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 보이의 첫경험 - 1부
2018.04.14 20:28
순진 보이의 첫경험30대 중반을 바라보는 지금에야 다가오는 여자 마다하지 않고 쌍수 들고 환영하는 어쩔 수 없는 늑대가 되어버렸지만 나는 10대 후반까지 딸딸이를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르는 순진한 놈이었다.
미국에 와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어울려 다니게 된 한국 학생들이 여럿 있었다. 이들이 하루는 포르노 테이프가 있으니 누구네 집이 비었으면 몰려 가서 보자는 것이었다. 마침 우리 집이 비어 있었고 나는 그 쏘세지 부대를 우리 집으로 불러 들였다. 이 포르노 영화에서 상스럽게 생긴 백인 여자가 흑인 남자의 물건을 붙잡고 쏘세지 주물러 국물 빼내는 광경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고 나는 그 때에서야 딸딸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가 내 나이 열여섯. 늦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당시 내 또래 아이들의 비해서는 엄청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자연 법칙의 조화로 가끔 몽정을 하고 팬티를 잔뜩 적신채 잠에서 깨곤 했었지만 나는 잠결에 쉬야를 팬티에 지렸나 하며 빨래통에 그 팬티를 아무렇지도 않게 벗어 놓곤 하였던 것이다.
나의 첫 여자 친구는 미국식으로 말하면 11학년, 한국식으로 말하면 고2때 생겼다. 나는 한창 문학 소년으로,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으로, 비합리적인 사회 구조와 깨지지 않는 부익부 빈익빈 체제의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고민하는 제법 의식 있는 청소년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중상층 동네에 있는 명문 고등학교에 재학을 했었고 학구열 높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학부모들은 자녀들을 열심히 이 고등학교에 보내려 머나먼 미국까지 이민 와서 뼈빠지게 LA 바닥을 주름 잡고 휩쓸고 짖밟고 뒤덮었다.
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제 아무리 잘 나가던 사람들이라 해도 일단 이민을 오면 우선 종사하게 되는 직종이 세탁소나 청소업, 봉제업이나 페이트업이었다. 세탁소를 운영하며 많은 사람들의 바지와 치마에 주름을 잡았고, 청소를 하며 늦은 밤 텅빈 빌딩 바닥을 빗자루로 쓸었고, 봉제공장에 다니며 재봉틀 발판을 열심히 열심히 밟았으며 페인트로 LA에 있는 빌딩과 아파트 벽들을 온통 뒤덮으면서 아메리칸 드림을 일궈내려 피땀 흘렸던 것이다.
암튼 LA 바닥을 주름 잡고 휩쓸고 짖밟고 뒤덮으며 번 돈으로 좋은 동네에 거처를 마련하면 일단 자녀들이 남들이 좋다해주는 학교에 재학을 하게 되니 마음이 놓이나보다. 이 학교 역시 오렌지카운티 부촌에 속하는 동네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로 캘리포니아 전체에서 10위권 안에 들기를 밥먹듯 하던 명문교였고 그래서 그랬는지 한국 학생들이 엄청 많았다.
내가 11학년에 재학 중이던 때. 뉴욕에서 한 한국 여학생이 전학 온다는 소문이 교내 한국 학생들 사이에 퍼졌다. 소문을 듣고 난 의젓한척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처럼 생활을 했다. 점심 시간. 도서관 앞을 걸어가는 낯선 여자 아이가 눈에 띄었다.
앙증 맞을 정도로 작은 키. 작은 키에 비해 날씬하고 그 나이 또래 여자 아이들답지 않게 볼록 솟아 있는 가슴. 평범한 대한민국 여자들답지 않게 볼록 튀어나와 위를 향해 솟아 있는 엉덩이. 세침거리듯 고개를 120도 각도를 내리고 걷는 도도한 모습. 속으로 저 아이가 그 아이인가 보다 하면서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5교시. 수학시간이었고 이 여자아이가 뻘쭘하게 교실문을 열고 들어왔다. 수학 선생에게 다가가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를 하더니 교실을 한바퀴 둘러보고는 내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저기, 한국사람이지요?"
"네."
"나 오늘 전학 왔어요. 반가워요. 이름은 박현지에요."
"아 그래요? 난 이기현이에요."
"몇학년이에요?"
"11학년이고 73년생입니다."
"그래요? 나랑 똑같네."
"어, 그래?"
미국의 고등학교 시스템을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부연 설명을 하자면 한국처럼 반이 정해져 선생들이 교실들을 왔다갔다 학생들을 찾아다니는게 아니라, 학생들이 각자 알아서 과목을 선택하고 졸업에 필요한 수업을 선택해 듣는, 마치 대학 시스템과 같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같은 반이어도 학년이나 나이가 다를 수가 있다.
5교시가 끝나고 나는 현지에게 나중에 또 보자는 인사를 했다. 6교시가 끝나고 학교 주차장을 향해 걷고 있었다. 주차장 입구에 서성이고 있는 현지의 모습이 보였다. "집에 안가?"
"응. 나 차가 없어서..."
"그래? 집이 어딘데? 내가 데려다 줄까?"
"그래줄 수 있어?"
미국은, 특히 LA는 16세가 되면 운전면허를 필수로 취득해야 하고, 일부 학교에서는 고등학교 졸업 조건 중 운전면허 취득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이런 외곽의 동네일수록 대중교통이 전무하여 16세가 되면 고등학생들도 대부분 차를 몰고 등하교를 하게 되어 있다.
현지를 현지가 사는 집 앞에 내려 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책상에 앉아 숙제를 하고 음악을 듣는 등 평소 하던 대로 하루를 죽여가고 있었다. 문득 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새록새록 그녀의 톤 높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하얀 미니스커트, 하얀 티셔츠, 밤색 가죽 자켓을 입고 있던 현지의 세련된 모습이 눈 앞에 그려졌다.
밤이 되어 잠을 청하려 침대에 누웠는데 그녀의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지며 이상하게 가슴이 뛰는 것이었다.
내가 왜 이러지? 현지 생각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음날도 5교시 수학 시간에 현지를 만났고 그날 방과후에도 자신을 집에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했다. 현지를 차에 태우고 하교를 하던 중, 현지가 어디 가서 햄버거라도 먹자는 제안을 했다. 동네 맥도널드에 가서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씹으며 그녀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짧은 시간의 대화 속에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현지는 뉴욕으로 조기 유학을 왔다가 LA 인근으로 대학으로 진학을 하는 친오빠를 따라 이곳에 왔고, 지금은 친오빠와 둘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지의 아버지는 강남에서 잘나가는 회계사무소를 운영하고 계셨다.
현지와 나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가까워졌다.
주말이면 우리는 함께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고 바닷가로 놀러 가기도 했다. 나는 가난한 이민 가정의 아들이었지만 그녀는 돈많은 집안의 조기 유학생이었다. 데이트 비용은 그녀의 지갑 안에서 나왔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 30여분 남쪽으로 내려가면 라구나비취라는 경관 죽이는 해변이 나온다. 이 해변에 가면 언덕을 따라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고, 산책로의 끝에는 벼랑 끝에 원두막(?) 같은 건물이 하나 놓여 있다. 어느 토요일 저녁. 현지와 나는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고 이 라구나비취를 찾았다. 해질무렵 해변의 산책로를 손을 잡고 거닐었다. 이 원두막 같은 건물 앞에 이르렀을 때.
"어. 해 진다."
"그러네? 우와 이쁘다."
해지는 광경을 보려는 연인들이 여러 커플 있었다. 현지와 나도 그들 사이에서 해가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모습을 구경했다. 커플들은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깔리자 약속이라도 한듯 서로를 포응했고 키스를 하기도 했다. 우리 나이 또래로 보이는 커플도 있었고 신혼부부 쯤으로 보이는 젊은 커플도 보였고 중년의 백인 커플도 보였다.
어색했다. "어..험... 분위기가 좀 그러네?" 현지가 어색함을 깨보려는듯 입을 열었다.
나는 난간에 몸을 기대고 현지를 잡아 당겼다. 현지를 품에 안았다. 현지가 놀라며 멈칫했지만 내 품에 들어와 안겨주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성을 안아 보는 순간이었다.
서로에게서 몸에 떼고 우리는 주차해 두었던 곳으로 걸었고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한참을 운전해 현지의 집 앞에 도착했고 집 안에 오빠가 없다는 것을, 집 앞 주차 공간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었다.
"현지야. 아까 나 기분 너무 좋았어. 한번만 더 안아봐도 돼?"
현지가 눈을 흘겼다. 차에서 내리는 현지를 따라 내렸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현관문을 닫고 현관문 바로 옆 벽에 현지를 기대도록 세웠다. 현지를 다시 끌어 안았다. 현지의 입술을 찾아 내 입술을 가져다 댔다. 현지가 고개를 돌리며 거부했다. 내가 손을 올려 현지의 얼굴 방향을 움직여 다시 입술끼리의 맞춤이 가능하도록 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여자의 입술. 황홀했다. 경험은 없었지만 티비나 영화에서 본 것은 있어서, 그리 어렵지 않게 이뤄졌다. 현지의 입술을 열고 내 혀를 집어 넣었다. 현지가 이빨을 굳게 닫고 내 혀를 거부했다. 나는 현지가 입고 있던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현지의 까무잡잡한 맨살이 드러났고 하얀 브라자가 모습을 보였다. 브라자 밑으로 손을 집어 넣으려 했다. 현지가 손으로 이를 거부했고 순간 나는 현지의 입 안으로 내 혀를 집어 넣을 수 있었다.
첫키스를 경험한 순간이었다. 키스를 막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틈을 타 가슴을 노렸고, 가슴을 막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틈을 타 첫 키스에 성공했던 것이다.
현지의 입안에 혀를 넣기는 했지만 그 다음엔 뭘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라 뻘쭘하게 혀만 집어 넣고 있었다. 현지의 몸이 얼어 붙었고 두 손을 내 허리 부위에 가볍게 올려놓은채 서있었다. 브라자를 걷어 올렸다. 귀엽게 솟아 있는 두 유방이 보였다. 두 손으로 각각 유방을 하나씩 쥐었다. 손 안에 쏙 들어오는 현지의 가슴 촉감이 황홀했다.
"기현아, 오늘은 그만. 오빠 들어올까봐 불안해 죽겠어."
오빠가 들어올지 모른다는 말에 나도 두려웠다.
내 나이 열일곱. 태어나 처음으로 다른 여자의 입 안으로 내 혀를 집어 넣어본 밤이었고, 태어나 처음으로 여자의 유방을 만져 본 밤이었다.
미국에 와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어울려 다니게 된 한국 학생들이 여럿 있었다. 이들이 하루는 포르노 테이프가 있으니 누구네 집이 비었으면 몰려 가서 보자는 것이었다. 마침 우리 집이 비어 있었고 나는 그 쏘세지 부대를 우리 집으로 불러 들였다. 이 포르노 영화에서 상스럽게 생긴 백인 여자가 흑인 남자의 물건을 붙잡고 쏘세지 주물러 국물 빼내는 광경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고 나는 그 때에서야 딸딸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가 내 나이 열여섯. 늦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당시 내 또래 아이들의 비해서는 엄청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자연 법칙의 조화로 가끔 몽정을 하고 팬티를 잔뜩 적신채 잠에서 깨곤 했었지만 나는 잠결에 쉬야를 팬티에 지렸나 하며 빨래통에 그 팬티를 아무렇지도 않게 벗어 놓곤 하였던 것이다.
나의 첫 여자 친구는 미국식으로 말하면 11학년, 한국식으로 말하면 고2때 생겼다. 나는 한창 문학 소년으로,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으로, 비합리적인 사회 구조와 깨지지 않는 부익부 빈익빈 체제의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고민하는 제법 의식 있는 청소년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중상층 동네에 있는 명문 고등학교에 재학을 했었고 학구열 높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학부모들은 자녀들을 열심히 이 고등학교에 보내려 머나먼 미국까지 이민 와서 뼈빠지게 LA 바닥을 주름 잡고 휩쓸고 짖밟고 뒤덮었다.
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제 아무리 잘 나가던 사람들이라 해도 일단 이민을 오면 우선 종사하게 되는 직종이 세탁소나 청소업, 봉제업이나 페이트업이었다. 세탁소를 운영하며 많은 사람들의 바지와 치마에 주름을 잡았고, 청소를 하며 늦은 밤 텅빈 빌딩 바닥을 빗자루로 쓸었고, 봉제공장에 다니며 재봉틀 발판을 열심히 열심히 밟았으며 페인트로 LA에 있는 빌딩과 아파트 벽들을 온통 뒤덮으면서 아메리칸 드림을 일궈내려 피땀 흘렸던 것이다.
암튼 LA 바닥을 주름 잡고 휩쓸고 짖밟고 뒤덮으며 번 돈으로 좋은 동네에 거처를 마련하면 일단 자녀들이 남들이 좋다해주는 학교에 재학을 하게 되니 마음이 놓이나보다. 이 학교 역시 오렌지카운티 부촌에 속하는 동네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로 캘리포니아 전체에서 10위권 안에 들기를 밥먹듯 하던 명문교였고 그래서 그랬는지 한국 학생들이 엄청 많았다.
내가 11학년에 재학 중이던 때. 뉴욕에서 한 한국 여학생이 전학 온다는 소문이 교내 한국 학생들 사이에 퍼졌다. 소문을 듣고 난 의젓한척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처럼 생활을 했다. 점심 시간. 도서관 앞을 걸어가는 낯선 여자 아이가 눈에 띄었다.
앙증 맞을 정도로 작은 키. 작은 키에 비해 날씬하고 그 나이 또래 여자 아이들답지 않게 볼록 솟아 있는 가슴. 평범한 대한민국 여자들답지 않게 볼록 튀어나와 위를 향해 솟아 있는 엉덩이. 세침거리듯 고개를 120도 각도를 내리고 걷는 도도한 모습. 속으로 저 아이가 그 아이인가 보다 하면서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5교시. 수학시간이었고 이 여자아이가 뻘쭘하게 교실문을 열고 들어왔다. 수학 선생에게 다가가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를 하더니 교실을 한바퀴 둘러보고는 내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저기, 한국사람이지요?"
"네."
"나 오늘 전학 왔어요. 반가워요. 이름은 박현지에요."
"아 그래요? 난 이기현이에요."
"몇학년이에요?"
"11학년이고 73년생입니다."
"그래요? 나랑 똑같네."
"어, 그래?"
미국의 고등학교 시스템을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부연 설명을 하자면 한국처럼 반이 정해져 선생들이 교실들을 왔다갔다 학생들을 찾아다니는게 아니라, 학생들이 각자 알아서 과목을 선택하고 졸업에 필요한 수업을 선택해 듣는, 마치 대학 시스템과 같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같은 반이어도 학년이나 나이가 다를 수가 있다.
5교시가 끝나고 나는 현지에게 나중에 또 보자는 인사를 했다. 6교시가 끝나고 학교 주차장을 향해 걷고 있었다. 주차장 입구에 서성이고 있는 현지의 모습이 보였다. "집에 안가?"
"응. 나 차가 없어서..."
"그래? 집이 어딘데? 내가 데려다 줄까?"
"그래줄 수 있어?"
미국은, 특히 LA는 16세가 되면 운전면허를 필수로 취득해야 하고, 일부 학교에서는 고등학교 졸업 조건 중 운전면허 취득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이런 외곽의 동네일수록 대중교통이 전무하여 16세가 되면 고등학생들도 대부분 차를 몰고 등하교를 하게 되어 있다.
현지를 현지가 사는 집 앞에 내려 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책상에 앉아 숙제를 하고 음악을 듣는 등 평소 하던 대로 하루를 죽여가고 있었다. 문득 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새록새록 그녀의 톤 높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하얀 미니스커트, 하얀 티셔츠, 밤색 가죽 자켓을 입고 있던 현지의 세련된 모습이 눈 앞에 그려졌다.
밤이 되어 잠을 청하려 침대에 누웠는데 그녀의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지며 이상하게 가슴이 뛰는 것이었다.
내가 왜 이러지? 현지 생각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음날도 5교시 수학 시간에 현지를 만났고 그날 방과후에도 자신을 집에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했다. 현지를 차에 태우고 하교를 하던 중, 현지가 어디 가서 햄버거라도 먹자는 제안을 했다. 동네 맥도널드에 가서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씹으며 그녀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짧은 시간의 대화 속에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현지는 뉴욕으로 조기 유학을 왔다가 LA 인근으로 대학으로 진학을 하는 친오빠를 따라 이곳에 왔고, 지금은 친오빠와 둘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지의 아버지는 강남에서 잘나가는 회계사무소를 운영하고 계셨다.
현지와 나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가까워졌다.
주말이면 우리는 함께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고 바닷가로 놀러 가기도 했다. 나는 가난한 이민 가정의 아들이었지만 그녀는 돈많은 집안의 조기 유학생이었다. 데이트 비용은 그녀의 지갑 안에서 나왔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 30여분 남쪽으로 내려가면 라구나비취라는 경관 죽이는 해변이 나온다. 이 해변에 가면 언덕을 따라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고, 산책로의 끝에는 벼랑 끝에 원두막(?) 같은 건물이 하나 놓여 있다. 어느 토요일 저녁. 현지와 나는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고 이 라구나비취를 찾았다. 해질무렵 해변의 산책로를 손을 잡고 거닐었다. 이 원두막 같은 건물 앞에 이르렀을 때.
"어. 해 진다."
"그러네? 우와 이쁘다."
해지는 광경을 보려는 연인들이 여러 커플 있었다. 현지와 나도 그들 사이에서 해가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모습을 구경했다. 커플들은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깔리자 약속이라도 한듯 서로를 포응했고 키스를 하기도 했다. 우리 나이 또래로 보이는 커플도 있었고 신혼부부 쯤으로 보이는 젊은 커플도 보였고 중년의 백인 커플도 보였다.
어색했다. "어..험... 분위기가 좀 그러네?" 현지가 어색함을 깨보려는듯 입을 열었다.
나는 난간에 몸을 기대고 현지를 잡아 당겼다. 현지를 품에 안았다. 현지가 놀라며 멈칫했지만 내 품에 들어와 안겨주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성을 안아 보는 순간이었다.
서로에게서 몸에 떼고 우리는 주차해 두었던 곳으로 걸었고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한참을 운전해 현지의 집 앞에 도착했고 집 안에 오빠가 없다는 것을, 집 앞 주차 공간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었다.
"현지야. 아까 나 기분 너무 좋았어. 한번만 더 안아봐도 돼?"
현지가 눈을 흘겼다. 차에서 내리는 현지를 따라 내렸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현관문을 닫고 현관문 바로 옆 벽에 현지를 기대도록 세웠다. 현지를 다시 끌어 안았다. 현지의 입술을 찾아 내 입술을 가져다 댔다. 현지가 고개를 돌리며 거부했다. 내가 손을 올려 현지의 얼굴 방향을 움직여 다시 입술끼리의 맞춤이 가능하도록 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여자의 입술. 황홀했다. 경험은 없었지만 티비나 영화에서 본 것은 있어서, 그리 어렵지 않게 이뤄졌다. 현지의 입술을 열고 내 혀를 집어 넣었다. 현지가 이빨을 굳게 닫고 내 혀를 거부했다. 나는 현지가 입고 있던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현지의 까무잡잡한 맨살이 드러났고 하얀 브라자가 모습을 보였다. 브라자 밑으로 손을 집어 넣으려 했다. 현지가 손으로 이를 거부했고 순간 나는 현지의 입 안으로 내 혀를 집어 넣을 수 있었다.
첫키스를 경험한 순간이었다. 키스를 막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틈을 타 가슴을 노렸고, 가슴을 막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틈을 타 첫 키스에 성공했던 것이다.
현지의 입안에 혀를 넣기는 했지만 그 다음엔 뭘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라 뻘쭘하게 혀만 집어 넣고 있었다. 현지의 몸이 얼어 붙었고 두 손을 내 허리 부위에 가볍게 올려놓은채 서있었다. 브라자를 걷어 올렸다. 귀엽게 솟아 있는 두 유방이 보였다. 두 손으로 각각 유방을 하나씩 쥐었다. 손 안에 쏙 들어오는 현지의 가슴 촉감이 황홀했다.
"기현아, 오늘은 그만. 오빠 들어올까봐 불안해 죽겠어."
오빠가 들어올지 모른다는 말에 나도 두려웠다.
내 나이 열일곱. 태어나 처음으로 다른 여자의 입 안으로 내 혀를 집어 넣어본 밤이었고, 태어나 처음으로 여자의 유방을 만져 본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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