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o, Teacher 불륜 - 상편
2018.04.14 21:33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큰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친구의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친구의 남편과 사랑에 빠진지, 햇수로 3년 째였다.
난 공교육 속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담당과목은 수학. 내 친구 역시 영어를 담당하는 교사이다. 이름은 김영숙, 현재 나와 42살로 동갑이다.
영숙이를 처음 만났을 때는 28살이었는데 10여 년 전 H 중학교에서 근무를 할 때였다. 그 당시에 서로 담당 과목은 달랐지만 동갑내기로서 조금의 친분은 가지며 지냈고, 본격적으로 친구가 된 것은 몇 년 뒤의 일이었다. 내가 전근을 간 중학교에 영숙이 역시 전근을 오게 된 것이었다.
같은 학교에서 근무를 하게 되는 것은 큰 우연이었다. 이 우연이 반복되면서 영숙이와 나는 언제부터인가 서로 말을 놓으며 마음을 터놓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 영숙이는 성격도 좋았고 생각하는 가치관도 나와 비슷했기 때문에, 소위 말이 잘 통하는 친구였다.
영숙이와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서로의 가정에 관한 문제였다. 난 일가친척이 없이 홀아버지 밑에서 자라왔다. 당연히 교사가 되기 전까지 가정 형편은 항상 어려웠다. 내가 교사가 되어서 집안 사정이 조금 나아지려고 할 때, 아버지는 췌장암 선고를 받으셨다. 청천 벽력같은 소식 이였기 때문에 이리저리 발버둥을 치며 치료를 해보려고 했지만 결국 2년 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세상에 혼자 남을 딸을 걱정하셨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당신의 친구의 아들과 나를 맞선을 보게 했고, 난 아버지의 마지막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아무런 애정도 없이 아버지의 친구 아들과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서둘러 결혼을 해버렸다.
급하게 먹는 밥은 체하기 마련이다. 세상의 이치가 모두 그러하다. 아무런 애정 없이 시작한 결혼 생활은 순탄치가 않았다. 남편은 도전 정신이 높고 야망이 큰 사람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고집스런 성격에 외골수적인 모습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가치관과 성격 때문에 남편은 남의 밑에서 일을 하지 못했다. 남편은 사업하기를 원했다.
맨발로 가시밭을 걷는 날의 연속이었다. 남편은 여러 사업에 손을 댔다. 건설사 하청업체를 해보기도 했고, 때로는 그와는 전혀 다른 식당을 운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의 모든 사업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대부분의 사업 자금은 아버지의 친구, 즉 남편의 아버지인 시아버지의 주머니에서 나왔기 때문에 가세는 점점 기울어졌다. 차압도 당해봤고 1년에 10번이 넘는 이사를 해보기도 했다.
난 그런 남편을 보며 지쳐만 갔지만, 남편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9번 실패를 하더라도 단 1번 크게 성공을 하면 인생 역전이 되는 사업의 특성 때문일까?. 사실 사업 성공이라고 할 수 없지만 우연찮게 지인의 말을 듣고 남편이 시아버지 명의로 사놓은 땅이 몇 년 뒤에 정부의 개발 정책에 맞물려 대박을 터뜨렸다. 그 뒤로는 모든 일이 잘 되었다. 남편이 손을 대는 것마다 성공을 했다.
그리고 현재, 남편은 경기 지역에 골프장 2개를 운영하는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었다. 최근에는 스크린 골프장이 인기를 끌면서, 그에 관하여도 사업을 확장하려는 모습이 보였다. 남들은 남편을 보고 사업 수완이 좋은 사람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그리고 나를 보고는 능력 있는 남편을 뒀기 때문에 행복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난 남들의 말과는 달리 행복하지 않았다. 집에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남편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그동안의 고통과 노력에 대해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돈을 물 쓰듯이 쓰고 다녔다.
처음에는 사업이 성공하면서 그만큼 바쁜 줄 알았다. 그러나 남편의 셔츠에서는 립스틱 자국이 여러 번 발견 되었고, 그의 바지에서는 유흥주점에 갔다 온 흔적들이 역시 발견 되었다. 셔츠와 바지를 내밀며 남편에게 화를 냈지만, 남편은 오히려 사업 때문에 바쁜 사람을 붙잡고 잔소리를 한다며 역정을 냈다. 사업을 하면서 그런 곳에 갈 수 밖에 없는 것을 왜 이해를 못하냐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때부터 남편의 외박이 시작이 되었다. 한 두 번의 외박이 장기가 되었고, 이제는 같은 집에 살면서도 얼굴을 보는 일이 드물었다. 학교에서 퇴근을 하고 집에 오면 항상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 부부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남편은 불임이었다.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는 텅 빈 집에서 혼자 우는 날이 많아졌다. 세상에 의지할 사람은 나 자신 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언젠가부터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남편이 집에 들어오는 날에 다른 살림을 차린 것이 아니냐고 물으면 절대 그런 일 없다고 했다. 그리고 남편은 왜 자신을 불륜을 저지르는 부도덕한 사람으로 몰아붙이냐며 역정을 냈다. 난 남편의 바지를 붙잡고 울었다. 제발 집에 들어오라고, 그리고 나를 안아주라고 울면서 말했다. 남편은 나를 외면했다. 나를 보는 것이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집을 나갔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한 번은 남편에게 이혼을 하자고 했지만, 남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차라리 이혼을 하고 그 여자랑 알콩달콩 살라고 소리를 쳤지만, 남편은 나의 뺨을 치며 화를 했다. 우리는 부부였지만, 더 이상 부부가 아니었다. 남편에게 이혼 요구를 하고 뺨을 맞은 순간, 난 그를 마음속에서 포기했다. 이제는 서로 각자의 삶을 살기로 했다. 남편이 무엇을 하든지, 또 내가 무엇을 하든지 서로에게 관심을 끄기로 했다.
단지 우리가 부부의 모습을 보일 때는, 집안 및 외부 행사가 있을 때뿐이었다. 시댁에 가서 시부모님을 뵐 때나, 부부모임 같은 외부 모임에서는 형식적이나마 우리는 행복한 부부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런 나의 불행한 가정사를 친구 영숙이는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내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난 친정도 없고 자식도 없었다. 오직 친구인 영숙이만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영숙이는 이런 나의 슬픈 이야기를 들어줬고, 때로는 남편과 나의 사이를 원활하게 만들기 위해서 많은 조언들을 해줬다. 그리고 남편과 다시 좋은 관계가 되기를 자신의 일처럼 기원해줬다.
그런데 나는 이런 영숙이를 배신했다.
몇 년 전, 내가 힘들어하고 있을 때, 영숙이가 자신의 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했고 난 흔쾌히 응했다. 학교에서 퇴근 후에는 매일 혼자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은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영숙이 집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갔다.
그런데, 이 저녁식사 초대가 나와 영숙이, 그리고 영숙이의 남편인 철규씨와의 관계를 복잡하게 엮게 될지는 그 때는 꿈에도 몰랐다.
영숙이 집에 도착하고 그녀의 남편인 철규씨를 보고 난 깜짝 놀랐다. 철규씨는 친구라고 소개하는 영숙이의 말을 들으며 나를 아주 반갑게 맞아줬는데, 그는 나를 기억하지는 못하는 듯 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났지만, 난 또렷하게 철규씨를 기억하고 있었다. 20년 전, 철규씨와 난 한 곳의 미팅 장소에 같이 있었다. 비록 당시에는 파트너가 되지 못했지만, 철규씨는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큰 체격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내 머리는 분명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철규씨와 내가 한 미팅 장소에 같이 있었던 사실은 한 편의 추억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철규씨가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난 굳이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또한 철규씨는 현재 내 유일한 친구 영숙이의 남편이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애써 밝히는 것이 옳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저녁 식사는 유쾌한 시간이었다. 인근 중학교 체육 선생님을 하고 있다는 철규씨는 생각보다 상당히 부드러운 남자였다. 그리고 남을 배려하고 편안하게 할 줄 아는 남자였다. 난 그런 철규씨와 대화를 나누며 영숙이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영숙이의 옆에 있는 든든한 아들을 보며 이것이야 말로 정말 행복한 가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가볍게 맥주를 마시고 담소를 나눴다. 이야기를 나눌 수 록 나를 편안하게 대해주는 철규씨가 만약 내 남편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면 옆에 있는 영숙이에게 미안했기 때문에 아주 잠시 했을 뿐, 그때는 심각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첫 저녁식사 초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서 화목한 영숙이의 가정을 떠올리며 흐뭇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가정을 가지지 못한 나 자신이 불쌍하기도 했다. 스스로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 그만큼 비참한 일도 없을 것이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어느새 내 눈에는 눈물이 한 가득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어두운 집에 돌아와서는 침대에 얼굴을 묻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제는 외로움에 익숙해졌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울어야 했는지 스스로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눈물일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눈이 부은 채로 학교에 출근을 했고 영숙이는 나의 탱탱 부은 나의 눈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다. 마땅한 대답이 없어서 ‘그냥 울고 싶었다’라고 말을 했고, 영숙이는 슬픈 표정으로 나를 다독거려줬다.
“남편이랑.... 다 잘 될 거야.... 기운 내.”
영숙이의 위로대로 남편과 잘 지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나 역시 남편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우리 여행 갈래?. 부부 동반으로?.”
얼마 지나지 않으면 학교는 여름 방학이었다. 영숙이는 나에게 부부 동반으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 내 사정을 알고 있는 영숙이는 부부 동반으로 여행을 가면 나와 남편의 사이가 좀 더 좋아질 것이라고 말을 했다. 난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을 했지만, 영숙이는 막무가내였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영숙이의 이런 막무가내가 나를 위한 것임을...
“그럼 내가 남편하고 상의해서 계획을 세울게... 넌 남편 설득을 해봐... 알았지?.”
나와 남편의 관계 개선을 위한 부부 동반 여행은 친구 영숙이에 의해서 계획 되었다. 난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위해서 이렇게 애써 주는 영숙이의 제안을 거절 할 수는 없었다.
남편을 설득 시키는 건 힘들지 않았다. 대외적으로는 우리는 금슬이 좋은 부부였기 때문에, 서로의 부부모임에는 큰 불만 없이 참여 해주는 관행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행지는 제주도로 결정되었다. 2박 3일 정도의 짧은 일정이었다. 대부분의 준비는 영숙이가 알아서 했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은 그저 경비를 보태는 일 뿐이었다.
여름 방학이 시작이 되었고, 여행 날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부터 큰 기대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여행 날이 다가올수록 가슴이 두근거렸다.
‘철규씨...........’
우습게도 난 영숙이의 남편인 철규씨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고 있었다.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애써 생각했다. 철규씨를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영숙이의 화목한 가정이 부러웠던 것이라고....
시간이 흘러 여행 날이 되었고, 나와 남편은 김포 공항으로 향했다. 김포 공항에 도착하자 이미 도착해 있던 영숙이와 철규씨가 우리를 반겨줬고, 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반갑습니다. 오대수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철규라고 합니다.”
처음 보는 두 남자는 서로 악수를 했다. 큰 체격에도 불구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웃음을 띠며 인사하는 철규씨, 그에 반하여 사무적인 느낌이 강한 내 남편 오대수.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넷은 이내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향했다. 비행기를 탄 지, 약 40분 후 우리는 제주도 공항에 도착을 했고 먼저 협재 해수욕장 근처에 예약을 해놓은 호텔에 가서 짐을 풀었다. 그리고 제주도 여행 계획을 세운 영숙이를 따라 관광을 시작했다. 동북 해안도로, 성산 일출봉, 트릭아트 뮤지엄 등을 돌았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제주도 여행을 하는 동안 내가 부러웠던 점은 영숙과 철규씨가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디를 가든지,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있었고 그에 반하여 나와 남편은 조금은 어색하게 떨어져서 걸었다. 영숙이가 이런 우리 부부의 관계를 눈치 채고 나의 남편에게 다가와 ‘대수씨, 우리 미연이 손도 잡아주고 그래요?.’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지만, 남편은 ‘허허허’라고 어색하게 웃을 뿐 이었다. 물론, 나 역시 남편의 스킨십을 기대하지도, 반기지도 않았다.
하루 종일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다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고 우리 일행은 상당히 지쳐 있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으려고 했는데, 영숙이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제주 유람선 선상 뷔페를 예약 했어요. 모두 저를 따라 오세요.”
영숙은 마치 자신이 제주도 여행의 가이드가 된 것처럼 과장이 섞인 연기를 했고, 우리는 그 모습을 보고 한바탕 크게 웃으며 그녀를 뒤따라갔다.
제주시내의 도두항에 도착하고 유람선에 승선한 우리는 뷔페를 통해서 간단한 저녁식사를 마쳤다. 저녁을 먹기 위해 자리에 앉으려고 했을 때, 철규씨는 직접 영숙이의 의자를 뒤로 빼줘서 편히 앉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 내가 그 모습을 보고 ‘철규씨는 매너도 좋아요. 영숙이가 행복해 하는 이유가 있었네요’라고 웃으며 말을 하자, 철규씨가 대답을 했다.
“하하하, 밖에서만 그래요. 밖에서라도 이렇게 노력해야죠. 하하하.”
저녁 식사 시간에는 철규씨의 유쾌한 농담이 이어졌지만 내 남편은 그저 꾸역꾸역 음식만 먹기만 할 뿐이었다. 더불어 술과 함께...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나자, 그사이 사위는 어두워져 있었다. 본격적으로 유람선이 출발하기 시작했고 선상으로 나온 우리 넷은 입을 딱 벌리며 제주도의 화려한 야경에 취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여름에 무더위를 시원하게 날려주는 제주도의 바닷바람은 내 마음속 답답함을 날려 버렸다. 처음으로 영숙이의 여행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진 찍어요.”
영숙이의 말에 우리 넷은 제주도의 화려한 야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 뒤로는 부부끼리 찍었는데, 남편이 영숙이와 철규씨를 찍는 것을 보며 참으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차례는 나와 남편이었다. 남편과 내가 배의 난간에 기대어 섰고, 영숙이가 사진을 찍으려고 준비를 했다.
“에이, 뭔 부부가 그래요?. 좀 더 붙어 봐요. 대수씨...”
“아... 네... 네...”
남들이 보기에도 우리 부부는 어색해보였나 보다.
“두 분 다 웃으시고..... 스마일......”
영숙이의 지시에 따라 억지로 입 꼬리를 올려 봤다. 하지만 미소를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영숙이가 ‘찰칵’하고 카메라 버튼을 눌렀는데, 문득 내 사진 속의 내 표정이 어떨지 궁금했다.
“에이... 미연이 미소가 왜 이래?. 다시 한 번 찍자.”
역시나 바로 사진을 확인한 영숙이 입에서 볼멘소리가 나왔다. 영숙이가 사진을 다시 찍자는 말에 남편의 표정을 보니,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 난 속으로 한 숨을 내쉬고 영숙이에게 말했다.
“괜찮아..... 다음에 찍지 뭐....”
“다음이 어딨어.... 빨리... 빨리 다시 서 봐.... 대수씨도요.”
영숙이의 성화에 남편과 나는 다시 어색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억지웃음을 얼굴에 만들어 냈고, 영숙이는 사진을 찍었다.
“으음..... 아무리 봐도 표정이 어색해....”
이번에도 사진이 잘 못 나온 듯 했다.
“본 판이 그러는데... 잘 나오는 턱이 있겠니?. 그만 찍자...”
난 사진 속의 어색한 나와 남편을 보고, 영숙이에게 그만 찍자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사진 속의 나와 남편을 보고 그 누구도 부부라고 하지는 않을 했다. 어색한 웃음, 어색한 자세, 그리고 어색한 관계. 이 모습이 우리 부부의 현재였다.
“와, 저기 야경 예쁘다. 자기야, 저기로 가보자.”
사진을 찍고 난 후, 영숙이는 어린 아이처럼 제주도의 야경을 보고 연이어 감탄을 했고, 철규씨의 팔을 이끌며 반대쪽 선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남겨진 나와 남편은 서로의 시선을 피하며 침묵만 지켰다.
“으.. 음...”
“.......”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또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난감했다. 지난 수년 간 함께 살아온 남편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 누구보다 어색했다. 마치 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성격이 활발한 친구군.....”
“으... 응”
오랜 침묵을 깨고 나에게 말을 꺼낸 남편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대화가 유람선의 마지막 대화이기도 했다.
곧이어 남편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고, 발신자를 확인한 남편은 전화를 받으며 나에게서 점점 떨어져 갔다. 사업상 문제일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년일 것이다. 한 번도 본적은 없지만 내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도록 하는 그년, 남편과 나의 사이를 갈라 놔버린 그년, 분명 그년일 것이다.
점점 멀어지는 남편을 보고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핸드폰을 뺏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남편과 현재 통화하는 그년에게 한 바가지 욕이라도 퍼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심한 몸의 떨림과는 달리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선상 바닥에 내 양 다리가 붙은 듯 했다.
“미연씨, 혼자 뭐하세요?.”
남편이 어느새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쯤, 내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뜻 밖에도 철규씨였다.
“영숙이는?.”
“아, 화장실에 갔어요.”
“남편 분은 어디로?.”
“사업상 문제로 전화할 것이 있나 봐요.”
“그... 그렇군요.”
예상하지 못한 철규씨와의 단둘의 대화가 이뤄졌다. 그러나 나는 마땅히 철규씨에게 할 말이 없었다.
“참, 아름답죠?.”
“네에?.”
갑자기 철규씨가 나에게 ‘아름답죠?’라고 질문을 했다.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었는데, 철규씨가 손가락으로 제주도를 가리켰다. 그때서야 제주도의 야경을 두고 한 말임을 알아챘다. 어떻게 보면 아주 당연한 말이었는데...
“참 아름다운 것 같아요.”
“네... 예쁘네요.”
“그거 아세요?.”
“..................”
철규씨는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제주도의 야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아주 어두운 밤에 육지에서 바다를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주위가 캄캄하기 때문에 당연한 사실이지만......”
“........”
“그런데 똑같은 밤인데 이렇게 바다 위에서 육지를 바라보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요. 육지에는 수많은 불빛이 있죠. 저 불빛에는 우리의 밤거리를 밝혀주는 가로등이 있을 수도 있고, 현재 집에서 가족과 좋은 시간을 보내게 만들어주는 형광등이 있을 수도 있고, 지금 이 시간에도 땀을 흘리는 작업장의 불빛도 있겠죠.”
“그... 그렇겠군요.”
“문득 지금의 이 야경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유치한 것 같지만, 바다 위에서 육지를 바라보는 야경이,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야경보다 예쁘고 아름다운 이유는, 육지에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
“서로 힘들고 괴로워도 주위에 사람이 있어야 인생이 아름답고 예쁘지 않을까 싶어요. 혼자라면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과 같겠죠. 캄캄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우습죠?.”
철규씨의 말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울컥해졌다. 마치 현재 내 외로움을 아는 것처럼 말하는 철규씨, 어느새 내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난 철규씨가 눈치 채지 못하게 재빨리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미연아, 자기야, 거기서 둘이 뭐해?.”
다행히 화장실에서 돌아 온 영숙이가 우리의 대화를 끊어줬다. 만약 조금만 대화가 더 이어졌다면 내 눈물을 철규씨에게 들킬 수 밖 에 없었을 것이다. 눈물을 들켰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했을까?.
“하하하. 그냥 이런 저런 이야기.... 미연씨랑 조금 데이트 했다. 질투나?.”
“호호호.”
유쾌한 농담으로 받아치는 철규씨를 보니, 나도 어느새 입가에 웃음기가 띠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영숙이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람선의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호텔로 돌아왔다. 가볍게 맥주 한 잔을 마시려고 했지만, 영숙이와 내 남편이 너무나 피곤해 했기 때문에 다음날로 미뤘다. 우리는 각자의 숙소에 들어가서 쉬기로 했다.
“안 씻어요?.”
“피곤해.....”
난 개운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왔는데, 남편은 침대의 한쪽에서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안 씻냐는 질문에 피곤해서 그냥 잔다고 했다. 여름이라 땀을 많이 흘렸을 텐데, 무어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난 샤워를 마친 후 맥주 캔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텔레비전을 틀어 채널을 돌려보지만 막상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다. 어느새 내 귀에는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고, 뒤를 돌아 남편을 보니 괜히 가슴이 답답해졌다. 잠을 자려고 하지만 그것마저 쉽지가 않았다.
“잠시 바람을 쇠로 나갈까.”
옷을 다시 입고 호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호텔 바로 앞에 해변가로 향한다. 잔잔한 파도소리가 들으며 모래사장을 걸었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연씨?.”
누군가 나를 불러서 뒤를 돌아보니, 뜻밖에도 철규씨였다.
“어?. 철규씨?.”
“미연씨 맞군요. 어두워서 설마 했는데....”
“이 시간에.......”
“아..... 그냥 잠이 안와서 바람 좀 쇨까 하고... 미연씨는...”
“저도.....”
“하하하. 저랑 마음이 통한 사람이 여기 있었네요. 집사람은 너무 피곤하다고 해서 벌써 골아 떨어졌거든요... 하하.”
우연이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이 우연이 싫지만은 않았다.
“밤늦게 혼자 다니시는 것은 위험한데, 제가 보디가드 해드리죠.”
“고... 고마워요.”
철규씨와 난 그렇게 나란히 서서 모래사장을 걷기 시작했다. 주로 철규씨가 말을 했고, 난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들어줬다. 철규씨는 정말 유쾌한 사람이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재밌는 이야기를 조금은 과장되게 이야기를 해주는데, 너무나 즐거웠다.
“호호호.... 재밌네요.”
“그렇죠?.”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의 남편과 밤늦게 함께 있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금은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미... 미연씨.”
“네... 말씀하세요.”
“음.... 실례지만 하나 물어봐도 돼요?.”
“.....무슨 말씀인데.... 네... 물어보세요.”
한참을 이야기 하며 걷던 철규씨는 갑자기 제 자리에 멈췄다. 그리고 나를 향해 물어볼 것이 있다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을 할 지, 궁금했다.
“아까.......”
“.............”
“아까... 왜 눈물을......”
난 철규씨의 말을 듣고 크게 당황했다. 분명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내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철규씨도 본 듯 했다. 난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 지, 난감했다.
“그... 그냥요.”
“그냥요?.”
“.....여자는 가끔 그럴 때... 있잖아요. 영숙이는 안 그래요?.”
“..........”
“철규씨... 너무 짓궂으시다... 여자에겐 비밀이 있는 건데... 꼬치꼬치 캐묻는 건 여자에 대한 매너가 아니랍니다.”
“아... 죄송힙니다. 그냥.... 걱정도 되고...”
농담을 하며 대충 얼버무리려고 했는데, 나를 걱정했다는 철규씨의 말에 다시 한 번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과하실 필요는 없고, 혹시 영숙이에게 말했어요?.”
“아... 아뇨.”
“영숙이에게는 비밀이에요.”
“네... 그러도록 하지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힘내세요. 미연씨는 웃는 모습이 예쁘고 좋아요.”
“네에?.”
이제는 내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숨이 가쁠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철규씨의 말 한마디에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당장에라도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미연씨, 그만 돌아갈까요?.”
“네.....”
철규씨는 말을 마치고 호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난 그의 한 걸음 뒤에서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 누구보다 넓은 철규씨의 등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했다.
‘철규씨가 내 남자였으면....’
난 공교육 속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담당과목은 수학. 내 친구 역시 영어를 담당하는 교사이다. 이름은 김영숙, 현재 나와 42살로 동갑이다.
영숙이를 처음 만났을 때는 28살이었는데 10여 년 전 H 중학교에서 근무를 할 때였다. 그 당시에 서로 담당 과목은 달랐지만 동갑내기로서 조금의 친분은 가지며 지냈고, 본격적으로 친구가 된 것은 몇 년 뒤의 일이었다. 내가 전근을 간 중학교에 영숙이 역시 전근을 오게 된 것이었다.
같은 학교에서 근무를 하게 되는 것은 큰 우연이었다. 이 우연이 반복되면서 영숙이와 나는 언제부터인가 서로 말을 놓으며 마음을 터놓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 영숙이는 성격도 좋았고 생각하는 가치관도 나와 비슷했기 때문에, 소위 말이 잘 통하는 친구였다.
영숙이와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서로의 가정에 관한 문제였다. 난 일가친척이 없이 홀아버지 밑에서 자라왔다. 당연히 교사가 되기 전까지 가정 형편은 항상 어려웠다. 내가 교사가 되어서 집안 사정이 조금 나아지려고 할 때, 아버지는 췌장암 선고를 받으셨다. 청천 벽력같은 소식 이였기 때문에 이리저리 발버둥을 치며 치료를 해보려고 했지만 결국 2년 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세상에 혼자 남을 딸을 걱정하셨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당신의 친구의 아들과 나를 맞선을 보게 했고, 난 아버지의 마지막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아무런 애정도 없이 아버지의 친구 아들과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서둘러 결혼을 해버렸다.
급하게 먹는 밥은 체하기 마련이다. 세상의 이치가 모두 그러하다. 아무런 애정 없이 시작한 결혼 생활은 순탄치가 않았다. 남편은 도전 정신이 높고 야망이 큰 사람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고집스런 성격에 외골수적인 모습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가치관과 성격 때문에 남편은 남의 밑에서 일을 하지 못했다. 남편은 사업하기를 원했다.
맨발로 가시밭을 걷는 날의 연속이었다. 남편은 여러 사업에 손을 댔다. 건설사 하청업체를 해보기도 했고, 때로는 그와는 전혀 다른 식당을 운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의 모든 사업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대부분의 사업 자금은 아버지의 친구, 즉 남편의 아버지인 시아버지의 주머니에서 나왔기 때문에 가세는 점점 기울어졌다. 차압도 당해봤고 1년에 10번이 넘는 이사를 해보기도 했다.
난 그런 남편을 보며 지쳐만 갔지만, 남편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9번 실패를 하더라도 단 1번 크게 성공을 하면 인생 역전이 되는 사업의 특성 때문일까?. 사실 사업 성공이라고 할 수 없지만 우연찮게 지인의 말을 듣고 남편이 시아버지 명의로 사놓은 땅이 몇 년 뒤에 정부의 개발 정책에 맞물려 대박을 터뜨렸다. 그 뒤로는 모든 일이 잘 되었다. 남편이 손을 대는 것마다 성공을 했다.
그리고 현재, 남편은 경기 지역에 골프장 2개를 운영하는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었다. 최근에는 스크린 골프장이 인기를 끌면서, 그에 관하여도 사업을 확장하려는 모습이 보였다. 남들은 남편을 보고 사업 수완이 좋은 사람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그리고 나를 보고는 능력 있는 남편을 뒀기 때문에 행복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난 남들의 말과는 달리 행복하지 않았다. 집에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남편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그동안의 고통과 노력에 대해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돈을 물 쓰듯이 쓰고 다녔다.
처음에는 사업이 성공하면서 그만큼 바쁜 줄 알았다. 그러나 남편의 셔츠에서는 립스틱 자국이 여러 번 발견 되었고, 그의 바지에서는 유흥주점에 갔다 온 흔적들이 역시 발견 되었다. 셔츠와 바지를 내밀며 남편에게 화를 냈지만, 남편은 오히려 사업 때문에 바쁜 사람을 붙잡고 잔소리를 한다며 역정을 냈다. 사업을 하면서 그런 곳에 갈 수 밖에 없는 것을 왜 이해를 못하냐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때부터 남편의 외박이 시작이 되었다. 한 두 번의 외박이 장기가 되었고, 이제는 같은 집에 살면서도 얼굴을 보는 일이 드물었다. 학교에서 퇴근을 하고 집에 오면 항상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 부부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남편은 불임이었다.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는 텅 빈 집에서 혼자 우는 날이 많아졌다. 세상에 의지할 사람은 나 자신 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언젠가부터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남편이 집에 들어오는 날에 다른 살림을 차린 것이 아니냐고 물으면 절대 그런 일 없다고 했다. 그리고 남편은 왜 자신을 불륜을 저지르는 부도덕한 사람으로 몰아붙이냐며 역정을 냈다. 난 남편의 바지를 붙잡고 울었다. 제발 집에 들어오라고, 그리고 나를 안아주라고 울면서 말했다. 남편은 나를 외면했다. 나를 보는 것이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집을 나갔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한 번은 남편에게 이혼을 하자고 했지만, 남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차라리 이혼을 하고 그 여자랑 알콩달콩 살라고 소리를 쳤지만, 남편은 나의 뺨을 치며 화를 했다. 우리는 부부였지만, 더 이상 부부가 아니었다. 남편에게 이혼 요구를 하고 뺨을 맞은 순간, 난 그를 마음속에서 포기했다. 이제는 서로 각자의 삶을 살기로 했다. 남편이 무엇을 하든지, 또 내가 무엇을 하든지 서로에게 관심을 끄기로 했다.
단지 우리가 부부의 모습을 보일 때는, 집안 및 외부 행사가 있을 때뿐이었다. 시댁에 가서 시부모님을 뵐 때나, 부부모임 같은 외부 모임에서는 형식적이나마 우리는 행복한 부부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런 나의 불행한 가정사를 친구 영숙이는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내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난 친정도 없고 자식도 없었다. 오직 친구인 영숙이만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영숙이는 이런 나의 슬픈 이야기를 들어줬고, 때로는 남편과 나의 사이를 원활하게 만들기 위해서 많은 조언들을 해줬다. 그리고 남편과 다시 좋은 관계가 되기를 자신의 일처럼 기원해줬다.
그런데 나는 이런 영숙이를 배신했다.
몇 년 전, 내가 힘들어하고 있을 때, 영숙이가 자신의 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했고 난 흔쾌히 응했다. 학교에서 퇴근 후에는 매일 혼자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은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영숙이 집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갔다.
그런데, 이 저녁식사 초대가 나와 영숙이, 그리고 영숙이의 남편인 철규씨와의 관계를 복잡하게 엮게 될지는 그 때는 꿈에도 몰랐다.
영숙이 집에 도착하고 그녀의 남편인 철규씨를 보고 난 깜짝 놀랐다. 철규씨는 친구라고 소개하는 영숙이의 말을 들으며 나를 아주 반갑게 맞아줬는데, 그는 나를 기억하지는 못하는 듯 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났지만, 난 또렷하게 철규씨를 기억하고 있었다. 20년 전, 철규씨와 난 한 곳의 미팅 장소에 같이 있었다. 비록 당시에는 파트너가 되지 못했지만, 철규씨는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큰 체격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내 머리는 분명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철규씨와 내가 한 미팅 장소에 같이 있었던 사실은 한 편의 추억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철규씨가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난 굳이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또한 철규씨는 현재 내 유일한 친구 영숙이의 남편이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애써 밝히는 것이 옳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저녁 식사는 유쾌한 시간이었다. 인근 중학교 체육 선생님을 하고 있다는 철규씨는 생각보다 상당히 부드러운 남자였다. 그리고 남을 배려하고 편안하게 할 줄 아는 남자였다. 난 그런 철규씨와 대화를 나누며 영숙이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영숙이의 옆에 있는 든든한 아들을 보며 이것이야 말로 정말 행복한 가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가볍게 맥주를 마시고 담소를 나눴다. 이야기를 나눌 수 록 나를 편안하게 대해주는 철규씨가 만약 내 남편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면 옆에 있는 영숙이에게 미안했기 때문에 아주 잠시 했을 뿐, 그때는 심각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첫 저녁식사 초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서 화목한 영숙이의 가정을 떠올리며 흐뭇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가정을 가지지 못한 나 자신이 불쌍하기도 했다. 스스로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 그만큼 비참한 일도 없을 것이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어느새 내 눈에는 눈물이 한 가득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어두운 집에 돌아와서는 침대에 얼굴을 묻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제는 외로움에 익숙해졌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울어야 했는지 스스로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눈물일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눈이 부은 채로 학교에 출근을 했고 영숙이는 나의 탱탱 부은 나의 눈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다. 마땅한 대답이 없어서 ‘그냥 울고 싶었다’라고 말을 했고, 영숙이는 슬픈 표정으로 나를 다독거려줬다.
“남편이랑.... 다 잘 될 거야.... 기운 내.”
영숙이의 위로대로 남편과 잘 지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나 역시 남편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우리 여행 갈래?. 부부 동반으로?.”
얼마 지나지 않으면 학교는 여름 방학이었다. 영숙이는 나에게 부부 동반으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 내 사정을 알고 있는 영숙이는 부부 동반으로 여행을 가면 나와 남편의 사이가 좀 더 좋아질 것이라고 말을 했다. 난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을 했지만, 영숙이는 막무가내였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영숙이의 이런 막무가내가 나를 위한 것임을...
“그럼 내가 남편하고 상의해서 계획을 세울게... 넌 남편 설득을 해봐... 알았지?.”
나와 남편의 관계 개선을 위한 부부 동반 여행은 친구 영숙이에 의해서 계획 되었다. 난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위해서 이렇게 애써 주는 영숙이의 제안을 거절 할 수는 없었다.
남편을 설득 시키는 건 힘들지 않았다. 대외적으로는 우리는 금슬이 좋은 부부였기 때문에, 서로의 부부모임에는 큰 불만 없이 참여 해주는 관행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행지는 제주도로 결정되었다. 2박 3일 정도의 짧은 일정이었다. 대부분의 준비는 영숙이가 알아서 했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은 그저 경비를 보태는 일 뿐이었다.
여름 방학이 시작이 되었고, 여행 날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부터 큰 기대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여행 날이 다가올수록 가슴이 두근거렸다.
‘철규씨...........’
우습게도 난 영숙이의 남편인 철규씨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고 있었다.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애써 생각했다. 철규씨를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영숙이의 화목한 가정이 부러웠던 것이라고....
시간이 흘러 여행 날이 되었고, 나와 남편은 김포 공항으로 향했다. 김포 공항에 도착하자 이미 도착해 있던 영숙이와 철규씨가 우리를 반겨줬고, 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반갑습니다. 오대수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철규라고 합니다.”
처음 보는 두 남자는 서로 악수를 했다. 큰 체격에도 불구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웃음을 띠며 인사하는 철규씨, 그에 반하여 사무적인 느낌이 강한 내 남편 오대수.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넷은 이내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향했다. 비행기를 탄 지, 약 40분 후 우리는 제주도 공항에 도착을 했고 먼저 협재 해수욕장 근처에 예약을 해놓은 호텔에 가서 짐을 풀었다. 그리고 제주도 여행 계획을 세운 영숙이를 따라 관광을 시작했다. 동북 해안도로, 성산 일출봉, 트릭아트 뮤지엄 등을 돌았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제주도 여행을 하는 동안 내가 부러웠던 점은 영숙과 철규씨가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디를 가든지,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있었고 그에 반하여 나와 남편은 조금은 어색하게 떨어져서 걸었다. 영숙이가 이런 우리 부부의 관계를 눈치 채고 나의 남편에게 다가와 ‘대수씨, 우리 미연이 손도 잡아주고 그래요?.’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지만, 남편은 ‘허허허’라고 어색하게 웃을 뿐 이었다. 물론, 나 역시 남편의 스킨십을 기대하지도, 반기지도 않았다.
하루 종일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다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고 우리 일행은 상당히 지쳐 있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으려고 했는데, 영숙이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제주 유람선 선상 뷔페를 예약 했어요. 모두 저를 따라 오세요.”
영숙은 마치 자신이 제주도 여행의 가이드가 된 것처럼 과장이 섞인 연기를 했고, 우리는 그 모습을 보고 한바탕 크게 웃으며 그녀를 뒤따라갔다.
제주시내의 도두항에 도착하고 유람선에 승선한 우리는 뷔페를 통해서 간단한 저녁식사를 마쳤다. 저녁을 먹기 위해 자리에 앉으려고 했을 때, 철규씨는 직접 영숙이의 의자를 뒤로 빼줘서 편히 앉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 내가 그 모습을 보고 ‘철규씨는 매너도 좋아요. 영숙이가 행복해 하는 이유가 있었네요’라고 웃으며 말을 하자, 철규씨가 대답을 했다.
“하하하, 밖에서만 그래요. 밖에서라도 이렇게 노력해야죠. 하하하.”
저녁 식사 시간에는 철규씨의 유쾌한 농담이 이어졌지만 내 남편은 그저 꾸역꾸역 음식만 먹기만 할 뿐이었다. 더불어 술과 함께...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나자, 그사이 사위는 어두워져 있었다. 본격적으로 유람선이 출발하기 시작했고 선상으로 나온 우리 넷은 입을 딱 벌리며 제주도의 화려한 야경에 취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여름에 무더위를 시원하게 날려주는 제주도의 바닷바람은 내 마음속 답답함을 날려 버렸다. 처음으로 영숙이의 여행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진 찍어요.”
영숙이의 말에 우리 넷은 제주도의 화려한 야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 뒤로는 부부끼리 찍었는데, 남편이 영숙이와 철규씨를 찍는 것을 보며 참으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차례는 나와 남편이었다. 남편과 내가 배의 난간에 기대어 섰고, 영숙이가 사진을 찍으려고 준비를 했다.
“에이, 뭔 부부가 그래요?. 좀 더 붙어 봐요. 대수씨...”
“아... 네... 네...”
남들이 보기에도 우리 부부는 어색해보였나 보다.
“두 분 다 웃으시고..... 스마일......”
영숙이의 지시에 따라 억지로 입 꼬리를 올려 봤다. 하지만 미소를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영숙이가 ‘찰칵’하고 카메라 버튼을 눌렀는데, 문득 내 사진 속의 내 표정이 어떨지 궁금했다.
“에이... 미연이 미소가 왜 이래?. 다시 한 번 찍자.”
역시나 바로 사진을 확인한 영숙이 입에서 볼멘소리가 나왔다. 영숙이가 사진을 다시 찍자는 말에 남편의 표정을 보니,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 난 속으로 한 숨을 내쉬고 영숙이에게 말했다.
“괜찮아..... 다음에 찍지 뭐....”
“다음이 어딨어.... 빨리... 빨리 다시 서 봐.... 대수씨도요.”
영숙이의 성화에 남편과 나는 다시 어색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억지웃음을 얼굴에 만들어 냈고, 영숙이는 사진을 찍었다.
“으음..... 아무리 봐도 표정이 어색해....”
이번에도 사진이 잘 못 나온 듯 했다.
“본 판이 그러는데... 잘 나오는 턱이 있겠니?. 그만 찍자...”
난 사진 속의 어색한 나와 남편을 보고, 영숙이에게 그만 찍자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사진 속의 나와 남편을 보고 그 누구도 부부라고 하지는 않을 했다. 어색한 웃음, 어색한 자세, 그리고 어색한 관계. 이 모습이 우리 부부의 현재였다.
“와, 저기 야경 예쁘다. 자기야, 저기로 가보자.”
사진을 찍고 난 후, 영숙이는 어린 아이처럼 제주도의 야경을 보고 연이어 감탄을 했고, 철규씨의 팔을 이끌며 반대쪽 선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남겨진 나와 남편은 서로의 시선을 피하며 침묵만 지켰다.
“으.. 음...”
“.......”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또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난감했다. 지난 수년 간 함께 살아온 남편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 누구보다 어색했다. 마치 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성격이 활발한 친구군.....”
“으... 응”
오랜 침묵을 깨고 나에게 말을 꺼낸 남편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대화가 유람선의 마지막 대화이기도 했다.
곧이어 남편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고, 발신자를 확인한 남편은 전화를 받으며 나에게서 점점 떨어져 갔다. 사업상 문제일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년일 것이다. 한 번도 본적은 없지만 내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도록 하는 그년, 남편과 나의 사이를 갈라 놔버린 그년, 분명 그년일 것이다.
점점 멀어지는 남편을 보고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핸드폰을 뺏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남편과 현재 통화하는 그년에게 한 바가지 욕이라도 퍼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심한 몸의 떨림과는 달리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선상 바닥에 내 양 다리가 붙은 듯 했다.
“미연씨, 혼자 뭐하세요?.”
남편이 어느새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쯤, 내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뜻 밖에도 철규씨였다.
“영숙이는?.”
“아, 화장실에 갔어요.”
“남편 분은 어디로?.”
“사업상 문제로 전화할 것이 있나 봐요.”
“그... 그렇군요.”
예상하지 못한 철규씨와의 단둘의 대화가 이뤄졌다. 그러나 나는 마땅히 철규씨에게 할 말이 없었다.
“참, 아름답죠?.”
“네에?.”
갑자기 철규씨가 나에게 ‘아름답죠?’라고 질문을 했다.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었는데, 철규씨가 손가락으로 제주도를 가리켰다. 그때서야 제주도의 야경을 두고 한 말임을 알아챘다. 어떻게 보면 아주 당연한 말이었는데...
“참 아름다운 것 같아요.”
“네... 예쁘네요.”
“그거 아세요?.”
“..................”
철규씨는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제주도의 야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아주 어두운 밤에 육지에서 바다를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주위가 캄캄하기 때문에 당연한 사실이지만......”
“........”
“그런데 똑같은 밤인데 이렇게 바다 위에서 육지를 바라보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요. 육지에는 수많은 불빛이 있죠. 저 불빛에는 우리의 밤거리를 밝혀주는 가로등이 있을 수도 있고, 현재 집에서 가족과 좋은 시간을 보내게 만들어주는 형광등이 있을 수도 있고, 지금 이 시간에도 땀을 흘리는 작업장의 불빛도 있겠죠.”
“그... 그렇겠군요.”
“문득 지금의 이 야경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유치한 것 같지만, 바다 위에서 육지를 바라보는 야경이,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야경보다 예쁘고 아름다운 이유는, 육지에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
“서로 힘들고 괴로워도 주위에 사람이 있어야 인생이 아름답고 예쁘지 않을까 싶어요. 혼자라면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과 같겠죠. 캄캄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우습죠?.”
철규씨의 말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울컥해졌다. 마치 현재 내 외로움을 아는 것처럼 말하는 철규씨, 어느새 내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난 철규씨가 눈치 채지 못하게 재빨리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미연아, 자기야, 거기서 둘이 뭐해?.”
다행히 화장실에서 돌아 온 영숙이가 우리의 대화를 끊어줬다. 만약 조금만 대화가 더 이어졌다면 내 눈물을 철규씨에게 들킬 수 밖 에 없었을 것이다. 눈물을 들켰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했을까?.
“하하하. 그냥 이런 저런 이야기.... 미연씨랑 조금 데이트 했다. 질투나?.”
“호호호.”
유쾌한 농담으로 받아치는 철규씨를 보니, 나도 어느새 입가에 웃음기가 띠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영숙이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람선의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호텔로 돌아왔다. 가볍게 맥주 한 잔을 마시려고 했지만, 영숙이와 내 남편이 너무나 피곤해 했기 때문에 다음날로 미뤘다. 우리는 각자의 숙소에 들어가서 쉬기로 했다.
“안 씻어요?.”
“피곤해.....”
난 개운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왔는데, 남편은 침대의 한쪽에서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안 씻냐는 질문에 피곤해서 그냥 잔다고 했다. 여름이라 땀을 많이 흘렸을 텐데, 무어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난 샤워를 마친 후 맥주 캔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텔레비전을 틀어 채널을 돌려보지만 막상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다. 어느새 내 귀에는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고, 뒤를 돌아 남편을 보니 괜히 가슴이 답답해졌다. 잠을 자려고 하지만 그것마저 쉽지가 않았다.
“잠시 바람을 쇠로 나갈까.”
옷을 다시 입고 호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호텔 바로 앞에 해변가로 향한다. 잔잔한 파도소리가 들으며 모래사장을 걸었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연씨?.”
누군가 나를 불러서 뒤를 돌아보니, 뜻밖에도 철규씨였다.
“어?. 철규씨?.”
“미연씨 맞군요. 어두워서 설마 했는데....”
“이 시간에.......”
“아..... 그냥 잠이 안와서 바람 좀 쇨까 하고... 미연씨는...”
“저도.....”
“하하하. 저랑 마음이 통한 사람이 여기 있었네요. 집사람은 너무 피곤하다고 해서 벌써 골아 떨어졌거든요... 하하.”
우연이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이 우연이 싫지만은 않았다.
“밤늦게 혼자 다니시는 것은 위험한데, 제가 보디가드 해드리죠.”
“고... 고마워요.”
철규씨와 난 그렇게 나란히 서서 모래사장을 걷기 시작했다. 주로 철규씨가 말을 했고, 난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들어줬다. 철규씨는 정말 유쾌한 사람이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재밌는 이야기를 조금은 과장되게 이야기를 해주는데, 너무나 즐거웠다.
“호호호.... 재밌네요.”
“그렇죠?.”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의 남편과 밤늦게 함께 있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금은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미... 미연씨.”
“네... 말씀하세요.”
“음.... 실례지만 하나 물어봐도 돼요?.”
“.....무슨 말씀인데.... 네... 물어보세요.”
한참을 이야기 하며 걷던 철규씨는 갑자기 제 자리에 멈췄다. 그리고 나를 향해 물어볼 것이 있다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을 할 지, 궁금했다.
“아까.......”
“.............”
“아까... 왜 눈물을......”
난 철규씨의 말을 듣고 크게 당황했다. 분명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내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철규씨도 본 듯 했다. 난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 지, 난감했다.
“그... 그냥요.”
“그냥요?.”
“.....여자는 가끔 그럴 때... 있잖아요. 영숙이는 안 그래요?.”
“..........”
“철규씨... 너무 짓궂으시다... 여자에겐 비밀이 있는 건데... 꼬치꼬치 캐묻는 건 여자에 대한 매너가 아니랍니다.”
“아... 죄송힙니다. 그냥.... 걱정도 되고...”
농담을 하며 대충 얼버무리려고 했는데, 나를 걱정했다는 철규씨의 말에 다시 한 번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과하실 필요는 없고, 혹시 영숙이에게 말했어요?.”
“아... 아뇨.”
“영숙이에게는 비밀이에요.”
“네... 그러도록 하지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힘내세요. 미연씨는 웃는 모습이 예쁘고 좋아요.”
“네에?.”
이제는 내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숨이 가쁠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철규씨의 말 한마디에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당장에라도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미연씨, 그만 돌아갈까요?.”
“네.....”
철규씨는 말을 마치고 호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난 그의 한 걸음 뒤에서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 누구보다 넓은 철규씨의 등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했다.
‘철규씨가 내 남자였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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