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제와의 약속 (1부)
2018.04.14 19:54
처제와의 약속 (1부)
“대학 붙으면 너한테 더 좋은 거지 또 무슨 소원까지 들어 달래?”
“아이 참, 선생님이 약속해주면 더 열심히 공부할 것 같으니까 그러는 거잖아요. 제가 잘 되길 바라신다면서 그런 것도 못해주세요?”
“참 나…… 그래. 가고 싶은 대학 붙기만 해. 까짓 거 들어줄 테니까. 대신 정말 열심히 해야 한다. 꼭 대학 가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네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최선을 다하란 말이야. 알겠지?”
“히히. 알았어요, 선생님. 암튼 약속한 거 꼭 기억하셔야 해요. 잊으면 안 돼요.”
별 생각도 없이 나는 미희에게 그런 약속을 했다. 그저 나는 담임으로서 미희가 꼭 원하는 바를 이루기만을 바랐을 뿐이었다. 비단 미희뿐만이 아니라 내가 맡은 아이들이 하나라도 더 잘될 수 있다면 그런 약속쯤 얼마든지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미희는 내게 그런 약속을 얻어낸 이후로 틈만 나면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며 나를 상기시키곤 했다. 평소에도 불쑥불쑥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 것을 잊지 말라며 강조를 해댔기에 나는 그 약속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그쯤 되니 나는 솔직히 미희가 말한 그 소원이 대체 뭘까 갈수록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러던 미희가 겨울이 지나갈 무렵, 정말로 합격통지서를 당당히 손에 들고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저 맛있는 거 사 주세요!”
“맛있는 거?”
“네. 저는 오므라이스 좋아해요.”
생각보다는 소박한 소원이었다. 그동안 혼자 궁금해 했던 내가 오히려 김이 빠질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그 나이에 어울리는 순수함처럼 느껴져 왠지 귀엽기도 했다.
“알았어. 그 정도야 뭐.”
나는 미희를 시내로 데려가 좋아하는 음식을 이것저것 사 주었다. 함께 밥을 먹는 동안 대학에 가서도 열심히 공부하라는 그런 이야기들을 줄곧 늘어놓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미희는 그 때 내 소매를 잡아끌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저 아직 소원 안 끝났는데요.”
“응?”
“제 소원은 선생님이 제 소원 100가지를 들어주는 거거든요. 히히, 그러니까 이제 겨우 하나가 끝났을 뿐이에요.”
“나 참…… 이 녀석이 자기 담임을 가지고 놀려 드네. 그래, 다음 소원은 또 뭔데?”
“같이 영화 보러 가요!”
결국 그 날 미희는 그런 억지를 핑계로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시고, 거리를 거닐고…… 해가 질 무렵까지 시내 이곳저곳을 쏘다니고 나서야 나는 미희를 집 앞까지 바래다줄 수 있었다.
“선생님, 오늘 데이트해서 너무너무 재밌었어요. 선생님도 좋으셨어요?”
“그래, 선생님도 재밌었어. 얼른 들어가렴.”
미희는 제법 맹랑하게 표현을 했지만, 나는 미희와 보낸 그 시간을 제자의 합격을 축하하는 의미로만 여기고 싶었기에 별다른 이야기를 더 하지 않았다. 왠지 미희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한참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너무 욕심이 많아서 죄송해요. 그런데 정말 마지막으로 딱 한 가지만 더 들어주시면 좋겠어요.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한 소원이거든요.”
“뭔데?”
“저 이제 수능도 봤고……, 곧 성인이잖아요.”
“으응. 그렇지”
미희는 당돌하게도 내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그 토끼 같은 눈망울을 깜빡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선생님이랑 애인 사이하면 안 돼요?”
*
시간이 많이 흘러서 미희는 내 처제가 되었다. 기억 속 어딘가에 귀엽고 순수한 학생으로 간직해두었던 그 아이가 연인의 동생으로서 처음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비로소 아내에게서 줄곧 느껴왔던 그 익숙한 느낌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내와 내가 결혼하던 날, 처제는 오지 않았다. 몸이 많이 아팠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혹시나 처제가 아직도 어린 시절의 감정을 간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신경을 쓰기도 했지만 내 걱정과는 다르게 아내와 결혼한 이후 처제는 무척 살갑게 나를 대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옛날의 기억은 희미한 추억거리로 잊혀져갔다.
처제는 언니에게 나를 고교 시절의 선생님이라고만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면 아내는 연애시절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한 적이 없었다. 동생 이야기를 내게 조금만 했더라면 쉽게 알 수도 있었을 텐데……. 아마도 불우한 집안 환경을 내게 밝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야, 야, 최민수. 오늘은 진짜 뿌리 뽑힐 때까지 노는 거야. 알겠지? 너 인마, 오늘도 일찍 들어가면 재미없어.”
“알았어, 알았어. 그렇다고 너무 늦게 들어가는 건 안 돼. 와이프가 다음 주부터 출장이라 주말 동안 이것저것 도와줘야한다고.”
동식이의 시끄러운 술주정에 나는 상념에서 깨었다. 평소 술 마시고 노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 아닌지라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불알친구의 진급 기념인데 오늘만큼은 동식이 녀석의 기분을 좀 맞춰줘야겠다 싶었다.
“뭐? 제수씨는 또 출장이야?”
“그쪽 일이 다 그렇지 뭐.”
“야, 한창 지지고 볶아도 모자랄 판에 그렇게 제수씨 출장이 잦아서야 어디 남편 노릇이나 제대로 하겠어?”
“어쩌겠냐고. 그것도 다 일인데……”
외국계 기업에 근무하는 아내는 늘 출장이 잦았다. 게다가 이번엔 기간도 한 달이 넘는 장기출장이었기 때문에 다음 주부터 또 독수공방해야할 생각을 하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아내도 좋아서 출장을 가는 것은 아닐 테니 뭐라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없었다.
“제수씨 일에도 좀 여유가 생겨야 아이도 가질 텐데. 이제 슬슬 첫째 갖고 싶을 때 되지 않았어?”
“됐어. 골치 아픈 얘기 그만해. 술이나 먹자.”
“좋아, 좋아. 이런 날에 괜한 소리 늘어놓을 필요 없지. 야, 2차는 좋은 데 가서 마실까?”
“좋은 데라니?”
“형님 믿고 따라와.”
동식이는 이미 삼겹살에 소주 몇 병으로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얼굴이었지만 호기롭게 앞장서서 나를 이끌었다. 놀기 좋아하는 동식이가 좋은 데라고 부를 만한 곳이 어디일지는 대충 짐작이 가서 조금은 망설여졌다. 그래도 그 날은 그렇게 무작정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이런 데도 와주고 그래야지.”
“야, 난 이런 데는 좀 그래.”
“왜? 뭐가 문젠데?”
“나 학교 선생이야, 이 자식아. 선생이 여대생 바에서 여자들 끼고 술 먹는 게 정상이냐?”
“얌마, 너 선생이기 이전에 내 불알친구잖아. 내가 드디어 만년 대리 탈출을 했다는데 오늘만큼은 내 기분 좀 맞춰줘야 하는 거 아니냐?”
“아무리 그래도……”
“괜찮아, 자식아! 여기 네 동네 주변도 아닌데 누가 보기라도 할까봐 그래?”
사실 내가 그렇게까지 금욕주의적인 삶을 지향하는 인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나 동식이나 버젓이 와이프가 있는데 이런 곳에 들어간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너도 어차피 제수씨가 자주 집 비우고 그래서 요새 적적했잖아. 우리가 뭐 바람을 피자는 것도 아니고 기분전환이나 한번 하자는 건데 뭐가 나빠? 여기 네가 생각하는 그런 지저분한 곳도 아니야. 그냥 들어가서 애들이랑 재밌게 떠들고 마시다가 나오면 돼.”
녀석은 항상 얄밉게도 내 속마음을 집어내며 유혹을 해온다. 고지식한 내 성격은 동식이와 좀체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 대신 동식이는 어렸을 적부터 나를 이런 식으로 꼬드기는 일에 무척 능했다.
“자, 자, 빨리 들어가자. 대신 내가 쏜다. 오케이?”
“어어…… 야, 잠깐만.”
나는 그렇게 동식이의 손에 이끌려, 요란하게 반짝이는 유리문을 훌쩍 넘고 말았다.
*
“안녕하세요?”
자리를 잡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여자 둘이 커튼을 젖히고 들어왔다. 사근사근하고 앳된 목소리에 나는 헛기침을 했지만 동식이는 헤벌쭉 웃음을 지었다.
“이리와 앉아요.”
“어머, 술 비싼 거 시키셨네. 돈 많으신가 봐요?”
“하하! 좋은 날이라 이 정도는 마셔주고 싶어서.”
여기서 파는 술들 중 무엇 하나 비싸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젊고 예쁜 여대생이 따라주는 술을 비싼 돈 주고 먹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가 갔지만, 암만 그래도 나는 이 분위기가 편치 않았다. 내가 애매하게 시선을 돌린 채 구석에서 위스키만 홀짝이고 있으니 동식이와 재잘거리던 그 여자가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손님은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아보이세요? 좋은 날이라면서.”
“…….”
“제가 맘에 안 드세요? 저쪽 분이랑 파트너 바꿔드릴까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저 술만 홀짝였다. 옆에 앉은 여자는 내 눈치를 살피더니, 맞은편 동식이 옆자리에 앉은 여자에게 손짓을 했다.
“얘, 미영아. 손님이 내가 맘에 안 드시나봐. 나랑 바꿀래?”
애초에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맞은편 여자에게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나는 조금 민망해졌다. 재미도 없는 내 옆자리에 앉기는 싫다는 걸까? 멋쩍어서 그런지 괜히 눈치가 보이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곁눈질로 맞은편 여자를 흘끗 바라보았다.
“…….”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는 그 여자가 아까부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그대로 굳어져버렸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고, 마시던 위스키가 목구멍에 걸려 목소리 대신 기침세례가 튀어나왔다.
“쿨럭, 쿨럭!”
“괜찮으세요?”
옆에 앉은 여자가 등을 두드리는 손길을 무심코 뿌리쳤다. 나는 얼간이처럼 벌떡 일어서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다.
‘처제가……’
처제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속물적이게도 그 순간 나는 의문보다는 불안을 느꼈다. 처제가 왜 이런 곳에 있는지에 대한 의문보다도, 혹시나 처제가 아내에게 이 사실을 얘기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이 더 컸다.
‘바보같이……’
그리고 그 후엔 부끄러움이 물밀 듯이 밀어닥쳤다. 처제에게 있어 나는 형부이자, 어린 시절의 담임선생이기도 했다. 그런 내가 유흥업소에 들락거리는 꼴을 보고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게다가 그 자리에서 아무런 대처도 못하고 죄인처럼 도망쳐버리기까지……
“나가자.”
나는 룸으로 돌아가 다짜고짜 동식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녀석은 신이 난 얼굴로 처제의 어깨에 한 팔을 두르고는 잔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울컥 화나기도 했고, 또 가슴이 덜컥하기도 했다.
처제와 내 시선이 한 번 더 마주쳤지만 나는 애써 그 눈길을 피했다. 처제도 내게 구태여 아는 척을 해오지 않았다. 왜 나는 그 상황에서 처제에게 당당하게 굴지 못했을까? 아마도 치부를 보인 것 같은 극심한 자괴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보통의 형부와 처제 사이였다면 그 자리에서 처제에게 입단속을 시키거나, 서로 못 본 걸로 하자며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처제이기 이전에 내가 가르쳤던 제자, 윤미희였으니…….
“야, 가긴 어딜 가?”
“일단 좀 나가자고. 어?”
나는 거의 막무가내로 동식이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즐거움을 방해받은 동식이는 바깥으로 나오고 나서 있는 대로 성질을 냈다.
“이 자식 이거 왜 이래!”
“우리 다른데 가자.”
“뭐?”
“내가 낼 테니까, 우리 다른데 가서 마시자고.”
“왜 그래…… 난 방금 그 아가씨 맘에 들었는데. 야, 다른 데 가도 그만한 애들 잘 없어.”
“너무 불편해서 그런다. 부탁 좀 하자, 어?”
“…….”
절박하게 부탁하는 내 모습에서 동식이도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는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긴 했지만 입을 다물어주었다. 나는 서둘러 카운터로 돌아가 계산을 했다. 채 5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자리의 술값으로 수십만 원이 빠져나갔다.
“미영 씨, 보아 씨, 손님들 가신대. 나와서 인사드려.”
“아, 아니, 괜찮아요.”
아마도 처제는 이곳에서 미영이란 이름을 쓰는 것 같았다. 나는 카운터의 여직원이 얼른 계산을 하고 카드나 내놓길 바랐지만 그녀는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녀가 룸에 대고 부르자마자 안쪽에서 두 여자가 걸어 나왔다.
“…….”
세 번째로 처제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끝내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나도 그랬지만, 시선을 피하는 것은 처제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라도 거기서 처제가 먼저 아는 체를 해줬다면 나도 조금은 마음이 편했을까? 내가 침묵해서 그런지 처제도 끝까지 침묵을 지켰고, 내가 문을 나설 때까지 결국 우리는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안녕히 가세요.”
그 정중한 목소리 한 마디를 들었을 뿐이었다.
*
“휴……. 한 달이나 되다보니 챙길게 많네.”
아내는 분주하게 캐리어 속으로 짐들을 정리해 넣었다. 나는 아내의 푸념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멍하니 딴 생각에 빠져있었다. 어제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전전긍긍하다 잠이 들었고, 아침에 눈을 뜬 이후 내가 가장 먼저 확인했던 것은 아내의 기색이었다. 혹시라도 간밤에 처제에게서 무슨 얘기를 들은 건 아닌지…… 그게 가장 먼저 신경 쓰였다.
“여보.”
“…….”
“여보!”
“어, 어.”
아내가 코앞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아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야, 왜 그렇게 넋 놓고 있어?”
“아, 아니야……”
“이것 좀 도와줘.”
“응.”
꽤 멀리까지 가는 해외출장이라 기후 차가 커서 깊숙이 쌓아두었던 계절 옷들을 꺼내야만 했다. 나는 주섬주섬 박스들을 꺼내서 아내가 입을 만한 것들을 차곡차곡 바닥에 쌓았다. 아내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다가와 나를 슬며시 뒤에서 껴안았다.
“왜?”
“미안해, 여보.”
“뭐가?”
“내가 매번 출장으로 집 비우고 그래서 많이 쓸쓸하지? 나랑 사는 거 외롭지 않아?”
어제 동식이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지만 불평을 해봤자 득이 될 것이 없었다.
“왜 그런 말을 해.”
“미안해서 그러지.”
“대신 출장 다녀와서 나한테 잘해주면 되잖아.”
“호호……”
어제 있었던 일로 가책이 있었기 때문인지 유난스러울 만큼 나는 대범하게 반응했다. 아내는 그런 내게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껴안은 손을 여전히 풀지 않은 채 아내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가기 전에도 잘해주고 싶은데?”
가슴팍을 안았던 손이 슬금슬금 밑으로 내려왔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아내가 자꾸 은근히 신호를 주었는데 마음이 복잡해서 그냥 무시하고 자버렸던 것 같다. 혹시 서운했을까?
“뭐야……. 일하다말고.”
“호호.”
솔직한 심정으로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뿌리칠 수도 없었다. 지금 아내를 서운하게 만들었다간 감정이 상한 채로 출장길에 오르게 될 테니.
“으음……”
하다못해 밤까지 아내가 기다려주길 바랐지만 그녀는 어쩐 일로 혼자 페달을 밟기 시작했는지 내 귓불을 잘근잘근 물어왔다. 복잡한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나도 적당히 달아오르는 척 연기하며 아내의 몸을 더듬었다. 그런데 그 순간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아…… 뭐야.”
딩동, 하는 소리에 아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툴툴거렸다. 아내에겐 무척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내심 잘됐다 생각하며 얼른 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을 열어젖힌 순간 안도했던 마음도 잊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처, 처제.”
“안녕하세요, 형부.”
처제는 여느 때처럼 생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멍한 얼굴로 내가 문을 닫지도 못하고 서 있으려니, 안쪽에서 아내가 성큼 걸어 나오며 동생에게 역정을 부렸다.
“계집애 진짜…… 눈치도 없이.”
“왜? 뭐?”
“됐다.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은. 언니 또 출장 간다기에 얼굴 한번 봐두려고 왔지.”
“치. 그럼 짐 챙기는 거나 좀 도와.”
그렇게 얼떨결에 처제까지 끼어들었다. 셋이서 일을 하니 준비가 생각보다 빨리 끝났고 뒷정리도 금방 마무리되었다. 거실바닥이 말끔하게 치워지고 나서 아내는 우리를 돌아보며 넌지시 물었다.
“밖에 나가서 저녁 먹을까?”
“콜!”
처제는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었다. 어렸을 적의 모습이 아직 고스란히 처제에게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처제를 떠올릴수록 더욱 마음이 불편해졌다. 언니에게 어제 일을 이야기할 생각은 없는 걸까?
우리는 바깥으로 나와 식사를 하고, 호프집으로 옮겨 간단하게 맥주도 한잔 했다. 자리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계속 처제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에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지만, 다행히 처제에게는 별다른 의도가 없어보였다. 그래서 나도 갈수록 긴장이 풀렸다.
“언니, 그거 알아?”
“뭐?”
하지만 처제는 거의 끝에 가서 불쑥 기습을 가해왔다.
“형부가 있잖아.”
“처, 처제.”
은근히 안심하고 있던 나는 그야말로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당황하고 말았다. 처제의 입을 막기라도 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그 고민보다 이어지는 처제의 뒷말이 빨랐다.
“나 고등학교 다닐 때 엄청 인기 많았던 거 알아?”
“뭐? 네 형부가?”
“…….”
우려했던 폭로는 아니었기에 긴장이 탁 풀렸다. 처제가 지금 내 당황하는 속내를 읽고 있는 것 같아 무척 부끄럽기도 했다. 테이블 너머로 처제와 눈이 마주쳤는데, 어제와는 다르게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토끼 같아 보였던 그 커다란 눈이 지금은 어쩐지 고양이처럼 느껴졌다.
“응. 형부 좋아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오호, 그래? 뭐 그래봤자 지금은 인기 없을걸?”
“왜?”
“이제는 총각 선생님도 아니잖아.”
“에이, 그거야 모르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흘러가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처제는 그렇게 나를 안심시켜놓고는 또 엉뚱한 공격을 해왔다.
“사실 나도 그 때 형부 되게 좋아했었다?”
“뭐? 호호호.”
나는 당황해서 헛기침을 해버렸지만 아내는 시답잖은 유머라도 들은 것처럼 피식 웃어넘겼다. 처제는 무슨 생각인지 눈웃음을 지으며 언니의 반응을 재촉했다.
“왜? 아무렇지도 않아?”
“풋, 그 나이 때 애들이 다 그렇지 뭐.”
채 스무 살도 안 되었을 나이의 순수한 풋사랑은 그 누구의 눈에도 마냥 귀엽게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그 때도 다들 그렇게 여겼고, 심지어 나조차 그랬다.
“그래서? 지금도 네 형부가 좋냐?”
아내는 오히려 장난기까지 담아서 처제에게 되물었다. 처제는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어린 시절의 귀여웠던 모습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애매한 웃음이었다.
“글쎄? 형부 같은 남자, 나쁠 건 없지 뭐.”
“호호. 얘가 외로운가보네? 당신 친구들 중에 괜찮은 남자 있으면 소개 좀 시켜줘 봐.”
“아, 그건 싫어. 형부 친구들 왠지 좀 별로일 것 같아.”
“왜? 네가 본적이라도 있어?”
“얼마 전에 형부 친구 한 사람 봤는데, 영 아니더라고. 호호.”
“…….”
뼈 있는 한마디에 나는 움츠러들었다. 처제는 아내 모르게 내 폐부를 찔러오고 있었다.
“이것만 마시고 가자. 컨디션 조절 해야지.”
“헤헤, 아쉽다.”
“나 없는 동안 집에 자주 와서 네 형부 좀 챙기고 그래라. 이 인간은 차려주지 않으면 밥도 제대로 안 챙겨먹으니까.”
“정말? 의외다. 형부 부지런할 줄 알았는데.”
계산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아내와 처제는 자잘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저 옆에서 묵묵히 듣기만 했다. 아내가 옆구리를 쿡 찌르며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오늘 왜 이렇게 말이 없어?”
“음…… 좀 피곤해서.”
거기서 처제가 불쑥 끼어들었다.
“형부! 저 좀 데려다주시면 안 돼요?”
“야, 그냥 택시 타고 가. 네 형부 피곤하대.”
“밤에 택시 타는 거 무섭단 말이야. 나 오랜만에 형부 차에 타보고 싶어. 응? 응?”
“얘가 왜 이래?”
하지만 나는 문득 처제와 둘만의 시간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덥석 승낙하고 나섰다.
“그래. 멀지도 않은데 차로 데려다주고 올게. 당신은 쉬고 있어.”
“에이, 참…… 그럼 빨리 다녀와.”
아까 못한 것을 계속하고 싶었기 때문인지, 아내 역시 둘만의 시간을 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눈치껏 처신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일부러 아내를 집으로 들여보내고 처제를 차에 태웠다. 보조석에 오를 때까지 처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저기, 처제…… 있잖아.”
“네?”
결국 먼저 이야기를 꺼낸 쪽은 나였다.
“어제 말이야…… 우리 거기서 만난 거.”
“호호, 걱정 마요. 언니한테 얘기 안할게요.”
“으, 응?”
처제는 내가 홀로 전전긍긍했던 것이 너무도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가볍게 대꾸했다. 혹시 내가 창피할까봐 연기를 해주는 건가 싶어 표정을 살폈지만 처제는 정말로 그 문제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실망스럽지 않았어? 형부란 사람이 그런 데나 들락거리고…….”
“형부. 그런 데서 일을 하다보면요, 자연스럽게 손님들 사이즈 파악이 대충 되거든요? 어제 분위기를 보니까 옆의 친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끌려온 것 같던데. 아니에요?”
“…….”
한심하게도 나는 옛날 제자의 마음 씀씀이에 배려 받은 선생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전 이해해요. 남자들이 가끔 그렇게 놀고 싶어질 수도 있죠. 뭐, 그렇다고 안마방이나 룸살롱 같은 데를 가셨다면 좀 심각하겠지만. 호호.”
아무렇지 않게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처제가 낯설어보였다. 내가 알고 있던 처제의 모습이 아니었고, 오래전 기억 속에 남아있는 윤미희의 모습은 더더욱 아니었다.
“언제부터…… 그런 데서 일하게 된 거야?”
“단기로 잠깐 뛰고 있을 뿐이에요. 등록금 벌어야죠.”
처가의 빈곤한 살림이야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돌이켜보면 그것은 미희의 담임이었을 때부터 알아왔던 사실이었다. 미희는 집이 가난했다. 수학여행을 갈 돈이 없어서 내가 대신 내주었던 기억도 있었다.
“언니는 알고 있어?”
“몰라요. 대충 알바 한다고만 했어요. 그러니까 형부도 비밀로 해주세요. 서로 비밀로 하면 공평하겠죠?”
바보같이 제자에게 약점이라도 잡힌 것처럼 굴고 있는 내가 싫었다. 나름대로 나를 배려해준 처제의 마음씨에는 고마웠지만 형부로서, 그리고 선생으로서 할 말은 해야만 했다.
“처제…… 그런 일 그만두면 안 될까?”
“왜요?”
“좀 그렇잖아. 다른 일 해도 되는데 왜 굳이 술집에서 일을 해.”
“이것만큼 편하게 돈 벌수 있는 일도 별로 없어요. 앉아서 웃고 떠들기만 하면 되는 걸요.”
처제는…… 아니, 미희는 고교생 무렵부터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대체 왜 나를 좋아했나 싶을 정도였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미모에 더욱 물이 올랐는지 내 눈으로 보기에도 객관적으로 처제는 정말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래서 더 문제였다. 나도 남자인 이상 그곳에 오는 남자들이 처제에게 어떤 마음을 품을지 안 봐도 뻔히 알 수 있었다. 노골적인 유흥업소가 아니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술집인 만큼 지저분한 추파를 던지는 손님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처제가 일하도록 두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어떤 손님들이 올지 모르고…… 아무튼 위험해. 그러다 이상한 사람에게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호호호. 형부. 저도 이제 어린애 아니에요. 제 앞가림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아니, 그건 알지만……”
자못 심각한 내 분위기와는 달리 처제는 까르르 웃었다. 물론 웃는 얼굴로 얘기하긴 했지만 그 말속에는 ‘참견하지 말라’는 뜻이 숨어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따끔하게 야단이라도 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형부가 걱정하지 않아도 오래 일할 생각은 없어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
뭔가 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느새 처가 앞에 도착해있었다. 처제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아파트 안으로 점점 멀어져갔다. 나는 고민을 거듭하다 끝내 문을 벌컥 열고 그 뒤를 쫓아 달려갔다.
“처제!”
뚜벅뚜벅 걸어가던 처제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암만 생각해도 모른 체 할 수가 없어서…… 등록금은 내가 아내 모르게 조금 보태줄 테니까, 거기서 일하는 거 그만 둬.”
“왜 그러세요, 형부.”
“윤미희!”
“…….”
내가 이름을 부르자 처제는 조금 놀랐는지 옛날처럼 토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는 내가 가르쳤던 제자야. 너는 이제 나를 선생보다는 형부로 생각하고 있겠지만 난 내가 가르쳤던 애들 하나하나 전부 언제까지고 내 소중한 제자라고 생각한다. 학교를 졸업했어도 마찬가지야. 난 네가 엇나가는 꼴 두고 보기가 힘들다.”
“…….”
때마침 불어온 바람 한 줄기에 추억이 묻어있었는지, 왠지 그 순간 정말로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희도 같은 기분을 느꼈던 걸까?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미희가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그 말…… 참 듣기 좋네요. 선생님. 호호.”
“미희야.”
집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미희는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미희를 마주보니 새삼 그녀가 얼마나 자랐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하실래요?”
“뭘……?”
“일하는 거 그만둘 테니 대신 제 소원 하나 들어주세요.”
소원……. 어딘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어감이었다. 하지만 나는 모르는 척 되물었다.
“소원이라니?”
“옛날 생각나게 해드릴까요?”
미희가 한걸음 더 성큼 다가왔다. 얼굴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고양이처럼 느껴지는 그 눈매가 가늘게 휘었다.
“언니 출장이 한 달이라고 했나요?”
“그건 왜……?”
미희는…… 아니, 처제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여태껏 내가 단 한번도 적이 없는 고혹적인 미소였다.
“그 한 달 동안 제 애인이 되어주실래요?”
“대학 붙으면 너한테 더 좋은 거지 또 무슨 소원까지 들어 달래?”
“아이 참, 선생님이 약속해주면 더 열심히 공부할 것 같으니까 그러는 거잖아요. 제가 잘 되길 바라신다면서 그런 것도 못해주세요?”
“참 나…… 그래. 가고 싶은 대학 붙기만 해. 까짓 거 들어줄 테니까. 대신 정말 열심히 해야 한다. 꼭 대학 가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네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최선을 다하란 말이야. 알겠지?”
“히히. 알았어요, 선생님. 암튼 약속한 거 꼭 기억하셔야 해요. 잊으면 안 돼요.”
별 생각도 없이 나는 미희에게 그런 약속을 했다. 그저 나는 담임으로서 미희가 꼭 원하는 바를 이루기만을 바랐을 뿐이었다. 비단 미희뿐만이 아니라 내가 맡은 아이들이 하나라도 더 잘될 수 있다면 그런 약속쯤 얼마든지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미희는 내게 그런 약속을 얻어낸 이후로 틈만 나면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며 나를 상기시키곤 했다. 평소에도 불쑥불쑥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 것을 잊지 말라며 강조를 해댔기에 나는 그 약속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그쯤 되니 나는 솔직히 미희가 말한 그 소원이 대체 뭘까 갈수록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러던 미희가 겨울이 지나갈 무렵, 정말로 합격통지서를 당당히 손에 들고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저 맛있는 거 사 주세요!”
“맛있는 거?”
“네. 저는 오므라이스 좋아해요.”
생각보다는 소박한 소원이었다. 그동안 혼자 궁금해 했던 내가 오히려 김이 빠질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그 나이에 어울리는 순수함처럼 느껴져 왠지 귀엽기도 했다.
“알았어. 그 정도야 뭐.”
나는 미희를 시내로 데려가 좋아하는 음식을 이것저것 사 주었다. 함께 밥을 먹는 동안 대학에 가서도 열심히 공부하라는 그런 이야기들을 줄곧 늘어놓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미희는 그 때 내 소매를 잡아끌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저 아직 소원 안 끝났는데요.”
“응?”
“제 소원은 선생님이 제 소원 100가지를 들어주는 거거든요. 히히, 그러니까 이제 겨우 하나가 끝났을 뿐이에요.”
“나 참…… 이 녀석이 자기 담임을 가지고 놀려 드네. 그래, 다음 소원은 또 뭔데?”
“같이 영화 보러 가요!”
결국 그 날 미희는 그런 억지를 핑계로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시고, 거리를 거닐고…… 해가 질 무렵까지 시내 이곳저곳을 쏘다니고 나서야 나는 미희를 집 앞까지 바래다줄 수 있었다.
“선생님, 오늘 데이트해서 너무너무 재밌었어요. 선생님도 좋으셨어요?”
“그래, 선생님도 재밌었어. 얼른 들어가렴.”
미희는 제법 맹랑하게 표현을 했지만, 나는 미희와 보낸 그 시간을 제자의 합격을 축하하는 의미로만 여기고 싶었기에 별다른 이야기를 더 하지 않았다. 왠지 미희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한참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너무 욕심이 많아서 죄송해요. 그런데 정말 마지막으로 딱 한 가지만 더 들어주시면 좋겠어요.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한 소원이거든요.”
“뭔데?”
“저 이제 수능도 봤고……, 곧 성인이잖아요.”
“으응. 그렇지”
미희는 당돌하게도 내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그 토끼 같은 눈망울을 깜빡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선생님이랑 애인 사이하면 안 돼요?”
*
시간이 많이 흘러서 미희는 내 처제가 되었다. 기억 속 어딘가에 귀엽고 순수한 학생으로 간직해두었던 그 아이가 연인의 동생으로서 처음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비로소 아내에게서 줄곧 느껴왔던 그 익숙한 느낌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내와 내가 결혼하던 날, 처제는 오지 않았다. 몸이 많이 아팠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혹시나 처제가 아직도 어린 시절의 감정을 간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신경을 쓰기도 했지만 내 걱정과는 다르게 아내와 결혼한 이후 처제는 무척 살갑게 나를 대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옛날의 기억은 희미한 추억거리로 잊혀져갔다.
처제는 언니에게 나를 고교 시절의 선생님이라고만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면 아내는 연애시절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한 적이 없었다. 동생 이야기를 내게 조금만 했더라면 쉽게 알 수도 있었을 텐데……. 아마도 불우한 집안 환경을 내게 밝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야, 야, 최민수. 오늘은 진짜 뿌리 뽑힐 때까지 노는 거야. 알겠지? 너 인마, 오늘도 일찍 들어가면 재미없어.”
“알았어, 알았어. 그렇다고 너무 늦게 들어가는 건 안 돼. 와이프가 다음 주부터 출장이라 주말 동안 이것저것 도와줘야한다고.”
동식이의 시끄러운 술주정에 나는 상념에서 깨었다. 평소 술 마시고 노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 아닌지라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불알친구의 진급 기념인데 오늘만큼은 동식이 녀석의 기분을 좀 맞춰줘야겠다 싶었다.
“뭐? 제수씨는 또 출장이야?”
“그쪽 일이 다 그렇지 뭐.”
“야, 한창 지지고 볶아도 모자랄 판에 그렇게 제수씨 출장이 잦아서야 어디 남편 노릇이나 제대로 하겠어?”
“어쩌겠냐고. 그것도 다 일인데……”
외국계 기업에 근무하는 아내는 늘 출장이 잦았다. 게다가 이번엔 기간도 한 달이 넘는 장기출장이었기 때문에 다음 주부터 또 독수공방해야할 생각을 하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아내도 좋아서 출장을 가는 것은 아닐 테니 뭐라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없었다.
“제수씨 일에도 좀 여유가 생겨야 아이도 가질 텐데. 이제 슬슬 첫째 갖고 싶을 때 되지 않았어?”
“됐어. 골치 아픈 얘기 그만해. 술이나 먹자.”
“좋아, 좋아. 이런 날에 괜한 소리 늘어놓을 필요 없지. 야, 2차는 좋은 데 가서 마실까?”
“좋은 데라니?”
“형님 믿고 따라와.”
동식이는 이미 삼겹살에 소주 몇 병으로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얼굴이었지만 호기롭게 앞장서서 나를 이끌었다. 놀기 좋아하는 동식이가 좋은 데라고 부를 만한 곳이 어디일지는 대충 짐작이 가서 조금은 망설여졌다. 그래도 그 날은 그렇게 무작정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이런 데도 와주고 그래야지.”
“야, 난 이런 데는 좀 그래.”
“왜? 뭐가 문젠데?”
“나 학교 선생이야, 이 자식아. 선생이 여대생 바에서 여자들 끼고 술 먹는 게 정상이냐?”
“얌마, 너 선생이기 이전에 내 불알친구잖아. 내가 드디어 만년 대리 탈출을 했다는데 오늘만큼은 내 기분 좀 맞춰줘야 하는 거 아니냐?”
“아무리 그래도……”
“괜찮아, 자식아! 여기 네 동네 주변도 아닌데 누가 보기라도 할까봐 그래?”
사실 내가 그렇게까지 금욕주의적인 삶을 지향하는 인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나 동식이나 버젓이 와이프가 있는데 이런 곳에 들어간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너도 어차피 제수씨가 자주 집 비우고 그래서 요새 적적했잖아. 우리가 뭐 바람을 피자는 것도 아니고 기분전환이나 한번 하자는 건데 뭐가 나빠? 여기 네가 생각하는 그런 지저분한 곳도 아니야. 그냥 들어가서 애들이랑 재밌게 떠들고 마시다가 나오면 돼.”
녀석은 항상 얄밉게도 내 속마음을 집어내며 유혹을 해온다. 고지식한 내 성격은 동식이와 좀체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 대신 동식이는 어렸을 적부터 나를 이런 식으로 꼬드기는 일에 무척 능했다.
“자, 자, 빨리 들어가자. 대신 내가 쏜다. 오케이?”
“어어…… 야, 잠깐만.”
나는 그렇게 동식이의 손에 이끌려, 요란하게 반짝이는 유리문을 훌쩍 넘고 말았다.
*
“안녕하세요?”
자리를 잡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여자 둘이 커튼을 젖히고 들어왔다. 사근사근하고 앳된 목소리에 나는 헛기침을 했지만 동식이는 헤벌쭉 웃음을 지었다.
“이리와 앉아요.”
“어머, 술 비싼 거 시키셨네. 돈 많으신가 봐요?”
“하하! 좋은 날이라 이 정도는 마셔주고 싶어서.”
여기서 파는 술들 중 무엇 하나 비싸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젊고 예쁜 여대생이 따라주는 술을 비싼 돈 주고 먹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가 갔지만, 암만 그래도 나는 이 분위기가 편치 않았다. 내가 애매하게 시선을 돌린 채 구석에서 위스키만 홀짝이고 있으니 동식이와 재잘거리던 그 여자가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손님은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아보이세요? 좋은 날이라면서.”
“…….”
“제가 맘에 안 드세요? 저쪽 분이랑 파트너 바꿔드릴까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저 술만 홀짝였다. 옆에 앉은 여자는 내 눈치를 살피더니, 맞은편 동식이 옆자리에 앉은 여자에게 손짓을 했다.
“얘, 미영아. 손님이 내가 맘에 안 드시나봐. 나랑 바꿀래?”
애초에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맞은편 여자에게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나는 조금 민망해졌다. 재미도 없는 내 옆자리에 앉기는 싫다는 걸까? 멋쩍어서 그런지 괜히 눈치가 보이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곁눈질로 맞은편 여자를 흘끗 바라보았다.
“…….”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는 그 여자가 아까부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그대로 굳어져버렸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고, 마시던 위스키가 목구멍에 걸려 목소리 대신 기침세례가 튀어나왔다.
“쿨럭, 쿨럭!”
“괜찮으세요?”
옆에 앉은 여자가 등을 두드리는 손길을 무심코 뿌리쳤다. 나는 얼간이처럼 벌떡 일어서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다.
‘처제가……’
처제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속물적이게도 그 순간 나는 의문보다는 불안을 느꼈다. 처제가 왜 이런 곳에 있는지에 대한 의문보다도, 혹시나 처제가 아내에게 이 사실을 얘기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이 더 컸다.
‘바보같이……’
그리고 그 후엔 부끄러움이 물밀 듯이 밀어닥쳤다. 처제에게 있어 나는 형부이자, 어린 시절의 담임선생이기도 했다. 그런 내가 유흥업소에 들락거리는 꼴을 보고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게다가 그 자리에서 아무런 대처도 못하고 죄인처럼 도망쳐버리기까지……
“나가자.”
나는 룸으로 돌아가 다짜고짜 동식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녀석은 신이 난 얼굴로 처제의 어깨에 한 팔을 두르고는 잔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울컥 화나기도 했고, 또 가슴이 덜컥하기도 했다.
처제와 내 시선이 한 번 더 마주쳤지만 나는 애써 그 눈길을 피했다. 처제도 내게 구태여 아는 척을 해오지 않았다. 왜 나는 그 상황에서 처제에게 당당하게 굴지 못했을까? 아마도 치부를 보인 것 같은 극심한 자괴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보통의 형부와 처제 사이였다면 그 자리에서 처제에게 입단속을 시키거나, 서로 못 본 걸로 하자며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처제이기 이전에 내가 가르쳤던 제자, 윤미희였으니…….
“야, 가긴 어딜 가?”
“일단 좀 나가자고. 어?”
나는 거의 막무가내로 동식이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즐거움을 방해받은 동식이는 바깥으로 나오고 나서 있는 대로 성질을 냈다.
“이 자식 이거 왜 이래!”
“우리 다른데 가자.”
“뭐?”
“내가 낼 테니까, 우리 다른데 가서 마시자고.”
“왜 그래…… 난 방금 그 아가씨 맘에 들었는데. 야, 다른 데 가도 그만한 애들 잘 없어.”
“너무 불편해서 그런다. 부탁 좀 하자, 어?”
“…….”
절박하게 부탁하는 내 모습에서 동식이도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는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긴 했지만 입을 다물어주었다. 나는 서둘러 카운터로 돌아가 계산을 했다. 채 5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자리의 술값으로 수십만 원이 빠져나갔다.
“미영 씨, 보아 씨, 손님들 가신대. 나와서 인사드려.”
“아, 아니, 괜찮아요.”
아마도 처제는 이곳에서 미영이란 이름을 쓰는 것 같았다. 나는 카운터의 여직원이 얼른 계산을 하고 카드나 내놓길 바랐지만 그녀는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녀가 룸에 대고 부르자마자 안쪽에서 두 여자가 걸어 나왔다.
“…….”
세 번째로 처제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끝내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나도 그랬지만, 시선을 피하는 것은 처제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라도 거기서 처제가 먼저 아는 체를 해줬다면 나도 조금은 마음이 편했을까? 내가 침묵해서 그런지 처제도 끝까지 침묵을 지켰고, 내가 문을 나설 때까지 결국 우리는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안녕히 가세요.”
그 정중한 목소리 한 마디를 들었을 뿐이었다.
*
“휴……. 한 달이나 되다보니 챙길게 많네.”
아내는 분주하게 캐리어 속으로 짐들을 정리해 넣었다. 나는 아내의 푸념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멍하니 딴 생각에 빠져있었다. 어제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전전긍긍하다 잠이 들었고, 아침에 눈을 뜬 이후 내가 가장 먼저 확인했던 것은 아내의 기색이었다. 혹시라도 간밤에 처제에게서 무슨 얘기를 들은 건 아닌지…… 그게 가장 먼저 신경 쓰였다.
“여보.”
“…….”
“여보!”
“어, 어.”
아내가 코앞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아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야, 왜 그렇게 넋 놓고 있어?”
“아, 아니야……”
“이것 좀 도와줘.”
“응.”
꽤 멀리까지 가는 해외출장이라 기후 차가 커서 깊숙이 쌓아두었던 계절 옷들을 꺼내야만 했다. 나는 주섬주섬 박스들을 꺼내서 아내가 입을 만한 것들을 차곡차곡 바닥에 쌓았다. 아내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다가와 나를 슬며시 뒤에서 껴안았다.
“왜?”
“미안해, 여보.”
“뭐가?”
“내가 매번 출장으로 집 비우고 그래서 많이 쓸쓸하지? 나랑 사는 거 외롭지 않아?”
어제 동식이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지만 불평을 해봤자 득이 될 것이 없었다.
“왜 그런 말을 해.”
“미안해서 그러지.”
“대신 출장 다녀와서 나한테 잘해주면 되잖아.”
“호호……”
어제 있었던 일로 가책이 있었기 때문인지 유난스러울 만큼 나는 대범하게 반응했다. 아내는 그런 내게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껴안은 손을 여전히 풀지 않은 채 아내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가기 전에도 잘해주고 싶은데?”
가슴팍을 안았던 손이 슬금슬금 밑으로 내려왔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아내가 자꾸 은근히 신호를 주었는데 마음이 복잡해서 그냥 무시하고 자버렸던 것 같다. 혹시 서운했을까?
“뭐야……. 일하다말고.”
“호호.”
솔직한 심정으로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뿌리칠 수도 없었다. 지금 아내를 서운하게 만들었다간 감정이 상한 채로 출장길에 오르게 될 테니.
“으음……”
하다못해 밤까지 아내가 기다려주길 바랐지만 그녀는 어쩐 일로 혼자 페달을 밟기 시작했는지 내 귓불을 잘근잘근 물어왔다. 복잡한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나도 적당히 달아오르는 척 연기하며 아내의 몸을 더듬었다. 그런데 그 순간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아…… 뭐야.”
딩동, 하는 소리에 아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툴툴거렸다. 아내에겐 무척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내심 잘됐다 생각하며 얼른 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을 열어젖힌 순간 안도했던 마음도 잊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처, 처제.”
“안녕하세요, 형부.”
처제는 여느 때처럼 생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멍한 얼굴로 내가 문을 닫지도 못하고 서 있으려니, 안쪽에서 아내가 성큼 걸어 나오며 동생에게 역정을 부렸다.
“계집애 진짜…… 눈치도 없이.”
“왜? 뭐?”
“됐다.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은. 언니 또 출장 간다기에 얼굴 한번 봐두려고 왔지.”
“치. 그럼 짐 챙기는 거나 좀 도와.”
그렇게 얼떨결에 처제까지 끼어들었다. 셋이서 일을 하니 준비가 생각보다 빨리 끝났고 뒷정리도 금방 마무리되었다. 거실바닥이 말끔하게 치워지고 나서 아내는 우리를 돌아보며 넌지시 물었다.
“밖에 나가서 저녁 먹을까?”
“콜!”
처제는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었다. 어렸을 적의 모습이 아직 고스란히 처제에게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처제를 떠올릴수록 더욱 마음이 불편해졌다. 언니에게 어제 일을 이야기할 생각은 없는 걸까?
우리는 바깥으로 나와 식사를 하고, 호프집으로 옮겨 간단하게 맥주도 한잔 했다. 자리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계속 처제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에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지만, 다행히 처제에게는 별다른 의도가 없어보였다. 그래서 나도 갈수록 긴장이 풀렸다.
“언니, 그거 알아?”
“뭐?”
하지만 처제는 거의 끝에 가서 불쑥 기습을 가해왔다.
“형부가 있잖아.”
“처, 처제.”
은근히 안심하고 있던 나는 그야말로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당황하고 말았다. 처제의 입을 막기라도 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그 고민보다 이어지는 처제의 뒷말이 빨랐다.
“나 고등학교 다닐 때 엄청 인기 많았던 거 알아?”
“뭐? 네 형부가?”
“…….”
우려했던 폭로는 아니었기에 긴장이 탁 풀렸다. 처제가 지금 내 당황하는 속내를 읽고 있는 것 같아 무척 부끄럽기도 했다. 테이블 너머로 처제와 눈이 마주쳤는데, 어제와는 다르게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토끼 같아 보였던 그 커다란 눈이 지금은 어쩐지 고양이처럼 느껴졌다.
“응. 형부 좋아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오호, 그래? 뭐 그래봤자 지금은 인기 없을걸?”
“왜?”
“이제는 총각 선생님도 아니잖아.”
“에이, 그거야 모르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흘러가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처제는 그렇게 나를 안심시켜놓고는 또 엉뚱한 공격을 해왔다.
“사실 나도 그 때 형부 되게 좋아했었다?”
“뭐? 호호호.”
나는 당황해서 헛기침을 해버렸지만 아내는 시답잖은 유머라도 들은 것처럼 피식 웃어넘겼다. 처제는 무슨 생각인지 눈웃음을 지으며 언니의 반응을 재촉했다.
“왜? 아무렇지도 않아?”
“풋, 그 나이 때 애들이 다 그렇지 뭐.”
채 스무 살도 안 되었을 나이의 순수한 풋사랑은 그 누구의 눈에도 마냥 귀엽게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그 때도 다들 그렇게 여겼고, 심지어 나조차 그랬다.
“그래서? 지금도 네 형부가 좋냐?”
아내는 오히려 장난기까지 담아서 처제에게 되물었다. 처제는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어린 시절의 귀여웠던 모습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애매한 웃음이었다.
“글쎄? 형부 같은 남자, 나쁠 건 없지 뭐.”
“호호. 얘가 외로운가보네? 당신 친구들 중에 괜찮은 남자 있으면 소개 좀 시켜줘 봐.”
“아, 그건 싫어. 형부 친구들 왠지 좀 별로일 것 같아.”
“왜? 네가 본적이라도 있어?”
“얼마 전에 형부 친구 한 사람 봤는데, 영 아니더라고. 호호.”
“…….”
뼈 있는 한마디에 나는 움츠러들었다. 처제는 아내 모르게 내 폐부를 찔러오고 있었다.
“이것만 마시고 가자. 컨디션 조절 해야지.”
“헤헤, 아쉽다.”
“나 없는 동안 집에 자주 와서 네 형부 좀 챙기고 그래라. 이 인간은 차려주지 않으면 밥도 제대로 안 챙겨먹으니까.”
“정말? 의외다. 형부 부지런할 줄 알았는데.”
계산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아내와 처제는 자잘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저 옆에서 묵묵히 듣기만 했다. 아내가 옆구리를 쿡 찌르며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오늘 왜 이렇게 말이 없어?”
“음…… 좀 피곤해서.”
거기서 처제가 불쑥 끼어들었다.
“형부! 저 좀 데려다주시면 안 돼요?”
“야, 그냥 택시 타고 가. 네 형부 피곤하대.”
“밤에 택시 타는 거 무섭단 말이야. 나 오랜만에 형부 차에 타보고 싶어. 응? 응?”
“얘가 왜 이래?”
하지만 나는 문득 처제와 둘만의 시간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덥석 승낙하고 나섰다.
“그래. 멀지도 않은데 차로 데려다주고 올게. 당신은 쉬고 있어.”
“에이, 참…… 그럼 빨리 다녀와.”
아까 못한 것을 계속하고 싶었기 때문인지, 아내 역시 둘만의 시간을 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눈치껏 처신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일부러 아내를 집으로 들여보내고 처제를 차에 태웠다. 보조석에 오를 때까지 처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저기, 처제…… 있잖아.”
“네?”
결국 먼저 이야기를 꺼낸 쪽은 나였다.
“어제 말이야…… 우리 거기서 만난 거.”
“호호, 걱정 마요. 언니한테 얘기 안할게요.”
“으, 응?”
처제는 내가 홀로 전전긍긍했던 것이 너무도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가볍게 대꾸했다. 혹시 내가 창피할까봐 연기를 해주는 건가 싶어 표정을 살폈지만 처제는 정말로 그 문제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실망스럽지 않았어? 형부란 사람이 그런 데나 들락거리고…….”
“형부. 그런 데서 일을 하다보면요, 자연스럽게 손님들 사이즈 파악이 대충 되거든요? 어제 분위기를 보니까 옆의 친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끌려온 것 같던데. 아니에요?”
“…….”
한심하게도 나는 옛날 제자의 마음 씀씀이에 배려 받은 선생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전 이해해요. 남자들이 가끔 그렇게 놀고 싶어질 수도 있죠. 뭐, 그렇다고 안마방이나 룸살롱 같은 데를 가셨다면 좀 심각하겠지만. 호호.”
아무렇지 않게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처제가 낯설어보였다. 내가 알고 있던 처제의 모습이 아니었고, 오래전 기억 속에 남아있는 윤미희의 모습은 더더욱 아니었다.
“언제부터…… 그런 데서 일하게 된 거야?”
“단기로 잠깐 뛰고 있을 뿐이에요. 등록금 벌어야죠.”
처가의 빈곤한 살림이야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돌이켜보면 그것은 미희의 담임이었을 때부터 알아왔던 사실이었다. 미희는 집이 가난했다. 수학여행을 갈 돈이 없어서 내가 대신 내주었던 기억도 있었다.
“언니는 알고 있어?”
“몰라요. 대충 알바 한다고만 했어요. 그러니까 형부도 비밀로 해주세요. 서로 비밀로 하면 공평하겠죠?”
바보같이 제자에게 약점이라도 잡힌 것처럼 굴고 있는 내가 싫었다. 나름대로 나를 배려해준 처제의 마음씨에는 고마웠지만 형부로서, 그리고 선생으로서 할 말은 해야만 했다.
“처제…… 그런 일 그만두면 안 될까?”
“왜요?”
“좀 그렇잖아. 다른 일 해도 되는데 왜 굳이 술집에서 일을 해.”
“이것만큼 편하게 돈 벌수 있는 일도 별로 없어요. 앉아서 웃고 떠들기만 하면 되는 걸요.”
처제는…… 아니, 미희는 고교생 무렵부터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대체 왜 나를 좋아했나 싶을 정도였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미모에 더욱 물이 올랐는지 내 눈으로 보기에도 객관적으로 처제는 정말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래서 더 문제였다. 나도 남자인 이상 그곳에 오는 남자들이 처제에게 어떤 마음을 품을지 안 봐도 뻔히 알 수 있었다. 노골적인 유흥업소가 아니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술집인 만큼 지저분한 추파를 던지는 손님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처제가 일하도록 두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어떤 손님들이 올지 모르고…… 아무튼 위험해. 그러다 이상한 사람에게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호호호. 형부. 저도 이제 어린애 아니에요. 제 앞가림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아니, 그건 알지만……”
자못 심각한 내 분위기와는 달리 처제는 까르르 웃었다. 물론 웃는 얼굴로 얘기하긴 했지만 그 말속에는 ‘참견하지 말라’는 뜻이 숨어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따끔하게 야단이라도 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형부가 걱정하지 않아도 오래 일할 생각은 없어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
뭔가 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느새 처가 앞에 도착해있었다. 처제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아파트 안으로 점점 멀어져갔다. 나는 고민을 거듭하다 끝내 문을 벌컥 열고 그 뒤를 쫓아 달려갔다.
“처제!”
뚜벅뚜벅 걸어가던 처제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암만 생각해도 모른 체 할 수가 없어서…… 등록금은 내가 아내 모르게 조금 보태줄 테니까, 거기서 일하는 거 그만 둬.”
“왜 그러세요, 형부.”
“윤미희!”
“…….”
내가 이름을 부르자 처제는 조금 놀랐는지 옛날처럼 토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는 내가 가르쳤던 제자야. 너는 이제 나를 선생보다는 형부로 생각하고 있겠지만 난 내가 가르쳤던 애들 하나하나 전부 언제까지고 내 소중한 제자라고 생각한다. 학교를 졸업했어도 마찬가지야. 난 네가 엇나가는 꼴 두고 보기가 힘들다.”
“…….”
때마침 불어온 바람 한 줄기에 추억이 묻어있었는지, 왠지 그 순간 정말로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희도 같은 기분을 느꼈던 걸까?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미희가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그 말…… 참 듣기 좋네요. 선생님. 호호.”
“미희야.”
집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미희는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미희를 마주보니 새삼 그녀가 얼마나 자랐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하실래요?”
“뭘……?”
“일하는 거 그만둘 테니 대신 제 소원 하나 들어주세요.”
소원……. 어딘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어감이었다. 하지만 나는 모르는 척 되물었다.
“소원이라니?”
“옛날 생각나게 해드릴까요?”
미희가 한걸음 더 성큼 다가왔다. 얼굴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고양이처럼 느껴지는 그 눈매가 가늘게 휘었다.
“언니 출장이 한 달이라고 했나요?”
“그건 왜……?”
미희는…… 아니, 처제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여태껏 내가 단 한번도 적이 없는 고혹적인 미소였다.
“그 한 달 동안 제 애인이 되어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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