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 7부

서로의 감정을 들어내는 말이 필요 없는 그들은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키스였다. 혀와 혀가 엉키고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상민이 그녀를 가볍게 들어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침대 위에 눕힌 상민은 자신의 옷을 훌훌 벗었다. 그리고 반드시 누운 그녀를 음미하듯이 내려다보며 잠옷을 벗겨냈다. 지선은 마치 첫날밤을 치루는 신부처럼 눈을 지그시 감고 기다릴 뿐이었다.

달빛에 들어난 그녀의 나신은 은빛가루로 덮인 여인의 조각상 같았다. 상민의 손길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뺨을 스쳐 목덜미와 젖가슴, 그리고 허리를 쓰다듬고 내려가 둔부를 어루만졌다. 그녀의 나신이 가늘게 떨렸다. 그들에게 가로막힌 벽도 번민과 고통도 벗어난 그들은 감추어진 애정만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한동안 냉정했던 그녀의 모습에 안타까웠던 상민이 낮은 목소리를 말했다.

“난, 잊을 수가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마.........”

눈을 감고 있던 지선이 올려다보며 상민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막았다. 그녀는 언어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들어내고 싶지 않았다. 다만 지금 순간의 감정에만 몰입하고 싶었다. 그러나 상민의 마음은 달랐다. 그녀의 행복을 원하기에 우울했던 상민은 그녀의 애정만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도 포항으로 쫓아가고 싶어.”
“그럴 수도 없고, 더 이상 말하면 아프기만 해.”

“사랑하는 아픔이 나에게는 행복이라는 걸 몰라!?”
“아픈 건 참을 수 있어도 더 큰 상처를 만들고 싶지 않아.........”

상민은 짧은 말만으로도 그녀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를 가슴아래 품고 키스를 했다. 늦은 밤에 어디선가 그들의 애정을 축복하는 것처럼 피아노의 선율이 잔잔하게 들려왔다. 상민의 습하고 뜨거운 입김이 그녀의 귓가에 그리고 젖가슴을 열기를 불어 넣었다. 젖꼭지를 깊게 빨아 당기는 상민은 거친 호흡을 흘렸다.

“사, 사랑해.”
“하~! 자기야.........”

온 몸이 빨려 들어가는 전율 속에 지선은 짜릿한 황홀감에 젖었다. 지선은 뱃속에 잉태한 아기의 생명을 불어 넣어준 상민과의 마지막 밤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상민은 그녀를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욕망으로 천천히 애무를 했다. 젖가슴을 걸쳐 발끝까지 내려간 상민의 혀가 그녀의 발가락을 핥고 있었다. 그녀는 발가락이 상민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자지러질 것만 같은 쾌감을 느꼈다.

“하 윽~~! 나, 난 몰라. 어, 떡, 해..........”

상민의 섬세한 애무에 지선의 성감을 활화산처럼 폭발하게 만들었다. 발가락 사이마다 스며들던 상민의 혀끝이 종아리와 무릎을 걸쳐 허벅지 사이에 습한 열기를 뿜어냈다. 상민의 손끝은 그녀의 허벅지 사이의 민감한 살갗들을 보듬고 쓰다듬었다. 지선은 뼈마디가 녹아내리는 황홀함에 바들바들 떨었다.

“아 하~~~! 자, 자기야. 으 읍.......”
“내, 내 사랑........”

허벅지 사이에 발기한 페니스가 용솟음치고 있는 상민은 그녀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참을 수 없었다. 힘을 주어 마찰하는 상민의 손바닥에 클리토리스와 살갗의 예민한 돌기들이 휩쓸렸다. 온몸의 신경이 한군데로 몰리는 지선은 아득한 늪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그녀의 꽃샘에서 진한 샘물이 흘러나와 상민의 손끝을 적셨다. 입술을 깨무는 지선은 상민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촉촉한 목소리를 흘렸다.

“자, 자기야. 사랑해줘.........”
“나를 안 잊을 거지?”
“모, 나도 몰라........”

정신이 혼미한 지선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상민은 할 수만 있다면 그녀를 영원히 자신의 여자로 만들 싶은 욕구에 불타올랐다. 둔부를 들어 올리는 그녀의 허벅지를 벌리고 이슬을 머금은 꽃잎 속으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꽃잎을 헤집고 들어간 페니스가 그녀의 만감해진 몸속을 가득 채웠다. 몸속으로 깊이 들어온 상민의 남성을 느끼는 그녀는 눈동자를 홉뜨고 바르르 떨었다.

“하 으~! 난 어떡해..........”
“지선이 없으면 못 살 것 같아.”

상민의 엉덩이를 끌어당기며 허리를 들어 올리는 지선의 눈동자에 이슬이 맺혔다. 그것은 몸속으로 들어온 상민의 남성으로 인해 하나가 된 희열의 눈물이고 순간의 엑스터시를 다시는 느끼지 못할 것 같은 안타까움이었다. 상민은 그녀의 꽃샘 속에 가득채운 페니스를 천천히 움직였다. 하나가 된 그들의 나신이 달빛을 받아 물결처럼 흔들린다. 몸속으로 남성이 치밀고 들어 올 때마다 지선은 반사적으로 입술을 벌렸다.

“하 아, 아 흣, 으 으, 으 흡, 아 하.........”
“지선인 내 여자야.”

신음을 흘리며 똑바로 올려다보는 지선은 상민의 여자인 것을 인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허물 수 없는 벽 속에 갇혔기에 지금의 감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녀는 상민의 여자라는 것에 전혀 부끄러움이나 윤리의식도 벗어던지고 있었다. 오직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를 가슴에 각인시키고 싶어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잔잔한 물결처럼 그녀의 나신을 출렁이게 하던 상민의 동작이 거칠고 빨라졌다. 땀방울이 흐른 살갗과 살갗이 부딪는 소리, 거칠어진 숨소리, 여자의 몸속을 드나드는 남성의 마찰소리가 방안에 흘러 넘쳤다. 끊이지 않는 사랑의 행위가 달빛처럼 고요하게 때로는 폭풍처럼 몰아쳤다. 지선의 반복적인 신음 소리에 상민도 거친 숨을 흘리며 폭풍처럼 몰아쳤다.

“하 앗! 자, 자기야. 하 우. 으 으, 하 읍, 으 핫. 아 하.........”
“하 윽, 으 흠, 허 윽.........”

상민은 거친 파도를 일으키는 태풍처럼 지선을 몰아쳤고, 그녀는 파도에 밀린 난파선이 되어 암벽에 부딪쳤다. 지선은 남성의 마찰에 몸속의 돌기들이 짓이겨지고 일그러지며 불길에 타올라 기절할 것만 같았다. 진절머리를 치는 그녀는 허겁지겁 상민의 입술을 입술로 물고 부르르 떨었다.
페니스가 옥죄이는 엑스터시에 빠진 상민은 그녀의 허리를 들어 올리며 안간힘을 썼다. 몸속을 뚫고 들어오는 남성이 뼈끝까지 닿는 충격에 지선은 허벅지를 조이며 신음을 터트렸다.

“나, 난 몰라. 하 윽.......!”
“허 억! 사, 사랑해........”

상체를 들어 올린 지선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좌우로 흔들었다. 지극하고도 격렬한 오르가즘에 그녀는 숨을 쉴 수도 없었다. 갑자기 옥죄이던 페니스가 열탕 속에 빠지는 촉감에 상민은 그녀의 허리를 붙들고 경직되었다.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뿜어낸 희열의 진액이 그녀의 몸속에서 용암처럼 소용돌이 쳤다.

“주, 죽겠어. 자기야. 하 으~~”
“허 억! 내, 내 여자야.......”

환희 뒤이어 오는 습한 열기, 그들은 하나가 되어 거칠어진 숨을 토해냈다. 숨소리가 잦아지고 지선의 젖꼭지를 입술로 잘근거리던 상민이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어느 때보다도 뜨꺼운 엑스터시에 젖었던 지선은 문득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지선의 감정을 모르는 상민은 격렬하게 쾌감을 느끼던 그녀의 표정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 그녀의 뺨을 양손으로 보듬어 안고 내려다 봤다.

“그걸, 느끼는 표정도 못 잊을 거야.”
“미워 죽겠어, 정말..........”

시선이 마주치고 눈을 하얗게 흘기는 지선의 목소리는 목이 메어 있었다. 지선은 뱃속에 잉태한 생명을 상민에게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해결된 문제는 아니었다. 지선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상처받고 힘들어 하는 것보다 자신만의 고통만으로 비밀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은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선은 이 밤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눈동자를 크게 뜨고 상민을 올려다보는 지선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가라앉은 목소리를 흘렸다.

“더, 더 사랑해 줘.........”
“오늘은 내 여자를 놓치지 않을 거야.”

지선은 몸속을 채우고 있는 남성이 다시 불끈 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별이라는 안타까움에 그녀는 태우고 태워도 욕구의 불길이 꺼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상민은 페니스를 삽입한 상태에서 그녀를 일으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외삼촌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도 하지만 상민 역시 그녀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처럼 그들은 하나가 되어 물결을 이룬다. 때로는 풍랑을 만난 거친 파도처럼 휘몰아치고 바위에 부딪쳐 물보라를 일으킨다. 한번 불어 닥친 태풍은 한 번, 두 번, 그리고 연달아 그녀의 심장을 멈추게 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절정에서 곤두박질하면서도 그녀는 상민의 남성에 의해 소유당할 때마다 또 다른 세계의 환희 속에 빠져들곤 하였다.

발가벗은 채 상민의 가슴에 안긴 지선은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깊은 잠에 빠져 들었던 지선은 송이가 깨어나서 우는 소리를 들었다. 잠결에 지선은 발가벗은 몸 위에 잠옷만 걸치고 안방으로 갔다. 잠에서 깨어난 송이가 방긋거리며 웃고 있었다. 안도의 한 숨을 내쉰 그녀는 몽롱한 눈빛으로 창문을 바라보았다.

눈이 부시도록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을 보고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벽시계의 시침이 정오를 향해 달리고 있어 지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리나케 분유를 타서 송이에게 젖병을 물린 지선은 상민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세상모르고 깊은 잠에 빠진 상민을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열두시란 말이야. 강의 받으러 갈 시간 늦었잖아?”
“음.......! 벌써?”

눈을 부비고 일어난 상민은 책상위의 탁상시계를 바라보았다. 너무 진한 정사를 해서 그런지 상민은 온 몸이 늘어졌다. 그는 쳐다보고 서있는 지선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그녀의 심장 뛰는 소리가 완연하게 들렸다.

“오전 강의는 안 들어도 돼.”
“이제 우리 이러면 안 돼는 거 알잖아. 냉정해지자고.”

한숨을 내쉰 지선은 허리를 껴안은 상민의 손을 밀어냈다. 지선은 넋을 놓고 쳐다보는 상민을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서로에 대한 감정은 알면서도 냉정해지려니까, 서먹서먹해지는 분위기였다. 그들은 식탁을 마주하고 앉아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하면서 말없이 눈치만 살폈다.

남자는 맹목적인 사랑을 하는지 몰라도 여자는 현실적인 사랑에 더 민감한지도 모른다. 지선은 이사를 할 준비에 바쁘게 움직이고 이삿짐센터에도 예약을 하였다. 지선은 집에 찾아온 은주엄마에게도 이사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섭섭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은주엄마는 송이아빠가 취직한 것을 축하해 주었다.

지선은 잔금을 받기 위해 매입자에게 연락을 했다. 이사를 올 사람은 아직 날짜가 남았지만 집을 비워 준다고 하니 집수리를 위해 잘됐다고 반겼다. 사흘 후 잔금을 받은 지선은 먼저 이삿짐센터 차량에 짐을 실어서보내고 남편과 같이 기차로 내려가기로 했다. 상민은 전세로 얻은 집이 삼일 후에 비워준다고 해서 짐을 옮길 수가 없었다.

외숙모 지선이 이사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민은 오전 강의만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외삼촌이 있어서 상민은 그녀와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외삼촌이 없었다고 해도 상민이나 지선은 서로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상민은 안타깝고 우울한 심정으로 외삼촌이 택시를 타는 대로변까지 쫓아 나갔다.

어떤 말도 못하고 상민은 외숙모 지선의 떠나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택시 안에서 힐끔 돌아보는 지선의 눈동자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가슴으로 흐느끼는 지선은 남편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의 심정도 모르는 경호는 침착한 목소리로 위로를 했다.

“오래 동안 살던 집이라 정들어서 서운한 거지. 내가 더 행복하게 해줄게.”
“...........”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지선은 남편을 외면했다. 지선과 경호, 그리고 송이를 태운 택시가 사라질 때까지 상민은 골목 어귀에 서 있었다. 비록 처음으로 여자와의 성경험은 은주이지만 상민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첫 번째의 여자는 외숙모 지선이었다.

방향을 잃는 걸음으로 집으로 들아 온 상민은 이삿짐이 빠져나간 빈 공간에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외숙모가 없는 공간은 전쟁터 같이 삭막하고 쓸쓸했다. 제정신으로는 한 순간도 못 견딜 것 같은 상민은 고교시절부터 절친한 친구 재용에게 술을 마시자고 전화를 하고 다시 집을 나왔다.

상민은 신촌의 대학생들의 단골고객인 클럽에서 재용과 만났다. 번쩍이는 조명등과 요란한 음악소리, 주점안의 젊음을 발산하는 흥겨운 분위기지만 상민은 혼자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지선의 모습만이 떠올랐다. 그리고 갑자기 상민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넋을 놓고 있는 상민에게 재용이 술잔을 권했다.

“상민이가 웬일로 술을 마시자고 하니.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아니, 그냥 취하고 싶어서......”

억지로 쓴웃음을 띤 상민은 재용이 권하는 술잔을 들어 벌컥 들이마셨다. 술잔을 연거푸 비워도 상민은 청각이 마비된 것 같았다. 클럽안의 모든 사람들이 언어를 잃고 있었다. 밴드들이 연주하는 음악소리도 스테이지 앞에서 춤을 추는 젊은이도 상민에게는 흐느적거려 보였다. 어쩌면 상민 자신이 감정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싶은지도 모른다. 재용이 넋을 놓고 있는 상민의 어깨를 툭 쳤다.

“너 아무래도 무슨 일 있나보다. 즐겁게 마셔.”
“응.......! 머리가 좀 아파서.........”

망각에서 깨어난 상민은 다시 술잔을 비우고 재용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상민은 지선과의 이별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만큼 충격적이기에 무의식적으로 기억을 잊어버리고도 싶은 것이다. 금붕어가 어항 속에서 사는 것을 견딜 수 있는 것은 기억력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금붕어는 유리벽에 닿을 때까지 헤엄쳐 갔다가 다시 돌아간다. 이런 과정은 무한히 돌아가는 회전목마처럼 되풀이된다. 결국 금붕어의 기억력이 약한 것은 미치지 않기 위한 생존 전략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흔히 인간을 망각의 동물이라고도 한다. 상민의 무의식적인 망각은 지선과의 이별이라는 충격으로부터 탈피하려는 본능인지도 모른다. 고개를 흔들어 스테이지를 응시하는 상민의 귀에 시끄러운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스테이지위에서 흘러나오는 광란의 음악소리, 취객들의 흥청거리는 목소리, 상민은 비로소 술기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때 상민과 재용의 좌석으로 다가오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희들과 합석하실래요?”
“네.......!?”

그녀들을 바라본 재용이 갑작스러운 제안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몸매가 들어나도록 달라붙는 바지와 허벅지가 들어나는 미니스커트를 걸친 두 여자였다. 재용의 시선을 따라 상민도 그녀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옷차림새는 어려보이나 화장한 것으로 보아 상민이나 재용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재용이 빙긋이 웃으면서 상민의 눈치를 살폈다. 상민은 표정 변화 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고개를 끄덕인 재용이 흔쾌히 그녀들의 청을 받아드렸다.

“괜찮으시다면 저희들은 좋지요.”
“그럼 술은 사주시는 거지요?”
“하하~! 얼마나 드시는지 모르지만 술쯤이야.”

재용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서로의 시선을 마주친 그녀들은 망설인다. 바지를 입은 여자가 재용의 옆에 앉고 미니스커트를 걸친 여자가 눈웃음치며 상민의 옆자리에 각각 앉았다. 기분이 다운되어 있는 상민은 별로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재용이 여자들에게 인사를 했다.

“서로 이름이라도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저는 재용이라는 머슴이고 내 친구는 상민입니다.”
“아! 네. 난, 선경이고. 제는 소정예요.”

재용의 옆에 앉은 여자가 자신들의 이름을 밝혔다. 재용이 종업원에게 손짓을 하서 물러 술잔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 두 여자의 잔에 맥주를 채워 주고는 잔을 들어 마시기를 권했다.

“이거도 인연인데 같이 한 잔 하시지요.”
“호호~! 저희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오래간만에 온 거니까.”

그들은 서로의 술잔을 부딪쳤다. 자괴감에 빠진 상민은 그녀들이 안중에도 없었다. 소정이 술잔을 반쯤비우고 옆에 앉은 상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나이를 꼭 알아야 됩니까?”
“아니, 어려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먹을 만큼 먹었습니다.”

탐탁지 않은 상민은 퉁명스러운 말투를 흘렸다. 그때 우락부락하게 보이는 청년 한 명이 탁자 앞에 버티고 섰다. 스물 대여섯쯤으로 보이는 청년을 보고 소정과 선경이 흠칫하였다. 청년을 아는지 그녀들이 서로 눈짓을 하였다. 청년이 대뜸 소정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소정이! 너, 서방질 하는 거야?”
“왜 그래, 오빠! 오빠가 무슨 상관이야?”

겁에 질린 소정이 손가방으로 얼굴을 가리며 뒤로 물러앉았다. 안면도 없는 여자들의 청에 의해 합석을 하게 된 재용과 상민은 낯선 남자의 등장에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소정을 바라보던 청년이 대뜸 상민을 향해 반말을 했다.

“너, 소정이 하고 잘 아는 사이야?”
“초면에 말씀이 너무 거치시네요.”

강압적인 청년의 말투에 상민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청년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상민을 노려보았다. 취기가 있는 상민도 지지 않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술을 꿰니 마셨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는 청년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런 씨발놈이!? 묻는 말에 대답 안 하고,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씨발 놈이라니!?”

화가 치민 상민이 벌떡 일어났다. 상민의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이 청년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상민의 멱살을 움켜쥐고 밀어붙였다. 전혀 대비하지 않았던 상민이 탁자와 함께 쓰러졌다. 탁자위에 있던 술병들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동시에 여자들이 놀라서 외마디를 질렀다.

“어 멋!”
“오빠, 왜 그래?”

그녀들의 놀라는 모습을 보고 청년이 코웃음을 쳤다. 순간 쓰러졌던 상민이 일어나면서 번개같이 청년의 턱을 돌려 찼다. 마치 슬로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턱이 돌아간 청년은 천천히 뒤로 나동그라졌다. 상민은 틈틈이 익힌 합기도의 유단자였다. 상민에게 일격을 당했으나 청년도 만만치 않았다. 벌떡 일어난 청년은 입가에 묻은 피를 주먹으로 문지르며 비웃음을 흘렸다.

“후 후! 제법인 걸. 좆같은 새끼! 오늘 임자 만났다.”
“.........”

갑작스런 사태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몰렸다. 청년이 상민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와장창하고 술병 깨지는 소리, 탁자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종업원들이 통로 사이를 비집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청년의 주먹을 피한 상민이 무릎으로 올려치기를 했다. 뒷걸음으로 피한 청년이 상민의 목덜미를 가격했다. 잠시 비틀 거리던 상민이 청년의 가슴을 휘둘러 찼다.

짧은 시간이었는데 경찰들이 뛰어 들어왔다. 종업원의 연락을 받고 근처의 경찰지구대에서 출동한 경찰들이었다. 동시에 쓰러졌다가 일어나는 청년과 상민 사이에 경찰이 가로막고 섰다. 경찰에 제지를 당한 청년과 상민 모두 얼굴에 상처를 입고 씨근덕거렸다. 상민과 청년은 경찰에 의해 지구대로 끌려갔다.

공연히 시비를 걸었던 청년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씨근덕거렸다. 하지만 경찰 조서를 받는 동안 청년은 의외로 고분고분했다. 조서를 작성했으나 서로 처벌을 원치 않았다. 뒤늦게 출두한 업주는 흔히 있는 손님간의 일이라 장사를 생각해서인지 손해배상이나 처벌을 원치 않아서 상민과 청년은 합의 각서를 쓰고 지구대를 나왔다.

지구대를 나온 청년은 상민을 잔뜩 노려보며 욕설을 뱉고 사라졌다. 상민은 기다리고 있던 재용과 지구대를 나섰다. 그들이 술 한 잔을 더하려고 근처의 포장마차로 가는데, 클럽에서 합석했던 두 여자가 골목길에서 나왔다. 슬며시 다가온 소영이 주춤거리며 상민에게 다가왔다.

“죄송해요. 그냥 나를 쫓아다니는 친구 오빠예요. 미안해서 제가 술 한 잔 살게요.”
“됐습니다. 그냥 가세요.”

뜻하지 않은 싸움으로 상민은 그녀들을 상대하기도 싫었다. 멋쩍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녀들을 뒤로 하고 상민은 재용과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지선과 이별의 아픔으로 고통스러웠던 상민은 술잔을 채우기 바쁘도록 술을 들이켰다. 상민은 재용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술을 마시며 횡설수설하였다.

다음날 상민은 갈증을 느껴 눈을 떴다. 창문에는 해가 중천에 걸려있고 어제저녁 어떻게 집으로 들어왔는지 상민은 가물가물 하였다. 현기증을 느끼며 방문을 열고나선 그는 가구들이 없는 텅 비어 썰렁한 집안을 돌아본다. 어깨가 시리도록 한기를 느낀 그는 냉수를 들이켜고 앉아 자신의 나약함을 느꼈다.

이틀 후 상민은 구입한 전셋집으로 옮겼다. 새로운 마음으로 생활을 시작하자고 다짐을 하면서도 상민의 머릿속에는 지선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캠퍼스 생활이 시작되며 학우들과 어울리고 새로운 학과에 몰두하게 된 고 상민의 하루하루는 바쁘게 지나가기 시작했다.

들과 산이 초록으로 물들고 제법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였다. 강의를 마치고 친구를 기다리는 상민은 캠퍼스 나무 밑의 벤치에 걸터앉았다. 혼자만의 여유로운 시간이 되면 상민은 지나간 아픔을 되살렸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그는 외숙모 지선의 소식이 궁금하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어떤 결과이든지 실망할 것이 두려워 전화를 하지는 못했었다.

항상 눈웃음이 깃든 정감어린 눈빛, 조신한 성격이면서도 열정적인 지선의 모습을 떠올린 상민은 오늘도 휴대폰을 꺼내 들고 망설였다.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행복을 깨는 것은 아닌지, 과연 전화를 받고 반가워할는지, 전화를 해서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알 수 없었다.

상민은 몇 번인가 망설이다가 포기 하고 말았던 지선의 휴대폰번호를 눌렀다. 신호는 가지만 지선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두 번, 세 번째도 받지 않아 실망한 상민이 포기하려는데 통화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말이 없었다. 상민은 느낌만으로도 그녀가 틀림없다는 예감이 들었다.

“외숙모.........!?”
“...........”

“상민인데, 잘 지내고 있지요?”
“...........”

“송이가 꽤 예뻐졌겠네.”
“음! 그렇지 뭐.........”

담담하면서도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상민이 그녀의 목소리를 모를 리 없었다. 휴대폰을 들고 있는 상민은 감정이 격해지고 있었다. 왠지 서먹하지만 상민은 예전과 다르지 않은 그녀만이 풍기는 느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전화를 받고 있는 지선은 상민을 잊으려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속마음은 상민의 전화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으나 지선은 자신의 감정이 들어나지 않도록 조심스러웠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소리 없이 숨을 들이마신 지선은 상민의 목소리에 흔들릴 것만 같았다.

“그 동안....... 별일 없었어요?”
“음.........”

조금은 어색하고 들뜬 어조의 상민의 물음에 지선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포항으로 내려간 지선은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과거로 되돌아 갈 수도 없었다. 아팠던 상처가 다시 들어내고 싶지 않은 지선은 간단하게 전화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상민이 그녀에게 물었다.

“아픈 곳은 없어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앞으로는 전화 하지 말아줘.........”
“..........”

지선의 냉정한 목소리에 상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선은 천천히 통화버튼을 눌러서 껐다. 휴대폰을 들고 있는 지선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창문에는 낙조가 드리워져 있었다. 지선은 상민을 기억 속에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결국 남편을 속이고 아기를 낳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이룰 수 없는 애정 대신에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 갈 뿐이었다.

지선이 통화를 끊고 나서 상민은 신경세포들이 싸늘하게 전율하였다. 어쩌면 남자보다 여자가 감정을 들어내지 않는 현실적인 감각을 지녔는지도 모른다. 상민은 그녀가 진실로 자신을 잊고 있었든지 아니면 잊지 못하는 감정을 들어내지 않으려하는 것인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상민은 잊어야하는 그녀의 현실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상민은 허전하기만 했다. 잔디밭에 벌렁 누운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상민은 지선을 잊지 못하지만 외숙모를 불행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만큼 그의 가슴 속에는 그녀의 영혼이 깊이 박혀 있었다. 상민은 올려다 보이는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그녀도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상민아! 가자.”

상민이 기다리던 친구 재용이가 잔디밭에 누워있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상민이 수시입학 고시로 합격한 대학에 재용은 정식으로 입학시험을 치루고 들어왔다. 학과는 다르지만 재용은 상민과 같은 서예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었다. 누웠다가 상체를 일으키는 상민의 시야에 재용의 뒤편에서 다가서는 스커트 자락이 보였다.

“상민씨!”

상큼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재용과 같은 학과의 미나였다. 그녀는 생일이 빨라서 상민과 거의 한 살 가까운 나이 차이였다. 미나도 상민과 같은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었다. 재용과 자주 만나면서 상민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알게 되었다. 상민과 재용은 동아리 선배가 출품한 서예전에 갈 약속을 했었다. 재용이 상민을 재촉했다.

“늦어서 미안! 빨리 가자.”
“아직 시간이 많으니 괜찮아. 미나씨도 같이 가려고........!?”

상민이 담담한 표정으로 미나를 바라보았다. 까맣고 큰 눈동자에 미소를 깃들인 미나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자그마한 체구의 마나는 무척 귀염성이 돋보였다. 그녀의 부모는 모두 각각 다른 대학의 교수였다. 학자 출신r가문의 딸답게 그녀는 조신하면서도 발랄한 성품을 지녔다.

미나는 재용이 상민을 만나는 자리에 대부분 같이 어울렸다. 상민은 그녀가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상민도 그녀가 싫지 않았다. 그들은 캠퍼스 정문을 향해 부지런히 걸어갔다. 재용의 뒤를 따라 걸어가던 미나와 상민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공연히 재용의 눈치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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