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푸른 날 - 16부

그제야 나는 여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외마디 비명 같은 한마디가 내 입술을 열고 튀어 나왔다.



“팀장 님?!!”



“제대로 찾아오기는 했네.. 현정 씨 집.”



믿어지지 가 않았다.

그녀가 지금 온통 젖은 체 로 나를 보면서 살짝 웃고 있었다.

그렇게 보고자 했던 사랑스런 미소를 다시 보게 되는 순간이었지만 나는 기겁해서 그녀를 빨리 안으로 들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욕실에 물을 받아 놓을 테니 일단 들어가서 씻으세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겉옷은 어디다 벗어두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것이 중요 한 게 아니었다.

물에 빠진 생쥐 같은 그녀를 씻기는 일이 시급했다. 잘못하면 감기가 걸릴지도 모를 일이었기에..



“물이 충분히 데워졌어요. 이제 씻으세요.”



그녀는 말 없이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살짝 자리를 비켜주며 우윳빛 창문에 반사되어 드러나는 그녀의 실루엣에 주목했다.



“무슨 일 일까? 저렇게 젖은 체로..”



싱크대 위에 그녀의 검은 겉옷이 있었다.

겉옷을 내방 구석 진 자리에 있는 빨래 걸이에 걸어 놓자 그녀가 씻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쏴아아아아..



빗 소리와 그녀가 씻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귓가를 맴돌았다.

어쩌면 오늘 그녀는 내 방에서 자고 갈지도 몰랐다.

그러면 나는 그녀를 살포시 안고 잠이 들 수 도 있을 것이다.



“히히히.. 바라 던 일이 진짜 일어났어.”



벌써부터 온갖 즐거운 상상으로 인해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찾아온 이유보다 있어준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러 가지 기대감이 실처럼 엉켜 가슴속에서 설레임 이라는 감정으로 크게 부푸는 순간 이었다.



끼이이이..



그녀 가 욕실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방문이 열리는 그 순간을 숨 소리 조차 죽이고 기다렸다.



“나 다 씻었어.”



“네?”



이미 욕실에 있는 목욕 타월을 몸에 두르고 있어서 나는 머리를 닦아낼 타월 한 장을 건넸다.

그녀는 뭐가 부끄러운지 등을 돌린 체 로 머리를 말렸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보였다.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



“무슨 말씀을 요? 팀장 님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고마워.”



나는 이 이상 의 어색한 시간이 흐르기 전에 냉장고 안에서 차가운 오렌지 쥬스를 꺼내 평소 내가 아끼는 컵에 따랐다.



“팀장 님.. 감기 들어요. 우선 비타민부터 섭취하세요.”



“고마워.”



평소 하고는 아주 다른 소극적인 모습으로 그녀는 잔을 받아들었다.



뭔가 이상했다.



어딘지 그녀다운 느낌이 나지 않았다.



그 자신감에 차 있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간 거지?



“비가 많이 오고해서 현정 씨의 이력서를 보게 되었어. 주소.. 그 주소를 보고.. 찾아오는데.. 좀 어려움이 있었어.. 그래도.. 제대로 찾아와서 다행이야.”



또 다시 그녀에게서 암호 같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림 퍼즐을 맞추는 아이처럼 그녀가 제공한 조각난 낱말들을 하나하나 짜 맞춰 갔다.



“무슨 일 있었어요? 팀장 님?”



“종아리 아직 도 아파?”



“네? 아! 이제 괜찮아요.”



“좀 보여줄래?.”



뜬금없는 말에 나는 멍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녀 앞에 서서 살짝 몸을 틀어 종아리를 보였다.

그녀는 휴~~ 하고 짧은 한숨을 쉬더니 그만 앉아도 좋다는 의미의 손짓을 했다.



“많이 아팠지? 별로 때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현정씨가 원했던 일이었잖아?”



“네?”



“일부러 서류를 엉터리로 수정해서 나로 하여금 체벌 하게 했잖아? 그런 일을 시키다니 현정씨 도 나쁜 사람이네?”



그녀는 모든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 거려 참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미 내 속을 읽고 일부러 체벌을 했었다는 애기 인가?



“난 비가 싫어.”



“네?”



“비오는 날이 싫다구.”



“왜 요?”



그녀는 무릎을 끌어당겨 두 팔로 안고 고개를 숙였다.

두려움을 느낄 때 보이는 흔한 자세였다.



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그녀의 발가락이 앙증맞고 귀여워 보였다.



“나 어렸을 때... 우리 집은 부자였어. 하지만 엄마 아빠는 무척 바빴어.”



마치 다섯 살 짜리 어린아이처럼 그녀는 말을 하는데 꽤나 힘들어했다.



“그때 우리 집 세 들어 사는 남자가 있었어. 키타를 쳤는데 그 소리는 솔직히 듣기 좋았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나는 그녀의 말이 차츰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윗층에서 들려오는 소리만 들었어. 그러다가 호기심이 생겨 그 남자의 방에 들어가 봤어. 엄마 아빠는 일 나가시고 나와 그 남자만 있었어..”



아마도 그녀가 겪은 오랜 과거의 일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키타 소리가 좋았을 뿐 이었어. 그게 다 였어. 그 남자는 관심 없었어. 그런데.. 그런데...”



그녀는 갑자기 무릎에 묻었던 고개를 확 쳐들더니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프고 창피 했어. 그 자식이 아주 나쁜 짓을 했어. 어린 나에게 아픔을 줬어. 그리고 엄마 아빠 한테 이르면 그곳에서 뱀이 나올 거라고 했어. 그 뱀이 나를 잡아 먹을 거라고 했어. 그때부터 나는 키타 소리와 비가 싫었어. 그 남자에게 아팠던 날도 비가 많이 오고 있었어. 그랬던 거야.”



나는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 같으면서 절로 욕이 나왔다.

정황으로 보아 나의 그녀는 오래전에 누군가로 하여금 몸을 망친 것이 분명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지독한 일을 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진짜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놈을 찾아가 식칼로 토막을 내버리고 싶었다.



“나는 쉴 수 없어. 그 자식이 그 후에도 여러번 이나 나를 아프게 했어. 말을 듣지 않으면 진짜 그곳에서 뱀이 나와서 나를 잡아먹을 거라고 했어.”



“이제 그만해요 팀장님~!!”



나는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내 품안에서 떨고 있었다.

가여웠다.



비가 오는 날 마다 그녀는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는 듯 보였다.



충격이었다.



당당한 모습의 그녀에게 이런 아픈 과거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 그랬는데..



“호호호호홋~!!”



나는 깜짝 놀라 그녀를 품에서 놓아 버렸다.



그녀 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건방진 놈들. 내가 보란 듯이 이겨줬어. 이제 내 눈빛 만 봐도 남자 놈들이 무서워 해. 나는 그런 순간들을 위해 정말 열심히 했어. 그래서 김 유정이 그 놈들을 이기게 된 거야.”



정말 안스러울 정도였다.



지금까지 얼마나 괴로웠을 까?



고통을 이겨내고 당당한 모습으로 새로 거듭난 그녀는 분명히 승리자 였지만 경기 후유증을 안고 있는 프로 복서처럼 어떤 상황이 될 때마다 고통에 몸부림쳐 야 했다. 그녀는 비가 올 때 나 키타 소리를 들을 때 깊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비가 오는 날 마다 그녀가 이런 모습을 보였다면 사내에서는 말이 많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그녀의 부하직원들의 말을 들어보면 모두 그녀를 칭찬 하는 말 뿐이었으니 얼마나 그녀가 스스로를 조절하려 애쓰는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문제였다.



“팀장 님..”



“현정 씨는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나 사실 너무 외로웠다. 강해지는 건 나쁘지 않았지만 내 상처를 털어놓고 위로 받을 사람은 없었어. 다들 내가 강하다고 생각하니까.”



“팀장 님은 제가 본 어떤 여성 보다 도 강한 여성이에요. 그리고 오늘 저희 집에 오신 일은 정말 잘 하신 결정이었어요.”



“그렇지? 현정씨는 역시 나를 위로해 줄 줄 알았어. 그럼 나 이제 현정씨를 잠시 은신처로 삼아 쉬어도 돼? 이제 숨기는 일은 피곤해.. 너무 지쳐서..”



눈물이 흘렀다. 지금 순간 참을 수 없는 눈물이 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목이 멨지만 나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럼요. 쉬세요. 얼마든지... 제가... 팀장 님의 은신 처가 되어 드릴게요.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는 비밀스런 은신처가 되어 드릴 게요“



그녀는 지쳤는지 고마워 라는 말을 끝으로 다시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나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지금은 어떤 간섭도 하기 싫었다.

그녀가 충분히 안심하도록, 쉴 수 있도록 그렇게 내버려두고 싶었다.



내가 입던 트레이닝복을 그녀에게 입히자 그녀는 곧 잠에 빠져 들었다.



나는 젖은 그녀의 옷에 얼룩 같은 것이 묻지 않았는지 살피고 언제 어디서 떨어졌는지 모를 단추 하나를 주머니에서 발견하고 손바느질을 해서 달아주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답답한 새장 속에서 그녀를 꺼내어 줄 거야. 따뜻하게 가슴으로 품어 주겠어.”

나는 한 가지를 다짐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와 함께 하는 빗소리 가득한 밤은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했다.



<17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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