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親] 여동생 - 1부
2019.07.18 01:00
<<글을 시작하며......>>
애초의 구상은 저의 평범하지 않았던 연애사를 시간에 흐름에 따라 나열할 생각이었습니다.
<첫경험>이란 글 뒤로 <형수님>을 소개했던 것도 그 맥락이었죠.
따라서 다음 이야기는 <형수님> 이후에 있었던 일이 소개되어야 마땅하지만,,
한 인간이 겪기엔 너무 다양한 상황들이라 진위 여부와 관련해 여러 오해가 생겨날듯 하여
다른 이야기 하나를 먼저 소개할까 합니다.
진실이냐 허구냐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 때문에 숲을 보지 않고 나무만 보게 된다면 글을 개재하는 의미가 퇴색되지 않겠습니까!
전 이 글을 통해서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들을 일상처럼 겪었던 사람도 있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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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가 지나자 이젠 쫑파티 개념의 모임과 회식들이 들뜬 분위기를 이어갔다.
그 분위기를 주도 하는 것은 역시 각 회사의 종무식(終務式)이었다.
종무식이란 말 그대로 연말을 마감하는 행사일 뿐이지만
나에게 있어 사회에 나와 초, 중, 고등학교의 분위기를 가감 없이 다시 느끼게 하는 유일한 행사이기도 했다.
평소에는 얼굴 대할 기회도 없던 윗분들과 웃는 낯으로 악수하며 인사하고,
손에 음료수를 들고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업무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나누고,
그 시절의 쫑파티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종무식 날의 밤은 이야기가 달랐다.
평소 술을 즐기지도 않지만 이렇게 직급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마셔야 한다는 것이
나를 더더욱 불편하게 했다.
구지 남의 충고가 아니더라도 이런 모습으론 주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어쨌든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평소 같으면 1차에서 눈치 보다가 슬며시 빠져나가겠지만
이번만큼은 부장님이 끝까지 남아있으라는 비밀지령이 내려져 나를 더욱 옥죄였던 것 같다.
‘그런데, 왜 나를 콕 찍어 끝까지 남아있으라고 한 걸까? 그것도 스파이 같이 비밀스럽게 말이다. 정말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나만 특별 대우를 받는 걸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입사한지 일년 남짓 되었을 뿐이고, 무슨 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일개 말단 직원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차후에 이유를 알고 나니 어이없는 웃음 밖에 나지 않았다.
내가 올린 기획서 2개가 회장님께 좋은 반응을 이끌었다는 것이었다.
공짜로 한 것도 아니고 월급 받으면서 그 값 한 것뿐인데!
혹시나 자기네 이름으로 바꿔 올려서 공을 가로챘던 것이 미안했던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정작 나를 더 허탈하게 만든 것은 끝까지 남아있으라는 이유가 룸싸롱에 데려간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과연 특혜인 걸까?
사회경험도 일천하고 룸싸롱의 매력을 몰라서였을 수도 있지만 나에겐 전혀 특혜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불편했다.
그나마 1, 2차 땐 동료들이라도 있었지만
이제부터 같이 할 사람들은 전무, 부장, 과장 그리고 나, 이 네 사람이었다.
싫다고 할 수도 없는 정말 갑갑한 상황이었다.
룸싸롱의 모습은 TV나 영화 같은 곳에서 봤던 기억이 있어서 낯설진 않았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확실히 달랐다.
아니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으니 다르다, 아니다를 논할 처지가 못되었다.
안으로 걸어내려 갈수록 이유 없는 부자유가 엄습해 온 몸을 경직시켰다.
문 입구를 들어서자 30대 중, 후반 정도로 보이는 마담이
미리 연락 받고 기다렸다는 듯 다소곳이 인사를 건넸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던 수다스럽고 요사스런 느낌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교양 있고 지적이며 깊이가 있는 매력을 은은히 뿜어내고 있었다.
괜히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요새 사람 많지?”
“아무래도 연말이다 보니 그러네요.”
“유마담 이러다 빌딩세우겠어! 하하하.”
“1년 내내 이러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하하하, 그건 그렇고 지연이 있지?”
“네, 걱정 마시고 들어가서 잠시 기다리세요.”
배알이 꼬여서 그랬던 걸까? 원하지 않는 상황에 약이 올랐던 걸까?
신부장님은 마치 한 회사의 사장처럼 거들먹거리는 것 같았고,
임전무님은 능글능글한 변태아저씨의 전형처럼 비쳐졌다.
말은 없었지만 정과장님 또한 입이 귀에 걸린 표정으로 약삭빠르게 행동하는 것이 굉장한 아첨꾼처럼 보였다.
내 눈에는 오히려 마담이 훨씬 고고한 인격체처럼 보였다.
‘나는 절대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
마담의 안내로 생전 처음 룸 안으로 들어섰다.
“앉으세요!”
“아~ 네.”
“호호, 처음이신가 봐요!”
“……”
그다지 멍한 상태도 아니었는데 마담은 대번에 알아봤다.
아니 누구나 단번에 알아볼 정도로 얼뜨기 같은 표정이었을까?
생각할 틈도 없이 부장님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설마? 재진씨 진짜 처음이야?”
“아~~네.”
“오~~~ 이거 우리도 몰랐는데, 유마담 특별히 신경 써야겠어!”
이번엔 임전무님까지 한 몫 거들었다. 하지만 전혀 반갑지 않았다.
“후훗, 그러게요. 젊은 오빠는 어떤 스타일 좋아해요?”
“아~~ 저,, 뭐 딱히..”
“뭐야, 재진씨 보기완 다르게 완전 숙맥이네. 하하하.”
사람 바보 만드는 건 순간이다.
친구들과 있을 때는 항상 가해자 입장이다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로부터 피해자 입장이 되니 떨떠름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재진씨 설마 숫총각 딱지도 못 뗀 거 아니야? 하하하하.”
뒤늦게 한마디 거드시는 정과장님, 정말 어떻게 해버리고 싶었다.
유마담만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진 내 표정을 읽었는지 내 팔을 살짝 쥐어 내 주위를 돌렸다.
그리고 그들에게 들으란 듯이 말을 이었다.
“그렇담 내가 한 번 데쉬해 볼까요?”
“오~~~ 이거 유마담 젊은 사람 보니까 마음이 동하는가 보네.”
“부러워, 재진씨.”
계속되는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신경을 자극했지만
유마담의 미소 짓는 얼굴 앞에서 더 이상 얼굴을 찡그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재진씨라고 하셨죠?”
“네.”
“음, 내가 보기에 어울릴 만한 애가 하나 있는데 혹시라도 맘에 안 들면 저한테 따로 말씀하세요.”
“전 신경 안 쓰셔도 되요. 그냥 아무나 상관 없어요.”
유마담이 나가고 술상이 차려지기 전까지 자화자찬, 아첨, 뒷담화 등이 화려하게 진행됐다.
덕분에 나의 존재는 뒷전이 되어 예민해졌던 신경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술상이 다 차려지자 마담이 여자애들을 직접 데리고 나타났다.
“오~ 지연이 오랜만이야!”
“전무님 요즘 저한테 너무 무신경하신 거 아니에요?”
“에이~ 그럴 리가 있나? 그나 저나 우리 지연이는 점점 이뻐지네.”
‘아주 염병을 하는구나, 마누라가 보면 아주 좋아하겠다.’
마음이 차분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 모습을 보니 또 부화가 치밀어 올랐다.
솔직히 내가 그렇게 예민해 질 이유는 없었다.
이건 분명 이미 삐뚤어져버린 감정 탓에 오버하는 꼴밖에 안되었다.
“그 앤 누구야? 못 보던 앤데?”
“신경 끄세요. 신부장님! 오늘 특별 손님 재진씨 파트너니까요.”
“그래 알았어.”
유마담의 그 한 마디로 파트너가 정해져 각자의 옆에는 젊고 이쁜 여인들이 하나씩 자리를 차지했다.
“음, 역시 둘이 어울리네. 사겨도 되겠어!”
“진짜, 둘이 분위기가 비슷한 게 잘 어울리는데, 재진씨 오늘 잘해봐!”
“그래 선남선녀가 따로 없네!”
“둘이 잘 되도 유마담 방해 안 할거지?”
“둘이 좋다면야 제가 무슨 권리로 방해해요?”
정과장이 유마담의 말에 맞장구를 치자 신부장님, 임전무님도 형식적으로 한마디씩 거들었다.
유마담이 자리를 뜨자 비로소 술판이 벌어졌다.
3사람이 차례로 한 잔씩 돌리는 탓에 순식간에 3잔이나 스트레이트로 비워버렸다.
취기가 확 올라와 머리가 어질어질 했다.
허나 나머지 3명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 흥을 돋우며 계속해서 술잔을 돌렸다.
나는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바른 생활 사나이도 아니다.
모르긴 해도 나머지 3명보다 도덕적으로 불순한 경험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도 겨우 자식 나이 정도될 여자애를 끌어안고
희희낙락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역겹다 못해 분노 같은 게 치솟았다.
이런 걸 두고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하나?
그렇다고 그 감정을 노출해서 판을 엎을 생각은 없었지만 분위기를 즐기고 싶은 마음 또한 없었다.
정과장의 폭탄주 쑈에 그들의 얼굴색만큼이나 분위기가 달아 올랐다.
“야! 밴드 불러! 이제부터 제대로 놀아야지.”
밴드를 부르라는 임전무님의 말이 귀에 들어오자
앞으로 벌어질 그림들이 눈 앞에 하나 둘 떠오르며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술이야 조용히 앉아서 마시면 된다지만 밴드가 들어오면 내가 판을 엎지 않는 이상 같이 어울려야 했기 때문이다. 답답한 마음에 홀짝거리기만 했던 폭탄주 잔을 단숨에 들이켜 버렸다.
“재진씨, 밴드 부른다니까 술을 마시네. 진작 부를 걸 그랬어.”
“그래, 그래. 윗사람들이랑 있다고 너무 긴장하지 말고 형들이랑 왔다고 생각하고 놀아!”
“요즘 젊은 사람 같지가 않아. 빈틈없고 예의 바른 게 참 마음에 든단 말이야.”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오해였다.
난 단지 그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조용히 앉아 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예의 바르게 보였다니,
오히려 반감 가득한 내 심정을 눈치라도 채 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진씨가 스타트 끊는 거야!”
밴드가 들어와서 간단한 세팅을 시작하는 사이 정과장이 쐐기를 박았다.
하지만 이들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다시 폭탄주 2잔을 연이어 비웠다. 원하던 대로 속이 울렁거려 왔다.
물론 오바이트하는 것도 싫었지만 차라리 이들 앞에서 노래를 하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 사이 세팅이 완료되고 사람들의 호응에 떠밀려 마이크를 잡고 섰다.
반주가 흐르는 사이 시기 적절하게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죄송합니다. 잠시 화장실 좀……”
“저런, 괜찮아?”
“네, 전 괜찮습니다. 그럼 잠시……”
“그래, 그래…… 정과장이 따라 갔다 와!”
“아닙니다. 그냥 바람만 좀 쐬고 오겠습니다. 과장님이라도 분위기 띄우셔야죠.”
변기 뚜껑을 열자마자 미처 소화되지 못한 음식들이 쏟아져 나왔다.
형언하기 힘든 괴로움으로 눈물에 콧물까지 줄줄 흘렀다.
그러나 그걸 닦을 틈이 없이 구토는 계속 됐다.
헛구역질이 될 땐 목구멍이 훨씬 쓰라렸다.
“퉷, 퉷. ……아~ 죽겠네!”
진득한 침과 뒤섞인 위액을 몇 번이고 뱉어내니 입 속이 까칠까칠했다.
그것으로 구토는 끝이 났지만 경련을 일으켰던 내장기관이 진정될 때까지 상체를 기울이고 기다렸다.
잠시 후, 세면대로 가서 콧물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물로 닦아내고 입을 헹궜다.
그리고 물기가 흐르는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았다. 창백했다.
차가운 공기를 쐬며 정신이라도 차릴 겸해서
룸 반대편 복도를 따라 지하 주차장으로 이어진 비상구를 빠져 나왔다.
늦은 시간인데도 많은 차량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차량 사이를 지나 주차장 입구 한 켠에 섰다.
코로 숨을 들이 마시고 입으로 내 뱉으며 호흡을 골랐다.
알코올 기운이 조금씩 사라지는 듯 했다.
그제서야 바지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끄트머리에 라이터 불을 붙이며 깊숙이 빨았다.
코에서 뿜어지는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자욱이 퍼져 나갔다.
두 모금이나 빨았을까? 등 뒤에서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세요?”
고개 돌려보니 한 여인이 자신의 가슴아래로 팔짱을 낀 채 다가오고 있었다.
유마담이 짝지어준 아가씨였다.
“아~ 네, 괜찮아요. 근데 왜 나오셨어요?”
“한참을 기다려도 안 오시길래 걱정돼서 나와봤어요.”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요?”
“코트 벗어 두시고 나가신 분이 멀리 가셨겠어요? 뻔하죠, 뭐!”
“하긴.”
“저도 담배 하나만 주세요.”
담배를 무는 것을 확인하고 라이타 불을 켜 주었다.
순간 그녀 입술에 물린 담배가 소리 없이 타 들어갔다.
그리고 곧 하얀 연기가 입술 사이에서 뿜어져 나왔다.
“다른 분들은 잘 놀고 계시죠?”
“네, 근데 파트너 바꿔 드릴까요?”
“네? 가셔야 하나요?”
“제가 가긴 어딜 가겠어요. 아까부터 잘 놀지도 않으시고 불만 가득한 표정이시니 제가 맘에 안 드셔서 그러시나 하는 거죠.”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그럼 뭐 기분 안 좋은 일이라도?”
“그냥 꼴 같지 않아서요.”
“누가요?”
“같이 온 사람들요.”
“왜, 평소에 근엄한 척 하던 사람들이 딸내미 같은 애들이랑 횡설수설 하는 게 보기 싫어요?”
그녀는 엷은 미소를 지었지만 내 말에 공감하는 투가 아니라 마치 화난 어린 아이를 달래는 투였다.
좀 더 오버한다면 그런 너는 얼마나 깨끗하고 대단하길래 라고 말하는 것도 같았다.
아니, 내가 받아들이기엔 분명 후자 쪽이었다.
순간적으로 기분이 나빠지며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딱히 대꾸할 말도 없었다.
“손님 중에선 오빠 같은 반응 보이는 사람 처음이지만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늘 그런 종류의 생각을 하고 살아요.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무덤덤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이 깊어지면 좋을 게 없으니까 억지로라도 떨쳐버리려고 하죠.”
“그래서 우리 마담언니는 종종 이렇게 비유해요. 여기 오는 사람들 치열한 전쟁터에서 잠시 휴가 받아 나온 사람들이라고요. 그렇잖아요. 일이 힘든 건 다 마찬가지겠지만 윗사람 등살에 시달리고 아랫사람들은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게다가 나이 드는 것도 서러운데 가정에선 점점 존재감을 잃어가고 외로움은 커지고 누구 하나 보듬어주는 사람 없으니 살 맛 나겠어요.”
“그게 우리 눈에는 안보이니까, 뭐 보려고도 안 하지만, 허세부리고 위선 떠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겠죠! 제가 그럴 주제는 아니지만 돈으로 밖에 이런 위로를 살 수 없는 그 분들도 불쌍하긴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리고 오빠도 나이 먹잖아요. 저 사람들 나이 돼서도 이런데 안 올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결국 그런 일들을 겪으며 살아갈 텐데 나쁘게만 보지 마세요.”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틀렸다거나,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의 고집에 이성을 잠식당할 때가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 역시 그것을 알면서도, 금방 후회하면서도 그런 일을 수 백 번이고 되풀이 하고 살았다.
그러나 그 때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상황이었지만 그렇게 하지도, 할 수 없었다.
처음엔 분명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이런 애한테 들어야 하는가 하고 기분 상했지만
잔잔하게 이어진 그녀의 말은 나의 짧은 생각과 옹졸함, 이기적인 본성을 차례로 발가벗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말문이 막힌 건 오래 전이고 이젠 어떤 표정을 지을지도 막막했다.
“자네, 괜찮나?”
룸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정면에 앉아 계시던 임전무님께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먼저 말을 건네셨다.
“네, 이젠 괜찮습니다.”
“이제부터 술 안 권할 테니까 천천히 마시게.”
“분위기 망쳐서 죄송합니다. 처음이라 긴장돼서……”
“하하하. 아니야 괜찮아!”
“대신 제가 분위기 한 번 살려 보겠습니다.”
나는 한결 부드러워진 마음으로 정중하게 대답을 했다.
그리고 내 파트너의 말대로 그들의 치열한 삶을 한번 위로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 기타 잠시 써도 될까요?”
“네, 그렇게 하세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닌 밴드 아저씨는 주저 없이 기타를 내어 주었다.
그 기타 스트랩을 매는 사이 신부장님이 놀라는 표정으로 말을 던지셨다.
“아니, 재진씨 기타도 칠 줄 알아?”
“네, 어릴 때 좀……”
조용필의 <여행을 떠나요>를 시작으로 인순이의 <밤이면 밤마다>를 연속으로 이어갔다.
사실 이런 곳에서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지 고민스럽기도 했지만
그냥 분위기 띄우는 데는 이런 노래가 좋을 것도 같고
그 사람들 세대에선 귀에 익숙할 듯 해서 나름대로 그렇게 레퍼토리를 가져갔던 것이었다.
반응은 뜨거웠다. 다들 박수로 박자를 맞추며 목청껏 노래를 따라 불렀다.
“재진씨, 이정선 노래도 되나?”
신부장님의 요청으로 유일하게 알고 있던 뭉게구름, 여름을 이어서 불렀다.
밴드 아저씨도 옛추억에 젖어 하모니카로 흥을 돋웠고 나머지 분들은 젊은 눈빛이 되어 즐겁게 노래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신부장님이 눈물을 훔치셨다.
나중에 하는 말이 대학 다닐 때 친구들과 학교 잔디밭에서
새우깡에 소주 마시며 밤새던 시절이 생각나더니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는 것이었다.
내 파트너 아가씨가 말한 것처럼 그들의 보이지 않는 모습들을 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푸르른 마음을 가진 그들의 젊은 날의 모습.
‘별시답지 않은 일을 가지고.’라고 생각한다면 유치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난 알 수 없는 아련한 기분에 휩싸였다.
나는 밴드 아저씨와 죽이 맞아 비틀즈 노래를 몇 곡 더 불렀고
전무님, 부장님, 과장님은 각자의 파트너와 블루스를 췄다.
그리고 새벽 3시가 지날 무렵에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색다른 즐거움 때문이었는지 누구 하나 인사불성이 된 사람도 없었고 적당한 취기에 함박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재진씨, 잠깐만.”
전무님과 부장님이 먼저 나가시자 정과장님이 나를 불러 세웠다.
“좀 있으면 재진씨 파트너 옷 갈아입고 올 거야. 그럼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돼. 무슨 말인지 알지?”
아마도 2차 이야기인 듯 했다.
사실 난 처음 갔던 미아리에서의 추억이 좋지 않아 이런 식의 육체관계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군소리 없이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고 하지 않고는 나중에 결정하면 될 일이니까.
“오빠 많이 기다렸죠? 내일 시골 집에 내려가거든요. 그래서 뒷정리 하느라 좀 늦었네요.”
“아뇨. 전 괜찮아요.”
“그럼 나가요.”
이미 전무님도, 부장님도, 과장님도 빠져나간 뒤였다.
유마담도 마지막 인사를 한 이후론 보이지 않았다.
단지 카운터 앞 출입문을 열어주는 호스트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파트너 아가씨 뒤를 따라 걸으며 호스트와 새해 덕담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계단을 걸어 1층으로 올라서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팔짱을 끼며 나를 이끌었다.
나와 어깨 선이 나란한 것이 힐을 신었지만 여자 키로는 상당히 큰 편이었다.
“윽,,,,,, 진짜 춥다.”
“정말 얼어 죽기 알맞은 날씨네요.”
“오빠, 빨리 걸어요.”
건물 밖으로 나서자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늦은 시간이기도 했지만 매서운 추위 탓인지 길거리는 인적이 없이 적막하기만 했다.
들리는 것은 그녀의 또각거리는 힐굽 소리와 대로에서 어쩌다 들려오는 자동차의 경적소리뿐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발끝이 아릴 정도로 시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숨을 들이 마실 때 콧속에서 얼어붙었던 콧물이 숨을 내 쉴 때 녹으면서 인중위로 흘러내렸다.
“아~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아요.”
“이제 다 왔어요.”
코너를 돌자 화려한 모텔 간판들이 추위에 아랑곳없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무 곳이나 들어가면 좋으련만 그녀의 발걸음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건물을 차례로 지나쳤다.
그리고 다시 코너 하나를 더 돌아서야 발걸음을 멈췄다.
모텔촌 안의 모텔들이야 하나같이 비슷비슷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들어간 곳은 보기에도 그럴싸한 모텔이었다.
“제가 계산할게요?”
“하하, 오빠 이미 다 계산 끝난 거에요. 키만 받아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세요.”
룸싸롱과 계약이 되어있던 모텔이었던가 보다.
그걸 알길 없는 나는 그녀가 계산하는 줄 알고 지갑을 꺼내며 그녀의 발길을 멈췄던 것이었다.
“아~~ 이제 좀 살겠다.”
“정말 추워도 너무 춥네요. 오빠 코트 주세요.”
“네, 여기요.”
“오빠 먼저 씻어요.”
“아뇨, 먼저 뭐 좀 마시면서 몸이나 녹이죠.”
“그래요, 그럼. 녹차랑 커피 밖에 없을 텐데……”
“전 그냥 커피 마실게요. 아가씨는 어떤 거 마실래요?”
“저도 커피 주세요. 근데 아가씨가 뭐에요. 이름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 죄송해요. 정신이 없어서……”
“희은이에요. 차희은. 또 잊어버리면 진짜 화낼 거에요.”
창가 옆 탁자 위에 커피를 담은 종이컵 두 개가 놓였다.
그녀가 자신의 옷가지를 옷걸이에 거는 사이 블라인드를 올리고
한쪽 의자에 앉아 모텔 불빛만 가득한 바깥 세상을 내려다 보았다.
“밖에 뭐 재미난 거라도 있어요?”
그녀는 내 옆을 지나가며 내가 보던 창 밖 세상으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아뇨, 그냥 본 거에요.”
“되게 감성적인 성격인가 보다.”
“전혀 아닌데.”
말을 주고 받는 사이 그녀가 맞은 편 의자에 앉아 양손으로 종이컵을 받쳐 들었다.
양 갈래로 길다랗게 늘어진 검은 생머리, 볼록한 이마, 쌍꺼풀이 있는 커다란 눈과 그 속의 까만 눈동자,
오뚝한 콧날, 도톰한 윗입술, 그 보다 조금 더 도톰한 아랫입술, 갸름한 얼굴선, 하얀 피부,
그제서야 그녀의 얼굴이 뚜렷이 볼 수 있었다.
정말 TV에서나 볼법한 외모였다.
아니 연예인이라기 보다 레이싱걸쪽에 더 가까운 이미지였다.
“사람들이 생각 없이 던진 말에 기분 상해본적 있으세요?”
“일일이 기억은 안 나지만 많겠죠! 근데 왜요?”
“제 말 오해 안 했음 해서요.”
“뭔데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전 육체관계가 사랑을 확인하는 행위니 어쩌니 하는 것처럼 특정한 의미를 두진 않아요. 뭐 특별히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도 없고요. 그냥 서로 맘 맞으면 하는 거고 아님 마는 거고, 딱 그 정도 선인 것 같아요.”
“갑자기 그 말씀을 왜?”
난데없이 이어진 내 말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며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 입술 사이에 걸린 담배에 불을 붙인 후 나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 연기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내 대답을 재촉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연거푸 담배 연기를 허공으로 날려보내며 뜸을 들였다.
“말년 휴가 때 친구들한테 이끌려서 처음으로 창녀촌이란 곳을 갔었어요. 군 입대하고 나선 한번도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어서 은근히 기대했었죠. 게다가 친구들이 제일 이쁜 애를 저한테 밀어주더라고요. 근데 파트너 된 아가씨랑 관계하는데 뭐랄까? 형식적인 느낌이 들었어요. 표정도 그렇고 신음소리도 그렇고. 그래도 첨이니 그런가 보다 하고 계속 했죠. 그러다 제가 키스하려고 하니까 고개를 돌리데요. 그러면서 <오빠 그냥 싸기나 하세요!>라고 하는데, 순간 오만 정이 다 떨어지는 거에요. 뭐, 그 여자한테 그랬다는 건 아니고 그 상황이 그렇더라고요. 밑에 여자는 아무런 감흥 없이 시간만 재고 있는데 난 그것도 모르고 위에서 헐떡이는 꼴이라니! 우습기도 하고, 어이 없기도 하고. 아무튼 더 이상 할 수가 없었어요. 아니 하기 싫더라고요. 그 때까지 여자 경험 많았던 건 아니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그래서 그 이후론 두 번 다시 안 갔죠. 그렇다고 그 여자 심정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에요. 나한텐 애정행위였지만 그 여자한텐 일이었으니 코드가 맞을 리가 없었겠죠. 사실 거기서 제가 원하는 걸 바랬던 것부터가 잘못이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까지 길게 이야기 할 마음은 없었지만 막상 말문을 열고 보니 이야기는 끝없이 주절주절 이어졌다.
요는 <너와 잠자리 하기 싫다.>라는 말 한마디를 하고 싶었던 것이었지만
그로 인해 괜히 자존심에 상처 주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아무 말없이 내 말에 귀 기울이고 있던 그녀는 담배 연기가 눈으로 들어갔는지
한쪽 눈을 질끈 감으며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나는 담배 한 모금을 빨면서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내 말을 제대로 이해했을지, 행여 다른 오해를 불러 일으킨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연인처럼 하자? 이건가요?”
말을 한참 돌렸으니 상대에 따라 해석은 다를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녀는 내가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이해한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가 내 심중을 정확히 꿰뚫은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미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같고,
물론 그 당시엔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내 무의식 속에선 그녀의 말대로 나를 이해시키고 나에게 맞춰주기를 바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들렸나요? 제 딴엔 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이었는데.”
“그럼 저 배려해주려고 하신 말씀인가요?”
“집에 내려가신다고 들떠 계시는 모습 보니까 그 기분 그대로 두고 싶기도 해서요.”
“호호, 오빠 참 특이한 사람인 것 같아요.”
그제서야 모를듯한 표정이었던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내 마음도 덩달아 편해졌다.
긴장하고 있었던 탓이리라!
“고맙긴 한데 왜 찜찜하지?”
“뭐가요?”
“아니에요, 그럼 오빤 이제 가실 거에요?”
“너무 추워서…… 전 아무래도 자고 가는 게 나을 것 같네요. 희은씨는 먼저 가셔도 되요.”
“오빠 너무 모질다. 자기도 추워서 자고 간다고 해놓고.”
“하하, 집에 내려가려면 이것 저것 준비해야 잖아요. 그래서.”
“준비는 진작에 다 했어요.”
“몇 시 차로 내려가는 거에요?”
“3시 15분이요.”
“그럼 여기서 한 숨 자고 가도 되겠네요.”
<다음편으로 계속>
애초의 구상은 저의 평범하지 않았던 연애사를 시간에 흐름에 따라 나열할 생각이었습니다.
<첫경험>이란 글 뒤로 <형수님>을 소개했던 것도 그 맥락이었죠.
따라서 다음 이야기는 <형수님> 이후에 있었던 일이 소개되어야 마땅하지만,,
한 인간이 겪기엔 너무 다양한 상황들이라 진위 여부와 관련해 여러 오해가 생겨날듯 하여
다른 이야기 하나를 먼저 소개할까 합니다.
진실이냐 허구냐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 때문에 숲을 보지 않고 나무만 보게 된다면 글을 개재하는 의미가 퇴색되지 않겠습니까!
전 이 글을 통해서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들을 일상처럼 겪었던 사람도 있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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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가 지나자 이젠 쫑파티 개념의 모임과 회식들이 들뜬 분위기를 이어갔다.
그 분위기를 주도 하는 것은 역시 각 회사의 종무식(終務式)이었다.
종무식이란 말 그대로 연말을 마감하는 행사일 뿐이지만
나에게 있어 사회에 나와 초, 중, 고등학교의 분위기를 가감 없이 다시 느끼게 하는 유일한 행사이기도 했다.
평소에는 얼굴 대할 기회도 없던 윗분들과 웃는 낯으로 악수하며 인사하고,
손에 음료수를 들고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업무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나누고,
그 시절의 쫑파티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종무식 날의 밤은 이야기가 달랐다.
평소 술을 즐기지도 않지만 이렇게 직급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마셔야 한다는 것이
나를 더더욱 불편하게 했다.
구지 남의 충고가 아니더라도 이런 모습으론 주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어쨌든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평소 같으면 1차에서 눈치 보다가 슬며시 빠져나가겠지만
이번만큼은 부장님이 끝까지 남아있으라는 비밀지령이 내려져 나를 더욱 옥죄였던 것 같다.
‘그런데, 왜 나를 콕 찍어 끝까지 남아있으라고 한 걸까? 그것도 스파이 같이 비밀스럽게 말이다. 정말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나만 특별 대우를 받는 걸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입사한지 일년 남짓 되었을 뿐이고, 무슨 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일개 말단 직원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차후에 이유를 알고 나니 어이없는 웃음 밖에 나지 않았다.
내가 올린 기획서 2개가 회장님께 좋은 반응을 이끌었다는 것이었다.
공짜로 한 것도 아니고 월급 받으면서 그 값 한 것뿐인데!
혹시나 자기네 이름으로 바꿔 올려서 공을 가로챘던 것이 미안했던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정작 나를 더 허탈하게 만든 것은 끝까지 남아있으라는 이유가 룸싸롱에 데려간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과연 특혜인 걸까?
사회경험도 일천하고 룸싸롱의 매력을 몰라서였을 수도 있지만 나에겐 전혀 특혜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불편했다.
그나마 1, 2차 땐 동료들이라도 있었지만
이제부터 같이 할 사람들은 전무, 부장, 과장 그리고 나, 이 네 사람이었다.
싫다고 할 수도 없는 정말 갑갑한 상황이었다.
룸싸롱의 모습은 TV나 영화 같은 곳에서 봤던 기억이 있어서 낯설진 않았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확실히 달랐다.
아니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으니 다르다, 아니다를 논할 처지가 못되었다.
안으로 걸어내려 갈수록 이유 없는 부자유가 엄습해 온 몸을 경직시켰다.
문 입구를 들어서자 30대 중, 후반 정도로 보이는 마담이
미리 연락 받고 기다렸다는 듯 다소곳이 인사를 건넸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던 수다스럽고 요사스런 느낌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교양 있고 지적이며 깊이가 있는 매력을 은은히 뿜어내고 있었다.
괜히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요새 사람 많지?”
“아무래도 연말이다 보니 그러네요.”
“유마담 이러다 빌딩세우겠어! 하하하.”
“1년 내내 이러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하하하, 그건 그렇고 지연이 있지?”
“네, 걱정 마시고 들어가서 잠시 기다리세요.”
배알이 꼬여서 그랬던 걸까? 원하지 않는 상황에 약이 올랐던 걸까?
신부장님은 마치 한 회사의 사장처럼 거들먹거리는 것 같았고,
임전무님은 능글능글한 변태아저씨의 전형처럼 비쳐졌다.
말은 없었지만 정과장님 또한 입이 귀에 걸린 표정으로 약삭빠르게 행동하는 것이 굉장한 아첨꾼처럼 보였다.
내 눈에는 오히려 마담이 훨씬 고고한 인격체처럼 보였다.
‘나는 절대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
마담의 안내로 생전 처음 룸 안으로 들어섰다.
“앉으세요!”
“아~ 네.”
“호호, 처음이신가 봐요!”
“……”
그다지 멍한 상태도 아니었는데 마담은 대번에 알아봤다.
아니 누구나 단번에 알아볼 정도로 얼뜨기 같은 표정이었을까?
생각할 틈도 없이 부장님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설마? 재진씨 진짜 처음이야?”
“아~~네.”
“오~~~ 이거 우리도 몰랐는데, 유마담 특별히 신경 써야겠어!”
이번엔 임전무님까지 한 몫 거들었다. 하지만 전혀 반갑지 않았다.
“후훗, 그러게요. 젊은 오빠는 어떤 스타일 좋아해요?”
“아~~ 저,, 뭐 딱히..”
“뭐야, 재진씨 보기완 다르게 완전 숙맥이네. 하하하.”
사람 바보 만드는 건 순간이다.
친구들과 있을 때는 항상 가해자 입장이다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로부터 피해자 입장이 되니 떨떠름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재진씨 설마 숫총각 딱지도 못 뗀 거 아니야? 하하하하.”
뒤늦게 한마디 거드시는 정과장님, 정말 어떻게 해버리고 싶었다.
유마담만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진 내 표정을 읽었는지 내 팔을 살짝 쥐어 내 주위를 돌렸다.
그리고 그들에게 들으란 듯이 말을 이었다.
“그렇담 내가 한 번 데쉬해 볼까요?”
“오~~~ 이거 유마담 젊은 사람 보니까 마음이 동하는가 보네.”
“부러워, 재진씨.”
계속되는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신경을 자극했지만
유마담의 미소 짓는 얼굴 앞에서 더 이상 얼굴을 찡그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재진씨라고 하셨죠?”
“네.”
“음, 내가 보기에 어울릴 만한 애가 하나 있는데 혹시라도 맘에 안 들면 저한테 따로 말씀하세요.”
“전 신경 안 쓰셔도 되요. 그냥 아무나 상관 없어요.”
유마담이 나가고 술상이 차려지기 전까지 자화자찬, 아첨, 뒷담화 등이 화려하게 진행됐다.
덕분에 나의 존재는 뒷전이 되어 예민해졌던 신경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술상이 다 차려지자 마담이 여자애들을 직접 데리고 나타났다.
“오~ 지연이 오랜만이야!”
“전무님 요즘 저한테 너무 무신경하신 거 아니에요?”
“에이~ 그럴 리가 있나? 그나 저나 우리 지연이는 점점 이뻐지네.”
‘아주 염병을 하는구나, 마누라가 보면 아주 좋아하겠다.’
마음이 차분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 모습을 보니 또 부화가 치밀어 올랐다.
솔직히 내가 그렇게 예민해 질 이유는 없었다.
이건 분명 이미 삐뚤어져버린 감정 탓에 오버하는 꼴밖에 안되었다.
“그 앤 누구야? 못 보던 앤데?”
“신경 끄세요. 신부장님! 오늘 특별 손님 재진씨 파트너니까요.”
“그래 알았어.”
유마담의 그 한 마디로 파트너가 정해져 각자의 옆에는 젊고 이쁜 여인들이 하나씩 자리를 차지했다.
“음, 역시 둘이 어울리네. 사겨도 되겠어!”
“진짜, 둘이 분위기가 비슷한 게 잘 어울리는데, 재진씨 오늘 잘해봐!”
“그래 선남선녀가 따로 없네!”
“둘이 잘 되도 유마담 방해 안 할거지?”
“둘이 좋다면야 제가 무슨 권리로 방해해요?”
정과장이 유마담의 말에 맞장구를 치자 신부장님, 임전무님도 형식적으로 한마디씩 거들었다.
유마담이 자리를 뜨자 비로소 술판이 벌어졌다.
3사람이 차례로 한 잔씩 돌리는 탓에 순식간에 3잔이나 스트레이트로 비워버렸다.
취기가 확 올라와 머리가 어질어질 했다.
허나 나머지 3명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 흥을 돋우며 계속해서 술잔을 돌렸다.
나는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바른 생활 사나이도 아니다.
모르긴 해도 나머지 3명보다 도덕적으로 불순한 경험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도 겨우 자식 나이 정도될 여자애를 끌어안고
희희낙락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역겹다 못해 분노 같은 게 치솟았다.
이런 걸 두고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하나?
그렇다고 그 감정을 노출해서 판을 엎을 생각은 없었지만 분위기를 즐기고 싶은 마음 또한 없었다.
정과장의 폭탄주 쑈에 그들의 얼굴색만큼이나 분위기가 달아 올랐다.
“야! 밴드 불러! 이제부터 제대로 놀아야지.”
밴드를 부르라는 임전무님의 말이 귀에 들어오자
앞으로 벌어질 그림들이 눈 앞에 하나 둘 떠오르며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술이야 조용히 앉아서 마시면 된다지만 밴드가 들어오면 내가 판을 엎지 않는 이상 같이 어울려야 했기 때문이다. 답답한 마음에 홀짝거리기만 했던 폭탄주 잔을 단숨에 들이켜 버렸다.
“재진씨, 밴드 부른다니까 술을 마시네. 진작 부를 걸 그랬어.”
“그래, 그래. 윗사람들이랑 있다고 너무 긴장하지 말고 형들이랑 왔다고 생각하고 놀아!”
“요즘 젊은 사람 같지가 않아. 빈틈없고 예의 바른 게 참 마음에 든단 말이야.”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오해였다.
난 단지 그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조용히 앉아 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예의 바르게 보였다니,
오히려 반감 가득한 내 심정을 눈치라도 채 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진씨가 스타트 끊는 거야!”
밴드가 들어와서 간단한 세팅을 시작하는 사이 정과장이 쐐기를 박았다.
하지만 이들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다시 폭탄주 2잔을 연이어 비웠다. 원하던 대로 속이 울렁거려 왔다.
물론 오바이트하는 것도 싫었지만 차라리 이들 앞에서 노래를 하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 사이 세팅이 완료되고 사람들의 호응에 떠밀려 마이크를 잡고 섰다.
반주가 흐르는 사이 시기 적절하게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죄송합니다. 잠시 화장실 좀……”
“저런, 괜찮아?”
“네, 전 괜찮습니다. 그럼 잠시……”
“그래, 그래…… 정과장이 따라 갔다 와!”
“아닙니다. 그냥 바람만 좀 쐬고 오겠습니다. 과장님이라도 분위기 띄우셔야죠.”
변기 뚜껑을 열자마자 미처 소화되지 못한 음식들이 쏟아져 나왔다.
형언하기 힘든 괴로움으로 눈물에 콧물까지 줄줄 흘렀다.
그러나 그걸 닦을 틈이 없이 구토는 계속 됐다.
헛구역질이 될 땐 목구멍이 훨씬 쓰라렸다.
“퉷, 퉷. ……아~ 죽겠네!”
진득한 침과 뒤섞인 위액을 몇 번이고 뱉어내니 입 속이 까칠까칠했다.
그것으로 구토는 끝이 났지만 경련을 일으켰던 내장기관이 진정될 때까지 상체를 기울이고 기다렸다.
잠시 후, 세면대로 가서 콧물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물로 닦아내고 입을 헹궜다.
그리고 물기가 흐르는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았다. 창백했다.
차가운 공기를 쐬며 정신이라도 차릴 겸해서
룸 반대편 복도를 따라 지하 주차장으로 이어진 비상구를 빠져 나왔다.
늦은 시간인데도 많은 차량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차량 사이를 지나 주차장 입구 한 켠에 섰다.
코로 숨을 들이 마시고 입으로 내 뱉으며 호흡을 골랐다.
알코올 기운이 조금씩 사라지는 듯 했다.
그제서야 바지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끄트머리에 라이터 불을 붙이며 깊숙이 빨았다.
코에서 뿜어지는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자욱이 퍼져 나갔다.
두 모금이나 빨았을까? 등 뒤에서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세요?”
고개 돌려보니 한 여인이 자신의 가슴아래로 팔짱을 낀 채 다가오고 있었다.
유마담이 짝지어준 아가씨였다.
“아~ 네, 괜찮아요. 근데 왜 나오셨어요?”
“한참을 기다려도 안 오시길래 걱정돼서 나와봤어요.”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요?”
“코트 벗어 두시고 나가신 분이 멀리 가셨겠어요? 뻔하죠, 뭐!”
“하긴.”
“저도 담배 하나만 주세요.”
담배를 무는 것을 확인하고 라이타 불을 켜 주었다.
순간 그녀 입술에 물린 담배가 소리 없이 타 들어갔다.
그리고 곧 하얀 연기가 입술 사이에서 뿜어져 나왔다.
“다른 분들은 잘 놀고 계시죠?”
“네, 근데 파트너 바꿔 드릴까요?”
“네? 가셔야 하나요?”
“제가 가긴 어딜 가겠어요. 아까부터 잘 놀지도 않으시고 불만 가득한 표정이시니 제가 맘에 안 드셔서 그러시나 하는 거죠.”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그럼 뭐 기분 안 좋은 일이라도?”
“그냥 꼴 같지 않아서요.”
“누가요?”
“같이 온 사람들요.”
“왜, 평소에 근엄한 척 하던 사람들이 딸내미 같은 애들이랑 횡설수설 하는 게 보기 싫어요?”
그녀는 엷은 미소를 지었지만 내 말에 공감하는 투가 아니라 마치 화난 어린 아이를 달래는 투였다.
좀 더 오버한다면 그런 너는 얼마나 깨끗하고 대단하길래 라고 말하는 것도 같았다.
아니, 내가 받아들이기엔 분명 후자 쪽이었다.
순간적으로 기분이 나빠지며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딱히 대꾸할 말도 없었다.
“손님 중에선 오빠 같은 반응 보이는 사람 처음이지만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늘 그런 종류의 생각을 하고 살아요.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무덤덤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이 깊어지면 좋을 게 없으니까 억지로라도 떨쳐버리려고 하죠.”
“그래서 우리 마담언니는 종종 이렇게 비유해요. 여기 오는 사람들 치열한 전쟁터에서 잠시 휴가 받아 나온 사람들이라고요. 그렇잖아요. 일이 힘든 건 다 마찬가지겠지만 윗사람 등살에 시달리고 아랫사람들은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게다가 나이 드는 것도 서러운데 가정에선 점점 존재감을 잃어가고 외로움은 커지고 누구 하나 보듬어주는 사람 없으니 살 맛 나겠어요.”
“그게 우리 눈에는 안보이니까, 뭐 보려고도 안 하지만, 허세부리고 위선 떠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겠죠! 제가 그럴 주제는 아니지만 돈으로 밖에 이런 위로를 살 수 없는 그 분들도 불쌍하긴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리고 오빠도 나이 먹잖아요. 저 사람들 나이 돼서도 이런데 안 올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결국 그런 일들을 겪으며 살아갈 텐데 나쁘게만 보지 마세요.”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틀렸다거나,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의 고집에 이성을 잠식당할 때가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 역시 그것을 알면서도, 금방 후회하면서도 그런 일을 수 백 번이고 되풀이 하고 살았다.
그러나 그 때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상황이었지만 그렇게 하지도, 할 수 없었다.
처음엔 분명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이런 애한테 들어야 하는가 하고 기분 상했지만
잔잔하게 이어진 그녀의 말은 나의 짧은 생각과 옹졸함, 이기적인 본성을 차례로 발가벗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말문이 막힌 건 오래 전이고 이젠 어떤 표정을 지을지도 막막했다.
“자네, 괜찮나?”
룸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정면에 앉아 계시던 임전무님께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먼저 말을 건네셨다.
“네, 이젠 괜찮습니다.”
“이제부터 술 안 권할 테니까 천천히 마시게.”
“분위기 망쳐서 죄송합니다. 처음이라 긴장돼서……”
“하하하. 아니야 괜찮아!”
“대신 제가 분위기 한 번 살려 보겠습니다.”
나는 한결 부드러워진 마음으로 정중하게 대답을 했다.
그리고 내 파트너의 말대로 그들의 치열한 삶을 한번 위로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 기타 잠시 써도 될까요?”
“네, 그렇게 하세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닌 밴드 아저씨는 주저 없이 기타를 내어 주었다.
그 기타 스트랩을 매는 사이 신부장님이 놀라는 표정으로 말을 던지셨다.
“아니, 재진씨 기타도 칠 줄 알아?”
“네, 어릴 때 좀……”
조용필의 <여행을 떠나요>를 시작으로 인순이의 <밤이면 밤마다>를 연속으로 이어갔다.
사실 이런 곳에서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지 고민스럽기도 했지만
그냥 분위기 띄우는 데는 이런 노래가 좋을 것도 같고
그 사람들 세대에선 귀에 익숙할 듯 해서 나름대로 그렇게 레퍼토리를 가져갔던 것이었다.
반응은 뜨거웠다. 다들 박수로 박자를 맞추며 목청껏 노래를 따라 불렀다.
“재진씨, 이정선 노래도 되나?”
신부장님의 요청으로 유일하게 알고 있던 뭉게구름, 여름을 이어서 불렀다.
밴드 아저씨도 옛추억에 젖어 하모니카로 흥을 돋웠고 나머지 분들은 젊은 눈빛이 되어 즐겁게 노래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신부장님이 눈물을 훔치셨다.
나중에 하는 말이 대학 다닐 때 친구들과 학교 잔디밭에서
새우깡에 소주 마시며 밤새던 시절이 생각나더니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는 것이었다.
내 파트너 아가씨가 말한 것처럼 그들의 보이지 않는 모습들을 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푸르른 마음을 가진 그들의 젊은 날의 모습.
‘별시답지 않은 일을 가지고.’라고 생각한다면 유치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난 알 수 없는 아련한 기분에 휩싸였다.
나는 밴드 아저씨와 죽이 맞아 비틀즈 노래를 몇 곡 더 불렀고
전무님, 부장님, 과장님은 각자의 파트너와 블루스를 췄다.
그리고 새벽 3시가 지날 무렵에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색다른 즐거움 때문이었는지 누구 하나 인사불성이 된 사람도 없었고 적당한 취기에 함박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재진씨, 잠깐만.”
전무님과 부장님이 먼저 나가시자 정과장님이 나를 불러 세웠다.
“좀 있으면 재진씨 파트너 옷 갈아입고 올 거야. 그럼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돼. 무슨 말인지 알지?”
아마도 2차 이야기인 듯 했다.
사실 난 처음 갔던 미아리에서의 추억이 좋지 않아 이런 식의 육체관계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군소리 없이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고 하지 않고는 나중에 결정하면 될 일이니까.
“오빠 많이 기다렸죠? 내일 시골 집에 내려가거든요. 그래서 뒷정리 하느라 좀 늦었네요.”
“아뇨. 전 괜찮아요.”
“그럼 나가요.”
이미 전무님도, 부장님도, 과장님도 빠져나간 뒤였다.
유마담도 마지막 인사를 한 이후론 보이지 않았다.
단지 카운터 앞 출입문을 열어주는 호스트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파트너 아가씨 뒤를 따라 걸으며 호스트와 새해 덕담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계단을 걸어 1층으로 올라서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팔짱을 끼며 나를 이끌었다.
나와 어깨 선이 나란한 것이 힐을 신었지만 여자 키로는 상당히 큰 편이었다.
“윽,,,,,, 진짜 춥다.”
“정말 얼어 죽기 알맞은 날씨네요.”
“오빠, 빨리 걸어요.”
건물 밖으로 나서자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늦은 시간이기도 했지만 매서운 추위 탓인지 길거리는 인적이 없이 적막하기만 했다.
들리는 것은 그녀의 또각거리는 힐굽 소리와 대로에서 어쩌다 들려오는 자동차의 경적소리뿐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발끝이 아릴 정도로 시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숨을 들이 마실 때 콧속에서 얼어붙었던 콧물이 숨을 내 쉴 때 녹으면서 인중위로 흘러내렸다.
“아~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아요.”
“이제 다 왔어요.”
코너를 돌자 화려한 모텔 간판들이 추위에 아랑곳없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무 곳이나 들어가면 좋으련만 그녀의 발걸음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건물을 차례로 지나쳤다.
그리고 다시 코너 하나를 더 돌아서야 발걸음을 멈췄다.
모텔촌 안의 모텔들이야 하나같이 비슷비슷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들어간 곳은 보기에도 그럴싸한 모텔이었다.
“제가 계산할게요?”
“하하, 오빠 이미 다 계산 끝난 거에요. 키만 받아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세요.”
룸싸롱과 계약이 되어있던 모텔이었던가 보다.
그걸 알길 없는 나는 그녀가 계산하는 줄 알고 지갑을 꺼내며 그녀의 발길을 멈췄던 것이었다.
“아~~ 이제 좀 살겠다.”
“정말 추워도 너무 춥네요. 오빠 코트 주세요.”
“네, 여기요.”
“오빠 먼저 씻어요.”
“아뇨, 먼저 뭐 좀 마시면서 몸이나 녹이죠.”
“그래요, 그럼. 녹차랑 커피 밖에 없을 텐데……”
“전 그냥 커피 마실게요. 아가씨는 어떤 거 마실래요?”
“저도 커피 주세요. 근데 아가씨가 뭐에요. 이름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 죄송해요. 정신이 없어서……”
“희은이에요. 차희은. 또 잊어버리면 진짜 화낼 거에요.”
창가 옆 탁자 위에 커피를 담은 종이컵 두 개가 놓였다.
그녀가 자신의 옷가지를 옷걸이에 거는 사이 블라인드를 올리고
한쪽 의자에 앉아 모텔 불빛만 가득한 바깥 세상을 내려다 보았다.
“밖에 뭐 재미난 거라도 있어요?”
그녀는 내 옆을 지나가며 내가 보던 창 밖 세상으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아뇨, 그냥 본 거에요.”
“되게 감성적인 성격인가 보다.”
“전혀 아닌데.”
말을 주고 받는 사이 그녀가 맞은 편 의자에 앉아 양손으로 종이컵을 받쳐 들었다.
양 갈래로 길다랗게 늘어진 검은 생머리, 볼록한 이마, 쌍꺼풀이 있는 커다란 눈과 그 속의 까만 눈동자,
오뚝한 콧날, 도톰한 윗입술, 그 보다 조금 더 도톰한 아랫입술, 갸름한 얼굴선, 하얀 피부,
그제서야 그녀의 얼굴이 뚜렷이 볼 수 있었다.
정말 TV에서나 볼법한 외모였다.
아니 연예인이라기 보다 레이싱걸쪽에 더 가까운 이미지였다.
“사람들이 생각 없이 던진 말에 기분 상해본적 있으세요?”
“일일이 기억은 안 나지만 많겠죠! 근데 왜요?”
“제 말 오해 안 했음 해서요.”
“뭔데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전 육체관계가 사랑을 확인하는 행위니 어쩌니 하는 것처럼 특정한 의미를 두진 않아요. 뭐 특별히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도 없고요. 그냥 서로 맘 맞으면 하는 거고 아님 마는 거고, 딱 그 정도 선인 것 같아요.”
“갑자기 그 말씀을 왜?”
난데없이 이어진 내 말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며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 입술 사이에 걸린 담배에 불을 붙인 후 나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 연기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내 대답을 재촉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연거푸 담배 연기를 허공으로 날려보내며 뜸을 들였다.
“말년 휴가 때 친구들한테 이끌려서 처음으로 창녀촌이란 곳을 갔었어요. 군 입대하고 나선 한번도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어서 은근히 기대했었죠. 게다가 친구들이 제일 이쁜 애를 저한테 밀어주더라고요. 근데 파트너 된 아가씨랑 관계하는데 뭐랄까? 형식적인 느낌이 들었어요. 표정도 그렇고 신음소리도 그렇고. 그래도 첨이니 그런가 보다 하고 계속 했죠. 그러다 제가 키스하려고 하니까 고개를 돌리데요. 그러면서 <오빠 그냥 싸기나 하세요!>라고 하는데, 순간 오만 정이 다 떨어지는 거에요. 뭐, 그 여자한테 그랬다는 건 아니고 그 상황이 그렇더라고요. 밑에 여자는 아무런 감흥 없이 시간만 재고 있는데 난 그것도 모르고 위에서 헐떡이는 꼴이라니! 우습기도 하고, 어이 없기도 하고. 아무튼 더 이상 할 수가 없었어요. 아니 하기 싫더라고요. 그 때까지 여자 경험 많았던 건 아니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그래서 그 이후론 두 번 다시 안 갔죠. 그렇다고 그 여자 심정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에요. 나한텐 애정행위였지만 그 여자한텐 일이었으니 코드가 맞을 리가 없었겠죠. 사실 거기서 제가 원하는 걸 바랬던 것부터가 잘못이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까지 길게 이야기 할 마음은 없었지만 막상 말문을 열고 보니 이야기는 끝없이 주절주절 이어졌다.
요는 <너와 잠자리 하기 싫다.>라는 말 한마디를 하고 싶었던 것이었지만
그로 인해 괜히 자존심에 상처 주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아무 말없이 내 말에 귀 기울이고 있던 그녀는 담배 연기가 눈으로 들어갔는지
한쪽 눈을 질끈 감으며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나는 담배 한 모금을 빨면서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내 말을 제대로 이해했을지, 행여 다른 오해를 불러 일으킨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연인처럼 하자? 이건가요?”
말을 한참 돌렸으니 상대에 따라 해석은 다를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녀는 내가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이해한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가 내 심중을 정확히 꿰뚫은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미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같고,
물론 그 당시엔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내 무의식 속에선 그녀의 말대로 나를 이해시키고 나에게 맞춰주기를 바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들렸나요? 제 딴엔 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이었는데.”
“그럼 저 배려해주려고 하신 말씀인가요?”
“집에 내려가신다고 들떠 계시는 모습 보니까 그 기분 그대로 두고 싶기도 해서요.”
“호호, 오빠 참 특이한 사람인 것 같아요.”
그제서야 모를듯한 표정이었던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내 마음도 덩달아 편해졌다.
긴장하고 있었던 탓이리라!
“고맙긴 한데 왜 찜찜하지?”
“뭐가요?”
“아니에요, 그럼 오빤 이제 가실 거에요?”
“너무 추워서…… 전 아무래도 자고 가는 게 나을 것 같네요. 희은씨는 먼저 가셔도 되요.”
“오빠 너무 모질다. 자기도 추워서 자고 간다고 해놓고.”
“하하, 집에 내려가려면 이것 저것 준비해야 잖아요. 그래서.”
“준비는 진작에 다 했어요.”
“몇 시 차로 내려가는 거에요?”
“3시 15분이요.”
“그럼 여기서 한 숨 자고 가도 되겠네요.”
<다음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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