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방시트콤 - 7부 4장

제목 : PC방 시트콤 제7부 경매사이트(4)



“나도 설렘과 고민이 뒤엉켜 있었다우.”

“뭔 고민인데요?”

“해결됐어. 큰 길가 사우나쥔 양반이 노숙자들 샤워를 도와줬거든.”

“어머, 그럼 때 빼구 광내야 PC방엘 들어가도록 했나보죠?”

“어쩔 수 없잖아. 동네 사람들이 방방 뜰텐데.”

“아뇨, 정말 좋은 아이디어였네요.”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물줄기 때문에 퍼득 정신을 차리게 된 사람들도 있을 것 같아.”

“그럼요. 찬물은 몰라도 뜨거운 물줄기에 몸을 맡긴다는 것은 생활의 반전이 되고도 남았을꺼에요.”

“정말 그랬으면 좋으련만...”

“식사는 했어요?”

“어물거리다 건너뛰고 말았네.”

“식사하세요. 제가 한턱 쏠께요.”

“나만 안먹은게 아니구 철호랑 강호도 배를 쫄쫄 곯면서 야단났을텐데...”

“그럼 얼른 PC방엘 들어가보죠. 컵라면이라도 챙겨 드세요.”

“그래, 밖이 춥네.”



김명순과 함께 PC방을 들어서며 안쪽을 쳐다보니 빈좌석이 없을 정도로 꽉 찬 것이 여간 감동적인 장면이 아니었다. PC방이라는 것이 서로 제살잘라먹기 식으로 제한된 고객을 상대로 출혈경쟁에만 혈안이 된 탓에 이처럼 많은 손님이 심야에 들어차기란 상상도 못할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요와 공급이 불일치할 때 그런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정당한 방책을 모색하는 것이 옳겠지만 너무 쉽게 남의 고객을 가로채는 방식으로 가격하락 경쟁이 시작되면 서로 죽을 노릇이 되고 만다. 마침 이 동네 PC방을 시작으로 가격 정상화 정책과 새로운 고객창출이 성공됨으로써 PC방도 살고 추위에 오돌오돌 떨며 새우잠을 청하던 노숙자들도 함께 구제하게 되었으니 작은 결단과 작은 노력으로 블루오션 속으로 PC방을 던져넣은 셈이다. 적어도 이 동네에서만큼은 단순한 경영방식과 서로에게 손실만 끼치는 경쟁관계는 개선되었지만 이 대열에 아무 생각없이 참여해 준 노숙자들에게 더 큰 이익이 돌아갈 수 있는 방책도 찾아야 할 것 같다.



“어이, 김형. 정말 따뜻하구먼.”

“할 만해요?”

“못할게 뭐야. 첨에 몇 번은 졌는데 이젠 알 것 같아. 벌써 열 번도 더 이겼는걸.”

“아하, 그럼 원래 바둑 고수였었군요?”

“히히, 둬 본지 워낙 오래됐잖아. 하지만 벌써 16급까지 올라왔다구.”

“금방 일단까지 올라가는거 아닐까요?”

“해 볼꺼야. 내가 사업만 망하지 않았으면 거의 프로기사 실력이었는데...”

“그러세요. 이젠 밤마다 이리 오셔서 추위도 녹이고 바둑 실력도 되찾으셔야죠.”

“알았다구. 고마워.”



“김형, 일루와봐.”

“왜요?”

“이거 쇼핑몰 있잖아?”

“네. 그걸 쇼핑몰이라구 하는거에요?”

“그렇다니까. 이거 내가 옛날에 만들었다가 파산하면서 그냥 두고왔던건데...”

“아, 아저씨는 장사하던 분이었군요?”

“장사가 아니라, 온라인 쇼핑몰이라구 대단한 것이었거든.”

“쇼핑이라면 시장엘 가야 물건을 사는 것이잖아요.”

“허, 김사장이 PC방 수완은 좋아도 인터넷은 영 모르는구먼?”

“저두 몇일전까진 백수였다니까요.”

“그러니까 백수도 뭔가 할 줄 알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거아냐?”

“그럼요. 전 인터넷을 잘 모르지만 추위도 녹이고 옛날 하시던 일도 찾으시면 되겠네요.”

“난 말야. 역경매를 생각했었거든.”

“역경매요? 그게 뭔데요?”

“경매는 알지?”

“그럼요.”

“역경매는 물건을 살 사람이 가격을 먼저 제시하면 물건을 팔 사람이 더 싸게 물건값을 제시하는거야.”

“그럼 손해잖아요.”

“손해보는 장사는 안하지.”

“싸게 사려는 사람한테 더 싸게 팔면 그게 손해 아닌가요?”

“온라인은 사람이 많잖아.”

“많아요?”

“그럼. 역경매 사이트를 개설해 놓고 그곳에 물건 살사람을 많이 준비시키는거야.

어차피 살 물건인데 더 싸게 팔 사람있으면 참여하라고 공시를 하는셈이지.“

“아무도 참여하지 않으면 꽝이잖아요.”

“당연하지. 하지만 소문이 돌면 물건 팔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몰려든다니까.”

“잘 이해가 안되네요.”

“암튼 김사장 당신 덕에 옛날 하던 일을 다시 보게 되어 기쁘네만 당신 너무 컴퓨터를 모르면서 어떻게 PC방을 장악한건지 그게 의문이구먼.”

“아휴, 철호랑 여기 강호가 있잖아요. 전 배짱만 있구요.”

“하긴 일을 저지르려면 배짱이 두둑해야겠지.”

“아저씨는 역경매라는 좋은 걸 만들어놓고는 왜 망했죠?”

“욕심을 너무 많이 냈거든.”

“어떤 욕심을?”

“하하,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는 사이트라고 소개시키고는 회원가입을 무척 많이 시켰었어.”

“그게 무슨 욕심이죠?”

“회비는 엄청 들어왔는데 물건 팔 사람들을 섭외하는데 실패했거든.”

“소비시장이 형성되었으면 공급자가 더 난리를 치며 들어왔을텐데요.”

“타이밍이 안맞았지. 회원들이 회비반환해 달라고 아우성치고 난리였어.”

“공급자를 설득할 시간은 있었을텐데...”

“맘이 급해서 안정적인 공급자를 못찾는 대신 싸구려를 갖다 들이댔었지.”

“그때 역효과가 났었겠군요?”

“엉터리란 소문이 쫘왁 돌면서 사기꾼으로 수배되기 시작했지.”

“돈도 다 뺏기고요?”

“몸만 피신했어. 돈은 고스란히 남았을꺼야.”

“그 많은 돈으로 해외 도피라도 하시지 노숙자 생활을 왜 하셨수?”

“맘이 아파서였어. 분명히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소비자가 우대받는 세상을 열것이라 믿었는데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뚜껑을 열어보니 사기꾼이 되고 말았었지.”

“다시 시작하면 되잖수. 뭐랄까 난 인터넷은 잘 모르지만...”

“묘안이 떠 올랐어.”

“어떤?”

“김형이 사업수완이 좋은 것 같아. 난 아이디어가 있구. 함께 뛰어들어 봅시다.”

“난 겨우 동네 PC방 일곱 개를 관리할 뿐인걸요.”

“허허,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일주일도 안되서 PC방 위임관리를 맡은 실력아니오. 난 도피하면서도 언젠가는 다시 되돌려줘야할 빚이라 생각하고 단 한푼도 쓰지 않았다오. 김형이랑 그 돈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어졌어.”

“마음이 곱군요. 그 돈이 얼만지는 몰라도 노숙까지 하면서 유혹을 뿌리치셨다니.”

“자그만치 오십억원이오. 다시 시작해도 될 될 돈이 아니겠소?”

“그래 뭘 하실 생각이죠?”

“우선 변형된 경매 사이트를 만들고 싶소.”

“아까 것도 잘 이해못했는데 더 획기적인 방법인가 보죠?”

“아마도 구식일꺼요. 일종의 복권과 같은 방식인데...”

“주택복권이요?”

“아니, 로또복권이라고 해야 맞겠지?”

“궁금하네...”

“김형, 나가서 술 한잔 사시겠수?”

“아직 가진게 없어서 술 살 형편은 아닌데...”

“취할 때 까지 마시자는게 아니구 여긴 얘기하기가 적당하지 않다는 말이오.”

“그럼 낼 밝은 때 만나서 정식으로 얘길 해보는게 어때요?”

“난 마음이 급해. 김형이 내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계속 노숙자 생활을 할꺼요.”



“갑수씨, 뭐해요. 컵라면 식어요.”

구석진 곳에서 한동안 소근대며 말하는 내가 궁금했는지 김명순이 끝좌석까지 찾아와선 말했다.

“어, 맞다 밥먹어야지.”

“무슨 얘길 그렇게 재밌게 하셨어요?”

“어, 이 분이 훌륭한 일을 하셨더라구.”

“뭔데요?”

“응, 아직 말할 단계는 아닌데, 어때 컵라면 한 개 드실라우?”

“내 것도 있어?”

“그럼요, 이 곳 PC방은 라면 한 개는 무조건 공짭니다.”

“좋네. 그렇지않아도 출출하던 참이거든.”

“물 덥혀지는데로 모두 컵 라면 한 개씩 드시우.”



나는 다른 노숙자들이 냉기만 가신 PC방에서 주린 배를 참고 있을 것 같아 큰 소리로 장중을 향해 말했다.



“공짜루?”

“그럼요. 여기선 여러분 먹고 싶은 과자랑 라면이 공짭니다. 대신 음료수는 돈 내고 드슈.”

“우와, 복받을꺼요.”



노숙자들이 우르르 컵라면이 쌓여있는 곳으로 뛰쳐 나가면서 졸졸졸 온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컵라면을 채우기 시작했다. 나도 김명순이 준비한 컵라면을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몇 번 입으로 말아 넣고는 뜨거운 국물을 말끔히 마셨다. 배고픈줄도 모르고 종일 뛰어다닌 끝에 라면국물이 이렇게 맛있는줄 몰랐다.



“이거 보슈.”

경매사이트를 운영했다는 사람이 꼬깃한 옷소매 끝에서 실밥을 풀며 통장을 내 보였다. 자릿수가 몇갠지 세어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숫자가 적혀있는 통장을 불빛에 비쳐보니 정말 오십억원이 넘는 금액이 보였다. 이 정도의 돈을 갖고 있으면서도 양심에 따라 단 한푼도 헛되게 쓰지 않고 재기를 노렸다면 믿고 어떤 일을 도모해도 밑질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좋아요. 얘기해보시죠. 내가 뭘 도와야 할지.”

“김형이 당장 할 일은 없고, 내가 오늘 때도 빼고 광도 냈으니 낼 부턴 양복 한 벌 구해서 말끔하게 다시 찾으리다. 나를 다시 일으켜준 김형과 큰 일을 도모할 생각이니까.”

“나도 여기 계신분들이 한 때는 모두 대단했으리라 믿고 있었지요.”

“그려, 모두 대단한 사람들이었을꺼야. 이 사람들이 힘을 합치면 뭔들 못하겠소.”

“제 역할은 그것까집니다. 제가 여러분이 하는 일에 간섭하기 시작하면 몸이 천개라도 모자라지요. 그냥 한명 두명씩 깨어나며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을 천직으로 삼고 살아갈까 합니다.”

“알겠소. 일단 낼 점심때 얘기 좀 합시다.”



나는 감격의 눈물을 소리없이 쏟아내야했다. 설마하며 시도한 첫 번째 날에 이렇게 깨인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모두 갖고 있던 재능을 찾아 밝은 세상으로 나와줬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정말 현실로 이뤄졌으면 좋겠다.



“강호야, 철호는 아직 연락없니?”

“전화 왔었어요. 통 믿질 않아서 늦었다구요.”

“그런데 어딨데?”

“사우날 갔는데 PC방에 사람들로 꽉 찼다니까 불가마에서 자고 새벽에 오겠데요.”

“거참, 자리가 없더라도 일단 PC방으로 데러와야 하는건데...”

“딴 PC방은 아직 덜 찼죠?”

“아직 삼사십명은 더 들어갈 수 있어.”

“사우날 다녀올께요. 철호놈이 철이 없어서 너무 즉흥적으로 결정했나봐요.”

“델구와. 불가마에서 잠자는 버릇 들이면 PC방엔 다신 못온다.”



강호를 시켜 철호를 찾으로 사우나엘 보냈다. 벌써 열두시가 다 되어가고 있다. 이영자도 올 시간이다. 북적거리는 곳에서 모두 모여있을 수는 없으니 철호가 들어오면 가까운 모텔을 보내도록 해야겠다. 매일 모텔을 들락거릴 판이면 월세방이라도 하나 얻어 잠도 자고 짐도 풀어놓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



“저 양반이 낼 또 올까요?”

“암, 정신을 차렸으니까 사업을 도모하러 반드시 올꺼야.”

“오십억이면 돈이 엄청 많은거죠?”

“뭔가 해 볼만한 돈이지.”

“근데 왜 거절했어요?”

“난 다른 사람들도 일어서도록 도와야하거든.”

“그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 되잖아요.”

“욕심이 많으면 잃는 것도 많은 법이잖아.”

“아휴, 아까워요. 돈 들이대면서 사업제휴하는데 거절하는 바보가 어디있어요?”

“기다려봐. 여기 온 노숙자 중에선 더 훌륭한 일을 해 낼 사람이 또 있을테니까.”

“아휴, 그래도 아까워죽겠네.”

“그럼 임자가 저 사람이랑 살림 차려보던지.”

“흥, 여자가 정절이 있지. 돈에 눈이 어두워서 갑수씰 배반하라구요?”

“허, 우리 사이가 그렇게 끈끈했었던가?”

“그럼 지난 번 날 사랑한다는 말은 빈 말이었어요?”

“아냐, 내가 잘못했소.”

“흥, 담에 그런말 또 하면 알죠?”



강호가 열명 정도의 노숙자를 이끌고 철호와 함께 PC방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김명순의 질타에 혼줄이 날뻔했다.



“행님요, 때빼구 광내구 델구왔심더.”

“이놈아, 지금이 몇시냐?”

“안믿잖아예. 냉큼 따라온나 해도 어슬렁 거려서 답답해 죽는갑다 했심더.”

“알겠다 이눔아. 그러니까 평소에 진중했으면 얼마나 좋겠냐.”

“하모, 암튼 델구 왔다 아임니꺼.”



새로 온 노숙자들은 이미 꽉 찬 PC방의 노숙자들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의 몸이 녹도록 다시 열풍기를 강하게 틀어주곤 커피 한잔씩을 빼서 건넸다.



“야, 임마 말이 증말 맞네.”

“글쎄다. 정말 우릴 받아주는 PC방도 있구만.”

“꽉 찼다 어딜 앉지?”



커피를 마시며 쇼파쪽이 웅성거리자 일찍 왔던 노숙자들은 오히려 어깨가 으쓱하며 자리도 못 잡구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향해 딱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는 사람들도 있었다.



“강호야 네놈 여자가 올 시간이 됐으니 이번에도 내가 이 사람들 다른 PC방엘 데려가야겠다.”

“아이쿠, 날씨도 찬데 제가 다녀올께요.”

“아니다. 영자씨가 네 놈 앞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봐야 신명이 날 것 아니냐.”

“하긴 그렇지만 형님이 추울까봐.”

“후딱 다녀올게. 그나저나 철호야 오늘도 알밤까야겠구나.”

“행님요, 저두 따라갈랍니다. 제가 델구 온 사람들이잖아예.”

“그래, 너도 앞장 서거라.”



철호를 앞세워 열명의 노숙자들을 길건너 PC방으로 데리고 들어섰다. 딱히 순번을 정할 것은 없지만 아까 방문한 순서대로 차곡차곡 노숙자들을 채우기 시작하면 몇일 이내에 항상 꽉찬 PC방이 될 것이다. 각각의 PC방도 특화시킬 겸 이사람들의 공통된 관심사를 찾아내서 매일 들락거릴 단골 PC방을 정해줘야 한다.



“어, 또 오셨어요?”

“그래, 안 졸립나?”

“아까 졸다 혼났잖아요. 그런데 손님이 워낙 없다보니까 자꾸 졸려 죽겠어요.”

“여기 온 분들이 모두 심야로 컴퓨터를 할 손님들이니까 이젠 졸지마.”

“우와, 정말 모두 손님들이에요?”

“그럼, 불 환하게 밝히고 PC방도 따뜻하게 온도를 유지하면 낼도 또 올꺼다.”

“알았습니다. 근데 정말 심야하는 사람들에게 컵라면 공짜로 주는 것 맞아요?”

“컵라면 한 개씩하고 과자는 맘대로 먹도록 해. 대신 음료수는 공짜가 아니다.”

“딴 손님들한테도 그렇게 해요?”

“응, 딴 손님들도 맘대로 먹으라고 해.”



“행님요.”

철호가 데려온 사람들을 PC방 한 곳에 몰아넣듯 하며 빠져나오려니 철호놈이 뒤에서 나를 부른다.

“왜?”

“오늘은 저두 이사람들이랑 함께 있을라구예.”

“내 눈 피해서 종일 겜하려는건 아니지?”

“암요. 제가 힘들여 모아온 사람들인데 조금 도와줄라꼬예.”

“그래, 낼은 더 많이 데려올 수 있겠지?”

“이 사람들 입이 무섭지예. 소문 금방 낼꺼라예.”

“알았다. 나랑 강호는 모텔에가서 좀 쉴란다.”

“피곤하지예.”

“응, 오늘 종일 뛰어 다니며 네 놈들이 데려올 사람들을 위해 안배했더니 좀 지친다.”

“행님요. 후딱 가이소.”



나는 철호가 자진해서 남겠다는 PC방을 뒤로 하고 강호가 있는 아지트로 향했다.



“갑수아저씨!”

“어, 이제 와요?”

“맘은 벌써 PC방인데 낼 먹을 김치 담그느라 늦었어요.”

“피곤할텐데 쉬지 그랬어?”

“아휴, 맘이 설레서 어딜요.”

“하하, 고마워. 암튼 대 성공이야.”

“꽉 찼어요?”

“대충. 매일 매일 늘어나겠지.”

“축하해요.”

“어서 추운데 들어가봐. 강호도 눈빠지게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이영자는 계단을 뛰듯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그 뒤를 따르며 긴잠에서 깨어난 것은 저들이 아니라 오히려 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뭔가 계획한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노력한다고 뜻을 이루는 것도 아니다. 우연과 우연이 모여 필연이 되고 그러한 필연이 되기 위해서는 우연 조차도 갈망하며 노력해야지만 겨우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우와, 정말 대단하네.”

뒤따라 들어가니 이영자는 남의 눈도 의식하지 않은체 강호의 목을 끌어안으며 기뻐하고 있었다. 생각같아서는 철호놈이랑 강호랑 다섯명이 오붓하게 앉아 오늘의 성공을 자축하고 싶었지만 일곱 개 PC방이 꽉차는 날에나 자축하려고 마음의 말을 아낀 채 강호와 이영자에게 돈을 쥐어주며 서둘러 PC방을 빠져나가게 했다.



“우린 안가요?” 김명순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응, 맥주나 한잔할까?”

“저랑 단 둘이서만?”

“좋잖아.”

“좋아요.”



두 사람이 맥주잔으로 건배를 하며 기분 좋게 목구멍으로 맥주를 넘겼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한 겨울의 맥주는 차갑기만 하더니 지금 마시는 맥주는 뜨거운 가슴을 식혀주듯 시원한 느낌으로 목을 적신다.



“갑수씨, 대단해요.”

“사업가 기질이 있었던걸까?”

“연구하시던 분 아니었어요?”

“원래 다방면에 소질이 있었던건 아닌지 몰라.”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을 척 해낸 걸 보면...”

“딴 생각이 없어서 그래. 이 일만 성공시켜야겠다 싶었을 뿐이거든.”

“강호씨랑 철호씨도 열심히 도운거죠?”

“모두 다 일등공신이지. 명순씨도 그렇고.”

“아잉, 이름을 부르고 그래요. 그냥 부르면 될텐데.”

“뭐라 부르지?”

“아잉, 차라리 부르지 말던지.”

“알았어. 차차 생각해 보기로 하지 뭐.”

“정말 오십억짜리에 욕심이 안생긴거에요?”

“그대가 돈에 욕심을 부린다 싶으면 잊어버리고 그렇지 않다 싶으면 신경써보지.”

“어휴, 멍청이같아. 굴러온 복을 차는 것도 유분수지.”

“어허, 그 돈이 없더라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데 왠 욕심을 내라고 그러는지...”

“있으면 편하잖아요. 아무 일이나 해 볼 수도 있고, 사업도 금방 키울텐데...”

“욕심이 앞서면 일을 그르친다구.”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구요.”

“암튼 그 돈은 내 돈이 아니야. 그 양반이 낼 정식으로 같이 일하자고 제의해 오면 그때부터 생각해도 늦지 않으니까.”

“그 사람은 분명 오지 않는다니까요. 제 정신을 차렸는데 다시 오겠어요?”

“안오면 그만이지. 하지만 분명 다시 올꺼야.”

“뭘 믿고 장담해요? 전 안오는 쪽에 걸겠어요.”

“하하, 그래. 난 오는 쪽에 걸지.”



김명순은 오십억을 걷어찬 내가 미운지 침대에 누워서도 도통 내 쪽으로 몸을 돌릴 생각을 안한다. 나는 그런 투정을 언제 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아주 오래전에 내 곁에서 누군가가 가끔은 뾰로퉁한 얼굴로 토라졌던 사랑스런 일들이 퍼즐조각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진달래가 활짝 핀 날. 그 가지를 꺽어 꽃을 바쳐서 청혼했던 것 같다. 둥근 얼굴에 또렷한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지만 내가 내민 그 꽃을 코 끝에 대고 진한 향기를 느끼면서 나의 손을 잡았다. 나는 그렇게 고운 날을 시작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내의 배가 점점 불러오더니 병원의 간호사가 함박만한 웃음을 지으며 아들을 출산했다고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아들. 지금은 스무살은 족히 넘었을 아들. 철호놈이 어떤 사연으로 노숙자로 굴러먹고 사는 지는 몰라도 그때 그 아이가 컷으면 그만쯤하겠다 싶은 어렴풋한 생각에 철호를 가깝게 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뭘 생각해요?”

“어, 아냐.”

“갑수씨도 오십억 생각하고 있는거지?”



아니라고 자꾸 우겨봤자 김명순의 머릿속에 잠식된 오십억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일 것 같아서 굳이 부정하는 말을 내 보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 나도 온통 오십억만 생각하고 있었어.”

“아휴, 이뻐.”



김명순은 금방 환한 얼굴이 되어 나를 향해 돌아 눕더니 이내 품 속을 파고 들었다. 나는 가지런하게 그녀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질하듯 쓸어 내렸다. 야들한 어깨살이며 가슴에 도톰하게 솟은 젖무덤이며 옆구리를 따라 흐르듯 스치며 만져지는 온갖 매끄러움이 끝나면 또 한번 펑퍼짐하게 부풀어 있는 엉덩이를 만지며 은근슬쩍 아랫배로 허리를 끌어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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