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벌록(日伐錄) - 프롤로그
2019.01.10 13:00
‘맴..맴... 매엠매엠....맴맴...’
목조 마룻바닥 거실로 크고 널찍한 유리창을 통해 화창한 햇살이 매미 소리와 함께 쏟아져 내렸다. 한 늙은 노(老)신사가 흔들의자에 등을 깊숙이 묻은 채 눈을 감고선 조용히 몸을 흔들고 있었다. 정갈한 인상이다.
‘아... 그렇다면 정말 대단한 사건 아닌가요?’
‘그렇죠. 만약 그 자료가 실재(實在)한다면 대단히 역사적 가치가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학술적 가치로도 대단하다 할 수 있죠. 학계에서도 자주 회자(膾炙)되곤 합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아까부터 역사학자 한 명이 패널로 나와 사람들의 흥미를 끌게 하는 소재로 어떤 고서(古書)에 대한 이야기를 앵커와 나누고 있었다.
“교수님, 여기 차(茶) 내왔어요.”
깨끗한 피부에 작고 귀여운 용모의 여자애가 투명한 안경알 너머로 눈웃음을 치며 애교스럽게 다가와 차 한 잔을 건넸다.
‘서애린’
여대생 2학년으로 그녀가 지금 교수라고 부르는 노신사의 문하생 중 한 명이다. 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문도영’
노신사의 이름이다. 대학 강단에서 은퇴한 지는 꽤 되었지만 명예교수로서 가끔 학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하며 젊은이들과의 정서적 거리감을 잃지 않으려고 유지하는 그였다. 문예 관련 학과에서는 명성이 대단해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따로, 자주 들르지는 않지만 ‘도영 글방’이라는 개인 사무실을 열어 문하생들을 데리고 문예창작물을 생산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사무실과는 좀 떨어진 한적한 교외 산기슭 아래 검은 목조 별장을 하나 구입해 놓고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가끔 찾아오는 손님이라곤 혼자된 며느리와 문하생들뿐이었다.
“교수님, 저 약속 있어 가봐야겠어요. 저쪽 청소는 다 했어요.”
애린이가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하는 얘기였다. 바로 노신사 문도영의 서재가 있는 방이었다. 애린이의 손에는 물기가 젖어 있었다.
“으음....그래 수고했어. 우리 애린이...”
노신사가 찻잔을 한 손에 든 채 애린이를 향해 인자하게 웃어보였다. 애린이가 생긋 웃으며 인사를 하더니 종종걸음으로 거실 목조현관을 밀고 나갔다. 차 한 잔을 한참을 음미하며 마셨다. 한가로웠다. 햇살 또한 여전히 한가롭게 거실 마룻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치이익.... 치익...’
노신사가 거실 유리창 쪽에 진열된 난(蘭)에 분무기를 뿌려댔다. 곧이어 손수건으로 난의 줄기 하나하나를 길게 뽑아대며 닦아냈다. 진열된 난 하나하나에 윤기가 그리 맨질맨질한 게 그의 평소 정갈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조선이 일본에 정벌대를 보냈다. 정말 다시 생각해도 대단한 큰 사건이었군요.’
다시금 텔레비전에서의 대화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네, 앵커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건 한일(韓日) 양국(兩國)간에 있어 대단히 큰 사건이라 할 수 있죠.’
‘아니... 그럼 그 당시 그리 큰 사건이 있었다면... 조선에서나 일본에서나 그에 대한 기록물이 전해져야 하지 않나요... 왜 찾아볼 수 없는 거죠?’
‘바로 그게 미스터리입니다. 양국 어디에서도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거죠.’
‘혹시 근거 없는 야사(野史)로만 떠돌던 이야기 아니었을까요?’
‘네, 물론 학계(學界)에서도 그럴 가능성을 전혀 배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여러 다른 기록에서도 그에 대한 이야기가 간접적으로 조금씩 언급된 걸로 보아 단순 야사는 아닌 걸로 보입니다. 각기 우회적으로 표현을 달리하긴 했지만 그 하나의 사건을 겨냥했습니다.“
앵커가 흥분했는지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바로 일벌록(日伐錄)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습니다. 어디엔가 원본... 아니 원본이 아니라 필사본이라도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물론... 희망사항입니다만...’
‘조선의 어느 왕조시대 기록물인지 알 수 있을까요?’
‘글쎄요...왕조까지는 특정할 수 없으나 추측해보건대, 임란(壬亂) 이후는 분명해 보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뭐... 그 책을 직접 보지 않아서 뭐라 확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정규전인 군대와 군대의 전쟁이 아니라 소수의 인물로 일본의 심장부만을 노렸다는 추측만이 가능할 뿐입니다.’
‘일본의 심장부라..... 이야... 이거... 듣기만 해도 흥미진진한데요? 일종의 소수정예 별똥대를 보낸 거군요?’
‘그렇다고 봐야죠. 아무래도 군대 단위의 규모는 눈에 띄기 십상이니 심장부로 가기도 전에 발각되겠죠.’
‘네... 소장님 모시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지만 방송시간이 다 되어서 이만 마쳐야겠습니다. 지금까지 한반도역사연구소장 박진오 박사님과 얘기 나누었습니다. 박사님 수고하셨습니다.’
‘네,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노신사 문도영은 여전히 난을 분무기로 적시며 정성스레 한 줄기 한 줄기를 손수건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
순간, 노신사 문도영의 두 눈이 부릅떠지며 이마 주름이 위로 깊게 치켜졌다.
’일벌록(日伐錄)‘
그의 뇌리를 스치는 낯익은 고서(古書) 한 권이 떠올랐다. 낡은 책자 표지 겉면에 세로로 쓰여진 ‘日伐錄’이라는 한자로 된 책 제목이었다.
‘서... 설마.... 그 책이...... 역사서?’
허나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도 그럴 게 그 책은 텔레비전에서 그 연구소장이라는 박사가 추앙할 정도로 그렇게 가치 있는 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음서(淫書)’
음서에 가까웠다. 노신사 문도영의 성장 시절, 그 어떠한 음란물보다도 성적(性的)욕구를 충족시켜주었던 음란서적이었기 때문이다. 문도영의 집안은 대대로 한학(漢學)을 업(業)으로 삼는 가문이었다. 때문에 문도영은 미취학 어린 시절부터 한자를 배웠고 학창시절에는 따로 한문학에 심취하기까지 했다. 그때 접한 게 바로 ‘일벌록’이었다. 내용이 전부 한자로 되어 있었지만 문도영이 읽은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집안에 대대로 내려와 보관하던 당시 골동품 창고에서 발견했다. 수많은 책자와 각종 도자기부터 진귀한 것들이 보관된 창고였다. 집안의 그러한 모든 보물들은 지금은 문도영이 보관하고 있다. 그리해 지금의 별장도 창고가 딸린 것을 구입한 것이다.
문도영이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더니 난을 정리하고선 거실 현관문을 나갔다. 파랗고 하얀 구름이 너무나도 청명한 여름의 낮이었다. 눈이 부셨다. 그를 경계하듯 매미소리가 더욱 세차게 귓가를 쩌렁쩌렁 울려댔다.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야외 구석에 설치된 재래식 변소(便所)간 옆에 멀찌감치 떨어져 위치한 낡은 창고 하나로 향했다. 오랫동안 찾지 않아 처마 밑에 하얀 거미줄이 맺혀 있었다. 그마저도 오래되어 말라붙었고 언제 걸렸을지 모를 똥파리 몇 마리가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주인인 거미마저 온데간데없이 방치된 그런 거미줄이 군데군데 ‘퀭’하니 쳐져 있었다.
‘덜커덩’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쾨쾨한 냄새가 코를 적당히 자극했다. 양쪽 선반에 도자기부터 각종 자개, 가야금까지 그 시대에 살아있었던 옛 가지들이, 문도영보다도 더 오래된 그들이 노신사 문도영을 맞이했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 한쪽에 책들이 방치되다시피 쌓여 있었다. 하나씩 들어 확인을 했다. 사람의 손을 탄 지 오래되어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몇 권의 책들을 하나씩 확인하고선 옆으로 가지런히 정리를 했다. 그렇게 수십 권이 반복되었고...
’일벌록(日伐錄)‘
마침내 노신사 문도영의 눈에 바랠 대로 바래진 낡은 책자의 표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핑’
갑자기 노신사 문도영의 눈에서 눈물이 도는 걸 뭘까.... 뭔지 모를 벅찬 가슴에 문도영은 목이 메고 눈물이 돌았다. 사춘기 성장시절 맡아보았던 그 책 내음...그 느낌... 그 시절의 아련한 향수가 그의 가슴을 적셨던 것이다. 음란서적에서 느껴지는 아이러니한 그런 감정... 다시 그 시절 소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을 게다.....
‘스윽’
손바닥으로 정성스레 책 표지에 쌓인 먼지를 닦아냈다. 누군가 근래 만졌던 것일까? 군데군데 사람의 흔적이 보이는 듯했다. 이어 계속 닦아냈다. 먼지가 걷혀지고 자신의 실체를 수십 년 만에 그의 앞에 드러내는 ‘일벌록’...... 문도영은 그 고서를 품에 소중히 담고서는 다시 검은 별장 안으로 돌아갔다. 다시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펼쳐보았다. 기억을 되살려 맨 뒷장을 먼저 펼쳐보았다.
‘1653년 한양 주인 없는 빈집에서 이 책을 발견하였다.
‘1658년 저잣거리에서 관군에게 쫓기던 자가 돌연 내 품에 쑤셔놓고 달아나 습득하게 되었다.
‘1658년 이 책을 쫓는 자들이 많아 버리기로 했다. 더러는 왜인(倭人)들도 있었다.
‘1665년 황해도 어느 이름 모를 병자(病者)가 내게 이 책을 주고선 숨을 거두었다.
‘1687년 몰락한 양반네 가문의 아녀자 방에서 얻게 되었다.
‘1693년 도성 시전상인에게 빌려준 돈 스무 냥을 이 책으로 대신했다.
‘1704년 가을, 경기 인근 서점에서 이 음서를 구입했다. 선비로서 부끄럽구나.’
‘17015년 역적으로 불난 집에서 얻게 되었다.’
.
.
.
등등 책의 출처가 기록된 듯한 다소 해학적인 내용이었다. 1800년 이전까지만 전달과정이 기록되어 있었고 후로는 없었다. 문도영은 학창시절 그때의 소년으로 돌아가 다시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같은 내용이지만 그때와는 뭔가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맨 앞 첫 장을 한 장 넘겼다.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명운(命運)이 다할 때까지는 금서(禁書)로서 너의 명(命)을 단축시킬 위험한 책이니 개의치 않는 자, 숨겨 보관하기 바란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의미심장한 문구가 책의 서문(序文)을 장식했다.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이어 한 장을 넘겼다.
‘임금께서 날 부르셨다.’
책의 이야기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목조 마룻바닥 거실로 크고 널찍한 유리창을 통해 화창한 햇살이 매미 소리와 함께 쏟아져 내렸다. 한 늙은 노(老)신사가 흔들의자에 등을 깊숙이 묻은 채 눈을 감고선 조용히 몸을 흔들고 있었다. 정갈한 인상이다.
‘아... 그렇다면 정말 대단한 사건 아닌가요?’
‘그렇죠. 만약 그 자료가 실재(實在)한다면 대단히 역사적 가치가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학술적 가치로도 대단하다 할 수 있죠. 학계에서도 자주 회자(膾炙)되곤 합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아까부터 역사학자 한 명이 패널로 나와 사람들의 흥미를 끌게 하는 소재로 어떤 고서(古書)에 대한 이야기를 앵커와 나누고 있었다.
“교수님, 여기 차(茶) 내왔어요.”
깨끗한 피부에 작고 귀여운 용모의 여자애가 투명한 안경알 너머로 눈웃음을 치며 애교스럽게 다가와 차 한 잔을 건넸다.
‘서애린’
여대생 2학년으로 그녀가 지금 교수라고 부르는 노신사의 문하생 중 한 명이다. 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문도영’
노신사의 이름이다. 대학 강단에서 은퇴한 지는 꽤 되었지만 명예교수로서 가끔 학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하며 젊은이들과의 정서적 거리감을 잃지 않으려고 유지하는 그였다. 문예 관련 학과에서는 명성이 대단해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따로, 자주 들르지는 않지만 ‘도영 글방’이라는 개인 사무실을 열어 문하생들을 데리고 문예창작물을 생산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사무실과는 좀 떨어진 한적한 교외 산기슭 아래 검은 목조 별장을 하나 구입해 놓고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가끔 찾아오는 손님이라곤 혼자된 며느리와 문하생들뿐이었다.
“교수님, 저 약속 있어 가봐야겠어요. 저쪽 청소는 다 했어요.”
애린이가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하는 얘기였다. 바로 노신사 문도영의 서재가 있는 방이었다. 애린이의 손에는 물기가 젖어 있었다.
“으음....그래 수고했어. 우리 애린이...”
노신사가 찻잔을 한 손에 든 채 애린이를 향해 인자하게 웃어보였다. 애린이가 생긋 웃으며 인사를 하더니 종종걸음으로 거실 목조현관을 밀고 나갔다. 차 한 잔을 한참을 음미하며 마셨다. 한가로웠다. 햇살 또한 여전히 한가롭게 거실 마룻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치이익.... 치익...’
노신사가 거실 유리창 쪽에 진열된 난(蘭)에 분무기를 뿌려댔다. 곧이어 손수건으로 난의 줄기 하나하나를 길게 뽑아대며 닦아냈다. 진열된 난 하나하나에 윤기가 그리 맨질맨질한 게 그의 평소 정갈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조선이 일본에 정벌대를 보냈다. 정말 다시 생각해도 대단한 큰 사건이었군요.’
다시금 텔레비전에서의 대화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네, 앵커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건 한일(韓日) 양국(兩國)간에 있어 대단히 큰 사건이라 할 수 있죠.’
‘아니... 그럼 그 당시 그리 큰 사건이 있었다면... 조선에서나 일본에서나 그에 대한 기록물이 전해져야 하지 않나요... 왜 찾아볼 수 없는 거죠?’
‘바로 그게 미스터리입니다. 양국 어디에서도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거죠.’
‘혹시 근거 없는 야사(野史)로만 떠돌던 이야기 아니었을까요?’
‘네, 물론 학계(學界)에서도 그럴 가능성을 전혀 배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여러 다른 기록에서도 그에 대한 이야기가 간접적으로 조금씩 언급된 걸로 보아 단순 야사는 아닌 걸로 보입니다. 각기 우회적으로 표현을 달리하긴 했지만 그 하나의 사건을 겨냥했습니다.“
앵커가 흥분했는지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바로 일벌록(日伐錄)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습니다. 어디엔가 원본... 아니 원본이 아니라 필사본이라도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물론... 희망사항입니다만...’
‘조선의 어느 왕조시대 기록물인지 알 수 있을까요?’
‘글쎄요...왕조까지는 특정할 수 없으나 추측해보건대, 임란(壬亂) 이후는 분명해 보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뭐... 그 책을 직접 보지 않아서 뭐라 확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정규전인 군대와 군대의 전쟁이 아니라 소수의 인물로 일본의 심장부만을 노렸다는 추측만이 가능할 뿐입니다.’
‘일본의 심장부라..... 이야... 이거... 듣기만 해도 흥미진진한데요? 일종의 소수정예 별똥대를 보낸 거군요?’
‘그렇다고 봐야죠. 아무래도 군대 단위의 규모는 눈에 띄기 십상이니 심장부로 가기도 전에 발각되겠죠.’
‘네... 소장님 모시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지만 방송시간이 다 되어서 이만 마쳐야겠습니다. 지금까지 한반도역사연구소장 박진오 박사님과 얘기 나누었습니다. 박사님 수고하셨습니다.’
‘네,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노신사 문도영은 여전히 난을 분무기로 적시며 정성스레 한 줄기 한 줄기를 손수건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
순간, 노신사 문도영의 두 눈이 부릅떠지며 이마 주름이 위로 깊게 치켜졌다.
’일벌록(日伐錄)‘
그의 뇌리를 스치는 낯익은 고서(古書) 한 권이 떠올랐다. 낡은 책자 표지 겉면에 세로로 쓰여진 ‘日伐錄’이라는 한자로 된 책 제목이었다.
‘서... 설마.... 그 책이...... 역사서?’
허나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도 그럴 게 그 책은 텔레비전에서 그 연구소장이라는 박사가 추앙할 정도로 그렇게 가치 있는 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음서(淫書)’
음서에 가까웠다. 노신사 문도영의 성장 시절, 그 어떠한 음란물보다도 성적(性的)욕구를 충족시켜주었던 음란서적이었기 때문이다. 문도영의 집안은 대대로 한학(漢學)을 업(業)으로 삼는 가문이었다. 때문에 문도영은 미취학 어린 시절부터 한자를 배웠고 학창시절에는 따로 한문학에 심취하기까지 했다. 그때 접한 게 바로 ‘일벌록’이었다. 내용이 전부 한자로 되어 있었지만 문도영이 읽은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집안에 대대로 내려와 보관하던 당시 골동품 창고에서 발견했다. 수많은 책자와 각종 도자기부터 진귀한 것들이 보관된 창고였다. 집안의 그러한 모든 보물들은 지금은 문도영이 보관하고 있다. 그리해 지금의 별장도 창고가 딸린 것을 구입한 것이다.
문도영이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더니 난을 정리하고선 거실 현관문을 나갔다. 파랗고 하얀 구름이 너무나도 청명한 여름의 낮이었다. 눈이 부셨다. 그를 경계하듯 매미소리가 더욱 세차게 귓가를 쩌렁쩌렁 울려댔다.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야외 구석에 설치된 재래식 변소(便所)간 옆에 멀찌감치 떨어져 위치한 낡은 창고 하나로 향했다. 오랫동안 찾지 않아 처마 밑에 하얀 거미줄이 맺혀 있었다. 그마저도 오래되어 말라붙었고 언제 걸렸을지 모를 똥파리 몇 마리가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주인인 거미마저 온데간데없이 방치된 그런 거미줄이 군데군데 ‘퀭’하니 쳐져 있었다.
‘덜커덩’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쾨쾨한 냄새가 코를 적당히 자극했다. 양쪽 선반에 도자기부터 각종 자개, 가야금까지 그 시대에 살아있었던 옛 가지들이, 문도영보다도 더 오래된 그들이 노신사 문도영을 맞이했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 한쪽에 책들이 방치되다시피 쌓여 있었다. 하나씩 들어 확인을 했다. 사람의 손을 탄 지 오래되어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몇 권의 책들을 하나씩 확인하고선 옆으로 가지런히 정리를 했다. 그렇게 수십 권이 반복되었고...
’일벌록(日伐錄)‘
마침내 노신사 문도영의 눈에 바랠 대로 바래진 낡은 책자의 표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핑’
갑자기 노신사 문도영의 눈에서 눈물이 도는 걸 뭘까.... 뭔지 모를 벅찬 가슴에 문도영은 목이 메고 눈물이 돌았다. 사춘기 성장시절 맡아보았던 그 책 내음...그 느낌... 그 시절의 아련한 향수가 그의 가슴을 적셨던 것이다. 음란서적에서 느껴지는 아이러니한 그런 감정... 다시 그 시절 소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을 게다.....
‘스윽’
손바닥으로 정성스레 책 표지에 쌓인 먼지를 닦아냈다. 누군가 근래 만졌던 것일까? 군데군데 사람의 흔적이 보이는 듯했다. 이어 계속 닦아냈다. 먼지가 걷혀지고 자신의 실체를 수십 년 만에 그의 앞에 드러내는 ‘일벌록’...... 문도영은 그 고서를 품에 소중히 담고서는 다시 검은 별장 안으로 돌아갔다. 다시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펼쳐보았다. 기억을 되살려 맨 뒷장을 먼저 펼쳐보았다.
‘1653년 한양 주인 없는 빈집에서 이 책을 발견하였다.
‘1658년 저잣거리에서 관군에게 쫓기던 자가 돌연 내 품에 쑤셔놓고 달아나 습득하게 되었다.
‘1658년 이 책을 쫓는 자들이 많아 버리기로 했다. 더러는 왜인(倭人)들도 있었다.
‘1665년 황해도 어느 이름 모를 병자(病者)가 내게 이 책을 주고선 숨을 거두었다.
‘1687년 몰락한 양반네 가문의 아녀자 방에서 얻게 되었다.
‘1693년 도성 시전상인에게 빌려준 돈 스무 냥을 이 책으로 대신했다.
‘1704년 가을, 경기 인근 서점에서 이 음서를 구입했다. 선비로서 부끄럽구나.’
‘17015년 역적으로 불난 집에서 얻게 되었다.’
.
.
.
등등 책의 출처가 기록된 듯한 다소 해학적인 내용이었다. 1800년 이전까지만 전달과정이 기록되어 있었고 후로는 없었다. 문도영은 학창시절 그때의 소년으로 돌아가 다시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같은 내용이지만 그때와는 뭔가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맨 앞 첫 장을 한 장 넘겼다.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명운(命運)이 다할 때까지는 금서(禁書)로서 너의 명(命)을 단축시킬 위험한 책이니 개의치 않는 자, 숨겨 보관하기 바란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의미심장한 문구가 책의 서문(序文)을 장식했다.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이어 한 장을 넘겼다.
‘임금께서 날 부르셨다.’
책의 이야기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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