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22부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22







본래의 선영이 아닌 현재의 선영에게 있어선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세계를 계속 살아가야 하는 꼴이 됐기에, 딱히 그녀를 탓할 수만도 없는 일이다. 물론 본래의 선영이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순간에 튀어나온 건 그녀의 의지이긴 하다. 하지만 모든 생물이 자신의 의지를 자유자재로 구현해보기도 전에 세상에 태어나는 것처럼, 그녀에게는 매우 애꿎은 본능과도 같은 의지였다. 그러므로 성진은 현재의 선영을 미워해서도 안 되고, 예전 본래의 선영이 (잠식은 했지만)그녀 내부에서 살아(?)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대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 정황을 모를 정도로 성진이 철없는 청년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속되는 그녀와의 동거 생활에서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성진은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덩어리를 갖게 된 기분이었다. 늘상 수업이나 운동, 납품 작업, 기타 외출 등을 하고 돌아오면 방안은 항상 언제 그랬냐싶게 어질러져 있었다. 그녀와 동거를 하기 전보다 두세배가량을 더 청소에 신경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은 항상 청소를 잘 안 하는 불성실한 인간상을 나타내는 듯했다.



“이봐, 은선영. 몇 번이나 말하지만 제발 빨래는 세탁기 옆 빨래통에다가 넣어두라고. 너보고 빨래를 하라는 건 아니잖아?”



침대에 앉아 젤리를 떠먹으며 TV를 시청하던 선영도 지지않고 맞받아쳤다.



“다리 불편한 사람보고 꼭 그렇게 얘길 해야 해? 세탁기가 있는 보일러실까지 왔다갔다하는 것만도 아파 죽겠다고.”



“지금 열 발자국도 안 되는 거리를 이유로 들고 있는 거냐?”



“보일러실 문 여는 건 또 어떻고? 나 팔도 다쳤다는 걸 자각해주었음 하는데. 한 팔로 생활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안 다쳐봤으니 모르지? 그리고 그렇게 간단해보이면 팔다리 성한 사람이 금방 해결하면 될 텐데 그게 그렇게 화낼 문제야?”



“젠장할!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치자. 좀 정리하는 성의라도 보임 안되냐? 왜이렇게 입다 만 옷들을 여기저기 내팽개치듯 던져놓는 건데?”



하지만 선영은 더 대꾸하기도 귀찮아졌는지 시선을 TV에 고정시키고 남은 젤리나 마저 떠먹고있었다. 방금 강의를 마치고 돌아온 성진은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을 생각도 않고 서서, 한 팔을 허리에 얹은 채 그런 선영을 노려보았다. 그리곤 오늘만은 못참겠다는 듯 삼키고 있던 잔소리들을 연이어서 내뱉었다.



“샤워실 벽에 거품들은 봤냐? 그것도 아픈 다리 핑계댈거야? 배수관 주변 머리카락들 아주 가관이 아니더라? 샤워를 하려면 좀 똑바로 하든가. 너 그리고 과일 좋아하지? 하지만 먹다 버린 사과껍질에 벌레가 모이는 걸 아는지 모르겠군. 과일 껍질 같은 것들은 제대로 싸서 버리든가 음식물 쓰레기로 분리수거해서…….”



“아 정말 시끄러워 죽겠네. 야, 김성진! 나는 지금 내 문제만으로도 머리아파 죽겠다고! 그냥 좀 참고 내버려두면 안 돼?”



“왜, 네 안의 본래의 선영이 또 계속 말걸어오기라도 하냐?”



성진은 이젠 아예 대놓고 빈정댔고, 선영은 침대에 앉은 상태로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쏘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진은 오늘만큼은 그냥 못넘어가겠다는 눈빛으로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의 정적 후 선영쪽이 결국 입술을 깨문 채 빈 젤리통을 옆에 놓고는 TV쪽으로 시선을 다시 돌렸다. 성진은 ‘카잔 전쟁’ 경기를 시청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TV를 꺼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 채 몸을 돌렸다. 그리곤 방 안에 어질러진 빨래들을 하나 둘 주워갔다.



그 중에는 성진의 옷도 상당수 있었고, 선영은 그의 집에서 생활하면서 그의 옷도 멋대로 꺼내 입고있는 중이었다. 그런 점을 새삼스레 자각하자 성진은 가라앉으려던 감정이 다시금 울컥하는 걸 느꼈다. 그러고 보니 요즘 그녀 때문에 외출용 옷을 선택하는 데 상당한 애로사항이 피어나는군. 구질구질하게 따지고 싶지 않아 내버려두는 것도 하루이틀이어야지, 젠장할!



“야. 은선영.”



선영은 그의 부름을 못들은 것처럼 TV의 브라운관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성진은 마치 그녀보고 보라는듯이 옷가지들을 한 손으로 들어올렸다.



“도대체 하루에 빨랫감을 몇 개나 생산하는 거냐? 이게 다 네가 입던 거야, 봐봐. 정말이지… 집에만 있으면서 속옷도 그렇게 꼭 하루 한번씩 갈아입어야 해? 쉴새없이 세탁기를 돌려도 내가 쓸 수건조차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라니까.”



“집에만 있는 거 아냐. 너 없을 때 밖에 나갔다오기도 해.”



조금은 미안한 감정이 들었는지 약간은 더듬거리는 목소리를 입밖에 내는 선영. 물론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성진을 돌아보지 않고 있었고, 그래서 성진은 마치 이쪽을 한번 보기나 하라는 것처럼 빨래더미를 바닥에 다시 흩뿌리듯 던졌다. 꽤나 쌓여있던지 다시금 빈정대는 음성이 그의 입에서 나온다.



“하, 그래? 잘난 물리치료라도 갔다 오셨나 보지?”



“그건 아니지만….”



“놀러 쏘다닐 다리는 있고, 청소할 다리는 없다? 네가 생각해도 좀 그렇지 않냐? 차라리 물리치료라도 다니지 그래? 시르병원 거기 치료 잘 하던 것 같은데. 아니, 제발 다니고 온다고 거짓말이라도 해라! 그렇게 빨리 나아서 민폐 끼치지 말고 본래의 네 집으로 얼른 돌아…….”



거침없이 독설을 내뱉던 성진은 자신을 바라보며 입을 꽉 다문 선영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는 얼마 안 가 자신이 할 말 못할 말을 구분짓지 않고 쏟아냈다는 것을 자각하자 한숨을 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쨌거나 현재의 선영은 가족은 물론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고 집으로 돌아가봤자 혼자선 며칠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아니, 그런 정황을 떠나서 본래의 선영 또한 그녀의 내부에 ‘존재’는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현재의 선영 또한 그런 그녀의 일부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됐는데….



선영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고, 성진이 사과할 타이밍을 잡지 못해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리모콘을 집어들어 TV를 끄고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성진의 앞을 지나쳐갔다. 잠시 힘겹게 신발을 신는 부산스런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는 정말로 자기 집에 돌아가겠다는 것처럼 현관문을 열고 원룸 바깥으로 사라졌다.



그때까지도 목석처럼 서있던 성진은 그녀 발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리치듯 던졌다. 본래의 선영이 나왔던 그 별 수확 없던 날을 기점으로, 현재의 선영과의 사이도 점차적으로 나빠지고 있었다.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받는지 예전보다 더 제멋대로 행동을 하고 있었고, 성진의 입장에선 어린애 뒤치닥거리를 하다 지친 사람처럼 기진맥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말은 좀 심했지…. 그렇게 떠올려보던 성진은 좀 떨어진 싱크대쪽 쌀포대와 옆의 냉장고를 보고는 그 생각조차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대행이라 해도 현재의 선영 또한 어쨌거나 여자였고, 그녀 특성상 많이 먹는 타입은 아니었다.(젤리는 꽤 많이먹긴 했다.) 하지만 갑작스레 늘어난 2인분의 식사 분량은 자금이 여유롭지 못한 학생 신분의 성진이 아무렇지도 않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녀의 병원비로 빠져나갔던 돈과 현재의 생활비 충당은 그가 열심히 납품 아르바이트를 한다 해도 간당간당했다.



늘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려 해보지만 자신에게 주어지는 상황은 전혀 나아지는 게 없다는 걸 자각한 성진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지친 눈을 들어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뒤적였다. 몇 친구들과 여자들 전화번호가 지나갔고, 혜진의 전화번호에서 손가락이 멈칫했다. 성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만 하자, 김성진. 너 그렇게 자꾸 못쓰게 놀면 안 된다.”



성진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핸드폰을 닫아 도로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방금 자신이 바닥에 흩어놓았던 빨랫감들을 주섬주섬 다시 모아가기 시작했다. 문득 선영의 브래지어를 들어올리게 된 성진은 그것을 잠시 살펴보다가 다시 한숨을 쉬듯 한 손에 안아 든 빨래더미 속에 쑤셔넣었다. 아직 환자인 주제에 굳이 레이스달린 걸로 골라서 입기는.



그러다가 이번엔 그녀의 팬티를 들어올리게 된 성진. 조그맣고 하얀 그 팬티 또한 연한 보랏빛 선을 경계점으로 귀여운 레이스들이 촘촘히 달려있었다. 손에 전해지는 감각만으로도 매우 부드럽고 야릇한 느낌.



“…….”



성진은 가만히 선영이 입었던 팬티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곤 어느 새 자신도 모르게 냄새를 맡듯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곤 흠칫 놀랐다.



“칫….”



성진은 얼굴을 붉히면서 브래지어와 마찬가지로 얼른 빨래더미 속에 쑤셔넣었다. 주변을 둘러보아 더 이상 빨랫감이 없다는 걸 확인한 그는 잠시 후 머리를 긁적이며 세탁기가 있는 보일러실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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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그랑. 딸랑, 딸랑….



두꺼운 여닫이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는 선영의 머리 위로, 손님이 왔다는 신호를 알리는 방울소리가 춤을 춘다. 느지막한 오후에 하품이라도 하듯 PC방 카운터에 앉아있던 남자 아르바이트생의 눈이 입구쪽으로 돌려지자마자 문득 생기가 돌았다.



“어서오세요.”



평**면 들릴락말락하게 말하던 그의 목소리도 어째선지 조금 커진 것 같다. 한달 넘게 투병을 했던 선영은 꽤나 초췌해진 모습이었고, 다리는 끌듯이 절뚝거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기본적 외모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녀의 목 언저리까지 오는 살랑거리는 머릿결에 아르바이트생 역시 카운터에서 마음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녹차로 갖다 드릴까요?”



이미 선영이 몇 번 왔던 것을 보았던지 아르바이트생은 그렇게 물었고, 선영은 간단히 ‘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별 생각없이 머리칼을 귀 너머로 쓸어넘기며 빈 자리 중 하나에 앉았다. 하지만 아르바이트생은 오늘따라 그녀를 꽤나 의식하는 듯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면서 종이컵에 녹차를 담갔다. 그리고는 그것을 갖다가 선영 옆자리에 놓았다.



“좋은 시간 되세요.”



어쩐지 은근한 기대감을 담아 건네어지는 말이었지만 선영은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모니터 속의 자신만의 관심사로 시선을 향했다. 아르바이트생은 카운터로 돌아가 본연의 일에 착수할 생각은 안 하고 선영이 뭘 하는지 궁금한 표정으로 뒤에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선영은 보통의 20대 초반 아가씨들이 하는, 그러니까 미니 홈피 운영이나 방문, 혹은 채팅이나 캐주얼 게임 따윈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약간 게임에 대해 눈을 뜬 여자들이 하는 MMORPG조차도 선영에게는 제외였다. 그녀는 참으로 천 명 중에 한 명 볼까말까할 ‘여성이 PC방을 방문했을 때’의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곧바로 남자들이 격투라도 하듯 피터지게(?) 싸우는 ‘카잔 전쟁’ 전략시뮬레이션을 로딩시킨 것이었다.



중세 시대의 대포와 검, 창날 등의 이미지가 디테일하게 로딩 화면에 표시되었다. 완전히 게임 속으로 들어가는 그 과정에서 선영은 문득 타인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녀가 앉은 의자 뒤로 아르바이트생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선영의 묻는 듯한 시선이 보내지자 아르바이트생은 얼른 볼을 긁적이면서 더듬더듬 말했다.



“아, 아하하. 카잔 전쟁을 즐겨하시나봐요?”



“예. 그런데요?”



“아뇨. 그냥…. 여자분이 혼자서만 계속 여길 오시길래… 뭘 하는지 궁금해서 보았던 것뿐입니다. 그나저나 꽤 특이한 취향을 가지셨나봐요? 여자분이 카잔 전쟁을 하는 건 이례적으로 잘 없는 일이어서….”



“여자는 이런 걸 잘 안 하나요?”



“보통 남친분들이랑 같이 왔을 때 심심풀이로 하거나 어쩌다 한두번 해보는 경우 외에는 잘 없죠. 전략시뮬레이션이란 건 주어진 자원을 이용해서 공간을 활용해서 상대방을 쓰러뜨린다는 보다 남성적 취향에 맞추어진 게임이니까요.”



PC방 아르바이트를 하며 나름대로 쌓아온 게임 쪽 경향에 관한 지식을 피력하기라도 하듯 그는 자신있게 말했다. 하지만 선영은 ‘아, 그러세요.’라고 별 관심 없는 투로 다시 모니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카잔 전쟁의 로딩 화면은 끝이 났고, 멀티플레이용 인터넷에 접속하는 창으로 전환돼있었다.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하는 선영을 보며 아르바이트생은 우물쭈물 서있다가 결심한 듯 다시 말을 걸었다.



“저기… 원래 늘 혼자 다니고 그러시나요?”



“그런데요. 왜요?”



“아니 그저… 이렇게 이쁘신데 남친 분이라도 안 계신가 해서…….”



이쁘다는 표현을 들어서 기분나쁠 여자는 없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상황에 맞추어져야 하는 법이다. 선영은 뒤에서 끈질기에 돌아가지 않는 그 남자에게로 다시 고개를 휙 돌려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귀찮게 하지?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시선이 마주치자 그 아르바이트생은 이번엔 자기 목을 쓰다듬으며 멋쩍게 웃었다. 뭐 나름대로 착해보이는 스타일이긴 한데…. 도저히 자신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말도 빙빙 돌려서 하는 그의 분위기에서, 아무리 연애를 모르는 현재의 선영에게 있어서도 ‘이 녀석 자력으로 애인 만들기는 틀렸군’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뭐 하나 제대로 꾸민 흔적도 없는 외모에서 연애 경험이라곤 제로에 가까울 것이라고 그녀는 판단했다.



얼른 카운터로 가서 손님을 위한 아르바이트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라고 직접적으로 쏘아줄까 하던 그녀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시계를 보았고 그 다음으로 PC방 내부를 한바퀴 돌아보았다. 그리고선 의아한 시선을 건네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생긋 웃으며 말했다.



“지금 바쁜 시간은 아니죠?”



“예? 아 예, 바쁘지는 않습니다만….”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오는 여자는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는지, 그는 갖가지 생각을 머릿속에 교차시키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선영은 갑자기 킥 하고 실소하고 싶어지는 걸 간신히 참으며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제안 비슷한 것이기도 했다.



“저랑 게임 한판 하실래요?”



“카잔 전쟁이요?”



“네. 매일 넷상으로 불특정인이랑만 하는 것도 썩 긴장감이 없어서요.”



그리고는 어쩔 줄 모르는 그를 향해 슬쩍 한마디 다시 던져보았다.



“혹시… 이 게임 할줄 모르세요?”



“아, 아니요! 할 줄 압니다. 한판 해보죠 뭐, 그거. 으흠….”



“그냥 하면 역시 긴장감이 덜할 테니까, 내기 걸어보는 건 어때요?”



아르바이트생의 묻는 듯한 시선이 다시 건네어졌다. 선영은 청재킷 안주머니에서 신용카드를 들어보이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한쪽 눈을 살짝 가리면서 이쪽을 바라보는 각도가 묘한 매력을 생성해낸다.



“당신이 이기면 있다가 아르바이트 끝나고 저녁 데이트 한번 해드리죠. 물론 비용은 내가 대는 걸로. 영화를 보든 어디든 당신이 좋아하는 데로 가자구요.”



당연히 그 카드는 성진의 것이었고, 몰래 가지고 나와 이런 식으로 쓰여지는 걸 그가 나중에 안다면 길길이 날뛸 일이지만 선영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모르는 아르바이트생의 입장에서는 이게 웬 횡재냐 하는 심경이 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치료 단계라 선영은 별볼일 없는 흰 티에 청재킷,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뛰어난 미모를 지닌 그녀이기에 한 남자의 마음을 흔들게 하긴 충분했다.



그러다가 문득 아르바이트생은 위험 요소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제가 지면…?”



“앞으로 귀찮게 저한테 말 걸지 마시고, 본연의 일이나 열심히 하심 돼요.”



별 생각 없이 대답한 선영이지만 사실 그것은 개인적인 관점에서만 ‘특별할 거 있냐’는 식의 대답일 뿐이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생은 없는 자신감마냥 쉽게 상처받는 타입이기도 했다. 그것이 맞물려지며 선영의 제안은 말 그대로 별 의미 없이 사그라들어버렸다. 아르바이트생은 얼굴이 벌개진 채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카운터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아니, 뭐 그렇게 제가 귀찮으셨다면… 그냥 됐구요.”



선영은 멍청한 얼굴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잠시 후 헛웃음을 삼키며 의자에 등을 깊숙이 대고 팔짱을 꼈다. 뭐 저런 시시한 남자가 다 있나? 차라리 성진이라면 그 특유의 날카로운 미소를 히죽 띠면서 한판 하자고 재미있게 다가왔을 텐데. 그러다가 그녀는 문득 어쩐지 예전에도 이 비슷한 경험이 있지 않았나 하는 이유모를 직감 같은 게 들었다. 그나저나 김성진…. 싸우고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 녀석 생각이 나는 거지?



선영은 고개를 휙휙 저어버리고는 다시 ‘카잔 전쟁’의 넷플레이나 하기 위해 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려고 마우스를 다시금 붙잡았을 때였다.



“어이, 아가씨. 그 제안 내가 받으면 안 될까?”



선영은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컴퓨터가 꺼져있는 빈 옆자리에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한 건장한 남자가 앉아서 이쪽으로 몸을 돌려 쳐다보고 있었다. 컴퓨터 책상 위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그의 귀에는 여러 개의 피어싱이 되어 있었고, 짧은 머리칼 가운데를 뒤에서부터 앞머리까지 노란 색으로 염색한 모습이었다. 선영은 어쩐지 양아치를 연상케 하는 그의 외모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걸쭉한 웃음을 짓는 그의 뒤편엔 같은 패거리로 보이는 녀석들이 제각기 의자에 앉아 이쪽으로 몸을 돌려 흥미롭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무슨 제안인지는 아시나요?”



“물론이지. 아까부터 쭉 보고 있었는데. 저런 시시껄렁한 아르바이트생보다 우리랑 노는 게 더 재밌지 않을까?”



그리고는 선영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컴퓨터를 켜는 노란 머리의 청년. 선영은 순간 도움을 요청할까 하다가 그 소심한 아르바이트생은 물론이고 주변에 도움을 줄 만한 손님도 거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곤 차선책을 자력으로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친 데다 힘도 없는 현재의 선영에게 있어선 선택의 루트란 게 그다지 많지 않은 게 사실. 그녀는 여흥거리가 보다 위험한 내기가 되었음을 깨닫곤 불안한 심정을 아슬아슬하게 감추는 게 고작이었다.



반면에 노란 머리 청년에겐 정말로 여흥거리가 된 듯 여유 있게 키보드와 마우스를 가슴 앞쪽에 끌어당겼다. 손가락을 뚜둑뚜둑 풀어보는 그의 목구멍속에서 재미있어 못견디겠다는 음성이 거하게 튀어나온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 이쁜이.”



선영은 그 치근덕거림이 분명한 지칭에 소리없이 몸을 떨었다. 뒤에서는 이쪽을 관망하는 패거리들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그녀는 애써 그것들을 외면하기 위해 시선을 모니터쪽으로 고정시켜 집중했다.



하지만 그녀 나름대로 내면적으로는 하나의 실력을 시험해보기 위한 긴장감이 조성된 무대라 여기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카잔 전쟁’ 방송을 여러 번 시청하며 연구했고, 나름대로 PC방에서 몰래 연습을 해왔기 때문이었다.(성진의 집에서는 그녀 계정이 결제되어있지 않아서 net을 통한 대결이 불가능하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기력을 발휘해서 반드시 이기고 말겠다고 마음먹으며 ‘카잔 전쟁’의 맵을 선택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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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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