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한 여인 - 프롤로그
2018.12.13 19:00
천한 여인(프롤로그)
큰누나의 칠순잔치가 열리게 되어 나는 어쩔 수 없이 내키지 않는 서울행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영숙이 큰누나는 우리 집안의 맏어른이고, 우리가 자랄 때 맏딸로서 특히 막내인 나를 보살펴 주고 온갖 것을 챙겨 준 제2의 엄마같은 존재다.
그런데도 떨떠름한 기분인 것은 순전히 나 개인의 문제 때문이다.
나는 5년 전에 이혼했고 ---사실은 이혼을 당했다는 것이 더 적절하겠지만, 그 몇달후에는 사업체마저 부도가 나버렸다. 50대 중반에 이른 어느날, 갑자기 인생도 사업도 추락해 버린 것이다.
졸지에 당한 충격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나는 항상 아내에게 군림하는 존재였고, 아내 역시 나를 하늘처럼 받들고 사는 줄만 알았다. 그 아내가 근 20년이나 차이가 나는 젊은 놈에게 가랭이를 벌렸다는 것이 분노에 앞서 허망했다.
사업체의 부도에 따른 여파도 비슷했다.
왕년의 나는 잘 나가는 건설업자였다. 전성기 때는 도급순위 70몇위까지도 랭크 되고 내가 제2의 정주영이나 김우중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르막 길을 순항중인줄 알았던 내 인생이 정상을 눈 앞에 두고 비비적 거리더니 급전직하로 곤두박질 쳐 버린 것이다.
충격으로 인한 방황과 타락의 과도기를 지나며 그 고통은 어느 정도 아물었다. 대신 나는 철저하게 무기력하고 완전히 의기소침한 인간으로 변해 있었다.
재혼이나 사업구상은 물론, 세상 돌아가는 일에도 전혀 관심이 일지 않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싫은 것을 지나쳐 두렵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미 시집 장가를 보낸 자녀들과도 떨어져, 몇년 전부터 강원도의 꽤 외진 곳에서 백여평의 텃밭을 가꾸며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한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경제적으로는 여생을 지낼만한 여유가 있다는 점이다.
건설업이 한창 호황일 때 여기저기 잡아 뒀던 땅뙈기들이나 하청업체에 담보로 잡았다가 인수하게 된 부동산들이 부스러기처럼 남은 덕을 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나의 거처인 강원도 산골의 주택도 옛날에 댐공사의 일부를 도급받았을 때 자재를 야적하기 위해 직원명의로 구입했던 부지였다. 회사가 부도 날 때도 압류를 피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전원주택 붐이 일면서 한 업자가 이땅을 사서 팬시 10여채를 짓는데 나도 땅값은 두둑히 받고 한채를 양도받은 것이다.
나는 모처럼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에 나 스스로 "유배지"라고 불러 온 강원도 산골을 벗어나 서울로 향했다.
특급호텔의 대연회장에서 열린 칠순잔치는 성황이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매형이 서울의 대학 총장 출신인데다 장성한 자녀들도 나름대로 성공한 터라, 빼곡한 화환이나 차려진 음식이나 참석자 면면이 모두 시쳇말로 하자면 나무랄데 없는 "짱"이었다.
단 하나, 초라한 나를 제외하고는. ......
우리 집은 딸만 내리 셋을 낳고 다시 아들 셋을 내리 낳은 6남매다. 모두 2살 터울로 태어나 큰누나와 막내인 나는 꼭 10살 차이다. 그러니 6남매가 60대 초입에서 70대 문턱까지, 황혼기를 맞은 인생들이다.
"너 얼굴이 많이 상했네. 어떻게 지냈니?"
"에그, 꼴이 말이 아니구나. 빨리 새 장가를 들어야지."
예상했던대로 누나와 형들뿐 아니라 매형과 형수들도 빠지지 않고 한마디씩 하는 것이 지겹다 못해 울화가 치밀 지경이었다.
잔치 진행도 지겹고 지루했다. 개회사에 축사에 주인공을 비롯해 남편과 자녀들까지 약력을 소개하고, 이어 목사의 축도와 답사까지 이어졌다. 케이크 커팅을 한 뒤 한장 여흥이 무르익었으나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는 나는 살짝 자리를 뜨기로 했다.
그런데 새롭게 파티장에 들어서는 3명을 보며 일단 의자에 다시 앉았다.
키가 훤칠한 중년의 백인남자와 그의 팔짱을 낀 검은 이브닝드레스 차림의 중년 여인, 그 옆에는 한복을 차려입은 30대 여인이 함께 중앙무대에 자리잡은 큰누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나도 가족석이라고 큰누나에서 몇자리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기에 그들을 정면으로 볼 수 있었다.
3명은 화사한 꽃바구니와 선물상자들을 들고 있어 하객이 분명한데 나는 그증에도 이브닝드레스 차림의 중년여인에게 시선을 쏠렸다.
나이는 50대, 혹은 내 나이 쯤 되었을까? 물들이지 않은 반백의 머리는 파마를 했고, 약간 색깔이 들어 있는 안경을 꼈다. 큼직한 알맹이의 진주 이어링과 목걸이는 반백의 머리와 검은 드레스와 적절한 앙상블을 이루는 것 같았다.
중년 여인답지 않게 몸매에 군살이 거의 없다. 가슴은 적당히 풍만해 보였고 몸에 착 붙는 드레스에 약간의 뱃살이 짐작되지만 탱탱한 히프에 이어져 날씬해 보일 정도였다.
차이니스 스타일로 옆구리가 약간 터져 통통하고 아담한 다리가 들어나는데 로우 힐을 신은 걸음걸이는 사뿐싸뿐하면서도 자신있어 보였다.
무엇보다도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전신으로 풍기는 기품과 우아함의 분위기였다. 말로 표현하기조차 어렵지만 나이를 먹어서 더욱 세련되고 은은한 매력이 얼굴뿐 아니라 온몸에 배어 있는 듯 했다.
그 여인은 곧바로 큰 누나에게 닥아 오더니 아마 70송이의 장미를 담았을 풍성한 꽃바구니를 건네며 "영숙아, 생일 축하해."라고 말했다.
"너, 너 ......문자, ...... 오문자 맞지?"
자기에게 닥아올 때부터 의아스런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던 큰 누나는 그녀의 인삿말에도 바로 대꾸를 못하고 아래 위를 훑어 보다가 소리쳤다.
"그래. 나 문자야. 정말 오랫만이지?"
"이 도깨비 같은 기집애! 어디 쳐박혀 있다가 이렇게 귀신처럼 불쑥 나타나니?"
"늦어서 미안해. L호텔에서 파티를 연다기에 시청앞으로 갔더니 잠실에도 같은 이름의 호텔이 있다더군. 그래서 허둥지둥 다시 이리 온거야."
"오늘 늦은 거 탓하는데 아니야, 이년아! 10년 전, 30년 전에는 왜 소식 하나 없었니?"
누나의 말투로만 보면 꼭 싸움을 거는 것 같지만 벅찬 반가움의 표현이라는 것을 그녀뿐 아니라 주위사람들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두 여인은 테이블을 중간에 두고 서로 몸을 굽혀 얼싸 안았다.
오문자! ...... 나도 큰 누나만큼이나 놀랍고 반가웠다. 특히 그녀와 나 사이에는 비밀이랄까, 말못할 사연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옆에서 지켜 보면서도 그녀가 오문자라는 것에 실감이 가지 않았다.
우선 혼자 세월을 피해 있었는지 너무 젊어 보인다. 내가 알기에 그녀는 영숙이 누나와 동갑, 그녀 역시 지금 70살인데 누가 누나와 같은 또래로 볼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저 기품과 우아함은 ......? 저게 옛날 우리가 "납작코" "오리궁뎅이"라고 놀려대기도 했던 문자누나란 말인가. 그보다도 그녀의 본색은 "부엌떼기", 바로 우리집 식모였었다.
그동안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지만 정말 믿기 어려운 변신이었다.
"이리 와! 좀 차근차근 이야기 하자."
큰누나의 말에 따라 그녀는 아까 큰 매형이 앉았던 의자에 옮겨 다시 두손을 맞 잡았다.
"오늘 행사를 알았다면 그때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
"그랬다가 네가 오지 말라면 끝장이다 싶어 이렇게 불쑥 부딪혀 보기로 했지."
그녀는 미소를 띤 얼굴로 잔잔하게 말했다.
"미친년, ...... 이렇게 파파할멈이 돼서 뭐 지난 날을 따질게 있니?"
"파파할멈이라니? 이 가시나야. 너 정말 곱게 늙었어. 이렇게 화장까지 하니 정말 새색시 같아. 그래 , 너는 변함 없이 공주마마야."
두여인의 상봉은 세월을 잠시 돌려 놓은 듯 욕설을 섞어가며 10대 소녀처럼 발랄하게 떠들고 깔깔거렸다.
"어머니는 ...... ?"
한동안 호들갑을 떨다 문자가 불쑥 물었다.
"돌아가셨지. 벌써 10여년 됐어. 아버지는 그보다 몇년전에 ......"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두손으로 눈을 가리며 "흐윽!"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곧 어깨를 들먹이며 울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여전히 흐느끼면서 말했다.
"내가 죄인이야! 내가 나쁜년이야! 아, 그토록 착하고 고마운 분들 ...... "
어느새 영숙이 누나도 울고 있었다.
"자책하지 마. 나도 네가 얼마나 마음에 걸리고 미안했는지 몰라. 정말 지울 수 없는 빚이었어. 그나마 지금이라도 만나 회포를 푸니 정말 좋다. 이 기집애야."
"영숙아. 나한테는 그 때가 내 인생에 유일한 동화 같은 시절이었어. 나이 들수록 사무쳐서 정말 너를 죽기 전에 한번은 만나야 했어."
두 여인은 또 꼭 끼어안고 울다 뭐라고 속삭이더니 함께 깔깔 거렸다.
이색적인 방문객의 등장, 잔치 주인공과의 시끌버쩍한 상봉에 좌중의 여흥조차 잠시 중단되고 모두의 시선이 두 여인에게 몰렸다.
"어머! 문자 언니 아냐?"
둘째인 영옥이 누나가 닥아 와 역시 포옹했다. 영옥이 누나가 막내인 영미누나를 불렀다.
"영미야, 이리 와! 여기 문자 언니가 왔어!"
영미 누나 역시 문자의 등장을 알고 있을텐데 외면하고 있다가 영옥이 누나가 큰소리로 부르자 마지 못한 듯 와서는 "오랫만이네."라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문자는 다른 누나들과처럼 포옹을 하려다 영미 누나의 토라진 표정을 보고 "잘 있었어?"라며 손을 내밀었다. 두여인은 악수만 하고 더 말도 나누지 않았다.
원래 쌀쌀맞고 성깔 있는 영미 누나는 아직도 뭔가 문자와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나도 인사를 하려 닥아 가는데 맏형 영철 형님이 가로 막았다.
"이거 오리 궁뎅이 누님 아냐!"
"나이 들어도 놀부대감 심술은 여전하군."
문자와 영철 형님이 악수하고, 이어 둘째 영수 형님과도 서로 손을 흔들며 담소했다. 이런 인사도 결국 나이 서열대로 하는 꼴이 되어 나는 6남매중 꼴찌로 문자 앞에 섰다.
"나 영도예요."
"어머나!"
문자는 내 아래 위를 훑어 보더니 확 끌어 안았다. 나도 두팔로 꼭 그녀를 휘감았다. 나는 잠시 감전된 기분이었다. 앞가슴의 뭉클함이 내 몸에 전해지고, 린스 냄새인지 향수인지 아니면 그냥 체취인지 향긋한 냄새가 나를 자극했다.
두 형들과의 인사 방법과 틀린 것으로 보아 그녀도 내가 더 반가운 모양이다.
"아아! 우리 꼬마 도령 ...... 보고 싶었어!"
그녀는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영탄조로 말했다.
"야, 꼬마 도령은 ...... ? 영도도 내년이면 환갑이야."
영숙이 누나가 옆에서 참견했다.
"그래도 나한테는 여전히 꼬마 도령인걸. 이렇게 흰머리에 주름살이 있어도 ...... "
그녀는 뒷굼치를 들어 내 뺨에 뽀뽀까지 했다. 그 과장된 행동에 무안해서 얼굴이 붉어 졌지만 전혀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나도 한두마디 의례적인 인삿말을 하고는 곧 자리를 비켰다. 아직도 소개하고 소개 받아야 할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매형과 형수들까지 간단히 수인사를 한 뒤 그녀는 동반자인 백인 남자와 한복차림의 30대 여인을 우리에게 소개했다.
"내 아들이야. 여기는 며느리. 아들이 입버릇처럼 엄마같은 코리안 여성하고 결혼한다고 하더니 정말 최고의 베터 하프를 만났지."
"안녕하십니까? 토마스 맥밀란입니다만 그냥 탐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녀의 아들은 과히 어색하지 않은 우리말로 자기 소개를 했다. 그러나 이 말은 연습을 했던 모양으로 다른 한국어는 거의 하지 못했다.
토마스는 미국의 한 다국적 회사의 개발담당이사로 1주일쯤 전 한국지사의 설립 타당성울 검토하려 한국에 오는김에 어머니를 함께 모셔왔다고 했다.
업무가 끝나는대로 모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내용들을 나는 귀동냥으로 들을 수 있었다.
문자에게 "다시 한번 만나자."고 하자 그녀는 명함을 건네 주었다.
도리스 M 맥밀란. --- 영문으로 적힌 이것이 옛날 오문자의 새 이름이었다.
명함에는 미국 남동부의 집수소와 전화및 우편번호, 그리고 한국에서 통용되는 휴대폰 번호도 실려 있었다. 나는 그 명함을 지갑에 간직하고 여흥이 이어질 때 살짝 파티장소를 나왔다.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영동고속국도는 체증이 심했다. 그럴수록 위험하게 끼어드는 얌체족들도 많아 나는 더러 당하기도 하면서 운전에만 신경을 쓰느라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다. 평시보다 한시간쯤은 더 걸려 집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 불을 켜며 들어서는 것은 정말 싫은 일중의 하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들어서자 비로서 시장끼가 느껴졌다. 음식이 넘쳐나는 잔칫집에서 배를 곯고 온것이다.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까 하다가 포기했다. 설거지를 한다는 것도 정말 싫기 때문이다. 내 보금자리로 돌아 와서도 모든 것이 짜증나고 우울했다. 혼자 사는 늙은 홀아비의 궁상이며 비애다.
나는 꼬냑병을 들고 소파에 앉아 TV도 켜지 않은 채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알코올 기운이 조금씩 퍼지는 것을 느낄 무렵 오문자가 다시 등장했다.
그리고 내 상념은 훌쩍 50년 이상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뛰어놀기 시작했다
오문자 이야기를 하려면 일단 당시의 상황과 배경을 설명해야겠다.
우리 고향은 황해도 해주로 6.25사변이 일어나자 1.4후퇴 때 피난봇짐을 쌌다.
우리 6남매와 아버지 엄마, 할머니까지 낀 아홉식구는 엄동설한에 남쪽으로 남쪽으로 발길을 옮겨 근 한달만에 대구에 피난짐을 풀었다.
당장 끼니를 때우고 잠자리를 얻는데 무진 고생을 했다. 당시 대부분 북한 출신 피난민이 그랬듯 아버지 엄마는 우선 봇짐에 넣어 왔던 시계나 반지, 금비녀들을 팔고 채소, 땅콩, 미군부대에서 흘러 나온 물건들을 받아 노점이나 행상을 하는등 닥치는대로 장사를 했다. 누나나 형들도 껌이나 초콜릿 몇개를 들고 행인을 좇아 다니며 구걸하듯 물건을 팔았다.
그래도 아홉식구는 늘 허기진 상태였다. 간혹 구호단체에서 분유에 쌀을 넣어 끓인 죽을 나누어 줄 때면 우리 6남매는 때로 귀쌈을 맞아가며 두세번씩 받아 가족 모두의 하루 끼니로 삼기도 했다. 미군부대 음식찌꺼기로 만든 이른바 꿀꿀이죽을 사면 누나들이 캐온 나물에 물을 새로 붇고 끓여 훨씬 멀개지고 고기냄새보다 풀냄새가 진한 것으로 배를 채우기도 했다.
나는 미군들만 보면 다른 애들이 하는 것처럼 "헬로, 찡껌(츄잉껌) 기브 미."하고 손을 내밀었고 운 좋으면 껌이나 초콜릿을 얻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나와 두형은 피난민 학교를 다녔다. 고향도 집도 다 잃었으나 자식이라도 잘 키워야겠다는 일념일 것이다. 나는 전쟁이 안났다면 입학할 나이였으므로 1학년에 편입했다.
다만 누나들은 --- 뒷날 두고두고 부모를 원망하는 일이 됐지만 --- 학교를 보내지 않았다. 누나들 역시 장사를 하거나 아버지 엄마가 장사를 하는 중 집안일을 보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몇년쯤 후 아버지는 시장 입구에 쌀가게를 차렸다. 그 쌀집이 잘되며 우리는 차츰 안정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이북에서 목수와 미장이 일을 했다는데 그 손재주가 쌀장사에도 궁합이 맞은 모양이었다. 쌀을 되나 말로 팔 때는 쌀알을 모두 세워 홍두께로 살짝 밀어 낸다. 반면 남의 쌀을 살 때는 꾹꾹 눌러 매매차익 말고도 그 손재주로 상당한 이득을 본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시골로 쌀을 사러 가게 되면 엄마가 가게를 보는데 그럴 때면 "한가마에 5되는 손해를 본다"는 아버지의 불평을 들은 것도 있다.
다소 여유가 생기자 우리는 집도 마련했다. 국유지에 피난민들이 모여 판잣집 20여호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에 우리도 방 3개짜리 집을 지은 것이다. 하꼬방이라고 부르는, 깡통조각을 이은 것으로 지붕을 덮고 송판과 박스들로 벽을 만든 판잣집이었지만 피난후 처음 갖게 된 내 집에 가족들 모두가 감개무량했다.
누나들도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다만 몇년을 놀았기 때문에 내가 4학년 때 큰 누나는 겨우 여고 1학년에 입학했다. 나와 꼭 10살 차이가 나면서도 학년은 6년 차밖에 안 나는 것이다.
하기야 당시 피난민들에게 그런 경우는 흔했다. 4학년 우리반만 해도 남자 여자 모두 나보다 3~4살이나 더 많은 노털 학생들이 몇명씩 있었다.
우리집에는 식모를 두어 누나들은 모두 집안일에서도 해방되었다.
우리는 피난민들중 드물게 안정을 찾은, 아니 어쩌면 성공했다고 할 정도였다.
우리가 피난민촌에 터전을 잡은지 몇달후 오문자네도 이곳에 들어왔다. 문태라는 그녀보다 3살 많은 오빠와 부모등 4식구였다.
우리와 문자네는 20여가구가 모여사는 피난민촌에서 극명하게 대조되는 가정이었다.
우선 우리집은 동네에서 경제적으로 제일 여유가 있었고, 문자네는 겨우 방한칸 있는 판잣집에서 때로 끼니를 거를만큼 가난했다.
가족 구성에서도 큰 차이가 났다. 우리집도 가끔 부부싸움도 하고 형제끼리 토닥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화목한 가정이었다.
문자네는 화목이라는 말을 붙이기조차 어려웠다. 나는 그렇게 가족을 매질하는 경우를 처음 보았다. 문자 아버지는 전형적인 술주정뱅이였는데 아내고 아들, 딸을 마구 때렸다.
문자 어머니는 억세다는 평안도 여자였는데 웃으면 양볼에 보조개가 패이는 무척 교태스런 미인이었다. 그러나 역시 술을 잘먹고 남편에게 맞으면서도 "죽여라, 이놈아!"라며 달려드는 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별스럽게 보였다. 또 남편에게는 얻어터지면서 그 분풀이처럼 아들, 딸은 잘 때렸다.
문태도 건뜻하면 제 누이동생을 때렸다. 문자는 가족 모두에게 얻어 맞기만 하는 제일 불쌍한 존재였다.
부부는 직업도 없으면서 맨날 술에 취해 있었고 싸움을 하게 되면 세간살이도 다 때려 부셨다가 싸움이 끝나면 부서진 가구를 다시 꿰어 맞추고 함께 술을 마시며 희희덕거리기도 하는 기묘한 사람들이었다.
문태는 철공소 같은데를 다녔고, 영숙이 누나와 동갑인 문자는 학교도 안다니며 부모가 없을 때면 공터에서 여자애들이 하는 고무줄이나 오자미 놀이에 가끔 참여했다. 그러나 옷차림도 남루했고 얼굴도 맨날 부스럼 같은 것이 나 있어 동네아이들한테도 업신여김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늘 침울했고 한번도 웃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사온지 몇달 후 문자 아버지가 죽었다. 그것도 미군부대에 뭘 훔치러 갔다가 철조망에 매달린 채 총에 맞아 죽었다고 했다. 리어카로 관이 실려 나갈 때 문자 어머니는 관에 매달려 온갖 넋두리를 하며 통곡했다. 어찌나 심하게 우는지 구경하는 나도 눈물이 날 정도였는데 아들, 딸은 화난 표정으로 눈물 한방울 안 흘리는 것이 내게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과부가 된 문자 어머니는 혼자서 술취한 날들이 많아지고 화장이 더 짙어지더니 몇달도 안되어 단칸방에 남자를 끓어들인다는 소문이 났다. 동네 사람들은 "자식 교육을 못시키겠다"며 문자 어머니를 내쫒자는 구수회의까지 열었다.
그무렵 문태는 집을 나갔다. 대구에서 꽤 떨어진 어느 대장간에서 일한다고 했다. 문자는 더욱 외롭고 불쌍해 졌다. 가끔 한밤중 밖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그녀를 동네사람들이 보기도 했는데 그때는 문자 어머니가 다른 남자를 집으로 끌어 들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하루는 문자가 우리집 누나방에 누워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문자 어머니를 쫓아내기 전에 그녀는 어디로 사라져 버렸고 끼니도 떨어진 터에 문자는 병이 든 것을 영숙이 누나가 알고 집으로 데려온 것이다.
아버지 엄마도 어쩔 수 없다고 일단 며칠은 문자를 집에서 묵도록 했다. 그녀는 한 이틀쯤 심하게 앓다 겨우 몸을 추스렸다. 그런데 그녀가 온 뒤로 "이가 옮았다"고 누나들이 난리를 피웠다.
다음날 엄마는 문자를 목욕탕으로 데려갔다 오더니 "때가 한말이나 나왔고 온몸이 멍투성이"라고 했다. 나는 어떻게 사람이 한말의 때를 몸에 지니고 살 수 있을까 궁금했다.
때를 빼고 이가 들끓는 옷을 갈아 잆었어도 그녀는 여전히 천덕꾸러기로 보였다. 하루 종일 침울한 얼굴에 전혀 말이 없고, 조그만 인기척에도 깜짝 놀라며 불안해 하고 남의 눈치만 살피는 것 같은 표정에 우리 가족 모두가 그녀에게 도대체 정이 가지 않았다.
문자가 우리집에 온지 4~5일 지나 그녀의 어머니가 찾아 왔다. 과자 한봉지를 사들고 온 그녀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며칠 집을 비우게 됐는데 그동안 보살펴 주어 고맙다."면서 "이제 부산에 살게 되었으니 문자를 데려 가겠다."고 했다.
"난 안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오들오들 떨고 있던 문자는 자기 어머니를 독기 어린 눈으로 쳐다 보면서 말했다. 문자 어머니는 웃으면서 얼르고 달랬지만 문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이 쌍년의 에미나이가 ...... !"
그녀의 주먹이 번개처럼 딸의 얼굴을 가격했다. 아버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오? 아무리 댁의 딸이라도 이 집안에서 폭력은 용납못하오!"
아버지의 기세에 눌려 문자 어머니는 주춤했는데 문자가 도발적이었다.
"당신은 엄마도 아냐! 아니, 당신은 인간도 아냐! 남편 죽은지 석달도 안 돼 새남자를 끓어 들이고, 내 이름도 홍문자를 오문자로 바꾸고 ...... "
"이 에미나이가 당장 아가리 못 닥치간!"
그녀는 딸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눈을 치뜨고 오히려 바락바락 달려들었다.
"새 남편한테 버림받자 또 남자들을 끌어 들이고, 껀뜻하면 매질을 하고 날 팔아버리겠다더니, ...... 나를 패고 싶어서 왔소? 어디 팔아 먹으려고 왔소? 차라리 고아원엘 들어가더라도 이제 엄마하고는 못 살아."
"어, 어, 쌍년 아가리를 찢어 버릴까 보다."
억센 평안도 여자도 독기를 잔득 품은 딸을 꺾지 못했다. 자신의 창피함만 자꾸 드러나자 "이 쌍년, 나중에 보자."라며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도망치듯 빠져 나갔다.
어머니에게 대들면서 터져나온 몇마디 말로 문자의 기구한 운명도 함께 드러났다. 남매의 아버지는 피난길에 병을 얻어 죽었다고 한다. 그 몇달후 문자의 어머니는 오씨라는 새남자를 만나 가호적을 하며 아이들 성도 오씨로 바꾸어 버렸다.
그런데 그 남자 마저 죽자 이 남자 저 남자를 끌어들이다 한 남자와 살림을 차리기로 한 모양인데 며칠동안 우리집에서 지금껏 자기가 살아왔던 환경과는 다른 가정을 보게 되면서 "죽어도 못간다"고 버틴 것이다.
우리집에서도 문자는 골치꺼리였다. 고아원은 이미 나이가 많아서 갈 수가 없었고 다 큰 여자애를 살벌한 바깥세상에 그냥 내던질 수도 없었다.
아버지와 엄마, 영숙이 누나가 그 문제로 며칠동안 끙끙대다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아버지는 온가족이 모아놓고 선언하듯 말했다.
"앞으로 문자도 우리 가족이다. 너는 우리를 아버지 엄마로 부르고 영숙이 아래는 다 네 동생들이니 모두 화목하게 지내도록 해라."
"그래도 돼요?"
가족회의처럼 둘러 앉았을 때부터 눈을 힐끗거리며 불안해 하던 문자는 이 한마디만을 했고,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하항!"하며 봇물터지듯 통곡을 했다.
피난민들은 생활이 각박하면서도 또 의협심과 동정심도 있었다. 문자도 그렇게 해서 우리 가족이 되었다.
아버지는 문자도 학교를 보내려 했다. 그러나 문자는 한사코 그것만은 사양하면서 집안 일을 돕겠다고 했다. 식모가 있었지만 10명 가족의 뒷바라지를 혼자 해내기는 힘든 일이었다. 문자는 가족이라면서도 식모 보조의 역할을 맞게 됐다.
그래도 가족으로 인정받으면서 문자는 놀랍게 변해갔다. 그녀는 원래 명랑하고 수다스러운 것 같았다. 농담이나 장난도 잘 치고 동네 아이들하고 놀 때도 옛날의 침울한 구석이 없고 오히려 아이들을 휘잡았다.
특히 내가 동네 아이들한테 얻어 맞기라도 하면 내손을 잡고 그집까지 가서 그애를 불러내어 야단을 치거나 쥐어박기까지 하며 내 편을 들어 주었다.
또 밥을 무척 많이 먹었다. 세끼를 먹고서도 찬밥이 남으면 혼자 부엌에서 먹어 치웠다. "쌀가게집이 아니었으면 구박께나 받았겠다"고 식모 아줌마가 놀리기도 했다.
영양실조에서 벗어나면서 문자는 마치 꽃봉오리가 터지듯 환한 얼굴로 변해 갔다. 얼굴의 부스럼은 없어지고 숯이 많은 머리칼은 옻칠을 한듯 윤이 났으며 하얀 피부의 양볼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했다.
우리집을 처음 찾는 손님이 "큰따님이 참 예쁘군요."라고 하면 진짜 딸인 세명의 누나는 입을 샐쭉거리기도 했다.
얼마 후 그 식모가 우리집 일을 그만 두게 됐다. 남편이 부상을 입어 국군병원에 있는 동안 아이들은 시부모에게 맡기고 돈을 벌러 나왔는데 남편이 퇴원을 하개 되자 함께 시골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우리집에서는 새 식모를 구하려 했다. 그러자 문자가 엄마에게 간청했다.
"제가 집안 일을 다 해낼테니 저한테도 아줌마가 받던 월급을 주세요."
미심쩍어 하면서도 문자는 정식 식모가 되었다. 그녀는 부지런하고도 억척스럽게 일을 잘해냈다.
아버지와 엄마도 만족해 했고 할머니는 가끔 식모들에게 업신여김도 받아왔는데 문자가 싹싹하게 굴자 "우리집 복덩이"라고 칭찬도 했다.
그래도 가끔 형이나 누나들은 도시락 반찬이 나쁘다거나 양말을 안 기워놨다는 것들로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욕을 해대기도 했다. 우리가 "언니" "누나"라고 불러도 그녀의 신분은 "부억떼기"를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한편 6학년으로 진급하면서 나는 큰 변화가 생겼다. 우선 나만의 방을 갖게 되었다.당장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피난 생활에서도 아들들은 학교를 보낼만큼 우리 아버지의 교육열은 대단했다. 그런데 두 형들은 국민학교에서는 우등상을 탈 정도로 공부룰 잘 했건만 1차 중학입시에서는 모두 낙방해 2류 중학교를 다녀야 했다.
삼세판이라는 각오였을까, 아버지는 막내인 나만은 꼭 1류중학에 넣어야겠다고 작정한 모양으로 뒷간을 집 밖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방을 새로 들였다. 바로 내 공부방이고 우리집에서는 처음으로 의자가 달린 책상까지 마련해 주었다.
독방을 갖게 된 나는 정말 오붓하고 행복했다.
그러나 조금 지나고 보니 형제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이 외롭고 심심하기도 했다. 그래서 북적대는 안방으로 왔다 혼나기도 하고, 더러는 방에 불을 켜 놓고 신발도 댓돌에 살짝 놓은 채 골목에 나가 동네 아이들과 어울린 적도 있다.역시 인생이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독방에서 나는 또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된다.
큰누나의 칠순잔치가 열리게 되어 나는 어쩔 수 없이 내키지 않는 서울행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영숙이 큰누나는 우리 집안의 맏어른이고, 우리가 자랄 때 맏딸로서 특히 막내인 나를 보살펴 주고 온갖 것을 챙겨 준 제2의 엄마같은 존재다.
그런데도 떨떠름한 기분인 것은 순전히 나 개인의 문제 때문이다.
나는 5년 전에 이혼했고 ---사실은 이혼을 당했다는 것이 더 적절하겠지만, 그 몇달후에는 사업체마저 부도가 나버렸다. 50대 중반에 이른 어느날, 갑자기 인생도 사업도 추락해 버린 것이다.
졸지에 당한 충격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나는 항상 아내에게 군림하는 존재였고, 아내 역시 나를 하늘처럼 받들고 사는 줄만 알았다. 그 아내가 근 20년이나 차이가 나는 젊은 놈에게 가랭이를 벌렸다는 것이 분노에 앞서 허망했다.
사업체의 부도에 따른 여파도 비슷했다.
왕년의 나는 잘 나가는 건설업자였다. 전성기 때는 도급순위 70몇위까지도 랭크 되고 내가 제2의 정주영이나 김우중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르막 길을 순항중인줄 알았던 내 인생이 정상을 눈 앞에 두고 비비적 거리더니 급전직하로 곤두박질 쳐 버린 것이다.
충격으로 인한 방황과 타락의 과도기를 지나며 그 고통은 어느 정도 아물었다. 대신 나는 철저하게 무기력하고 완전히 의기소침한 인간으로 변해 있었다.
재혼이나 사업구상은 물론, 세상 돌아가는 일에도 전혀 관심이 일지 않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싫은 것을 지나쳐 두렵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미 시집 장가를 보낸 자녀들과도 떨어져, 몇년 전부터 강원도의 꽤 외진 곳에서 백여평의 텃밭을 가꾸며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한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경제적으로는 여생을 지낼만한 여유가 있다는 점이다.
건설업이 한창 호황일 때 여기저기 잡아 뒀던 땅뙈기들이나 하청업체에 담보로 잡았다가 인수하게 된 부동산들이 부스러기처럼 남은 덕을 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나의 거처인 강원도 산골의 주택도 옛날에 댐공사의 일부를 도급받았을 때 자재를 야적하기 위해 직원명의로 구입했던 부지였다. 회사가 부도 날 때도 압류를 피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전원주택 붐이 일면서 한 업자가 이땅을 사서 팬시 10여채를 짓는데 나도 땅값은 두둑히 받고 한채를 양도받은 것이다.
나는 모처럼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에 나 스스로 "유배지"라고 불러 온 강원도 산골을 벗어나 서울로 향했다.
특급호텔의 대연회장에서 열린 칠순잔치는 성황이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매형이 서울의 대학 총장 출신인데다 장성한 자녀들도 나름대로 성공한 터라, 빼곡한 화환이나 차려진 음식이나 참석자 면면이 모두 시쳇말로 하자면 나무랄데 없는 "짱"이었다.
단 하나, 초라한 나를 제외하고는. ......
우리 집은 딸만 내리 셋을 낳고 다시 아들 셋을 내리 낳은 6남매다. 모두 2살 터울로 태어나 큰누나와 막내인 나는 꼭 10살 차이다. 그러니 6남매가 60대 초입에서 70대 문턱까지, 황혼기를 맞은 인생들이다.
"너 얼굴이 많이 상했네. 어떻게 지냈니?"
"에그, 꼴이 말이 아니구나. 빨리 새 장가를 들어야지."
예상했던대로 누나와 형들뿐 아니라 매형과 형수들도 빠지지 않고 한마디씩 하는 것이 지겹다 못해 울화가 치밀 지경이었다.
잔치 진행도 지겹고 지루했다. 개회사에 축사에 주인공을 비롯해 남편과 자녀들까지 약력을 소개하고, 이어 목사의 축도와 답사까지 이어졌다. 케이크 커팅을 한 뒤 한장 여흥이 무르익었으나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는 나는 살짝 자리를 뜨기로 했다.
그런데 새롭게 파티장에 들어서는 3명을 보며 일단 의자에 다시 앉았다.
키가 훤칠한 중년의 백인남자와 그의 팔짱을 낀 검은 이브닝드레스 차림의 중년 여인, 그 옆에는 한복을 차려입은 30대 여인이 함께 중앙무대에 자리잡은 큰누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나도 가족석이라고 큰누나에서 몇자리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기에 그들을 정면으로 볼 수 있었다.
3명은 화사한 꽃바구니와 선물상자들을 들고 있어 하객이 분명한데 나는 그증에도 이브닝드레스 차림의 중년여인에게 시선을 쏠렸다.
나이는 50대, 혹은 내 나이 쯤 되었을까? 물들이지 않은 반백의 머리는 파마를 했고, 약간 색깔이 들어 있는 안경을 꼈다. 큼직한 알맹이의 진주 이어링과 목걸이는 반백의 머리와 검은 드레스와 적절한 앙상블을 이루는 것 같았다.
중년 여인답지 않게 몸매에 군살이 거의 없다. 가슴은 적당히 풍만해 보였고 몸에 착 붙는 드레스에 약간의 뱃살이 짐작되지만 탱탱한 히프에 이어져 날씬해 보일 정도였다.
차이니스 스타일로 옆구리가 약간 터져 통통하고 아담한 다리가 들어나는데 로우 힐을 신은 걸음걸이는 사뿐싸뿐하면서도 자신있어 보였다.
무엇보다도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전신으로 풍기는 기품과 우아함의 분위기였다. 말로 표현하기조차 어렵지만 나이를 먹어서 더욱 세련되고 은은한 매력이 얼굴뿐 아니라 온몸에 배어 있는 듯 했다.
그 여인은 곧바로 큰 누나에게 닥아 오더니 아마 70송이의 장미를 담았을 풍성한 꽃바구니를 건네며 "영숙아, 생일 축하해."라고 말했다.
"너, 너 ......문자, ...... 오문자 맞지?"
자기에게 닥아올 때부터 의아스런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던 큰 누나는 그녀의 인삿말에도 바로 대꾸를 못하고 아래 위를 훑어 보다가 소리쳤다.
"그래. 나 문자야. 정말 오랫만이지?"
"이 도깨비 같은 기집애! 어디 쳐박혀 있다가 이렇게 귀신처럼 불쑥 나타나니?"
"늦어서 미안해. L호텔에서 파티를 연다기에 시청앞으로 갔더니 잠실에도 같은 이름의 호텔이 있다더군. 그래서 허둥지둥 다시 이리 온거야."
"오늘 늦은 거 탓하는데 아니야, 이년아! 10년 전, 30년 전에는 왜 소식 하나 없었니?"
누나의 말투로만 보면 꼭 싸움을 거는 것 같지만 벅찬 반가움의 표현이라는 것을 그녀뿐 아니라 주위사람들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두 여인은 테이블을 중간에 두고 서로 몸을 굽혀 얼싸 안았다.
오문자! ...... 나도 큰 누나만큼이나 놀랍고 반가웠다. 특히 그녀와 나 사이에는 비밀이랄까, 말못할 사연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옆에서 지켜 보면서도 그녀가 오문자라는 것에 실감이 가지 않았다.
우선 혼자 세월을 피해 있었는지 너무 젊어 보인다. 내가 알기에 그녀는 영숙이 누나와 동갑, 그녀 역시 지금 70살인데 누가 누나와 같은 또래로 볼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저 기품과 우아함은 ......? 저게 옛날 우리가 "납작코" "오리궁뎅이"라고 놀려대기도 했던 문자누나란 말인가. 그보다도 그녀의 본색은 "부엌떼기", 바로 우리집 식모였었다.
그동안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지만 정말 믿기 어려운 변신이었다.
"이리 와! 좀 차근차근 이야기 하자."
큰누나의 말에 따라 그녀는 아까 큰 매형이 앉았던 의자에 옮겨 다시 두손을 맞 잡았다.
"오늘 행사를 알았다면 그때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
"그랬다가 네가 오지 말라면 끝장이다 싶어 이렇게 불쑥 부딪혀 보기로 했지."
그녀는 미소를 띤 얼굴로 잔잔하게 말했다.
"미친년, ...... 이렇게 파파할멈이 돼서 뭐 지난 날을 따질게 있니?"
"파파할멈이라니? 이 가시나야. 너 정말 곱게 늙었어. 이렇게 화장까지 하니 정말 새색시 같아. 그래 , 너는 변함 없이 공주마마야."
두여인의 상봉은 세월을 잠시 돌려 놓은 듯 욕설을 섞어가며 10대 소녀처럼 발랄하게 떠들고 깔깔거렸다.
"어머니는 ...... ?"
한동안 호들갑을 떨다 문자가 불쑥 물었다.
"돌아가셨지. 벌써 10여년 됐어. 아버지는 그보다 몇년전에 ......"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두손으로 눈을 가리며 "흐윽!"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곧 어깨를 들먹이며 울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여전히 흐느끼면서 말했다.
"내가 죄인이야! 내가 나쁜년이야! 아, 그토록 착하고 고마운 분들 ...... "
어느새 영숙이 누나도 울고 있었다.
"자책하지 마. 나도 네가 얼마나 마음에 걸리고 미안했는지 몰라. 정말 지울 수 없는 빚이었어. 그나마 지금이라도 만나 회포를 푸니 정말 좋다. 이 기집애야."
"영숙아. 나한테는 그 때가 내 인생에 유일한 동화 같은 시절이었어. 나이 들수록 사무쳐서 정말 너를 죽기 전에 한번은 만나야 했어."
두 여인은 또 꼭 끼어안고 울다 뭐라고 속삭이더니 함께 깔깔 거렸다.
이색적인 방문객의 등장, 잔치 주인공과의 시끌버쩍한 상봉에 좌중의 여흥조차 잠시 중단되고 모두의 시선이 두 여인에게 몰렸다.
"어머! 문자 언니 아냐?"
둘째인 영옥이 누나가 닥아 와 역시 포옹했다. 영옥이 누나가 막내인 영미누나를 불렀다.
"영미야, 이리 와! 여기 문자 언니가 왔어!"
영미 누나 역시 문자의 등장을 알고 있을텐데 외면하고 있다가 영옥이 누나가 큰소리로 부르자 마지 못한 듯 와서는 "오랫만이네."라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문자는 다른 누나들과처럼 포옹을 하려다 영미 누나의 토라진 표정을 보고 "잘 있었어?"라며 손을 내밀었다. 두여인은 악수만 하고 더 말도 나누지 않았다.
원래 쌀쌀맞고 성깔 있는 영미 누나는 아직도 뭔가 문자와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나도 인사를 하려 닥아 가는데 맏형 영철 형님이 가로 막았다.
"이거 오리 궁뎅이 누님 아냐!"
"나이 들어도 놀부대감 심술은 여전하군."
문자와 영철 형님이 악수하고, 이어 둘째 영수 형님과도 서로 손을 흔들며 담소했다. 이런 인사도 결국 나이 서열대로 하는 꼴이 되어 나는 6남매중 꼴찌로 문자 앞에 섰다.
"나 영도예요."
"어머나!"
문자는 내 아래 위를 훑어 보더니 확 끌어 안았다. 나도 두팔로 꼭 그녀를 휘감았다. 나는 잠시 감전된 기분이었다. 앞가슴의 뭉클함이 내 몸에 전해지고, 린스 냄새인지 향수인지 아니면 그냥 체취인지 향긋한 냄새가 나를 자극했다.
두 형들과의 인사 방법과 틀린 것으로 보아 그녀도 내가 더 반가운 모양이다.
"아아! 우리 꼬마 도령 ...... 보고 싶었어!"
그녀는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영탄조로 말했다.
"야, 꼬마 도령은 ...... ? 영도도 내년이면 환갑이야."
영숙이 누나가 옆에서 참견했다.
"그래도 나한테는 여전히 꼬마 도령인걸. 이렇게 흰머리에 주름살이 있어도 ...... "
그녀는 뒷굼치를 들어 내 뺨에 뽀뽀까지 했다. 그 과장된 행동에 무안해서 얼굴이 붉어 졌지만 전혀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나도 한두마디 의례적인 인삿말을 하고는 곧 자리를 비켰다. 아직도 소개하고 소개 받아야 할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매형과 형수들까지 간단히 수인사를 한 뒤 그녀는 동반자인 백인 남자와 한복차림의 30대 여인을 우리에게 소개했다.
"내 아들이야. 여기는 며느리. 아들이 입버릇처럼 엄마같은 코리안 여성하고 결혼한다고 하더니 정말 최고의 베터 하프를 만났지."
"안녕하십니까? 토마스 맥밀란입니다만 그냥 탐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녀의 아들은 과히 어색하지 않은 우리말로 자기 소개를 했다. 그러나 이 말은 연습을 했던 모양으로 다른 한국어는 거의 하지 못했다.
토마스는 미국의 한 다국적 회사의 개발담당이사로 1주일쯤 전 한국지사의 설립 타당성울 검토하려 한국에 오는김에 어머니를 함께 모셔왔다고 했다.
업무가 끝나는대로 모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내용들을 나는 귀동냥으로 들을 수 있었다.
문자에게 "다시 한번 만나자."고 하자 그녀는 명함을 건네 주었다.
도리스 M 맥밀란. --- 영문으로 적힌 이것이 옛날 오문자의 새 이름이었다.
명함에는 미국 남동부의 집수소와 전화및 우편번호, 그리고 한국에서 통용되는 휴대폰 번호도 실려 있었다. 나는 그 명함을 지갑에 간직하고 여흥이 이어질 때 살짝 파티장소를 나왔다.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영동고속국도는 체증이 심했다. 그럴수록 위험하게 끼어드는 얌체족들도 많아 나는 더러 당하기도 하면서 운전에만 신경을 쓰느라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다. 평시보다 한시간쯤은 더 걸려 집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 불을 켜며 들어서는 것은 정말 싫은 일중의 하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들어서자 비로서 시장끼가 느껴졌다. 음식이 넘쳐나는 잔칫집에서 배를 곯고 온것이다.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까 하다가 포기했다. 설거지를 한다는 것도 정말 싫기 때문이다. 내 보금자리로 돌아 와서도 모든 것이 짜증나고 우울했다. 혼자 사는 늙은 홀아비의 궁상이며 비애다.
나는 꼬냑병을 들고 소파에 앉아 TV도 켜지 않은 채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알코올 기운이 조금씩 퍼지는 것을 느낄 무렵 오문자가 다시 등장했다.
그리고 내 상념은 훌쩍 50년 이상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뛰어놀기 시작했다
오문자 이야기를 하려면 일단 당시의 상황과 배경을 설명해야겠다.
우리 고향은 황해도 해주로 6.25사변이 일어나자 1.4후퇴 때 피난봇짐을 쌌다.
우리 6남매와 아버지 엄마, 할머니까지 낀 아홉식구는 엄동설한에 남쪽으로 남쪽으로 발길을 옮겨 근 한달만에 대구에 피난짐을 풀었다.
당장 끼니를 때우고 잠자리를 얻는데 무진 고생을 했다. 당시 대부분 북한 출신 피난민이 그랬듯 아버지 엄마는 우선 봇짐에 넣어 왔던 시계나 반지, 금비녀들을 팔고 채소, 땅콩, 미군부대에서 흘러 나온 물건들을 받아 노점이나 행상을 하는등 닥치는대로 장사를 했다. 누나나 형들도 껌이나 초콜릿 몇개를 들고 행인을 좇아 다니며 구걸하듯 물건을 팔았다.
그래도 아홉식구는 늘 허기진 상태였다. 간혹 구호단체에서 분유에 쌀을 넣어 끓인 죽을 나누어 줄 때면 우리 6남매는 때로 귀쌈을 맞아가며 두세번씩 받아 가족 모두의 하루 끼니로 삼기도 했다. 미군부대 음식찌꺼기로 만든 이른바 꿀꿀이죽을 사면 누나들이 캐온 나물에 물을 새로 붇고 끓여 훨씬 멀개지고 고기냄새보다 풀냄새가 진한 것으로 배를 채우기도 했다.
나는 미군들만 보면 다른 애들이 하는 것처럼 "헬로, 찡껌(츄잉껌) 기브 미."하고 손을 내밀었고 운 좋으면 껌이나 초콜릿을 얻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나와 두형은 피난민 학교를 다녔다. 고향도 집도 다 잃었으나 자식이라도 잘 키워야겠다는 일념일 것이다. 나는 전쟁이 안났다면 입학할 나이였으므로 1학년에 편입했다.
다만 누나들은 --- 뒷날 두고두고 부모를 원망하는 일이 됐지만 --- 학교를 보내지 않았다. 누나들 역시 장사를 하거나 아버지 엄마가 장사를 하는 중 집안일을 보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몇년쯤 후 아버지는 시장 입구에 쌀가게를 차렸다. 그 쌀집이 잘되며 우리는 차츰 안정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이북에서 목수와 미장이 일을 했다는데 그 손재주가 쌀장사에도 궁합이 맞은 모양이었다. 쌀을 되나 말로 팔 때는 쌀알을 모두 세워 홍두께로 살짝 밀어 낸다. 반면 남의 쌀을 살 때는 꾹꾹 눌러 매매차익 말고도 그 손재주로 상당한 이득을 본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시골로 쌀을 사러 가게 되면 엄마가 가게를 보는데 그럴 때면 "한가마에 5되는 손해를 본다"는 아버지의 불평을 들은 것도 있다.
다소 여유가 생기자 우리는 집도 마련했다. 국유지에 피난민들이 모여 판잣집 20여호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에 우리도 방 3개짜리 집을 지은 것이다. 하꼬방이라고 부르는, 깡통조각을 이은 것으로 지붕을 덮고 송판과 박스들로 벽을 만든 판잣집이었지만 피난후 처음 갖게 된 내 집에 가족들 모두가 감개무량했다.
누나들도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다만 몇년을 놀았기 때문에 내가 4학년 때 큰 누나는 겨우 여고 1학년에 입학했다. 나와 꼭 10살 차이가 나면서도 학년은 6년 차밖에 안 나는 것이다.
하기야 당시 피난민들에게 그런 경우는 흔했다. 4학년 우리반만 해도 남자 여자 모두 나보다 3~4살이나 더 많은 노털 학생들이 몇명씩 있었다.
우리집에는 식모를 두어 누나들은 모두 집안일에서도 해방되었다.
우리는 피난민들중 드물게 안정을 찾은, 아니 어쩌면 성공했다고 할 정도였다.
우리가 피난민촌에 터전을 잡은지 몇달후 오문자네도 이곳에 들어왔다. 문태라는 그녀보다 3살 많은 오빠와 부모등 4식구였다.
우리와 문자네는 20여가구가 모여사는 피난민촌에서 극명하게 대조되는 가정이었다.
우선 우리집은 동네에서 경제적으로 제일 여유가 있었고, 문자네는 겨우 방한칸 있는 판잣집에서 때로 끼니를 거를만큼 가난했다.
가족 구성에서도 큰 차이가 났다. 우리집도 가끔 부부싸움도 하고 형제끼리 토닥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화목한 가정이었다.
문자네는 화목이라는 말을 붙이기조차 어려웠다. 나는 그렇게 가족을 매질하는 경우를 처음 보았다. 문자 아버지는 전형적인 술주정뱅이였는데 아내고 아들, 딸을 마구 때렸다.
문자 어머니는 억세다는 평안도 여자였는데 웃으면 양볼에 보조개가 패이는 무척 교태스런 미인이었다. 그러나 역시 술을 잘먹고 남편에게 맞으면서도 "죽여라, 이놈아!"라며 달려드는 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별스럽게 보였다. 또 남편에게는 얻어터지면서 그 분풀이처럼 아들, 딸은 잘 때렸다.
문태도 건뜻하면 제 누이동생을 때렸다. 문자는 가족 모두에게 얻어 맞기만 하는 제일 불쌍한 존재였다.
부부는 직업도 없으면서 맨날 술에 취해 있었고 싸움을 하게 되면 세간살이도 다 때려 부셨다가 싸움이 끝나면 부서진 가구를 다시 꿰어 맞추고 함께 술을 마시며 희희덕거리기도 하는 기묘한 사람들이었다.
문태는 철공소 같은데를 다녔고, 영숙이 누나와 동갑인 문자는 학교도 안다니며 부모가 없을 때면 공터에서 여자애들이 하는 고무줄이나 오자미 놀이에 가끔 참여했다. 그러나 옷차림도 남루했고 얼굴도 맨날 부스럼 같은 것이 나 있어 동네아이들한테도 업신여김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늘 침울했고 한번도 웃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사온지 몇달 후 문자 아버지가 죽었다. 그것도 미군부대에 뭘 훔치러 갔다가 철조망에 매달린 채 총에 맞아 죽었다고 했다. 리어카로 관이 실려 나갈 때 문자 어머니는 관에 매달려 온갖 넋두리를 하며 통곡했다. 어찌나 심하게 우는지 구경하는 나도 눈물이 날 정도였는데 아들, 딸은 화난 표정으로 눈물 한방울 안 흘리는 것이 내게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과부가 된 문자 어머니는 혼자서 술취한 날들이 많아지고 화장이 더 짙어지더니 몇달도 안되어 단칸방에 남자를 끓어들인다는 소문이 났다. 동네 사람들은 "자식 교육을 못시키겠다"며 문자 어머니를 내쫒자는 구수회의까지 열었다.
그무렵 문태는 집을 나갔다. 대구에서 꽤 떨어진 어느 대장간에서 일한다고 했다. 문자는 더욱 외롭고 불쌍해 졌다. 가끔 한밤중 밖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그녀를 동네사람들이 보기도 했는데 그때는 문자 어머니가 다른 남자를 집으로 끌어 들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하루는 문자가 우리집 누나방에 누워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문자 어머니를 쫓아내기 전에 그녀는 어디로 사라져 버렸고 끼니도 떨어진 터에 문자는 병이 든 것을 영숙이 누나가 알고 집으로 데려온 것이다.
아버지 엄마도 어쩔 수 없다고 일단 며칠은 문자를 집에서 묵도록 했다. 그녀는 한 이틀쯤 심하게 앓다 겨우 몸을 추스렸다. 그런데 그녀가 온 뒤로 "이가 옮았다"고 누나들이 난리를 피웠다.
다음날 엄마는 문자를 목욕탕으로 데려갔다 오더니 "때가 한말이나 나왔고 온몸이 멍투성이"라고 했다. 나는 어떻게 사람이 한말의 때를 몸에 지니고 살 수 있을까 궁금했다.
때를 빼고 이가 들끓는 옷을 갈아 잆었어도 그녀는 여전히 천덕꾸러기로 보였다. 하루 종일 침울한 얼굴에 전혀 말이 없고, 조그만 인기척에도 깜짝 놀라며 불안해 하고 남의 눈치만 살피는 것 같은 표정에 우리 가족 모두가 그녀에게 도대체 정이 가지 않았다.
문자가 우리집에 온지 4~5일 지나 그녀의 어머니가 찾아 왔다. 과자 한봉지를 사들고 온 그녀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며칠 집을 비우게 됐는데 그동안 보살펴 주어 고맙다."면서 "이제 부산에 살게 되었으니 문자를 데려 가겠다."고 했다.
"난 안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오들오들 떨고 있던 문자는 자기 어머니를 독기 어린 눈으로 쳐다 보면서 말했다. 문자 어머니는 웃으면서 얼르고 달랬지만 문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이 쌍년의 에미나이가 ...... !"
그녀의 주먹이 번개처럼 딸의 얼굴을 가격했다. 아버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오? 아무리 댁의 딸이라도 이 집안에서 폭력은 용납못하오!"
아버지의 기세에 눌려 문자 어머니는 주춤했는데 문자가 도발적이었다.
"당신은 엄마도 아냐! 아니, 당신은 인간도 아냐! 남편 죽은지 석달도 안 돼 새남자를 끓어 들이고, 내 이름도 홍문자를 오문자로 바꾸고 ...... "
"이 에미나이가 당장 아가리 못 닥치간!"
그녀는 딸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눈을 치뜨고 오히려 바락바락 달려들었다.
"새 남편한테 버림받자 또 남자들을 끌어 들이고, 껀뜻하면 매질을 하고 날 팔아버리겠다더니, ...... 나를 패고 싶어서 왔소? 어디 팔아 먹으려고 왔소? 차라리 고아원엘 들어가더라도 이제 엄마하고는 못 살아."
"어, 어, 쌍년 아가리를 찢어 버릴까 보다."
억센 평안도 여자도 독기를 잔득 품은 딸을 꺾지 못했다. 자신의 창피함만 자꾸 드러나자 "이 쌍년, 나중에 보자."라며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도망치듯 빠져 나갔다.
어머니에게 대들면서 터져나온 몇마디 말로 문자의 기구한 운명도 함께 드러났다. 남매의 아버지는 피난길에 병을 얻어 죽었다고 한다. 그 몇달후 문자의 어머니는 오씨라는 새남자를 만나 가호적을 하며 아이들 성도 오씨로 바꾸어 버렸다.
그런데 그 남자 마저 죽자 이 남자 저 남자를 끌어들이다 한 남자와 살림을 차리기로 한 모양인데 며칠동안 우리집에서 지금껏 자기가 살아왔던 환경과는 다른 가정을 보게 되면서 "죽어도 못간다"고 버틴 것이다.
우리집에서도 문자는 골치꺼리였다. 고아원은 이미 나이가 많아서 갈 수가 없었고 다 큰 여자애를 살벌한 바깥세상에 그냥 내던질 수도 없었다.
아버지와 엄마, 영숙이 누나가 그 문제로 며칠동안 끙끙대다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아버지는 온가족이 모아놓고 선언하듯 말했다.
"앞으로 문자도 우리 가족이다. 너는 우리를 아버지 엄마로 부르고 영숙이 아래는 다 네 동생들이니 모두 화목하게 지내도록 해라."
"그래도 돼요?"
가족회의처럼 둘러 앉았을 때부터 눈을 힐끗거리며 불안해 하던 문자는 이 한마디만을 했고,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하항!"하며 봇물터지듯 통곡을 했다.
피난민들은 생활이 각박하면서도 또 의협심과 동정심도 있었다. 문자도 그렇게 해서 우리 가족이 되었다.
아버지는 문자도 학교를 보내려 했다. 그러나 문자는 한사코 그것만은 사양하면서 집안 일을 돕겠다고 했다. 식모가 있었지만 10명 가족의 뒷바라지를 혼자 해내기는 힘든 일이었다. 문자는 가족이라면서도 식모 보조의 역할을 맞게 됐다.
그래도 가족으로 인정받으면서 문자는 놀랍게 변해갔다. 그녀는 원래 명랑하고 수다스러운 것 같았다. 농담이나 장난도 잘 치고 동네 아이들하고 놀 때도 옛날의 침울한 구석이 없고 오히려 아이들을 휘잡았다.
특히 내가 동네 아이들한테 얻어 맞기라도 하면 내손을 잡고 그집까지 가서 그애를 불러내어 야단을 치거나 쥐어박기까지 하며 내 편을 들어 주었다.
또 밥을 무척 많이 먹었다. 세끼를 먹고서도 찬밥이 남으면 혼자 부엌에서 먹어 치웠다. "쌀가게집이 아니었으면 구박께나 받았겠다"고 식모 아줌마가 놀리기도 했다.
영양실조에서 벗어나면서 문자는 마치 꽃봉오리가 터지듯 환한 얼굴로 변해 갔다. 얼굴의 부스럼은 없어지고 숯이 많은 머리칼은 옻칠을 한듯 윤이 났으며 하얀 피부의 양볼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했다.
우리집을 처음 찾는 손님이 "큰따님이 참 예쁘군요."라고 하면 진짜 딸인 세명의 누나는 입을 샐쭉거리기도 했다.
얼마 후 그 식모가 우리집 일을 그만 두게 됐다. 남편이 부상을 입어 국군병원에 있는 동안 아이들은 시부모에게 맡기고 돈을 벌러 나왔는데 남편이 퇴원을 하개 되자 함께 시골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우리집에서는 새 식모를 구하려 했다. 그러자 문자가 엄마에게 간청했다.
"제가 집안 일을 다 해낼테니 저한테도 아줌마가 받던 월급을 주세요."
미심쩍어 하면서도 문자는 정식 식모가 되었다. 그녀는 부지런하고도 억척스럽게 일을 잘해냈다.
아버지와 엄마도 만족해 했고 할머니는 가끔 식모들에게 업신여김도 받아왔는데 문자가 싹싹하게 굴자 "우리집 복덩이"라고 칭찬도 했다.
그래도 가끔 형이나 누나들은 도시락 반찬이 나쁘다거나 양말을 안 기워놨다는 것들로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욕을 해대기도 했다. 우리가 "언니" "누나"라고 불러도 그녀의 신분은 "부억떼기"를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한편 6학년으로 진급하면서 나는 큰 변화가 생겼다. 우선 나만의 방을 갖게 되었다.당장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피난 생활에서도 아들들은 학교를 보낼만큼 우리 아버지의 교육열은 대단했다. 그런데 두 형들은 국민학교에서는 우등상을 탈 정도로 공부룰 잘 했건만 1차 중학입시에서는 모두 낙방해 2류 중학교를 다녀야 했다.
삼세판이라는 각오였을까, 아버지는 막내인 나만은 꼭 1류중학에 넣어야겠다고 작정한 모양으로 뒷간을 집 밖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방을 새로 들였다. 바로 내 공부방이고 우리집에서는 처음으로 의자가 달린 책상까지 마련해 주었다.
독방을 갖게 된 나는 정말 오붓하고 행복했다.
그러나 조금 지나고 보니 형제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이 외롭고 심심하기도 했다. 그래서 북적대는 안방으로 왔다 혼나기도 하고, 더러는 방에 불을 켜 놓고 신발도 댓돌에 살짝 놓은 채 골목에 나가 동네 아이들과 어울린 적도 있다.역시 인생이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독방에서 나는 또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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