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 - 프롤로그
2019.02.13 02:10
내 어머니
푸로로그-1
우선 이야기가 나온 김에 내 어머니의 처녀시절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겠어.
내 어머니「조규정(趙奎貞)」여사는 일제(日帝)시대에 우리나라에 3:1만세운동이 일어 난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저 경상도의『함안』땅이라는 시골에서 태어나 셨 대.
그보다 먼저 내 외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만 되겠지… !?
내 외할아버지와 내 친할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바로 내 어머니의 고향땅에서 서로 이웃하는 마을에서 함께 자라시면서 한때는 같은 서당에서 동문수학하시던 아주 막역한 친구 분들이었었대.
다만 내 친할아버지는 순수한 학자타입의 성품으로서 한학(漢學)에 전념하시는 반면…
내 외할아버지께서는 호탕한 성품이시라 그 당시 막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개화의 바람을 타고 들어오는 신문물에 일찍부터 눈을 뜨셔서 완고하신 내 외증조할아버님의 성화를 뿌리치고 일본으로 건너가셨다는 것이래.
그 어른은 우리나라 이씨조선(李氏朝鮮) 중엽이후 역대에 걸쳐서 천하를 주름잡고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다는 무슨「조(趙)」씨 가문의 종손(宗孫)집 맏아들로 태어나시긴 했지만 그저 잠자코 한국 땅에서만 사시 기엔 너무도 통이 크신 어른이셨다는 거래.
그때가 구한말(舊韓末)시대 그러니까 일제의 침범이 막 이루어지기 시작하던 19세기 초엽에 벌써 일본으로 건너가셔서 공부를 하시며 그곳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하셨던 분이셨대.
일본에서 외할아버지께서 무슨 활동을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일본에서 거의 20 년 이상 사셨다는 것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어.
젊으셨던 시절 그 어른은 일본에서 그 나라 여자한분을 만나셔서 사랑을 하시며 마나님으로 삼으시기도 했었다는 데…
그때 당시 내 외증조부 되시는 분(내 외할아버지의 아버지)의 엄한 꾸중아래 끌려오다시피 잠시 귀국을 하신 후 고향에서 거의 십여 년간을 사신 적이 있으셨다는 거지.
당신의 아버지 손에 이끌려서 고향으로 돌아오신 내 외할아버지는 당시 얌전한 양반집 규수와 정식으로 혼인을 하셔서 사시는 동안 내 외삼촌 두 분과 막내로 내 어머니가 태어나시게 되었다는 거래.
그래서 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나이차이가 많이 나시는 것 같았어.
내 외할머님께서는 방랑벽이 많으신 서방님을 만나신후 겨우 애기들 세 명만 낳으실 정도의 부부생활을 하셨을 뿐 평생을 독수공방을 하시며 그처럼이나 엄하다는 그「조(趙)」씨네 가문의 맏며느리로써 인내와 기다림 속에서 살아오시던 우리나라 전형적인 비극의 여인이셨던 분이신 셈이야…
물론 일본에서도 그곳의 마나님 즉 내게는 또 다른 한분의 외할머님이신 일본 여인에게서 소생이 따로 세분이나 있으셨다는 거야…
우리나라 고래의 전통에 따르면 일본의 마나님은 나이는 훨씬 많고 비록 내 외할아버지와 먼저 살을 맞대고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분은 말하자면 정실부인이 아닌 측실(側室)인 셈인 거지…
그렇기 때문에 내 외할머님에게 꼬박꼬박 윗사람대우를 해주시며 살아가시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나는 들어서 알고 있어.
그 일본의 외할머님도 어지간히는 불행한 여인이신거야.
내 외할아버지로부터「규정(奎貞)」이라는 이름을 얻으신 내 어머님께서도 어려서부터 그 「조(趙)」씨 가문의 종갓집 막내딸로 자라며 가문의 명예와 전통을 이어받도록 강요받으시며 전형적인 양반 댁의 작은아씨로서 손색이 없는 교육과 예절을 몸에 익히시며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었대.
그래서 내 어머니는 어린나이에 벌써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으셨고 소학(小學)은 물론 논어(論語)와 맹자(孟子)에 대학(大學)까지… 만약에 엄마가 남자였다면 이미 오래전에 과거에서 장원을 했을 꺼 라고 칭찬하는 이야기를 나도 몇 번씩이나 들었던 적이 있었어.
그 후의 일이지만 사실은 나도 어렸을 적에 아무것도 모르고 내 어머니한테 종아리를 맞아가며 한문과 붓글씨공부를 배우기도 했었어.
그 후에 내 외할아버지께서는 호랑이 같으신 당신의 아버지 즉 내 외증조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자 시묘사리 삼년을 마치신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예전에 하시던 모종의 사업을 계속하시게 된 거래.
그때에 무슨 생각이 드셨는지 불과 열 살도 안 된 어린 내 어머니를 데리고 일본으로 가셨다는 거래… 그리고 내 어머니는 그 일본 땅에서 새삼스럽게 소학교와 중학교과정을 마치시는 동안 일본여인이신 작은 어머니 댁에서 줄곧 사셨다는 거래…
그곳에서는 이미 일본여인이신 작은 어머니와 자기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낳으신 배다른 언니와 오라버니들도 있어서 함께 학교엘 다니셨던 모양이야… 물론 그분들도 내게는 외삼촌과 이모님이 되시는 분들인 거야.
그곳에서 내 어머니는 꿈 많은 소녀시절과 사춘기를 보내시는 동안 일본 특유의 문물을 배우시기도 하고 조선의 양반 댁 규수로써의 품위를 지키셔서 그곳의 또래친구들이나 어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음은 물론 일본 상류사회의 귀족들과도 많이 사귀기도 했었대.
엄마는 당시의 미인 기준에는 다소 맞지 않을지는 몰라도 무척 키가 크셨어. 지금으로 치면 팔등신의 훤칠한 미인이라 오히려 크게 환영받을 그런 타입의 여인이셨지만…
그 당시에는 여자가 키가 크다는 것은 일종의 흠이라고들 했었지…
분명히 분가루가 묻어날 것처럼 백설 같이 새하얀 피부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속눈썹이 기다랗고 진한데다가 눈 또한 커다래서 언제나 우수에 젖은 듯 항상 촉촉해있는 모습은 어린 내 눈에도 너무나 예쁘게 보이는 거였어.
지금으로 쳐도 분명히 이국적인 미모를 갖추신 미인 중의 미인이셨던 거야.
나도 내 외모가 주로 외탁을 한 탓인지 얼른보기에 여자 중에서도 미인 축에 든다고 할 정도로 아주 예쁘게 생겼다는 평을 받아오고 있었어.
다만 내 아버지를 닮아서 키가 작은 것이 흠이지만…
내 어머님에게 다소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녀의 성품이 너무나 깔끔한데다가 좀 사치스런 것을 좋아한다고 내 할머님이나 고모님들이 엄마가 안 계실 때에 뒷말들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지만 그것은 흠이 아니라 예뻐지고 싶어 하는 여자의 본능이 아니겠어… ?
그러나 그 정도의 사치는 그 당시 우리집안의 재력상태로 보아 충분히 감내하고도 남을 수 있는 말하자면 분수에 맞는 사치인 셈인거야.
일본 땅에서 중학교를 다니시며 밀려오는 신흥문물에 눈을 뜨신 당신 아버지의 원대한 꿈을 뒷바라지해주며 내 어머니 자신도 꿈을 싣고 공부를 하고 있던 내 어머니에게 혼삿말이 나오게 된 것은 내 엄마의 나이가 열여섯이 되던 해였대…
바로 옛날에 너무나 막역하셨던 두 분 할아버지들의 젊으셨을 때에 서로가 사돈지간이 되자고 약속했던 대로 결국 내 친할아버지의 외동아들인 내 아버지「전만진(全萬鎭)」씨와의 혼담이 진행되고 있었던 거지…
본인들의 의사는 전혀 무시된 채로 말이야…
싫다고 하시던 엄마가 자기의 꿈과 희망을 버리고 부모님의 뜻대로 고향땅에 사시는 내 아버지「전만진(全萬鎭)」씨와 혼례를 치르게 된 것은… 내 어머니가 열 일 곱살이 되던 해 봄이었었대.
어른들이 어렸을 적에 철모르고 훗날 커서 자식들이 생기면 서로가 사돈을 맺자고 했던 약속 때문에 어처구니없이 내 어머니는 당신의 커다란 꿈을 접고 평범한 여인네로 전락을 해야만 했다는 거야… 하기는 그것 때문에 나라는 인간이 세상에 나오기는 했지만… !?
그때가 또 서양에서는 제 2 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되던 때였대.
그때 내 엄마의 나이 겨우 열일곱이 되던 해였고 그리고 내 아빠의 나이는 엄마보다도 두 살이나 더 적은 열 다 섯 살이었었대.
솔직히 내 아버님은 그때까지 소학교만 겨우 졸업하시고 아직 중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채 부잣집 도령으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계시던… ??
말하자면 내 엄마에 비해서 별로 많은 것이 부족한 남자였었나 봐… !?
그때 마침 일본이라는 나라가 또 만주까지 진출하는 것을 기화로 내 외할아버지께서는 만주의 하얼빈이라는 곳으로 진출하셔서 무슨 사업인가를 하시고 있었대.
내 아버지의 인품이 별로 똑똑하지 못하고 또 남자답지 못한 기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신 내 외할아버지께서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주로 부르셨다는 거야…
내가 태어 난지 한 달도 안 되던 때였대…
그리고 내 어머니는 다시 외할아버지가 경영하시는 사업을 도와가는 한편 다시 학업을 시작하여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계속하시게 된 것이고… 내 아버지도 늦은 나이로 역시 중학교에를 입학하셔서 공부를 하면서 역시 당신의 장인이 하시는 사업을 도와주며 몇 년간을 살게 된 것이었대.
한편 내 친가도 역시 내 외가 못지않게 경상도 지방에서는 떵떵거리는 양반집의 잘 나가는 가문이었다는 것인데…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고 한다면 내 아버지까지 대대로 3 대째 독신으로 내려오고 있는 아주 손(孫)이 귀한 가문이었다는 거래.
그렇게 손이 귀한 가문에 시집을 오셔서 어머니께서는 우리「전(全)」씨 가문의 대(代)를 이어줄 아주 훌륭한 아들을 낳아주셨다는 거래…
바로 나「전동훈(全東勳)」이었던 거지… !!
그런데… 나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낳자마자 그렇게 부랴부랴 만주로 가시느라고 면사무소(面事務所)에다 나의 출생 신고하는 것을 빠뜨리시는 바람에 나는 내 실질적인 나이보다 호적 나이가 두 살이나 어리게 되고 말았다는 거야…
그 바람에 훗날 커가면서 나는 조금 황당한 일을 당하기도 했었지… !?
우리집안에서는 정말 더없이 귀한 대접을 받는 며느리가 된 셈인 거야.
내 어머니는 너무나 귀 하기만한 나에게 언제나「꾼-짱」이라고 불러주셨어.
왜냐하면 내 이름이「전동훈(全東勳)」이기 때문에 그 당시에 모두들 일본식으로 나를 부르면「졘-히가시 꾼」이었던 거야.
일본의 상류계급층에서는 그 어머니라 할지라도 귀한 자기의 아들에게 그 이름자 뒤에 「-짱」이라는 경어를 붙여주어 부르고 절대로 하대하는 반말은 쓰지 않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그 습관을 잘 아시는 내 어머니는 언제나 나에게 그렇게 불러주셨었어.
그때쯤 고향땅인 경상도에서는 한학자(漢學者)이신 내 할아버지께서 정감록(鄭鑑錄)이라는 무서(巫書)비슷한 예언서에 심취하셔서 그 예언서에서 아주 길지(吉地)라고 지정하는 충청도의 계룡산(鷄龍山)아래에 있는『신도안(新道安)』이라는 지역으로 이주를 하게 된 거래.
나는 만주에서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살았대.
나 이후에도 여자동생 두 명이 더 태어났지만 남자동생은 하나도 없었어.
내 기억으로 내 어머니는 중국계 대학을 졸업하시고 역시 외할아버지가 경영하시는 커다란 사업체를 도맡아서 운영하셨고 내 아버지는 내 어머니를 보조하는 역할을 했었나봐… !?
그때 내 어머니는 언제나 한복이 아닌 양장이나 중국의 꾸-냥 옷을 즐겨 입으셨는데… 훤칠한 미녀가 수 십 명의 종업원들 앞에서 손수 진두지휘하시며 호쾌하게 동분서주하시는 어머니가 그렇게나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어.
내 어머니는 그 어린 나의 눈에도 너무 너무나 당당하고 예쁜 미인이셨었어.
지금도 그때의 내 기억 속에서는 내 어머니만 있었을 뿐 내 아버지의 모습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 거야.
그 당시 내 큰 고모님도 함께 만주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살기도 했었어.
내 큰 고모님은 또 내 친할머니께서 내 아버지를 낳으시다 산후조리가 잘못되셔서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내 할아버지께서 다시아들이라도 보실까 해서 나이가 젊으신 처녀장가를 드신 후 그 처녀 할머님 몸에서 낳으신 내 아버지의 여동생이셨어.
이런 말하기는 좀 부끄럽지만 그 당시에 내 어머니와 그 처녀할머님의 나이는 불과 열 살밖에 차이가 안 나셨대나 봐… 그래서 내 어머니는 그 젊으신 시어머님을 모시느라 속깨나 썩이시고 있는 것을 나만은 잘 알고 있었어.
그러다가 일본이 전세(戰勢)에서 밀리는 정황이 나타나기 시작한 거야.
바깥세상의 정세가 점점 험악해가고 있는 것을 느끼신 내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선견지명 때문에 우리가족은 모두 함께 일본이 패망하기 일 년 전에 내 친할아버지가 사시는 충청도의 대전이라는 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거야.
그때쯤 내 할아버지께서는 경상도의 고향에 있는 엄청나게 많은 전답을 처분하셔서 소위 정감록(鄭鑑錄)에서 말하는 난리가 나지 않는다는 땅이라고 하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인『신도안』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오셔서 그 근처일대의 땅으로 돌려 잡게 되셨다는 거야…
그리고 그 인근의 큰 도시인『대전』시내에다가도 커다란 집을 장만 하시고 그 집터에다 당시 상당히 이권이 있다는 술도가(都家)… !! 즉 다시 말하면 양조장(釀造場)을 허가 내어서 직접 경영하시고 있었대.
만주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내 어머니의 소질과 품성을 아시게 된 내 친 할아버지는『대전』에 있는 양조장운영을 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맡기시고(사실은 내 어머니에게 맡기신 거지.) 당신은『신도안』으로 다시 들어가셔서 농사일에 전념을 하시는 한편 한학자로써의 본분을 지키시며 여전히 정감록이라는 책에 심취 하시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어.
그래서 엄마는『대전』시내에 나가시면 양조장의 경영자로 바쁘게 움직이셨고 또『신도안』에를 가시게 되면 수많은 일꾼이나 머슴들을 지휘하시며 농사일과 집안일을 거침없이 해내시며 안으로는 또 별당마님 역할을 톡톡히 해내시는 분이셨어.
물론 그 당시 안방마님이라 하면 내 할머님이 계시기 때문에『신도안』에만 가시면 엄마는 언제나 바깥채나 안채와는 동떨어진 별당 채에서 주로 기거하셨던 거야.
제 2 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었다고 모든 사람들이 들떠있을 때에 나도 영문도 모르면서 길거리를 쏘아 다니던 기억이 지금도 나는 걸…
『신도안』이라는 고장은 계룡산이라는 신령스러운 커다란 산의 웅장한 줄기가 감싸고도는 지역이기 때문에 옛날부터 이 고장에 새로운 도읍지가 들어선다고 해서 신도안(新都安)이라고 했다는 거야…
계룡산의 바로 밑자락이 되는 곳에 용추(龍湫)라고 하는 커다란 소(沼)가 두개나 있는데 하나는『숫용추』라하고 또 하나는『암용추』라고 하는데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고 할 정도로 깊은 연못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저수지라고 할 정도인거야…
이곳의 수량이 얼마나 많은지 그 두개의 깊은 소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깊은 계곡을 이룰 정도인거야… 그래서 여름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 계곡에 모여서 천렵도하고 물놀이도 하며 더위를 식히기도 하는 거지.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 살던 암수 용들이 함께 승천을 하고난 뒤에도 가끔 구름을 타고 내려와서 이곳에서 묵었다간다고 하는 곳인 거야…
나는 어려서부터 생김새가 계집아이처럼 예쁘기만 했었어… 그리고 또 3 대째 내려오는 귀한 집안의 외아들이기도 했던 거야.
집안에서는 남자라고는 거의 없고 온통 여자들뿐인 거야… 그래서 내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또 어떤 놀이를 하는지를 전혀 모른 채 여자들 틈에서만 자라고 있었던 거야… 만주에 살 때에도 언제나 엄마나 엄마의 몸종인「탄실」이 그리고 큰 고모, 그리고 집안일을 도와주는 중국여인네들 등등이 모두가 다 여자들뿐이었으니까…
만주에 있을 때에 태어난 동생들도 모두가 계집아이 였었어…
그리고 신도안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내 주위에는 더더욱 여자들뿐이었어.
신도안에 사시는 할머님과 고모들도 모두가 여자들뿐이었으니까…
내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딸 많은 집의 막내딸을 다음번에는 사내동생을 보라고 일부러 사내아이 옷을 입혀 놓은 계집아이라는 말들을 들을 정도로 겉으로 보기에 예쁘기만 한 아이였었어. 그러다보니까 내 행동도 또한 예쁜 계집아이처럼 나약하고 또 응석받이 왕자님처럼 위함만 받으며 살아오고 있었던 거지.
푸로로그-1
우선 이야기가 나온 김에 내 어머니의 처녀시절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겠어.
내 어머니「조규정(趙奎貞)」여사는 일제(日帝)시대에 우리나라에 3:1만세운동이 일어 난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저 경상도의『함안』땅이라는 시골에서 태어나 셨 대.
그보다 먼저 내 외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만 되겠지… !?
내 외할아버지와 내 친할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바로 내 어머니의 고향땅에서 서로 이웃하는 마을에서 함께 자라시면서 한때는 같은 서당에서 동문수학하시던 아주 막역한 친구 분들이었었대.
다만 내 친할아버지는 순수한 학자타입의 성품으로서 한학(漢學)에 전념하시는 반면…
내 외할아버지께서는 호탕한 성품이시라 그 당시 막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개화의 바람을 타고 들어오는 신문물에 일찍부터 눈을 뜨셔서 완고하신 내 외증조할아버님의 성화를 뿌리치고 일본으로 건너가셨다는 것이래.
그 어른은 우리나라 이씨조선(李氏朝鮮) 중엽이후 역대에 걸쳐서 천하를 주름잡고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다는 무슨「조(趙)」씨 가문의 종손(宗孫)집 맏아들로 태어나시긴 했지만 그저 잠자코 한국 땅에서만 사시 기엔 너무도 통이 크신 어른이셨다는 거래.
그때가 구한말(舊韓末)시대 그러니까 일제의 침범이 막 이루어지기 시작하던 19세기 초엽에 벌써 일본으로 건너가셔서 공부를 하시며 그곳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하셨던 분이셨대.
일본에서 외할아버지께서 무슨 활동을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일본에서 거의 20 년 이상 사셨다는 것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어.
젊으셨던 시절 그 어른은 일본에서 그 나라 여자한분을 만나셔서 사랑을 하시며 마나님으로 삼으시기도 했었다는 데…
그때 당시 내 외증조부 되시는 분(내 외할아버지의 아버지)의 엄한 꾸중아래 끌려오다시피 잠시 귀국을 하신 후 고향에서 거의 십여 년간을 사신 적이 있으셨다는 거지.
당신의 아버지 손에 이끌려서 고향으로 돌아오신 내 외할아버지는 당시 얌전한 양반집 규수와 정식으로 혼인을 하셔서 사시는 동안 내 외삼촌 두 분과 막내로 내 어머니가 태어나시게 되었다는 거래.
그래서 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나이차이가 많이 나시는 것 같았어.
내 외할머님께서는 방랑벽이 많으신 서방님을 만나신후 겨우 애기들 세 명만 낳으실 정도의 부부생활을 하셨을 뿐 평생을 독수공방을 하시며 그처럼이나 엄하다는 그「조(趙)」씨네 가문의 맏며느리로써 인내와 기다림 속에서 살아오시던 우리나라 전형적인 비극의 여인이셨던 분이신 셈이야…
물론 일본에서도 그곳의 마나님 즉 내게는 또 다른 한분의 외할머님이신 일본 여인에게서 소생이 따로 세분이나 있으셨다는 거야…
우리나라 고래의 전통에 따르면 일본의 마나님은 나이는 훨씬 많고 비록 내 외할아버지와 먼저 살을 맞대고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분은 말하자면 정실부인이 아닌 측실(側室)인 셈인 거지…
그렇기 때문에 내 외할머님에게 꼬박꼬박 윗사람대우를 해주시며 살아가시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나는 들어서 알고 있어.
그 일본의 외할머님도 어지간히는 불행한 여인이신거야.
내 외할아버지로부터「규정(奎貞)」이라는 이름을 얻으신 내 어머님께서도 어려서부터 그 「조(趙)」씨 가문의 종갓집 막내딸로 자라며 가문의 명예와 전통을 이어받도록 강요받으시며 전형적인 양반 댁의 작은아씨로서 손색이 없는 교육과 예절을 몸에 익히시며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었대.
그래서 내 어머니는 어린나이에 벌써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으셨고 소학(小學)은 물론 논어(論語)와 맹자(孟子)에 대학(大學)까지… 만약에 엄마가 남자였다면 이미 오래전에 과거에서 장원을 했을 꺼 라고 칭찬하는 이야기를 나도 몇 번씩이나 들었던 적이 있었어.
그 후의 일이지만 사실은 나도 어렸을 적에 아무것도 모르고 내 어머니한테 종아리를 맞아가며 한문과 붓글씨공부를 배우기도 했었어.
그 후에 내 외할아버지께서는 호랑이 같으신 당신의 아버지 즉 내 외증조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자 시묘사리 삼년을 마치신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예전에 하시던 모종의 사업을 계속하시게 된 거래.
그때에 무슨 생각이 드셨는지 불과 열 살도 안 된 어린 내 어머니를 데리고 일본으로 가셨다는 거래… 그리고 내 어머니는 그 일본 땅에서 새삼스럽게 소학교와 중학교과정을 마치시는 동안 일본여인이신 작은 어머니 댁에서 줄곧 사셨다는 거래…
그곳에서는 이미 일본여인이신 작은 어머니와 자기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낳으신 배다른 언니와 오라버니들도 있어서 함께 학교엘 다니셨던 모양이야… 물론 그분들도 내게는 외삼촌과 이모님이 되시는 분들인 거야.
그곳에서 내 어머니는 꿈 많은 소녀시절과 사춘기를 보내시는 동안 일본 특유의 문물을 배우시기도 하고 조선의 양반 댁 규수로써의 품위를 지키셔서 그곳의 또래친구들이나 어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음은 물론 일본 상류사회의 귀족들과도 많이 사귀기도 했었대.
엄마는 당시의 미인 기준에는 다소 맞지 않을지는 몰라도 무척 키가 크셨어. 지금으로 치면 팔등신의 훤칠한 미인이라 오히려 크게 환영받을 그런 타입의 여인이셨지만…
그 당시에는 여자가 키가 크다는 것은 일종의 흠이라고들 했었지…
분명히 분가루가 묻어날 것처럼 백설 같이 새하얀 피부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속눈썹이 기다랗고 진한데다가 눈 또한 커다래서 언제나 우수에 젖은 듯 항상 촉촉해있는 모습은 어린 내 눈에도 너무나 예쁘게 보이는 거였어.
지금으로 쳐도 분명히 이국적인 미모를 갖추신 미인 중의 미인이셨던 거야.
나도 내 외모가 주로 외탁을 한 탓인지 얼른보기에 여자 중에서도 미인 축에 든다고 할 정도로 아주 예쁘게 생겼다는 평을 받아오고 있었어.
다만 내 아버지를 닮아서 키가 작은 것이 흠이지만…
내 어머님에게 다소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녀의 성품이 너무나 깔끔한데다가 좀 사치스런 것을 좋아한다고 내 할머님이나 고모님들이 엄마가 안 계실 때에 뒷말들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지만 그것은 흠이 아니라 예뻐지고 싶어 하는 여자의 본능이 아니겠어… ?
그러나 그 정도의 사치는 그 당시 우리집안의 재력상태로 보아 충분히 감내하고도 남을 수 있는 말하자면 분수에 맞는 사치인 셈인거야.
일본 땅에서 중학교를 다니시며 밀려오는 신흥문물에 눈을 뜨신 당신 아버지의 원대한 꿈을 뒷바라지해주며 내 어머니 자신도 꿈을 싣고 공부를 하고 있던 내 어머니에게 혼삿말이 나오게 된 것은 내 엄마의 나이가 열여섯이 되던 해였대…
바로 옛날에 너무나 막역하셨던 두 분 할아버지들의 젊으셨을 때에 서로가 사돈지간이 되자고 약속했던 대로 결국 내 친할아버지의 외동아들인 내 아버지「전만진(全萬鎭)」씨와의 혼담이 진행되고 있었던 거지…
본인들의 의사는 전혀 무시된 채로 말이야…
싫다고 하시던 엄마가 자기의 꿈과 희망을 버리고 부모님의 뜻대로 고향땅에 사시는 내 아버지「전만진(全萬鎭)」씨와 혼례를 치르게 된 것은… 내 어머니가 열 일 곱살이 되던 해 봄이었었대.
어른들이 어렸을 적에 철모르고 훗날 커서 자식들이 생기면 서로가 사돈을 맺자고 했던 약속 때문에 어처구니없이 내 어머니는 당신의 커다란 꿈을 접고 평범한 여인네로 전락을 해야만 했다는 거야… 하기는 그것 때문에 나라는 인간이 세상에 나오기는 했지만… !?
그때가 또 서양에서는 제 2 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되던 때였대.
그때 내 엄마의 나이 겨우 열일곱이 되던 해였고 그리고 내 아빠의 나이는 엄마보다도 두 살이나 더 적은 열 다 섯 살이었었대.
솔직히 내 아버님은 그때까지 소학교만 겨우 졸업하시고 아직 중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채 부잣집 도령으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계시던… ??
말하자면 내 엄마에 비해서 별로 많은 것이 부족한 남자였었나 봐… !?
그때 마침 일본이라는 나라가 또 만주까지 진출하는 것을 기화로 내 외할아버지께서는 만주의 하얼빈이라는 곳으로 진출하셔서 무슨 사업인가를 하시고 있었대.
내 아버지의 인품이 별로 똑똑하지 못하고 또 남자답지 못한 기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신 내 외할아버지께서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주로 부르셨다는 거야…
내가 태어 난지 한 달도 안 되던 때였대…
그리고 내 어머니는 다시 외할아버지가 경영하시는 사업을 도와가는 한편 다시 학업을 시작하여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계속하시게 된 것이고… 내 아버지도 늦은 나이로 역시 중학교에를 입학하셔서 공부를 하면서 역시 당신의 장인이 하시는 사업을 도와주며 몇 년간을 살게 된 것이었대.
한편 내 친가도 역시 내 외가 못지않게 경상도 지방에서는 떵떵거리는 양반집의 잘 나가는 가문이었다는 것인데…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고 한다면 내 아버지까지 대대로 3 대째 독신으로 내려오고 있는 아주 손(孫)이 귀한 가문이었다는 거래.
그렇게 손이 귀한 가문에 시집을 오셔서 어머니께서는 우리「전(全)」씨 가문의 대(代)를 이어줄 아주 훌륭한 아들을 낳아주셨다는 거래…
바로 나「전동훈(全東勳)」이었던 거지… !!
그런데… 나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낳자마자 그렇게 부랴부랴 만주로 가시느라고 면사무소(面事務所)에다 나의 출생 신고하는 것을 빠뜨리시는 바람에 나는 내 실질적인 나이보다 호적 나이가 두 살이나 어리게 되고 말았다는 거야…
그 바람에 훗날 커가면서 나는 조금 황당한 일을 당하기도 했었지… !?
우리집안에서는 정말 더없이 귀한 대접을 받는 며느리가 된 셈인 거야.
내 어머니는 너무나 귀 하기만한 나에게 언제나「꾼-짱」이라고 불러주셨어.
왜냐하면 내 이름이「전동훈(全東勳)」이기 때문에 그 당시에 모두들 일본식으로 나를 부르면「졘-히가시 꾼」이었던 거야.
일본의 상류계급층에서는 그 어머니라 할지라도 귀한 자기의 아들에게 그 이름자 뒤에 「-짱」이라는 경어를 붙여주어 부르고 절대로 하대하는 반말은 쓰지 않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그 습관을 잘 아시는 내 어머니는 언제나 나에게 그렇게 불러주셨었어.
그때쯤 고향땅인 경상도에서는 한학자(漢學者)이신 내 할아버지께서 정감록(鄭鑑錄)이라는 무서(巫書)비슷한 예언서에 심취하셔서 그 예언서에서 아주 길지(吉地)라고 지정하는 충청도의 계룡산(鷄龍山)아래에 있는『신도안(新道安)』이라는 지역으로 이주를 하게 된 거래.
나는 만주에서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살았대.
나 이후에도 여자동생 두 명이 더 태어났지만 남자동생은 하나도 없었어.
내 기억으로 내 어머니는 중국계 대학을 졸업하시고 역시 외할아버지가 경영하시는 커다란 사업체를 도맡아서 운영하셨고 내 아버지는 내 어머니를 보조하는 역할을 했었나봐… !?
그때 내 어머니는 언제나 한복이 아닌 양장이나 중국의 꾸-냥 옷을 즐겨 입으셨는데… 훤칠한 미녀가 수 십 명의 종업원들 앞에서 손수 진두지휘하시며 호쾌하게 동분서주하시는 어머니가 그렇게나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어.
내 어머니는 그 어린 나의 눈에도 너무 너무나 당당하고 예쁜 미인이셨었어.
지금도 그때의 내 기억 속에서는 내 어머니만 있었을 뿐 내 아버지의 모습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 거야.
그 당시 내 큰 고모님도 함께 만주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살기도 했었어.
내 큰 고모님은 또 내 친할머니께서 내 아버지를 낳으시다 산후조리가 잘못되셔서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내 할아버지께서 다시아들이라도 보실까 해서 나이가 젊으신 처녀장가를 드신 후 그 처녀 할머님 몸에서 낳으신 내 아버지의 여동생이셨어.
이런 말하기는 좀 부끄럽지만 그 당시에 내 어머니와 그 처녀할머님의 나이는 불과 열 살밖에 차이가 안 나셨대나 봐… 그래서 내 어머니는 그 젊으신 시어머님을 모시느라 속깨나 썩이시고 있는 것을 나만은 잘 알고 있었어.
그러다가 일본이 전세(戰勢)에서 밀리는 정황이 나타나기 시작한 거야.
바깥세상의 정세가 점점 험악해가고 있는 것을 느끼신 내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선견지명 때문에 우리가족은 모두 함께 일본이 패망하기 일 년 전에 내 친할아버지가 사시는 충청도의 대전이라는 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거야.
그때쯤 내 할아버지께서는 경상도의 고향에 있는 엄청나게 많은 전답을 처분하셔서 소위 정감록(鄭鑑錄)에서 말하는 난리가 나지 않는다는 땅이라고 하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인『신도안』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오셔서 그 근처일대의 땅으로 돌려 잡게 되셨다는 거야…
그리고 그 인근의 큰 도시인『대전』시내에다가도 커다란 집을 장만 하시고 그 집터에다 당시 상당히 이권이 있다는 술도가(都家)… !! 즉 다시 말하면 양조장(釀造場)을 허가 내어서 직접 경영하시고 있었대.
만주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내 어머니의 소질과 품성을 아시게 된 내 친 할아버지는『대전』에 있는 양조장운영을 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맡기시고(사실은 내 어머니에게 맡기신 거지.) 당신은『신도안』으로 다시 들어가셔서 농사일에 전념을 하시는 한편 한학자로써의 본분을 지키시며 여전히 정감록이라는 책에 심취 하시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어.
그래서 엄마는『대전』시내에 나가시면 양조장의 경영자로 바쁘게 움직이셨고 또『신도안』에를 가시게 되면 수많은 일꾼이나 머슴들을 지휘하시며 농사일과 집안일을 거침없이 해내시며 안으로는 또 별당마님 역할을 톡톡히 해내시는 분이셨어.
물론 그 당시 안방마님이라 하면 내 할머님이 계시기 때문에『신도안』에만 가시면 엄마는 언제나 바깥채나 안채와는 동떨어진 별당 채에서 주로 기거하셨던 거야.
제 2 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었다고 모든 사람들이 들떠있을 때에 나도 영문도 모르면서 길거리를 쏘아 다니던 기억이 지금도 나는 걸…
『신도안』이라는 고장은 계룡산이라는 신령스러운 커다란 산의 웅장한 줄기가 감싸고도는 지역이기 때문에 옛날부터 이 고장에 새로운 도읍지가 들어선다고 해서 신도안(新都安)이라고 했다는 거야…
계룡산의 바로 밑자락이 되는 곳에 용추(龍湫)라고 하는 커다란 소(沼)가 두개나 있는데 하나는『숫용추』라하고 또 하나는『암용추』라고 하는데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고 할 정도로 깊은 연못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저수지라고 할 정도인거야…
이곳의 수량이 얼마나 많은지 그 두개의 깊은 소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깊은 계곡을 이룰 정도인거야… 그래서 여름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 계곡에 모여서 천렵도하고 물놀이도 하며 더위를 식히기도 하는 거지.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 살던 암수 용들이 함께 승천을 하고난 뒤에도 가끔 구름을 타고 내려와서 이곳에서 묵었다간다고 하는 곳인 거야…
나는 어려서부터 생김새가 계집아이처럼 예쁘기만 했었어… 그리고 또 3 대째 내려오는 귀한 집안의 외아들이기도 했던 거야.
집안에서는 남자라고는 거의 없고 온통 여자들뿐인 거야… 그래서 내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또 어떤 놀이를 하는지를 전혀 모른 채 여자들 틈에서만 자라고 있었던 거야… 만주에 살 때에도 언제나 엄마나 엄마의 몸종인「탄실」이 그리고 큰 고모, 그리고 집안일을 도와주는 중국여인네들 등등이 모두가 다 여자들뿐이었으니까…
만주에 있을 때에 태어난 동생들도 모두가 계집아이 였었어…
그리고 신도안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내 주위에는 더더욱 여자들뿐이었어.
신도안에 사시는 할머님과 고모들도 모두가 여자들뿐이었으니까…
내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딸 많은 집의 막내딸을 다음번에는 사내동생을 보라고 일부러 사내아이 옷을 입혀 놓은 계집아이라는 말들을 들을 정도로 겉으로 보기에 예쁘기만 한 아이였었어. 그러다보니까 내 행동도 또한 예쁜 계집아이처럼 나약하고 또 응석받이 왕자님처럼 위함만 받으며 살아오고 있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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