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st & Bitch - 프롤로그



프롤로그





*



금요일은 수업이 한 시간 밖에 없다. 그것도 1교시 수업이다.



수업을 마친 그녀는 교무실에서 하릴없이 창 밖을 보다가 하품이 나오는 걸 억지로 참는다.



퇴근시간까지 뭘 하며 시간을 때우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하품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만큼 따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퇴근 해 버릴 수도 없다.



비록 교사 경력 십이 년의, 선화여자고등학교에서는 그래도 제법 고참에 속하는 그녀라 할지라도.



그것도 달랑 1교시, 한 시간 수업하고 퇴근할 수는 더더욱 없다.







그러나 몇 년만에 처음으로 학급의 담임을 맡지 않아 마음은 가벼웠다. 마음만 가벼울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한가했다.



그래서 수업이 일찍 끝난 날은, 더구나 별다른 할 일도 없는 날은, 종종 교무실에서 인터넷 서핑이나 하며 퇴근 때까지



시간을 죽이기도 한다. 오늘처럼.







쇼핑 사이트를 뒤적이다 그녀는 문득 자신의 메일함을 열어 보았다.







며칠 전 그녀가 한 학급의 학생들에게 한 말이 떠올라서였다.



왜 유독 2학년 2반 학생들에게만 그런 말을 했을까?







아마도 자신이 1학년 때 담임을 맡은 학생들이 제법 많이 눈에 띄어서 그랬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2학년 2반을 맡고 있는 담임 선생님은 정년을 일 년 남겨둔, 애들이 "파파스머프"라고 부르는



정일성 선생님이라 그랬을 수도.





비록 지금은 애들에게 "파파스머프"라고 불리지만 오년 전까지만 해도 "성불"로 통했다.



"성불"은 "성난 불독"의 줄임말이다.





150센티가 겨우 넘는 작은 키, 왜소한 체구, 올챙이처럼 배만 볼록 나왔지만 얼굴 생김새가 영락없이 한 마리 불독처럼 생겼다.



더구나 화가 나면 얼굴이 벌개지면서 이마에 핏대가 돋는데 그럴 땐 선화여자고등학교에서 그를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딱 한 사람 교장 선생님 빼고는.



그 딱 한 사람인 "조희자 교장 선생님"이 오년 전에 정년 퇴임하신 이후부터는 그의 이마에 핏대가 돋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희자 교장 선생님의 퇴임 이후 오 년 만에 그는 눈에 띄게 활력을 잃어 버렸다.



아니 늙어 버렸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아옹다옹 하기는 했어도 그나마 학교내에서 유일한 상대였던 교장 선생님의 부재는 정선생님을 마치 꽁지 빠진 수탉 같이 만들어 버린 것이다.







늘 고3 담임을 맡아서 교내에서 대학 진학률이 제일 높았던 정선생님이었는데, 오년 전부터는 담임을 맡아도 1학년이나



2학년을 맡았다.





그리고 담임을 맡은 반은 완전히 애들 자율에 맡겨 버렸다. 심지어 출석조차 부르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반에 비해서 사건 사고가 적을 뿐만 아니라 요상스럽게도 반 성적도 상위급을 유지하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상하게도 정일성 선생님이 담임으로 있는 2학년 2반에 늘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어제, 그녀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말을 한 것인지도 몰랐다.





부모님이나 담임 선생님 혹은 친구에게조차 말 못할 비밀이 있으면 메일을 보내라고 그녀의 메일 주소를 2학년 2반



애들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익명성은 철저하게 보장해 준다. 물론 처음부터 익명으로 보내도 좋다. 당연히 메일 내용도 철저하게 비밀이다.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혼자서만 끙끙 앓느니 누구에게라도 하소연을 하고 나면 최소한 하지 않은 것 보다는 낫지 않을까?"라는 요지의



말을 하면서.







"메일이 왔을까?"



"과연! 한 통도 오지 않았다"



"한 통도 오지 않다니, 너무해!"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왠지 서운하기도 했다.







수업이, 1교시, 달랑 한 시간 밖에 없는 금요일의 시간은 한가롭게 그러나 조금은 따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 *





그녀는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마침 와인을 세일하길래 두어 병 사고 주말에 먹을 찬거리 몇 가지를 샀다.



그리고 지체 없이 집으로 왔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편한 옷으로 갈아 입고는 마트에서 산 와인 한 잔을 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학교에서 쇼핑하던 사이트에 접속해서는 책을 몇 권 주문한 뒤, 컴퓨터 모니터를 바꿀 요량으로 가격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큼지막한 24인치로"



"오호호! 이놈이 괜찮네, 특히 가격이 착하네!"



"게다가 디자인도 심플하고"



"그래, 이 놈으로 결정!"





주문서를 넣고 컴퓨터를 종료 시키려다 메일함을 다시 열어 보았다.



"아까는 오전이라 그랬는지도 몰라"



그녀는 어제 오후에 애들에게 말하고, 오늘 오전에 메일 안 왔다고 투덜거리며 아쉬워하며 동시에 안심하는 건



어쩐지 너무 성급한 것 같아서 그녀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메일함을 열었다.







"메일이 왔을까?"



"왔다!"





잡다한 광고 메일 속에 묻힌 한 통의 메일.





발신인의 아이디는 "dkazo"였고, 메일의 제목은 "1퍼센트만"이었다.



제목이 요즘 한참 보내오는 무슨 금융광고 같아서 내용은 읽어 보지도 않고 삭제할 뻔 했다.





편지의 내용은 짧았다.





[ "김지수 선생님께,



혼자서만 가슴에 담아 두고 있기에는 그 환희의 벅참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그 충만한 기쁨이 가져다 주는 달콤함이 자고 일어나면 없어질까 불안해서,



망설이고 망설이다, 아니 지금도 망설이고 있습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







지수는 편지를 읽고 나서 "풋"하고 웃었다.



여고 2학년생의 편지 치고는 지나치게 성숙한, 어쩌면 농염한, 느낌이 물씬 묻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남편 몰래 사랑에 빠진 귀족 부인의 아슬아슬한 정념의 번민을 노래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누굴까?"



지수는 2학년 2반의 학생들을 하나씩 머리에 떠올려 보았다.



1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애들은 비교적 선명하게 그렇지 않은 애들은 흐릿하게 머리 속에 그려졌다.







지수는 와인을 한 잔 더 따랐다.



인터넷 쇼핑을 하면서부터 홀짝거리며 마시던 것이 바닥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넘치도록 따른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면서 답장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너무 꼬치꼬치 캐묻는 듯한 인상을 주는 건 절대 금물!"



"그렇다고 무심하게 보이는 것 역시 금물!"





지수는 다시 와인 한 모금을 마셨다.







"내년이면 너도 고3인데 쓸데 없는 짓(비록 그 짓이 진정 뜨거운 연애라 할지라도) 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고 하면 욕이 한 바지 쯤 날아오겠지?"





다시 와인 한 모금.





"진지하게 그러나 무겁지 않게, 어떤 이야기든, 언제든, 귀 기울여 들어 줄 준비가 됐다는 것 정도만



알려 주는 선에서 마무리 하는 걸로 하자!"





또 한 모금.







[ "dkazo에게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는 얘기 알지?



대나무 숲에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고 외친 이발사(?)의 얘기 말이야.



비유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어떤 얘기든지 해.



나는 바람 없는 대숲이니까." ]







지수는 "메일 보내기" 버튼을 클릭했다.



마지막 남은 와인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다시 넘치도록 한 잔 따랐다.





"그런데 dkazo가 무슨 뜻이지?"



"약어? 조어? 합성어?"





지수는 좀전에 모니터 가격을 비교해보다가 띄워 놓은 검색창에 무심코 "dkazo"를 쳤다.



"암캐!"



"헉!"



"이게 뭐야? 암캐라니?"





그랬다. 키보드의 한/영 변환키를 누르고 "암캐"를 치자 "dkazo"되었다.



"dkazo"란 아이디의 뜻은 명백하게 "암캐"였다.





"맙소사!"





놀라움이 가시자 지수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모니터 화면에 떠 있는 그녀의 메일함에 뚜렷이 박혀 있는 발신인 "dkazo".





지수는 "dkazo"라는 아이디에서 문득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 냄새는 상스러웠고, 천박했으며, 금기와 음탕함이 뒤섞인 발정향이었다.



그녀의 내면 깊숙이 잠들어 있던 욕망을 일깨우는.







지수는 목이 말랐다.



와인 잔은 어느새 또 비어 있었다.



다시 한 잔을 따라 한번에 마셨다.





"하아......,"





긴 한숨인지 탄식인지 신음인지 정체불명의 소리를 내뱉고 나니 두근거리던 가슴이 조금 가라 앉았다.





"암캐"라는 아이디를 쓰는 아이? 누굴까? 또 메일을 보내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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