은 방학에 아이들을 미국에 보내서 어학연수시키느니 하는 거 보면서 솔직히 겉으로는 “야, 어릴 때 해봐야 아무 소용없어. 크면 다 까먹어.”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엄청 부러웠었거든요.

그런데 미국에 가게 되었다니 저는 뭐 남편 회사에서 발령 나기 전부터 제 브레인은 미국 LA 한복판에 와있었답니다.

남편은 자기도 미국에 한번 가보고 싶었지만 부모님 때문에 선뜻 결정을 못하더라구요.

“야, 우리 미국으로 가면 우리 엄마하고 아버지하고 두 분이 어떻게 사시냐?”

“어머님 아버님 아직 젊으시잖아. 아직 7순도 안 되셨고 두 분 다 뭐 건강하신데 뭐어. 그리고 우리가 아주 가는 게 아니잖어. 당신 주재원 파견 가는 게 5년이라며? 그럼 5년만 있다가 그럼 그때 아버님 7순 때쯤 그때 한국으로 들어와서 같이 살면 되지 뭐......”

“그래도 그렇지. 너무 외로우실 거 아냐.”

“아잉 여보옹.. 가자.. 내가 미국 가서도 맨날 맨날 전화 드리고 또 애들 방학 땐 애들 데리고 나와서 한 두 달 같이 지내고 그럴게....”

나는 어떡하든 남편의 마음을 돌리려고 갖은 아양을 다 떨고 남편을 꼬셨지요. 그날 밤엔 자주 안하던 오랄 섹스까지 서비스하면서 완전 남편에게 최고의 서비스로 모셨죠.

“여보옹.. 아가씨가 가끔 오면 되잖아.. 그리고 어머님 아버님도 미국 한번 가보고 싶어하시는데 미국 와서 지내다가 오셔도 되구.... 여보옹.. 우리 미국 가자아... 응? 나 미국 가면 정말 내가 당신한테 진짜 진짜 잘 할게... 우리 아이들 교육도 정말 잘 할 자신 있구.... 그러니까 자기야... 우리 미국 가자.. 응?”

“으으음... 오케이. 그럼 가자!”

“와앙.. 자기야. 알라뷰우~~~~”

우리 신랑이 아무리 버텨도 내 애교에는 못 당하죠. 난 우리 신랑을 끌어안고 볼에 뽀뽀를 하고 완전 난리를 쳤죠.

그렇게 2004년 봄에 미국에 오기로 결정을 했답니다.

전 미국에 오면 누구든지 3년만 지나면 영어를 기가 막히게 잘 하게 되는 줄 알았답니다. ㅎㅎㅎ

그래서 미국에서 3년만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뭐 영어회화학원 강사 정도는 다 하는 건 줄 알았어요.

미국 오기 전에 전 영어 한 마디 할 줄도 몰랐으면서 말이죠. 흐흐흐.

한 마디도 못하는 건 아니고 그래도 한국에서 대학까지 나왔는데 뭐 미국 가서 그까짓 영어 못하겠나 하는 자신감은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

미국에 왔는데 처음에 전 제가 바본 줄 알았어요.

LA 공항에서부터 까만 흑인이 뭐라고 쏼라쏼라 거리는 지 한 마디도 모르겠더라구요.

그 사람 왜 그렇게 얼굴은 새까맣고 희멀건 눈동자를 희번득거리며 이야기를 하는지 무슨 아프리카 몬도가네 식인종처럼 생겨가지고 저를 잡아먹을 거 같드라구요. 어찌나 무서운지......

그때 우리 오빠는 먼저 미국에 와서 집 구하고 이미 이쪽 회사에 출근을 하고 있었고 저는 아이 둘 데리고 나중에 들어온 거였는데, 공항에서 남편도 없고 그러다가 아이 둘하고 나하고 완전 국제고아되는 거 아닌가 하고 을마나 쫄았는지 지금도 기억이 나네요.

지금 미국 온 지 8년 되었거든요.

근데 개뿔 영어를 잘하긴 완전 지금도 그 수준이랍니당. 히히히.. 근데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미국에서 10년을 살았건 20년을 살았건 여기 이민 오신 분들 영어하는 거 보믄 흐흐 다 그게 그거예요. 완전 눈치로 때려 잡는거죠.

처음에 여기 왔을 때, 밖에 다닐 때 내가 제체기를 하면 미국 사람들이 자꾸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예요. 난 그래도 내가 제체기만 하면 왜 미국 사람들이 나한테 뭐라고 하나 생각하면서 아마 미국에서는 사람들 있는데 제체기를 하는 게 실례인가 보다하고 그담부터는 숨어서 하든가 참든가 그랬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에서는 다른 사람이 제체기를 하면 그냥 그 사람한테 “Bless you!”라고 말을 해주는 거라네요. 그 말은 “복 받으세요!”라고 하는 거래요. 왜냐하면 제체기가 나오는 건 천사가 와서 “당신 코를 간지럽게 해서 제체기가 나온 거니까 천사한테 복 받으세요”라고 하는 거라네요.

뭐 영어에 대한 이야기는 하도 많아서 해도 해도 끝이 없지만, 미국에 와서 LA 가까이에 사니까 영어 쓸 일이 없는 거예요. 한국 마켙이 한국 보다 더 잘 되어 있고 한국 식당들이 한국의 우리 동네 보다도 더 많고 뭐 한국 물건이 없는 게 없으니까요. 하다 못해 미국 와서 운전면허 필기시험도 한국말로 되어 있는 걸로 봤으니까요.

어느 정도인가 하면요. 여러분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공감하실 겁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어떤 집이 미국으로 이민을 오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아빠 엄마가 아이들한테 “야 우리 이제 미국으로 이민갈꺼다” 그랬데요. 그래서 아이들이 너무 좋아했데요. 그 다음에 한국에서 얼마 동안 미국 비자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그 다음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데요. 이민 와서 LA에서 한 1년 정도 살았는데 하루는 아이들이 엄마 아빠한테 그러더래요.

“아빠, 우리 언제 미국 이민 가는 거야?”

후후.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암튼 그런데 미국 안에서 한국 음식이나 한국 물건 아쉬움 없이 다 살 수 있으면서 또 미국의 좋은 교육 환경이나 야외활동 같은 걸 즐기면서 살 수 있으니 너무 좋더라구요.

그래서 처음 1년은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고 살았어요.

매주 주말마다 LA 근처의 헐리웃, 산타모니카 바닷가, 말리부, 디즈니랜드, 유니버설 스튜디오, 넛츠베리팜, LA 동물원, 게티뮤지움 등등 구경할 데가 너무 많더라구요. 그리고 애들 방학엔 휴가 내서 라스베가스, 그랜드캐년, 요세미티 국립공원,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등등 돌아다니구요.

그렇게 즐기면서 살다보니 5년이 후딱 지나가드라구요.

2004년에 신랑이 주재원으로 파견되서 5년이 되면 한국으로 되돌아 가야 되는 거였는데 1년 근무 연장을 할 수 있어서 1년을 연장했답니다. 그 다음해 2010년에 미국에 있을 것인지 한국으로 되돌아갈 것인지 결정을 해야 하는 거였죠.

근데 미국에서 애들이 6년 정도 살다보니 한국말을 다 까먹은거예요. 특히나 작은 애는 미국 올 때 2학년이었는데 6년 한국말을 안 썼더니 뭐 거의 한국말을 못하드라구요. 큰 애는 그나마 조금 낫지만 뭐 한국에 가서 한국의 학교에 가서는 도저히 학교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답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작은 녀석이 아침에 양말을 고르면서 “엄마! 나 어떤 양말 입어?” 그러는거죠. 영어로 socks(양말)은 wear(입다)라고 하니까요. 그리고 아들하고 이야기하다가 “야, 니네 미국에서 6년 살았는데 영어는 어쩜 그렇게 잘 하면서 한국말은 그렇게 싹 다 까먹냐.” 그랬더니, 아들 녀석 왈, “아 엄마 걱정마, 나 한국 가서 두 년만 살면 한국말 잘 할 수 있어.” “헉!” ‘두 년’이라니 ‘이 년’이겠지......

그때 우리 아이들이 11학년 (여기선 그렇게 말합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작은 애가 9학년(중학교 3학년)이었거든요. 그런데 아이들은 똑똑해서 공부를 참 잘하거든요.

남편과 상의를 한 끝에 남편만 혼자 한국으로 들어가고 저하고 아이들은 미국에 남기로 했죠. 작은 아이가 4년 후 대학에 들어가서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게 되면 그때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하구요.

“여보, 4년만 참아. 아이들을 위해선 할 수 없지 뭐.”

걱정을 하는 건 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신랑이 나를 더 걱정해 주었답니다. 저는 솔직히 말하면 속으로 느므느므 좋았거든요. ㅋㅋㅋ 

자, 그때부터 본격적인 저의 방황과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이 시작되었던 겁니다.

미국에서 남편 없이 사내 아이 둘을 혼자 돌보고 있는 미씨 아줌마.

아이들이 학교 가고 나면 사실 집 치우는 거 말고는 특별히 할 일은 없었답니다.

참 신기한 일은 왜 그때부터 나의 성욕이 폭발할 듯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느냐 하는 게 저도 궁금증입니다.

제 나이 40대 초반 그래도 몸은 탱탱하고 아직도 20대 후반은 아니지만 때때론 미혼이냐고 질문을 받기도 하는 귀요미. 몸은 얼마든지 내 욕망을 충족시켜 줄 만큼 건강한 여자였고 마음 속 욕망은 끊임없이 불쑥불쑥 느닷없이 끓어올랐죠.

아이들이 학교 간 뒤엔 컴퓨터에서 한국 드라마 보는 게 낙이었답니다.

왜 이렇게 요즘 한국 남자 탤런트들 다 잘 생긴 거예요. 혹시 미국이라도 한번 온다면 몰래 만나서 정말 몸이라도 함 대주고 싶더라구요. 그리고 진짜로 그런 여자들도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도 있구요.

그리고 한인타운에 가면 젊은 남자애들은 얼마나 많은지 애들이 다들 키도 크고 정말 탤런트 뺨치는 애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그런 남자애들 보면서 속으로 “야 쟤는 모하는 앨까? 한번 저런 애하고 같이 자고 싶네.....” 그런 생각을 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답니다.

그리고 여기 LA 한인타운에 가면 큰 한국 백화점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그냥 코리아타운 플라자고 또 하나는 겔러리아거든요, 그런데 거기 가면 종종 약간 나이 먹은 여자가 젊은 남자애하고 다정하게 다니는 걸 보게 되는데, 분명 엄마 아들은 아니고 그렇다고 부부는 아닌 그런 사인데 둘이 하는 걸 보면 너무 다정하게 밥도 먹고 그러거든요.

그런 거는 십중팔구 미국에서 혼자 사는 여자가 젊은 애 꼬셔서 연애하는 게 틀림 없더라구요.

남편은 한국에서 기러기 아빠하면서 뼈 빠지게 돈 벌어서 미국으로 보내면 마누라는 미국에서 젊은 남자애하고 신나게 노는 거죠.

그런데 이게 왠 일!

제가 바로 그런 여자가 되었더라구요.

그래도 전 남편이 보내주는 돈을 헤프게 막 쓰지는 않았답니다. 그리고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 남편한테 미안한 마음은 늘 갖구 있구요 여전히 남편을 존경하고 사랑하거든요. 믿거나 말거나 이건 사실이랍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제 이야기를 해볼까요?

제가 미국에 온 이후로 이상하게 한국에 있을 때 보다 성에 대한 생각이 많이 자유로워지고 욕구가 더 많이 생긴 걸 느꼈습니다.

그건 아마 이곳 미국이 성에 대해서 좀 자유로운 분위기여서 그런 거 같아요.

그리고 처음으로 내 마음 속 욕망의 심지에 불을 당긴 거는 저희 신랑의 사촌 동생의 남편이었어요.

신랑의 이모님이 아주 오래 전에 미국에 와서 사시고 계셨고 그 이모의 딸 그러니까 저희 신랑한테는 이종 사촌 동생인데 아주 어려서 미국에 와서 여기서 커서 미국 남자하고 결혼을 해서 사는 아주 예쁘고 몸매도 글래머인 사촌 시누이가 있어요.

가까이에 사니까 미국에 처음 와서 자주 만나고 도움도 많이 받았거든요. 그런데 그 사촌 시누이의 남편이 미국 남자인데 이름이 토니거든요. 그 집에서 토니를 처음 봤을 때, 정말 미국 영화에 나오는 영화 배우처럼 아주 잘 생기고 착하게 생겼거라구요. 키도 크고요.

처음엔 영어도 못하니까 말도 못하다가 나중에 자주 보니까 손짓발짓하며 대화가 되더라구요. 뭐 대화의 수준은

“토니! 아유 헝그리?”

“이트 디스. 오케이?”

뭐 이 정도였지요. 호호호

그런데 자주 보게 되니 어느 날은 토니가 바지를 입었는데 유난히 바지 앞이 불룩하게 나와서 힐금힐금 쳐다보니 정말 미국 남자들은 그게 크긴 큰 거 같드라구요.

집에서 미국 포르노 동영상을 다운로드해서 보면 정말 미국 남자들은 물건이 다들 대물이라서 저는 토니 물건도 한번만 보면 정말 좋겠드라구요.

그 이후로는 포르노 동영상을 보면서 토니 자지를 생각했고 토니가 그 큰 자지를 제 보지에 박는 상상을 하면서 자위를 하곤 했답니다.

그때가 미국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고 그때부터 점점 저의 욕망은 커지기 시작한 거죠.

그러나 남편이 2010년에 한국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전 옆에 남편도 있고 해서 저의 그 끓어오르는 욕망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않았답니다.

제가 실행에 들어간 건 남편이 한국으로 간 이후부터랍니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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