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61부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61







태환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선영의 말이 끝나자 곧바로 물어보았다.



「그 사람이라니?」



「왜, 저번에 말했던 멋진 남자 있잖아」



태환은 잠시 머리를 쥐고 생각에 잠기고는 아련히 떠오르는 이름을 타이핑했다.



「이기식… 이라는 남자였던가?」



「기억력도 좋아, 오빠. 칭찬해주지. 오늘 그 남자를 다시 만났어. 신생 프로게임단을 창설하고 초기 멤버를 구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중이었대. 어쩐지 자꾸 마주친다 했다니까. 아무튼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기식 씨는 나에게 스카웃 제의를 했어. 정말 멋지지 않아? 그렇게 잘생긴 남자가 내 실력을 필요로 한다니까. 거기다가 정식 창설 직전이라 그런지 계약 조건도 아주 좋아」



태환은 칭찬한다는 그녀의 앞 말에 잠깐 픽하고 웃었다가 이어지는 내용에 조금 생각에 잠겼다. 흐음, 그 이기식이란 남자가 그런 사람이었단 말이지. 가입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완고하게 밝힌 사람을 입단시키긴 쉽지 않은데. 혹시 선영이 그의 외모와 자상함에만 이끌렸던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던 태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경우에는 여러 부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봐야 맞다. 게다가 그녀한테 직접 물어본다 해도 별로 긍정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겠지.



이렇든저렇든 그 이기식이란 남자는 그야말로 엄청난 지원군을 업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선영이 입단하게 된 이상 팀의 명성은 따놓은 당상이다. 실력은 물론이고 여자인데다 연예인을 연상케 할 정도로 상당한 미모이니. 그 꽃미남이란 이기식과 함께 어울리며 팀을 꾸려나가는 장면은 생각만 해도 흐뭇한 광경이 연상된다. 물론 감독과 선수의 경계는 조금 있을 것이고, 선영의 약점을 극복하기까지 또한 시간이 약간 걸리겠지만.



그쯤까지 생각이 미친 태환의 눈에 다시금 ‘카잔 전쟁’ net플레이 대기실에 올라오는 채팅 메시지가 들어온다.



「어쨌건 나는 조만간 이 집을 떠날 거야. 그리고 창오빠한테도 기대지 않을 거야. 개인 숙소까지 마련해준다고 했으니까. 나는 그분의 지원 하에 온 노력을 들여서 ‘카잔 전쟁’ 플레이를 연마할거야. ‘스피어’가 제대로 스폰 기업을 잡아서 유명한 프로게임단으로 도약하는 그날까지」



「스피어?」



「그 게임단 명칭이 스피어야」



「그런 프로게임단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군」



「그럴 수밖에 없지. 앞서 언급했듯 아직 제대로 창설되지도 않은 신생 프로게임단이니까」



태환은 팔짱을 끼곤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영이 부담없이 입단하여 선배로서 입지를 먼저 확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아마 그녀의 실력과 여자란 신분을 감안해서 개인 숙소까지도 제공한다 했을 거겠지.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현재 그녀가 천재적인 두뇌로 그나마 할 줄 아는 ‘일’임을 감안하면 이만한 기회도 없을 것이다. 꾸준한 연봉으로 돈을 모아서 차후의 네 삶을 개척해나가라. 은선영. 그러다보면 현재의 ‘너’라 할지라도 분명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야.



그러나 태환은 지속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모든 것을 안심할 수는 없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비록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당한 지 2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짧은 시간이었다 할지라도 분명 사회경험이 있는 그였다. 그리고 세상의 메커니즘에 비추어 뜬금없는 행운에 꽤나 경계심을 갖고 있기도 했다. 신생 프로게임단이기에 그것에 관한 정보를 알아볼 수 없다는 건 납득은 할 수 있을지언정 의심을 안 할 수는 없다는 뜻이 된다. 물론 태환은 선영의 말에 거짓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발 더 나가서 선영이 철저히 믿도록 구슬려놓고 흑심을 품고 있을 그 누군가에 대한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녀가 ‘카잔 전쟁’으로 유명해진 현재, 기억상실증이란 뒷정보를 캐고 그것을 이용해먹을 작자가 이 험난한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리라곤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증거도 없는 불확실한 추측으로, 한창 기분이 업되어서 뭔가를 해보려는 선영의 의욕에 제지를 가할 수도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 태환은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지만 불을 붙일 생각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보고 있었다.



히키코모리란 내 입지에서, 그녀를 지킬 방법이…….



한참 동안 메시지가 올라오지 않자 선영은 기다리기 지루해졌는지 작별의 뉘앙스가 담긴 말을 띄웠다.



「난 이만 자러 갈래. 아직 좀 이르긴 하지만… 오늘 너무 오랫동안 바깥에 있었어. 피곤해」



「어? 어… 그래. 선영아. 수고했어」



한동안 뜸이 이어지다가 다시금 선영은 메시지를 띄워 올렸다.



「오빠가 걱정하는 건 알아. 그리고 그게 뭔지도 짐작이 가고. 하지만 기식 씨는 달라. 그분은 분위기부터가 뭔가 다르다니까. 난 그 남자와 함께 일이든 연애든 뭐든 열심히 해볼 생각이야」



태환은 네가 세상을 살아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사람 보는 눈이 생겼냐고 비웃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선영이 일을 하는 데 방해되지 않으면서도 최후에 믿을만한 하나의 방법을 간신히 떠올렸다. 예나에게 또 꽤나 귀찮은 일을 시켜야 하겠군. 물론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차후에 우려하던 상황이 발생한다면 도리어 그녀는 정의감에 불타겠지만.



태환은 나지막하게 말을 거는 느낌으로 메시지를 타이핑했다.



「선영아」



「음? 왜?」



「네가 찾은 길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해. 그리고… 그 이기식이란 남자에게도 후에 기회가 되면, 네 상태를 전하도록 하고. 만일 그게 어렵다면 또 내게 연락을 해」



「피, 겨우 그거 말하려고 뜬금없이 내 이름 친 거야? 고마워, 창오빠」



「그리고……」



태환은 흘끗 벽에 걸린 달력을 돌아보았다. 주말까지 감안을 한다고 해도….



「며칠 내로 네가 사는 거주지, 즉 성진의 원룸 앞에 소포가 하나 도착할 거야. 네 이름으로 되어 있으니까 웬만하면 성진에겐 보여주지 말고 너만 열어봐. 뭐 들킨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건 없겠지만, 설명이 길어질 테니…」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그리고 그걸 증거하는 메시지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띄워졌다.



「뭘 보내는데?」



「네 수호천사」



더더욱 의아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태환은 슬쩍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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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은 따뜻하고 기분 좋은 이불의 감촉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해는 벌써 중천에 떴는지 거대한 창문을 가린, 역시 거대한 커튼 틈으로 겨울 햇살이 힘겹게 통과하고 있었다. 아아, 그래. 여행 중이었지. 오늘이 여정 막바지의 날이고.



성진은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그는 호텔방 한 켠에 있는 인터넷 PC로 돌아갈 열차와 버스 시간표를 확인해볼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왼쪽 손에 부드럽고 물컹한 게 잡힘을 느꼈다. 성진은 고개를 돌렸고 무의식적으로 같이 자던 혜진의 젖가슴을 매만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



성진은 얼른 그녀의 가슴에서 손을 뗐다. 혜진은 누가 자기 몸을 만지는지 마는지도 모른 채 성진을 향해 누워서 쌕쌕거리며 잘도 자고 있었다. 흐트러진 새하얀 이불 사이에서 역시 군더더기 하나 없는 뽀얀 살결을 드러낸 채 알몸으로 잠에 빠져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성진은 곧 시선을 돌렸다. 보기 싫은 무언가에서 눈을 돌리는 동작은 아니었다. 성진은 한번 그녀에게 넋을 놓고 보거나 만지다보면 다시금 밀려오는 성욕을 감당할 수 없게 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언제나 적당한 수준에서 머물지 않고 반드시 끝장(?)을 봐야 겨우 진정되곤 했다.



미리부터 차단해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성진이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해서 거부하려고 해도 혜진이 그렇게 놔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섹스에서 발전한 연인이라 그랬을까. 둘은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을 증명이라도 하듯 하루도 빠짐없이 섹스를 했고 그건 아침이라고 종종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이를테면 지금 일어나 앉아있는 성진의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꼼지락거리며 만지고 있는 혜진의 손길이라든가.



“일어났냐?”



“…….”



혜진은 자는 건지 깬 건지 구분이 안 가게 여전히 눈을 감고 누운 상태로 계속해서 성진의 허벅지를 만졌다. 그녀의 손가락은 조금씩 성진의 자지 부근으로 꼬물거리며 올라가고 있었다.



성진은 그런 그녀를 흘끗 다시 내려다보았다가 모른 척 다시 나지막하게 말했다.



“일어났으면 씻고 얼른 옷 갈아입어. 막바지 일정 지연되겠다.”



“으음…….”



혜진은 여전히 졸린 어투로 가느다란 음성을 내며 기어코 성진의 자지를 붙잡았다. 그녀의 보드랍고 섬세한 움직임의 손놀림을 느낀 자지는 주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떡하고 치솟았다. 성진은 최대한 그녀의 손길을 무시하려 애쓰며 인내심이 담긴 어조로 낮게, 하지만 또박또박 말했다.



“식사까지 생각하면 의외로 시간이 촉박하다고. 여기서 꾸물댈 여유 없어.”



“우웅… 오빠아…… 그래도…….”



그녀의 손가락은 쉴새 없이 성진의 자지를 주물렀다. 딱딱하게 굳어지는 자지만큼이나 성진도 성욕이 무럭무럭 피어올랐고, 그런 오빠의 반응을 눈치챈 듯 혜진도 손가락 움직임이 점차적으로 집요해지고 있었다. 성진은 결국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손목을 잡아 자지에서 떼어놓으려 했다. 당연하게도 혜진의 손힘은 이럴 때 무척이나 세었고, 그걸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진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느라 상당한 애를 먹어야 했다. 그리고 간신히 그녀의 손을 떼어놓는 데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순간, 이번엔 그녀의 머리가 성진의 자지로 돌진해 들어왔다.



“허억… 야, 너 잠깐…….”



언제나 그렇듯 혜진은 그의 외마디의 제지는 한 귀로 흘려버린 채 그의 자지를 입 속에 넣고 혀로 귀두를 살살 간지럽혔다. 성진은 그녀의 머리를 붙잡고 떼어내려 했지만 혜진은 성진의 허벅지를 꽉 끌어안고 자지를 절대로 뱉어내지 않으려고 했다. 성진은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결국 그는 팔꿈치로 뒤를 지탱하곤 몸을 반쯤 뒤로 눕히며 신음처럼 말했다.



“늦는다는 말 안 들려? 헉, 헉…….”



혜진은 그제서야 자지 끝에서 침을 길게 늘어뜨리며 잠시 입을 떼었다.



“안 들려. 오빠. 하자.”



“무슨 여자애가 그렇게 성욕이 왕성하냐? 게다가 체크아웃 시간도 얼마나 남았는지 알고나….”



“몰라. 나도 이상하게 오빠만 보면 해도해도 부족한 것 같아. 그리고 자꾸 시간을 따지는데… 뭣하면 하루 더 묵는 걸로 연장시켜버리지 뭐.”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못할 것 같아? 와, 그럼 오늘은 하루 종일 오빠랑 할 수 있겠네.”



혜진은 생각만 해도 신난다는 듯 다시 자지를 입에 물고 힘차게 고개를 앞뒤로 움직여댔다. 성진은 떨리는 손으로 혜진의 어깨를 붙잡아서 제지하려 했고 혜진은 능숙하게 그 손을 밑으로 내려서 자기 가슴을 주무르게 만들어버렸다. 자지는 금방이라도 쌀 것 같이 붉게 치솟아올라 불끈거렸다. 성진은 마지막 힘을 짜내서 상체를 다시 제대로 일으킨 후 다른 쪽 손으로 그녀의 등을 눌렀다.



“나… 나도 일정이 있다고. 제발 좀 봐줘.”



“흐음…….”



혜진은 자지를 입에 문 채 빛나는 눈으로 성진을 올려다보다가 킥 웃으며 말했다.



“오빠, 지금 그거 이 순간을 빠져나가려고 거짓말하는 거지?”



“어? 어… 진짜야! 중요한 일정이야. 그러니까 너만 생각하면 안 되겠지? 자, 이제 그만…….”



“무슨 일정인데?”



“그… 러니까 그게… 중요한 약속…….”



성진은 차라리 과제나 시험공부 같은 학생의 본분을 짚을 수 있는 학기중이길 바랐다. 하지만 현재는 방학이라 그럴 수도 없었고 납품 일도 그만둔 마당에 뭔가 만만한 핑계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혜진은 그 사이에 그의 생각보다 더 빨리 앞서나가서 ‘(그 이유란 것의 타당성에 의문이 가지만)오빠의 의견을 존중함과 동시에 그녀 자신도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합리적인 타협 방식을 떠올린 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혜진은 그대로 혀를 자지에 갖다 대는 듯하더니 성진의 배 쪽으로 이동해서 가슴으로 타고 올라가 그의 젖꼭지를 살짝 깨물었다.



성진이 의아한 시선으로 몸을 움찔거리는 사이 혜진은 그대로 능숙하게 성진을 끌어안으며 그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성진의 가슴은 그녀의 젖가슴에 짓눌린 채로 침대 위에 밀려서 겹쳐지듯 강제로 뉘어졌다.



“허업… 읍…… 쭈쭙…….”



“쪽… 쪼옥…… 쭈웁, 쭈웁…….”



성진은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혜진은 일단 그렇게 성진을 쓰러뜨려놓고 그의 입술과 혀를 한바탕 빨아낸 후, 살짝 고개를 들어서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면 쉽고 좋은 방법이 있지. 얼른 하고 정리해서 나가는 것.”



“뭐…?”



“그러니까 빨리 하자, 오빠.”



성진의 어처구니없는 심경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자신의 위에서 짓누르듯 정신 없이 앵겨오는 혜진의 부드러운 살결들에 그토록 잡아두려고 발악했던 이성 따윈 그냥 한 순간에 소멸해버리는 것을 느꼈다. 성진의 자지는 혜진의 허벅지 사이를 스치면서 금방이라도 터질 듯 엄청나게 부풀어올랐다. 성진은 뭐라고 다시 웅얼거리려 했지만 혜진은 듣지 않겠다는 것마냥 재차 키스로 입을 막아버렸다.



“아, 진짜…! 내가 못살아!”



성진은 기어코 괴성을 지르며 혜진을 붙잡고 몸을 돌려 침대 위에 쓰러뜨리듯 눕혀놓았다. 그리곤 그녀의 목과 가슴을 정신 없이 빨아대었다.



“꺄아…….”



혜진의 즐거운 비명. 성진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 위해 서둘러서 그녀의 다리를 양 옆으로 벌리게 했다. 그리고는 자지를 보지 가까이에 들이밀었다. 혜진은 있는 힘껏 다리를 양 옆으로 벌려서 자기 가슴을 끌어안아 기대감 반짝이는 눈으로 성진의 자지를 응시하였다. 잘록하면서도 미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그녀의 허리를 꽉 붙잡은 성진은 새하얀 살결 한가운데에 자리한 그녀의 보지 숲 속으로 자지를 쑤우욱 밀어 넣었다.



익숙하면서도 중독된 쾌감이 혜진을 감싸오면서 야릇한 신음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아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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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날씨답지 않은 강렬한 햇빛이 도시를 가득히 물들였다. 벽인지 창문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유리창 앞에 서서 성진은 햇살 속에 파묻혀있는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은색과 검은색 줄무늬가 들어간 슬림한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그 주머니에 한쪽 손을 꽂은 채 바깥 경치를 바라보던 성진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호텔방 체크아웃 전에 혜진이 준비하는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은 아니었다. 과거에 사귀었던 여자들의 시간에 비추어서 그녀의 외출 준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는 걸 이미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참으로 엉뚱하게도 그는 여행 막바지에 다시 선영의 생각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걱정이었다. 마치 본능과도 같은, 아무렇지도 않게 떠올리게 되는 것.



‘녀석은 별 탈 없이 잘 있으려나? 게임대회에 돌아다니는 것 같던데 남자들 가득한 곳에 가서 사고치지나 말아야 할 텐데. 밥은 잘 먹고 있나? 반찬이야 늘상 떨어지지 않게 냉장고에 채워놓고 있긴 하지만…. 그리고 뭣하면 빌려준 카드로 사먹기야 하겠지. 그런데….’



새삼스레 왜 녀석의 안위가 걱정되는 거지? 녀석과 싸웠잖아. 아니, 일방적으로 나가라고 소리지른 쪽은 나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뜬금없게 녀석의 생각이 다시…. 멀리 떨어져있어서 그런가?



성진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피해서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때는 벌써 점심때라서 햇빛은 길게 들어오지 않았고, 그래서 쉽게 햇살로부터 물러설 수 있었다. 성진은 주머니에 꽂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자기 앞머리칼을 매만졌다.



‘현재의 선영은 전혀 다른 인격체이기에 녀석과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지만 녀석 안엔 내가 좋아해보고 싶었던 본래의 선영이 들어있다. 그래서 밥은 잘 먹고 있는가 따위의 안위 걱정은 당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의 선영이 아무리 얄밉게 행동해도 녀석 안에는 그녀가 들어있으니까.’



성진은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시늉을 해보았다.



‘그래. 내가 나가라고 히스테리를 부렸던 것도 전혀 다른 인격체인 선영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빌어먹을 자식. 하필이면 같은 외모로 있어서 사람 갈등하게 만들고 있어. 현재의 선영과 나는 정말로 아무 관계가 아니다. 아무 관계가…….’



한동안 머리칼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곧 툭하고 팔을 내려뜨렸다. 아주 납득할만한 논리로 끼워 맞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스레 자꾸만 꺼림칙해지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예 선영의 생각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로 했다. 게다가 내게는 지금 혜진이 있잖아. 결혼을 전제로 사귀기엔 이른 시점이긴 하지만, 애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자 생각을 하는 것은 어떤 면으로든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것이 설령 본래의 선영이라 해도…….



“오빠, 또 무슨 생각이 빠져있어?”



어느 새 다가온 혜진이 성진의 등 너머에서 기웃거리며 그의 얼굴을 살핀다. 준비가 다 끝났는지 그녀는 외투와 가방을 모두 한 켠에 정리해놓은 채 겉옷 차림으로 성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쪽 어깨가 모두 드러나는 노란색 블라우스에 검은 미니스커트, 그리고 무늬가 있는 스타킹을 신음으로써 귀여움과 섹시함을 동시에 살리고 있었다. 성진은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그녀의 큐트한 의상에 매번 감탄하면서도 또 감탄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무슨 여행 막바지까지 코디를 다 미리부터 구상하고 왔나?



그는 바깥 풍경에서 완전히 고개를 돌리고는 반색하며 혜진을 바라보았다.



“네 생각.”



“어, 진짜?”



“어떻게 하면 자기를 더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



“꺄핫….”



혜진은 성진의 팔을 가볍게 치고는 부끄러워했다.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그녀를 바라보며 성진도 따라서 미소를 띠곤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 이 여자를 사랑하고 싶다. 그래서… 마음 속을 끝없이 어지럽히는 선영이란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다. 이젠 좀 그만 그리워하고 편한 사랑을 하고 싶다. 성진은 몇 번이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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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성진은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메인히로인도 아닌 혜진이랑 놀고만 있고, 오히려 태환이 선영을 챙겨주는… 주연과 조연이 뒤바뀌는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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