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 단편
2018.04.14 20:44
비가 내린다.
을씨년스러운 하늘에서 내 회한의 눈물 같은 비가 추적추적 뿌린다. 마음이 울적하다.
이렇게 마음이 울적할 때는 한 점 티 없이 투명하고 맑기만한 소줏잔 속으로 발가벗고 뛰어 들어 마음껏 나를 적시고픈 생각이 든다. 온갖 세상 때에 찌들고 더러워진 내 정신이, 뭇남자들의 손끝에 닳고닳아 이제는 정액 냄새에 흠씬 찌들어 버린 내 육체가, 맑고 투명한 소주에 아무리 헹구어 낸다 한들 다시 깨끗해질리야 절대 없을 터이지만···.
채 한 평도 안 되는 이층 쪽방에서 내다보는 거리가 오늘따라 더욱 황량해 보이는 것은 유난히 을씨년스러운 겨울비 때문일까, 괜시리 울고만 싶어지는 내 마음 탓일까. 이럴 때 한 잔 술에 취해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마음껏 울 수 있는 애인이라도 있다면··· 아니 친구라도 하나 있다면···.
체념도 사는 법의 하나라지만 체념에 길들여져 버린 나에게는 이제 체념이란 낱말은 하나의 족쇄가 되고 말았다. 끊을 수 없는 쇠사슬. 마치 수갑처럼 내 인생의 발목을 묶어 버린 체념이란 한 마디.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체념이란 한 마디가 없었다면 나는 아직 이 세상에서 숨을 쉬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진작에 한강물로 몸을 던졌거나 면도날로 팔목을 긋고 말았을 것이다.
내 나이 열일곱 살 그 꿈 많고 호기심 많던 여고 시절에, 한번 잘못 끼워진 첫 단추에 체념이란 단어로만 대처하지 않았었더라면··· 그리고 그 이후로 이어진 내 삶의 궤적에서는 차마 체념이라는 단어마저도 없었다면···
따지고 보면 체념이란 단어는 내 삶을 규정지어 버린 굴레이기도 했지만 반면에 지금의 처연한 생활이나마 떨쳐 버리지 않고 붙잡게 만든 고마운(?) 원수였다.
첫 단추.
모든 일은 시작이 중요하고, 잘못 끼워진 첫 단추는 돌이킬 수 없다고들 말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 첫 단추 하나 쯤이야 바꾸어 달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터인데... 돌아보면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철부지 어린애였다. 나는...
열일곱, 여고 2학년, 몸만 다 컸지 마음은 여린 새싹에 불과했던 나는···.
영등포 역전.
해가 떨어지면서 원색으로 현란하게 밝혀지기 시작하는 거리에는 언제 모여든 지도 모르게 사람들이 몰려들어 복작이는 돗대기 시장을 이룬다.
열차를 타고 외지로 떠나기 위해 짐보따리를 든 채 서성거리며 상가를 기웃거리는 사람들, 방금 도착한 열차에서 내려 어디론가 자신의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바쁘게 서둘러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 하릴없이, 혹은 하룻밤의 우연찮은 향락과의 조우를 찾아서 방황하는 사람들···. 그래서 영등포 역전의 밤은 언제나 사람들로 만원이고 끈적거리는 향락의 냄새가 물씬물씬 풍겨 난다.
내가 살던 곳은 바로 영등포 역전에 인근한 한 골목의 상가였다. 상가라고는 하지만 그 근방 일대의 오래된 건물들이 그렇듯이 지하에서 1층이나 2층까지는 상가, 그리고 그 윗층의 3,4층은 직업소개소나 살림집이 들어 있는 주상 복합 지역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과 사춘기를 보낸 그 집은, 한 블럭 쯤 떨어진 뒷골목에 그 유명한 영등포 홍등가가 있고 앞쪽으로는 술집이나 당구장, 음식점이나 여인숙들이 몰려 있는 곳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2층짜리 건물이었다.
방이 세 개인 2층에서는 우리 가족이 살았고, 1층은 미용실로 세를 내주었는데 옷차림이 유난히 야하고 짙은 화장을 즐겨 하는 미용사 아가씨가 근처의 술집 여자들을 상대로 영업을 했다. 지하실은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한 쪽 다리가 불편한 작은 오빠가 군대에 간 큰 오빠를 대신해 만화방을 보고 있었는데 만화방 역시 손님의 대부분이 술집 아가씨들이었고 나머지는 근처의 하릴없는 건달들이었다.
주변 환경이 그렇다 보니 우리 부모님은 외동딸인 나의 교육 문제에 유달리 민감하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시장에서 자란 아이 장사꾼 되고 학교 앞에서 자란 아이 선생 된다고, 주변이라고는 아무리 둘러 봐도 한 집 건너 술집, 그 건너 여인숙에 눈에 보이는 거라곤 애초부터 싹수가 노란 풍경들뿐이었으니 딸 가진 부모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우리 엄마나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부터 나에 대해서는 노이로제라고 일컬어도 좋을 만큼 신경과민에 걸려 있었다. 공부도 꽤나 잘 하고 착실한 축에 든다고 여겨졌던 큰 오빠가 대학에 실패하고, 그것도 두 번이나 재수한 끝에 만화방을 차리더니 도망치다시피 군대로 날라 버린 것도 다 그 탓이 주변 환경에 있었던 우리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나에 대한 신경과민이 결코 신경과민이 될 수 없었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나의 학창 시절은, 그것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고 1때까지에만 해당되는 말이지만, 몹시 답답하고 습관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학교가 파하면 곧바로 집에 들어 와야 했고, 해가 떨어지는 시각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외출은 안 되었다. 행여 방과 후에 친구들과 어울려 빵집에서 한 두 시간 노닥거리거나 시내 서점에 들러 책구경 하느라 자칫 예정된 귀가 시간을 어기기라도 하는 날에는, 혹은 저녁에 공부하다가 갑자기 준비물이 생각나 잠깐이면 괜찮겠지 싶어 한 정거장 쯤 떨어진 문방구에라도 다녀오다 아버지의 눈에 띄는 날이면 그날은 곧 우리 집의 6.25 사변이었다.
-친구 좋아하다 신세 망치면, 친구가 네 인생 대신 살아 준다더냐? 친구고 나발이고 학교 끝나면 곧바로 집에 들어올 일이지 빵집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빵집이야. 늬 부모가 밥을 굶기냐, 옷을 안 사주냐? 한 번만 더 늦었다가는 다리 몽뎅이 부러질 줄 알아.
-오밤중에 문방구는 무슨 몸의 문방구야. 준비물을 못 챙겼으면 늬 오래비나 엄마한테 사다 달라고 부탁하면 될 일이지 어디서 다 큰 기집애가 밤나들이를 해, 밤나들이를. 자고로 밖으로 도는 접시 치고 안 깨지는 것이 없다 했거늘 밤나들이 나서는 년들 치고 온전한 것들 못 봤다 이년아.
그러면서 아버지는 다리가 퉁퉁 붓도록 회초리를 휘둘러 댔고 그러면 또 엄마는 훌쩍거리는 나를 슬그머니 끌어 앉혀 달래는 시늉 끝에
-선숙아, 누가 뭐래도 이 에미하고는 숨기는 것 없이 살도록 하자. 너 혹시 요즘 남자 친구 생겼니? 에미는 다 이해하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돼.
그러면서 한술 더 떠 태나지 않는 말꾸지람을 덧끼얹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서 내 성격은 차츰 안으로만 굽혀 들어가 내성적이 되어 갔고 학교에서도 속을 나눌 친구 하나 제대로 사귀지 못하는 채 외톨이로 굳어져 갈 수밖에는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것만 같던 부모님의 배려가 나에 대한 깊은 염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아무 세상 물정 모르는 청맹과니로 만들어 버렸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밖으로 도는 접시만 깨지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관리를 해 주지 않으면 집안에 고이 모셔둔 접시도 어느 결에 깨질지 모른다는 것을 우리 부모님은 알고 계셨을까···.
하긴, 부모님의 과보호가 나로 하여금 지나치게 안으로만 굽혀 들어간 성격상의 문제점을 떠안게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운명이 이렇게 된 것을 전적으로 그것에 원인을 둘 수만은 없다고 할 것이다. 결국에 가서는 자신의 운명을 책임지는 것은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고, 탓할 대상도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심란하게 비가 흩뿌리는 날 창가에 앉아 지나간 세월의 편린을 주우며 한탄을 늘어놓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단 한 순간의 실수, 그 실수로 인해 잘못 끼워진 인생의 첫단추가 너무나 아쉬웁고 회한이 많이 남아서이다. 아니, 그 첫단추가 아니라, 잘못 끼워진 첫단추에 대한 나의 대처가 너무 어리석었고 무지했었다는 것이 나를 아쉬웁게 하고 쓰디쓴 회한으로 몰아 넣는다.
따르르릉-.
새벽 잠결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
“여보세요··· 네··· 뭐, 뭐라구요?”
비몽사몽간에 거실 쪽으로 귀를 기울이던 나는 엄마의 화급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불길한 예감에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설마···.
방금 전에 꾸었던 꿈의 한 장면이 바늘 끝처럼 뇌리를 쑤시고 지나갔다. 얼굴에 피칠갑을 한 채로 아버지가 한 손에 회초리를 들고는 나를 무섭게 닦달하는 꿈이었다. 하도 무서워서 도망다니다가 어느 벼랑 끝에서 아버지에게 머리채를 잡히는 순간 깨어났는데, 바로 그 찰나에 거실의 전화벨이 울렸던 것이다.
“얘, 선호야. 선호야!”
작은 오빠를 깨우는 엄마의 외침 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조금 전 꿈의 불안감이 비로소 현실로 와 닿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엊저녁에 밤낚시를 떠난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터였다.
“선숙아, 빨리 일어나.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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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망연히 앉아 있던 나는 작은 오빠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허둥지둥 일어나 옷을 갈아 입었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엄마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붉게 상기된 얼굴에 놀람과 당황의 빛이 역력했다.
“아버지가 돌아 가셨단다. 바위에서 미끄러지셨대.”
작은 오빠는 남자여선지 엄마보다는 오히려 침착한 듯했다. 당혹감 속에서도 태도가 한결 안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작은 오빠의 인솔로 우리는 밤을 도와 남해안으로 달려 갔다.
아버지와 함께 일행했던 친구분들이 이미 그 근방의 작은 종합병원 영안실로 아버지의 시신을 옮겨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분들의 설명에 따르면 아버지는 술에 취한 채 친구분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갯바위 낚시를 하다가 미끄러져 차가운 바닷물에 심장마비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객사한 시신은 집에 들이지 않는다는 주위의 이끌림에 우리는 그곳에서 서둘러 화장을 하고 장례식을 마쳤다. 반쯤 넋이 나가 실성한 듯한 엄마 대신 작은 오빠가 그 모든 일을 맡아 처리했다.
서울로 돌아온 우리의 생활은 겉보기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는 듯했다. 나는 변함없이 학교에 나갔고 작은 오빠는 만화방을 보았으며 엄마는 살림을 꾸려 나갔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 집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당장 아버지가 들여다 주던 수입이 없어진 엄마의 가계부가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연히 쪼들리게 된 집안 살림은 예전과 다르게 작은 오빠의 만화방에도 손을 벌리게 되었다. 그저 용돈이나 벌어 쓰고 엄마의 곗돈에나 가끔 도움을 주던 만화방이 갑자기 우리 집 경제의 중심으로 들어앉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만화방의 푼돈 수입으로는 아무리 절약해서 쓴다 한들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아버지가 벌여 놓았던 사업을 정리하던 과정에서 남는 것 없이 오히려 빚만 챙기게 되어 엎친 데 덮친 꼴이 돼버린 것이 큰 짐이었다.
할 수 없이 엄마는 살림을 한 풀 접어놓고 밖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평소 알고 지내던 동네 아줌마의 소개로 술집 아가씨들을 상대로 한 일수찍기와 화장품 외판에 나섰다.
작은 오빠가 근처의 친구들을 불러 모아 도박판을 벌이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때쯤이었다.
그 전에는 만화방에서 포커판이 벌어지거나 화투판이 벌어지거나 하는 적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친구들이 먼저 얘기를 꺼내도 작은 오빠가 말리곤 했었다. 아버지의 불같은 성격이 도박을 눈앞에서 용납 못하는 점도 작용을 했지만 도박판을 벌이기 시작하면 순수히 만화를 보러 오는 손님들이 끊어진다는 게 작은 오빠의 이유였다.
그러나 이젠 사정이 달랐다. 아버지의 눈초리는 이미 저승에서 잠들어 있었고 작은 오빠에게는 큰 오빠 대신에 나누어 져야 할 가장으로서의 책임이 더욱 큰 부담이었다.
만화방의 수입은 훨씬 나아졌다. 판돈의 일부에서 떼는 소위 ‘꼬리’가 만화나 잡지를 빌려 주고 받는 푼돈의 몇 배나 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만화방은 동네의 할일없이 빈둥거리는 건달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아침부터 술냄새를 풍기고 들어와 죽치고 앉은 채 화투패를 돌려 대거나 날밤을 꼬박 새면서 포커판이 계속되거나 하는 게 다반사였다.
그 와중에 내가 만화방을 자주 들락거리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마당에 대학 진학은 언강생심 꿈도 꾸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이미 마음 한구석에서 포기해 버린 나는 차츰 공부에서 손을 놓기 시작했고 한결 여유로와진 시간이 서서히 무료함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빈 시간을 달래기 위해 지하실로 찾아들기 시작한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처음에는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이나 한두 권씩 뽑아다 보리라는 생각이었다. 쓸데없이 밖으로 나도는 것보다는 얌전히 집에 들앉아 있으면서 엄마대신 살림이나 돕고 책이나 읽는 것이 여러 모로 나으리라는 계산이었다.
내가 지하실에서 책을 빼다 읽기 시작하자 엄마나 작은 오빠도 저으기 안심하는 눈치였다. 아버지도 없이 엄마나 작은 오빠가 나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행여 내가 눈 맞은 강아지처럼 철없이 밖으로 나돌지나 않을까 내심 전전긍긍했던 중이었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엉뚱한 곳에 있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뜻밖의 세계에 빠져 들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말하기 부끄럽지만 자위를 배우게 된 거였다.
평소 친구들과의 대화나 다른 채널을 통해서 성에 대해 배울 기회가 없었던 나는 책 속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적나라한 성적인 묘사들을 통해서 하나 둘 성에 대해 눈을 떠가기 시작했다. 만화방에 진열된 책들의 대부분이 세계 명작이나 고전과는 거리가 먼 추리 소설이나 저급한 삼류 포르노 소설에 가까운 것들이었는데 평소 독서에 대한 올바른 바탕이 없었던 나는 그 소설들 속의 어처구니없는 세계에 아무 저항없이 빠져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는 지역이 왜 그 유명한 ‘영등포 역전’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지 그 까닭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우리 집 일층의 미용실에 드나드는 아가씨들의 옷차림이 왜 그렇게 야하며 또 그네들이 하는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감을 잡을 수 있게 되었으며 평소에 부모님이 나에게 했던 지나친 간섭의 바탕에 무엇이 있는 지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소설 속의 세계는 신비롭고 환상적인 세계였다. 그렇잖아도 내면적으로만 움츠러들었던 나의 성격은 소설 속의 세계라는 새로운 내면 세계를 만나자 급격하게 빠져 들었다.
소설 속에는 평소 내가 어렴풋이 동경해 오던 왕자가 있었고 장미꽃이 만발한 환상의 섬이 있었으며 눈 내리는 공원길의 낭만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끌어 당겼던 것은 책 속의 주인공들이 펼치는 ‘러브 스토리’였다. 그 러브 스토리라는 게 결국 빤한 삼류 포르노라는 것을 먼 훗날 알게 되긴 하였지만 그땐 내 호기심의 은밀한 창고를 채워 주는 소중한 보물이었던 것이다.
다들 아다시피 추리 소설이나 가판대에서 파는 싸구려 소설들 속에 등장하는 남녀 관계는 평범을 벗어난 비정상적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불륜, 강간, 폭력, 동성애, 변태성욕, 근친상간···. 사회적으로는 손가락질 받는 여러 일탈 행위들이 그 책들 속에서는 아름답고 달콤한 사랑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나 성에 대해 거의 아무런 예비 지식이 없었던 내가 그 책들 속에 등장하는 허구에 아무런 여과없이 빠져 들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귀결이었다. 텅 빈 창호지에 먹물이 배어들 듯이 내 뇌리에 인이 박힌 에로틱한 문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튀어 나와 나를 공상의 세계로 이끌어 가곤 했다.
수업 시간이나 등하교길의 버스 안에서나 꿈을 꾸듯이 몽환의 세계에 젖어 있다가 선생님이나 옆 친구의 지적을 받고서야 깜짝 놀라 깨어나곤 해서 내 별명이 ‘꿈숙’이가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친구들로부터 꿈숙이라고 놀림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가능하면 혼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공상에 빠져 들지 않으려고 나는 무진 애를 썼다. 일부러 딴 생각을 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거나 교과서의 활자에 눈을 붙들어 매두기도 해 보았지만 번번히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 결엔가 에로틱한 공상 속에 빠져 있는 거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날씨가 꽤나 쌀쌀해져 가는 가을 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에서 수업이 파하자마자 집으로 달려온 나는 버릇처럼 지하실로 달려갔다. 책을 빼오기 위해서였다.
“야, 선숙이 이제 보니 처녀티가 풀풀 나는데. 옷만 쫙 빼 입고 나가면 아가씬 줄 알겠다야.”
“짜식아, 그럼 선숙이가 처녀지 언제는 처녀가 아니었다던?”
“고건 고렇네. 그렇다면 내가 선숙이한테 큰 실수를 한 셈이구만 그래, 하하하.”
“야, 선숙아, 저런 쓰잘데 없는 놈하고는 상종도 하지 말고 앞으로 혹시 데이트 하고 싶은 생각 있으면 나같은 사람하고 해라, 응? 뭐니 뭐니 해도 남자는 나처럼 고게 튼실해야 하는 법이니까 말이야. ”
작은 오빠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친구들만 여럿이 둘러 앉아 포커를 치면서 나를 향해 농담을 해대는 것이었다.
평소에 지하실에 들락거리면서 얼굴이야 낯익었지만 얘기는 나누어 본 적도 없는 그들이었다. 그런데 작은 오빠가 자리에 없는 틈을 타서 저마다 한 마디씩 농담을 던져 대곤 낄낄거리면서 웃어 대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직 여고 일학년에 불과한 내게는 지나치다 못해 입에 담기도 민망한 말들을 농담이랍시고···.
‘나쁜 자식들. 노름해서 돈이나 있는 대로 날려 버리라지. 흥’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들을 무시해 버리고는 책만 골라 들고 올라와 버렸다.
그리고는 내 방에서 이불을 깔고 누웠다. 날씨가 쌀쌀해서 그냥 읽기에는 어쩐지 추운 듯했기 때문이었다.
가슴에 베게를 고이고 누워 책장을 펼치자 나는 곧 예의 공상의 세계로 빨려들어 가기 시작하였다. 방금 전 오빠 친구들의 농담으로 상했던 기분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소설의 내용은 한 여학생이 선생님과의 관계를 통해 어른들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고 멋진 여인으로 성숙해 간다는 스토리였다. 그런데 이 여학생은 중 3이었고 어느날 방과 후에 실험실에 남아 혼자 청소를 하다가 기혼자인 생물 선생으로부터 강간을 당해 첫경험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처녀막이 파열되는 아픔으로 눈물을 흘리지만 두번 째의 관계에서부터는 이윽고 남녀 관계의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해 오히려 적극적인 자세가 된다. 첫날 강간당하는 때에 무려 세 번의 관계를 갖게 되는데 마지막에는 여학생이 교사의 뒷처리까지 입술로 해줄 만큼 발전하게 된다. 일본 소설을 번역한 것인데 상태가 조잡해 이야기가 자꾸 끊어지는 단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설 속의 여학생이 되어 공상 속으로 빠져 들어 갔다.
소설 속의 묘사는 아주 적나라했다. 여학생의 시시각각 변해 가는 심리에서부터 육체적인 반응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군데도 빼놓지 않고 세밀하게 표현을 해 놓았다. 여학생의 가슴이 설레일 때는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어 한 손으로 가슴을 진정시켜야 할 정도였다. 나는 침을 삼키며 책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에 갔는데 참았던 오줌보를 터뜨리는 순간 어떤 알지 못할 전율이 아랫배 언저리를 훑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한 순간 아찔하는 기분이 들었으나 나는 곧 정신을 수습하고 방으로 돌아 왔다.
다시 책을 읽느라고 엎드리는 순간 좀전에 느꼈던 이상한 느낌이 또다시 아랫배에 스쳐가는 것이었다. 화장실에서 느껴졌던 것보다 좀더 강렬한 느낌이었다.
‘생리가 시작되려나?’
그렇지만 주기가 항상 일정했던 생리는 아직 일 주일여나 남아 있었다. 나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책장을 넘겼다.
<···방문을 잠그고 침대에 누운 에이꼬는 옷을 모두 벗고 맨몸이 된 채 아랫배를 깔고 비비기 시작했다. 싸르르한 전율이 사타구니에서 시작해 척추를 타고 온 몸으로 전해져 왔다. 더욱 강렬한 쾌감을 이끌어 내기 위해 에이꼬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좀더 자극적인 감각이 은밀한 곳에서 전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에이꼬는 계속 삼각 둔덕을 비벼 댔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만큼 감각의 상승은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숨을 가다듬은 에이꼬는 낮에 실험실에서 있었던 노무라 선생과의 섹스를 생각하며 사타구니 깊숙이 베개를 끼워 넣었다. 그리고 다리를 비틀며 힘껏 힘을 주었다. 마치 빨래를 쥐어짜듯이···. 그러자 아까보다는 훨씬 더 짜릿하고 강렬한 전류가 다리 사이로 흘러 넘쳤다. 에이꼬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돌아누웠다···. 도저히 이대로는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노무라 선생과의 세번 째 관계 때처럼 머릿속이 마치 텅 비어 버린 것만 같던 몽롱한 쾌감을 다시 한번 느끼지 않고는 미련이 남아 자위를 그만 두지 못할 것 같았다.잠시 망설이던 에이꼬는 결심한 듯 침대에서 일어나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인 채 문을 열고 주방으로 향했다. 낮에 주스를 꺼내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마침 오이 몇 개가 들어 있었던 것을 본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에이꼬는 소리없이 냉장고 문을 열고 보기에 적당히 매끄럽고 잘 생긴 걸로 골라 슬그머니 침대로 돌아 와서···>
소설은 마침 에이꼬라는 여학생이 낮에 있었던 선생과의 정사를 못잊어 자위에 몰두하는 대목이었다.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 갔다.
나는 잠시 활자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슬그머니 일어나 방문을 잠갔다. 엄마야 이렇게 일찍 귀가하실 리 없었지만 혹시 작은 오빠라면 무언가를 가지러 올라 올 수도 있으리란 생각에 미리 조심한 것이었다.
그 다음에 나는 소설 속의 에이꼬처럼 배를 깔고 누워 아랫배를 비벼대 보았다. 몇번 하지 않았는데도 마치 거짓말처럼 짜릿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아까 화장실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했는데 훨씬 더 진하고 강렬했다.
나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팬티 안으로 집어넣어 보았다. 그곳이 축축하게 젖어 있고 왠지 부피가 한 움큼이나 더 늘어난 것만 같았다. 나는 손바닥을 고르게 펴 그곳을 가볍게 감싸고는 슬그머니 문질러 보았다. 아랫배를 대고 비비는 것보다 더 크고 짜릿한 느낌에 숨이 멈출 것만 같았다.
그날 나는 처음 해본 자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의 에이꼬 흉내를 내며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혼자만의 은밀한 즐거움에 빠져 들었다. 책에서 표현한 것처럼 견딜 수없이 황홀한 쾌감은 아닌 것 같았지만 나름대로 숨이 컥컥 막힐 것만 같은 짜릿함은 난생 처음 느껴본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틈만 나면 방문을 닫아걸었다. 어떤 날은 무려 세번이나 자위에 몰두한 적도 있었다. 때로는 학교에서도 못참고 화장실에 앉아서 행여 누가 알세라 숨죽인 채 그짓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리고 숨어서 비밀스레 하는 자위가 더욱 감각을 자극해 짜릿함을 더해 준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지만 나의 자위 행위는 어디까지 그저 손바닥이나 베개를 이용해 마찰에서 자극을 얻는 수준이었지 소설 속의 에이꼬처럼 오이와 같은 물건을 직접 그곳에 삽입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었다. 사실 마음이야 그렇게 해서 더욱 강렬한 자극을 경험해 보고 싶은 게 굴뚝같았지만 어쩐지 두렵고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한편으로는 지금 느끼고 있는 그 자극만으로도 충분히 은밀한 즐거움을 충족시킬 수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였고.
자위를 배운 뒤로 내 공상하는 버릇은 각도를 달리하여 더욱 깊어져만 가게 되었다.
전에는 기껏해야 소설 속의 한 장면, 이를테면 멋진 해변에서 007 영화의 주인공처럼 잘 빠진 남자와 낭만적인 데이트를 나눈다거나 하는 장면 따위에 나를 대입시켜 상상의 이야기를 꾸며보거나 하는 식이었는데 이제는 거기에 성적인 것까지 보태게 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멋지고 매너 좋은 미남자와 우연히 만나 데이트를 한다. 그 남자는 나를 유혹하기 위해 온갖 화려한 옷과 보석을 선물하고 고급스럽고 사치스런 식당에서 프랑스 요리를 대접하며 장미꽃을 무더기로 안겨 주기도 하지만 나는 짐짓 튕긴다. 그럴수록 남자는 애가 닳아 더욱 열심으로 나를 공주 모시듯 섬기고···. 어느날 그 남자는 나에게 청혼하기 위해 빨간색 스포츠카에 나를 태우고는 바닷가에 있는 자신의 별장으로 모시고 간다. 별장에는 최고급 요리와 향기로운 술, 그가 청혼의 선물로 준비한 세계 최고 디자이너의 수제 드레스, 온갖 보석으로 꾸며진 화관 등이 기다리고 있고 실내 악단까지 대기하고 있다. 그의 스포츠카 안에서 나는 마침내 그의 청혼을 극적으로 받아들여야지 하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별장에 거의 다다르게 될 무렵, 불시에 나타난 도적떼에 의해 차가 세워진다. 그리고 끌어 내려진 두 사람은 도적 두목 앞에 묶인 채 무릎 꿇리운다. 두목은 온통 털복숭이에다 고릴라처럼 커다란 몸집, 부리부리한 두 눈에서는 흉폭한 살기가 가득차 보는 이의 치를 떨게 하는 모습이다. 그런 두목이 나를 보고 씨익 웃는다. 그리고는 부하들에게 명령해 내 옷을 찢게 하고는 그 남자가 보는 앞에서 나를 겁탈한다. 나는 반항하며 소리지르고 그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내지만 묶여 있는 그로서도 어쩔 수 없다. 결국 나는 두목과 그의 부하들에게 번갈아 겁탈을 당한 채 만신창이가 되어 인질로 남는다. 풀려난 남자는 그래도 나를 못잊어 몸값을 가지고 나를 찾으러 와 결혼을 신청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거절하지만 그는 굽히지 않고 나를 따라 다니며 애타게 사랑을 호소한다···.
대개 이런 식의 공상이었다.
그런데 나의 공상 속에서는 언제나 내가 비참하고 처절하게 남자에게 당하는 장면이 꼭 끼어들곤 했다. 의식적으로 만들어 낸 공상이 아니었음에도 강간을 당하거나 윤간을 당하는 장면이 떠오르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자위할 때처럼 아랫도리가 젖어 오고 묘한 전율을 상상하게 되곤 하는 것이었다.
그건 아마도 내가 읽은 책들 속의 장면 장면에서 영향을 받아서였을 것이다.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보다 원색적이고 변칙적인 섹스 장면을 나열해 놓은 소설들에 나도 모르게 중독되어서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 자신의 깊은 곳 어딘가에 평범치 않은 기질이 숨어 있던가.
어쨌든 나는 자위를 할 때마다 그런 폭력적인 상황에서 남자와 섹스를 하는 장면을 상상하곤 했고 나중에는 그런 자극적인 상상이 없이는 쾌감을 끄집어 낼 수 없게 되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런 장면 설정들이 대부분 남자 위주로 쓰여졌고, 때문에 남자들의 감각에 따르다 보니 강간당하는 여자가 고통에 못 이겨 지르는 신음 소리조차도 쾌감처럼 묘사된다는 것을 그 때는 몰랐었다. 따라서 나는 폭력을 동반한 남녀간의 섹스야말로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강렬하고 자극적인 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의를 내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하루하루 반복되는 답답한 일상 속에서 자위는 나에게 신선한 즐거움이 되어 주었다. 물론 때때로 막연한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따로 별다른 취미나 활동이 있을 리 없었던 나로서는 혼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자위야말로 행복하고 은밀한 도피처였던 셈이다.
가을이 점점 깊어 가면서부터 나는 지하실에 드나드는 횟수가 차츰 늘어났다.
그것은 추리 소설이나 에로틱 소설을 빼다 읽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책은 이미 만화방에 있는 거의 전부를 섭렵했다. 이제는 밤에 잠자리에 들거나 불현듯 자위가 하고 싶을 때에만 필요한 책을 갖다 읽으면 되었다. 또 내 책상 서랍 속에도 몇 권 아무도 몰래 감추어 둔 책이 있었기 때문에 급할 때는 꺼내 펼치기만 하면 되었다.
내가 지하실에 자주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작은 오빠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판만 벌려 주고 어울리지는 않던 오빠가 서서히 어우리는 횟수가 많아지더니 이제는 아예 본격적으로 도박판에 끼어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자 당연히 간식으로 라면을 끓인다거나 중국집에서 시켜 먹은 음식의 뒤치다꺼리를 한다거나 만화를 빌러 온 사람들을 상대하거나 하는 일은 내 몫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작은 오빠와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도 지난 번의 어느 날처럼 나에게 심한 농담을 하거나 하는 일 없이 잘해 주었다. 아마 작은 오빠의 얼굴을 의식해서였겠지만 그들은 오히려 내가 잔심부름이라도 해주면 심부름값이라면서 듬뿍 듬뿍 용돈을 쥐어 주기도 하며 살갑게 굴었다.
작은 오빠 역시 내가 내심 대학을 포기한 걸 눈치챘는지 지하실에 내려와 잔일을 거들어 주는 걸 은연중에 당연시 여기고 기특해 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예전에 아버지가 그러하셨듯이 내 행동에 대해서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함부로 농담도 못하게 하고 도박판 친구들과 함부로 가까와지지 않도록 보이지 않게 거미줄을 쳤다.
물론 나 역시 그들과 특별히 친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그런 생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오빠의 그런 조심스러움이 불편하게 여겨질 만큼 신경쓰이거나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변함없이 주의를 기울여 주는 오빠가 고맙기만 할 따름이었다.
오빠의 만화방 일을 거들면서부터 나는 갑자기 용돈의 풍요로움을 누리게 되었다. 오빠 친구들의 잔시중에서 생기는 부수입이 꽤 짭짤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중의 일부는 떼어 오빠에게 상납(?)했다. 어차피 내가 다 쓰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었고 괜스레 계면쩍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 오빠에게 준다면 어떤 방법이든 오빠가 잘 알아서 집을 위해서 쓸 것이었고 그렇게 되면 나도 우리집을 위하여 무언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내가 썼는데 거의 전부를 옷을 사는데 투자했다. 다른 곳에는 쓰고 싶어도 쓸 방법을 몰랐고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돈들 일도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 입고 싶었던 메이커제 청바지나 미니스커트, 블라우스 등을 사는 데에 거의 모든 용돈을 소비했다. 또 일층의 미용실이나 만화방에 드나드는 술집 아가씨들 중에서 멋진 옷을 입은 여자가 있으면 눈여겨 봐 두었다가 그런 옷을 사 입어 보기도 했다.
물론 그런 옷들은 대부분 내 옷장에서 잠자고 있어야 했다. 학교 오가는 일 외의 외출이 별로 없는 내가 그런 옷을 입을 기회란 별로 없는 게 당연했기 때문에. 또 혹시 엄마나 오빠가 보기라도 하면 틀림없이 좋지 않은 소리를 할 게 뻔했으므로. 그러므로 그런 화려하고 성숙해 보이는 옷들은 가끔씩 혼자 방에서 이것저것 갈아입어 보고 거울에 모습을 비추어 보면서 만족감을 느끼는 소품으로써의 역할밖에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꾸준히 옷을 사 모았다. 그런 옷을 살 때면 느껴지는, 벌써 내가 멋지고 성숙한 숙녀로 다 자란 것 같은 기분을 즐기는 게 보통의 즐거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저런 재미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던 그 가을에 작은 오빠는 사랑을 시작했다.
상대는 일층의 미용실에 근무하던 미용사 아가씨였다.
그녀는 충청도 어딘가가 고향이었는데 여고를 졸업하고 바로 서울에 올라와 미용학원을 나온 뒤 우리집 일층의 미용실에 취직했다. 미용실 한 구석에 주방을 겸해서 만들어 놓은 칸막이 방에서 숙식을 해결했는데 무료한 밤 시간을 보낼 시간 땜으로 만화책을 빌려 읽곤 하다가 작은 오빠와 가까와진 것이었다.
절름거리는 한 쪽 다리 때문에 컴플렉스가 있어 평소 연애라곤 엄두도 내지 않던 오빠에게 그녀는 신이 내려준 천사요 은혜의 선물이었다.
키도 작고 얼굴도 별로 예쁘진 않았지만 약간 오동통한 몸매에 유난히 큰 젖가슴이 도드라져 보이는 그녀는 시골에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자답게 아직 때가 묻지 않고 성격이 수더분해 전체적으로 포근하고 좋은 인상을 풍겼다.
오빠는 그녀에게 급격히 빠져 들었다.
내가 오빠의 데이트를 눈치 챈 것은 갑자기 오빠가 만화방을 비우는 횟수가 잦아진 때문이었다.
포커판이 벌어져 있는 데도 자주 오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궁금해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어느 날인가 오빠 친구들이 간식으로 라면을 끓여 달라 했다.
지하실 한 쪽에 있는 싱크대에서 라면을 다 끓여 가는데도 오빠가 돌아오지 않자 나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오빠 친구들에게 물었다.
“근데 선호 오빤 어디 갔어요?”
그러자 카드를 돌리던 오빠 친구들이 왁자하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능글맞은 얼굴로 저마다 한 마디씩 던지는 것이었다.
“늬 오빠 지금 떡치러 갔단다, 떡.”
“찰떡인지 팥떡인지 한 솥단지 해 오려면 한참 걸릴걸, 암.”
“선숙이 니는 떡냄새도 안 나냐? 우리는 코가 개코라서 그런지 벌써부텀 냄새가 진동을 하구만. 가만있자. 큼큼. 요것 냄새가 틀림없이 꿀떡인데, 달착지근한 것을 보니까.”
“선숙이 니도 떡 먹고 싶으면 이 오빠한테 얘기하거라, 응? 내 기똥찬 꿀떡으로 한 솥 박박 긁어 줄 테니까 말이여.”
그러고는 또 자기네들끼리 침을 튀겨 가며 배를 쥐고 웃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했다.
느닷없이 떡은 무엇이며 그 소리를 해 놓고는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웃는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나를 흘낏흘낏 쳐다보며 엉큼스런 웃음을 흘리는 것으로 봐선 틀림없이 숨은 뭐가 있다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정확한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아무리 도박판에나 기웃거리고 흉물스런 농담을 거리낌없이 내뱉는 사람들이거니 아직 나이 어린 내 앞에서 그런 낯뜨거운 음담패설을 내깔길 수 있으랴. 나는 전혀 그런 쪽으로는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 끓인 라면을 그릇에 옮겨 담으면서 나는 이번에는 평소 그래도 인상이 그중 나빠 보이지 않던 종훈이란 사람을 겨냥해서 물었다.
“오빠, 선호 오빠 정말로 어디 갔어요?”
내가 스스럼없이 오빠라는 호칭으로 불러 주자 기분이 좋았는지 종훈이란 사람이 헤벌쭉 웃으며 되물었다.
“선숙이 너 정말 선호 어디 간지 모르니?”
“그럼 모르니까 묻지 알면 왜 물어요? 괜히 이상한 말들만 하곤···”
“그으래? 가만 있자··· 이거 가르쳐 줘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아이, 뭔데요. 비밀을 지킬 테니까 가르쳐 줘봐요, 네?”
“야야, 뭘 그까짓 것 가지고 그래. 뭐 선숙이도 알 만한 나인데 속시원히 가르쳐 줘 버려. 뭐 어차피 알게 될 텐데.”
옆에서 한껏 폼을 잡으며 카드를 보고 있던 태길이란 사람이 툭 던지듯이 내뱉았다. 평소에도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 엉큼함이 가득 차 있고 농담도 제일 지저분하게 해서 얼굴만 마주쳐도 어쩐지 기분 나쁜 사내였다.
그러나 오늘은 그가 던져 준 한 마디가 무척이나 고맙게만 느껴졌다.
“그럴까? 선숙이 너, 혹시라도 니 오빠가 먼저 말하기 전에는 아는 척 하기 없기다.”
“알았다니깐.”
그렇게 해서 얻어 듣게 된 게 작은 오빠가 일층에서 일하는 미용사와 한창 열애 중이라는 이야기였다.
뒤늦게 여자를 사귀게 된 작은 오빠가 만화방 일을 제쳐 두고 빠져든 게 나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그 여자와 오빠가 잘 진행되어 결혼까지 갔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작은 오빠의 불편한 한 쪽 다리때문에 결혼에 대해서 걱정하는 부모님의 대화를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편으론 내가 오빠 대신 만화방 일을 좀더 거들어서 오빠로 하여금 마음놓고 그 여자와 만날 수 있도록 신경을 써 주어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사람의 마음일까. 만화방에 책을 빌리러 오는 그 미용사를 볼 때마다 야릇한 상상이 떠오르곤 하는 것이었다.
오빠 친구들로부터 이미 대강의 얘기를 들어 영업이 끝난 후 그녀가 혼자 있을 때 작은 오빠가 찾아 가서 어떤 썸씽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고 있어서였을까. 꿀떡이니 찰떡이니 하던 농짓거리가 생각나서였을까. 그녀를 보면 문득 작은 오빠와 함께 옷을 벗고 딩구는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혀지곤 하는 것이었다.
물론 나나 그녀나 서로 시침은 뚝 떼고 있었지만 알고 있는 나로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얽혀 떠오르는 것이었다.
저 여자도 나처럼 자위를 많이 하는 걸까. 아니 이젠 오빠가 있으니 할 필요가 없겠지만 오빠를 만나기 전에는 혹시 나처럼 책을 펼쳐 놓고 자주 자위를 했을까. 했다면 어떤 방법으로 했을까. 아니 어쩌면 그런 건 전혀 하지 않았을 지도 몰라. 저렇게 순해 보이고 얌전해 보이는데. 같은 여자끼리니까 한번 언니라고 부르면서 툭 터놓고 얘기나 해볼까. 안돼, 그러면 틀림없이 오빠 귀에 들어가게 되고 나는 경을 칠 거야···.
사실 그즈음 나는 상당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거의 날마다 습관처럼 계속해 버릇한 자위가 이제는 중독이 되었는지 생각날 때마다 하지 않으면 다른 일에는 아예 손이 가질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우연히 앉은 자세에서 손으로 문지르다가 그곳을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어쩐지 예전같지 않게 색깔이 거무스름해지고 음순이 늘어나 있었던 것이었다. 성에 대해서 뚜렷한 지식이 없었던 나는 그게 혹시 무슨 병은 아닌가 싶어 내심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래서 혹시 미용사 아가씨라면 나보다 나이도 많고 경험도 있을 터이니까, 그리고 사귀는 남자의 동생이니까 성실하게 상담에 응해 주고 해결 방법을 찾아 주겠지, 그런 기대를 떠올려 보기도 한 것이었지만 어쩐지 부끄럽고 또 오빠 귀에 들어가면 큰일나리란 생각에 속으로 삭여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가을이 깊어 갔다.
쌀쌀함을 넘어서서 제법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거리에는 완연한 겨울 옷차림의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띠었다.
날이 추워지면서 만화방은 더욱 바빠졌다. 하릴없이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던 룸펜들이 죄다 몰려든 듯 좌석이 가득 찼다. 그리고 동시에 오빠의 도박판도 눈에 띠게 활기를 띠었다. 멤버가 많이 늘어난 탓이었다.
더불어서 나 역시 바빠졌다. 만화 보는 사람들의 치다꺼리 하랴 노름판 치다꺼리 하랴 늦은 밤까지 지하실에 붙어 있어야 했다. 피곤하긴 했지만 한편으론 보람도 있었다. 두루두루 일이 잘 풀려 늘상 기분이 좋아 있는 작은 오빠의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웠고 하루라도 거르면 잠이 오지 않던 자위를 바쁘고 피곤한 덕분에 건너뛰게 되는 경우가 많아진 것도 내심 뿌듯했다. 또 빈 시간이 많을 때는 쓸데없이 이상한 공상에 시달리는 것도 지겨웠는데 그럴 여유조차 없는게 오히려 다행이다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더욱 열심히 오빠 일을 도우려 애썼고 제법 용돈도 모을 수 있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오빠의 눈길도 안쓰러움과 함께 사랑스러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내 인생의 궤적을 바꾸어 버린 운명의 날.
그날도 오늘처럼 가을비가 스산하게 뿌렸다. 어쩌면 진눈깨비가 한두 점 섞여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바깥 기온이 상당히 차가왔던 것으로 기억하니까.
그날은 거의 새벽 한 시가 되어 일이 끝났다.
근방의 다른 만화방들은 거의가 심야 영업을 했으나 오빠의 가게는 처음부터 심야 영업을 하지 않았으므로 포커판이 끝나자 바로 문을 닫게 된 것이었다.
“선숙아, 대강 치우고 올라가서 자. 난로 끄고 자리만 정리해 두면 오빠가 내일 아침에 청소는 할 테니까.”
포커 멤버들과 함께 밖으로 나서며 오빠가 말했다.
“왜, 어디 가려고, 오빠?”
“응? 으응, 애들하고 그냥 술이나 한잔 하고 오려고···.”
말끝을 사리는 오빠 옆에서 친구들이 의미있는 웃음을 흘렸다.
나는 직감적으로 오빠가 일층의 아가씨를 만나러 간다는 것을 알아챘다. 청소도 할 겸 지하실에서 그냥 자겠노라고 엄마한테는 거짓말을 해 놓고는 일층에서 잠을 자는 경우가 자주 있어 왔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았어, 오빠. 너무 많아 마시진 마.”
나는 짐짓 모르는 체 오빠를 배웅했다. 그리고 주섬주섬 실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먼저 탁자나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진 만화책들을 거두어 서가에 꽂아 놓고 컵라면 뚜껑이나 음료수 캔 따위를 치우자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했다.
그리고 포커를 치던 자리를 치우는데 웬걸? 누군가의 지갑이 방석 한 쪽에 끼워진 채 그대로 있는 것이었다.
‘누구 거지? 분명히 작은 오빠 것은 아닌데.’
몰려들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금방 찾으러 오겠지 하는 생각에 나는 지갑을 한 쪽으로 치워 놓고 다시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찾으러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곧 오겠지 하며 기다리느라 오빠가 하겠다던 바닥 청소까지 다 하며 기다렸는데도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시계 바늘은 벌써 새벽 두 시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나는 졸립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해서 일단 가지고 있다가 내일 아침에 오빠를 통해서 전해 주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지갑을 챙겨 들었다.
그런데 문득 이게 누구 것일까 하는 호기심이 일었다.
내 일생일대의 참혹한 실수였던 그 한 순간의 호기심. 그 한 순간만 넘겨 버렸더라면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내가 되어 있을 테인데 하는 후회를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그 단순한 호기심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그냥 집어 들고 올라가서 잠들어 버렸다면, 아니 최소한 지갑을 열어 누구의 것인가를 확인하는 일을 내 방에서만 했더라도···.
그것이 내 운명이고 팔자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쉬웁기 한이 없다.
지갑은 척 보기에도 두툼했다. 나는 돈에는 욕심이 없었지만 그저 누구의 것인지 확인이나 해보자는 심산으로 지갑을 펼쳐 보았다. 태길이란 사람의 주민등록증이 꽂혀 있었다. 그리고 생각대로 돈이 꽤 많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돈을 꽂아 둔 한쪽이 이상하게 불룩했다. 나는 무심코 그 쪽을 뒤져 보았다.
그러자 세상에나. 나온 것은 포르노 사진을 수첩처럼 엮어 놓은 조그마한 책자였다.
‘흥, 역시 생긴 대로 노는군.’
코웃음이 나오면서도 야릇한 호기심이 나를 충동질했다. 표지에서부터 징그럽게 생긴 남자의 그것이 여자의 은밀한 곳을 반쯤 뚫고 들어가 있는 사진이 여과없이 생생하게 실려 있었는데 몹쓸 것을 보았다는 마음과는 달리 내 눈은 자꾸만 책을 펼쳐 보라고 손가락을 부추겼다.
가슴이 세차게 고동쳐 왔다. 나는 크게 한숨을 몰아 쉬어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한번 널을 뛰기 시작한 가슴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한번 둘러 본 다음에 나는 마침내 결심을 하고는 책장을 넘겨보았다.
후읍.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았다. 가슴이 온통 쿵쾅거리고 얼굴이 뜨겁게 달아 올랐다.
젖가슴이 몹시 풍만한 금발의 서양 여인과 온몸이 시커먼 털로 뒤덮힌 건장한 남자가 괴상한 포즈로 성교를 하고 있는 사진이 적나라하게 눈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사진 속의 여자는 이미 절정에 도달한 듯 반쯤 감은 눈으로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인의 신음 소리가 생생히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꿀꺽.
내 목에서 침 넘어 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계속해서 사진을 넘겼다. 그러면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는 강렬한 욕구에 휩싸여 있었다. 평소에 자위에 대한 욕구를 느낄 때보다 더 강렬한 어떤 욕망이 다리 사이에서부터 멀미처럼 치밀어 올라 왔다.
‘잠깐이면 끝낼 수 있을 거야.’
나는 소파에 앉은 채 청바지 지퍼를 내렸다. 그러면서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문께를 슬쩍 살펴보는 걸 잊지 않았다. 이미 시간이 늦어 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오빠가 나갈 때 문을 잠갔으니 신경쓰일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왼손에 사진을 펼쳐 든 채로 나는 오른손으로 나의 비밀스런 그곳을 열심히 애무해 나갔다. 생생하고 도발적인 사진을 보아서인지 평소와는 다른 더욱 강한 어떤 느낌이 틀어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스스로 사진 속 여자의 자세를 흉내 내가며 여러 가지 자세를 취해 보기도 하고 조그맣게 신음 소리도 내보았다. 그러자 숨이 가빠 오고 몸이 허공에 추락하는 듯한 절정감이 등뼈를 타고 머리로 치올라 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무언가 잡힐 것만 같은 알수 없는 느낌의 끝을 찾아 열심히 손을 놀렸다.
그 때였다.
“흐흐흐, 완전히 뿅 갔구만 그래.”
낮고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가 내 머리 끝을 확 잡아채었다.
헉.
나는 비명조차도 지르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이미 반쯤 벗어져 무릎께에 뭉쳐져 있던 바지에 걸려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이런, 이런. 그렇게 놀라면 쓰나.”
느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우악스런 손길이 다가와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왜, 왜 이래요.”
나는 소리를 지르며 힘껏 몸을 버팅겼다.
그러자 거친 손길에 의해 내 어깨가 홱 잡아채 올려지더니 턱 숨이 막혀 왔다. 남자의 주먹이 내 가슴을 친 것이었다.
나는 다시 주저앉아 호흡을 가다듬고 숨을 쉬어 보려고 애를 썼지만 눈앞에 무수한 잔별들만 명멸할 뿐 도저히 숨을 추스릴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남자가 나를 번쩍 안아 들더니 소파 위로 던지듯이 내동댕이쳤다.
“흐흐흐. 혼자 하는 것보다는 둘이 하는 게 낫다구. 내가 홍콩 구경을 시켜 줄 테니까 잠자코 있어. 소리 질러 봐야 너만 쪽팔릴 테니까 말야. 혼자 그 짓거리 하다가 들켜서 그랬다고 온 동네 소문내고 싶으면 실컷 소리 질러 봐.”
남자의 그 소리에 나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가까스로 호흡은 회복되었지만 이번에는 절망감이 캄캄하게 눈앞에 장막을 쳤다.
당혹감, 수치심, 두려움, 초조감, 이런 감정들이 한꺼번에 소용돌이치며 나를 어지럽히는 가운데서도 나는 우선 바지를 추스려 입으려고 애를 썼다.
남자는 여유있다는 표정으로 내 옆에 턱 걸쳐 앉더니 손을 뻗쳐 어깨를 감싸 안아 왔다.
“이, 이러지마, 오빠. 제발···”
나는 그에게 오빠라고 부르며 애원했다.
“평소에 내가 널 얼마나 갖고 싶었는데. 미치고 환장한 지경이었다구.”
남자는 느물거리며 내 어깨를 감싼 손으로 젖가슴을 거침없이 주무르기 시작했다. 마치 자기 애인을 다루는 듯 침착하고 여유있는 태도였다.
“오, 오빠. 제발 잘못했으니까 한번만 봐 줘, 응?”
나는 그의 손을 밀어 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있는 힘껏 소리라도 질러 일층에 있는 오빠에게 구원을 요청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계속 머리에 스쳤지만 그 뒤에 감당해야 할 문제들이 또다른 두려움으로 나의 의지를 짓눌러 왔다.
나는 어떻게든 그를 달래서 이 위기를 벗어 날 수밖에는 없다는 단순하고도 어리석은 마음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오빠, 다신 안 그럴 테니까 한번만 봐 줘, 응?”
나는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허어. 니가 뭘 잘못했다고 나한테 봐 달라는 것이야, 내참 미치고 환장하겠네.”
그러면서 남자는 이미 내가 반항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내 젖가슴을 주물럭거리던 손에 힘을 주더니 나를 소파 위로 넘어뜨렸다.
“엄마야!”
나는 왈칵 겁에 질려 그의 가슴을 힘껏 떠밀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남자의 주먹이 옆구리에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다시 숨을 멎게 했다.
“이 썅년이 좋은 말로 하렸더니···”
남자가 욕설을 내뱉으며 거칠게 청바지를 잡아챘다.
큭, 큭.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숨이 막혀서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옷을 벗기워서는 안된다는 강박 관념에 힘껏 발버둥만 쳐질 뿐이었다.
퍽, 퍽.
이번에는 양 쪽 허벅지가 부러지는 것 같은 아픔이 왔다. 다리에 힘이 쭈욱 빠져 나가며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
“썅년이 혼자서 그짓 하고 있으면서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모를 정도면 다 알아 볼 조지 뭘 그렇게 내숭은 내숭이야.”
남자는 마치 되려 분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씨근덕거리더니 몸을 반쯤 일으켜 바지를 벗었다. 지퍼 열리는 소리가 내 가슴을 찢는 소리처럼 처절하게 들려 왔지만 주먹으로 몇대 맞은 게 충격이 컸는지 발끝 하나도 움직거릴 힘이 없었다.
“한번만 더 소릴 냈다간 죽여 버릴 줄 알아.”
바지를 다 벗은 남자가 확인하듯 한 마디를 내뱉곤 내 옷을 마저 벗기기 시작했다. 반항할 힘도 의욕도 잃어버린 내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러 내렸다.
‘벌을 받은 거야.’
우습게도 그때 내 머릿속에서는 그런 엉뚱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내가 공상 속에서 그리곤 하던 여러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지나갔다.
‘이런 게 아니었는데···’
씁쓸한 회한과 슬픔이 눈물샘에서 복받쳐 흘러 나왔다.
내 블라우스에서 브래지어, 팬티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발가벗긴 남자가 소파에 반쯤 기댄 자세로 나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입술을 내 젖가슴에 댔다.
‘안돼, 이런 자식에게 어처구니없이 이렇게 당해 버릴 순 없어.’
마음 한켠에서 끊임없이 안타까운 목소리 하나가 발버둥을 쳤지만 한번 폭력에 주눅든 몸이 더 큰 두려움으로 그 목소리를 억눌렀다.
남자는 축 늘어진 내 몸을 이제는 자유로이 유린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포자기 상태에서 입술을 악물고 어서 빨리 이 악몽같은 순간이 지나 가기만을 고대했다. 이 치욕스런 순간이 꿈결처럼 아무런 흔적없이 지나쳐 버리기를. 그래서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단지 악몽에 가위 눌렸었더라는 기억만으로 잊어 버릴 수 있게 되기를.
그런 부질없는 내 소망을 자각시키기라도 하듯 남자는 집요하게 내 젖가슴을 애무해 댔다. 남자의 탐욕스런 입술과 끈끈한 혓바닥은 이것이 꿈이 아니고 현실이라고 끊임없이 내 오감을 일깨웠다.
한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다른 한손으로는 입술과 함께 내 젖가슴을 핥고 빨던 남자가 이윽고 한숨을 몰아쉬더니 젖가슴 쪽의 손을 뻗어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아, 아앗.”
나는 나도 모르게 다리를 움츠렸다.
“너 맞고 할래?”
어깨를 감쌌던 손으로 내 턱을 힘주어 움켜쥐며 남자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금방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만 같은 험한 얼굴이었다.
“아, 아뇨.”
나도 모르게 그런 대답이 튀어 나오며 다리의 힘이 풀렸다.
남자는 만족한 듯이 다시 내 허벅지 사이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남자의 손길은 내 부끄러운 그곳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러면서도 입술은 여전히 내 젖가슴에 머물러 있었다. 아예 차분히 즐기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남자는 갖은 기교를 동원해 내 반응을 이끌어 내려고 애를 썼다. 젖꼭지를 살살 깨물었다가는 혀로 부드럽게 핥기도 하고 전체를 삼킬 것처럼 강하게 빨아들이기도 하면서.
‘이것은 전혀 내 뜻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네가 아무리 나를 ??
을씨년스러운 하늘에서 내 회한의 눈물 같은 비가 추적추적 뿌린다. 마음이 울적하다.
이렇게 마음이 울적할 때는 한 점 티 없이 투명하고 맑기만한 소줏잔 속으로 발가벗고 뛰어 들어 마음껏 나를 적시고픈 생각이 든다. 온갖 세상 때에 찌들고 더러워진 내 정신이, 뭇남자들의 손끝에 닳고닳아 이제는 정액 냄새에 흠씬 찌들어 버린 내 육체가, 맑고 투명한 소주에 아무리 헹구어 낸다 한들 다시 깨끗해질리야 절대 없을 터이지만···.
채 한 평도 안 되는 이층 쪽방에서 내다보는 거리가 오늘따라 더욱 황량해 보이는 것은 유난히 을씨년스러운 겨울비 때문일까, 괜시리 울고만 싶어지는 내 마음 탓일까. 이럴 때 한 잔 술에 취해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마음껏 울 수 있는 애인이라도 있다면··· 아니 친구라도 하나 있다면···.
체념도 사는 법의 하나라지만 체념에 길들여져 버린 나에게는 이제 체념이란 낱말은 하나의 족쇄가 되고 말았다. 끊을 수 없는 쇠사슬. 마치 수갑처럼 내 인생의 발목을 묶어 버린 체념이란 한 마디.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체념이란 한 마디가 없었다면 나는 아직 이 세상에서 숨을 쉬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진작에 한강물로 몸을 던졌거나 면도날로 팔목을 긋고 말았을 것이다.
내 나이 열일곱 살 그 꿈 많고 호기심 많던 여고 시절에, 한번 잘못 끼워진 첫 단추에 체념이란 단어로만 대처하지 않았었더라면··· 그리고 그 이후로 이어진 내 삶의 궤적에서는 차마 체념이라는 단어마저도 없었다면···
따지고 보면 체념이란 단어는 내 삶을 규정지어 버린 굴레이기도 했지만 반면에 지금의 처연한 생활이나마 떨쳐 버리지 않고 붙잡게 만든 고마운(?) 원수였다.
첫 단추.
모든 일은 시작이 중요하고, 잘못 끼워진 첫 단추는 돌이킬 수 없다고들 말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 첫 단추 하나 쯤이야 바꾸어 달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터인데... 돌아보면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철부지 어린애였다. 나는...
열일곱, 여고 2학년, 몸만 다 컸지 마음은 여린 새싹에 불과했던 나는···.
영등포 역전.
해가 떨어지면서 원색으로 현란하게 밝혀지기 시작하는 거리에는 언제 모여든 지도 모르게 사람들이 몰려들어 복작이는 돗대기 시장을 이룬다.
열차를 타고 외지로 떠나기 위해 짐보따리를 든 채 서성거리며 상가를 기웃거리는 사람들, 방금 도착한 열차에서 내려 어디론가 자신의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바쁘게 서둘러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 하릴없이, 혹은 하룻밤의 우연찮은 향락과의 조우를 찾아서 방황하는 사람들···. 그래서 영등포 역전의 밤은 언제나 사람들로 만원이고 끈적거리는 향락의 냄새가 물씬물씬 풍겨 난다.
내가 살던 곳은 바로 영등포 역전에 인근한 한 골목의 상가였다. 상가라고는 하지만 그 근방 일대의 오래된 건물들이 그렇듯이 지하에서 1층이나 2층까지는 상가, 그리고 그 윗층의 3,4층은 직업소개소나 살림집이 들어 있는 주상 복합 지역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과 사춘기를 보낸 그 집은, 한 블럭 쯤 떨어진 뒷골목에 그 유명한 영등포 홍등가가 있고 앞쪽으로는 술집이나 당구장, 음식점이나 여인숙들이 몰려 있는 곳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2층짜리 건물이었다.
방이 세 개인 2층에서는 우리 가족이 살았고, 1층은 미용실로 세를 내주었는데 옷차림이 유난히 야하고 짙은 화장을 즐겨 하는 미용사 아가씨가 근처의 술집 여자들을 상대로 영업을 했다. 지하실은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한 쪽 다리가 불편한 작은 오빠가 군대에 간 큰 오빠를 대신해 만화방을 보고 있었는데 만화방 역시 손님의 대부분이 술집 아가씨들이었고 나머지는 근처의 하릴없는 건달들이었다.
주변 환경이 그렇다 보니 우리 부모님은 외동딸인 나의 교육 문제에 유달리 민감하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시장에서 자란 아이 장사꾼 되고 학교 앞에서 자란 아이 선생 된다고, 주변이라고는 아무리 둘러 봐도 한 집 건너 술집, 그 건너 여인숙에 눈에 보이는 거라곤 애초부터 싹수가 노란 풍경들뿐이었으니 딸 가진 부모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우리 엄마나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부터 나에 대해서는 노이로제라고 일컬어도 좋을 만큼 신경과민에 걸려 있었다. 공부도 꽤나 잘 하고 착실한 축에 든다고 여겨졌던 큰 오빠가 대학에 실패하고, 그것도 두 번이나 재수한 끝에 만화방을 차리더니 도망치다시피 군대로 날라 버린 것도 다 그 탓이 주변 환경에 있었던 우리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나에 대한 신경과민이 결코 신경과민이 될 수 없었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나의 학창 시절은, 그것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고 1때까지에만 해당되는 말이지만, 몹시 답답하고 습관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학교가 파하면 곧바로 집에 들어 와야 했고, 해가 떨어지는 시각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외출은 안 되었다. 행여 방과 후에 친구들과 어울려 빵집에서 한 두 시간 노닥거리거나 시내 서점에 들러 책구경 하느라 자칫 예정된 귀가 시간을 어기기라도 하는 날에는, 혹은 저녁에 공부하다가 갑자기 준비물이 생각나 잠깐이면 괜찮겠지 싶어 한 정거장 쯤 떨어진 문방구에라도 다녀오다 아버지의 눈에 띄는 날이면 그날은 곧 우리 집의 6.25 사변이었다.
-친구 좋아하다 신세 망치면, 친구가 네 인생 대신 살아 준다더냐? 친구고 나발이고 학교 끝나면 곧바로 집에 들어올 일이지 빵집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빵집이야. 늬 부모가 밥을 굶기냐, 옷을 안 사주냐? 한 번만 더 늦었다가는 다리 몽뎅이 부러질 줄 알아.
-오밤중에 문방구는 무슨 몸의 문방구야. 준비물을 못 챙겼으면 늬 오래비나 엄마한테 사다 달라고 부탁하면 될 일이지 어디서 다 큰 기집애가 밤나들이를 해, 밤나들이를. 자고로 밖으로 도는 접시 치고 안 깨지는 것이 없다 했거늘 밤나들이 나서는 년들 치고 온전한 것들 못 봤다 이년아.
그러면서 아버지는 다리가 퉁퉁 붓도록 회초리를 휘둘러 댔고 그러면 또 엄마는 훌쩍거리는 나를 슬그머니 끌어 앉혀 달래는 시늉 끝에
-선숙아, 누가 뭐래도 이 에미하고는 숨기는 것 없이 살도록 하자. 너 혹시 요즘 남자 친구 생겼니? 에미는 다 이해하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돼.
그러면서 한술 더 떠 태나지 않는 말꾸지람을 덧끼얹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서 내 성격은 차츰 안으로만 굽혀 들어가 내성적이 되어 갔고 학교에서도 속을 나눌 친구 하나 제대로 사귀지 못하는 채 외톨이로 굳어져 갈 수밖에는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것만 같던 부모님의 배려가 나에 대한 깊은 염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아무 세상 물정 모르는 청맹과니로 만들어 버렸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밖으로 도는 접시만 깨지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관리를 해 주지 않으면 집안에 고이 모셔둔 접시도 어느 결에 깨질지 모른다는 것을 우리 부모님은 알고 계셨을까···.
하긴, 부모님의 과보호가 나로 하여금 지나치게 안으로만 굽혀 들어간 성격상의 문제점을 떠안게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운명이 이렇게 된 것을 전적으로 그것에 원인을 둘 수만은 없다고 할 것이다. 결국에 가서는 자신의 운명을 책임지는 것은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고, 탓할 대상도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심란하게 비가 흩뿌리는 날 창가에 앉아 지나간 세월의 편린을 주우며 한탄을 늘어놓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단 한 순간의 실수, 그 실수로 인해 잘못 끼워진 인생의 첫단추가 너무나 아쉬웁고 회한이 많이 남아서이다. 아니, 그 첫단추가 아니라, 잘못 끼워진 첫단추에 대한 나의 대처가 너무 어리석었고 무지했었다는 것이 나를 아쉬웁게 하고 쓰디쓴 회한으로 몰아 넣는다.
따르르릉-.
새벽 잠결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
“여보세요··· 네··· 뭐, 뭐라구요?”
비몽사몽간에 거실 쪽으로 귀를 기울이던 나는 엄마의 화급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불길한 예감에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설마···.
방금 전에 꾸었던 꿈의 한 장면이 바늘 끝처럼 뇌리를 쑤시고 지나갔다. 얼굴에 피칠갑을 한 채로 아버지가 한 손에 회초리를 들고는 나를 무섭게 닦달하는 꿈이었다. 하도 무서워서 도망다니다가 어느 벼랑 끝에서 아버지에게 머리채를 잡히는 순간 깨어났는데, 바로 그 찰나에 거실의 전화벨이 울렸던 것이다.
“얘, 선호야. 선호야!”
작은 오빠를 깨우는 엄마의 외침 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조금 전 꿈의 불안감이 비로소 현실로 와 닿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엊저녁에 밤낚시를 떠난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터였다.
“선숙아, 빨리 일어나.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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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망연히 앉아 있던 나는 작은 오빠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허둥지둥 일어나 옷을 갈아 입었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엄마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붉게 상기된 얼굴에 놀람과 당황의 빛이 역력했다.
“아버지가 돌아 가셨단다. 바위에서 미끄러지셨대.”
작은 오빠는 남자여선지 엄마보다는 오히려 침착한 듯했다. 당혹감 속에서도 태도가 한결 안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작은 오빠의 인솔로 우리는 밤을 도와 남해안으로 달려 갔다.
아버지와 함께 일행했던 친구분들이 이미 그 근방의 작은 종합병원 영안실로 아버지의 시신을 옮겨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분들의 설명에 따르면 아버지는 술에 취한 채 친구분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갯바위 낚시를 하다가 미끄러져 차가운 바닷물에 심장마비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객사한 시신은 집에 들이지 않는다는 주위의 이끌림에 우리는 그곳에서 서둘러 화장을 하고 장례식을 마쳤다. 반쯤 넋이 나가 실성한 듯한 엄마 대신 작은 오빠가 그 모든 일을 맡아 처리했다.
서울로 돌아온 우리의 생활은 겉보기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는 듯했다. 나는 변함없이 학교에 나갔고 작은 오빠는 만화방을 보았으며 엄마는 살림을 꾸려 나갔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 집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당장 아버지가 들여다 주던 수입이 없어진 엄마의 가계부가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연히 쪼들리게 된 집안 살림은 예전과 다르게 작은 오빠의 만화방에도 손을 벌리게 되었다. 그저 용돈이나 벌어 쓰고 엄마의 곗돈에나 가끔 도움을 주던 만화방이 갑자기 우리 집 경제의 중심으로 들어앉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만화방의 푼돈 수입으로는 아무리 절약해서 쓴다 한들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아버지가 벌여 놓았던 사업을 정리하던 과정에서 남는 것 없이 오히려 빚만 챙기게 되어 엎친 데 덮친 꼴이 돼버린 것이 큰 짐이었다.
할 수 없이 엄마는 살림을 한 풀 접어놓고 밖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평소 알고 지내던 동네 아줌마의 소개로 술집 아가씨들을 상대로 한 일수찍기와 화장품 외판에 나섰다.
작은 오빠가 근처의 친구들을 불러 모아 도박판을 벌이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때쯤이었다.
그 전에는 만화방에서 포커판이 벌어지거나 화투판이 벌어지거나 하는 적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친구들이 먼저 얘기를 꺼내도 작은 오빠가 말리곤 했었다. 아버지의 불같은 성격이 도박을 눈앞에서 용납 못하는 점도 작용을 했지만 도박판을 벌이기 시작하면 순수히 만화를 보러 오는 손님들이 끊어진다는 게 작은 오빠의 이유였다.
그러나 이젠 사정이 달랐다. 아버지의 눈초리는 이미 저승에서 잠들어 있었고 작은 오빠에게는 큰 오빠 대신에 나누어 져야 할 가장으로서의 책임이 더욱 큰 부담이었다.
만화방의 수입은 훨씬 나아졌다. 판돈의 일부에서 떼는 소위 ‘꼬리’가 만화나 잡지를 빌려 주고 받는 푼돈의 몇 배나 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만화방은 동네의 할일없이 빈둥거리는 건달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아침부터 술냄새를 풍기고 들어와 죽치고 앉은 채 화투패를 돌려 대거나 날밤을 꼬박 새면서 포커판이 계속되거나 하는 게 다반사였다.
그 와중에 내가 만화방을 자주 들락거리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마당에 대학 진학은 언강생심 꿈도 꾸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이미 마음 한구석에서 포기해 버린 나는 차츰 공부에서 손을 놓기 시작했고 한결 여유로와진 시간이 서서히 무료함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빈 시간을 달래기 위해 지하실로 찾아들기 시작한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처음에는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이나 한두 권씩 뽑아다 보리라는 생각이었다. 쓸데없이 밖으로 나도는 것보다는 얌전히 집에 들앉아 있으면서 엄마대신 살림이나 돕고 책이나 읽는 것이 여러 모로 나으리라는 계산이었다.
내가 지하실에서 책을 빼다 읽기 시작하자 엄마나 작은 오빠도 저으기 안심하는 눈치였다. 아버지도 없이 엄마나 작은 오빠가 나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행여 내가 눈 맞은 강아지처럼 철없이 밖으로 나돌지나 않을까 내심 전전긍긍했던 중이었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엉뚱한 곳에 있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뜻밖의 세계에 빠져 들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말하기 부끄럽지만 자위를 배우게 된 거였다.
평소 친구들과의 대화나 다른 채널을 통해서 성에 대해 배울 기회가 없었던 나는 책 속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적나라한 성적인 묘사들을 통해서 하나 둘 성에 대해 눈을 떠가기 시작했다. 만화방에 진열된 책들의 대부분이 세계 명작이나 고전과는 거리가 먼 추리 소설이나 저급한 삼류 포르노 소설에 가까운 것들이었는데 평소 독서에 대한 올바른 바탕이 없었던 나는 그 소설들 속의 어처구니없는 세계에 아무 저항없이 빠져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는 지역이 왜 그 유명한 ‘영등포 역전’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지 그 까닭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우리 집 일층의 미용실에 드나드는 아가씨들의 옷차림이 왜 그렇게 야하며 또 그네들이 하는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감을 잡을 수 있게 되었으며 평소에 부모님이 나에게 했던 지나친 간섭의 바탕에 무엇이 있는 지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소설 속의 세계는 신비롭고 환상적인 세계였다. 그렇잖아도 내면적으로만 움츠러들었던 나의 성격은 소설 속의 세계라는 새로운 내면 세계를 만나자 급격하게 빠져 들었다.
소설 속에는 평소 내가 어렴풋이 동경해 오던 왕자가 있었고 장미꽃이 만발한 환상의 섬이 있었으며 눈 내리는 공원길의 낭만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끌어 당겼던 것은 책 속의 주인공들이 펼치는 ‘러브 스토리’였다. 그 러브 스토리라는 게 결국 빤한 삼류 포르노라는 것을 먼 훗날 알게 되긴 하였지만 그땐 내 호기심의 은밀한 창고를 채워 주는 소중한 보물이었던 것이다.
다들 아다시피 추리 소설이나 가판대에서 파는 싸구려 소설들 속에 등장하는 남녀 관계는 평범을 벗어난 비정상적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불륜, 강간, 폭력, 동성애, 변태성욕, 근친상간···. 사회적으로는 손가락질 받는 여러 일탈 행위들이 그 책들 속에서는 아름답고 달콤한 사랑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나 성에 대해 거의 아무런 예비 지식이 없었던 내가 그 책들 속에 등장하는 허구에 아무런 여과없이 빠져 들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귀결이었다. 텅 빈 창호지에 먹물이 배어들 듯이 내 뇌리에 인이 박힌 에로틱한 문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튀어 나와 나를 공상의 세계로 이끌어 가곤 했다.
수업 시간이나 등하교길의 버스 안에서나 꿈을 꾸듯이 몽환의 세계에 젖어 있다가 선생님이나 옆 친구의 지적을 받고서야 깜짝 놀라 깨어나곤 해서 내 별명이 ‘꿈숙’이가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친구들로부터 꿈숙이라고 놀림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가능하면 혼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공상에 빠져 들지 않으려고 나는 무진 애를 썼다. 일부러 딴 생각을 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거나 교과서의 활자에 눈을 붙들어 매두기도 해 보았지만 번번히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 결엔가 에로틱한 공상 속에 빠져 있는 거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날씨가 꽤나 쌀쌀해져 가는 가을 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에서 수업이 파하자마자 집으로 달려온 나는 버릇처럼 지하실로 달려갔다. 책을 빼오기 위해서였다.
“야, 선숙이 이제 보니 처녀티가 풀풀 나는데. 옷만 쫙 빼 입고 나가면 아가씬 줄 알겠다야.”
“짜식아, 그럼 선숙이가 처녀지 언제는 처녀가 아니었다던?”
“고건 고렇네. 그렇다면 내가 선숙이한테 큰 실수를 한 셈이구만 그래, 하하하.”
“야, 선숙아, 저런 쓰잘데 없는 놈하고는 상종도 하지 말고 앞으로 혹시 데이트 하고 싶은 생각 있으면 나같은 사람하고 해라, 응? 뭐니 뭐니 해도 남자는 나처럼 고게 튼실해야 하는 법이니까 말이야. ”
작은 오빠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친구들만 여럿이 둘러 앉아 포커를 치면서 나를 향해 농담을 해대는 것이었다.
평소에 지하실에 들락거리면서 얼굴이야 낯익었지만 얘기는 나누어 본 적도 없는 그들이었다. 그런데 작은 오빠가 자리에 없는 틈을 타서 저마다 한 마디씩 농담을 던져 대곤 낄낄거리면서 웃어 대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직 여고 일학년에 불과한 내게는 지나치다 못해 입에 담기도 민망한 말들을 농담이랍시고···.
‘나쁜 자식들. 노름해서 돈이나 있는 대로 날려 버리라지. 흥’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들을 무시해 버리고는 책만 골라 들고 올라와 버렸다.
그리고는 내 방에서 이불을 깔고 누웠다. 날씨가 쌀쌀해서 그냥 읽기에는 어쩐지 추운 듯했기 때문이었다.
가슴에 베게를 고이고 누워 책장을 펼치자 나는 곧 예의 공상의 세계로 빨려들어 가기 시작하였다. 방금 전 오빠 친구들의 농담으로 상했던 기분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소설의 내용은 한 여학생이 선생님과의 관계를 통해 어른들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고 멋진 여인으로 성숙해 간다는 스토리였다. 그런데 이 여학생은 중 3이었고 어느날 방과 후에 실험실에 남아 혼자 청소를 하다가 기혼자인 생물 선생으로부터 강간을 당해 첫경험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처녀막이 파열되는 아픔으로 눈물을 흘리지만 두번 째의 관계에서부터는 이윽고 남녀 관계의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해 오히려 적극적인 자세가 된다. 첫날 강간당하는 때에 무려 세 번의 관계를 갖게 되는데 마지막에는 여학생이 교사의 뒷처리까지 입술로 해줄 만큼 발전하게 된다. 일본 소설을 번역한 것인데 상태가 조잡해 이야기가 자꾸 끊어지는 단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설 속의 여학생이 되어 공상 속으로 빠져 들어 갔다.
소설 속의 묘사는 아주 적나라했다. 여학생의 시시각각 변해 가는 심리에서부터 육체적인 반응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군데도 빼놓지 않고 세밀하게 표현을 해 놓았다. 여학생의 가슴이 설레일 때는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어 한 손으로 가슴을 진정시켜야 할 정도였다. 나는 침을 삼키며 책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에 갔는데 참았던 오줌보를 터뜨리는 순간 어떤 알지 못할 전율이 아랫배 언저리를 훑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한 순간 아찔하는 기분이 들었으나 나는 곧 정신을 수습하고 방으로 돌아 왔다.
다시 책을 읽느라고 엎드리는 순간 좀전에 느꼈던 이상한 느낌이 또다시 아랫배에 스쳐가는 것이었다. 화장실에서 느껴졌던 것보다 좀더 강렬한 느낌이었다.
‘생리가 시작되려나?’
그렇지만 주기가 항상 일정했던 생리는 아직 일 주일여나 남아 있었다. 나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책장을 넘겼다.
<···방문을 잠그고 침대에 누운 에이꼬는 옷을 모두 벗고 맨몸이 된 채 아랫배를 깔고 비비기 시작했다. 싸르르한 전율이 사타구니에서 시작해 척추를 타고 온 몸으로 전해져 왔다. 더욱 강렬한 쾌감을 이끌어 내기 위해 에이꼬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좀더 자극적인 감각이 은밀한 곳에서 전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에이꼬는 계속 삼각 둔덕을 비벼 댔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만큼 감각의 상승은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숨을 가다듬은 에이꼬는 낮에 실험실에서 있었던 노무라 선생과의 섹스를 생각하며 사타구니 깊숙이 베개를 끼워 넣었다. 그리고 다리를 비틀며 힘껏 힘을 주었다. 마치 빨래를 쥐어짜듯이···. 그러자 아까보다는 훨씬 더 짜릿하고 강렬한 전류가 다리 사이로 흘러 넘쳤다. 에이꼬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돌아누웠다···. 도저히 이대로는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노무라 선생과의 세번 째 관계 때처럼 머릿속이 마치 텅 비어 버린 것만 같던 몽롱한 쾌감을 다시 한번 느끼지 않고는 미련이 남아 자위를 그만 두지 못할 것 같았다.잠시 망설이던 에이꼬는 결심한 듯 침대에서 일어나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인 채 문을 열고 주방으로 향했다. 낮에 주스를 꺼내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마침 오이 몇 개가 들어 있었던 것을 본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에이꼬는 소리없이 냉장고 문을 열고 보기에 적당히 매끄럽고 잘 생긴 걸로 골라 슬그머니 침대로 돌아 와서···>
소설은 마침 에이꼬라는 여학생이 낮에 있었던 선생과의 정사를 못잊어 자위에 몰두하는 대목이었다.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 갔다.
나는 잠시 활자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슬그머니 일어나 방문을 잠갔다. 엄마야 이렇게 일찍 귀가하실 리 없었지만 혹시 작은 오빠라면 무언가를 가지러 올라 올 수도 있으리란 생각에 미리 조심한 것이었다.
그 다음에 나는 소설 속의 에이꼬처럼 배를 깔고 누워 아랫배를 비벼대 보았다. 몇번 하지 않았는데도 마치 거짓말처럼 짜릿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아까 화장실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했는데 훨씬 더 진하고 강렬했다.
나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팬티 안으로 집어넣어 보았다. 그곳이 축축하게 젖어 있고 왠지 부피가 한 움큼이나 더 늘어난 것만 같았다. 나는 손바닥을 고르게 펴 그곳을 가볍게 감싸고는 슬그머니 문질러 보았다. 아랫배를 대고 비비는 것보다 더 크고 짜릿한 느낌에 숨이 멈출 것만 같았다.
그날 나는 처음 해본 자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의 에이꼬 흉내를 내며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혼자만의 은밀한 즐거움에 빠져 들었다. 책에서 표현한 것처럼 견딜 수없이 황홀한 쾌감은 아닌 것 같았지만 나름대로 숨이 컥컥 막힐 것만 같은 짜릿함은 난생 처음 느껴본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틈만 나면 방문을 닫아걸었다. 어떤 날은 무려 세번이나 자위에 몰두한 적도 있었다. 때로는 학교에서도 못참고 화장실에 앉아서 행여 누가 알세라 숨죽인 채 그짓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리고 숨어서 비밀스레 하는 자위가 더욱 감각을 자극해 짜릿함을 더해 준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지만 나의 자위 행위는 어디까지 그저 손바닥이나 베개를 이용해 마찰에서 자극을 얻는 수준이었지 소설 속의 에이꼬처럼 오이와 같은 물건을 직접 그곳에 삽입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었다. 사실 마음이야 그렇게 해서 더욱 강렬한 자극을 경험해 보고 싶은 게 굴뚝같았지만 어쩐지 두렵고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한편으로는 지금 느끼고 있는 그 자극만으로도 충분히 은밀한 즐거움을 충족시킬 수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였고.
자위를 배운 뒤로 내 공상하는 버릇은 각도를 달리하여 더욱 깊어져만 가게 되었다.
전에는 기껏해야 소설 속의 한 장면, 이를테면 멋진 해변에서 007 영화의 주인공처럼 잘 빠진 남자와 낭만적인 데이트를 나눈다거나 하는 장면 따위에 나를 대입시켜 상상의 이야기를 꾸며보거나 하는 식이었는데 이제는 거기에 성적인 것까지 보태게 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멋지고 매너 좋은 미남자와 우연히 만나 데이트를 한다. 그 남자는 나를 유혹하기 위해 온갖 화려한 옷과 보석을 선물하고 고급스럽고 사치스런 식당에서 프랑스 요리를 대접하며 장미꽃을 무더기로 안겨 주기도 하지만 나는 짐짓 튕긴다. 그럴수록 남자는 애가 닳아 더욱 열심으로 나를 공주 모시듯 섬기고···. 어느날 그 남자는 나에게 청혼하기 위해 빨간색 스포츠카에 나를 태우고는 바닷가에 있는 자신의 별장으로 모시고 간다. 별장에는 최고급 요리와 향기로운 술, 그가 청혼의 선물로 준비한 세계 최고 디자이너의 수제 드레스, 온갖 보석으로 꾸며진 화관 등이 기다리고 있고 실내 악단까지 대기하고 있다. 그의 스포츠카 안에서 나는 마침내 그의 청혼을 극적으로 받아들여야지 하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별장에 거의 다다르게 될 무렵, 불시에 나타난 도적떼에 의해 차가 세워진다. 그리고 끌어 내려진 두 사람은 도적 두목 앞에 묶인 채 무릎 꿇리운다. 두목은 온통 털복숭이에다 고릴라처럼 커다란 몸집, 부리부리한 두 눈에서는 흉폭한 살기가 가득차 보는 이의 치를 떨게 하는 모습이다. 그런 두목이 나를 보고 씨익 웃는다. 그리고는 부하들에게 명령해 내 옷을 찢게 하고는 그 남자가 보는 앞에서 나를 겁탈한다. 나는 반항하며 소리지르고 그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내지만 묶여 있는 그로서도 어쩔 수 없다. 결국 나는 두목과 그의 부하들에게 번갈아 겁탈을 당한 채 만신창이가 되어 인질로 남는다. 풀려난 남자는 그래도 나를 못잊어 몸값을 가지고 나를 찾으러 와 결혼을 신청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거절하지만 그는 굽히지 않고 나를 따라 다니며 애타게 사랑을 호소한다···.
대개 이런 식의 공상이었다.
그런데 나의 공상 속에서는 언제나 내가 비참하고 처절하게 남자에게 당하는 장면이 꼭 끼어들곤 했다. 의식적으로 만들어 낸 공상이 아니었음에도 강간을 당하거나 윤간을 당하는 장면이 떠오르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자위할 때처럼 아랫도리가 젖어 오고 묘한 전율을 상상하게 되곤 하는 것이었다.
그건 아마도 내가 읽은 책들 속의 장면 장면에서 영향을 받아서였을 것이다.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보다 원색적이고 변칙적인 섹스 장면을 나열해 놓은 소설들에 나도 모르게 중독되어서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 자신의 깊은 곳 어딘가에 평범치 않은 기질이 숨어 있던가.
어쨌든 나는 자위를 할 때마다 그런 폭력적인 상황에서 남자와 섹스를 하는 장면을 상상하곤 했고 나중에는 그런 자극적인 상상이 없이는 쾌감을 끄집어 낼 수 없게 되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런 장면 설정들이 대부분 남자 위주로 쓰여졌고, 때문에 남자들의 감각에 따르다 보니 강간당하는 여자가 고통에 못 이겨 지르는 신음 소리조차도 쾌감처럼 묘사된다는 것을 그 때는 몰랐었다. 따라서 나는 폭력을 동반한 남녀간의 섹스야말로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강렬하고 자극적인 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의를 내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하루하루 반복되는 답답한 일상 속에서 자위는 나에게 신선한 즐거움이 되어 주었다. 물론 때때로 막연한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따로 별다른 취미나 활동이 있을 리 없었던 나로서는 혼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자위야말로 행복하고 은밀한 도피처였던 셈이다.
가을이 점점 깊어 가면서부터 나는 지하실에 드나드는 횟수가 차츰 늘어났다.
그것은 추리 소설이나 에로틱 소설을 빼다 읽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책은 이미 만화방에 있는 거의 전부를 섭렵했다. 이제는 밤에 잠자리에 들거나 불현듯 자위가 하고 싶을 때에만 필요한 책을 갖다 읽으면 되었다. 또 내 책상 서랍 속에도 몇 권 아무도 몰래 감추어 둔 책이 있었기 때문에 급할 때는 꺼내 펼치기만 하면 되었다.
내가 지하실에 자주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작은 오빠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판만 벌려 주고 어울리지는 않던 오빠가 서서히 어우리는 횟수가 많아지더니 이제는 아예 본격적으로 도박판에 끼어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자 당연히 간식으로 라면을 끓인다거나 중국집에서 시켜 먹은 음식의 뒤치다꺼리를 한다거나 만화를 빌러 온 사람들을 상대하거나 하는 일은 내 몫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작은 오빠와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도 지난 번의 어느 날처럼 나에게 심한 농담을 하거나 하는 일 없이 잘해 주었다. 아마 작은 오빠의 얼굴을 의식해서였겠지만 그들은 오히려 내가 잔심부름이라도 해주면 심부름값이라면서 듬뿍 듬뿍 용돈을 쥐어 주기도 하며 살갑게 굴었다.
작은 오빠 역시 내가 내심 대학을 포기한 걸 눈치챘는지 지하실에 내려와 잔일을 거들어 주는 걸 은연중에 당연시 여기고 기특해 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예전에 아버지가 그러하셨듯이 내 행동에 대해서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함부로 농담도 못하게 하고 도박판 친구들과 함부로 가까와지지 않도록 보이지 않게 거미줄을 쳤다.
물론 나 역시 그들과 특별히 친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그런 생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오빠의 그런 조심스러움이 불편하게 여겨질 만큼 신경쓰이거나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변함없이 주의를 기울여 주는 오빠가 고맙기만 할 따름이었다.
오빠의 만화방 일을 거들면서부터 나는 갑자기 용돈의 풍요로움을 누리게 되었다. 오빠 친구들의 잔시중에서 생기는 부수입이 꽤 짭짤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중의 일부는 떼어 오빠에게 상납(?)했다. 어차피 내가 다 쓰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었고 괜스레 계면쩍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 오빠에게 준다면 어떤 방법이든 오빠가 잘 알아서 집을 위해서 쓸 것이었고 그렇게 되면 나도 우리집을 위하여 무언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내가 썼는데 거의 전부를 옷을 사는데 투자했다. 다른 곳에는 쓰고 싶어도 쓸 방법을 몰랐고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돈들 일도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 입고 싶었던 메이커제 청바지나 미니스커트, 블라우스 등을 사는 데에 거의 모든 용돈을 소비했다. 또 일층의 미용실이나 만화방에 드나드는 술집 아가씨들 중에서 멋진 옷을 입은 여자가 있으면 눈여겨 봐 두었다가 그런 옷을 사 입어 보기도 했다.
물론 그런 옷들은 대부분 내 옷장에서 잠자고 있어야 했다. 학교 오가는 일 외의 외출이 별로 없는 내가 그런 옷을 입을 기회란 별로 없는 게 당연했기 때문에. 또 혹시 엄마나 오빠가 보기라도 하면 틀림없이 좋지 않은 소리를 할 게 뻔했으므로. 그러므로 그런 화려하고 성숙해 보이는 옷들은 가끔씩 혼자 방에서 이것저것 갈아입어 보고 거울에 모습을 비추어 보면서 만족감을 느끼는 소품으로써의 역할밖에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꾸준히 옷을 사 모았다. 그런 옷을 살 때면 느껴지는, 벌써 내가 멋지고 성숙한 숙녀로 다 자란 것 같은 기분을 즐기는 게 보통의 즐거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저런 재미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던 그 가을에 작은 오빠는 사랑을 시작했다.
상대는 일층의 미용실에 근무하던 미용사 아가씨였다.
그녀는 충청도 어딘가가 고향이었는데 여고를 졸업하고 바로 서울에 올라와 미용학원을 나온 뒤 우리집 일층의 미용실에 취직했다. 미용실 한 구석에 주방을 겸해서 만들어 놓은 칸막이 방에서 숙식을 해결했는데 무료한 밤 시간을 보낼 시간 땜으로 만화책을 빌려 읽곤 하다가 작은 오빠와 가까와진 것이었다.
절름거리는 한 쪽 다리 때문에 컴플렉스가 있어 평소 연애라곤 엄두도 내지 않던 오빠에게 그녀는 신이 내려준 천사요 은혜의 선물이었다.
키도 작고 얼굴도 별로 예쁘진 않았지만 약간 오동통한 몸매에 유난히 큰 젖가슴이 도드라져 보이는 그녀는 시골에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자답게 아직 때가 묻지 않고 성격이 수더분해 전체적으로 포근하고 좋은 인상을 풍겼다.
오빠는 그녀에게 급격히 빠져 들었다.
내가 오빠의 데이트를 눈치 챈 것은 갑자기 오빠가 만화방을 비우는 횟수가 잦아진 때문이었다.
포커판이 벌어져 있는 데도 자주 오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궁금해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어느 날인가 오빠 친구들이 간식으로 라면을 끓여 달라 했다.
지하실 한 쪽에 있는 싱크대에서 라면을 다 끓여 가는데도 오빠가 돌아오지 않자 나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오빠 친구들에게 물었다.
“근데 선호 오빤 어디 갔어요?”
그러자 카드를 돌리던 오빠 친구들이 왁자하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능글맞은 얼굴로 저마다 한 마디씩 던지는 것이었다.
“늬 오빠 지금 떡치러 갔단다, 떡.”
“찰떡인지 팥떡인지 한 솥단지 해 오려면 한참 걸릴걸, 암.”
“선숙이 니는 떡냄새도 안 나냐? 우리는 코가 개코라서 그런지 벌써부텀 냄새가 진동을 하구만. 가만있자. 큼큼. 요것 냄새가 틀림없이 꿀떡인데, 달착지근한 것을 보니까.”
“선숙이 니도 떡 먹고 싶으면 이 오빠한테 얘기하거라, 응? 내 기똥찬 꿀떡으로 한 솥 박박 긁어 줄 테니까 말이여.”
그러고는 또 자기네들끼리 침을 튀겨 가며 배를 쥐고 웃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했다.
느닷없이 떡은 무엇이며 그 소리를 해 놓고는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웃는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나를 흘낏흘낏 쳐다보며 엉큼스런 웃음을 흘리는 것으로 봐선 틀림없이 숨은 뭐가 있다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정확한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아무리 도박판에나 기웃거리고 흉물스런 농담을 거리낌없이 내뱉는 사람들이거니 아직 나이 어린 내 앞에서 그런 낯뜨거운 음담패설을 내깔길 수 있으랴. 나는 전혀 그런 쪽으로는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 끓인 라면을 그릇에 옮겨 담으면서 나는 이번에는 평소 그래도 인상이 그중 나빠 보이지 않던 종훈이란 사람을 겨냥해서 물었다.
“오빠, 선호 오빠 정말로 어디 갔어요?”
내가 스스럼없이 오빠라는 호칭으로 불러 주자 기분이 좋았는지 종훈이란 사람이 헤벌쭉 웃으며 되물었다.
“선숙이 너 정말 선호 어디 간지 모르니?”
“그럼 모르니까 묻지 알면 왜 물어요? 괜히 이상한 말들만 하곤···”
“그으래? 가만 있자··· 이거 가르쳐 줘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아이, 뭔데요. 비밀을 지킬 테니까 가르쳐 줘봐요, 네?”
“야야, 뭘 그까짓 것 가지고 그래. 뭐 선숙이도 알 만한 나인데 속시원히 가르쳐 줘 버려. 뭐 어차피 알게 될 텐데.”
옆에서 한껏 폼을 잡으며 카드를 보고 있던 태길이란 사람이 툭 던지듯이 내뱉았다. 평소에도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 엉큼함이 가득 차 있고 농담도 제일 지저분하게 해서 얼굴만 마주쳐도 어쩐지 기분 나쁜 사내였다.
그러나 오늘은 그가 던져 준 한 마디가 무척이나 고맙게만 느껴졌다.
“그럴까? 선숙이 너, 혹시라도 니 오빠가 먼저 말하기 전에는 아는 척 하기 없기다.”
“알았다니깐.”
그렇게 해서 얻어 듣게 된 게 작은 오빠가 일층에서 일하는 미용사와 한창 열애 중이라는 이야기였다.
뒤늦게 여자를 사귀게 된 작은 오빠가 만화방 일을 제쳐 두고 빠져든 게 나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그 여자와 오빠가 잘 진행되어 결혼까지 갔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작은 오빠의 불편한 한 쪽 다리때문에 결혼에 대해서 걱정하는 부모님의 대화를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편으론 내가 오빠 대신 만화방 일을 좀더 거들어서 오빠로 하여금 마음놓고 그 여자와 만날 수 있도록 신경을 써 주어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사람의 마음일까. 만화방에 책을 빌리러 오는 그 미용사를 볼 때마다 야릇한 상상이 떠오르곤 하는 것이었다.
오빠 친구들로부터 이미 대강의 얘기를 들어 영업이 끝난 후 그녀가 혼자 있을 때 작은 오빠가 찾아 가서 어떤 썸씽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고 있어서였을까. 꿀떡이니 찰떡이니 하던 농짓거리가 생각나서였을까. 그녀를 보면 문득 작은 오빠와 함께 옷을 벗고 딩구는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혀지곤 하는 것이었다.
물론 나나 그녀나 서로 시침은 뚝 떼고 있었지만 알고 있는 나로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얽혀 떠오르는 것이었다.
저 여자도 나처럼 자위를 많이 하는 걸까. 아니 이젠 오빠가 있으니 할 필요가 없겠지만 오빠를 만나기 전에는 혹시 나처럼 책을 펼쳐 놓고 자주 자위를 했을까. 했다면 어떤 방법으로 했을까. 아니 어쩌면 그런 건 전혀 하지 않았을 지도 몰라. 저렇게 순해 보이고 얌전해 보이는데. 같은 여자끼리니까 한번 언니라고 부르면서 툭 터놓고 얘기나 해볼까. 안돼, 그러면 틀림없이 오빠 귀에 들어가게 되고 나는 경을 칠 거야···.
사실 그즈음 나는 상당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거의 날마다 습관처럼 계속해 버릇한 자위가 이제는 중독이 되었는지 생각날 때마다 하지 않으면 다른 일에는 아예 손이 가질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우연히 앉은 자세에서 손으로 문지르다가 그곳을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어쩐지 예전같지 않게 색깔이 거무스름해지고 음순이 늘어나 있었던 것이었다. 성에 대해서 뚜렷한 지식이 없었던 나는 그게 혹시 무슨 병은 아닌가 싶어 내심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래서 혹시 미용사 아가씨라면 나보다 나이도 많고 경험도 있을 터이니까, 그리고 사귀는 남자의 동생이니까 성실하게 상담에 응해 주고 해결 방법을 찾아 주겠지, 그런 기대를 떠올려 보기도 한 것이었지만 어쩐지 부끄럽고 또 오빠 귀에 들어가면 큰일나리란 생각에 속으로 삭여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가을이 깊어 갔다.
쌀쌀함을 넘어서서 제법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거리에는 완연한 겨울 옷차림의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띠었다.
날이 추워지면서 만화방은 더욱 바빠졌다. 하릴없이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던 룸펜들이 죄다 몰려든 듯 좌석이 가득 찼다. 그리고 동시에 오빠의 도박판도 눈에 띠게 활기를 띠었다. 멤버가 많이 늘어난 탓이었다.
더불어서 나 역시 바빠졌다. 만화 보는 사람들의 치다꺼리 하랴 노름판 치다꺼리 하랴 늦은 밤까지 지하실에 붙어 있어야 했다. 피곤하긴 했지만 한편으론 보람도 있었다. 두루두루 일이 잘 풀려 늘상 기분이 좋아 있는 작은 오빠의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웠고 하루라도 거르면 잠이 오지 않던 자위를 바쁘고 피곤한 덕분에 건너뛰게 되는 경우가 많아진 것도 내심 뿌듯했다. 또 빈 시간이 많을 때는 쓸데없이 이상한 공상에 시달리는 것도 지겨웠는데 그럴 여유조차 없는게 오히려 다행이다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더욱 열심히 오빠 일을 도우려 애썼고 제법 용돈도 모을 수 있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오빠의 눈길도 안쓰러움과 함께 사랑스러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내 인생의 궤적을 바꾸어 버린 운명의 날.
그날도 오늘처럼 가을비가 스산하게 뿌렸다. 어쩌면 진눈깨비가 한두 점 섞여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바깥 기온이 상당히 차가왔던 것으로 기억하니까.
그날은 거의 새벽 한 시가 되어 일이 끝났다.
근방의 다른 만화방들은 거의가 심야 영업을 했으나 오빠의 가게는 처음부터 심야 영업을 하지 않았으므로 포커판이 끝나자 바로 문을 닫게 된 것이었다.
“선숙아, 대강 치우고 올라가서 자. 난로 끄고 자리만 정리해 두면 오빠가 내일 아침에 청소는 할 테니까.”
포커 멤버들과 함께 밖으로 나서며 오빠가 말했다.
“왜, 어디 가려고, 오빠?”
“응? 으응, 애들하고 그냥 술이나 한잔 하고 오려고···.”
말끝을 사리는 오빠 옆에서 친구들이 의미있는 웃음을 흘렸다.
나는 직감적으로 오빠가 일층의 아가씨를 만나러 간다는 것을 알아챘다. 청소도 할 겸 지하실에서 그냥 자겠노라고 엄마한테는 거짓말을 해 놓고는 일층에서 잠을 자는 경우가 자주 있어 왔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았어, 오빠. 너무 많아 마시진 마.”
나는 짐짓 모르는 체 오빠를 배웅했다. 그리고 주섬주섬 실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먼저 탁자나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진 만화책들을 거두어 서가에 꽂아 놓고 컵라면 뚜껑이나 음료수 캔 따위를 치우자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했다.
그리고 포커를 치던 자리를 치우는데 웬걸? 누군가의 지갑이 방석 한 쪽에 끼워진 채 그대로 있는 것이었다.
‘누구 거지? 분명히 작은 오빠 것은 아닌데.’
몰려들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금방 찾으러 오겠지 하는 생각에 나는 지갑을 한 쪽으로 치워 놓고 다시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찾으러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곧 오겠지 하며 기다리느라 오빠가 하겠다던 바닥 청소까지 다 하며 기다렸는데도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시계 바늘은 벌써 새벽 두 시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나는 졸립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해서 일단 가지고 있다가 내일 아침에 오빠를 통해서 전해 주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지갑을 챙겨 들었다.
그런데 문득 이게 누구 것일까 하는 호기심이 일었다.
내 일생일대의 참혹한 실수였던 그 한 순간의 호기심. 그 한 순간만 넘겨 버렸더라면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내가 되어 있을 테인데 하는 후회를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그 단순한 호기심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그냥 집어 들고 올라가서 잠들어 버렸다면, 아니 최소한 지갑을 열어 누구의 것인가를 확인하는 일을 내 방에서만 했더라도···.
그것이 내 운명이고 팔자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쉬웁기 한이 없다.
지갑은 척 보기에도 두툼했다. 나는 돈에는 욕심이 없었지만 그저 누구의 것인지 확인이나 해보자는 심산으로 지갑을 펼쳐 보았다. 태길이란 사람의 주민등록증이 꽂혀 있었다. 그리고 생각대로 돈이 꽤 많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돈을 꽂아 둔 한쪽이 이상하게 불룩했다. 나는 무심코 그 쪽을 뒤져 보았다.
그러자 세상에나. 나온 것은 포르노 사진을 수첩처럼 엮어 놓은 조그마한 책자였다.
‘흥, 역시 생긴 대로 노는군.’
코웃음이 나오면서도 야릇한 호기심이 나를 충동질했다. 표지에서부터 징그럽게 생긴 남자의 그것이 여자의 은밀한 곳을 반쯤 뚫고 들어가 있는 사진이 여과없이 생생하게 실려 있었는데 몹쓸 것을 보았다는 마음과는 달리 내 눈은 자꾸만 책을 펼쳐 보라고 손가락을 부추겼다.
가슴이 세차게 고동쳐 왔다. 나는 크게 한숨을 몰아 쉬어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한번 널을 뛰기 시작한 가슴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한번 둘러 본 다음에 나는 마침내 결심을 하고는 책장을 넘겨보았다.
후읍.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았다. 가슴이 온통 쿵쾅거리고 얼굴이 뜨겁게 달아 올랐다.
젖가슴이 몹시 풍만한 금발의 서양 여인과 온몸이 시커먼 털로 뒤덮힌 건장한 남자가 괴상한 포즈로 성교를 하고 있는 사진이 적나라하게 눈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사진 속의 여자는 이미 절정에 도달한 듯 반쯤 감은 눈으로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인의 신음 소리가 생생히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꿀꺽.
내 목에서 침 넘어 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계속해서 사진을 넘겼다. 그러면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는 강렬한 욕구에 휩싸여 있었다. 평소에 자위에 대한 욕구를 느낄 때보다 더 강렬한 어떤 욕망이 다리 사이에서부터 멀미처럼 치밀어 올라 왔다.
‘잠깐이면 끝낼 수 있을 거야.’
나는 소파에 앉은 채 청바지 지퍼를 내렸다. 그러면서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문께를 슬쩍 살펴보는 걸 잊지 않았다. 이미 시간이 늦어 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오빠가 나갈 때 문을 잠갔으니 신경쓰일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왼손에 사진을 펼쳐 든 채로 나는 오른손으로 나의 비밀스런 그곳을 열심히 애무해 나갔다. 생생하고 도발적인 사진을 보아서인지 평소와는 다른 더욱 강한 어떤 느낌이 틀어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스스로 사진 속 여자의 자세를 흉내 내가며 여러 가지 자세를 취해 보기도 하고 조그맣게 신음 소리도 내보았다. 그러자 숨이 가빠 오고 몸이 허공에 추락하는 듯한 절정감이 등뼈를 타고 머리로 치올라 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무언가 잡힐 것만 같은 알수 없는 느낌의 끝을 찾아 열심히 손을 놀렸다.
그 때였다.
“흐흐흐, 완전히 뿅 갔구만 그래.”
낮고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가 내 머리 끝을 확 잡아채었다.
헉.
나는 비명조차도 지르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이미 반쯤 벗어져 무릎께에 뭉쳐져 있던 바지에 걸려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이런, 이런. 그렇게 놀라면 쓰나.”
느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우악스런 손길이 다가와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왜, 왜 이래요.”
나는 소리를 지르며 힘껏 몸을 버팅겼다.
그러자 거친 손길에 의해 내 어깨가 홱 잡아채 올려지더니 턱 숨이 막혀 왔다. 남자의 주먹이 내 가슴을 친 것이었다.
나는 다시 주저앉아 호흡을 가다듬고 숨을 쉬어 보려고 애를 썼지만 눈앞에 무수한 잔별들만 명멸할 뿐 도저히 숨을 추스릴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남자가 나를 번쩍 안아 들더니 소파 위로 던지듯이 내동댕이쳤다.
“흐흐흐. 혼자 하는 것보다는 둘이 하는 게 낫다구. 내가 홍콩 구경을 시켜 줄 테니까 잠자코 있어. 소리 질러 봐야 너만 쪽팔릴 테니까 말야. 혼자 그 짓거리 하다가 들켜서 그랬다고 온 동네 소문내고 싶으면 실컷 소리 질러 봐.”
남자의 그 소리에 나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가까스로 호흡은 회복되었지만 이번에는 절망감이 캄캄하게 눈앞에 장막을 쳤다.
당혹감, 수치심, 두려움, 초조감, 이런 감정들이 한꺼번에 소용돌이치며 나를 어지럽히는 가운데서도 나는 우선 바지를 추스려 입으려고 애를 썼다.
남자는 여유있다는 표정으로 내 옆에 턱 걸쳐 앉더니 손을 뻗쳐 어깨를 감싸 안아 왔다.
“이, 이러지마, 오빠. 제발···”
나는 그에게 오빠라고 부르며 애원했다.
“평소에 내가 널 얼마나 갖고 싶었는데. 미치고 환장한 지경이었다구.”
남자는 느물거리며 내 어깨를 감싼 손으로 젖가슴을 거침없이 주무르기 시작했다. 마치 자기 애인을 다루는 듯 침착하고 여유있는 태도였다.
“오, 오빠. 제발 잘못했으니까 한번만 봐 줘, 응?”
나는 그의 손을 밀어 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있는 힘껏 소리라도 질러 일층에 있는 오빠에게 구원을 요청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계속 머리에 스쳤지만 그 뒤에 감당해야 할 문제들이 또다른 두려움으로 나의 의지를 짓눌러 왔다.
나는 어떻게든 그를 달래서 이 위기를 벗어 날 수밖에는 없다는 단순하고도 어리석은 마음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오빠, 다신 안 그럴 테니까 한번만 봐 줘, 응?”
나는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허어. 니가 뭘 잘못했다고 나한테 봐 달라는 것이야, 내참 미치고 환장하겠네.”
그러면서 남자는 이미 내가 반항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내 젖가슴을 주물럭거리던 손에 힘을 주더니 나를 소파 위로 넘어뜨렸다.
“엄마야!”
나는 왈칵 겁에 질려 그의 가슴을 힘껏 떠밀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남자의 주먹이 옆구리에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다시 숨을 멎게 했다.
“이 썅년이 좋은 말로 하렸더니···”
남자가 욕설을 내뱉으며 거칠게 청바지를 잡아챘다.
큭, 큭.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숨이 막혀서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옷을 벗기워서는 안된다는 강박 관념에 힘껏 발버둥만 쳐질 뿐이었다.
퍽, 퍽.
이번에는 양 쪽 허벅지가 부러지는 것 같은 아픔이 왔다. 다리에 힘이 쭈욱 빠져 나가며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
“썅년이 혼자서 그짓 하고 있으면서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모를 정도면 다 알아 볼 조지 뭘 그렇게 내숭은 내숭이야.”
남자는 마치 되려 분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씨근덕거리더니 몸을 반쯤 일으켜 바지를 벗었다. 지퍼 열리는 소리가 내 가슴을 찢는 소리처럼 처절하게 들려 왔지만 주먹으로 몇대 맞은 게 충격이 컸는지 발끝 하나도 움직거릴 힘이 없었다.
“한번만 더 소릴 냈다간 죽여 버릴 줄 알아.”
바지를 다 벗은 남자가 확인하듯 한 마디를 내뱉곤 내 옷을 마저 벗기기 시작했다. 반항할 힘도 의욕도 잃어버린 내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러 내렸다.
‘벌을 받은 거야.’
우습게도 그때 내 머릿속에서는 그런 엉뚱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내가 공상 속에서 그리곤 하던 여러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지나갔다.
‘이런 게 아니었는데···’
씁쓸한 회한과 슬픔이 눈물샘에서 복받쳐 흘러 나왔다.
내 블라우스에서 브래지어, 팬티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발가벗긴 남자가 소파에 반쯤 기댄 자세로 나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입술을 내 젖가슴에 댔다.
‘안돼, 이런 자식에게 어처구니없이 이렇게 당해 버릴 순 없어.’
마음 한켠에서 끊임없이 안타까운 목소리 하나가 발버둥을 쳤지만 한번 폭력에 주눅든 몸이 더 큰 두려움으로 그 목소리를 억눌렀다.
남자는 축 늘어진 내 몸을 이제는 자유로이 유린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포자기 상태에서 입술을 악물고 어서 빨리 이 악몽같은 순간이 지나 가기만을 고대했다. 이 치욕스런 순간이 꿈결처럼 아무런 흔적없이 지나쳐 버리기를. 그래서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단지 악몽에 가위 눌렸었더라는 기억만으로 잊어 버릴 수 있게 되기를.
그런 부질없는 내 소망을 자각시키기라도 하듯 남자는 집요하게 내 젖가슴을 애무해 댔다. 남자의 탐욕스런 입술과 끈끈한 혓바닥은 이것이 꿈이 아니고 현실이라고 끊임없이 내 오감을 일깨웠다.
한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다른 한손으로는 입술과 함께 내 젖가슴을 핥고 빨던 남자가 이윽고 한숨을 몰아쉬더니 젖가슴 쪽의 손을 뻗어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아, 아앗.”
나는 나도 모르게 다리를 움츠렸다.
“너 맞고 할래?”
어깨를 감쌌던 손으로 내 턱을 힘주어 움켜쥐며 남자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금방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만 같은 험한 얼굴이었다.
“아, 아뇨.”
나도 모르게 그런 대답이 튀어 나오며 다리의 힘이 풀렸다.
남자는 만족한 듯이 다시 내 허벅지 사이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남자의 손길은 내 부끄러운 그곳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러면서도 입술은 여전히 내 젖가슴에 머물러 있었다. 아예 차분히 즐기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남자는 갖은 기교를 동원해 내 반응을 이끌어 내려고 애를 썼다. 젖꼭지를 살살 깨물었다가는 혀로 부드럽게 핥기도 하고 전체를 삼킬 것처럼 강하게 빨아들이기도 하면서.
‘이것은 전혀 내 뜻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네가 아무리 나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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