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21부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21







대학로로 향하는 지하철 역은 언제나 사람이 붐비지만, 그런 곳도 가끔씩은 어느 정도 한가한 시간이란 게 존재하기 마련. 평일의 이른 점심시간이 바로 그러한 때였고, 모텔에서 나온 성진과 혜진 둘다 딱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 시각 그 장소를 걷고 있게 되었다. 성진은 오후 늦게나 수업이 있었기에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갔다가 학교에 갈 것이라고 했고 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조심해서 잘 가. 오빠.”



쏟아져내리는 따스한 늦가을 햇살에 등 뒤를 살짝 덮은 혜진의 긴 머리칼이 윤기를 형성하며 바람에 나풀거리듯 흔들렸다. 살포시 미소지으며 가방을 두 손으로 앞쪽에 모아쥔 채 걷는 그녀. 성진은 그런 혜진을 바라보다가 문득 뭔가 빠뜨린 사람처럼 물었다.



“너는?”



“점심시간 직후에 수업이 있어. 어차피 오빠랑 아침 겸 점심을 먹었으니 이대로 일찍 강의실에 들어갈 생각이야.”



그랬었나, 어쩐지 모텔에서 나오기 전 조금 오래 차림새를 고쳐입는 듯하더니 이럴 생각이었군. 성진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그녀가 걸음을 멈칫한 걸 보고 따라서 멈춰섰다.



“난 이제 이 역에서 이쪽길로 가야 해.”



“아, 그래. 그렇군. 이쪽이 대학교 정문으로 향했지…. 그럼 잘 가라. 강혜진.”



그렇게 말한 성진은 한 손을 재킷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다른 쪽 길로 몇 발자국 앞서갔다. 얼마간 걸어간 그는 슬쩍 몸을 돌려 손을 들어보였다. 하지만 혜진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아 보이는 검은색 가방을 앞쪽에 모아쥔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 대여섯 걸음 떨어졌던 성진은 다시 돌아와서 그녀 앞에 섰다. 그녀의 뒷편으로 몇몇 사람들이 제각기 귀에 이어폰을 꽂거나 통화를 하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지나다닌다.



“왜 그래, 혜진아.”



“으응, 아니……. 그냥 좀 찝찝한 게 있어서….”



“뭐가?”



혜진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빠한데 어제 좀 미안했던 것 같아. 그… 내가 너무 내 위주로만 즐겁게 진행해서 오빠한텐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성진은 ‘뭐 그런 것 갖고, 괜찮아.’라고 평범하게 말해주려다 문득 멈칫했다. 그리고는 자신과 시선을 잘 마주치지 못하는 혜진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이럴 녀석이 아닌데…. 그녀와 같이 한 시간이 길다곤 볼 수 없지만 성진은 여자의 작은 변화에도 어느 정도 마음을 감지해볼 수 있는 경험력은 갖추고 있었고, 그래서 한 루트를 던져보기로 했다.



“뭐 할말 있니, 혜진아? 괜찮으니 오빠한테 슬쩍 말해봐.”



하지만 혜진은 눈을 감듯 조용히 내리깔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 뿐이었다. 여전히 그 평온한 미소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며. 성진은 그런 후배를 말없이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하곤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얼마간 걸어가서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땐 정말로 신경 쓰지 말라는 듯 한결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혜진을 보게 되었다.



아직 채 정리되지 않은 선영의 생각과 혜진에 대한 미묘한 감정 등등을 곱씹어보며 두 다리를 무의식적으로 놀리듯 걷는 성진. 멀어져가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혜진은 그녀 나름대로 자신의 감정을 정립하고 있었다. 혜진이 느끼던 것은 일종의 애달픔 비슷한 것이었고 그녀는 사실 그러한 감정이 밀려오는 것에 별로 당황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는 이십 대 초반의 당당한 여대생 표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 감정에 쓸쓸함을 느낄지언정 혼란스러워하지는 않았다.



이제 손바닥으로 가릴 수도 있을 만큼 멀어진 성진의 뒷모습 옆에 천천히 손을 들어올린 혜진. 그녀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있었고, 그것을 열어젖혀 화면이 보이게 한 후 예전에 찍었던 하나의 사진을 로딩시켰다. 성진과 첫 관계를 가졌던 모텔에서의 사진이었고 이쪽을 바라보며 씩 하고 웃고 있는 성진의 모습과 현재 그의 뒷모습을 번갈아 보던 혜진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짙은 간절함을 담아서.



“성진 오빠…. 내가 얼마나 오빨 좋아하는지 오빠는 잘 모를 거야.”



그녀는 문득 산들바람에도 추워진 듯 핸드폰을 들지 않은 다른 쪽 팔로 자신의 가슴을 꼭 끌어안았다. 그녀는 어제의 그 연예인을 방불케 할 블라우스에 숏재킷, 체크무늬 미니스커트, 롱부츠를 신은 화사한 옷차림 그대로였고 주변을 지나가던 몇몇 청년들은 잠시 고개를 돌리며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자신이 너무 데이트차림새로 혼자 오래 서있다는 걸 자각한 혜진은 귀찮은 집적거림이 다가오기 전에 갈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핸드폰을 도로 가방 속에 집어넣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그녀. 이어서 이런 차림으로 강의에 들어가도 될까 하는 애매한 문제에 봉착하려는 찰나 설마하던 집적거림이 다가왔다.



그 집적거림은 전혀 예상치 못한 형태였다. 그리고 그건 정확히 말하자면 집적거림이라 표현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같은 여자이자 그것도 같은 학번의 여대생이었기에. 하지만 혜진은 그런 사실이 무색할 만큼 놀라버렸다. 언제부터 같이 걷기 시작했는지 모르게 그 여대생은 옆에서 앞쪽으로 몸을 숙이고는 혜진을 쳐다본 것이었다.



“채… 채미선?”



“흐음, 강의 들어가는 거야 혜진아?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



그녀 특유의 포니테일 머리를 살랑거리며 생긋 웃는 미선. 티셔츠에 청멜빵반바지차림의 그녀는 가벼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곤 가방을 앞쪽으로 모아 쥐고 있는 혜진과는 달리 그녀는 뒷짐을 지듯 모아들고 있었다. 꽤나 귀여운 인상이었지만 모텔에서 정사를 나누고 방금 성진과 헤어진 혜진에게 있어서는 가슴 철렁한 등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으응…. 점심시간 끝나고 바로 강의가 있어서. 그런데 언제부터 옆에 있던거야?”



“음? 조금 전부턴데?”



“조금 전 언제?”



“핸드폰을 들어올리고 뭐라고 중얼거리던데. 나는 셀프 사진이라도 찍는 줄 알았지. 그런데 왜 그렇게 민감해?”



혜진은 얼른 평소의 표정 상태를 연기하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성진 오빠와의 관계를 들켰나?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들켰다고 해서 별로 위해될 건 없거니와 과도 달라서 서로 얼굴도 잘 모를 정도이니 이상한 소문을 낼 것 같지도 않았다. 그것보다 혜진은 별로 친하지도 않은 미선이 이렇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이유가 더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편의점에서 커피와 비스킷 등을 살 때 자신에 대한 디테일한 평을 했지…. 나는 잘 모르는데 미선은 나를 그렇게 주의깊게 관찰했단 건가?



“대화도 거의 해보지 않은 동급생이 왜이렇게 달라붙는지 궁금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나란히 걷던 미선이 앞서 질문한 대답을 듣기를 포기했는지 쿡 웃으며 다른 질문을 던졌고, 물론 그것은 혜진을 또 한번 놀라게 했다.



“어, 어, 어?”



“피, 왜 그래? 죄지은 사람처럼. 확대해석하는 건지 뭔지…. 아니면 나랑 같이 걷는 게 불편한가 보다.”



일부러 삐진 듯 고개를 홱 돌리자 혜진은 모든 잘못이 자신에게 있는 것마냥 자꾸만 허둥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아니, 아냐. 방금 전까지 너무 생각에 빠져있어서 그래. 마침 학교까지 거리도 많이 남았는데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고 생각하던 참이야.”



미선은 곁눈으로 그런 혜진을 살피다가 곧 고개를 원래대로 하고는 ‘에헤헷’하고 웃어버렸다. 그 순수한 모습은 혜진마저도 잠시 넋을 놓을 정도로 귀여웠고 그래서 혜진은 잠시 동급생이란 사실을 잊고는 챙겨주고 싶은 후배를 보는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둘 다 1학년이기에 후배 따윈 아직 없었지만 실제로 미선의 키는 혜진에 비해 조금 작다는 점도 작용하는 듯했다.



잠시 후 미선은 산책을 거니는 소녀처럼 전방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래. 우린 아직 잘 모르는 사이지만 친하게 지내고 싶어. 나는 솔직히 말하면… 2학기가 된 지 꽤 지났는데도 친구도 거의 사귀지못했어. 성격이 내성적이거든.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물론 돈을 벌기 위해서지만 조금이라도 사람들을 많이 접하면 성격이 바뀌지 않을까 해서 시작했던 일이고 말야. 그리고 내가 몰래 좋아하는 오빠도 있긴 하지만… 으응, 이건 쓸데없는 말. 어쨌거나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는 혜진이 네가 부러워. 오늘도 그렇지만 정말 예쁘게 차려입고 나왔잖아?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하며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다닐 수 있지?”



허세부리기 좋아하는 인간이 아닌 이상,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갖고 있는 장점을 어느 정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혜진이라고 해서 그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따라서 혜진은 미선이 부러워하는 점을 대충 머릿속으로 모두 필터링해버리고는 ‘몰래 좋아하는 오빠’부분에 신경을 집중해가기 시작했다. 자신을 내성적이라 표현할 정도로 이 자신감없고 귀여운 녀석이 좋아할 정도면… 그게 누굴까? 광범위하고 과대망상일 수도 있겠지만 혜진은 어쩐지 성진과 그녀가 같은 과라는 사실이 신경쓰였다.



하지만 혜진은 더 이상 당황하지는 않았다. 미선과 달리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는 그녀는 어떤 타입의 사람에겐 어떻게 대하는가를 상당 부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고, 그래서 미선의 말 속에 담긴 구체적인 부분을 파고들 여유까지도 되찾았다. 초반에 꽤나 의기양양하게(?) 끼어들었다가 더 이상 할말이 없어지자 입을 다물어버린 미선과는 달리 혜진은 슬슬 그녀의 본심을 자극해서 베일을 벗겨보는 놀이를 진행해나갔다.



“내가 저번에 편의점에서도 얘기했던 것 같은데? 자신의 단점을 굳이 보완하려 노력하기보단 그것을 장점으로 되살려보라고. 누군가를 비춰보며 자신을 똑같이 베껴나가기엔 우리 같은 이십 대 주체에게 부여된 자유란 게 너무도 아깝거든.”



“우웅…. 알고 있어. 하지만 너무 어려운걸.”



혜진은 고개를 조금 숙이며 픽하고 웃고는 한 손으로 머리칼을 귀 너머로 쓸어넘기었다. 그리고는 짐짓 안타까운 시선으로 미선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너, 그렇게 아무한테나 속마음을 쉽게 드러내다간 쉽게 상처받는다.”



하지만 미선은 그 말에 눈을 똑바로 뜨고는 혜진을 마주보았다.



“너도 그 ‘아무나’에 해당하는 거야?”



“뭐 그렇게 굳이 말할 수는 없겠지만… 우린 아직 알고 지낸지도 얼마 안 됐고. …그럼 이렇게 하지. 우리 이제부터 말벗. 소울메이트? 음, 그건 오버지만 그 못지않은 친구 해보기로 하는 게 어때?”



어쩐지 챙겨주고 싶은 기분에 그런 관계도 하나쯤 정립해보는 것도 신선할 듯해서 내뱉은 말이었지만 미선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뭐야. 난 잘 몰라. 어려워. 그냥 친구해. 난 이미 널 친구로 생각하고 있지만서도…….”



혜진은 그만 입을 가리고 조금 격하게 실소했고,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래, 그래. 친구. 후우…. 근데 너 보기보다 조금 화끈한 데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미선은 그 말엔 별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여전히 뒷짐진 자세로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타박타박 걸어갔다. 사람마다 성격의 차이마냥 중요시하는 관점도 다르기 마련이고, 말싸움을 하려면 그런 관점이 아주 어긋나지 않는 일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혜진은 미선과는 그런 말싸움의 기제도 존재하지 않을 예감이 들었고 그래서 소리없이 웃으며 전방을 응시했다.



하지만 대학교 정문이 보일 때쯤까지 걸어온 혜진에게 있어선 또한번 격한 파동이 일듯한 말을 듣게 되었다.



“성진 오빠 만났어?”



미선이 좋아하는 오빠란 게 누군지 어떻게 유도해볼까 머릿속으로 구상해보던 혜진. 그녀는 미선의 이 직접적이고 단순한 물음에 뜻밖의 선공을 당한 사람처럼 가슴이 철렁했다. 혜진은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말하려 했으나 특별한 상황 외에는 매사에 요조숙녀처럼 연기하는 데 익숙한 그녀에게 있어서도 억양은 살짝 떨리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만났구나. 흐음.”



무의식적인 되물음이 그 어떤 진실성보다 더 진실된 대답이 되었음을 자각한 혜진은 스스로를 다그쳤다. 왜이리 답지 않게 안절부절 못하지? 그녀가 그걸 봤다고 해서 무슨 큰 문제가 된다고. 혜진은 짐짓 별 것도 아니라는 듯이 다시 연기해 들어갔다.



“뭐야, 그 오빠랑 헤어지는 걸 본 거야? 그러면서 아까는 모르는 척 셀프사진 찍는 줄 알았다고 한 거니.”



“헤어지고 나서 찍은 줄 알았지. 흐음,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부분을 자꾸 찔러보는 걸 보니…….”



혜진은 살짝 가슴이 뛰면서 꺼림칙한 눈으로 옆에 걷는 미선을 바라보았다. 미선은 마치 퀴즈를 맞추기라고 하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혜진을 가리키며 싱긋 웃어보였다.



“남몰래 연애하고 있구나! 성진 오빠랑.”



혜진은 결국 한숨을 폭하고 쉬었다. 이 녀석… 겉으론 내성적이라면서…. 아니, 실제로 자신이 없는 게 맞겠지. 하지만 이상스레 날카로운 면이 있단 말야. 아니면 내가 너무 민감한 건가?



어쨌거나 혜진은 일단 난처한 미소로 수습 단계를 밟기로 했다.



“에이, 들켜버렸네. 뭐 하지만 비밀로 해줘. 아직 연애하는 건지 뭔지도 애매한 단계이니까.”



친구니까 그정도 비밀은 지켜줄 수 있겠지? 라는 미소를 능숙하게 건네는 혜진. 그러고 보니… 연애라. 그 단어가 갑자기 와닿네. 혜진은 정말로 성진과 자신이 연인 관계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올려보았다. 물론 몇 번 잠자리를 같이 하긴 했지만 성진에게 있어선 그 무언가를 쫓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성진이 딱히 애인이 없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그를 붙잡기에는 정리되지 않은 무언가가 가득 들어찬 느낌. 예전에 미팅 때 그의 귓가를 때려대던 전화 소리와, 한 여자를 알고 싶었지만 그냥 떠나보냈다고 괴로워하던 어제의 모습에서 자신이 들어설 공간은 없음을 직감적으로 안 것이다.



혜진은 적극적이긴 하지만 급하게 밀어붙여서 성진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기에 언제까지고 기다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기약 없는 기다림이란 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이러다 성진이 또 다른 여자를 만나서 가버린다면…? 이 옆에 걷고 있는 미선만 하더라도 같은 과니까 혹시 그렇고 그런 사이가 돼버리면…….



그런 갈등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선은 자신만의 판단으로 그녀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에에. 애매한 관계는 아닌 것 같은데. 성진 오빠가 ‘그것’까지 사다줄 정도면…….”



“‘그것’이라니?”



“몰랐어? 여자라면 다들 갖고다니는 그것 있잖아. 내가 골라주기까지 했는데.”



“……?”



“흐음……. 정말 모르나보네. 그럼 다른 사람인가.”



혜진은 ‘그것’이 무엇인지 한번 더 물어볼까 했지만 미선은 미선 나름대로 복잡한 관계를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래서 혜진은 결국 타이밍을 놓쳤고, 둘은 그렇게 각자의 상념 속에서 터벅터벅 걷기만 할 뿐이었다. 긴장되었던 탓일까. 혜진은 어느 새 학교 정문을 통과해서 강의실이 있는 건물까지 다다랐음을 깨달았다. 에스프레**도 하나 마시고 들어갈까 생각한 그녀는 구내 커피숍으로 향하며 미선을 돌아보았다.



“커피 마실래?”



“아니.”



곧바로 나오는 그녀의 대답. 혜진은 가방 속에서 지갑을 찾아들며 한번 더 권유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틈도 없이 거의 연이어지듯 미선의 입이 열렸다.



“그보다 혜진아.”



혜진은 미선을 바라보았다. 미선은 뭔가 고백하는 소녀처럼 잠시 땅을 보면서 쭈뼛쭈뼛하더니 두 걸음 정도 뒤로 물러서곤 생긋 웃어보였다. 살짝 고개를 들면서.



“네가 애매한 관계라고 하니까 말해도 될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어, 어…?”



“나, 사실은 성진 오빠 좋아해.”



“뭐……?”



여기까지 오는 동안 미선의 별 거 아닌 말들마다 잔뜩 경계의 기분이 들었던 이유를 찾을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랬나. 그녀도 선배가 아닌 오빠란 호칭을…. 그리고 혜진은 다음에 이어진 그녀의 말에서도 다시 한대 맞은 듯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네가 너무 매력적이라서… 성진 오빠 애인으로 있으면 나는 끼어들 자리가 없을 것 같았거든. 하지만 이젠 나도 노력해야지. 네가 충고해준 나만의 장점을 되살려서 말이야. 헤헷.”



“채미선…….”



그녀는 여전히 뒷짐진 자세로 몸을 조금 앞으로 숙이고는 혀를 살짝 내밀어보였다. 어쩐지 놀린다기보다는 경각심을 부여하는 몸짓.



“혜진 네가 성진오빠를 좋아하고 있더라도 난 안 질거야. 그럼 밥 맛있게 먹고, 다음에 또 보자고.”



이미 식사는 한 거나 마찬가지였던 혜진이기에, 커피를 마시겠다고 했던 것이지만 미선은 당황함 속에서 말을 헛나오고도 눈치를 못 챈듯하다. 곧바로 몸을 돌려 뛰어가는 그녀의 얼굴이 어쩐지 빨개져있다고 생각하던 혜진. 강의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을 텐데. 정말 귀엽긴 하군, 무슨 고등학생도 아니고…….



하지만 혜진은 곧 그렇게 그녀를 여유있게 평가할 상황이 아님을 자각하고 있었다. 후우……. 불안감이 사실로. 예리한 자신의 예감에 자부심이 들 법도 하지만 당연하게도 결과가 별로 고무적이지 못했기에 혜진은 힘없이 웃으며 커피숍의 메뉴판을 눈으로 읽어나갔다. 하긴 성진 같은 남자가 같은 과에서 좋아하는 여자 한명도 없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할지도 모르겠지. 그럼 나에게 불리한 건가? 뭘 하더라도 성진은 그녀와 같이 행동할 테니….



그러나 미선이 동경할(?) 정도로 매사에 적극적이고 당당한 대학생의 표본이란 것은 괜히 그녀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혜진의 머릿속은 벌써부터 다른 생각으로 들어차기 시작했다.



‘이렇게 있으면 안 되지. 강혜진. 너답지 않게 왜이래. 네가 성진을 정말로 좋아한다면 몇 명이 가로막든 헤쳐나가서 쟁취해버려.’



혜진은 이것을 각성의 기회로 삼기로 마음먹고는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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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짧았습니다. 원래는 두 편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으려했는데 첫번째 것이 너무 길어져서 다음으로 패스. 어째 시나리오를 생각해두던 것이 글로 풀어내면 본래 예상보다 분량이 너무 길어지곤 하네요; 이러다가 정말 50화 내외로 끝낼 수나 있을지 의문.



간만에 글을 올렸는데 반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반겨주는 분들이 계셔서 좋았습니다. 역시 **넷이란 곳은 늘 계시던분들이 계시는 곳이랄까…. 그런데 앞서도 말했지만 바빠진 시점이라 이후의 연재가 제대로 될지는 장담 못합니다 ㅠ



테라는 파멸의 마수 업뎃 후로 관뒀고 요즘은 다른 온라인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소설은 일상 게임 외에 남는 시간마다 조금씩 끄적이는 거니 연재가 많이 늦습니다. 하지만 쓸 때는 최선을 다해서 쓸려고 합니다. 소설쓰기는 제가 아주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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