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인형 - 단편
2018.04.14 21:30
춤추는 인형
“저기…선배…오늘 시간 되세요?”
어렵사리 꺼낸 그의 말에 그녀가 낮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미안. 친구랑 약속이 있거든.”
“그…그래요? 실례했습니다.”
그는 세차게 뛰는 심장에 손을 얹고서 빠르게 그녀로부터 벗어났다.
그녀를 본 것은 3개월 전. 대학에 처음 들어오고 나서 1,3.4 학년 과 미팅이
있을 때였다. 3학년에 재학 중인 그녀의 이름은 김미경. 그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였다.
그녀는 언제나 10시가 되면 집으로 향하는 차를 탔다.
조금 전 그는 그녀에게 같이 가자고 할 생각이었다. 같은 방향이고, 같은
차를 타고 갈 수 있었으므로. 하지만 그녀는 그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따로 약속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실망감을 안고서 대학로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후문 바로 앞에 있는
오락실로 들어섰다. 그가 자주 이용하는 오락실이다. 비록, 할 줄 아는 오락은
1945정도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3판을 잘 넘기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오래통에 가기 위해서. 혹자는 오락실 안의 노래방이라 하여,
오래방이라 하지만 이것이 어찌 방이 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통이라 칭하고,
그래서 그는 그것을 오래통이라 불렀다.
“한 걸음 뒤에~ 항상~ 내가 있었는데~ 그대~ 영원히 내 모습 볼 수 없나요~ 호~ …….”
그는 항상 즐겨 부르는 ‘인형의 꿈’을 불렀다.
선배는 내 마음 알까….
한참 노래를 부르던 그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조금 더 지체해 버리면 막차를 놓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택시를 타야하고,
택시를 타게 되면 버스 요금의 10배 가까이 돈이 깨져버린다. 그는 그런
낭비를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돈이 풍족하기로서니 낭비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맨 뒤의
바로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제일 뒷자리는 어느 버스든 항상 다른 자리보다 높이 솟아있다. 그는 그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너무 위험한 것이었다. 만약 사고가 날 경우에 가장 많이 다칠 가능성이
있는 곳이 그 뒷좌석이었다. 그렇다고 중간 즈음에 앉기는 뭐한게 그 자리는
내리는 문과 가깝기 때문에 아줌마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가장 선호하는 자리였다.
물론 경로석은 앞쪽에 있다. 하지만 내릴 때 편하게 내리기 위해서 중간을
선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리를 비키지 않아도 되고, 그나마 안전한 편인
뒤에서 한 칸 앞의 자리를 선호하는 것이었다.
두 정거장 쯤 갔을까? 일단의 사람들이 더 탔다. 그가 탔던 곳은 버스 노선이 시작되는
부근이라서 사람이 별로 없었다. 또한, 지금은 출발지에서 가까워서 내리는 사람 또한 없었다.
그는 무심히 밖을 보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자 그는 버스 내부를 한번 슥- 둘러보았다.
아는 사람이 혹 타지는 않았을까 하는 경계의식이었다. 이 주변이 그가 다니는 대학
주변인만큼 아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기 때문이었다. 막 다시 고개를 창 밖으로
돌리려는 찰나 그는 익숙한 뒷모습을 보았다.
설마! 아닐 것이다. 그녀는 오늘 약속이 있다 하지 않았던가. 그는 앞좌석에 앉은
그녀로 추정되는 여자를 살펴보았다.
그녀와 같은 부드러운 검은 머리. 어깨를 넘는 길이. 검은색 얇은 끈으로 이어진 가방.
연녹색 상의. 옆으로 나온 다리로 인해 보이는 청바지. 그리고 작은 검은색 구두.
오늘 만났던 그녀와 같은 스타일이다.
그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 가서 누구인지 확인하는 것 보다는 기다리는 것을 택했다. 그녀가
어딘가에서 내릴 때 그녀는 내리는 문으로 다가가기 위해서 뒤를 돌아볼 것이고,
그러면 자연히 뒤쪽에 앉아있는 그로서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어느새 사람이 많이 타서, 한번 일어섰다가는 다시 앉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점
또한 합리적인 그에게는 그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되어 주었다.
그는 버스가 가는 내내 그녀를 주시하였다. 한 시도 눈을 떼지 않고서. 버스가
한참을 달려, 어느새 그가 내릴 곳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고민하였다. 이대로
내릴 것인가, 아니면 계속 남아서 그녀가 맞는지 확인을 할 것인가. 그는 그냥
내리기로 하였다. 어차피 그녀와 그는 버스가 내리는 곳은 같은 곳이었으니까.
그녀가 맞는다면 여기서 내릴 것이고, 아니라면 안 내릴 것이다. 혹, 그녀가 맞고
그녀가 몇 정거장 더 가서 약속이 있다면? 하지만 지금은 11시가 가까워오고 있는
시간이었다. 매일 아침 8시 즈음이면 버스를 타고서 학교로 가는 그녀가 이 시간에
약속이 있을 리가 없다. 그녀를 보기 위해서, 같이 학교로 가기 위해서 그는 항상
일찍 나와서 기다리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녀와 같이 학교로 갈 수 있었다.
그는 앞의 그녀를 주시하며 일어서서 벨을 눌렀다. 그리고 내리기 위해서 문 앞에
대기하였다. 정거장이 가까워오자 그녀도 일어서는 것이 보인다. 이윽고 그녀가
몸을 돌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그는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당황함을. 빠르게 사라졌지만 그는
분명히 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말없이 싱긋 웃어주기만 하였다.
둘은 버스에서 내린 후에 간단히 인사를 하고서 헤어졌다. 평소라면 그가 그녀를
집에까지 바래다준다면서 이것저것 말을 걸며 달라붙었겠지만 그는 지금 그럴 정신이 아니었다.
집으로 향하는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감히 나를 속였단 말인가! 네년이! 얼마나
잘났기에! 집으로 향하는 그의 주먹은 꽉 쥐어져 있었다.
춤추는 인형 (2)
“돌아오셨습니까, 주인님.”
화가 난 채로 들어오는 그를 맞이하는 한 명의 여성이 문 앞에 있었다.
다리를 곧게 펴고서 허리를 45도로 굽히며 곱게 맞이하였다.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펴고 그의 짐을 받았다.
“오늘 학교는 어떠하였는지요?”
길게 내려오는 머리를 한 쪽으로 묶어서 가지런히 정돈한 이 미녀는
그의 시녀인 루인이었다. 그녀의 복장은 현대식 메이드 복 이었다.
예전에 사용되던 검은색 바탕에 흰 에이프런을 두른 중세식 메이드
복과는 다른, 현대식의 전신이 새하얀 깔끔한 메이드 복이었다. 지금
이런 형식은 호텔 같은 곳의 고급 하인들의 복장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젠장! 오늘은 되는 일이 없어.”
그는 정말 화가 나 있는 듯 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언짢은 일이 있으신가봐요.”
그녀의 물음에 그가 거칠게 옷을 벗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여자가
눈앞에 있는데도 그는 옷 벗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김미경이라는 계집을 알고 있겠지?”
알다마다. 3개월 전부터 들어온 이름이었다.
“물론 알고있어요.”
“그 계집이 오늘 뭐라고 했는지 아나?”
“…….”
그녀는 잠자코 그의 말을 경청하였다. 이럴 때는 그저 들어주면 되는 것이다.
“오늘 그녀에게 같이 갈 수 있겠냐고 청하였지. 그런데 친구와 약속이
있다는군. 할 수 없이 나는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어.”
그 정도로 그의 기분이 나빠질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정한 이유는 그 뒤에 나왔다.
“그런데 10시쯤에 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그 계집이 올라 탄 거야.
처음에는 그녀가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 뒷모습 이었거든.”
그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하지만 내릴 때 분명히 보았어.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 계집의
눈에 나타난 당혹감을!”
“그 천한 것이 주인님에게 거짓을 고하였단 말씀이군요”
그녀는 그의 대화상대로는 언제나 최고였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언제나 말을 잘 알아들어서 좋군.”
그녀는 베시시 미소지었다. 주인님에게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그래서 그 계집을 그대로 두실 건가요?”
감히 주인님에게 거짓을 고한 천것을 어찌 그대로 둔단 말인가?
뭔가 처벌이 필요하다.
“조금 있으면 방학이다.”
그녀는 바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 그녀가
알아듣지 못한 것을 알고는 그는 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눈앞의 여자는 자신이 몸소 추가설명을 해 줄 가치가 있는 여인이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 여자의 순위를 매길 수 있다면 눈앞의 여인은 1순위다.
한때 착각에 빠져서 김미경이라는 천한 계집을 0순위에 올릴 뻔 하였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방학이 되면 연락이 두절되어도 이상할 것은 없지.”
“그렇군요…….”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춤추는 인형 (3)
그 후로 더 이상 그는 아침 일찍 나가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았다.
단지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가끔 가다 학교에서 그녀와 마주쳐도
그는 후배가 선배에게 보내는 간단한 인사만 할 뿐이었다. 학교에서는
아무도 그의 정체에 대해서 모른다. 그는 아웃사이더로 불렸고,
그래서 그와 친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에 대해서 아는 사람
또한 없었다. 그가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학생기록부에는
그가 혼자서 사는 평범한 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디까지나
기록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진실한 정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간은 흘러 방학이 되었다. 정확히는 종강이지만, 실질적으로 방학이었다.
그는 루인에게 물었다.
“준비는 모두 지시한 대로 다 해 놓았겠지?”
준비라는 것은 그 천한 계집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예. 물론 해 두었습니다.”
“좋아. 넌 역시 최고의 여자야.”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뺨을 손으로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에 그녀가 눈을 감으며 그를 느꼈다.
그의 손이 서서히 내려와 그녀의 가슴에 닿았다. 그녀는 반항하거나
소리치지 않았다. 단지 그에게로 더 다가와 그의 손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려 할 뿐.
“아응~”
묘한 신음소리와 함께 그녀가 그에게로 달라붙었다. 그는 손을 돌려
그녀의 허리를 잡아 끌어당기며 나머지 한 손으로 그녀의 뒷머리를 받쳤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고개가 위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자신의
얼굴을 그녀의 얼굴위로 내렸다.
“으음~”
그녀에게는 이 세상 어느 것보다 달콤한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맞닿자 작은 신음소릴 내뱉었다. 그녀에게는 그의 모든 것이 환희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는 환영한다는 의미로
입을 벌려 그녀의 입술로 그의 입술을 맞아 주었다. 서로의 혀가 얽히는
가운데 그녀의 흥분은 더해갔다.
이윽고 그가 입술을 떼었다.
짧은 쾌락은 그렇게 끝이 나 버렸지만, 여운은 남아서 그녀의 몸을 타고
돌았다. 아~ 젖어 버렸어. 그녀는 흥분한 자신의 몸을 느끼며 여기서 멈춘
그를 원망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는 짓궂게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나머지는 일이 완수된 후에 하지.”
그녀는 어서 빨리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할 것이라 다짐하였다.
그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춤추는 인형 (4)
어떤 무리들이 그녀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로 미경은
계절 학기를 어느 것으로 할지를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김미경양?”
그녀의 담당교수 조진환이었다.
“아, 교수님. 안녕하세요?”
그녀는 얼른 일어서서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였다.
“마침 잘 왔어요. 안 그래도 학생에게 할 말이 있었어요.”
그는 학생들에게도 매너교수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예?”
의문을 표하는 그녀에게 그는 자리를 권했다.
“일단 앉아요.”
그녀가 자리에 앉고 나자 그가 차를 한 잔 건네었다. 쟈스민 차였다.
은은한 향기가 과 사무실 내부를 채웠다.
“내가 학생을 보고자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가 흘끗 그녀가 보고 있던 것을 바라보았다.
“미경양. 계절 학기 신청하려고 그러나?”
무슨 말을 하려고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질문에 그녀는 정중히 대답하였다.
“아, 예.”
“자네 혹시 일본에 가 볼 생각 없나?”
“에…일본이요?”
갑작스레 일본이라 말하니 그녀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번에 일본에서 열리는 세계과학기술전시회에 우리 과에서
한 명 초청을 받았는데, 자네가 가면 어떨까 싶어서 말이지.”
“에에~~!!”
그녀는 너무도 놀랐다. 세계과학기술전시회!! 각국의 내 노라 하는
연구소와 대학에서 공동으로 개최되는 그 전시회에! 자신이!
“저…정말 인가요 교수님?”
그는 진정하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진정하게 미경양. 물론 사실이지.”
“가…가겠어요. 아니, 꼭 가게 해 주세요.”
“그럼 미경양이 가는 것으로 알겠으니, 계절 학기는 신청하지 않도록 해요.”
“예!”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해요.”
“예. 그럼 이만.”
“아, 잠깐.”
사무실을 나가려는 그녀를 그가 불러 세웠다.
“네?”
“다른 학생들에게는 자네가 전시회에 간다는 것을 말하지 않도록 하세요.
방학 때 뭐 하냐고 물으면 그냥 멀리 여행 간다고 하고요.”
“예?”
“말하지 않는 게 좋답니다. 괜한 질투와 시기심만 생겨요.”
“예. 알겠습니다.”
그녀로서는 무조건 OK였다. 그 유명한 전시회에 갈 수 있는데 무엇인들 못 할까.
그녀가 사라지고 나자, 교수의 웃음이 짙어졌다. 매너교수 외에도
그에게는 하회탈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언제나 웃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런 그의 웃음이 더욱 짙어진 것이다.
그는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 조진환입니다.”
“「조진환 교수님이시군요.」”
“말씀하신 일은 잘 처리되었습니다.”
“「그런가요. 수고하셨어요.」”
“수고랄 게 뭐 있겠습니까.”
“「어쨌든 잘 해 주었어요. 반응은 어떻던가요?」”
“반드시 자기가 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어찌나 흥분하던지…….”
“「후훗. 어떤 일이 기다릴지 알고 있다면 그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겠지요.」”
“허허허 그야 그렇지요.”
“「저는 일이 있으니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아이고 이거 제가 바쁜 사람 붙잡고 수다를 떨었군요. 어서 들어가도록 하세요.”
「뚜우우- 뚜우우- 뚜우우-」
이내 전화는 끊겼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그의 입가에 매너교수,
하회탈과는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크흐흐 이거 정말 재밌는 일이 벌어지겠구먼.”
조금 전에 보았던 학생을 떠올리며 그는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띠었다.
춤추는 인형 (5)
조진환 교수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그녀는 다른 학생들에게
그 사실을 말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 또한 아웃사이더의 일종이었으므로.
단지 그 이유가 누구와는 달리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지만 과 행사에도
모두 불참하는 아웃사이더였다.
종강을 한 후에, 그녀는 자신이 일본으로 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부모님은
계시지 않기 때문에 먼 시골에 계시는 조부모님께 전화를 드려서 일본으로
간다고 전화를 하였을 뿐이다.
이윽고 시간은 다가와 그녀가 일본으로 출발할 날이 되었다. 그녀는 이른
아침부터 일본으로 갈 사람들이 모이는 공항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리
콜택시를 불러서 문을 나섰을 때는 택시가 대기 중이었다. 그녀는 택시에
몸을 싣고서 일본으로의 꿈에 부풀었다.
전시회에 일반인으로 가는 것과 초대되어 가는 것은 다르다. 일반인은 그저
구경만 할 뿐이지만, 초대되어 간다는 것은 일종의 유학처럼 그곳의
선진기술을 맛볼 수 있게 된다. 그 점에서 그녀는 이번 초청에 자신을 꼭
추천해 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당첨된 것이다. 행운의 여신은
자신의 편을 들어준 것이었다.
그녀는 꿈에 부풀어서 그녀가 떠나고 난 뒤, 이삿짐 차량 한 대가 그녀의 집
앞에 멈춰 서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내린 사람들이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 또한.
얼마쯤 갔을 때 택시가 잠시 멈추었다. 꿈에 빠져있던 그녀에게 택시 기사가
뒤를 돌아보더니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공항 간다는데 합승해도 되겠습니까?”
“에? 예.”
기분이 좋으면 사람이 관대해진다. 또 지금은 아침이고 해서 그녀의 경계심은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동행인은 두 명이었다. 둘 모두 큰 여행 가방을 메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행객인 듯 하였다. 그녀는 그들의 행색을 보고서 공항으로 가는 것이 확실해
보이자 합승을 허락하였다. 한 명은 앞좌석에, 한 명은 뒷좌석에
그녀의 옆에 앉게 되었다.
택시의 경우 뒷좌석 왼쪽은 보통 문을 잠가둔다. 오른쪽으로 계속 탔다가
내렸다가 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위치한 곳은 그 왼쪽이었다.
어느 정도 길을 갔을까? 옆 좌석에 앉아있던 사람이 그녀에게 말을 건네었다.
“김미경씨?”
“에…?”
“혹시 김미경씨 아닌가요?”
“예…? 마…맞는데요?”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그녀는 의심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하 맞군요. 일본에 가시죠? 저도 일본에 가거든요. 제가 인솔 팀에 있어서
참가자들 신상명세서를 검토하였거든요.”
“아~ 예.”
그제야 그녀는 납득하였다.
“이번에 같이 일본으로 갈 원영균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그녀에게 악수를 청하였다. 그녀는 의심 없이 악수를 하기
위해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손은 그녀의 손이 아닌 그녀의
뒷머리를 잡았다. 그녀가 뭐라고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는 재빨리
그녀를 밖에서 볼 수 없도록 손을 당겨, 그녀의 고개를 아래로 숙여 버렸다.
그의 왼손에는 어느새 작은 손수건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는 재빠르게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과 코를 막았다.
그녀는 당혹감과 함께 의식이 서서히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공항으로 향하던 택시는 진로를 바꿔 외진 곳으로 향하였다.
공항.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 옆에는 ‘일본 세계과학기술전시회’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그 무리들을 향하는 한 명의 여성이 있었다. 무리들 쪽에서
그녀를 알아보고는 다가오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아, 미경씨. 일찍 왔군요.”
미경이라 불린 그녀는 싱긋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거든요.”
춤추는 인형 (6)
외딴곳에 있는 아담한 집 한 채. 그 안에 민성이 살고 있었다.
그에게로 다가오는 한 여성이 있었다.
“주인님.”
“음.”
“오는 중이랍니다.”
“그런가.”
그는 몸을 돌려 그녀와 마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깔끔한 순백의
현대식 메이드 복장이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그녀의 몸을 그에게로 가까이 밀착시켰다.
그리고 마주치는 서로의 입술.
“언제나 너는 나를 만족시켜 주는구나.”
“그것이 저의 바람이자 행복입니다.”
“그것도 그렇군. 그럼 우린 서로가 원하는 것을 주고받는 셈인가?”
그녀가 웃었다. 그도 웃었다.
다시 서로의 입술이 맞붙는다. 좀 더 오래 계속되는 입맞춤.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여민 옷을 살며시 풀며 안으로 비집고 들어간다.
“하아~”
작은 한숨과 함께 그녀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가슴이 그의 손에 닿았다.
여기서 브래지어 하나만 더 벗겨내면 맨살이 닿는다. 그녀의 상의를
헤집으로 그는 양쪽 가슴을 번갈아가며 주물렀다.
“으으응~”
그녀의 허리가 살며시 앞으로 휘면서 그는 좀 더 편안하게 가슴을 만질 수
있었다. 그가 입술을 점점 아래로 내려 그녀의 목덜미까지 다가왔다.
-쪽.
그녀의 하얀 목에 그가 인장을 찍었다.
“넌 내거라는 표시야.”
-띵동~
그때 벨 소리가 들렸다.
“왔나보군.”
그는 그녀를 놓아 주고서 일어섰다. 밑에는 여전히 늘어진 채로 앉아 있는
그녀가 있었다.
“복장 정리해.”
그는 타인에게는 그녀의 흐트러진 모습을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그의
보물1호를 아무에게나 보여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세상 누구라도.
그의 명에 그녀는 즉각 일어나서는 복장을 정리하였다. 익숙한 듯, 상당히
빠른 동작이었다. 복장을 모두 정리한 후에 그녀는 예약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다. 물론 그와 함께.
그녀가 문을 열자, 3명의 남자가 기절한 한 명의 여자를 업고서 들어왔다.
“음… 좋아.”
“수고했어요.”
그와 그녀가 납치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었다.
여자를 메고 온 남자가 바닥에 내려놓고서는 그들의 인사에 대답하였다.
“여차~ 이거 꽤 무게가 나가는군요. 수고라니 별 말씀을요. 이 정도는 일도
아닙니다. 언제든지 시켜만 주십시오.”
“음… 그러지.”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마실 거라도 내 오지요.”
루인은 그렇게 말하고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가고, 나머지 두 명과
함께 네 명은 모두 거실로 모였다.
“앉지.”
민성이 먼저 앉으면서 자리를 권했다. 어느 모로 보나 하수인을 대하는 태도였다.
하지만 상대는 세 명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 뒤처리는 제대로 하였겠지?”
이삿짐을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입니다. 지금쯤이면 본가로 운송중일 것입니다.”
“서류상의 처리는 완벽한가?”
“물론입니다.”
옆에 있던 한 남자가 품에서 서류를 꺼내어 그에게 건네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서 민성의 앞에 놓았다.
“여기 관련 서류입니다.”
민성은 서류를 받아서 살펴보았다. 그러는 동안에 루인이 차를 내어왔다.
“아, 고마워.”
그의 감사에 그녀가 싱긋 웃었다. 조용히 웃는 그녀의 작은 미소는 천사의
미소와 같았다. 절로 흐뭇해진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대충 훑어보고는
그대로 내려놓고는 그녀를 옆에 앉혔다.
“이리 와서 앉지 그래?”
“네. 그럼.”
그녀가 그의 옆에 와서 앉았다. 보통의 여인처럼 조금 떨어져서 앉지 않고,
그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는 어깨까지 붙여서 찰싹 달라붙듯이 앉았다. 그는
왼팔을 들어서 그녀의 뒤로 둘러서 그녀의 허리에 걸쳤다. 한 팔에 감기는
허리는 무척 부드러웠다.
그녀가 그 자세로 앞에 놓인 차를 한 잔 들어서 입가에 가져가서는 후- 불어서
뜨거운 차를 조금 식혔다.
“후- 후-.”
그는 그녀가 후- 불 때마다 튀어 나오는 입술을 보면서 갈증을 느꼈다. 저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힘껏 빨아 당기면 해결될 것이다. 그는 괜한 갈증에 앞에 놓인
차라도 마시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때 그녀가 먼저 차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찻잔이었다.
“드세요.”
“어…그래.”
그는 한 손으로 찻잔을 받으려 하였지만, 그녀는 한 손을 들어서는 그의 손을
살며시 물리었다.
“드세요.”
“음…….”
그는 찻잔에 얼굴을 살며시 가져갔다. 은은한 차향이 그의 코를 통해서 들어왔다.
“재스민?”
“네.”
그가 즐기는 차였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차를 내 오라고 하면 언제나 재스민
차를 내 놓았다. 열대와 아열대지방에서 자라는 재스민의 꽃잎은 새하얀 색이어서,
재스민차를 마실 때면 그는 언제나 순백의 메이드 복을 깨끗하게 차려입은 루인을 떠올린다.
차를 마시며 조용히 사색에 잠겨있는 그에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조용히 자신의 천사를 떠올릴 수 있었다. 한 손에는 그녀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면서.
잠시 상념에 빠져있던 그가 찻잔을 쥔 손을 살며시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본가로 간다.”
춤추는 인형 (7)
“으음…….”
그녀는 서서히 정신을 드는 것을 느끼면서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맨 먼저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하얀색이었다. 아직은 몽롱한 상태라
뭐가 먼지 알 수도 없었지만, 그녀에겐 온통 하얀 색만이 비춰졌다.
점차 사물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을 느끼면서 현 상황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해서 머리를 굴려 보았다. 자신은 분명 일본에 가기 위해서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잡아탔었다. 그리고 누군가와 합승을 하였고, 그는 인솔 팀의 한 명이었다.
그 후에 어찌어찌하여 정신을 잃은 듯한데…….
중요한 것은 어떻게 납치되었느냐가 아니었다. 그녀가 도대체 왜 누구에게
무엇 때문에 납치를 당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여기는 어디이며 어떻게 해야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음…여긴…….”
정신이 들자 그녀는 일어나려고 하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시각과 청각,
후각 촉각 등 감각은 돌아왔으나 몸은 천근만근 어찌나 무거운지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흑…으윽…….”
한 팔로 힘겹게 상체를 버티면서 겨우 상체만을 일으켜서 앉을 수 있었다.
아직 약 기운이 남아있기 때문이었지만 그녀는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간신히 상체만을 일으킨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선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자신이 앉아있는 침대. 세 사람 정도는 편히 잘 수 있을 듯한 큰 침대는 하얀 시트에
싸여 있었고, 각 모서리에는 팔뚝만한 기둥이 있어서 천장이 달린 침대였다. 그리고
그 천장에서는 빛을 차단하는 커튼을 내릴 수 있게 되어있었다. 블라인드처럼
오르내림을 조절하는 장치는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그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넓은 방 안을 환희 비추는 커다란 창. 남향으로 난
그 창은 매우 넓었고, 높았다. 창의 끝은 천장과 맞닿아 있었는데 햇살은 좀 더 많이
받아들이기 위함이었다. 아래쪽과 위쪽으로 창이 분리되어 있었는데, 아래쪽은
열 수 있었고 위쪽은 특수한 장치가 있어야 열 수 있거나 열 수 없는 것 같아 보였다.
한쪽에는 백색 옷장이 있었는데, 현재 일어설 수 없는 그녀로서는 안에 어떠한
것들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옷장 옆에는 커다란 전신거울이 있어서 옷을
고르기 편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화장대가 있었다.
다른 한 쪽에는 작은 문이 하나 딸려 있었는데, 서재 같은 것인지 욕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방을 둘러보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노크 없이
그냥 문을 여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아직 깨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깨어났군요.”
낯선 여인은 침대에 앉아있는 그녀를 보고서는 놀랍다는 듯 작은 탄성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로 다가와서는 침대 앞 작은 탁자에 가져온 것을 내려놓았다.
“수프를 끓였어요. 드실 수 있겠어요?”
보자마자 먹을 것부터 권하는 그녀에게 미경은 우선 궁금한 것부터 묻기로 하였다.
“저기…….”
“네?”
“여기는……?”
“아, 여기는 주인님의 저택 이예요.”
싱긋 웃으면서 대답을 한다. 하지만 듣고 있는 미경으로서는 답답함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화병이 도지게 하여 자신을 간접 타살시키려는 게 아닌지 그 저의가
궁금할 수밖에 없는 대답이었다.
“아 그러니까 여기가 어디죠?”
“네. 주인님의 저택입니다.”
“…….”
뭔가 말이 안 통한다. 서너 살 먹은 어린애와 대화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니까…에…그 주인님이……?”
“네. 저희들의 주인님이십니다.”
“…….”
“……?”
뭔가 더 궁금한 것은 없냐는 듯이 보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미경은 그녀가
가져온 그릇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따뜻한 듯 김이 엷게 피어오르는
수프를 보니 문득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꼈다.
할 수 없이 미경은 궁금한 것은 차후에 묻도록 하고, 우선 배부터 채우기로 하였다.
급한 것이 우선인 것이다.
“그것 좀 가까이 가져다주겠어요?”
그녀는 즉시 미경이 수프를 먹을 수 있게 준비했다. 냅킨을 그녀의 허벅지 위에
얹고서, 그릇을 그녀의 턱 밑에 대어 주고는 한 스푼 떠서는 그녀의 입에 대 주었다.
“저기…제가 먹을게요.”
이런 과다한 친절에 생소한 미경으로서는 오히려 이런 것은 불편할 뿐이었다.
거절하려는 미경에게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의 분부를 어겨서는 절대로 안 된다.
“안 돼요.”
“제가 먹을 수 있다니까요.”
“그래도 안 돼요.”
“왜 안 되죠?”
“주인님의 명이니까요.”
미경은 문득 그녀가 자꾸 언급하는 주인님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아까부터 계속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 이 집도 그 주인인가 하는 사람의
집이라고 하였고 지금도 주인의 명이라고 하지 않는가.
춤추는 인형 (8)
미경은 조심스레 말을 텄다.
“저기…….”
“네? 말씀하세요.”
“그 주인님이라는 사람은 누구죠?”
“저희…….”
“아뇨.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말해주세요.”
또다시 ‘저희들의 주인님입니다’라는 황당한 대답이 나오기 전에 미경은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나마 그녀는 정말로 정신 연령이 애 수준의 바보는
아니었는지 미경이 원하는 바를 알아챈 듯, 엷은 웃음을 띄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궁금한가요?”
“네 그래요. 자꾸 주인님. 주인님. 그러는데 누군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다시 한번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차차 알게 될 거에요.”
그 웃음에 미경은 그 사람에 대해서 더 물어볼 수 없었다.
그녀는 미경이 수프를 다 먹고 나자, 빈 그릇을 챙겨 들고는 나갈 준비를 하였다.
일어서서는 그녀에게 이것저것 설명을 해 주고 감을 잊지는 않았다.
“우선, 저기 보이는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욕실이 있고, 몸을 씻은 다음에
저기 옷장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꺼내 입으세요. 그러고 나서 주인님을 뵐 수 있을 거예요.”
“에…? 예.”
저기가 정말 욕실이란 말이야? 갖출 건 다 갖추었네. 이거 완전히 특급 호텔 이잖아?
그녀는 괜찮다면 그 주인이라는 사람에게 이곳에서 며칠 묵을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멋진 침대와 햇살이 들어오는 창, 고급
옷이 한가득 정렬되어 있을 듯한 큰 옷장. 단아한 화장대. 욕실 딸린 작은 방.
얼마나 클지 상상도 안 가는 거대한 저택. 일하는 하녀들, 시중 드는 시녀들.
꿈에서나 그려볼 만한 공주님의 생활이 아니던가.
“혼자 일어날 수 있겠어요?”
그녀는 자신의 몸 상태를 체크해 보았다. 앉아서 좀 쉰 덕분인지 수프를 한 그릇
먹어 치운 덕분인지 몸은 많이 나아져 있었다.
“괜찮은 것 같군요.”
“도와드릴까요?”
“네. 좀…….”
그녀가 와서 상체를 받쳐주자 미경은 그녀의 어깨를 짚고서는 천천히 일어났다.
혼자서도 할 수 있겠지만 낯선 곳에 있는 이상 한 명이라도 자신에게 우호적인
상황을 만들어 두는 게 좋았다. 그런 점에서 눈앞의 그녀는 안성맞춤이었다.
어쨌든 미경은 그녀의 도움 하에 완전히 일어설 수 있었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로 천천히 한 발 한 발 움직여 보았다.
“하나. 두울. 세엣. 네엣. 좋아요. 이제 괜찮은가 보네요.”
그녀가 조심스레 한 발 한 발을 떼는 그녀를 보고는 마치 똑똑한 아이를 바라보는
듯이 그녀에게 칭찬을 하였다.
“이제 괜찮거든요? 그만 나가주실래요?”
미경의 말에 그녀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안 돼요. 환자를 혼자 두다니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예요.”
“저기…저는 환자가…….”
“안정. 안정. 절대안정이에요.”
나는 더 이상 환자가 아니야! 미경은 그렇게 말하는 그녀에게 외치고 싶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환자 취급을 하는 거야. 정말 짜증나. 지금은 혼자 있고 싶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소리치는 대신에 상냥한 웃음을 띠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모르는군요. 이름이 뭐죠?”
“남의 이름을 물을 때는 자신의 이름을 먼저 밝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름을 묻는 미경에게 그녀는 그렇게 대꾸하였다. 미경은 짜증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면서 속으로 눌러 참았다.
“김미경 이예요.”
춤추는 인형 (9)
미경이 대답하자, 그녀는 자랑스럽게 어깨를 떡 벌리더니, 가슴에 힘을
주고는 자신의 신상내역에 대해서 토해내기 시작하였다.
“흠흠.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세계 최강의 신영을 이룩한 그 근원지이자
본가인 이 저택에서 일하는 프로페셔널 메이드로서…….”
자, 잠깐. 지금 뭐라고? 미경은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자… 잠깐만요. 방금 뭐라고 했죠?”
자신의 말을 끊은 것이 기분이 좋지 않은지 그녀가 살짝 인상을 쓰더니
다시 대답해 주었다.
“프로페셔널 메이드…….” “아니, 그 앞에!”
미경은 자신도 모르게 격한 반응을 보였지만, 그 자신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계 최강의 신영을…….”
“신영!!”
“맞아요. 신영이에요.”
미경은 언제 환자였다는 듯이 그녀에게 순식간에 다가와서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는 재차 물었다.
“정말… 정말 그 신영이 맞아요?!”
“물론이에요!”
“아아~.”
미경은 머릿속으로 동화 같은 그림을 그려 보았다. 위기의 순간에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서 구해주고, 평범한 여자와 왕자와의 꿈같은 사랑. 자신의 상황과 딱 맞지
않는가. 신영의 주인이라면 분명 왕조 시대의 황제 폐하와도 같은 것. 지금 그의
궁전에 그녀가 있는 것이다.
미경은 머릿속으로 환상을 그리고 있느라, 눈앞의 그녀가 역겹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놀라는 모습이 가관이군요.”
“그래. 저 꿈에 부풀은 모습을 봐. 너무나 바보 같지 않아?”
한 방에서 남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꿈은 꿈일 뿐이지요.”
여자의 목소리는 분명 화면속의 그녀를 비웃고 있었다.
“훗. 나중에는 꿈조차 꾸지 못하게 해 주지.” 그에 답하는 남자는 그녀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었다. 그는 한민성 이었다.
“어머~ 그건 너무하지 않나요?”
그의 말에 그녀 루인이 그를 살짝 흘겨보았다.
“후후 뭐가 너무하다는 거지?”
그는 자신의 앞에 등을 보이고 앉은 그녀의 앞으로 손을 뻗어서는 가슴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아아~ 그건 너무 관대해요.”
그는 나머지 손도 뻗어서 두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살며시 애무하였다. 그녀의
신음소리가 더 깊어졌다.
“관대하다니?”
“흐응~ 한창 꿈에 부풀게 한 다음에 그 꿈을 산산조각 내 버리는 거예요.”
“후후… 역시 당신은 똑똑해.”
그들이 보는 화면에는 미경과 한 명의 메이드가 서 있는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영상 뿐 아니라 음성까지 생생이 나오는 화면이었다.
“저런 천한 것은 제 주제를 알아야 해요.”
“그래. 그래.”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는 수컷의 영역표시를 해 나갔다.
춤추는 인형 (10)
“네르.”
한참을 꿈에 부풀어 있던 미경의 정신을 원래의 세계로 끌어당긴 것은
그녀의 토라진 듯한 목소리였다.
‘아!’
그제야 미경은 앞에 사람을 놓고서 자신이 망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정말 둔해도 이렇게 둔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의 바보 같음을 자책하며
미경은 얼른 그녀에게 사과하였다.
“미안해요.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미경의 태연한 대답에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방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눈에 뻔히 보였는데 말이다. 분명히 주인님과의 로맨스를 꿈꾸었을 것이다. 이곳을
거쳐 간 모든 여자가 그런 생각을 가지니까. 정말 꿈도 야무지다. 하지만 그녀는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는 대신에 살며시 웃는 가면의 표정을 만들어 내었다. 그것이
눈앞의 멍청한 계집에게 보내는 그녀만의 비웃음이었다.
“제 이름이에요. 네르.”
미경이 활짝 미소지었다. 좀 전의 실수를 무마하려는 것이었다.
“좋은 이름이군요. 잘 어울려요. 그냥 네르라고 불러도 되죠?”
“네. 그러세요. 저도 미경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겉으로 보이는 분위기는 화기애애하였다. 겉으로는 말이다.
“그럼 이제 씻어도 되겠지요?”
미경은 이제 씻을 테니 그만 나가달라는 뜻이었다.
“네. 얼른 씻어요.”
하지만 그녀 네르는 나갈 생각을 않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미경은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말하였다.
“저기… 씻을 건데요.”
“네. 그래야죠.”
앞에도 그랬지만 이 여자는 뭔가 말이 안 통한다. 정말 짜증나는 여자라고
생각하며 미경은 직설적으로 말하였다.
“그만 나가주시겠어요?”
미경의 말에 네르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안 될 말이다.
네르는 미경에 대한 시중을 드는 동시에 감시역을 맡고 있기도 한 것이다.
“목욕 시중을 들어 드리겠어요.”
“저 혼자 괜찮으니 나가주세요.”
“안 돼요. 편히 모시라는 주인님의 분부입니다.”
그녀가 강하게 나오자 미경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었다. 이곳은 그녀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럼 씻고 나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 줘요. 그 정도는 괜찮겠지요?”
미경 또한 그녀가 왜 나가지 않는 것인지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해가 가지 않기도 하였다. 자신이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감시 같은
것을 한단 말인가.
미경의 말에 네르는 잠시 생각하는 듯이 눈을 감고는 고개를 좌우로 까딱
까닥거리며 침묵을 지켰다.
“음…….”
그런 그녀에게 자신의 주장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미경은 계속 설득조의 어조로
말을 늘어놓았다. 물론 친근한 듯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네르. 전 여태까지 목욕 시중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그런 과한 친절은
제게 불편할 뿐이에요. 그러니 나가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제가 씻고 나올 동안
여기서 기다려 달라는 것이니 그 정도는 어렵지 않잖아요? 설령 당신의 주인이
명한 일이라 해도, 당사자가 불편해 하니 그 정도는 너그럽게 이해해 줄 거예요.”
잠시 생각에 잠긴 척 하던 네르로서는 미경의 말에 인상을 팍 쓸 뻔했다. ‘당신의
주인이 명한 일’이라고?! 주인님께서 명한 일이다! 이해해 줄 거라고?! 이해해
주시길 빌어야지! 은근슬쩍 자신의 주인님에게 높임말을 생략하는 그녀에게 네르는
큰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질대로 억지로 목욕 시중을 든다고 하여서는, 그녀를 있는 대로 괴롭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여기에 대해서 따로 명받은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목욕 시중을 든다 하면, 분명 거절할 거예요. 당신은 그럼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방에 남겠다고 해요. 그리고 10분쯤 뒤에 그녀를 따라 들어가서 목욕 시중을 들도록 해요.’
그녀에게 미경이란 천녀(賤女)의 시중을 들도록 명한 주인님의 옆에서 그분의 전속시녀이자
모든 시녀들의 시녀장인 루인님께서 덧붙인 내용이었다. 물론 루인님의 말이라면
다 들어주는 주인님께서는 그렇게 하라 이르셨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요. 전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천천히 씻고 나오세요.”
“고마워요, 네르.”
네르는 웃으며 어서 들어가 보라고 재촉하였다. 물론 미경이 욕실로 들어간 후에 문을
향해서 가운데 손가락을 살며시 들어주는 것을 잊지 않았음은 당연지사였다.
'확 미끄러져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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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인형 (11)
욕실에 들어와서 문을 닫은 미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겨우 혼자
생각할 여유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녀로서는 네르의 목욕시중을 거부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받고 싶었다는 말이 맞으리라.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그러한 대접을 받아 보겠는가. 하지만 낯선 상황에서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그녀로서는 이렇게라도 잠시 짬을 낼 수밖에 없었다.
“하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곳에 왔는지도 가르쳐 주지 않고, 이곳이 어디인지 정확한
위치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단지 신영의 본가라고만 하였을 뿐.
‘앙큼한 년. 정작 중요한 건 하나도 가르쳐 주지 않다니.’
애꿎은 네르만을 욕할 수밖에 없는 그녀였다.
‘아아~ 그나저나 그 주인님이라는 사람은 어떠할까.’
미경은 신영의 본가에 사는 주인님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무척 궁금했다. 분명
주인님이라 불린다면 저택의 책임자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집사나 지배인
정도로 불릴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주인님이라 하였고, 그렇다면 이 저택의
주인이라는 뜻이었다. 이 저택은 신영의 본가라고 하였으니 이 저택의 주인이라는
말은 즉, 그 대단한 신영의 주인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었다.
‘정말 멋져!’
멋져도 이보다 더 멋질 수는 없다. 세상 어느 남자가 있어 신영의 주인보다 나을 수가 있을까.
‘아!’
그녀는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주인이라면 분명 신영의 회장 같은 것일 테고,
일반적인 기업의 회장의 이미지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하얗게 센 머리와 주름진
얼굴에 탐욕스런 인상.
‘그, 그럴 리가 없어.’
그녀는 세차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분명 늙어도 곱게 늙은 청초한 용모의 중년일
것이라고 머릿속으로 자기 암시를 걸었다.
만약 그녀가 TV라도 제대로 보았다면 이런 상상은 필요 없는 것이었다. 신영의
회장은 대통령보다 더 유명한 사람으로서 TV를 조금만 본다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세상살이에 대해서는 그 속에서 살아가기에 조금 알지만,
학문에 전념하느라 TV같은 것은 제대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맞아! 그 정도 된다면 분명 아들이 있을 거야! 앗!”
문득 드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목소리를 내어 버렸다.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밖에서 네르가 분명 들었을 것이었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 정도 나이가 되면(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분명 후계자가
있을 것인데 말이다.
‘아! 하지만 이런 초거대 기업의 후계자라면 분명 약혼녀가 있을 텐데……. 하지만 어차피
정략일 텐데 내가 뺏으면 되는 거야!!’
참으로 당찬 생각을 하며 미경은 욕조에 몸을 담갔다. 따뜻한 기운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가며 그녀의 피로를 살며시 풀어 주었다.
"으음~ 도련님……."
그녀는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이름도 모르는 상상속의 후계자를 생각하며 살며시
보지 둔덕을 쓰다듬었다.
큰 키, 넓은 어깨, 튼튼한 근육이 그녀의 몸을 감싸며 그녀의 귓가에 달콤한
사랑의 말을 속삭인다. 사랑해…… 그리고 이윽고 그의 커다란 남성이 자신의
몸속을 파고든다. 그렇게 된 후에는 임신을 하게 되고, 수십만의 부하 직원을 발아래
거느린 왕비가 되는 것이다.
‘아앙~’
혼자서 망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미경이었다.
‘지랄. 보지나 확 뚫어 버릴라.’
밖에서 이미 모든 것을 지켜보는 네르로서는 저 썩을 년이 이루지 못할 꿈을
꾸는 것을 보며 이를 갈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저 갈보 년을 묶어놓고서
밀대 막대를 이용해 보지부터 입까지 뚫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주인님의 엄명이
있으니 속으로 꾹 참으며 상상으로만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그 편이 더 재미있기도 하겠어.’
네르는 훗날 망가진 미경이 어떤 모습이 될지 상상하는 것으로도 꾀나 즐거웠다.
‘혹, 저 년하고 주인님하고 정말로 이루어진다면…….’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휙휙 저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주인님에게는
루인님이 계시다.
‘처녀인지 확인을 해 보라 하셨으니…….’
루인님께서 그녀에게 목욕 시중을 들 때, 미경이 처녀인지 아닌지를 확인해 보라고
밀명을 내린 것을 떠올리며 그녀는 문을 두드렸다.
-똑똑
그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이 방은 문을 잠글
수 없게 되어있다.
갑자기 문이 열리자 미경이 놀라서 물 속으로 몸을 완전히 담그는 게 보였다. 그녀는
비웃음을 속으로 감추고는 미소를 띤 채로 미경에게 다가갔다.
“네르예요. 등 밀어 드릴게요.”
“저기…선배…오늘 시간 되세요?”
어렵사리 꺼낸 그의 말에 그녀가 낮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미안. 친구랑 약속이 있거든.”
“그…그래요? 실례했습니다.”
그는 세차게 뛰는 심장에 손을 얹고서 빠르게 그녀로부터 벗어났다.
그녀를 본 것은 3개월 전. 대학에 처음 들어오고 나서 1,3.4 학년 과 미팅이
있을 때였다. 3학년에 재학 중인 그녀의 이름은 김미경. 그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였다.
그녀는 언제나 10시가 되면 집으로 향하는 차를 탔다.
조금 전 그는 그녀에게 같이 가자고 할 생각이었다. 같은 방향이고, 같은
차를 타고 갈 수 있었으므로. 하지만 그녀는 그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따로 약속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실망감을 안고서 대학로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후문 바로 앞에 있는
오락실로 들어섰다. 그가 자주 이용하는 오락실이다. 비록, 할 줄 아는 오락은
1945정도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3판을 잘 넘기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오래통에 가기 위해서. 혹자는 오락실 안의 노래방이라 하여,
오래방이라 하지만 이것이 어찌 방이 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통이라 칭하고,
그래서 그는 그것을 오래통이라 불렀다.
“한 걸음 뒤에~ 항상~ 내가 있었는데~ 그대~ 영원히 내 모습 볼 수 없나요~ 호~ …….”
그는 항상 즐겨 부르는 ‘인형의 꿈’을 불렀다.
선배는 내 마음 알까….
한참 노래를 부르던 그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조금 더 지체해 버리면 막차를 놓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택시를 타야하고,
택시를 타게 되면 버스 요금의 10배 가까이 돈이 깨져버린다. 그는 그런
낭비를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돈이 풍족하기로서니 낭비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맨 뒤의
바로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제일 뒷자리는 어느 버스든 항상 다른 자리보다 높이 솟아있다. 그는 그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너무 위험한 것이었다. 만약 사고가 날 경우에 가장 많이 다칠 가능성이
있는 곳이 그 뒷좌석이었다. 그렇다고 중간 즈음에 앉기는 뭐한게 그 자리는
내리는 문과 가깝기 때문에 아줌마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가장 선호하는 자리였다.
물론 경로석은 앞쪽에 있다. 하지만 내릴 때 편하게 내리기 위해서 중간을
선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리를 비키지 않아도 되고, 그나마 안전한 편인
뒤에서 한 칸 앞의 자리를 선호하는 것이었다.
두 정거장 쯤 갔을까? 일단의 사람들이 더 탔다. 그가 탔던 곳은 버스 노선이 시작되는
부근이라서 사람이 별로 없었다. 또한, 지금은 출발지에서 가까워서 내리는 사람 또한 없었다.
그는 무심히 밖을 보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자 그는 버스 내부를 한번 슥- 둘러보았다.
아는 사람이 혹 타지는 않았을까 하는 경계의식이었다. 이 주변이 그가 다니는 대학
주변인만큼 아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기 때문이었다. 막 다시 고개를 창 밖으로
돌리려는 찰나 그는 익숙한 뒷모습을 보았다.
설마! 아닐 것이다. 그녀는 오늘 약속이 있다 하지 않았던가. 그는 앞좌석에 앉은
그녀로 추정되는 여자를 살펴보았다.
그녀와 같은 부드러운 검은 머리. 어깨를 넘는 길이. 검은색 얇은 끈으로 이어진 가방.
연녹색 상의. 옆으로 나온 다리로 인해 보이는 청바지. 그리고 작은 검은색 구두.
오늘 만났던 그녀와 같은 스타일이다.
그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 가서 누구인지 확인하는 것 보다는 기다리는 것을 택했다. 그녀가
어딘가에서 내릴 때 그녀는 내리는 문으로 다가가기 위해서 뒤를 돌아볼 것이고,
그러면 자연히 뒤쪽에 앉아있는 그로서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어느새 사람이 많이 타서, 한번 일어섰다가는 다시 앉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점
또한 합리적인 그에게는 그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되어 주었다.
그는 버스가 가는 내내 그녀를 주시하였다. 한 시도 눈을 떼지 않고서. 버스가
한참을 달려, 어느새 그가 내릴 곳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고민하였다. 이대로
내릴 것인가, 아니면 계속 남아서 그녀가 맞는지 확인을 할 것인가. 그는 그냥
내리기로 하였다. 어차피 그녀와 그는 버스가 내리는 곳은 같은 곳이었으니까.
그녀가 맞는다면 여기서 내릴 것이고, 아니라면 안 내릴 것이다. 혹, 그녀가 맞고
그녀가 몇 정거장 더 가서 약속이 있다면? 하지만 지금은 11시가 가까워오고 있는
시간이었다. 매일 아침 8시 즈음이면 버스를 타고서 학교로 가는 그녀가 이 시간에
약속이 있을 리가 없다. 그녀를 보기 위해서, 같이 학교로 가기 위해서 그는 항상
일찍 나와서 기다리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녀와 같이 학교로 갈 수 있었다.
그는 앞의 그녀를 주시하며 일어서서 벨을 눌렀다. 그리고 내리기 위해서 문 앞에
대기하였다. 정거장이 가까워오자 그녀도 일어서는 것이 보인다. 이윽고 그녀가
몸을 돌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그는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당황함을. 빠르게 사라졌지만 그는
분명히 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말없이 싱긋 웃어주기만 하였다.
둘은 버스에서 내린 후에 간단히 인사를 하고서 헤어졌다. 평소라면 그가 그녀를
집에까지 바래다준다면서 이것저것 말을 걸며 달라붙었겠지만 그는 지금 그럴 정신이 아니었다.
집으로 향하는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감히 나를 속였단 말인가! 네년이! 얼마나
잘났기에! 집으로 향하는 그의 주먹은 꽉 쥐어져 있었다.
춤추는 인형 (2)
“돌아오셨습니까, 주인님.”
화가 난 채로 들어오는 그를 맞이하는 한 명의 여성이 문 앞에 있었다.
다리를 곧게 펴고서 허리를 45도로 굽히며 곱게 맞이하였다.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펴고 그의 짐을 받았다.
“오늘 학교는 어떠하였는지요?”
길게 내려오는 머리를 한 쪽으로 묶어서 가지런히 정돈한 이 미녀는
그의 시녀인 루인이었다. 그녀의 복장은 현대식 메이드 복 이었다.
예전에 사용되던 검은색 바탕에 흰 에이프런을 두른 중세식 메이드
복과는 다른, 현대식의 전신이 새하얀 깔끔한 메이드 복이었다. 지금
이런 형식은 호텔 같은 곳의 고급 하인들의 복장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젠장! 오늘은 되는 일이 없어.”
그는 정말 화가 나 있는 듯 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언짢은 일이 있으신가봐요.”
그녀의 물음에 그가 거칠게 옷을 벗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여자가
눈앞에 있는데도 그는 옷 벗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김미경이라는 계집을 알고 있겠지?”
알다마다. 3개월 전부터 들어온 이름이었다.
“물론 알고있어요.”
“그 계집이 오늘 뭐라고 했는지 아나?”
“…….”
그녀는 잠자코 그의 말을 경청하였다. 이럴 때는 그저 들어주면 되는 것이다.
“오늘 그녀에게 같이 갈 수 있겠냐고 청하였지. 그런데 친구와 약속이
있다는군. 할 수 없이 나는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어.”
그 정도로 그의 기분이 나빠질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정한 이유는 그 뒤에 나왔다.
“그런데 10시쯤에 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그 계집이 올라 탄 거야.
처음에는 그녀가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 뒷모습 이었거든.”
그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하지만 내릴 때 분명히 보았어.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 계집의
눈에 나타난 당혹감을!”
“그 천한 것이 주인님에게 거짓을 고하였단 말씀이군요”
그녀는 그의 대화상대로는 언제나 최고였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언제나 말을 잘 알아들어서 좋군.”
그녀는 베시시 미소지었다. 주인님에게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그래서 그 계집을 그대로 두실 건가요?”
감히 주인님에게 거짓을 고한 천것을 어찌 그대로 둔단 말인가?
뭔가 처벌이 필요하다.
“조금 있으면 방학이다.”
그녀는 바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 그녀가
알아듣지 못한 것을 알고는 그는 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눈앞의 여자는 자신이 몸소 추가설명을 해 줄 가치가 있는 여인이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 여자의 순위를 매길 수 있다면 눈앞의 여인은 1순위다.
한때 착각에 빠져서 김미경이라는 천한 계집을 0순위에 올릴 뻔 하였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방학이 되면 연락이 두절되어도 이상할 것은 없지.”
“그렇군요…….”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춤추는 인형 (3)
그 후로 더 이상 그는 아침 일찍 나가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았다.
단지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가끔 가다 학교에서 그녀와 마주쳐도
그는 후배가 선배에게 보내는 간단한 인사만 할 뿐이었다. 학교에서는
아무도 그의 정체에 대해서 모른다. 그는 아웃사이더로 불렸고,
그래서 그와 친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에 대해서 아는 사람
또한 없었다. 그가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학생기록부에는
그가 혼자서 사는 평범한 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디까지나
기록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진실한 정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간은 흘러 방학이 되었다. 정확히는 종강이지만, 실질적으로 방학이었다.
그는 루인에게 물었다.
“준비는 모두 지시한 대로 다 해 놓았겠지?”
준비라는 것은 그 천한 계집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예. 물론 해 두었습니다.”
“좋아. 넌 역시 최고의 여자야.”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뺨을 손으로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에 그녀가 눈을 감으며 그를 느꼈다.
그의 손이 서서히 내려와 그녀의 가슴에 닿았다. 그녀는 반항하거나
소리치지 않았다. 단지 그에게로 더 다가와 그의 손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려 할 뿐.
“아응~”
묘한 신음소리와 함께 그녀가 그에게로 달라붙었다. 그는 손을 돌려
그녀의 허리를 잡아 끌어당기며 나머지 한 손으로 그녀의 뒷머리를 받쳤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고개가 위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자신의
얼굴을 그녀의 얼굴위로 내렸다.
“으음~”
그녀에게는 이 세상 어느 것보다 달콤한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맞닿자 작은 신음소릴 내뱉었다. 그녀에게는 그의 모든 것이 환희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는 환영한다는 의미로
입을 벌려 그녀의 입술로 그의 입술을 맞아 주었다. 서로의 혀가 얽히는
가운데 그녀의 흥분은 더해갔다.
이윽고 그가 입술을 떼었다.
짧은 쾌락은 그렇게 끝이 나 버렸지만, 여운은 남아서 그녀의 몸을 타고
돌았다. 아~ 젖어 버렸어. 그녀는 흥분한 자신의 몸을 느끼며 여기서 멈춘
그를 원망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는 짓궂게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나머지는 일이 완수된 후에 하지.”
그녀는 어서 빨리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할 것이라 다짐하였다.
그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춤추는 인형 (4)
어떤 무리들이 그녀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로 미경은
계절 학기를 어느 것으로 할지를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김미경양?”
그녀의 담당교수 조진환이었다.
“아, 교수님. 안녕하세요?”
그녀는 얼른 일어서서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였다.
“마침 잘 왔어요. 안 그래도 학생에게 할 말이 있었어요.”
그는 학생들에게도 매너교수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예?”
의문을 표하는 그녀에게 그는 자리를 권했다.
“일단 앉아요.”
그녀가 자리에 앉고 나자 그가 차를 한 잔 건네었다. 쟈스민 차였다.
은은한 향기가 과 사무실 내부를 채웠다.
“내가 학생을 보고자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가 흘끗 그녀가 보고 있던 것을 바라보았다.
“미경양. 계절 학기 신청하려고 그러나?”
무슨 말을 하려고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질문에 그녀는 정중히 대답하였다.
“아, 예.”
“자네 혹시 일본에 가 볼 생각 없나?”
“에…일본이요?”
갑작스레 일본이라 말하니 그녀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번에 일본에서 열리는 세계과학기술전시회에 우리 과에서
한 명 초청을 받았는데, 자네가 가면 어떨까 싶어서 말이지.”
“에에~~!!”
그녀는 너무도 놀랐다. 세계과학기술전시회!! 각국의 내 노라 하는
연구소와 대학에서 공동으로 개최되는 그 전시회에! 자신이!
“저…정말 인가요 교수님?”
그는 진정하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진정하게 미경양. 물론 사실이지.”
“가…가겠어요. 아니, 꼭 가게 해 주세요.”
“그럼 미경양이 가는 것으로 알겠으니, 계절 학기는 신청하지 않도록 해요.”
“예!”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해요.”
“예. 그럼 이만.”
“아, 잠깐.”
사무실을 나가려는 그녀를 그가 불러 세웠다.
“네?”
“다른 학생들에게는 자네가 전시회에 간다는 것을 말하지 않도록 하세요.
방학 때 뭐 하냐고 물으면 그냥 멀리 여행 간다고 하고요.”
“예?”
“말하지 않는 게 좋답니다. 괜한 질투와 시기심만 생겨요.”
“예. 알겠습니다.”
그녀로서는 무조건 OK였다. 그 유명한 전시회에 갈 수 있는데 무엇인들 못 할까.
그녀가 사라지고 나자, 교수의 웃음이 짙어졌다. 매너교수 외에도
그에게는 하회탈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언제나 웃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런 그의 웃음이 더욱 짙어진 것이다.
그는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 조진환입니다.”
“「조진환 교수님이시군요.」”
“말씀하신 일은 잘 처리되었습니다.”
“「그런가요. 수고하셨어요.」”
“수고랄 게 뭐 있겠습니까.”
“「어쨌든 잘 해 주었어요. 반응은 어떻던가요?」”
“반드시 자기가 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어찌나 흥분하던지…….”
“「후훗. 어떤 일이 기다릴지 알고 있다면 그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겠지요.」”
“허허허 그야 그렇지요.”
“「저는 일이 있으니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아이고 이거 제가 바쁜 사람 붙잡고 수다를 떨었군요. 어서 들어가도록 하세요.”
「뚜우우- 뚜우우- 뚜우우-」
이내 전화는 끊겼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그의 입가에 매너교수,
하회탈과는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크흐흐 이거 정말 재밌는 일이 벌어지겠구먼.”
조금 전에 보았던 학생을 떠올리며 그는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띠었다.
춤추는 인형 (5)
조진환 교수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그녀는 다른 학생들에게
그 사실을 말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 또한 아웃사이더의 일종이었으므로.
단지 그 이유가 누구와는 달리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지만 과 행사에도
모두 불참하는 아웃사이더였다.
종강을 한 후에, 그녀는 자신이 일본으로 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부모님은
계시지 않기 때문에 먼 시골에 계시는 조부모님께 전화를 드려서 일본으로
간다고 전화를 하였을 뿐이다.
이윽고 시간은 다가와 그녀가 일본으로 출발할 날이 되었다. 그녀는 이른
아침부터 일본으로 갈 사람들이 모이는 공항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리
콜택시를 불러서 문을 나섰을 때는 택시가 대기 중이었다. 그녀는 택시에
몸을 싣고서 일본으로의 꿈에 부풀었다.
전시회에 일반인으로 가는 것과 초대되어 가는 것은 다르다. 일반인은 그저
구경만 할 뿐이지만, 초대되어 간다는 것은 일종의 유학처럼 그곳의
선진기술을 맛볼 수 있게 된다. 그 점에서 그녀는 이번 초청에 자신을 꼭
추천해 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당첨된 것이다. 행운의 여신은
자신의 편을 들어준 것이었다.
그녀는 꿈에 부풀어서 그녀가 떠나고 난 뒤, 이삿짐 차량 한 대가 그녀의 집
앞에 멈춰 서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내린 사람들이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 또한.
얼마쯤 갔을 때 택시가 잠시 멈추었다. 꿈에 빠져있던 그녀에게 택시 기사가
뒤를 돌아보더니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공항 간다는데 합승해도 되겠습니까?”
“에? 예.”
기분이 좋으면 사람이 관대해진다. 또 지금은 아침이고 해서 그녀의 경계심은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동행인은 두 명이었다. 둘 모두 큰 여행 가방을 메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행객인 듯 하였다. 그녀는 그들의 행색을 보고서 공항으로 가는 것이 확실해
보이자 합승을 허락하였다. 한 명은 앞좌석에, 한 명은 뒷좌석에
그녀의 옆에 앉게 되었다.
택시의 경우 뒷좌석 왼쪽은 보통 문을 잠가둔다. 오른쪽으로 계속 탔다가
내렸다가 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위치한 곳은 그 왼쪽이었다.
어느 정도 길을 갔을까? 옆 좌석에 앉아있던 사람이 그녀에게 말을 건네었다.
“김미경씨?”
“에…?”
“혹시 김미경씨 아닌가요?”
“예…? 마…맞는데요?”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그녀는 의심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하 맞군요. 일본에 가시죠? 저도 일본에 가거든요. 제가 인솔 팀에 있어서
참가자들 신상명세서를 검토하였거든요.”
“아~ 예.”
그제야 그녀는 납득하였다.
“이번에 같이 일본으로 갈 원영균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그녀에게 악수를 청하였다. 그녀는 의심 없이 악수를 하기
위해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손은 그녀의 손이 아닌 그녀의
뒷머리를 잡았다. 그녀가 뭐라고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는 재빨리
그녀를 밖에서 볼 수 없도록 손을 당겨, 그녀의 고개를 아래로 숙여 버렸다.
그의 왼손에는 어느새 작은 손수건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는 재빠르게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과 코를 막았다.
그녀는 당혹감과 함께 의식이 서서히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공항으로 향하던 택시는 진로를 바꿔 외진 곳으로 향하였다.
공항.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 옆에는 ‘일본 세계과학기술전시회’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그 무리들을 향하는 한 명의 여성이 있었다. 무리들 쪽에서
그녀를 알아보고는 다가오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아, 미경씨. 일찍 왔군요.”
미경이라 불린 그녀는 싱긋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거든요.”
춤추는 인형 (6)
외딴곳에 있는 아담한 집 한 채. 그 안에 민성이 살고 있었다.
그에게로 다가오는 한 여성이 있었다.
“주인님.”
“음.”
“오는 중이랍니다.”
“그런가.”
그는 몸을 돌려 그녀와 마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깔끔한 순백의
현대식 메이드 복장이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그녀의 몸을 그에게로 가까이 밀착시켰다.
그리고 마주치는 서로의 입술.
“언제나 너는 나를 만족시켜 주는구나.”
“그것이 저의 바람이자 행복입니다.”
“그것도 그렇군. 그럼 우린 서로가 원하는 것을 주고받는 셈인가?”
그녀가 웃었다. 그도 웃었다.
다시 서로의 입술이 맞붙는다. 좀 더 오래 계속되는 입맞춤.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여민 옷을 살며시 풀며 안으로 비집고 들어간다.
“하아~”
작은 한숨과 함께 그녀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가슴이 그의 손에 닿았다.
여기서 브래지어 하나만 더 벗겨내면 맨살이 닿는다. 그녀의 상의를
헤집으로 그는 양쪽 가슴을 번갈아가며 주물렀다.
“으으응~”
그녀의 허리가 살며시 앞으로 휘면서 그는 좀 더 편안하게 가슴을 만질 수
있었다. 그가 입술을 점점 아래로 내려 그녀의 목덜미까지 다가왔다.
-쪽.
그녀의 하얀 목에 그가 인장을 찍었다.
“넌 내거라는 표시야.”
-띵동~
그때 벨 소리가 들렸다.
“왔나보군.”
그는 그녀를 놓아 주고서 일어섰다. 밑에는 여전히 늘어진 채로 앉아 있는
그녀가 있었다.
“복장 정리해.”
그는 타인에게는 그녀의 흐트러진 모습을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그의
보물1호를 아무에게나 보여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세상 누구라도.
그의 명에 그녀는 즉각 일어나서는 복장을 정리하였다. 익숙한 듯, 상당히
빠른 동작이었다. 복장을 모두 정리한 후에 그녀는 예약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다. 물론 그와 함께.
그녀가 문을 열자, 3명의 남자가 기절한 한 명의 여자를 업고서 들어왔다.
“음… 좋아.”
“수고했어요.”
그와 그녀가 납치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었다.
여자를 메고 온 남자가 바닥에 내려놓고서는 그들의 인사에 대답하였다.
“여차~ 이거 꽤 무게가 나가는군요. 수고라니 별 말씀을요. 이 정도는 일도
아닙니다. 언제든지 시켜만 주십시오.”
“음… 그러지.”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마실 거라도 내 오지요.”
루인은 그렇게 말하고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가고, 나머지 두 명과
함께 네 명은 모두 거실로 모였다.
“앉지.”
민성이 먼저 앉으면서 자리를 권했다. 어느 모로 보나 하수인을 대하는 태도였다.
하지만 상대는 세 명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 뒤처리는 제대로 하였겠지?”
이삿짐을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입니다. 지금쯤이면 본가로 운송중일 것입니다.”
“서류상의 처리는 완벽한가?”
“물론입니다.”
옆에 있던 한 남자가 품에서 서류를 꺼내어 그에게 건네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서 민성의 앞에 놓았다.
“여기 관련 서류입니다.”
민성은 서류를 받아서 살펴보았다. 그러는 동안에 루인이 차를 내어왔다.
“아, 고마워.”
그의 감사에 그녀가 싱긋 웃었다. 조용히 웃는 그녀의 작은 미소는 천사의
미소와 같았다. 절로 흐뭇해진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대충 훑어보고는
그대로 내려놓고는 그녀를 옆에 앉혔다.
“이리 와서 앉지 그래?”
“네. 그럼.”
그녀가 그의 옆에 와서 앉았다. 보통의 여인처럼 조금 떨어져서 앉지 않고,
그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는 어깨까지 붙여서 찰싹 달라붙듯이 앉았다. 그는
왼팔을 들어서 그녀의 뒤로 둘러서 그녀의 허리에 걸쳤다. 한 팔에 감기는
허리는 무척 부드러웠다.
그녀가 그 자세로 앞에 놓인 차를 한 잔 들어서 입가에 가져가서는 후- 불어서
뜨거운 차를 조금 식혔다.
“후- 후-.”
그는 그녀가 후- 불 때마다 튀어 나오는 입술을 보면서 갈증을 느꼈다. 저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힘껏 빨아 당기면 해결될 것이다. 그는 괜한 갈증에 앞에 놓인
차라도 마시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때 그녀가 먼저 차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찻잔이었다.
“드세요.”
“어…그래.”
그는 한 손으로 찻잔을 받으려 하였지만, 그녀는 한 손을 들어서는 그의 손을
살며시 물리었다.
“드세요.”
“음…….”
그는 찻잔에 얼굴을 살며시 가져갔다. 은은한 차향이 그의 코를 통해서 들어왔다.
“재스민?”
“네.”
그가 즐기는 차였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차를 내 오라고 하면 언제나 재스민
차를 내 놓았다. 열대와 아열대지방에서 자라는 재스민의 꽃잎은 새하얀 색이어서,
재스민차를 마실 때면 그는 언제나 순백의 메이드 복을 깨끗하게 차려입은 루인을 떠올린다.
차를 마시며 조용히 사색에 잠겨있는 그에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조용히 자신의 천사를 떠올릴 수 있었다. 한 손에는 그녀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면서.
잠시 상념에 빠져있던 그가 찻잔을 쥔 손을 살며시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본가로 간다.”
춤추는 인형 (7)
“으음…….”
그녀는 서서히 정신을 드는 것을 느끼면서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맨 먼저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하얀색이었다. 아직은 몽롱한 상태라
뭐가 먼지 알 수도 없었지만, 그녀에겐 온통 하얀 색만이 비춰졌다.
점차 사물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을 느끼면서 현 상황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해서 머리를 굴려 보았다. 자신은 분명 일본에 가기 위해서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잡아탔었다. 그리고 누군가와 합승을 하였고, 그는 인솔 팀의 한 명이었다.
그 후에 어찌어찌하여 정신을 잃은 듯한데…….
중요한 것은 어떻게 납치되었느냐가 아니었다. 그녀가 도대체 왜 누구에게
무엇 때문에 납치를 당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여기는 어디이며 어떻게 해야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음…여긴…….”
정신이 들자 그녀는 일어나려고 하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시각과 청각,
후각 촉각 등 감각은 돌아왔으나 몸은 천근만근 어찌나 무거운지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흑…으윽…….”
한 팔로 힘겹게 상체를 버티면서 겨우 상체만을 일으켜서 앉을 수 있었다.
아직 약 기운이 남아있기 때문이었지만 그녀는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간신히 상체만을 일으킨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선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자신이 앉아있는 침대. 세 사람 정도는 편히 잘 수 있을 듯한 큰 침대는 하얀 시트에
싸여 있었고, 각 모서리에는 팔뚝만한 기둥이 있어서 천장이 달린 침대였다. 그리고
그 천장에서는 빛을 차단하는 커튼을 내릴 수 있게 되어있었다. 블라인드처럼
오르내림을 조절하는 장치는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그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넓은 방 안을 환희 비추는 커다란 창. 남향으로 난
그 창은 매우 넓었고, 높았다. 창의 끝은 천장과 맞닿아 있었는데 햇살은 좀 더 많이
받아들이기 위함이었다. 아래쪽과 위쪽으로 창이 분리되어 있었는데, 아래쪽은
열 수 있었고 위쪽은 특수한 장치가 있어야 열 수 있거나 열 수 없는 것 같아 보였다.
한쪽에는 백색 옷장이 있었는데, 현재 일어설 수 없는 그녀로서는 안에 어떠한
것들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옷장 옆에는 커다란 전신거울이 있어서 옷을
고르기 편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화장대가 있었다.
다른 한 쪽에는 작은 문이 하나 딸려 있었는데, 서재 같은 것인지 욕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방을 둘러보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노크 없이
그냥 문을 여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아직 깨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깨어났군요.”
낯선 여인은 침대에 앉아있는 그녀를 보고서는 놀랍다는 듯 작은 탄성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로 다가와서는 침대 앞 작은 탁자에 가져온 것을 내려놓았다.
“수프를 끓였어요. 드실 수 있겠어요?”
보자마자 먹을 것부터 권하는 그녀에게 미경은 우선 궁금한 것부터 묻기로 하였다.
“저기…….”
“네?”
“여기는……?”
“아, 여기는 주인님의 저택 이예요.”
싱긋 웃으면서 대답을 한다. 하지만 듣고 있는 미경으로서는 답답함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화병이 도지게 하여 자신을 간접 타살시키려는 게 아닌지 그 저의가
궁금할 수밖에 없는 대답이었다.
“아 그러니까 여기가 어디죠?”
“네. 주인님의 저택입니다.”
“…….”
뭔가 말이 안 통한다. 서너 살 먹은 어린애와 대화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니까…에…그 주인님이……?”
“네. 저희들의 주인님이십니다.”
“…….”
“……?”
뭔가 더 궁금한 것은 없냐는 듯이 보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미경은 그녀가
가져온 그릇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따뜻한 듯 김이 엷게 피어오르는
수프를 보니 문득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꼈다.
할 수 없이 미경은 궁금한 것은 차후에 묻도록 하고, 우선 배부터 채우기로 하였다.
급한 것이 우선인 것이다.
“그것 좀 가까이 가져다주겠어요?”
그녀는 즉시 미경이 수프를 먹을 수 있게 준비했다. 냅킨을 그녀의 허벅지 위에
얹고서, 그릇을 그녀의 턱 밑에 대어 주고는 한 스푼 떠서는 그녀의 입에 대 주었다.
“저기…제가 먹을게요.”
이런 과다한 친절에 생소한 미경으로서는 오히려 이런 것은 불편할 뿐이었다.
거절하려는 미경에게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의 분부를 어겨서는 절대로 안 된다.
“안 돼요.”
“제가 먹을 수 있다니까요.”
“그래도 안 돼요.”
“왜 안 되죠?”
“주인님의 명이니까요.”
미경은 문득 그녀가 자꾸 언급하는 주인님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아까부터 계속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 이 집도 그 주인인가 하는 사람의
집이라고 하였고 지금도 주인의 명이라고 하지 않는가.
춤추는 인형 (8)
미경은 조심스레 말을 텄다.
“저기…….”
“네? 말씀하세요.”
“그 주인님이라는 사람은 누구죠?”
“저희…….”
“아뇨.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말해주세요.”
또다시 ‘저희들의 주인님입니다’라는 황당한 대답이 나오기 전에 미경은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나마 그녀는 정말로 정신 연령이 애 수준의 바보는
아니었는지 미경이 원하는 바를 알아챈 듯, 엷은 웃음을 띄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궁금한가요?”
“네 그래요. 자꾸 주인님. 주인님. 그러는데 누군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다시 한번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차차 알게 될 거에요.”
그 웃음에 미경은 그 사람에 대해서 더 물어볼 수 없었다.
그녀는 미경이 수프를 다 먹고 나자, 빈 그릇을 챙겨 들고는 나갈 준비를 하였다.
일어서서는 그녀에게 이것저것 설명을 해 주고 감을 잊지는 않았다.
“우선, 저기 보이는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욕실이 있고, 몸을 씻은 다음에
저기 옷장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꺼내 입으세요. 그러고 나서 주인님을 뵐 수 있을 거예요.”
“에…? 예.”
저기가 정말 욕실이란 말이야? 갖출 건 다 갖추었네. 이거 완전히 특급 호텔 이잖아?
그녀는 괜찮다면 그 주인이라는 사람에게 이곳에서 며칠 묵을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멋진 침대와 햇살이 들어오는 창, 고급
옷이 한가득 정렬되어 있을 듯한 큰 옷장. 단아한 화장대. 욕실 딸린 작은 방.
얼마나 클지 상상도 안 가는 거대한 저택. 일하는 하녀들, 시중 드는 시녀들.
꿈에서나 그려볼 만한 공주님의 생활이 아니던가.
“혼자 일어날 수 있겠어요?”
그녀는 자신의 몸 상태를 체크해 보았다. 앉아서 좀 쉰 덕분인지 수프를 한 그릇
먹어 치운 덕분인지 몸은 많이 나아져 있었다.
“괜찮은 것 같군요.”
“도와드릴까요?”
“네. 좀…….”
그녀가 와서 상체를 받쳐주자 미경은 그녀의 어깨를 짚고서는 천천히 일어났다.
혼자서도 할 수 있겠지만 낯선 곳에 있는 이상 한 명이라도 자신에게 우호적인
상황을 만들어 두는 게 좋았다. 그런 점에서 눈앞의 그녀는 안성맞춤이었다.
어쨌든 미경은 그녀의 도움 하에 완전히 일어설 수 있었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로 천천히 한 발 한 발 움직여 보았다.
“하나. 두울. 세엣. 네엣. 좋아요. 이제 괜찮은가 보네요.”
그녀가 조심스레 한 발 한 발을 떼는 그녀를 보고는 마치 똑똑한 아이를 바라보는
듯이 그녀에게 칭찬을 하였다.
“이제 괜찮거든요? 그만 나가주실래요?”
미경의 말에 그녀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안 돼요. 환자를 혼자 두다니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예요.”
“저기…저는 환자가…….”
“안정. 안정. 절대안정이에요.”
나는 더 이상 환자가 아니야! 미경은 그렇게 말하는 그녀에게 외치고 싶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환자 취급을 하는 거야. 정말 짜증나. 지금은 혼자 있고 싶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소리치는 대신에 상냥한 웃음을 띠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모르는군요. 이름이 뭐죠?”
“남의 이름을 물을 때는 자신의 이름을 먼저 밝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름을 묻는 미경에게 그녀는 그렇게 대꾸하였다. 미경은 짜증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면서 속으로 눌러 참았다.
“김미경 이예요.”
춤추는 인형 (9)
미경이 대답하자, 그녀는 자랑스럽게 어깨를 떡 벌리더니, 가슴에 힘을
주고는 자신의 신상내역에 대해서 토해내기 시작하였다.
“흠흠.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세계 최강의 신영을 이룩한 그 근원지이자
본가인 이 저택에서 일하는 프로페셔널 메이드로서…….”
자, 잠깐. 지금 뭐라고? 미경은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자… 잠깐만요. 방금 뭐라고 했죠?”
자신의 말을 끊은 것이 기분이 좋지 않은지 그녀가 살짝 인상을 쓰더니
다시 대답해 주었다.
“프로페셔널 메이드…….” “아니, 그 앞에!”
미경은 자신도 모르게 격한 반응을 보였지만, 그 자신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계 최강의 신영을…….”
“신영!!”
“맞아요. 신영이에요.”
미경은 언제 환자였다는 듯이 그녀에게 순식간에 다가와서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는 재차 물었다.
“정말… 정말 그 신영이 맞아요?!”
“물론이에요!”
“아아~.”
미경은 머릿속으로 동화 같은 그림을 그려 보았다. 위기의 순간에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서 구해주고, 평범한 여자와 왕자와의 꿈같은 사랑. 자신의 상황과 딱 맞지
않는가. 신영의 주인이라면 분명 왕조 시대의 황제 폐하와도 같은 것. 지금 그의
궁전에 그녀가 있는 것이다.
미경은 머릿속으로 환상을 그리고 있느라, 눈앞의 그녀가 역겹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놀라는 모습이 가관이군요.”
“그래. 저 꿈에 부풀은 모습을 봐. 너무나 바보 같지 않아?”
한 방에서 남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꿈은 꿈일 뿐이지요.”
여자의 목소리는 분명 화면속의 그녀를 비웃고 있었다.
“훗. 나중에는 꿈조차 꾸지 못하게 해 주지.” 그에 답하는 남자는 그녀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었다. 그는 한민성 이었다.
“어머~ 그건 너무하지 않나요?”
그의 말에 그녀 루인이 그를 살짝 흘겨보았다.
“후후 뭐가 너무하다는 거지?”
그는 자신의 앞에 등을 보이고 앉은 그녀의 앞으로 손을 뻗어서는 가슴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아아~ 그건 너무 관대해요.”
그는 나머지 손도 뻗어서 두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살며시 애무하였다. 그녀의
신음소리가 더 깊어졌다.
“관대하다니?”
“흐응~ 한창 꿈에 부풀게 한 다음에 그 꿈을 산산조각 내 버리는 거예요.”
“후후… 역시 당신은 똑똑해.”
그들이 보는 화면에는 미경과 한 명의 메이드가 서 있는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영상 뿐 아니라 음성까지 생생이 나오는 화면이었다.
“저런 천한 것은 제 주제를 알아야 해요.”
“그래. 그래.”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는 수컷의 영역표시를 해 나갔다.
춤추는 인형 (10)
“네르.”
한참을 꿈에 부풀어 있던 미경의 정신을 원래의 세계로 끌어당긴 것은
그녀의 토라진 듯한 목소리였다.
‘아!’
그제야 미경은 앞에 사람을 놓고서 자신이 망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정말 둔해도 이렇게 둔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의 바보 같음을 자책하며
미경은 얼른 그녀에게 사과하였다.
“미안해요.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미경의 태연한 대답에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방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눈에 뻔히 보였는데 말이다. 분명히 주인님과의 로맨스를 꿈꾸었을 것이다. 이곳을
거쳐 간 모든 여자가 그런 생각을 가지니까. 정말 꿈도 야무지다. 하지만 그녀는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는 대신에 살며시 웃는 가면의 표정을 만들어 내었다. 그것이
눈앞의 멍청한 계집에게 보내는 그녀만의 비웃음이었다.
“제 이름이에요. 네르.”
미경이 활짝 미소지었다. 좀 전의 실수를 무마하려는 것이었다.
“좋은 이름이군요. 잘 어울려요. 그냥 네르라고 불러도 되죠?”
“네. 그러세요. 저도 미경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겉으로 보이는 분위기는 화기애애하였다. 겉으로는 말이다.
“그럼 이제 씻어도 되겠지요?”
미경은 이제 씻을 테니 그만 나가달라는 뜻이었다.
“네. 얼른 씻어요.”
하지만 그녀 네르는 나갈 생각을 않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미경은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말하였다.
“저기… 씻을 건데요.”
“네. 그래야죠.”
앞에도 그랬지만 이 여자는 뭔가 말이 안 통한다. 정말 짜증나는 여자라고
생각하며 미경은 직설적으로 말하였다.
“그만 나가주시겠어요?”
미경의 말에 네르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안 될 말이다.
네르는 미경에 대한 시중을 드는 동시에 감시역을 맡고 있기도 한 것이다.
“목욕 시중을 들어 드리겠어요.”
“저 혼자 괜찮으니 나가주세요.”
“안 돼요. 편히 모시라는 주인님의 분부입니다.”
그녀가 강하게 나오자 미경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었다. 이곳은 그녀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럼 씻고 나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 줘요. 그 정도는 괜찮겠지요?”
미경 또한 그녀가 왜 나가지 않는 것인지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해가 가지 않기도 하였다. 자신이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감시 같은
것을 한단 말인가.
미경의 말에 네르는 잠시 생각하는 듯이 눈을 감고는 고개를 좌우로 까딱
까닥거리며 침묵을 지켰다.
“음…….”
그런 그녀에게 자신의 주장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미경은 계속 설득조의 어조로
말을 늘어놓았다. 물론 친근한 듯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네르. 전 여태까지 목욕 시중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그런 과한 친절은
제게 불편할 뿐이에요. 그러니 나가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제가 씻고 나올 동안
여기서 기다려 달라는 것이니 그 정도는 어렵지 않잖아요? 설령 당신의 주인이
명한 일이라 해도, 당사자가 불편해 하니 그 정도는 너그럽게 이해해 줄 거예요.”
잠시 생각에 잠긴 척 하던 네르로서는 미경의 말에 인상을 팍 쓸 뻔했다. ‘당신의
주인이 명한 일’이라고?! 주인님께서 명한 일이다! 이해해 줄 거라고?! 이해해
주시길 빌어야지! 은근슬쩍 자신의 주인님에게 높임말을 생략하는 그녀에게 네르는
큰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질대로 억지로 목욕 시중을 든다고 하여서는, 그녀를 있는 대로 괴롭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여기에 대해서 따로 명받은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목욕 시중을 든다 하면, 분명 거절할 거예요. 당신은 그럼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방에 남겠다고 해요. 그리고 10분쯤 뒤에 그녀를 따라 들어가서 목욕 시중을 들도록 해요.’
그녀에게 미경이란 천녀(賤女)의 시중을 들도록 명한 주인님의 옆에서 그분의 전속시녀이자
모든 시녀들의 시녀장인 루인님께서 덧붙인 내용이었다. 물론 루인님의 말이라면
다 들어주는 주인님께서는 그렇게 하라 이르셨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요. 전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천천히 씻고 나오세요.”
“고마워요, 네르.”
네르는 웃으며 어서 들어가 보라고 재촉하였다. 물론 미경이 욕실로 들어간 후에 문을
향해서 가운데 손가락을 살며시 들어주는 것을 잊지 않았음은 당연지사였다.
'확 미끄러져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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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인형 (11)
욕실에 들어와서 문을 닫은 미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겨우 혼자
생각할 여유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녀로서는 네르의 목욕시중을 거부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받고 싶었다는 말이 맞으리라.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그러한 대접을 받아 보겠는가. 하지만 낯선 상황에서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그녀로서는 이렇게라도 잠시 짬을 낼 수밖에 없었다.
“하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곳에 왔는지도 가르쳐 주지 않고, 이곳이 어디인지 정확한
위치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단지 신영의 본가라고만 하였을 뿐.
‘앙큼한 년. 정작 중요한 건 하나도 가르쳐 주지 않다니.’
애꿎은 네르만을 욕할 수밖에 없는 그녀였다.
‘아아~ 그나저나 그 주인님이라는 사람은 어떠할까.’
미경은 신영의 본가에 사는 주인님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무척 궁금했다. 분명
주인님이라 불린다면 저택의 책임자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집사나 지배인
정도로 불릴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주인님이라 하였고, 그렇다면 이 저택의
주인이라는 뜻이었다. 이 저택은 신영의 본가라고 하였으니 이 저택의 주인이라는
말은 즉, 그 대단한 신영의 주인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었다.
‘정말 멋져!’
멋져도 이보다 더 멋질 수는 없다. 세상 어느 남자가 있어 신영의 주인보다 나을 수가 있을까.
‘아!’
그녀는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주인이라면 분명 신영의 회장 같은 것일 테고,
일반적인 기업의 회장의 이미지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하얗게 센 머리와 주름진
얼굴에 탐욕스런 인상.
‘그, 그럴 리가 없어.’
그녀는 세차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분명 늙어도 곱게 늙은 청초한 용모의 중년일
것이라고 머릿속으로 자기 암시를 걸었다.
만약 그녀가 TV라도 제대로 보았다면 이런 상상은 필요 없는 것이었다. 신영의
회장은 대통령보다 더 유명한 사람으로서 TV를 조금만 본다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세상살이에 대해서는 그 속에서 살아가기에 조금 알지만,
학문에 전념하느라 TV같은 것은 제대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맞아! 그 정도 된다면 분명 아들이 있을 거야! 앗!”
문득 드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목소리를 내어 버렸다.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밖에서 네르가 분명 들었을 것이었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 정도 나이가 되면(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분명 후계자가
있을 것인데 말이다.
‘아! 하지만 이런 초거대 기업의 후계자라면 분명 약혼녀가 있을 텐데……. 하지만 어차피
정략일 텐데 내가 뺏으면 되는 거야!!’
참으로 당찬 생각을 하며 미경은 욕조에 몸을 담갔다. 따뜻한 기운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가며 그녀의 피로를 살며시 풀어 주었다.
"으음~ 도련님……."
그녀는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이름도 모르는 상상속의 후계자를 생각하며 살며시
보지 둔덕을 쓰다듬었다.
큰 키, 넓은 어깨, 튼튼한 근육이 그녀의 몸을 감싸며 그녀의 귓가에 달콤한
사랑의 말을 속삭인다. 사랑해…… 그리고 이윽고 그의 커다란 남성이 자신의
몸속을 파고든다. 그렇게 된 후에는 임신을 하게 되고, 수십만의 부하 직원을 발아래
거느린 왕비가 되는 것이다.
‘아앙~’
혼자서 망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미경이었다.
‘지랄. 보지나 확 뚫어 버릴라.’
밖에서 이미 모든 것을 지켜보는 네르로서는 저 썩을 년이 이루지 못할 꿈을
꾸는 것을 보며 이를 갈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저 갈보 년을 묶어놓고서
밀대 막대를 이용해 보지부터 입까지 뚫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주인님의 엄명이
있으니 속으로 꾹 참으며 상상으로만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그 편이 더 재미있기도 하겠어.’
네르는 훗날 망가진 미경이 어떤 모습이 될지 상상하는 것으로도 꾀나 즐거웠다.
‘혹, 저 년하고 주인님하고 정말로 이루어진다면…….’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휙휙 저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주인님에게는
루인님이 계시다.
‘처녀인지 확인을 해 보라 하셨으니…….’
루인님께서 그녀에게 목욕 시중을 들 때, 미경이 처녀인지 아닌지를 확인해 보라고
밀명을 내린 것을 떠올리며 그녀는 문을 두드렸다.
-똑똑
그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이 방은 문을 잠글
수 없게 되어있다.
갑자기 문이 열리자 미경이 놀라서 물 속으로 몸을 완전히 담그는 게 보였다. 그녀는
비웃음을 속으로 감추고는 미소를 띤 채로 미경에게 다가갔다.
“네르예요. 등 밀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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