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을 해치우다 - 8부

그녀들을 해치우다밥을 먹으면서 글 이야기를 좀 더 했다. 그리고 우리가 도착한 결론은 갇혀진 첨탑의 공주가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그 당시로서는 편지가 유일했을 거라는 것이었다. 편지질을 일단 컨셉으로 잡았는데, 난 기왕에 하는 거, 공주보다는 병약한 세가의 버려진 대공자 같은 건 어떠느냐고 물었고, 테리우스는 그 이유를 궁금해 했다.



"기본적으로 여자가 주인공인 무협은 성공률이 낮아. 거기에 남자가 편지질을 해야 여러 여자를 꼬실 수 있는 거라고, 만약에 여자가 똑같은 짓을 하면 일단 비호감이 되버리고 말지. 우리나라 남자들은 그런 부분에서 멘탈이 이기적이니까."

"하긴, 나 같아도 이놈저놈 주는 여자는 가볍게 보이거든. 생각해보면, 그 정연이라는 애는 여대생이잖아. 사라는 술집 여자고, 그런데도, 난 형이랑 자고, 나랑도 잔 그 정연이란 애는 다시 따먹으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 사라는 지금 다시 술집에 나간다고 해도, 내 돈 내고도 못할 것 같거든. 그런데, 형 주인공이 좀 세면 안돼? 너무 전형적이잖아. 나중에 힘을 얻을 것 아니야."

"아니, 애초에 힘이 없는 걸로 설정을 하고 말이야. 세가에서도 내쳐지는 거지. 무공을 못하는 대공자는 필요가 없다 뭐 이렇게. 그런 다음, 유폐를 당한 대공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강호의 무림 칠화에 관심을 쏟게 되는 거야. 이야기 책이나 매설꾼들을 통해서 말이야. 유폐된 대공자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으니까 그런 곳에 빠질 수 있잖아. 그런 다음, 편지질로 무림 칠화를 모조리 꼬셔버리는 거지."

"편지로만?"

"응, 생각을 해 봐. 무림의 장중보옥도 사람인데, 엄격하기만 한 집안 사람들 모르게 하나의 비밀쯤은 가지고 싶을 거잖아. 그럴 때 다정한 편지를 그것도 얼굴도 모르는 유명 세가의 대공자의 편지를 받았다고 생각을 해 봐. 달뜰 것 같은 심정이 될 것 같지 않냐?"

"좋은데. 내가 일단 쓸테니까요. 형은 편지를 맡아. 형이 또 그런 쪽 글빨은 죽이니까."

"내일까지 대강의 얼개를 만들자. 일단은 한 명을 꼬시는 걸로 컨셉을 잡아. 처음부터 너무 다 꼬시면 재미가 없으니까. 하나하나 꼬시다가 한 4권 쯤에서 경쟁을 부치자고."

"너무 흐름이 느린 거 아니야?"

"그런가? 그럼 꼬시는 과정을 압축해서 일권에 담고, 2권부터 여자들을 모을까?"

"그래. 일단은 형, 제갈세가로 하자. 제갈세가의 공녀 제갈민영어때?"

"민영은 또 뭐냐?"

"형, 마케팅이지. 지금 형이 새 책을 낸다고 쳐 봐. 얼마나 업계의 화제가 되겠어. 그런데, 꼬시는 여자의 이름이 민영이다. 딱 좋은 소재잖아."

"됐다. 민영이 이름 그런데 팔아먹고 싶지 않아."

"절절하게 쓸게. 한 번 그렇게 하자. 어쩌면 말이야. 이 번 글이 형이 다주지 못했던 쓰린 마음을 해소하는 계기가 될 지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 쓰자고."

"이름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어나자. 여기서 정동진역까지 그래도 한참 걸리잖아."

"나는 그냥 있을게. 형 혼자 다녀와."

"그건 또 왜?"

"형도 알잖아. 작가들 중에서 나 싫어하지 않는 작가 하나도 없잖아. 경희씨도 나 싫어하고. 내가 나가면 일이 잘 안될 것 같아서 그래. 난 집도 좀 치우고, 관리인 할머니한테 이야기해서 한 상 그득하게 차려놓을 테니까, 형 혼자 다녀와요."

"알았다."



정동진 역으로 가면서 경희씨에게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았다. 역에 도착하면 다시 하리라 생각하면서 운전에 집중했다. 한잔이라도 술을 먹은게 찝찝했다. 편의점이 보이자마자 여명을 한 캔 사마시고, 가그린을 사서 가글을 두어번 했더니 정신이 들었다. 다시 운전을 하려는데, 경희씨에게 전화가 왔다.



"선배님. 어쩐 일이세요?"

"도착했어요?"

"네, 지금 역 앞 식당에서 가락국수랑 김밥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어요. 아까 전엔 플랫폼 나오느라 못 받았어요."

"먹지 말고, 기다려요. 지금 가고 있거든요."

"네? 여길요?"

"실은, 테리우스 작가랑 속초에 있는 별장에 와 있었어요. 여자분들 둘이서 모텔은 좀 위험할 것 같아서요. 방도 넉넉하고, 바다도 가까우니까 괜찮을 거 같아서요. 한 30분 정도만 기다릴래요. 가서 전화할게요."

"네. 좋아요. 선배민. 작가님께는 제가 말씀 드릴게요."



역에 도착하니 단촐한 가방만을 들고 온 두 사람이 내차를 반겼다. 나란히 뒷자리에 탄 두 사람은 좀 추웠는지 각각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있었는데, 내게도 커피를 내밀었다. 컵홀더에 넣고 살짝 빨았는데, 라즈베리맛 아이스티였다. 좋아하는 음료였다. 내가 눈으로 어떻게 된거냐고 묻자, 경희씨가 대답했다.



"선배님 좋아하는 거잖아요. 마침 눈에 보여서요. 운전하면서 뜨거운 건 위험할 것 같기도 하고."

"고맙네. 우작가님은 잘 지냈어요?"

"경민씨 인기 되게 많은 거 알아요. 어제 라푼젤 언니랑 통화했는데, 그 유민영이랑 사귀었던 걸 알고는 자기도 꼬실 마음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테리우스는요?"

"작가님 온다고 한 턱 낸다던데요. 지금 한 상 차리고 있을걸요?"

"에이. 거짓말. 여자 싫어하잖아요. 테리우스 작가."

"테리가요?"

"아니다. 여자 싫어하는 건 아니고, 못생긴 여자를 싫어하는 거겠지만, 아니 여자 작가들을 싫어하나."

"테리우스 작가님이야. 대부분 싫어하죠. 선배님을 잘 따르는 걸 보면 신기하다니까요. 하긴, 두 분이야, 특별한 곳에서 우정을 다졌으니까 그럴수도 있지만."

"아, 이야기 다 들었어요. 유민영이 실제로는 나가요 출신이라면서요?"



고경희의 가벼운 입에 놀랐다. 그리고 이미 나랑은 관계가 없는 사라가 다른 여자들의 입방아에 오른 것으로 화가 나는 내 자신에 더 놀랐다. 글을 쓴다는 여자가 다른 사람의 사정을, 그것도 여자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볍게 입에 올린다는 것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내 표정이 굳자, 경희씨가 바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죄송해요. 선배님. 그런 이야기 대외빈데. 우 작가님이랑 내내 같이 작업하다가 우연히 니와버렸어요. 죄송해요."

"네."

"경민씨. 기분 상했어요?"

"네. 믿기지가 않네요. 글을 쓰시는 분들의 입에서 모르는 남의 아픈 이야기가 너무 쉽게 나와서요."

"그런 게 아니라... 거짓말도 아니잖아요."

"됐습니다. 괜찮습니다."

"많이 좋아하셨나봐요? 술집여자라서 헤어진게 아닌가봐요?"

"그 이야기는 그만 하죠. 우 작가님 잘못도 아닙니다. 제가 너무 믿었네요. 경희씨를."



고경희는 너무도 싸늘한 내 태도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우연희 작가도 내가 조개처럼 입을 다물자, 말이 붙일 수 없었다. 울 것 같은 고경희와 그녀를 위로하며, 나를 조금 원망하는 얼굴로 바라보는 우 작가, 둘을 보기도 싫은 나, 이렇게 기묘한 대치를 이루며 도착한 별장엔 이미 바베큐가 준비되어 있었다. 바람이 적당히 불어서 화가 나서 붉어진 얼굴이 조금 시원해졌다. 밝게 우리를 맞으려던 테리우스는 굳어진 세사람의 분위기를 보고, 내게 슬쩍 다가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고, 난 경희씨가 사라가 술집에서 일했던 것을 우 작가에게 말했고, 그것을 너무 가볍게 이야기해서 화가 났다고 솔직히 이야기했다. 테리우스는 불같이 화를 냈다. 당장에 경희씨에게 뛰어간 테리우스가 소리소리를 질렀다.



"고경희. 어떻게 그래? 넌 그렇게 잘났어. 넌 생각이 없어? 뇌가 없니 씨발.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안해야 할 지 몰라? 넌 늘 그렇게 다른 사람 이야기를 쉽게 이야기 하고 다니냐? 왜 신문사 기자라도 불러서 인터뷰를 하지. 그 이야기는 안했어? 경민이 형이랑 좋아지냈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바람에 경민이 형이 결혼까지 생각했던 여자 엎었다는 거. 왜 그게 문제가 돼? 술집나간 거? 그 술집이 어떤 곳인지나 알아? 너같은 호박땡이들은 근처에도 못가는 술집이었어. 왜 이래. 어이, 아줌마. 아줌마가 그렇게 잘났어? 사라가 아줌마보다 못나게 느껴져? 개코나 글도 못 쓰면서 얼굴은 그 따위로 생겨서 어디서 사라를 욕해. 씨발, 이래서 보지달린 것들은 다 문제라니까. 자기보다 이쁘면 다들 걸레취급이니. 세상이 이모양이지. 하긴, 니들 걸 누가 먹어주기나 한대. 못생겨가지고."



테리우스의 말은 너무 독했고, 일방적이었지만, 일견 시원해지는 부분도 있었다. 내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둘은 얼어붙은 듯 아무말도 하지 못했지만, 곧 고경희는 누가 뺨을 때린 것처럼 휘청하더니 다리가 풀려서 푹 주저앉아서 통곡을 하듯 울었다. 말그래도 펑펑 울었는데, 그 곁에서 경희씨를 달래던, 우작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보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잘못했어요. 그래요. 그 연예인 여자에게 나도 경희도 잘못했어요. 경민씨 말처럼 너무 쉽게 생각했는지도 모르죠.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네요. 하지만, 나도 경희도 경민씨의 사정에 대해 몰랐어요. 그런 이야기는 본인들만 알 수 있는 거잖아요. 실수에 대해서 너무 관용이 없네요. 여기서 머물지 않겠어요. 이 곳 주소를 알려주세요. 택시를 불러야겠어요. 이런 취급을 받으려고 시간을 내서 여기 온 건 아니니까요."



잡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나는 주소를 몰랐고, 테리우스는 열을 내면서 경희씨에게 몇 마디 욕설을 더 퍼붓고는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에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너무 울어서 움직일 생각을 못하는 경희씨를 우작가가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 둘을 물끄러미 보던 나는 테리우스를 따라 집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경희씨와는 일년내내 봐야할 사람이어서, 고개를 숙여 두 사람에게 사과했다.



"고의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도 화가 났어요. 진짜 좋아했던 사람이라서. 테리우스 일은 잊어주세요. 화를 잘 참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테리우스 녀석도 상처가 많거든요. 어쩌다 삼각관계 비슷한 게 되어서는. 나만큼 테리우스 녀석도 민영이를 좋아했거든요. 그리고 민영인 저와 테리우스 두 사람이 모두 넋을 빼고 좋아할만큼 아주 좋은 사람이었어요. 술집에 나갔던 것도 어려운 집안 때문이었고, 2차를 나가거나, 사치를 하거나, 선물을 바라거나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고운 사람이었으니까, 혹시나 다른 사람들에겐 이야기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미안해요. 괜히 이쪽으로 오자해서 좋은 여행을 망쳤네요. 타세요. 여기에서 자는 건 말도 안되고, 제가 방을 잡아드릴게요."



고향의 교회는 신도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한화 콘도에 회원권이 있다. 난 한화콘도에 전화를 해서 빈 방이 있는 지를 물었고, 비수기여서 방이 있어 둘을 한화콘도 앞에다 내려줬다. 경희씨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긴 했는데, 너무 울어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우 작가도 다시 한 번 내게 미안함을 표했다. 서로 사과에 사과를 거듭하는 나와 우작가는 역시 사회 생활에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잃는 게 많은 사람들만이 자존심보다 굴욕을, 명예보다 사과를 선택하는 법이다.



콘도에서 별장까지 차를 타고 달리다가 문득 사라가 몹시 보고 싶었다. 말을 하다보니 진짜로 좋은 여자였었다. 보고 싶은 마음이 끌어올랐지만, 어쩔 방법은 없었다. 연락처도 모르고 있었고, 연락처를 안다고 해도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괜히 마음이 답답해서 창을 열고 마구 소리를 지르며 해안도로를 달렸다. 그렇게 삼십분 정도를 달리니 속이 조금 가라앉았다. 유턴을 해서 별장쪽으로 다시 가는데,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목이 꽉 잠긴 경희씨였다. 꼭 할말이 있다고 해서, 난 다시 한화콘도로 향했다. 기왕 받을 사과라면 상대방이 부담되지 않게 일찍 받고 푸는 게 수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서 난 곧바로 콘도의 방으로 향했고, 문을 열자 울어서 눈이 부은 경희씨가 있었다. 경희씨는 긴 머리를 푹 숙여서 자기의 얼굴을 감췄다. 난 화장대 앞에 있던 의자를 경희씨가 앉은 침대 옆으로 가져가서 경희씨의 앞에 앉았다.



"무슨 이야기든 해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네."

"그렇게 편하게 대답해주지 마세요. 저 진짜 잘못한 거 알아요. 그렇게 쉽게 용서하지 마세요."

"네. 진짜 잘못했어요. 많이 화가 났어요. 그래도 경희씨도 실수한 것일 거고, 또 계속 봐야 하잖아요. 마음이란 건 먼저 풀지 않는 쪽이 더 크게 상처를 입게 되어 있는 거라서요. 경희씨는 더구나 좋은 사람이구요."

"선배님."

"네."

"선배님 좋아해요. 오래 됐어요. 그래서 그랬어요. 제가 선배님 좋아하는 걸 저 자신도 인정하지 못했었는데, 테리 작가님이랑 선배님이랑 그 여자분을 좋아했었고, 선배님이 술집에 다니셨다는 말, 그리고, 술집에서 어떻게 그 여자분이랑 친해졌다는 말을 다 들으니까. 참을 수가 없었어요. 저도 제가 모자란 사람인 거 잘 알아요. 유민영이라는 탈랜트가 얼마나 예쁜지도 알고요. 모자라는 날 알게 되니까, 진짜로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모든 게 그 여자 책임 같고 그랬어요."



말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는 들어서는 안된다고.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죄가 아니지만, 좋아하는 마음을 거듭해서 거절하는 건 결국 죄가 되고 만다.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기 위해 우작가를 찾았다.



"우작가님은요?"

"우작가님은 나가 있으라고 했어요."

"네?"

"우 작가님은 절 좋아하거든요. 동료가 아니라 사랑으로요. 저도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전 아닌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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