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의 게임 - 1부
2018.05.28 14:50
그녀와의 게임한 잔, 두 잔 쑥쑥 들어간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는 사이 선배들이 몇 번 왔다 갔다 하며 따라주는 술을 마시다 보니 어느새 내 주량인 소주2병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선배들과의 첫 자리라서 긴장한 탓일까,
속이 조금 울렁거리긴 했지만 아직 필름이 끊길 정도로 정신이 없지는 않았다.
그사이 밖에 나가서 토하거나, 선배들 몰래 빠져나갔거나, 너무 취해서 벌써 집으로 돌려보내진 사람들까지..
이미 자리는 거의 막바지로 치달으며 정말 술을 잘 마시거나,
이 분위기를 끝까지 즐기고 싶은 사람만 남아 있었다.
그 사이 우리 테이블엔 나 혼자 뿐..
아웃사이더 두 명은 언제 갔는지도 모르게 사라져버렸고, 지수는 선배들의 사랑을 받으며 먼 테이블에 앉아
열심히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안녕”
“어? 허어..너..!”
“표정이 왜 그러냐..별로 아는 척 하고 싶진 않다만, 앞으로 자주 얼굴 보게 될 테니 인사라도 하려고 왔는데..”
어느새 내 테이블에 와서 앉은 민지..
술을 안 마신건지, 요령껏 마신 것인지 민지는 전혀 술에 취해 보이지 않았다.
“아니..먼저 와서 아는 척 해놓고..”
“그럼 같은 과인데 아예 말도 안 하고 지내려고? 이렇게 인사하는 척 하고 미리 친한 척은 해놔야지. 그래야 나중에라도 이상하게 안 보지..”
“그런 의심 받기 싫으면 그 계약부터 파기하든가..지금 와서 생각하니 1년은 너무 하잖아”
“호오~ 너무해? 그래...?”
민지가 휴대폰을 꺼내든다.
무슨 짓을 할지 뻔히 보였기에 난 다급히 민지의 앞에 놓여 진 잔에 술을 따랐다.
“하하..성격도 급하셔라..내가 언제 안 한다 그랬나..자자~ 일단 술 한 잔 들이키면서 잘 생각해보자고~ 응??”
“술은 왜 따라 주냐? 이거 맥여서 나 어떻게 해볼라고? 원래 변태남인건 알았지만 너무 대놓고 작업하니까 좀 그렇네..”
아..열불이 터진다.
이런 게 바로 의사소통의 부재인가.. 아니면 나보다 더 오바하는 사람인건가..
이건 자기 멋대로 생각하는 것도 정도껏이지..
술 한 잔 따라줬다고 어떻게 작업을 해 볼 남자로 볼 줄이야..
난 부글부글 끓는 속을 겨우겨우 가라앉히며 얼굴에 억지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지금은 난 명백한 약점이 잡혀 있는 을이니까..
혹시나 민지가 갑자기 돌변해서 그 사진을 공개라도 하는 날엔...
아..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 순간 내 학과생활은 말 그대로 종을 치는 것이다.
“자자~ 그런 거 아닌 거 알면서..흐흐..그냥 너 말대로 미리 친한 척 좀 해야 주위에서 우리를 이상하게 안 볼 거 아냐..안 그래?”
“뭐..그래..이제 좀 말이 통하나?”
“뭘 그렇게 재밌게 이야기하고 있어? 둘이 벌써 친해진 거야? 아니면 민지랑 원래 아는 사이인가?”
“원래 아는 사이는 무슨..내가 저런 변...아..쟤랑 친할 리가 있나..하하”
순간 난 분명히 들었다. 민지의 입에서 변까지 튀어나온 걸..
다행히 그 뒤에 말이 이어지진 않았지만, 아직 쌀쌀한 3월 초의 날씨인데 내 등으로는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변?? 무슨 소리야?”
“아~ 아니야. 내가 다른 애랑 이름을 헷갈렸나 보다. 하튼 이제 친해지려고 왔지.. 우리 동기애들 거의 다 뻗었거나 갔네. 아직 남아 있는 동기가 있는데 모르는 애라서..”
“그래? 그러고 보니 선배들이랑 한 잔 하고 왔더니 진짜 거의 다 사라지고 없네..아쉽다. 동기들끼리 한 잔 더 하고 가자 그러려고 했더니..”
“그럼 우리들끼리 갈까? 선배들도 이제 파하는 분위기인데..”
“그럴까? 내일 수업 있어도 신입생이면 술 먹고 처음엔 수업도 좀 째고 그래야지~”
“그래~ 그러자”
어..이거 나만 빼고 죽이 척척 맞는다. 원래 친한 사이인가?
그건 그렇고 동기들끼리 술자리라니..그럼 민지도 같이..??
아..머리가 아파온다. 아까도 분명 말실수를 할 뻔한 민지인데..
그런 시한폭탄과 같은 자리에 있어야 하다니..골이 아파온다.
“그럼 내가 애들 불러 올 테니까 민지 너는 지후랑 먼저 나가있어”
“그래~”
지수가 애들을 모으러 가고, 다시 테이블에 남은 건 나와 민지..
“난 먼저 갈게. 피곤해서 먼저 갔다고 전해줘”
“야~ 어딜 가?”
“아..진짜 속도 좀 안 좋고..”
“흐흐..계약 시작인 거 잊었냐?”
민지의 눈빛이 빛난다. 그 날처럼..
아뿔사..3월1일부터 시작이라 그랬지..오늘은 3월2일이니까 벌써 계약 시작이구나..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
“야...널 그걸 그렇게 써 먹냐..”
“가려면 가고...헤헤”
민지가 휴대폰을 들어 흔든다.
아..열 받는다. 남자였으면 당장 저걸 그냥..
아니다. 남자였으면 그런 이상한 일이 벌어질 리가 없었겠구나..
민지는 그런 나를 보며 신이 나는지 더욱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잡아 밖으로 이끌었고, 난 복날에 끌려가는 개마냥 그저 민지의 손에 이끌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애들 다 모았는데 다 가고 지혜랑 민재밖에 없네..둘 다 좀 취하긴 했지만”
“어어..안녕 헤헤헤~ 우리 동기들이구나”
술에 잔뜩 취한 민재라는 이름의 남자 녀석 그리고 내 테이블에 앉아 있던 아웃사이더로 보이던 지혜.. 아 지혜는 아직 안 간 거구나..
“가자~내가 선배들한테 미리 괜찮은 호프집 알아놨으니까 거기서 간단하게 한 잔 하면 될 거 같아”
“그래”
지수가 이끌어 우리는 다 같이 호프집으로 향했고, 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민지와 함께 제일 뒤에서 따라갔다.
“좀 어색하게 웃지 좀 말지..다 티 나거든..”
“너나 말조심 좀 해..아까처럼 그러면..난...아휴..”
“아까는 실수거든. 너랑 말하고 있다가..”
“다 왔어~ 둘이 친하게 지내는 건 좋은데 우리도 같이 끼어서 이야기 좀 하자~”
“어? 아냐 안 친해..하하..얼른 들어가자..”
갑작스레 나타난 민재의 얼굴에 난 당황하며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민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유유히 민재와 함께 들어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형식적인 자기소개..
지혜는 내 예상처럼 나와 같이 입학식 전 모든 행사를 불참한데다 나름 소심한 성격이라 자기도 원치 않게 아웃사이더가 되어버렸고, 민재와 민지 그리고 지수는 학과 행사를 모두 참여해서 어느 정도 자기들끼리 친하고 잘 아는 것 같았다.
나와 지혜만 조금 어색할 뿐..
순간 지혜와 난 서로를 바라보며 과연 우리는 학과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영영 아웃사이더가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라는 불안한 눈빛을 교환했다.
원래 서로 같은 처지의 사람끼린 잘 통한다고..
하지만 그런 우리의 생각은 기우에 가까웠다.
지수와 민재는 정말 엄청 활발한 성격이었고, 특히 민재는 남자가 저렇게 말이 많나 싶을 정도로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그런 지수와 민재 덕에 어느 정도 풀어진 분위기..
지혜도 나도 이 분위기에 적응 되어 조금씩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친해진 것 같지는 않지만..
“민재야~ 민재야..아휴..얘 또 훅 갔네...신입생OT때도 MT때도 가더니 벌써 3번째야..”
“술이 약한 거 같은데 엄청 마시니까 그렇지..민재는 술이 엄청 약한 듯..”
분명 내가 보기엔 아까부터 술을 엄청 마신 거 같은데...
저 정도면 오히려 안 취하는 게 이상할 정도인데..술이 약하다고 하다니..
순간 난 민지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역시 가까이 해서 좋을 게 없는 녀석이야...아우..저런 게 어쩌다 우리 옆집에..’
하지만 후회하면 뭐하랴..이미 우리 집은 민지의 옆집인데..
“뭔 또 혼자 공상에 빠졌냐? 민재 좀 업어”
“어??”
“민재 업으라고~ 내가 없을까??”
“어..어어..아니..”
“크크..민지야 그만 좀 닦달해~ 지후 정신 나가겠다”
“아니..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답답하니까..말도 잘 못 알아듣고..느리고..”
“왜~ 난 그런 게 맘에 드는데..어딘가 순진해보이고..순수하다고 할까?”
“순..풉...!!!”
민지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손으로 막았고, 난 그런 민지를
한 번 흘깃 째려보고는 민재를 업고 밖으로 나갔다.
“민지야~ 순 뭐?? 아무래도 이상해~너희들”
“아니야~ 그냥 놀리려고 하다가 웃겨서..얼른 가자~”
뒤에서 민지와 지수가 수다를 떠들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고, 난 먼저 걸어 나갔고
나보다 먼저 나간 지혜가 택시를 잡아 주었기에 난 택시에 민재를 태웠다.
“민재야..혼자 갈 수 있겠어?”
“어? 어어..허허..고맙다. 내일 보자..”
“진짜 괜찮겠냐?”
“그러엄~ 아직 정신 멀쩡해~ 바바이~~”
난 혹시나 민재가 택시 안에서 의식이 끊어질까 불안했지만 민재는 먼저 택시 문을 닫아버렸고,
택시는 바로 출발했다.
“괜찮겠나 모르겠네..”
“괜찮겠지..아까 이야기 들으니까 OT때도 저러고 혼자 잘 갔다잖아..”
“그러게..아..그러고 보니 너랑은 이야기도 많이 못했네..아까도 같은 테이블이었는데..”
“어..내가 말수가 좀 적어서..내성적이기도 하고..”
“나도 그래..낯을 좀 가리는 편이라..”
지혜...이렇게 바로 옆에서 보는 건 처음인데 나쁘지 않은 얼굴이다.
아니다. 나쁜 게 아니라 이 정도면 충분히 귀엽고 예쁜 편이었다.
바로 옆에 지수가 붙어 있어서 외모가 빛을 바래서 그렇지..
“고마워. 먼저 와서 택시도 잡아주고..”
“아냐 뭘...”
지혜의 얼굴이 붉어진다. 정말 내성적이고 부끄럼도 많이 타는 성격인가..
볼이 발그래 해지니 어쩐지 무척 귀엽게 느껴진다.
“민재 보냈어?”
“어~ 택시 타고 갔어..혼자 보내도 되나 모르겠다만..”
“괜찮을거야. OT때도 저렇게 보내고 다들 걱정했는데 다음날 잘 도착했다고 연락 왔었거든”
“그래..그럼 다행이고”
“자~ 그럼 우리도 집에 가야지”
“난 먼저 갈게”
“같은 방향 있으면 같이 택시 타고 가지?”
“아냐. 먼저 갈게”
“그래..”
갑자기 빠져버린 민지..혹시나 민지와 같이 택시를 타고 가야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먼저 저렇게 가주다니..
순간 민지가 천사로 보였다. 물론 아주 짧은 순간...
“난 너네들이랑 방향이 달라서 먼저 가 볼게”
“그래..지혜야 조심해서 들어가”
“어어”
이제 남은 건 지수와 나 둘 뿐..
“너랑은 방향이 반대였던 거 같은데..그럼 이제 이쯤에서 우리도..?”
무언가 아쉽다. 아직 지수와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아직 지수에 대해 더 알고 싶은데..이렇게 보내기가..너무나 아쉬웠다.
“저..어..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갈까?”
“너가 쏘는 거야? 그럼 콜!”
“그래 내가 살게”
의외로 쿨한 허락, 난 겨우 용기를 꺼내서 한 말인데 생각보다 너무 쉽게 허락하자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뭐해? 안 들어가고?”
“어? 어어..”
여자와 단 둘이 처음 와본 카페.. 막상 내가 오자 그래서 들어왔는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온다.
이미 자기소개는 아까 전에 끝냈고..
“너..여자 친구 한 번도 안 사겨봤지?”
“어? 하..하하..아냐..요즘 누가 10대 때 연애도 안 해보냐..”
“아닌데...아무리 봐도..여자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되는지도 모르고..”
“티..티나?”
아..이런 바보 멍청이 같은 멘트라니..
티가 나냐니? 내가 내뱉고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미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이 먼저 튀어 나가버렸고,
지수는 그런 나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네..너 엄청 순진하구나..”
“아니..뭐..꼭 그런 건..”
“왜..순진한 건 좋은 거야. 요즘 늑대 같은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너처럼 순진한 남자 찾기란 힘들지..”
지수의 눈빛이 갑자기 진지하게 반짝였고, 순간 난 지수의 말에서 설렘을 느꼈다.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 같은..그런 김칫국일수도 있지만 지수의 말은 나에게 지금 그렇게 들렸다.
“너 귀엽다..”
“내..내가...?”
순간 술이 취해서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그럼 너 말고 여기 누가 있냐..난 너무 작업남처럼 보이는 애들 싫어...바람둥이 같고..너같이 편한 스타일이 좋아..”
이 정도면 정말 내가 좋다는 건가?
아직 한 번도 여자를 사겨보지 않아서 이 정도 멘트로 확신할 수도 없었고, 내가 워낙 오바를 잘해서 지금도 오바하고 있는 걸 수도 있지만 분명 내가 싫지는 않다는 소리였고 그 말은 나에게 희망을 품게 하기 충분했다.
어쩌면 나도 지수 같은 퀸카와 사귈 수도 있을 거 같다는 희망을..
“어..그렇다고 너무 앞서나가진 말고..너 지금 눈에 하트 뿅뿅 떠있거든...”
역시 내가 너무 앞서나간 것인가..아니면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인가..
난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했다.
내 마음을 지수에게 모두 들켜버린 것만 같아서..
“민지가 왜 그렇게 너랑 붙어서 이야기 많이 한 줄 알겠네..너 귀엽다..재밌고..놀리는 재미가 있다고 할까?”
“어..지금 나 그럼 놀린 거?”
순간 나도 모르게 욱했다. 처음으로 했던 내 고백을 장난스럽게 거부하던 승희가 떠올라서..
“아니..그런 건 아니고..진심이야..너 같은 스타일이 좋다는 건..화난거야?”
“어..아..아냐..화난 거..미안..나도 모르게 그만..”
“아냐. 내가 말을 너무 심하게 했나보네. 우리 이제 좀 친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놀리고 싶다는 게 아니라 친하니까 그냥 장난친 건데..미안해..”
“아냐..너가 뭐가 미안해..”
지수는 장난으로 나에게 말한 것인데 나 혼자 정색하고 화를 내버렸다.
지수에게 미안하다. 괜히 혼자서 김칫국 마시고 상상하다 혼자 화를 내고..
내가 얼마나 이상한 사람으로 느껴질까..
“아직 기분 안 풀린 거야??”
“어..아..아니..”
언제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것일까..
잠시 멍을 때리는 동안 어느새 내 옆에 다가온 지수의 얼굴이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이렇게 여자를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
지수의 예쁜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내 가슴은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아..어..어..푸..풀렸어..”
너무 가깝다. 더 가까이 다가오면 심장이 터져버릴 만큼..
“헤헤..난 정말 화난 줄 알고 걱정했지..시간 너무 늦었다. 화 풀렸으면 그만 나가자. 벌써 2시가 넘었네. 이러다 진짜 내일 첫 수업부터 땡땡이 치겠다”
“어..그러게..”
지수가 먼저 일어나고, 지수의 얼굴이 멀어진다. 그리고 가까스로 터질듯하던 심장 박동이 다시 느려진다.
지수의 말대로 시계를 보니 너무 늦은 시간, 이제는 정말 집에 가야했다.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안 좋은 모습만 보인 거 같아서 신경이 쓰였지만, 다행히 지수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했고 내가 택시 타는 곳까지 따라와 주었다. 지수의 집은 학교 근처여서..
“내가 바래다 줘야 하는데..”
“우리 집 학교랑 진짜 안 멀어. 걸어서 10분 정도?”
“그래도 시간이 늦었잖아”
“괜찮아요~ 누가 안 잡아가니까..그렇게 내가 걱정돼?”
“어..흐음..”
말문이 막힌다. 걱정된다고 하면 내가 좋아한다는 것이 들켜버릴 거 같아서..
“걱정 되나 보네..맞지? 걱정해줘서 고마워~ 근데 진짜 괜찮아. 얼른 들어가 봐. 저기 택시 온다”
“그..그래..”
내 앞에 멈춰선 택시.. 그리고 그 순간 지수가 나를 부른다.
“지후야”
“어..?웁..”
순식간에 나의 입술에 다가와 닿은 지수의 입술..그리고 찰나의 순간 지수의 입술이 다시 떨어져 나갔다.
눈 깜짝 사이에 벌어진 일..난 어안이 벙벙했다.
“잘 들어가라고~ 요건 내 선물!”
지수가 손을 흔들며 뛰어간다. 난 잘 가라고 인사도 못 했는데..
아직 내 입술에 닿은 지수의 촉감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학생 안 탈거야?”
“아..네 타야죠..”
택시 기사의 재촉에 난 넋이 나간 상태에서 택시에 올라탔고 집에 가는 내내 지수의 깜짝 뽀뽀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말...꿈이 아니었던 거지..지수가 내 입술에...하아...’
정말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 꿈이 아니었다.
살짝 내 입술에 다가와 닿았던 부드럽고 촉촉한 지수의 입술 촉감..
그 생생한 촉감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말도 안 돼..내가 우리과 퀸카 지수랑...내가...’
아직도 믿기지 않는 그 순간..
나는 몇 번이고 기억을 떠올려 지수의 입술이 닿았던 그 순간을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너무나 짧았던 그 순간이 아쉬워서, 너무나 짧았던 그 순간이 달콤해서..
“다 왔습니다”
“아..네...”
택시 기사의 말에 그제야 난 다시 현실로 돌아왔고, 요금을 내고 택시에서 내렸다.
“하아..너무..좋았어...내가 지수랑 으아아아..!!!!!”
분명 옆에서 누군가 나를 보면 미친놈이라고 할 것이다.
새벽에 길거리에서 소리를 지르고 뛰어가는 정신 나간 놈이라니..
하지만 지금 이 기분을 난 만끽하고 싶었고, 이렇게 소리 내서 자랑하고 싶었다.
지수와의 그 짜릿했던 순간을..
“아..집이다...”
집까지 뛰어와서 그런지 집에 오자마자 극심한 피로와 함께 숙취가 올라와 잠이 밀려온다.
그리고 그 순간 도착한 카톡 메시지..
난 혹시 지수인가 하는 설렘에 확인했지만 아쉽게도 지수가 아닌 민지였다.
-이제 왔냐
-어..어떻게 알았냐..우리 집에 몰카 설치했냐?
-미친....아파트가 오래된 건지..니가 문을 세게 닫았는지..문 닫는 소리 다 들렸거든..
-아..그래? 미안..내가 잠 깨운 건가..
_아니, 원래 술 마신 날 잠이 안와서 잘 못 자
-어쩌냐..그래도 자야지..내일 아침부터 수업 있는데..
-씻었냐?
-뜬금없이...방금 들어왔다니까..이제 씻으려고..
-씻고 우리 집 좀 와
-뭔 소리야..이 새벽에..한 잔 더 하자고?
-오라면 와..뭔 말이 많냐..단체 카톡에 사진 확 뿌려??
-하아..제발 말이라도 좀...생각만 해도 무섭다..
-그러니 말 잘 들으면 그럴 리 없잖아. 얼른 씻고 넘어와
-야...야!!! 김민지!
하지만 더 이상 답장이 없다. 역시나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순간 욱하고 올라왔지만 서글프게도 다시 내가 을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고,
난 대충 샤워를 마치고 나와 민지의 집으로 향했다.
-집 앞
-열렸음
민지의 카톡에 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불이 하나도 켜져 있지 않아 집 안은 어두컴컴했다.
“야 하나도 안 보여..”
“그냥 걸어 들어와. 네가 있는 곳이 현관이고 신발 벗고 좀 들어오면 나 누워 있어”
“아니 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 정도는 아는데...너무 어두우니까..”
“그만 좀 말하고 그냥 들어오지..?”
“알았다..말을 말자..내가 너랑 무슨...”
난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신발을 벗고 더듬더듬 앞으로 걸어갔다.
조금씩 익숙해지는 어둠..
방 안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중간에 누워있는 민지가 보였다.
“아니..뭐..어쩌라고..”
“누워..”
“어...?”
순간 난 말을 잘못들은 건가 했다. 누우라니..
“저기..내가 잘못들은 거 아니지?”
“어..아니니까 누워..나 잠 좀 자자..”
“아니..무슨...”
난 무슨 말이라도 더 하고 싶었지만, 내가 이야기해 봤자 민지가 중간에서 짜를 게 뻔했기에 일단 민지의 옆에
누웠다.
“일루와”
“야...”
“계약..”
더 이상 말대꾸를 할 수 없는 한 단어, 그 말이 나오면 어떤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이제는 난 잘 알고 있었기에 민지의 바로 앞으로 다가갔다.
코앞까지 가까워 온 거리,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그 날의 사건 이후 이번이 두 번째였다.
“안아줘..”
“야..뭔..”
“그래야 잠이 올 거 같아..”
“하아....”
어처구니가 없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엄마나 누나와도 한 방에서 잠을 잔 적이 없었는데 아무런 사이도 아닌 여자가 안아달라니..그래야 잠이 온다니..
그리고 그 상황에서 더 어처구니가 없는 건 그걸 또 할 수밖에 없는 내 상황이란 것이었다.
‘돌겠다...’
진짜 머리가 터질 듯이 복잡했지만 일단 민지를 재우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기에 난 조금 더 다가가 민지를 품에 안았다.
따뜻한 민지의 체온..그리고 기분 좋은 향기..
이 향은 체리블러썸..승희가 좋아하던 향이었다. 그래서 나도 따라서 좋아하게 되어버린..
“따뜻해..잠이 올 거 같아..”
“그..그래..얼른 자..”
민지의 심장박동 소리가 느껴진다.
그리고 묘한 기분..이 느낌은 뭔지..
분명 내가 민지를 좋아하는 그런 정신 나간 일이 벌어지진 않을 텐데..
지금 이 순간 난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도 싫지 않은..
‘아니야..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정신 차려..내가 이런 정신 나간 애랑...그냥 지금 처음으로 여자애를 안고 있어서 잠시 잡생각이 든 거야..’
“내 몸에 손대면 죽어...변태..”
민지의 목소리가 끊어진다. 졸음이 밀려오는 목소리..
그 와 중에도 변태라니..
순간 정신이 번쩍 든다. 그래..내가 이런 애를 상대로 무슨 생각을..
“흐으음..움직이지 좀 마..잠 깨..”
잠시 몸을 뒤로 빼려고 했는데 어찌나 귀신같이 잘 알아채는지 민지는 조금 더 내 품 안으로 다가왔고 그 순간 말캉한 감촉이 내 몸에 와 닿는다.
‘서..설마 안 한 건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 촉감..그리고 떠오르는 그 날..
분명 이 느낌은...
“가만히 좀 있으래도...잠 깨잖아...”
더 이상 민지와 붙어 있다가는 무슨 일이라도 날 거 같아 몸을 빼려고 했지만, 민지는 다시 내 품 안으로 더 파고들어왔고, 그 순간 민지의 가슴이 내 몸에 부벼졌다.
‘아..돌겠다...’
순간 내 물건이 커지려 하고 있었고, 이 정도 거리면 그게 민지에게 느껴질 게 너무나 분명했기에 난 다급히 애국가를 속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제발 진정하길 바라며..
‘이게 뭔 일이람..난 대체...왜..하아..김민지..이 도움 안 되는...’
하지만 원망해봐야 이미 시간을 돌릴 수 없었고, 왠지 오늘 밤은 잠을 한 숨도 못자고 지새워야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는 사이 선배들이 몇 번 왔다 갔다 하며 따라주는 술을 마시다 보니 어느새 내 주량인 소주2병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선배들과의 첫 자리라서 긴장한 탓일까,
속이 조금 울렁거리긴 했지만 아직 필름이 끊길 정도로 정신이 없지는 않았다.
그사이 밖에 나가서 토하거나, 선배들 몰래 빠져나갔거나, 너무 취해서 벌써 집으로 돌려보내진 사람들까지..
이미 자리는 거의 막바지로 치달으며 정말 술을 잘 마시거나,
이 분위기를 끝까지 즐기고 싶은 사람만 남아 있었다.
그 사이 우리 테이블엔 나 혼자 뿐..
아웃사이더 두 명은 언제 갔는지도 모르게 사라져버렸고, 지수는 선배들의 사랑을 받으며 먼 테이블에 앉아
열심히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안녕”
“어? 허어..너..!”
“표정이 왜 그러냐..별로 아는 척 하고 싶진 않다만, 앞으로 자주 얼굴 보게 될 테니 인사라도 하려고 왔는데..”
어느새 내 테이블에 와서 앉은 민지..
술을 안 마신건지, 요령껏 마신 것인지 민지는 전혀 술에 취해 보이지 않았다.
“아니..먼저 와서 아는 척 해놓고..”
“그럼 같은 과인데 아예 말도 안 하고 지내려고? 이렇게 인사하는 척 하고 미리 친한 척은 해놔야지. 그래야 나중에라도 이상하게 안 보지..”
“그런 의심 받기 싫으면 그 계약부터 파기하든가..지금 와서 생각하니 1년은 너무 하잖아”
“호오~ 너무해? 그래...?”
민지가 휴대폰을 꺼내든다.
무슨 짓을 할지 뻔히 보였기에 난 다급히 민지의 앞에 놓여 진 잔에 술을 따랐다.
“하하..성격도 급하셔라..내가 언제 안 한다 그랬나..자자~ 일단 술 한 잔 들이키면서 잘 생각해보자고~ 응??”
“술은 왜 따라 주냐? 이거 맥여서 나 어떻게 해볼라고? 원래 변태남인건 알았지만 너무 대놓고 작업하니까 좀 그렇네..”
아..열불이 터진다.
이런 게 바로 의사소통의 부재인가.. 아니면 나보다 더 오바하는 사람인건가..
이건 자기 멋대로 생각하는 것도 정도껏이지..
술 한 잔 따라줬다고 어떻게 작업을 해 볼 남자로 볼 줄이야..
난 부글부글 끓는 속을 겨우겨우 가라앉히며 얼굴에 억지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지금은 난 명백한 약점이 잡혀 있는 을이니까..
혹시나 민지가 갑자기 돌변해서 그 사진을 공개라도 하는 날엔...
아..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 순간 내 학과생활은 말 그대로 종을 치는 것이다.
“자자~ 그런 거 아닌 거 알면서..흐흐..그냥 너 말대로 미리 친한 척 좀 해야 주위에서 우리를 이상하게 안 볼 거 아냐..안 그래?”
“뭐..그래..이제 좀 말이 통하나?”
“뭘 그렇게 재밌게 이야기하고 있어? 둘이 벌써 친해진 거야? 아니면 민지랑 원래 아는 사이인가?”
“원래 아는 사이는 무슨..내가 저런 변...아..쟤랑 친할 리가 있나..하하”
순간 난 분명히 들었다. 민지의 입에서 변까지 튀어나온 걸..
다행히 그 뒤에 말이 이어지진 않았지만, 아직 쌀쌀한 3월 초의 날씨인데 내 등으로는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변?? 무슨 소리야?”
“아~ 아니야. 내가 다른 애랑 이름을 헷갈렸나 보다. 하튼 이제 친해지려고 왔지.. 우리 동기애들 거의 다 뻗었거나 갔네. 아직 남아 있는 동기가 있는데 모르는 애라서..”
“그래? 그러고 보니 선배들이랑 한 잔 하고 왔더니 진짜 거의 다 사라지고 없네..아쉽다. 동기들끼리 한 잔 더 하고 가자 그러려고 했더니..”
“그럼 우리들끼리 갈까? 선배들도 이제 파하는 분위기인데..”
“그럴까? 내일 수업 있어도 신입생이면 술 먹고 처음엔 수업도 좀 째고 그래야지~”
“그래~ 그러자”
어..이거 나만 빼고 죽이 척척 맞는다. 원래 친한 사이인가?
그건 그렇고 동기들끼리 술자리라니..그럼 민지도 같이..??
아..머리가 아파온다. 아까도 분명 말실수를 할 뻔한 민지인데..
그런 시한폭탄과 같은 자리에 있어야 하다니..골이 아파온다.
“그럼 내가 애들 불러 올 테니까 민지 너는 지후랑 먼저 나가있어”
“그래~”
지수가 애들을 모으러 가고, 다시 테이블에 남은 건 나와 민지..
“난 먼저 갈게. 피곤해서 먼저 갔다고 전해줘”
“야~ 어딜 가?”
“아..진짜 속도 좀 안 좋고..”
“흐흐..계약 시작인 거 잊었냐?”
민지의 눈빛이 빛난다. 그 날처럼..
아뿔사..3월1일부터 시작이라 그랬지..오늘은 3월2일이니까 벌써 계약 시작이구나..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
“야...널 그걸 그렇게 써 먹냐..”
“가려면 가고...헤헤”
민지가 휴대폰을 들어 흔든다.
아..열 받는다. 남자였으면 당장 저걸 그냥..
아니다. 남자였으면 그런 이상한 일이 벌어질 리가 없었겠구나..
민지는 그런 나를 보며 신이 나는지 더욱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잡아 밖으로 이끌었고, 난 복날에 끌려가는 개마냥 그저 민지의 손에 이끌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애들 다 모았는데 다 가고 지혜랑 민재밖에 없네..둘 다 좀 취하긴 했지만”
“어어..안녕 헤헤헤~ 우리 동기들이구나”
술에 잔뜩 취한 민재라는 이름의 남자 녀석 그리고 내 테이블에 앉아 있던 아웃사이더로 보이던 지혜.. 아 지혜는 아직 안 간 거구나..
“가자~내가 선배들한테 미리 괜찮은 호프집 알아놨으니까 거기서 간단하게 한 잔 하면 될 거 같아”
“그래”
지수가 이끌어 우리는 다 같이 호프집으로 향했고, 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민지와 함께 제일 뒤에서 따라갔다.
“좀 어색하게 웃지 좀 말지..다 티 나거든..”
“너나 말조심 좀 해..아까처럼 그러면..난...아휴..”
“아까는 실수거든. 너랑 말하고 있다가..”
“다 왔어~ 둘이 친하게 지내는 건 좋은데 우리도 같이 끼어서 이야기 좀 하자~”
“어? 아냐 안 친해..하하..얼른 들어가자..”
갑작스레 나타난 민재의 얼굴에 난 당황하며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민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유유히 민재와 함께 들어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형식적인 자기소개..
지혜는 내 예상처럼 나와 같이 입학식 전 모든 행사를 불참한데다 나름 소심한 성격이라 자기도 원치 않게 아웃사이더가 되어버렸고, 민재와 민지 그리고 지수는 학과 행사를 모두 참여해서 어느 정도 자기들끼리 친하고 잘 아는 것 같았다.
나와 지혜만 조금 어색할 뿐..
순간 지혜와 난 서로를 바라보며 과연 우리는 학과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영영 아웃사이더가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라는 불안한 눈빛을 교환했다.
원래 서로 같은 처지의 사람끼린 잘 통한다고..
하지만 그런 우리의 생각은 기우에 가까웠다.
지수와 민재는 정말 엄청 활발한 성격이었고, 특히 민재는 남자가 저렇게 말이 많나 싶을 정도로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그런 지수와 민재 덕에 어느 정도 풀어진 분위기..
지혜도 나도 이 분위기에 적응 되어 조금씩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친해진 것 같지는 않지만..
“민재야~ 민재야..아휴..얘 또 훅 갔네...신입생OT때도 MT때도 가더니 벌써 3번째야..”
“술이 약한 거 같은데 엄청 마시니까 그렇지..민재는 술이 엄청 약한 듯..”
분명 내가 보기엔 아까부터 술을 엄청 마신 거 같은데...
저 정도면 오히려 안 취하는 게 이상할 정도인데..술이 약하다고 하다니..
순간 난 민지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역시 가까이 해서 좋을 게 없는 녀석이야...아우..저런 게 어쩌다 우리 옆집에..’
하지만 후회하면 뭐하랴..이미 우리 집은 민지의 옆집인데..
“뭔 또 혼자 공상에 빠졌냐? 민재 좀 업어”
“어??”
“민재 업으라고~ 내가 없을까??”
“어..어어..아니..”
“크크..민지야 그만 좀 닦달해~ 지후 정신 나가겠다”
“아니..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답답하니까..말도 잘 못 알아듣고..느리고..”
“왜~ 난 그런 게 맘에 드는데..어딘가 순진해보이고..순수하다고 할까?”
“순..풉...!!!”
민지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손으로 막았고, 난 그런 민지를
한 번 흘깃 째려보고는 민재를 업고 밖으로 나갔다.
“민지야~ 순 뭐?? 아무래도 이상해~너희들”
“아니야~ 그냥 놀리려고 하다가 웃겨서..얼른 가자~”
뒤에서 민지와 지수가 수다를 떠들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고, 난 먼저 걸어 나갔고
나보다 먼저 나간 지혜가 택시를 잡아 주었기에 난 택시에 민재를 태웠다.
“민재야..혼자 갈 수 있겠어?”
“어? 어어..허허..고맙다. 내일 보자..”
“진짜 괜찮겠냐?”
“그러엄~ 아직 정신 멀쩡해~ 바바이~~”
난 혹시나 민재가 택시 안에서 의식이 끊어질까 불안했지만 민재는 먼저 택시 문을 닫아버렸고,
택시는 바로 출발했다.
“괜찮겠나 모르겠네..”
“괜찮겠지..아까 이야기 들으니까 OT때도 저러고 혼자 잘 갔다잖아..”
“그러게..아..그러고 보니 너랑은 이야기도 많이 못했네..아까도 같은 테이블이었는데..”
“어..내가 말수가 좀 적어서..내성적이기도 하고..”
“나도 그래..낯을 좀 가리는 편이라..”
지혜...이렇게 바로 옆에서 보는 건 처음인데 나쁘지 않은 얼굴이다.
아니다. 나쁜 게 아니라 이 정도면 충분히 귀엽고 예쁜 편이었다.
바로 옆에 지수가 붙어 있어서 외모가 빛을 바래서 그렇지..
“고마워. 먼저 와서 택시도 잡아주고..”
“아냐 뭘...”
지혜의 얼굴이 붉어진다. 정말 내성적이고 부끄럼도 많이 타는 성격인가..
볼이 발그래 해지니 어쩐지 무척 귀엽게 느껴진다.
“민재 보냈어?”
“어~ 택시 타고 갔어..혼자 보내도 되나 모르겠다만..”
“괜찮을거야. OT때도 저렇게 보내고 다들 걱정했는데 다음날 잘 도착했다고 연락 왔었거든”
“그래..그럼 다행이고”
“자~ 그럼 우리도 집에 가야지”
“난 먼저 갈게”
“같은 방향 있으면 같이 택시 타고 가지?”
“아냐. 먼저 갈게”
“그래..”
갑자기 빠져버린 민지..혹시나 민지와 같이 택시를 타고 가야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먼저 저렇게 가주다니..
순간 민지가 천사로 보였다. 물론 아주 짧은 순간...
“난 너네들이랑 방향이 달라서 먼저 가 볼게”
“그래..지혜야 조심해서 들어가”
“어어”
이제 남은 건 지수와 나 둘 뿐..
“너랑은 방향이 반대였던 거 같은데..그럼 이제 이쯤에서 우리도..?”
무언가 아쉽다. 아직 지수와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아직 지수에 대해 더 알고 싶은데..이렇게 보내기가..너무나 아쉬웠다.
“저..어..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갈까?”
“너가 쏘는 거야? 그럼 콜!”
“그래 내가 살게”
의외로 쿨한 허락, 난 겨우 용기를 꺼내서 한 말인데 생각보다 너무 쉽게 허락하자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뭐해? 안 들어가고?”
“어? 어어..”
여자와 단 둘이 처음 와본 카페.. 막상 내가 오자 그래서 들어왔는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온다.
이미 자기소개는 아까 전에 끝냈고..
“너..여자 친구 한 번도 안 사겨봤지?”
“어? 하..하하..아냐..요즘 누가 10대 때 연애도 안 해보냐..”
“아닌데...아무리 봐도..여자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되는지도 모르고..”
“티..티나?”
아..이런 바보 멍청이 같은 멘트라니..
티가 나냐니? 내가 내뱉고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미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이 먼저 튀어 나가버렸고,
지수는 그런 나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네..너 엄청 순진하구나..”
“아니..뭐..꼭 그런 건..”
“왜..순진한 건 좋은 거야. 요즘 늑대 같은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너처럼 순진한 남자 찾기란 힘들지..”
지수의 눈빛이 갑자기 진지하게 반짝였고, 순간 난 지수의 말에서 설렘을 느꼈다.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 같은..그런 김칫국일수도 있지만 지수의 말은 나에게 지금 그렇게 들렸다.
“너 귀엽다..”
“내..내가...?”
순간 술이 취해서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그럼 너 말고 여기 누가 있냐..난 너무 작업남처럼 보이는 애들 싫어...바람둥이 같고..너같이 편한 스타일이 좋아..”
이 정도면 정말 내가 좋다는 건가?
아직 한 번도 여자를 사겨보지 않아서 이 정도 멘트로 확신할 수도 없었고, 내가 워낙 오바를 잘해서 지금도 오바하고 있는 걸 수도 있지만 분명 내가 싫지는 않다는 소리였고 그 말은 나에게 희망을 품게 하기 충분했다.
어쩌면 나도 지수 같은 퀸카와 사귈 수도 있을 거 같다는 희망을..
“어..그렇다고 너무 앞서나가진 말고..너 지금 눈에 하트 뿅뿅 떠있거든...”
역시 내가 너무 앞서나간 것인가..아니면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인가..
난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했다.
내 마음을 지수에게 모두 들켜버린 것만 같아서..
“민지가 왜 그렇게 너랑 붙어서 이야기 많이 한 줄 알겠네..너 귀엽다..재밌고..놀리는 재미가 있다고 할까?”
“어..지금 나 그럼 놀린 거?”
순간 나도 모르게 욱했다. 처음으로 했던 내 고백을 장난스럽게 거부하던 승희가 떠올라서..
“아니..그런 건 아니고..진심이야..너 같은 스타일이 좋다는 건..화난거야?”
“어..아..아냐..화난 거..미안..나도 모르게 그만..”
“아냐. 내가 말을 너무 심하게 했나보네. 우리 이제 좀 친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놀리고 싶다는 게 아니라 친하니까 그냥 장난친 건데..미안해..”
“아냐..너가 뭐가 미안해..”
지수는 장난으로 나에게 말한 것인데 나 혼자 정색하고 화를 내버렸다.
지수에게 미안하다. 괜히 혼자서 김칫국 마시고 상상하다 혼자 화를 내고..
내가 얼마나 이상한 사람으로 느껴질까..
“아직 기분 안 풀린 거야??”
“어..아..아니..”
언제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것일까..
잠시 멍을 때리는 동안 어느새 내 옆에 다가온 지수의 얼굴이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이렇게 여자를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
지수의 예쁜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내 가슴은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아..어..어..푸..풀렸어..”
너무 가깝다. 더 가까이 다가오면 심장이 터져버릴 만큼..
“헤헤..난 정말 화난 줄 알고 걱정했지..시간 너무 늦었다. 화 풀렸으면 그만 나가자. 벌써 2시가 넘었네. 이러다 진짜 내일 첫 수업부터 땡땡이 치겠다”
“어..그러게..”
지수가 먼저 일어나고, 지수의 얼굴이 멀어진다. 그리고 가까스로 터질듯하던 심장 박동이 다시 느려진다.
지수의 말대로 시계를 보니 너무 늦은 시간, 이제는 정말 집에 가야했다.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안 좋은 모습만 보인 거 같아서 신경이 쓰였지만, 다행히 지수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했고 내가 택시 타는 곳까지 따라와 주었다. 지수의 집은 학교 근처여서..
“내가 바래다 줘야 하는데..”
“우리 집 학교랑 진짜 안 멀어. 걸어서 10분 정도?”
“그래도 시간이 늦었잖아”
“괜찮아요~ 누가 안 잡아가니까..그렇게 내가 걱정돼?”
“어..흐음..”
말문이 막힌다. 걱정된다고 하면 내가 좋아한다는 것이 들켜버릴 거 같아서..
“걱정 되나 보네..맞지? 걱정해줘서 고마워~ 근데 진짜 괜찮아. 얼른 들어가 봐. 저기 택시 온다”
“그..그래..”
내 앞에 멈춰선 택시.. 그리고 그 순간 지수가 나를 부른다.
“지후야”
“어..?웁..”
순식간에 나의 입술에 다가와 닿은 지수의 입술..그리고 찰나의 순간 지수의 입술이 다시 떨어져 나갔다.
눈 깜짝 사이에 벌어진 일..난 어안이 벙벙했다.
“잘 들어가라고~ 요건 내 선물!”
지수가 손을 흔들며 뛰어간다. 난 잘 가라고 인사도 못 했는데..
아직 내 입술에 닿은 지수의 촉감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학생 안 탈거야?”
“아..네 타야죠..”
택시 기사의 재촉에 난 넋이 나간 상태에서 택시에 올라탔고 집에 가는 내내 지수의 깜짝 뽀뽀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말...꿈이 아니었던 거지..지수가 내 입술에...하아...’
정말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 꿈이 아니었다.
살짝 내 입술에 다가와 닿았던 부드럽고 촉촉한 지수의 입술 촉감..
그 생생한 촉감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말도 안 돼..내가 우리과 퀸카 지수랑...내가...’
아직도 믿기지 않는 그 순간..
나는 몇 번이고 기억을 떠올려 지수의 입술이 닿았던 그 순간을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너무나 짧았던 그 순간이 아쉬워서, 너무나 짧았던 그 순간이 달콤해서..
“다 왔습니다”
“아..네...”
택시 기사의 말에 그제야 난 다시 현실로 돌아왔고, 요금을 내고 택시에서 내렸다.
“하아..너무..좋았어...내가 지수랑 으아아아..!!!!!”
분명 옆에서 누군가 나를 보면 미친놈이라고 할 것이다.
새벽에 길거리에서 소리를 지르고 뛰어가는 정신 나간 놈이라니..
하지만 지금 이 기분을 난 만끽하고 싶었고, 이렇게 소리 내서 자랑하고 싶었다.
지수와의 그 짜릿했던 순간을..
“아..집이다...”
집까지 뛰어와서 그런지 집에 오자마자 극심한 피로와 함께 숙취가 올라와 잠이 밀려온다.
그리고 그 순간 도착한 카톡 메시지..
난 혹시 지수인가 하는 설렘에 확인했지만 아쉽게도 지수가 아닌 민지였다.
-이제 왔냐
-어..어떻게 알았냐..우리 집에 몰카 설치했냐?
-미친....아파트가 오래된 건지..니가 문을 세게 닫았는지..문 닫는 소리 다 들렸거든..
-아..그래? 미안..내가 잠 깨운 건가..
_아니, 원래 술 마신 날 잠이 안와서 잘 못 자
-어쩌냐..그래도 자야지..내일 아침부터 수업 있는데..
-씻었냐?
-뜬금없이...방금 들어왔다니까..이제 씻으려고..
-씻고 우리 집 좀 와
-뭔 소리야..이 새벽에..한 잔 더 하자고?
-오라면 와..뭔 말이 많냐..단체 카톡에 사진 확 뿌려??
-하아..제발 말이라도 좀...생각만 해도 무섭다..
-그러니 말 잘 들으면 그럴 리 없잖아. 얼른 씻고 넘어와
-야...야!!! 김민지!
하지만 더 이상 답장이 없다. 역시나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순간 욱하고 올라왔지만 서글프게도 다시 내가 을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고,
난 대충 샤워를 마치고 나와 민지의 집으로 향했다.
-집 앞
-열렸음
민지의 카톡에 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불이 하나도 켜져 있지 않아 집 안은 어두컴컴했다.
“야 하나도 안 보여..”
“그냥 걸어 들어와. 네가 있는 곳이 현관이고 신발 벗고 좀 들어오면 나 누워 있어”
“아니 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 정도는 아는데...너무 어두우니까..”
“그만 좀 말하고 그냥 들어오지..?”
“알았다..말을 말자..내가 너랑 무슨...”
난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신발을 벗고 더듬더듬 앞으로 걸어갔다.
조금씩 익숙해지는 어둠..
방 안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중간에 누워있는 민지가 보였다.
“아니..뭐..어쩌라고..”
“누워..”
“어...?”
순간 난 말을 잘못들은 건가 했다. 누우라니..
“저기..내가 잘못들은 거 아니지?”
“어..아니니까 누워..나 잠 좀 자자..”
“아니..무슨...”
난 무슨 말이라도 더 하고 싶었지만, 내가 이야기해 봤자 민지가 중간에서 짜를 게 뻔했기에 일단 민지의 옆에
누웠다.
“일루와”
“야...”
“계약..”
더 이상 말대꾸를 할 수 없는 한 단어, 그 말이 나오면 어떤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이제는 난 잘 알고 있었기에 민지의 바로 앞으로 다가갔다.
코앞까지 가까워 온 거리,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그 날의 사건 이후 이번이 두 번째였다.
“안아줘..”
“야..뭔..”
“그래야 잠이 올 거 같아..”
“하아....”
어처구니가 없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엄마나 누나와도 한 방에서 잠을 잔 적이 없었는데 아무런 사이도 아닌 여자가 안아달라니..그래야 잠이 온다니..
그리고 그 상황에서 더 어처구니가 없는 건 그걸 또 할 수밖에 없는 내 상황이란 것이었다.
‘돌겠다...’
진짜 머리가 터질 듯이 복잡했지만 일단 민지를 재우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기에 난 조금 더 다가가 민지를 품에 안았다.
따뜻한 민지의 체온..그리고 기분 좋은 향기..
이 향은 체리블러썸..승희가 좋아하던 향이었다. 그래서 나도 따라서 좋아하게 되어버린..
“따뜻해..잠이 올 거 같아..”
“그..그래..얼른 자..”
민지의 심장박동 소리가 느껴진다.
그리고 묘한 기분..이 느낌은 뭔지..
분명 내가 민지를 좋아하는 그런 정신 나간 일이 벌어지진 않을 텐데..
지금 이 순간 난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도 싫지 않은..
‘아니야..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정신 차려..내가 이런 정신 나간 애랑...그냥 지금 처음으로 여자애를 안고 있어서 잠시 잡생각이 든 거야..’
“내 몸에 손대면 죽어...변태..”
민지의 목소리가 끊어진다. 졸음이 밀려오는 목소리..
그 와 중에도 변태라니..
순간 정신이 번쩍 든다. 그래..내가 이런 애를 상대로 무슨 생각을..
“흐으음..움직이지 좀 마..잠 깨..”
잠시 몸을 뒤로 빼려고 했는데 어찌나 귀신같이 잘 알아채는지 민지는 조금 더 내 품 안으로 다가왔고 그 순간 말캉한 감촉이 내 몸에 와 닿는다.
‘서..설마 안 한 건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 촉감..그리고 떠오르는 그 날..
분명 이 느낌은...
“가만히 좀 있으래도...잠 깨잖아...”
더 이상 민지와 붙어 있다가는 무슨 일이라도 날 거 같아 몸을 빼려고 했지만, 민지는 다시 내 품 안으로 더 파고들어왔고, 그 순간 민지의 가슴이 내 몸에 부벼졌다.
‘아..돌겠다...’
순간 내 물건이 커지려 하고 있었고, 이 정도 거리면 그게 민지에게 느껴질 게 너무나 분명했기에 난 다급히 애국가를 속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제발 진정하길 바라며..
‘이게 뭔 일이람..난 대체...왜..하아..김민지..이 도움 안 되는...’
하지만 원망해봐야 이미 시간을 돌릴 수 없었고, 왠지 오늘 밤은 잠을 한 숨도 못자고 지새워야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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